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헌법에는 엄연히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 즉, 정치가 특정 종교에 바탕을 두거나 특정 종교를 위한 것일 수 없다. 정치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는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공적으로 정치를 펼칠 때에는 자신이 신앙하는 특정 종교의 정파적 이해관계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특히 종교 분포상으로 우리나라는 절묘한 종교적 균형을 갖고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특정 종교에 편향된 정치는 종교적 분쟁뿐만 아니라 국민적 분열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교분리가 이렇게 헌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유지되어야 함에도, 이른바 ‘고소영 정권’으로 불리며 시작된 현 집권당의 종교적 편향은 정권 말기에 그 꼼꼼함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정교 유착이 이번 정권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해방 이후, 적어도 개신교인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비슷한 문제들이 불거졌었다.

다른 각도에 문제를 보기로 하자. “정교유착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라고 질문하기 전에, “ 개신교와 정치는 왜 이렇게 쉽게 유착되는가?”를, 더 나아가 “개신교와 정치의 유착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를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개신교와 과학’의 유착 메커니즘을 통해 ‘개신교와 정치’의 유착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나는 우선 미국과 한국의 (주류) 개신교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현대 과학의 상식을 무시하고 자신의 교리를 과학에 덧씌우려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1~2절). 이 과정에서 드러난 개신교인들의 특이한 사고 양식은 왜 그들이 정교유착에 그리도 익숙한지를 설명해줄 것이다(3절). 확실한 조사 자료가 아직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창조론 옹호 집단일수록 종교유착에 대해 호감을 가질 개연성은 아주 높아 보인다. 개신교의 경우, 과학과 종교의 유착 메커니즘과 정치와 정교의 유착 메커니즘은 동형적이다. 둘 다 뿌리 깊은 배타주의에 물들어 있다.

최근 한 창조과학 옹호 단체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진화의 사례들에 대해 삭제 및 수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교과부에 제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교과서 저자들이 그 엉터리 청원 내용을 받아들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해서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다. 이것은 한국 주류 개신교의 배타주의가 공교육에까지 침투한 엄중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개신교인들은 이런 독특한 사고 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유전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특별한 교육이나 전통을 통해 그렇게 된 사람들일까? 나는 이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해야만 정교유착을 끊을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4절).

1. 개신교와 과학의 유착 메커니즘: 미국의 지적설계론 운동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150년이 더 지나는 동안 진화론의 수용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반응을 보인 국가는 아마도 미국일 것이다. 예컨대, ‘원숭이 재판’이라 불리기도 하는 스콥스 재판(1925년 테네시 주)에서 반진화론법이 통과된 사건부터 1981년에 아칸소 주에서 창조론자들이 요구했던 ‘동등시간법(진화론을 가르치는 시간만큼 창조론도 동등한 시간 동안 가르치도록 요구한 법)’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과학계에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진화론에 대해 미국의 보수기독교층은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1990년대 등장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theory)은 진공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창조론이 좀 더 세련되어진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Numbers 2006).

실제로 CBS가 2004년 말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5%가 창조론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길 원하고, 심지어 37%는 진화론 대신에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지 부시 후보를 찍은 유권자 중 45%가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답한 반면, 존 케리 후보(당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자 중에는 24% 정도만이 이에 찬성했다. 또한 2004년 성탄절 직전에 한 〈뉴스위크〉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중 62%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했다. 게다가, 신이 우리 인간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했다고 믿는 미국인은 55%나 된다.

이런 맥락에서 재임 시절에 ‘설계론과 진화론 간의 논쟁을 가르치라’는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의 발언에는 설계론 운동(movement)의 집요한 전략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논쟁을 가르치라’는 것인데, 사실 이 전략은 지난 10여 년 동안 설계론 운동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디스커버리연구소(Discovery Institute, 이하 DI)의 작품이다. 미국의 설계론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DI와 그 주변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DI는 미국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 본부를 두고 있는 보수 기독교계의 싱크탱크로서 공화당 정치인 출신의 부르스 채프먼(Bruce Chapman)과 정보기술의 석학인 조지 길더(George Gilder)가 1990년에 의기투합하여 만든 공공정책 연구기관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DI는 1996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를 갓 받은 스티븐 메이어(Stephen C. Meyer)의 합류로 ‘과학과 문화 센터’라는 부설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 이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 캠퍼스)의 법학 교수 필립 존슨(Phillip E. Johnson)의 주도로 1998년부터 이른바 ‘쐐기 문건’을 작성하게 된다. 이 문건에는 미국에 설계론를 퍼뜨리기 위한 향후 5개년 전략이 담겨 있었는데, 내부용으로 회람되던 것이 1999년에 인터넷을 통해 그 내용이 새어 나왔다. ‘쐐기 전략’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전략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과학적 유물론과 그것의 파괴적인 도덕적^문화적^정치적 유산을 물리치는 일이고, 둘째는 유물론적 설명을 인간과 자연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유신론적 이해로 대체하는 일이다”

