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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초기불교 관점에서 본 미학 / 김한상
[52호] 2012년 09월 01일 (토) 김한상 devamitta@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케임브리지 철학 사전(The Cambridge Dictionary Of Philosophy)》은 미학(美學, aesthetics)을 자연, 인생, 예술이 지닌 아름다움의 본질과 이를 음미하는 인간의 감성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고 있다. 원래 영어에서 미학을 뜻하는 ‘aesthetics’는 그리스어로 ‘감성적’이란 뜻의 ‘아이스테티코스(aisthetikos)’에서 왔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18세기 중엽 독일의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 1714∼1762)에 의해, 진리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에 대해 미학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적 인식의 학문으로서 ‘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이름으로 철학의 한 부분에 설치된 것이 그 최초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학은 예술, 아름다움, 감성을 삼위일체로 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초기불교는 현실의 괴로움을 해소하고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얻기 위한 가르침으로, 그 궁극적 지향점을 출세간(出世間, lokuttara)에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간(世間, lokiya)의 문제에 속하는 미학과 출세간을 지향하는 불교는 상충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특히 초기불교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되는 남방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는 모든 존재를 5온(五蘊, khandha), 12처(十二處, āyatana), 18계(十八界, dhātu) 등으로 해체하여 보는 분석적인 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더더욱 초기불교가 감성의 영역인 미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쉽게 예를 들어 어떤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고 하자. 우리가 만약 그 여성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상기의 방식대로 하나하나 분해해서 본다면 그 여성에게서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혐오감이나 무상한 생각만 들 것이다. 이렇게 분석적 지혜를 강조하는 교리적 체계 외에도 초기불교의 엄격한 계율적 규제는 초기불교와 미학은 상충된다고 생각하는 데에 한몫하는 듯하다. 그래서 일찍이 아난다 꾸마라와스미(Ananda Coomaraswami)는 초기불교는 아름다움과 개인의 사랑을 덧없이 여길 뿐만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할 악이나 유혹으로 여기고, 계율적 규제로 인해 미학이 오락으로 폄하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불교의 한 면만을 보고 내린 성급한 판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초기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두 축으로 하여 깨달음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다. 이는 두 날개를 써서 목적지로 날아가는 새에 비유될 수 있다. 새가 창공을 날 때 두 날개를 동시에 펄럭거려야만 균형을 이루어 원하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듯이, 우리도 깨달음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면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계발해야 한다고 초기불교는 역설한다. 그리고 지성과 감성이 최고로 계발되면 지혜와 자비로 승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가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미학을 고찰할 때에는 이러한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초기불교는 지성만큼이나 감성도 소홀하지 않기 때문에 감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학도 소홀하지 않고 출세간의 목적을 위해 적극 이용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성과 감성으로 각각 대표되는 지혜와 자비가 최고로 고양된 상태가 초기불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이고, 미학은 특히 이 감성을 계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빨리 니까야는 미학의 주 영역인 시, 게송, 우화, 비유 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시는 초기불교에서 제자들의 신심(saddha)을 고취하거나 법열(pīti)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더욱이 붓다의 가르침을 결집할 때 대중이 그것을 합송(合誦, saṁgīti)하면서 생긴 아름다운 율조는 후대 불교음악의 기원이 되었다. 붓다 자신도 종종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찬양하였다. 붓다와 아라한은 결코 감성이 메마른 목석(木石)이 아니라 연민, 사랑, 동료애, 우정과 같은 감성이 풍부하고, 뛰어난 미학적 감각을 지녔던 분들이었다.

2. 초기불교에서 보는 감성

초기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5온(五蘊, pañca-khandha)으로 이루어진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의 복합체이다. ‘칸다(khandha)’라고 하는 것은 ‘모임’ 또는 ‘무더기’란 뜻으로 인간은 이 5가지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1) 색온(色蘊, rūpakkhandha)-물질의 무더기
(2) 수온(受蘊, vedanākkhandha)-느낌의 무더기
(3)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인식의 무더기
(4) 행온(行蘊, saṅkhārākkhandha)-의도작용의 무더기
(5) 식온(識蘊, viññāṇakkhandha)-의식의 무더기

