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불교는 한민족의 정신과 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왔으며, 전통예술문화의 형성과 발전에도 주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해왔다. 음악문화에서도 불교의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불교는 한반도에 유입된 시점부터 왕실과 귀족의 음악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 한 예로, 정악 중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는 악곡을 들 수 있다. 영산회상은 현재 기악곡의 형태로 전해지나, 본래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佛菩薩)〉이라는 가사를 지닌 성악곡으로서 궁중에서 연행되었던 곡이다. 이 악곡의 곡명과 가사만 살펴보더라도 불교와의 관련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불교의 영향력은 민간의 음악, 즉 민속음악(民俗音樂)에서도 나타난다. 민속음악은 민중에 의해서 형성되고 애호되는 음악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궁중음악과 선비음악을 뜻하는 정악(正樂)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민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요나, 민속 예능을 위한 음악은 물론, 전문적^직업적인 음악가에 의하여 전승된 고도의 예술 음악이라도 민중이 향유해 온 음악이면 다 민속음악의 범주에 포함된다. 민속음악은 기층문화의 한 갈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을지 더욱 주목된다.

민속음악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불교적 요소들을 살펴보면, 상엿소리나 무가(巫歌)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노래하면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빌기도 하며, 탈놀이에서는 극중 인물로 승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불가 계통의 노래를 부르는 경우도 많다. 아울러 잡가나 민요에서도 불교 계통의 사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불교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이러한 민속음악들은 ‘불교적 요소들을 차용한 부류’와 ‘불교문화의 토양 위에 새롭게 생성된 부류’로 양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상기 두 부류에 해당하는 민속음악들을 차례로 살펴, 민속음악과 불교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즉, 불교와 민속음악이 상호 간에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를 살피고, 나아가 민속음악과 불교의 유기적 관계는 어떠한 배경 아래 형성된 것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논의해보고자 한다.

2. 민속음악, 불교 사상을 품다

1) 향토민요 속에 스며든 불교

민요는 민간의 대중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노래이다. 민중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민중의 삶의 모습, 정서, 사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기층음악의 토대를 이룬다. 음악학계에서는 민요를 가창자의 특성에 따라 향토민요(또는 토속민요)와 통속민요로 분류하고 있다. 향토민요는 어느 국한된 지방에서 불리는 것으로 사설이나 선율이 극히 소박하고 향토적이다. 통속민요는 특정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전승된 향토민요와는 달리 전국적으로 전파된 민요이며, 직업적인 소리꾼에 의하여 불리는 비교적 세련된 노래이다.

향토민요는 통속민요보다 민중의 생활에 더 근접해 있으며 각 지방의 언어, 풍습에 따라 각기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향토민요는 그 기능에 따라 노동요, 의례요, 유희요, 기타 민요로 구분된다. 이 중 의례요에 속하는 장례요는 인간의 죽음과 관련된 통과의례에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가사에서 종교적, 신앙적 요소를 보이는데, 특히 불교적 내용을 가진 노랫말이 많다.

상엿소리의 연행 형태를 살펴보면, 강원도에서는 처음에 발인(發靷)하면서 느리게 ‘미리미리 타불’ 소리를 하고, 본격적으로 운상을 할 때는 ‘어이넘차’ 소리를 한다. 전남 지방에서는 주로 ‘관암보살’ 소리와 ‘너화널’ 소리가 결합한 형태의 노래를 하는데, 그 후렴으로 “에헤이 에헤이 에헤 허이 나먼 보살” “관암보이 관암보살” “오호 호호 오호 호오호 나무아미타불” 등의 가사를 부른다.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상엿소리

에헤이 에헤이 에헤 허이 나먼 보살
(관암보이 관암보살)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캄캄헌디 혼은 어디로 가셨네
그려 쉽게 가시려거든 당초 이 세상을 나오시지를 말제
황천길이 멀고도 멀다더니 지체 없이도 잘 가셨소
(오호 호호 오호 호오호 나무아미타불)
[중략]
(너화 너화 너화널)
어리가리 넘차 너화널
조심들 허세 조심들 허세
유대 형제군들 조심들 허세
관암보이 관암보살
관암보이 나먼보살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상엿소리