이 문건이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은 DI가 설계론을 내세워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궁극적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적 성취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유신론적 세계관의 확산을 위한 것이었다. DI는 유신론의 확산을 가로막는 원흉으로서 진화론을 지목했고 그것의 지위를 흔들기 위한 방법으로서 설계론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진화론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설계론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이다. 사람들에게 이 둘 간의 논쟁을 가르쳐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이라고. 그렇다면 도대체 설계론은 무엇인가?

‘설계론’이라는 용어 자체는 1989년에 출간된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Of Pandas and People)》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용으로 쓰였는데, 《창세기》의 구절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의 방식과는 달리, 성서를 참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나 ‘창조론’ 등의 용어들을 ‘지적 설계’라는 탈기독교적 용어로 대체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설계론이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이 본래의 특성을 가진 상태에서 갑자기 지적인 행위자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지적인 행위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공립학교 교과서의 최소 요건 중 하나, 즉 “특정 종교의 확립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려 했다. 이때부터 출판사는 여러 자원들을 동원하여 교육위원회들이 이 책을 교과서로 택할 수 있도록 홍보와 로비를 펼치기 시작한다.

설계론이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에서 시작된 용어이긴 하지만, 1990년대 전반부에 설계론의 확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책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캘리포니아 대학의 저명한 법 논리학 교수인 존슨이 1991년에 출간한 《심판대 위의 다윈(Darwin on Trial)》이다. 존슨은 생물학 교육을 공식적으로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책에서 법의 논리로 현대 진화론의 난점들을 고발하려고 했다. 이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설계론은 새로운 유형의 창조론으로 미국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는 후속작들을 통해 단순히 진화론 비판에 머물지 않고 과학계의 ‘방법론적 자연주의’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방법론은 ‘유신론적 실재론’이다. 이런 그의 입장은 DI의 쐐기 문건에서 적시된 두 가지 목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1999년에 공화당 텃밭인 캔자스 주의 교육위원회가 공립학교에서 생명의 기원을 어떤 이론으로 가르쳐야 할지를 놓고 벌인 일련의 회의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논쟁을 가르치라’는 캠페인을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DI는 이 모든 전략과 캠페인을 공식화하는 막강한 후원 기관이고 존슨은 DI 산하의 ‘과학과 문화 센터’에서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존슨의 활약으로 기존의 창조과학에 식상해 있던 (교육 수준이 높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을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이 주로 신자들을 교육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면, 설계론자들은 그 일 외에도 열린 공간에서 주류 학자들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DI의 ‘쐐기 전략’과 ‘논쟁 교육 캠페인’은 지적 열등감을 떨쳐버리려는 보수 기독교계의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설계론 운동은 ‘지적 설계자’를 특정화하지 않음으로써 개신교의 많은 분파들과 가톨릭을 포함한 유신론 진영을 모두 품는 데 적잖이 성공했다.