이 가운데 색온은 우리의 물질을 이루고,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은 우리의 정신을 이루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색온은 땅(地, paṭhavi), 물(水, āpo), 불(火, tejo), 바람(風, vāyo)의 4대종(四大種, mahā-bhūta)과 24가지 소조색(所造色, upādāya-rūpa)으로 이루어진 물질 일반이며, 수온은 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감수작용을 가리키고, 상온은 개념 표상의 작용을 가리키고, 행온은 의지나 의도작용을 위시한 50가지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을 총칭하고, 식온은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물질인 색온과 정신의 4가지 온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감성과 지성으로 구성된 인격체를 구성하고 지탱한다.
또 인간이 생존하는 방식을 4가지 음식(四食, cattāro-āhāra)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1) 단식(段食, kabaḷīkārāhāra)-덩어리의 음식
(2) 촉식(觸食, phassāhāra)-접촉의 음식
(3) 의사식(意思食, manosañcetanāhāra)-의도의 음식
(4) 식식(識食, viññāṇāhāra)-식의 음식

여기서 ‘아하라(āhāra)’란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데 필수적인 물질과 정신의 요소들을 음식에 빗댄 일종의 비유적인 표현이다. 단식은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덩어리로 된 음식으로 물질의 몸을 지탱해 준다. 촉식은 즐거운 느낌(樂受, sukkha-vadanā), 괴로운 느낌(苦受, dukkha-vedan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 adukkha-ma-asukhā-vedanā)의 3가지 느낌(受, vedanā)을 지탱해준다. 의사식은 3계(三界, ti-loka)에 태어나는 것을 지탱해 주는 음식으로 의도(思, cetanā)나 업(業, kamma)과 동의어이다. 식식은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의 합성체 즉 5온을 전체적으로 지탱해준다. 

이러한 5온(五蘊)과 4식(四食)은 우리 삶에서 정신이 물질보다 훨씬 더 비중이 크며, 지성과 감성은 정신의 두 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5온(五蘊)과 4식(四食)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과 감성이 어떤 특정한 온(蘊)이나 식(食)에서 현저하기는 해도 모든 온(蘊)과 식(食)에 두루 내재한다고 보는 편이 더 옳다는 점이다.  

이제 지성과 감성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고찰해보자. 우리가 사회에서 출세나 성공을 하려면 학문, 지식, 기술 등을 잘 습득해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이 지성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 인생, 예술작품의 아름다움도 음미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로움과 우애, 사랑, 친절, 자비의 정신 등도 함양해야 한다. 이것이 감성이다. 만약 우리가 감성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지성만을 계발하는 데 몰두한다면 출세한 사람이나 박학다식한 학자는 될지 몰라도 뜨거운 가슴을 지닌 휴머니스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아는 냉혈한 이기주의자로 전락할 것이며 감정이 메마른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 게 될 것이다.

반면에 지성을 도외시하고 너무 감성에만 치중해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 부족하면 학문, 지식, 기술을 잘 습득하지 못하게 되어 세상에서 많은 경제적 곤경과 어려움을 겪게 될 뿐만 아니라, 무계획적이고 목표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바람직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성과 감성을 골고루 계발할 필요가 있다. 이는 비단 우리가 사는 세간에서뿐만 아니라 출세간의 경지를 추구하는 불교에서도 꼭 필요하다. 이제 다음에서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3. 지혜(paññā)와 자비(karuṇā)의 균형 있는 계발

초기불교에 따르면 완전한 인격체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혜(慧, paññā)와 자비(悲, karuṇa)이다. 지혜는 우리의 지성을 최고로 계발하고 승화시킨 것이고, 자비는 우리의 감성을 최고로 계발하고 승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바로 이렇게 인격의 두 축을 이루는 지성과 감성을 최고로 계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성과 감성을 최고로 계발한 완전한 인격체가 바로 붓다와 아라한이며, 그러한 상태가 바로 열반(涅槃, nibbāna)이기 때문이다. 붓다와 아라한은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의 본질인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를 꿰뚫어 보는 지혜와 더불어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도 갖춘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그래서 고대 스리랑카의 대주석가 붓다고사(Buddhagosa)는 디가니까야 주석서인 《수망갈라윌라시니(Sumaṅgalavilāsinī)》에서 붓다를 이렇게 칭송하고 있다.

[중생에 대한] 자비로 가득찬 시원한 가슴을 가지셨고 지혜의 빛으로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제거하셨고 인간과 불사의 영역을 포함한 모든 세상의 스승이시며 태어남을 벗어나신 선서(善逝)께 예배합니다.