에~에~에~이에 (관암보살)
이경치고 (관암보살)
호사를 극락세계를 (관암보살)
에님에 관안보살
관암보살을 좋은길로 (관암보살)
관암보살을 좁을길도 (관암보살)
허~넘 얼가리
충청도라 주지가지가 허어
강원도라 아그댁바그댁 허어
여보소 이내말을
내가죽어도 자네가죽어도 허어 [후략]

진도의 상엿소리는 ‘가난님 보살’ ‘긴소리’ ‘천근이야’ ‘나무아미타불’ ‘하적이야’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사 역시 불교와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엿소리 중 운상소리의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진도 운상소리

헤헤 헤헤헤야 헤에 헤에 에헤에야
못 가겄네 안 갈라네 차마 서러서 못 가겄네
내 집을 두고는 못 가나겄네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오날 가시는 금일 망제(망자)는 백 년도 못 살았네
오날은 여그서 울고불고 있다마는
어느 시절에 여기를 올거나
가시는 날은 안다마는
오만 날짜는 모른답니다
요내 염불로 길을 닦아
왕생극락으로 인도를 합니다

진도 운상소리의 가사는 망자의 넋을 위로하며 염불로써 망자를 왕생극락으로 인도하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진도의 상엿소리는 대부분 씻김굿을 하는 단골무당에게서 민간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도 씻김굿의 길닦음

[후렴] 제 에에 보살 제에헤 에헤 보살이로구나
나무여 어어여이허 여이허 허허 어허허로구나
다냐타 허허어 허허허로구나
나무 나무여 아미 타불
① 가노라 가시난데 일망세계 다리를 놓아서
여래 염불로 길이나 닦세
② 넋이는 오셨으니 넋반에다가 고이 모셔
인일랑은 모셔를 놓으니 신방에다 모셔놓고
반야용선을 무어타고 극락가고 세왕을 가세

민요인 상엿소리와 굿음악인 무가(巫歌)의 내용을 보면 불교적 내세관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은 이승의 죽음으로 그 생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승, 즉 극락세계에 환생하여 새로운 사후(死後)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특히 구전으로 전해오는 각 지방의 무가는 죽음 및 환생을 주제로 하여 불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굿 제의에서도 불경을 많이 독송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관련이 깊다.

2) 굿음악 속에 스며든 불교

상술했듯이 굿음악인 무가는 불교적 색채가 강한 사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굿거리 구성에서도 불교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는데, 불교 계통의 신을 모시는 제석거리의 경우, 무당은 승려의 복식을 흉내 내어 고깔을 쓰고 가사, 장삼을 입기도 한다. 황해도굿에서는 제석거리에서 바라를 들고 바라춤을 추기도 하는 등 불교의 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불교 용어인 ‘염불’은 굿음악 속에서 전용되고 있는데, 굿판에서 연주하는 다양한 무가(巫歌)와 무악(巫樂)을 염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굿의 염불은 무악으로 긴염불(또는 염불타령, 염불), 반염불(또는 자진염불), 염불도드리가 있다. 이것은 대풍류인 염불풍류의 구성곡을 가져다 쓰는 것이며, 염불풍류는 긴염불-반염불-삼현타령-느린허튼타령-중허튼타령-자진허튼타령-굿거리-자진굿거리-당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염불풍류는 서울굿뿐 아니라 서울^경기 지방의 승무, 검무, 탈춤 등의 반주 음악으로도 사용된다.

전라도굿의 염불은 무가이며 긴염불, 중염불, 자진염불 세 종류가 있는데, 보통 긴염불은 무당이 혼자 부르는 통절 형식으로 되어 있고, 중염불과 자진염불은 무당이 메기는소리를 부르면 악사가 후렴구를 받는 유절 형식으로 되어 있다. 후렴구는 대부분 “나무아미타불”이다.

동해안굿에서는 무가를 염불소리라고 부르는데, 특히 경남 지역에 염불소리가 많다. 안채비염불, 고삼염불, 자삼염불, 육자염불, 지옥가염불, 꽃노래염불, 뱃노래염불, 초롱등노래염불, 탑등노래염불 등 다양한 곡명의 염불소리가 존재한다.