미국 리하이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마이클 비히(Michael Behe)는 1996년에 《다윈의 블랙박스(Darwin’s Black Box)》라는 책을 통해 현대 진화론이 세포의 진화조차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며 설계론 운동에 합류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편모에도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 존재하는데 그런 복잡성은 다윈의 진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 마치 쥐덫을 이루는 다섯 개의 핵심 부분(해머, 스프링, 걸쇠, 나무판자, 금속막대) 중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쥐덫으로서 기능이 정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그는 이런 복잡성은 ‘지적 설계자’의 존재와 개입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당시 미국 출판계를 강타해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난 십여 년 동안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세포 수준의 복잡성과 그것의 진화에 대해 그동안 많은 연구들을 해왔으며 그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들을 계속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왜 비히가 엄연히 존재하는 진화론적 설명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는지, 또 더 나은 진화론적 설명을 찾기 위해 왜 노력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한편 신학계의 비판도 있었다. 그것은 비히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통해 신학적 변증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도 너무 성급했다는 비판이다. 만일 그의 주장처럼, 기존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고 지적 설계에 의해 그 부분이 잘 설명된다고 해보자. 그런데 어느 날 그 부분에 대한 더 나은 진화론적 설명이 제시되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그의 신(神)은 설명의 간격을 메우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터이고,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 간격은 점점 더 축소될 것이다. 특히 과학적 성과들을 존중하는 신학자와 종교학자들에게 이런 결론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예를 들어, 세포 진화에 대해 비히도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진화론적 설명이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서 제시된다면 틀림없이 그 간격은 줄어들 것이고 따라서 신의 활동 범위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철학자 윌리엄 뎀스키는 바로 이 취약점들을 정면 돌파하며 설계론의 지위를 한 단계 높이려 시도했다. 그의 대표작 《설계 추론》에 따르면, 자연적으로 생긴 복잡성을 능가하는 또 다른 종류의 복잡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그런 현상들은 ‘설계 추론(design inference)’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는 그런 종류의 복잡성에 ‘특정화된 복잡성(specified complexity)’이라는 용어를 붙이면서 그것으로 우연성이나 복잡성과 구분하려 했다(Dembski 1998). 쉽게 말하면, 자연적 과정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특정한 복잡성은 지적 설계자의 개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런 발상은 진화론을 비판하고 유신론적 과학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설계론 운동의 기본 노선에 정확히 일치한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뎀스키는 확률이론과 정보이론을 통해 비히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 철학자들은 그의 현란한 확률 테크닉 뒤에 작동 불가능한 꿰맞추기 식 과학 방법론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지적하고 우연성, 복잡성, 특정성을 구분하는 그의 ‘설명 필터’ 이론 또한 작위적이라고 비판한다(Sober et al. 1999).

주류 학계의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설계론 운동의 3인방이 펼친 지난 활동들은 미국의 진화^창조 논쟁에 새 국면을 가져다줬다. 그것은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음지의 창조론을 대중의 관심 속으로 끌고 왔다. 둘째, 성서를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진화^창조 논쟁의 구도를 무신론^유신론의 구도로 확장시켰다. 셋째, 적어도 외양적으로는 학문적 능력을 갖춘 논자들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보수 엘리트 세력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넷째 설계론 옹호자들은 싱크탱크인 DI를 통해 각종 전략과 캠페인을 세우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다섯째, 설계론 옹호자들은 설계론 교과서 채택과 설계론의 공교육 침투를 위해 법적인 투쟁을 꾸준히 전개해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도버 지역에서 벌어진 최근의 법정 싸움은 설계론 운동의 이 모든 특성이 집약된 재판이었다. 2005년 도버 카운티의 교육위원회는 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설계론을 가르치라고 결정을 내렸다. 이에 11명의 학부모와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교육위원회는 1987년 연방법원의 “공립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과학 이론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이번 결정이 심각하게 훼손했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학부모인 키츠밀러 등(Kitzmiller et al.)이 미국 연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은 2005년 9월 26일에 시작되어 같은 해 12월 20일에 막을 내렸다. 담당 판사인 존 존스 3세(John E. Jones III)는 무려 139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통해 “설계론은 창조론의 한 형태이며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라는 도버 카운티 교육 위원회 측의 결정은 미국 수정 헌법의 제1조인 국교금지 조항을 어긴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설계론 운동은 미국 개신교가 집요하게 기획한 ‘유신론적 세계관 확산 전략’이 과학의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사례로서, 미국 개신교와 과학의 유착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2. 한국 개신교와 과학의 유착: 한국의 창조론 운동