사실, 불교는 바로 이렇게 지성과 감성을 최고로 계발하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bodhipakkhiyā-dhammā)으로 체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 37조도품을 구성하는 각지들을 하나씩 살펴본다면 불교는 우리가 지성과 감성을 골고루 계발할 수 있도록 짜인 매우 훌륭한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37조도품 가운데 5근(五根, indriya)과 5력(五力, bala)을 예로 들어보자. 5근과 5력은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믿음(信, saddhā), 정진(精進, vīriya), 마음챙김(念, sati), 집중(定, samādhi), 지혜(慧, paññā)의 5각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믿음(信, saddhā)은 감성에 해당하고 지혜(慧, paññā)는 지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이 너무 강하고 지혜가 약한면 맹신이나 그릇된 믿음에 빠지기 쉽고, 믿음이 약하고 지혜만 강하면 교활해지기 쉽기 때문에 붓다고사는 이 둘을 균형 있게 계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밖에도 붓다고사는 지성과 감성에 따라 사람의 기질을 여러 가지로 나눠서 이에 맞는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지혜는 성냄(dosa)와 관계되고 자비는 탐욕(rāga)과 관계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지성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감성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자비를 우선적으로 계발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지혜를 우선적으로 계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붓다고사는 말한다.

상좌부 아비담마에 따르면 선(禪, jhāna)에는 일으킨 생각(尋, vita-ka),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eka-ggatā)의 5가지 각지가 있다. 이 가운데 일으킨 생각(尋, vitaka)과 고찰(伺, vicāra)은 지성에 해당되고 희열(喜, pīti)과 행복(樂, sukha)은 감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선에서도 감성과 지성을 동시에 계발해야만 그 결과인 집중(定, ekaggatā)을 얻게 됨을 알 수 있다.

지성과 감성을 해탈(解脫, vimutti)의 문제에 적용하여 고찰해 본다면 삶에서 지성과 감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는 두 가지의 해탈을 설정하고 있는데, 하나는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고 하나는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이다. 심혜탈은 사마타 명상(samatha-bhāvāna)을 통해서 완성되며, 혜해탈은 위빠사나 명상(vipassanā-bhāvāna)을 통하여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마타 명상은 40가지 명상 주제(業處, kammaṭṭāna)를 통해서 마음의 집중(定, samādhi)을 얻기 위한 수행이며, 위빠사나 명상은 모든 법의 고유한 성질과 연기성을 각각 찰라(khaṇika)와 조건(paccaya)으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7청정을 닦아서 16가지(또는 10가지) 위빠사나 지혜를 체득하기 위한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마타 수행은 감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위빠사나 수행은 지성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는 제자들이 지혜와 자비를 균형 있게 계발하도록 하기 위해 사마타 명상과 위빠사나 명상을 함께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렇게 감성과 지성을 함께 계발하여 얻은 해탈을 초기불교에서는 구분해탈(俱分解說) 또는 양면해탈(兩面解脫, ubhatobhāgo-vimutti)이라고 한다. 물론 이 양면해탈이 심해탈이나 혜해탈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임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또한 우리는 불교의 교리적 체계, 이를테면 4성제(四聖諦, ariya-sacca), 12연기(十二緣起, paṭṭiccasamuppāda), 5온(五蘊, khandha), 12처(十二處, dhātu), 18계(十八界, dhātu) 등을 연구함으로써 지혜를 점진적으로 계발할 수 있을 것이며, 불교의 윤리적 체계, 이를테면 4범주(四梵住, brahma-vihāra) 등을 닦거나 계(戒, sīla)를 잘 지키는 도덕적인 삶을 삶으로써 자비를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격의 완성과 깨달음의 증득은 감성과 지성이라는 인격의 두 축을 균형 있게 계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감성과 지성은 새의 양 날개와 같이 창공을 나는 데 서로 평형을 맞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 지혜로 대표되는 지성과 자비로 대표되는 감성의 양 날개를 모두 펴서 우리는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을 향해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지혜와 자비는 초기불교에서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도 수행자가 반드시 구족해야 할 요소이자 덕목이다.

