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호신부의 필요성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혹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더라도 나와는 무관한 일로 여겼다. 어떤 부적(符籍)을 지닌다고 내 몸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미신으로서 나약한 심성을 위로받기 위한 방편일 뿐, 최첨단 과학의 시대를 사는 현대 지식인들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였다. 그랬던 내가 최근에 호신부를 몸에 지니게 되면서 이것이 진정으로 그 역할을 다해 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나의 호신부는 염주(念珠)이다. 염주를 택한 이유는 내가 불자(佛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검은색 재질의 염주알 21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22번째 알은 약간 길쭉하면서 끝이 몸통보다 좁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검은색 줄이 달려 있고 그 안에 작은 형태의 나무로 된 목탁과 막대기가 달려 있다. 내 연구실 책꽂이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고 패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것을 ‘호신부’로 삼아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필자는 이것을 패용한다고 저절로 내 몸이 보호받으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호신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해하는 호신(護身)이란 병원균, 잡균이 내 몸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본래 청정한 내 마음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항상 참나인 본분가향(本分家鄕)에 내 마음을 두는 것이 긴요하다. 그러면 내 마음뿐 아니라 몸의 면역성도 강화되어 내 심신의 건강을 해칠 삿된 병원균, 사사(邪私)로운 잡균이 일체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처럼 일심, 우주심, 순수의식의 상태에 가장 근접해 있으면 나에게는 더 이상 일체의 재난(災難)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깨달은 사람이라면 호신을 위한 노력은 불필요하다. 저절로 호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견성오도(見性悟道)와는 거리가 멀기에 호신을 하자면 의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즉, 제대로 된 수행을 통하여 정력(定力) 혹은 집중력을 충분히 배양해 두고 있어야 정혜일체(定慧一體)의 원리에 따라서 통찰력과 관찰력을 발휘하여 병균의 침투를 방지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호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불교평론》 45호의 논단에 실린 졸고 〈염불선을 중심으로 살펴본 ‘지금 여기’의 불교적 함의〉에서 ‘시공일체선(時空一體禪) 수행’을 제시한 바 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금 여기 호흡 알아차리기 수행’이다. 이것은 염불선 수행의 일종이되, 참나[眞我]인 ‘지금 여기(now and here)’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기준이 되는 호흡(呼吸)에 주목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날숨−앉아 있음−들숨−앉아 있음−날숨’의 수행이다. 이때 날숨과 들숨을 알아차리고, 앉아 있음을 확인하고, 그래도 잡념이 침투해 들어오면 이것을 주시(注視)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앉아 있음이란 본래면목 자리, 참나의 자리, 중도실상의 자리에 앉아 있음이다. 제대로 앉아 있다면 일체의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싹틀 수 없다. 그러자면 이때 내 의식이 내면의 본성을 항상 관(觀)하고 있어야 한다.

《육조단경》에서는 좌선(坐禪)을 설명하여 “밖으로 일체 경계에 부딪히더라도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앉음[坐]이라고 하고, 안으로 본성을 봐서 어지럽지 않음을 선(禪)이라고 한다[外於一切境界上, 念不起謂坐, 內見本性不亂謂禪].”고 하였다.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내 본성을 관하는 것이야말로 참선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을 호흡에 주목하면서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시공일체선 수행을 하면 아집(我執)과 아상(我相)이 차츰 사라지고 언젠가는 업장(業障)이 소멸될 것이다. 그리하여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마치 병아리 알 깨고 나오듯이 줄탁동기(啐啄同機)의 계기를 통해서 광명한 새 세상으로 나옴으로써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의 삶, 이른바 깨달음의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좌선수행은 꼭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혼자 있을 때면, 그리고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면 시공일체선 수행을 한다. 이때 이 염주는 매우 유용하다. 왼팔의 염주를 풀어서 오른손에 쥐고 날숨과 들숨을 알아차리면서 호흡에 맞추어 엄지손가락으로 염주알을 굴려나간다.

그리하여 한 바퀴 돌아 두 번째 시작하면서 왼손가락을 굽혀 한 번 했음을 표시한다. 이렇게 하여 열 번 굴리면 굽혔던 왼손가락이 모두 펴지면서 모두 210개를 헤아리게 된다. 시간은 대략 35분에서 40분 정도 걸린다. 걸어가면서도 하고 의자에 앉아서도 한다. 210개를 다 헤아릴 시간이 확보 안 되면 다섯 번 굴릴 때도 있고 세 번, 두 번, 때로는 한 번 굴릴 때도 있다. 어쨌건 하고 나면 내 마음이 어느덧 우주의 순수한 생명 에너지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자리에 근접하면서 그만큼 정력(定力)도 배양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후 응사접물(應事接物), 대인접물(待人接物) 시에 내가 외물에 끄달리지 않고 가장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나를 표출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런 의식을 지니면 유혹의 잡균이 침투하더라도 이겨내기가 쉽고, 탐진치 삼독심도 현저히 줄어듦을 느낀다.

나는 이 염주를 잘 활용할 생각으로 언제나 시계 위의 왼 팔목에 차고 있다. 시계를 볼 때마다 그 존재를 의식하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유혹에 끄달리지 않고 언제나 참 나의 자리에 머물면서 나의 정위치(正位置)에서 나의 본분사(本分事)에 충실할 수 있기를 희구한다. 게으름 피우고, 미적거리면서 뒤로 미루고, 요행을 바라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 허튼짓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마음이 나약하여 징크스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쉽게 상처받아서 우왕좌왕하는 등의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을 바탕으로 관찰력과 통찰력을 발휘하는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유용한 수행의 도구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내가 인천(人天)의 안목(眼目)까지는 못되더라도 적어도 남으로부터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는 일은 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내게 있어 이 염주는 호신을 위한 수행, 그것도 전천후적인 상시수행(常時修行)에 유용한 도구요, 더 이상 호신이 불필요한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나는 이 호신부를 지님으로써 앞으로 몸과 마음을 좀먹는 온갖 병원균의 침투를 물리칠 만큼 더 강력해지고, 그만큼 더 요익중생(饒益衆生)할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하리라고 다짐해 본다. 앞으로 이 염주를 구입하여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한다. 이것을 호신부로서 잘 활용한다면 아마도 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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