경상남도 별신굿에서는 부정장단을 염불장단이라고도 하는데, 노랫말이 “일세동방결도량 이세남방득천량”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3) 연희음악 속에 스며든 불교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연희가 되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하나로 상좌춤, 옴중춤, 목중과 옴중, 연닢 눈끔쩍이춤, 팔목중춤, 노장춤, 샌님춤, 신할아비와 미얄할미 등의 여덟 과장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두 과장을 제외한 여섯 과장은 모두 그 신분이 승려인 상좌, 옴중, 목중, 노장 등에 의해 꾸며진다.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부르는 노래는 대개 민요나 가사, 시조, 무가 등을 차용한 것이나, 팔목중춤 과장에서는 불교 계통의 노래가 보이기도 한다. 제5과장 팔목중춤은 다시 세분하면 제1경 염불놀이, 제2경 침놀이, 제3경 애사당 법고놀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때 제1경 염불놀이에서 불교와 관련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나무아미타불”을 반복해서 소리하는 ‘염불’이 있고, 극중 인물인 완보가 “염불이면 독경이나 하지”로 시작하는 노래를 하고 이어서 목중들이 “(생략) ……우리 절에 대해서 덕담(德談) 한마디를 해야겠다”고 한 뒤 꽹과리를 치며 부르는 노래, ‘염불소리’가 있다. 완보가 부르는 노래의 사설은 다음과 같다.

염불이면 독경이나 하지 세존님께 자손 창성 발원 허자
어느 자손 발원 허나 상남에도 서방님 중남에도 도령님
어깨 너머 설동자며 귀한 애기 길러 낼제
일년은 열두달 과년은 열석달 일년 내내 태평 무사히…… 아~에
(합창) 아흐헤 에~로구나
− 양주별산대놀이 제5과장 팔목중춤 제1경 염불놀이 중에서

이 곡은 탁발승들이 걸립이나 탁발 시 꽹과리 반주를 하면서도 불렀던 탁발염불에 속한다. 이러한 염불조의 음악은 승려를 등장인물로 둔 여타 탈놀이에서도 발견되는데, 봉산탈춤에서도 제4과장에서 목중들이 승려 행세를 하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염불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민요의 상엿소리, 굿음악의 무가와 무악, 탈놀이 노래에는 불교의 여러 요소 중 ‘염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등의 불교 용어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주로 죽음과 관련된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염불을 통해 극락왕생 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가사가 많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 민속음악의 저변에 깔려 있던 불교의 정토신앙, 관음신앙이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토신앙 및 관음신앙이 일반 서민들에게 살아 있는 불교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통일신라시대이다. 미타신앙에 의하면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못하더라도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염불을 한다면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다.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일체중생을 모두 평등하게 구제한다는 이 미타신앙은 서민의 불교였다. 한편, 아미타불의 보처(補處)보살인 관세음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관음보살신앙은 미타신앙의 유행과 함께 널리 유포되었는데, 질병이나 재해 등 인간 생활의 현실적인 고뇌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내세의 신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정토신앙과 관음신앙이 민중 속으로 깊이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 원효(元曉) 등의 포교승이 활약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실과 귀족 중심이었던 당시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하여 민중 속에 깊숙이 들어가 정토신앙과 관음신앙을 널리 전도하였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민중 포교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효 스님은 이미 파계하여 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優人]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형상이 진기했다. 그 박의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 중 “일체의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一乘]出生死)”는 구절을 따서 무애(無碍)라 이름을 짓고 그것에 해당하는 노래[무애가]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널리 교화를 펼치고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빈민촌 사람들과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불타의 명호를 알게 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 스님의 교화는 참으로 크기도 하다.(일연 《삼국유사》 元曉不羈)

원효는 소성거사라는 이름으로 민중들과 함께 생활하며 〈무애가〉를 지어 불러 그들을 교화하였고, 이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명호는 민중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다. 이를 두고 불가(佛歌)인 화청(和請)의 유래를 원효의 〈무애가〉에서 찾기도 한다.

원효와 같은 포교승들에 의해 불교는 왕권에 예속되었던 특권적 지위와 민중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민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섰고 민중과 수평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불교는 민중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한 민속음악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즉, 불교적 요소가 가미된 민속음악들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불교음악, 세속의 옷을 입다

1) 선소리(立唱)

선소리는 전문적인 소리꾼에 의해 연행되는 잡가 중 서서 하는 소리를 말하며, 연행 되는 지역과 그 음악적 특징에 따라 경^서도 선소리 산타령과 남도 선소리로 구분된다.