대승불교의 교육 이념이자 보살의 정신인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바로 이 지혜와 자비의 실천에 다름 아니다. 위로 깨달음(菩提, bodhi)을 구하려면 지혜가 없어서는 안 되며,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려면 자비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요소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형인 보살(菩薩)로 구현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śvara)은 감성을 최고로 계발한 자비의 화현이며, 문수보살(文殊菩薩, Mañjuśrī)은 지성을 최고로 계발한 지혜의 화현으로 대승불교에서 숭배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도 지혜와 자비는 수행자가 반드시 구족해야 할 요소이자 덕목이다.

4. 붓다와 제자들의 미학적 감각

아름다움은 직관적이기 때문에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無言)의 힘과 호소력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붓다는 잘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미학적 감각을 적극적으로 계발하여 출세간의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도록 고무하였다. 뿐만 아니라 붓다 자신도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제자들이 지은 시나 노래를 음미하고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다.

디가 니까야(長部, Digha-Nikāya)의 《삭까빤하경(Sakkapañha sutta)》에서 우리는 그러한 붓다의 미학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빤짜시카(Pa-ñcasikha)라는 하늘의 음악가는 붓다를 찾아와 악기를 연주하면서 붓다와 법과 아라한을 칭송하면서도 한 천녀에 대한 사랑의 정이 가득 담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들은 붓다는 그를 외설적이라고 비난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렇게 칭찬해주었다.

빤짜시카여, 너의 활줄 소리는 노랫소리와 잘 어울리고 너의 노랫소리는 활줄 소리와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언제 너는 붓다를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아라한을 칭송하면서도 사랑이 가득 감긴 이런 노래를 지었느냐?

디가 니까야의 《마하빠리닙바나경(大般涅槃經 Mahāparinibbāna sutta)》에서 붓다는 웨살리(Vesāli)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낀 감흥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아난다여, 웨살리는 아름답구나. 우데나 탑묘도 아름답고, 고따마까 탑묘도 아름답고, 삿땀바까 탑묘도 아름답고, 바후뿟따 탑묘도 아름답고, 사란다다 탑묘도 아름답고, 짜빨라 탑묘도 아름답구나.

또한 붓다는 왓지(Vajjī)의 아름답고 화려한 위용을 제자들에게 가리키면서 아직 33천(三十三天, Tāvatiṃsa)을 보지 못한 자가 있다면 이 왓지들을 보라고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우리는 붓다가 결코 감정이 메마른 목석(木石)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음미할 줄 아는 뛰어난 미학적 감각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빨리 니까야에서 붓다가 미학적 감각을 이용하여 제자들을 고무하고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 사례를 몇 가지만 보기로 한다.

붓다의 사촌동생 난다(Nanda)는 붓다가 까삘라왓뚜(Kapilavatthu)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석가 족 청년들과 함께 출가하였다. 하지만 그는 출가하기 전 아름다운 자나빠다깔야니(JanapadaKalyāṇi)를 아내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리워서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다시 환속하고 싶었다. 이를 안 붓다는 그를 데리고 공중을 날아서 히말라야 산으로 갔다. 붓다는 거기에서 산불에 덴 암원숭이를 난다에게 보여주면서 자나빠다깔야니와 저 불에 덴 암원숭이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를 물어보았다.

 난다는 자나빠다깔야니의 아름다움은 불에 덴 암원숭이와 비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붓다는 다시 난다를 데리고 33천으로 올라갔다. 난다에게 33천의 아름다운 천녀들을 보여주고는 자나빠다깔야니와 33천의 천녀들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난다는 33천의 천녀들과 비교했을 때 자나빠다깔야니는 히말라야 산의 불에 덴 암원숭이와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붓다는 열심히 수행한다면 이 33천의 천녀들을 모두 갖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약속에 크게 고무된 난다는 열심히 수행하여 오래 지나지 않아 아라한과를 얻었다.

난다가 출가생활을 포기하고 환속하려던 이유는 자나빠다깔야니의 아름다움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난다와 같이 아름다움에 도취된 자에게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득하여 다시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일은 붓다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우리말 속담처럼 붓다는 난다의 미학적 감각을 이용하여 그를 다시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박깔리(Vakkali) 이야기도 붓다가 미학적 감각을 이용하여 제자를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한 좋은 사례이다. 박깔리는 사왓티(Sāvatthi) 성내를 거니는 붓다의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에 이끌려 출가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승가에 들어와서도 항상 붓다만을 바라보면서 수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붓다는 박깔리를 이렇게 훈계하였다.