최근 창조과학 옹호 단체의 청원으로 과학교과서의 내용이 변경될 뻔한 초유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한국 창조론 운동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진화−창조 논쟁의 역사는 한국창조과학회(이하, KACR)의 출범으로부터 시작된다. 창조과학 옹호자들은 일반적으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근본주의적 색채를, 교회관에 있어서는 투사적 교회관을, 연대 문제나 종말론에 있어서는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양승훈 1996). KACR의 역사를 보면 한국 특유의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KACR의 씨앗은 대표적인 보수적 대학 선교 단체인 한국대학생선교단체(C.C.C)가 주최한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 기간 중에 뿌려졌다. 이 대회의 프로그램 중에 해외 강사들의 ‘창조론 세미나’가 있었는데, 1972년에 창조과학연구소(ICR)를 세우는 등 미국 창조과학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왔던 수력학자 모리스(H. Morris)와 화석학자 기시(D. Gish) 등이 연사로 참여했다. 이 세미나의 영향으로 당시 강연 통역을 맡았던 김영길(당시 한국과학원 교수, 현 한동대 총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과학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이듬해인 1981년 1월 31일에 150여 명의 발기인으로 구성된 KACR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KACR은 독자적으로 《창조》라는 소식지를 매월 발간함으로써 한국 기독교계에 창조과학을 소개하는 일뿐만 아니라 교계 내에서 점점 늘어가는 창조과학 지지 세력을 네트워킹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KACR은 현재 “석박사급 과학자, 의사, 교수, 교사로 구성된 1,100여 명의 회원과 1만 2천여 명의 온라인 회원, 그리고 16개의 국내 지부와 5개의 국외 지부를 가진”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KACR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KACR의 목표는 첫째, “창조론적 교육의 개혁이다. 현재 진화론만 가르치고 있는 공교육기관에서도 과학적 증거를 통해 창조론을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서양 창조과학 운동의 그것과 정확히 똑같다. 두 번째 목표는 매우 구체적이다. 그것은 창조과학관의 건립이다. 그들은 창조과학관이 “창조의 과학적 증거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창조과학 전시관, 학술적인 연구를 담당할 창조과학 연구소, 체계적인 훈련과 이를 통한 전문인 선교사 파송을 위한 창조과학교육원 등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이 창조과학관에 “창조신앙의 회복을 선포하고 다음 세대에 훌륭한 기독교 문화유산을 물려주며 세계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겠다”는 포부를 실었다.

KACR은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전략적인 활동을 전개해왔다. 우선 그들은 전국의 교회를 순회하며 각종 강연회를 펼침으로써 창조과학을 지지하고 KACR을 후원하는 개인과 교회의 수를 늘리는 데 각별한 신경을 써왔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를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창조과학과 관련된 강연을 들어봤을 정도로 출장 강연으로 인한 KACR의 인지도는 꽤 높은 편이다.

둘째, KACR은 매년 한 번씩 학술대회를 열고 몇몇 기독교 재단의 대학들(한동대, 명지대, 아세아연합신대 등)로 하여금 창조과학 관련 과목을 개설할 수 있도록 지원해왔다. 셋째, KACR은 창조과학 교육원을 통해 창조과학 강사를 훈련시키고 전국교사연합회를 결성하여 일선 교육 현장에서 창조론 교육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가령, 전국 교사연합회의 교사들(초^중^고 교사로서 모두 기독교인)은 생물학 교과서의 ‘생명의 기원’ 부분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넷째, 서울에 창조과학 상설 전시실을 소규모로 마련했고(2007년), 창조과학관을 위한 부지를 한국대학교선교단체의 명예 회장인 김준곤 목사로부터 기부받았으며(2007년), 건립을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섯째, KACR은 회원들이 창조과학을 일반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책을 출간할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창조과학 운동은 한국의 진화^창조 논쟁과 과학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한마디로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은 태생부터 성장까지 미국 창조과학 운동을 그대로 복제했다고 할 만하다. 심지어 목표와 내용뿐만 아니라 전략 면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의 창조과학이 국내의 그것만큼 주류 기독교계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는 교계와 교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른바 대형교회들이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으로 창조과학을 옹호하고 있는 상황인 데 비해, 미국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미국의 경우에는 오히려 설계론 운동이 그런 환영을 받고 있다.