경^서도 선소리 산타령이란 장고를 맨 한 명의 모갑이가 소리를 메기면, 소고를 든 여러 명의 소리꾼이 발림을 하며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 등의 소리를 부르는 음악 장르를 말한다. 선소리 산타령의 연원에 대하여 기존 연구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는데, 19세기 중^후반의 문헌사료 및 20세기 초 잡가집들을 중심으로 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산타령은 사당패소리를 기반으로 발생한 것이며, 19세기 말에 유랑예인이었던 사당패에게서 붙박이 예인인 선소리패로 산타령 담당층의 전이가 일어나면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당(社堂, 社黨, 舍堂, 社長, 捨堂)패는 본래 불교와 관련된 집단이다. 이들은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집단으로 사찰 근처에 불당골이라 일컫는 근거지를 두고 생활하였다. 사당패는 한 명의 모갑이의 통솔하에 남사당 또는 거사(居士)라고 부르는 남자들과 여사당이라 불리는 여자 십여 명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불경(佛經)의 간행, 범종의 주조, 석비(石碑)의 건립을 위해 민간에 나가 판놀음을 벌이고 염불을 하며 회중을 축원하고 시주(施主)를 걷어 절에 바치는 역할을 했다. 이렇듯 재가에서 불사(佛事)를 연행한 집단인 사당패는 ‘재가불교집단’이라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사당패가 사찰에 시주한 예는 절의 비문이나 불경의 간행기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시주자 명단에 ‘거사 아무개, 사당 아무개’와 같이 기록이 남아 있으며, 사당패의 활동 모습이 몇몇 사찰의 감로탱화에 묘사되기도 하였다. 감로탱화의 하단부에는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사당패, 남사당패,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굿중패 등 다양한 유랑예인집단과 그들의 연희 장면이 현실 생활의 일부로 함께 묘사되어 있다. 감로탱화에서 볼 수 있는 유랑예인집단의 전통연희는 외줄타기, 쌍줄타기, 솟대타기, 쌍줄백이(솟대타기의 일종), 땅재주, 방울 쳐올리기, 탈춤, 접시돌리기, 인형극, 사당춤, 검무 등이 있다.
대흥사 감로탱화에는 사당이 소고를 든 거사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사당패의 연행 형태는 이능화의 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남자가 손에 소고(小鼓)를 잡고 무대 위에 벌려서고 여자가 마주 서서 먼저 노래를 받는다. 시속(時俗)의 잡가(雜歌)를 꺼내면 남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서 그 노래를 받는다. 먼저 하기도 하고, 뒤에 하기도 하며, 소고를 두드리기도 하고, 노래를 하기도 한다.(이능화 《조선해어화사》)

19세기에 이르러 계속된 조선조의 억불정책과 가뭄 및 흉년 등으로 사찰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사당패는 한 사찰에 지속적으로 머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으로 걸식하게 되었다. 민가를 유랑하던 이들은 대중의 오락적 요구에 부응하여 불교의 염불은 잊고 주로 세속의 잡가와 기예를 공연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생존을 위해 매창(賣娼)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 사찰은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이들 집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집단을 찾게 되었는데, 굿중패, 절걸립패 등이 기존의 사당패 역할을 대신하여 시주를 걷는 일을 하게 되었다.

사당패의 판염불은 선소리패, 산타령패, 놀량패 등으로 불리는 연희패에 의해 발달되어 산타령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이른다. 현전하는 선소리 산타령은 경기 선소리 산타령, 서도 선소리 산타령의 두 갈래가 있다.
경기 선소리 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도 선소리 산타령은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타령의 전신인 사당패의 판염불은 불가어(佛家語)로 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전하는 경^서도 선소리 산타령은 그 사설에 있어서 불교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연행 집단이 전이되고 기능이 변하는 과정에서 음악 또한 변화하여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속화되기 전의 산타령 모습은 1915년에 간행된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판염불, 압산타령, 뒤산타령, 자진산타령’의 사설을 싣고 있는데, 이 사설들은 현행 경기 선소리 산타령으로 계승되고 있다.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의 판염불 사설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판염불