이 더러운 육신을 쳐다보아서 무슨 이로움이 있느냐? 박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박깔리는 여전히 수행을 게을리하고 붓다만을 바라보며 지냈다. 나중에 붓다가 자신을 멀리하자 크게 낙심하여 영취산(靈鷲山, Gijjhakūṭa) 정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했다. 그 순간 붓다는 그에게 광명을 보내고 자신이 바로 앞에 있는 듯이 모습을 나투었다. 이를 본 박깔리는 무한한 희열이 샘솟았고 이렇게 일어난 희열을 잘 관찰하여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다.

박깔리가 출가하게 된 동기는 붓다의 심오하고 철학적인 가르침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그의 미학적 감각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성보다는 감성이 훨씬 더 강하기 마련이다. 붓다도 처음에 이성적인 방법 즉 논리적인 설법으로 그를 훈계하였지만, 그는 미학적 감각이 풍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통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붓다는 자살하려는 박깔리에게 광명을 나투는 방법으로 그가 지닌 미학적 감성을 고무시켜 마침내 출세간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다.

《담마빠다 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에는 케마(Khemā) 비구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케마 비구니는 출가하기 전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왕비였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육체적 아름다움을 비판하는 붓다를 만나러 가기를 꺼려 하였다. 하지만 주위의 권유로 붓다를 찾아가서 법문을 듣게 된다. 이때 케마 왕비는 붓다 곁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말았다. 사실 그 여인은 붓다가 신통력으로 만든 환영이었다. 그런데 케마 왕비의 눈앞에 그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점점 나이가 들어서 결국에는 바닥에 쓰러져 죽는 광경이 전개되었다. 케마 왕비는 아름다움의 무상함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다.

케마 왕비와 같이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미학적 감각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법을 하기 보다는 미학적 감성을 이용하여 아름다움도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의 보편적인 법칙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렇게 중생의 다양한 성향을 알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려줄 수 있는 능력이 붓다와 그 제자인 아라한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점은 다음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법의 장군(法將, Dhamma-senāpati) 사리뿟따는 한 제자를 두고 있었다. 사리뿟따는 그 제자에게 더러움을 관하는 명상을 닦도록 했지만 제자는 3개월이 다 가도록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비구는 과거 5백 생 동안 금 세공인이었기 때문에 더러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아름다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안 붓다는 신통력으로 그 제자 앞에 연꽃으로 만발한 연못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 연꽃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제자는 한참을 그 연꽃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붓다는 그 연꽃이 점차 시들도록 하였다. 이를 본 제자는 모든 법의 무상을 깨닫고는 곧바로 아라한과를 얻었다. 여기서도 붓다는 그의 미학적 감각을 부정하지 않고 이를 교화의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즉 그가 좋아할 만한 아름다운 연꽃을 만들어 보여 그의 미학적 감각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 연꽃이 시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름다움도 결국은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의 보편적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다.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Nikāya)의 《마하고싱가경(Mahāg-osiṅga sutta)》을 보면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수행자들의 정신적인 진보가 하나로 어우러진 정경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저녁 마하목갈라나, 마하깟사빠, 아누룻다, 레와따, 아난다는 사리뿟따에게 법문을 들으러 갔다. 사리뿟따가 그들을 반기며 이렇게 물었다.

고싱가 살라 숲은 아름답습니다. 밤이면 달빛이 밝고 살라 꽃이 만개하여 마치 천상의 향기가 두루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 고싱가 살라 숲을 빛나게 합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4명의 비구들의 대답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서로 달랐다. 마지막으로 붓다는 사리뿟따에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사리뿟따여, 여기 비구는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앉아서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한다. 그는 ‘집착이 없어져서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라고 결심한다. 사리뿟따여, 이러한 비구가 고싱가 살라숲을 빛나게 한다.

《테라가타(長老偈, Theragātha)》와 《테리가타(長老尼偈, Therigātha)》는 깨달음을 성취한 아라한 비구와 비구니가 읊은 게송의 모음이다. 이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 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용맹정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감흥을 아주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하깟사빠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낀 자신의 미학적 감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까레리꽃으로 뒤덮여 있는 시름없는 곳이 있네. 코끼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이 아름다운 산악은 나를 즐겁게 하네.