한국의 창조론자들이 미국의 창조과학을 직수입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점도 있다. 그것은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미국의 그것이 안고 있었던 신학적^과학적 문제점들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떠안고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 창조과학 운동은 기독교계 내에서 이단의 한 분파로 인식되어온 ‘안식교’ 전통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Numbers 2006). 하지만 한국의 창조과학 옹호자들은 이런 신학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창조과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선, 당시 한국의 주류 신학은 근본주의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비슷한(더 극단적인) 신학적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창조과학 운동은 상대적으로 더 쉽게 환영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세속 학문의 도전들에 대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보수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창조과학의 반진화론 운동이 반가운 아군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의 창조과학을 받아들이게 된 한국의 기독교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더욱 근본주의화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리고 교인들로 하여금 과학에 대해 매우 뒤틀린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부정적 측면 때문에 기독교권 밖에서는 KACR에 대해 대개 ‘변변한 전문 연구지 하나 없는, 학술 단체를 빙자한 종교 단체’쯤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KACR이 한국의 과학 문화에 끼친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한국 교회에서 창조과학 강연회와 교육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서 진화에 대한 충실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많게는) 거의 매주 창조론을 옹호하는 설교나 강연을 듣게 된다는 것은 공교육 측면에서도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창조과학이 주류 기독교계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은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한국 사회에서 무시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에는 오늘도 “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들”이라는 황당한 기사가 메인 화면에 띄워져 있다. 그런데 이 단체를 이끌어온 명예회장은 대학교육 정책에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회장으로 지난 1년간 일했다. 게다가 그 회장은 2011년 2월에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과학기술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공적으로 카이스트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이공계 대학 어디에서도 창조과학을 주도적으로 보급하려는 사람에게 명예학위를 주지는 않는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진화론의 허구성을 밝히겠다’며 결성한 단체의 장을 대학교육 정책의 수장으로 두지는 않는다.

3. 쌍둥이 유착: 과종 유착과 정교 유착

최근에는 한국 개신교인들의 과학 이해가 얼마나 저급한 수준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시리즈로 발생했다. 우선,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 감리교회의 아무개 목사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주요 일간지의 한 면을 털어 광고물을 낸 사건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 목사는 진화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다윈의 학설처럼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면 지금도 어느 산속이나 정글에서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되는 과정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역사상 그것을 본 일이 없다”면서 창조론을 옹호했다. 주류 개신교 교회가 진화론을 이단시한다는 사실은 이미 비밀도 아니지만, 일간지 한 면을 할애하여 대형 교회 목사가 이렇게 대놓고 창조론을 선전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다윈 이후로 이제는 상식이 된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개념만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개념에 따르면 현재의 침팬지나 원숭이는 엄격히 말해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 몇백 만 년, 몇천 만 년 전쯤에 우리 인간과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현재 우리와) 사촌 종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물원에 가서 1억 년을 계속 관찰한다 해도 우리는 그들이 사람으로 진화하는 일을 결코 관찰할 수 없다. 이것은 진화론의 기본을 배운 초등학생도 이제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는 그 아무개 목사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친미 우익 보수 세력을 대변해온, 정경유착의 대표적 나팔수라는 점이다. 개신교와 과학의 유착에서 정경유착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사례이다. 나는 이 두 유착의 메커니즘이 동형적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예컨대 한국의 개신교인은 대부분 창조론자들이다. 즉,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적 교리(창조론)가 과학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의 교리가 과학적 상식과 어긋나는 경우에도 주저하지 않고 교리를 편든다. 마치 정치적 상식이 종교적 교리를 이기지 못하는 한국 개신교의 경우와 흡사하다.

개신교의 한 대형 교회의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 시절에 서울시를 봉헌하겠다고 했고, 국가조찬기도회에 무릎을 꿇고 통성 기도를 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그리고 동시에 과학에 대해서는 창조론자다. 정치에 대한 그의 태도는 과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일치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번 정부에서 이 쌍둥이 유착의 사례는 적지 않다. 가령,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청와대 전 홍보기획 비서관이 한 기독교 행사에서 “사탄의 무리들이 판치지 못하도록 기도해 달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물의가 일자 그는, “이는 기독교계에서 기도나 연설 말미에 통상적으로 쓴 관행적 용어일 뿐 특별한 집단을 지칭한 발언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해명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매일 만나는 다섯 명 중 하나는 ‘관행적’으로 ‘사탄’이라는 말을 쓰는 개신교인일 것이다. 좀 섬뜩하지 않은가? 아무리 입에 붙은 말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기도할 때 등장하는 ‘사탄’이라는 단어의 지시체는 장난꾸러기 꼬마 요정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악령(惡靈)’이다.