※진군명산 만즁봉에 쳥쳔삭츌금부용
음도로음도로시볍이라 무어바에 동라
안산이라 쥬산이라 좌우라 도졍용 무바 무라도바 무바
츙쳥도라 포산에 두루두루 량님 와계신
막걸니 여달동의 걸녀스니 시거말거 무라도바 무바
일세동방에 졀도령 이셰남방에 득쳥룡 삼셰셔방에 부졍토 셰북방에 영안강
도령쳥졍에 무화례 삼보쳘영에 강자
아금지송에 묘진언 나무라셔바 무바
※산쳔초목이 여셩님어나에 구경가기에좃코 에에헷여 네로구나
에에에헤야에헷여 네헤에야 어어듸이이이이얼 네로구나
말은네에야 어이이놈 말드러보라 [후략]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1915) 중에서

위의 판염불 사설을 보면 “진군명산~아금지송에 묘진언 나무라셔바 무바”까지는 불가어로 되어 있고, “산쳔초목이~”부터는 세속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산쳔초목이~”부터가 현행 경기 선소리 산타령 중 놀량에 해당한다. 즉, 사당패소리 판염불에서 불가어로 된 전반부 사설이 누락되고 입타령이 확대되었으며, 후반부의 사랑 관련 사설은 모두 산천경개와 관련된 사설로 대체되면서 현행 경기 선소리 산타령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이렇듯 선소리 산타령의 연원은 본래 재가불교 집단인 사당패에 두고 있지만, 그 음악과 내용이 세속화되면서 세속의 소리꾼들에 의해 성창되었고 오늘날 민속음악의 한 갈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남도지방의 〈보렴〉과 〈화초사거리〉는 선소리라는 점에서 선소리 산타령과 비교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경^서도의 선소리 산타령처럼 산천경개를 노래한 것이 아니어서 산타령이라는 명칭은 쓰이지 않는다. 그 발생에 있어서는 남도지역의 소리꾼들이 사당패소리를 듣고 따라 부르다가 형성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화초사거리〉의 경우 그 사설이 불가와 전혀 무관하나, 〈보렴(報念)〉의 경우 제목이 보시염불(報施念佛)의 줄임말에서 온 것이며 가사 또한 불가어로 되어 있어 주목된다.

보렴

상래소수 공덕해요 회향삼처 실원만을
봉위 주상전하 수만세요 왕비전하 수제년을
세자전하 수천주요 선왕선후 원왕생
제궁 종실 각 안녕 문무백료 진충량 도내방백 위익고
성주합하 증일품 국태민안에 법륜전이라
나무천룡 지신님네
동방화류 서방화류 북방화류 남방화류야 오름이야 도름이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가 보살
무상심심 미묘법 백천만겁 난조우
여래법정 진언 옴바라니 대다라니 게청계수
관음보살 석가여래 문수보살 지장보살
옴바라니 옴바라요 옴바라니 옴바라요 [후략]

〈보렴〉의 앞부분에서는 절에서 재를 지낼 때 범패승이 부르는 상단축원화청의 사설과 유사한 가사를 중모리장단으로 부른다. 이어서 왕과 왕비, 문무백관과 도방백(道方伯)들을 축원하고, 늦은중중모리장단으로 시주자들을 축원하는 염불을 한 다음, 자진중중모리장단으로 《천수경》의 일부분을 부르고 마친다. 이렇듯 〈보렴〉은 그 내용에 있어 불교와 관련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재가불교 집단으로서 불가와 관련된 음악을 연행했던 사당패와의 연관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2) 서도민요 산염불(긴염불)^자진염불

