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중요성 절감케 한 노작(勞作)

중국인의 삶과 불교의 변용
K.S. 케네스 첸 지음
장은화 옮김 / 씨아이알 
이 책은 케네스 첸(Kenneth Ch’en)의 The Chinese Transformation Of Buddhism을 번역한 것이다. 이제 번역과 내용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 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과 함께 케네스 첸의 ‘중국불교 2부작’으로 불리는 Buddhism In China를 10년쯤 전에 《중국불교》라는 제목으로 번역하면서 느낀 점은, 영어로 된 동아시아 관련 문헌을 번역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어색한 번역 투의 문장과 영어로 번역된 개념을 다시 번역하면서 생기는 본래 개념과의 괴리를 피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사람, 지리, 절, 책, 관직 등의 본래 한자 이름을 밝히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오역도 나타나기 마련이다.(부끄럽지만 《중국불교》에도 이런 문제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음을 고백한다.) 이 책에서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지적함으로써 이 책에 대한 이해와 앞으로 번역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표기에 일정한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한자 병기에 대해 옮긴 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독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한자 사용을 최대한 자제했으며 문맥상 애매하게 읽힐 우려가 있을 때만 한자어를 병기했다.”(〈옮긴 이의 글〉) 이 말은 지당하다.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런데 한 가지 오해가 있는 듯하다. 신문이나 대중적인 저작물에서는 될 수 있으면 한자를 안 쓰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이 책처럼 한자문화권의 문화를 다루는, 수많은 주석이 달려 있는 학술서적의 경우에는 최소한 처음 나올 때만이라도 한자를 병기해 주는 것이 오히려 가독성을 높이고, 문맥 파악을 쉽게 한다.

5쪽에는 중국에서 활동한 외국 출신 밀교 승려 수바카라심하, 바즈라보디, 아모가바즈라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중국에서 활동할 때의 이름은 이것이 아니라 善無畏, 金剛智, 不空金剛이라는 한자 이름이고, 대부분의 불교 문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이 책의 뒤에서는 ‘불공금강’의 이름을 ‘불공(아모가바즈라)’이라 표기하기도 하였고(88쪽), 초기의 외국 출신 역경승인 축법호(竺法護)를 ‘축법호(Dharmaraksa)’로 표기하기도 하였다(23쪽). 원서에서는 이들 모두 범어의 로마자 표기만이 있을 뿐인데, 번역에서는 이처럼 제각각이다.

나아가 ‘정토(淨土)’ ‘주재(主宰)’처럼 굳이 한자를 넣어주지 않아도 될 용어에는 한자를 병기하면서도 ‘사중사’ ‘광택사 법운’처럼 중국의 지명, 인명, 절 이름 등의 고유명사에는 정작 한자를 병기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것은 가독성의 문제가 아니라 친절함의 문제다. 이들에 대해서 《불광대사전》이나 《대한화사전》 《한어대사전》 같은 한문 사전에서 더 찾아보고 싶어도 찾을 방법이 없다. 한자 표기가 없기 때문이다.

가독성의 관점에서도 한번 생각해보자. 이미 익숙하게 알려진 한자 이름을 빼버리고 ‘바즈라보디’라는 낯선 이름만 표기하는 것과,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라고 표기한 뒤, 이후로는 ‘금강지’라고 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독성이 높겠는가?