현대 과학이 말해 주는바, 물질적 기반이 없이 떠도는 영(靈)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사탄은 고사하고 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각자의 종교와는 무관하게 ‘천사’라는 용어를 착한 일을 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기도 한다. 이때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전직 목사인 그 비서관이 쓴 ‘사탄’도 단지 그저 ‘나쁜 사람들’을 지칭하는 상징적 표현에 불과한 것인가?

사탄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그는 슬그머니 그렇게 해명한 셈이지만, 내가 보기엔 일반인들이 쓰는 ‘천사’에 비해 그의 ‘사탄’은 실제로 존재하는 영에 가깝다. 놀랍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천사나 사탄을 문자 그래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증거가 있다. 2004년 한국갤럽이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악마의 존재를 믿는 신자는 개신교인 중 77.6%나 된다. 그 비서관의 해명과는 반대로,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사탄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셈이다. 몇 가지 항목을 더 보면, 개신교인 중 80.9%는 천당을, 81%는 사후 영혼을, 83.6%는 기적을, 70.2%는 창조설을, 63.6%는 심판설을 믿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지식이라도 그들의 굳건한 신념 앞에서는 늘 상대적이고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지식의 교류 측면에서 소통이 가장 더딘 동네가 바로 개신교 집단이다. 그들은 경전의 컨테이너를 쌓고 이견의 유입을 차단하며, 자신들만의 소통에 골몰하면서 배타주의의 성을 높이 쌓고 있다. “서울시를 봉헌”하고 “사탄의 무리가 판치지 못하게” 하고, “좌파 빨갱이를 잡아들이자”는 종교인들의 말실수는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며 그들에게 세계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교 서약서까지 써놓고 여행자제국으로 기어이 떠나고 마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며,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신뢰하고 그 나라 대통령의 안위를 위해서까지 눈물로 기도하는 갑갑함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 개신교가 만들어낸 온갖 유착들을 좀 더 살펴보자. 운이 좋으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예수천국 불신지옥’철을 탄다. 불자인 시어머니와 기독교인 며느리가 제사상 앞에서 벌이는 우상숭배 논쟁은 단골 메뉴다. 어디를 가든 그 땅을 신의 영토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부터 하는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개신교인들도 최근에 문제된 ‘봉은사 땅밟기’에 대해 불편해하긴 했지만, 내가 알기로 그들은 거의 매주 온 세상을 복음화할 비전으로 재무장된다. 9^11테러범들이 대학 교육을 받은 멀쩡한 중산층이었듯이, 우리 친구들도 남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개신교에 ‘감염’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이 모든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지만 문자 그대로 ‘다른 세계’의 주민들이다.

4. 배타주의 밈에 감염된 한국 개신교가 정교유착을 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세상과의 참조점을 두지 않고 자신만의 나침반으로 배타적인 길을 가려는 한국 개신교의 성향은 왜 생겨난 것일까? 이에 대한 내 작업가설은 다음과 같다. 한국 개신교는 근본주의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때 전달된 ‘배타주의’라는 밈(meme)이 그 이후로도 가정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수직적, 수평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이 밈은 지난 세기 동안에 한국 개신교가 떠받들고 왔던 ‘성장주의’ 밈 또는 기복 신앙과 강한 연관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 보자.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이 들고 나오는 가방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인기 걸그룹의 춤은, 심각한 변형이 일어나긴 하지만 멀리 철책 군부대까지도 전달된다. 어떤 전자제품은 빨리 구입하려고 매장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소비자를 기다리는가 하면, 다른 제품은 소리 소문 없이 시장에서 사라진다. 어떤 신을 믿는 이들은 새벽마다 특정 장소에 모여 큰 소리로 어딘가를 향해 부르짖고, 어떤 이들은 가부좌를 틀고 침묵의 시간을 즐긴다. 우리는 평생 헌신할 수 있는 가치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방황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투신한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과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물의 궤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11장에서 인간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가 아닌 새로운 복제자(replicator)를 다음과 같이 도입한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복제자가 지구상에 최근에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눈앞에 있다. 아직은 유아기에 있으며 원시 수프 속에서 서투르게 헤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낡은 유전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화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새로운 수프는 인간 문화의 수프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복제자의 이름이 필요한데, 그것은 문화 전달의 단위, 혹은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표현해줘야 한다. ……이것은 meme이다.”(도킨스 1976, p.192). 도킨스는 밈의 사례로 선율, 아이디어, 캐치프레이즈, 패션, 주전자 만드는 방법, 문 만드는 기술 등을 들었고, 신념과 종교 등을 복제자의 관점에서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 인간만이 밈이라는 새로운 복제자를 진화시켰으며 그 밈들을 통해 유전자의 독재로부터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밈’이란 모방을 통해 전달되는 ‘무언가’를 뜻한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를 모방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내게로 ‘무언가’가 전달된다. 그 ‘무언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거기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될 수 있다. 이렇게 계속 전달되면서 저만의 생명을 지니는 것을 ‘밈’이라 부른다. 즉, 밈이란 모방이라는 비유전적 방법을 통해 전달되는 문화의 요소이다.