통속민요로 분류되는 서도민요의 〈산염불〉과 〈자진염불〉은 황해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곡으로 그 곡명에 ‘염불’이라는 용어가 들어가 있고, 후렴구가 “∼아미타불이로다”로 끝난다는 점에서 일견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염불〉의 경우 후렴을 제외한 사설과 음악적 특징은 불교음악과 크게 관련이 없고, 〈자진염불〉만이 그 사설에서 불교적인 요소를 비교적 많이 작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산염불〉의 연원에 대해서 선소리 보유자 황용주는 “산염불은 평안도^황해도 지방에서 굿에 쓰이는 염불이 소리꾼들의 입으로 옮겨지면서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명곡으로 발전되었다”고 하며, “불가의 화청제(和請制)가 민간인 음악으로 전래된 곡”이라고 하였다. 한편 최근에 음악학자 손인애는 개성 산염불과 사당패 산염불의 관계를 밝히며 산염불의 연원이 사당패소리에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사설에 불교와 관계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산염불〉과 〈자진염불〉에 끼친 불교의 영향은 간과될 수 없다. 나아가 향후 산염불과 사당패소리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밝혀진다면, 산염불^자진염불 또한 선소리 산타령처럼 재가불교 집단에 의해 탄생하여 민간에 정착한 민속음악의 한 장르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산염불(긴염불)

[후렴] 아하에 에헤에 에헤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로다
① 북망산천(北邙山川)아 말 물어 보자
영웅호걸 죽은 무덤 몇몇이나 되며
절대가인 죽은 무덤 몇일러냐
② 서산낙조(西山落照) 떨어지는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돋건마는 황천길은
얼마나 먼지 한번 가면은 영절(永絶)이라
③ 오동 복판 거문고에 새줄 얹어 타노라니
백학이 제 지음(知音)하고 우줄우줄 춤을 춘다
[후략]

자진염불

[후렴] 에 헤에 헤여 아미타불(阿彌陀佛)
① 긴염불도 좋거니와 자진염불로 넘어간다
② 석가여래가 원불(願佛)인데, 칼산지옥(刀山地獄)만 면합소사
③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백팔염주를 목에다가 걸고 극락세계로 들어간다
[후략]

3) 경기민요 회심곡

불가(佛家)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그 테두리를 벗어나 민간에서 더욱 성행하게 된 대표적인 곡목 중 하나가 경기민요 〈회심곡〉이다.

경기민요 회심곡

일심정념(一心情念)은 극락세계라 나무아미타불
천지지시 분한 후에 삼남화성 일어나서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에서 또 있는가
이 보시오 시주님네 이 내 말씀 들어보오
이 세상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었나
불보살님 은덕으로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타고 칠성님께 명을 빌어
제석님께 복을 타고 석가여래 제도하사
인생일신 탄생하니 한 두 살에 철을 몰라
부모은공 아올소냐 이삼십을 당하여는
애윽하고 고생살이 부모은공 갚을 소냐
절통하고 애달플사 부모은덕 못다 갚아
무정세월 약유파라 원수백발 달려드니
인간 칠십 고래희라 없던 망녕 절로 난다 [후략]

본디 불교에서 〈회심곡〉은 화청의 일종으로 절 안에서 범패승이 부를 때는 4^4조 율격의 불교 가사를 엇모리장단과 같은 일정한 장단에 맞춰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편 이 〈회심곡〉은 굿중패, 절걸립패, 탁발승 등에 의해 음악적 어법을 조금 달리하여 절 밖에서도 연행되었는데 이를 따로 염불회심곡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이 염불회심곡을 경^서도 명창들이 받아들여 세속화시켜 부른 것이 소릿조 회심곡, 즉 경기민요 회심곡이다. 경기민요 〈회심곡〉의 경우, 그 사설의 기본 골격은 염불회심곡과 같으나, 음역을 더욱 넓게 쓰고 화려한 목의 기교를 쓰는 등 음악적인 변화에 치중하고 있다.

이렇게 절 안에서 불교음악의 한 곡으로 연행되었던 〈회심곡〉(이를 따로 화청회심곡이라 일컫기도 한다)이 절 밖에서 연행되면서 세속화하고 민속음악의 레퍼토리로 자리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 시작은 사당패가 불교적 역할을 상실하고 쇠퇴하던 시점에 있다.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사당패가 날로 쇠퇴하면서 이들의 시주로 운영해왔던 사찰의 재정은 기울어 갔고, 이에 가무의 기능을 가진 승려가 무리를 이루어 민간에 나가 시주를 걷게 되었다. 이렇게 시주를 걷기 위해 모인 가무에 능한 승려들의 무리를 굿중패라 한다.