표기 방식에 대한 혼란은 연구자들의 이름 표기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인들은 이름을 ‘한자’로 쓰지 ‘한글’로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인의 이름은 한글 발음만 적어놓고 정작 한자 표기를 생략해버린 것이 대부분이다. 중국인들의 이름은 한글만 쓴 경우, 한자만 쓴 경우, ‘고염무(顧炎武)’ ‘진인각(陳寅恪)’처럼 함께 표기한 경우가 일정한 원칙 없이 뒤섞여 있다. 그런가 하면 맨 뒤의 참고문헌에서는 유독 일본인들의 이름만 ‘한글 발음(한자)’ 식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이건 무슨 경우일까? 발음의 정확성을 위해서라면, 중국인들도 붙여줘야 하고, 로마자 이름에도 영어식 프랑스식 독일식에 따라 발음이 다르니, 모두 붙여줘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장에 따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일정한 원칙이 없는 표기 방식은 상당히 혼란스럽고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번역의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간과할 수 없는 오류들 또한 눈에 띈다. 6쪽의 ‘백의의 판다라바시니’는 오역이다. ‘판다라바시니’라는 말 자체가 ‘흰옷을 입은’이라는 뜻이고, 케네스 첸 또한 그런 뜻으로 풀이해 놓고 있다. 15쪽에 나오는 ‘한(韓)’은 ‘한(漢)’의 오역이고, 43쪽의 ‘순조’는 ‘손작(孫綽)’의 중국식 발음을 그대로 쓴 것인데, 원본 뒤쪽의 용어집에 나와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원서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예컨대 79쪽에 나오는 혜원의 말 가운데 일부는 전거가 있고, 일부는 전거가 없고, 일부는 오역이다. “승려는 황제를 알현할 때는 승복을 입지 말아야 하며, 승려는 황궁에서는 걸식하는 발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부분이 대표적인 오역인데, 《고승전》에 실린 혜원의 전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글의 제대로 된 번역은 “가사는 황제를 조회할 때 입는 옷이 아니고, 발우는 궁중이나 종묘에서 쓰는 그릇이 아니다”이고, 그 뜻은 ‘승려는 이미 왕이 지배하는 세속의 규범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케네스 첸은 에린 쥐르허(E. Zurcher)의 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불교의 중국 정복》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에서 이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쥐르허는 이 대목을 정확하게 번역하였지만, 요약 인용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글이 되어 버렸다.(일본어 번역도 오해의 소지가 약간 있다.) 한편 이 책의 4쪽에 언급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경우 원서에서는 24품이라고 하였지만, 현재 유통되고 있는 구마라집 번역본 《법화경》에서는 25품이다. 이를 이 책에서는 원서대로 24품으로 번역하였고, 일본어 번역에서는 원서의 내용을 밝히지 않은 채 25품으로 정정하여 번역하였는데,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이처럼 원저자의 오류가 분명할 경우에는 원서대로 번역하고 주석에서 바로잡거나, 원서의 오류를 바로잡아 번역하고 주석에서 원서의 내용을 밝히는 것이 원서의 내용도 살리면서 올바른 이해도 가능하게 해주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이상의 오류는 《중국불교》에서도 많이 발견될 텐데, 알려주면 좀 더 나은 번역판을 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케네스 첸의 불교학자로서 명성과 이 책이 지닌 가치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저자의 광범위한 자료 수집력과 문화사적인 안목은 누구에게나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장점을 전제로, 그래도 발견되는 한계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겠다.

첫째, 10세기 이전의 중국불교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시대적 한계이다. 이 책보다 1년 앞선 1972년에 출간된 Buddhism In China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책 또한 송 대 이후의 중국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소략하다. 이는 이 책이 저술될 당시의 중국불교 연구 경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지금도 그런 견해가 팽배하지만, 당 대의 불교를 중국불교의 절정으로 보고, 송 이후는 쇠퇴기로 보는 것이 당시 학계의 주된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은 송 대 이후의 불교에 대한 연구자와 연구 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저술된 이 책에도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송 대 이후의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늘었고,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송 대 불교에 대한 재평가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따라서 좀 더 넓고 열린 시각에서 중국불교의 시대 구분에 대해서도 새롭게 논의하고, 송 대 이후의 중국불교에 보이는 중국적 특성에 대해서도 새롭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둘째, 다루는 분야가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다 보니, 꼭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분야가 있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남종선 계통의 선불교와 삼세인과응보설의 중국적인 변형이다. 선불교는 가장 중국적인 불교로 평가될 정도로 중국적인 특색이 강하기 때문에 불교의 중국적 변형을 논할 때에는 빠뜨릴 수 없는 주제인데 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 가장 독특한 교리로 인식되었던 삼세인과응보설 또한 중국적인 환경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붓다가 우연론이나 운명론 같은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새롭게 제시한 세계관이 바로 업과 연기론이고, 이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행위 중심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보여준다. 그런데 중국에서 연기설은 전생의 업의 힘이 피할 수 없는 힘으로 현생을 지배하는 숙명론이나 운명론으로 변질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나고 죽는 것은 운명에 달렸다’고 하는 중국인들의 운명론적인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처럼 변질된 연기설은 지금까지도 동아시아불교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체념적이고 순응적인 삶의 태도를 조장하고 있다. 윤회의 교리를 접한 중국의 불교인들은 불변하는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신불멸론(神不滅論)적인 인간관을 초기부터 형성하여, 이를 비판하는 반불교도들과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관은 이후 중국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꾸준히 영향을 미쳤으며, 불성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과 맞물리면서 초월적인 영원한 자아의 관념을 형성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처럼 이는 중국불교의 정체성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윤리사상 분야에서 불교의 상호주의적 윤리설이 중국의 일방적인 의무의 윤리관에 의해 제대로 조명되지도 못한 채 왜곡되어 묻혀버린 점, 여성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무측천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나 관음보살의 여성화, 사실상 어머니의 은혜의 무거움을 설파하고 있는 《부모은중경》에서 보여준 모성적 가치의 존중과 승화 등을 통해 나타나는 중국불교의 여성주의적 기능 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이 밖에도 문학 분야에서 백거이 한 사람에게 치우쳐 서술하는 등, 분야별 주제와 서술 방식의 여러 가지 한계 등도 지적될 수 있다.

이상에서 여러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였지만, 그것이 이 책이 지니는 고유의 가치와 미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이 책의 번역이 지닌 의미와 공덕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지적들을 곱씹어보면 오히려 이 책의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책의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서가 출판된 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더 늦기 전에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

박해당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연구원.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재 서울대학교 자하서당, 동국대학교 불교한문아카데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역서로 《중국불교(상, 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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