《밈(The meme machine)》의 저자 수잔 블랙모어(Susan Blackmore)는 인간의 마음 자체가 밈들이 뇌를 재편해서 자신들에게 더 나은 서식처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 인공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커다란 뇌는 모방의 산물로서 다른 영장류와 그것들과 구별된다. 우리의 언어도 밈이 더 많은 자신의 복제본을 퍼뜨리기 위해 진화시킨 것이며, 밈은 자신의 경험과 소유물을 물려주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섹스)를 통해 자신을 맘껏 확산시킨다. 특히 종교적 밈의 경우에는 두려움과 이타성을 통해 자신의 밈을 더 널리 전파한다. 이때 종교적 밈의 확산은 세상에 대한 진실성과는 관련이 없다.

블랙모어는 대담하게도 우리의 자아가 서로 다른 밈들의 복합체(memeplex)일 뿐이고, 밈을 전달하는 모방 능력 때문에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 뚜렷이 구분되며, 우리는 결국 밈 머신(meme machine)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전자가 우리의 배후에 있다는 것도 불편한데 밈마저도 우리의 본성을 모양 짓는 또 하나의 복제자가 있다고 하니, 또 한 번 자존심이 상하는 대목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 개신교는 배타주의와 성장주의의 밈 복합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하필 이 두 밈이 연합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생존 자체가 목표였던 시절, 한국 개신교가 채택한 가치는 성장주의였다. 그 결과 압축적 근대화의 외면적 성공과 더불어 교회도 풍요로워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 근본주의 개신교의 뿌리 깊은 배타주의가 슬그머니 끼어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배타주의는 성장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잘 먹고 잘살되, 우리끼리만 그렇게 하자’는 밈 복합체가 한 패키지로 개신교인의 뇌를 통해 확산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이런 밈 복합체를 갖는 것이 자기 자신의 유전적 적응도를 높였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때로는 이 복합체가 뇌를 점유함으로써 그 개인의 적응도가 타격을 입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타주의 밈은 운반자의 적응도를 고려해주지 않는다. 그저 복제되고 복제될 뿐이다.

그렇다면 배타주의 밈에 감염되어 정교유착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되돌려 놓겠는가? 어떻게 정교유착의 고리를 끊을 것인가? 기복신앙으로 인생에서 물질적, 정신적 보상으로 받은 사람들, 즉 기도로 성공을 경험한 우리 부모 세대의 경우에 배타주의 밈은 피하기 힘든 유혹으로 작용한다. 나는 적어도 이 부모 세대가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배타주의 밈을 운반하는 운반자들이 살아 있는 한, 마치 독감 바이러스의 숙주가 격리되지 않는 이상 그 바이러스가 접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듯, 정교유착의 고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박사). 미국 터프츠대학교의 인지 연구소 방문 연구원과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2010년부터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의 교수,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겸무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생물철학과 진화학이며, 〈일반 복제자 이론〉 〈이타성의 진화와 선택의 수준 논쟁〉 등의 논문과 《다윈의 식탁》 《종교 전쟁》(공저),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통섭》(공역) 등의 저서가 있다. 대한민국과학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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