시리고 맑은 물이 있으며, 인다고빠까 벌레가 가득한 곳, 푸른 구름빛을 띤 이들 아름다운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푸른 구름빛 봉우리, 마치 우아하고 높다란 궁전과 닮은, 코끼리 울음소리 들려오는 이들 아름다운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아름다운 산기슭에 비가 내리네. 선인(仙人)들은 종종 이곳을 찾네. 바위산에서는 공작이 소리높이 울고 있네. 이들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굳은 결심으로 선정을 닦으려는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굳은 결심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수행자인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굳은 결심으로 평안한 경지를 얻으려는 수행자인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굳은 결심으로 요가를 닦으려는 훌륭한 사람인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구름에 덮힌 하늘과 같이 삼꽃 옷을 둘러쓴, 온갖 새들이 살고 있는 이들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세상 사람들이 찾지 않고 사슴떼만 오고 가는, 온갖 새들이 살고 있는 이들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널찍한 암반이 있으며, 검은 원숭이와 사슴, 그리고 물과 이끼로 뒤덮힌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마음을 모아 도리를 바로 꿰뚫어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5가지 악기로도 당해내지 못하네.

깔루다이(Kāludāyi)도 다음과 같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를 지어 붓다에게 고향인 카삘라왓뚜를 방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거룩하신 분이시여, 이제 진홍빛으로 물든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으면서 화염을 일으키며 불타오르듯 찬란합니다. 거룩하고 당당한 분이시여, 지금은 가르침을 음미하며 즐겨야 할 때입니다.

아름다운 나무들은 꽃을 피워 사방에 널리 향기를 날리면서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습니다. 당당하신 분이시여, 이제 길을 나서 행각해도 좋을 때입니다.

춥지도 않고 또한 덥지도 않습니다. 즐거운 계절, 여행에 알맞습니다. 당신이 서쪽을 향해 로히니 강을 건너시는 모습을 석가족과 꼴리족이 볼 수 있도록 하소서.

끝으로 《위숫디막가(淸淨道論, Visuddhimagga)》를 보기로 하자. 여기서 우리는 미학적 감각이 최고로 고양되어 마침내 출세간의 경지로 승화되는 극적인 사례를 접할 수 있다. 풋사데와(Phussadeva)라는 비구는 마라(Māra)가 만든 붓다의 상을 보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지닌 이것도 이렇게 빛나는데 모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읜 세존은 얼마나 빛날까’라고 붓다를 대상으로 희열을 얻고 위빠사나를 증장시켜 아라한과를 얻는다.

5. 마치는 말

미학은 아름다움, 예술, 감성적 인식을 주제로 하는 철학이다. 그러므로 미학은 감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감성은 지성과 함께 인격을 이루는 두 축이자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간의 행복과 출세간의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이 둘을 균형 있게 계발해야 한다.

이렇게 지성과 감성을 최고로 계발하여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이상적인 인간형이 바로 붓다와 아라한이다. 붓다와 아라한은 아름다움을 음미할 줄 아는 미학적 감각이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며, 미학을 교화나 수행의 방편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렇게 초기불교는 출세간(出世間, lokuttara)의 목표를 지향하면서도 세간(世間, lokiya)의 문제인 미학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미학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나중에 불교가 전파된 각 지역에서 불교예술이 찬란하게 꽃피게 된 원동력이 되었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기불교가 미학을 단순한 오락으로 폄하한다거나, 미학의 가치와 초기불교의 가치는 서로 양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일각의 견해는 초기불교의 한 면만을 본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우리는 세간의 미학과 초기불교의 미학은 그 궁극적인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세간의 미학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에 그치지만 초기불교의 미학은 이를 뛰어넘어 출세간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극단에 치우쳐 탐욕(lobha)이나 자만(māna)과 같은 불선한 마음의 작용(akusala-cetasika)이나 번뇌(煩惱, kilesa)가 일어나는 것도 경계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이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단순히 음미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혜의 빛으로 그것을 꿰뚫어 볼 수만 있다면,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의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를 터득하여 해탈과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저 사리뿟따의 제자나 케마 왕비와 같이 말이다. ■

 

김한상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1971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스리랑카 켈레니야대학(University of Keleniya) 석사(불교학) 졸업. 역서로 《마라의 편지》 《초전법륜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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