조선 승가에는 예로부터 하나의 행화지법이 전해 내려온다. 만약 어느 사찰이 화재로 다 타버려 새로 세우려 하면, 그때 여러 명의 승려−일정하지는 않지만 많게는 오륙십 명까지−를 모아 하나의 무리를 만드는데, 이를 건립(建立)이라 부른다. 또 군중파(群衆派), 금고(金鼓)라고 부르는데, 이는 북을 치며 나아가고 종을 치며 물러나는 것이 마치 군법(軍法)과 같기 때문이다. 무용을 잘하는 자, 법고를 잘 두드리는 자, 바라를 잘 울리는 자, 희학(戱謔)을 잘하는 자, 잘 기록하는 자가 각각 명목이 있어 화주, 고수, 포수, 화동, 무동 등으로 불려지며,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닌다. 사찰에서도 모연(募緣)을 할 때는 명망 있는 스님들도 모두 기꺼이 건립을 했다. 예를 들면 금강산의 우은화상(遇隱和尙) 퇴운선사(退雲禪師)같은 분도 일찍이 화동을 했었다. 이러한 법이 언제부터 나왔는지(서산 사명의 승군 이후에 나오지 않았을까 의심된다)는 모르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모두 폐지하였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 和請舞鼓新式廢止)

위의 글에서 군중파(群衆派)는 굿중패를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굿중패는 다양한 기예로써 건립에 나섰지만 이 또한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 쇠퇴하고 만다.

사당패와 굿중패가 쇠퇴하자 불교 사찰에서는 사찰 운영 자금을 충당할 방법이 막히게 되었다. 이에 사찰에서는 자구책으로 낭걸립패를 고용하여 시주를 걷었다. 낭걸립패는 걸립패의 한 갈래인데, 걸립패는 본래 대동굿 돌돌이 등의 무속걸립에서 나온 것으로 창우집단(倡優集團)의 걸립패가 성행하면서 민간에서 이를 모방하여 조직한 집단이다. 사찰에 고용되어 불사를 하는 낭걸립패는 다른 걸립패와 변별하기 위해 따로 절걸립패라 일컬어졌다. 이 절걸립패 또한 사당패처럼 재가불교 집단의 성격을 갖는다.

절걸립패는 반드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의 신표(信標, 일명 ‘문서’라 한다)를 받아 불사를 행하였다. 절걸립패는 건립을 할 때 고사염불을 하였는데, 고사염불은 고사선염불과 뒷염불로 구성된다. 이 중 고사선염불은 창우집단의 고사소리를 전용한 것이나, 뒷염불은 창우집단의 뒷소리를 따르지 않고 절걸립패가 독자적으로 만든 소리이다.

절걸립패의 뒷염불에는 평염불, 덕담, 반멕이, 오조염불 등이 있다. 이 중 평염불은 탁발승들이 탁발하며 부르게 되면서 근래에는 탁발염불의 대표적인 곡이 되었다. 탁발승은 시주 받을 집 문 앞에 가면 흔히 평염불을 불렀다. 이에 집주인은 돈이나 곡식으로 시주를 하거나 탁발승을 안으로 들여 고사를 청했다. 그러면 탁발승은 고사반(告祀飯)을 마당이나 대청마루 위에 차린 후 고사선염불(告祀先念佛, 또는 고사덕담(告祀德談))과 뒷염불(또는 덕담)을 불렀다.

탁발승에 의해 성창된 평염불의 사설 내용을 보면, 평조 부분이라 일컬어지는 전반과 부모은중경으로 된 후반으로 나뉘어 있다.

평염불

[전반] 일심정념은 극락세계라
나무아미타불……
[후반] 법화경은 아버님경
은중경은 어머님경
형님동생 애중경을 마련할 때
아버님께서는 뼈를 빌구
어머님께 살을 빌어 [후략]

바로 이 평염불에서 염불회심곡이 나왔으며 이것을 경^서도 명창들이 수용하여 성창한 것이 현행 경기민요 〈회심곡〉이다.

불가에 뿌리를 둔 〈회심곡〉은 불교의례음악(화청회심곡)에서 탁발음악(염불회심곡)으로, 그리고 다시 세속음악(경기민요 회심곡)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또한 기층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민요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었는데, 민요 중 상엿소리에서는 〈회심곡〉을 차용한 대목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진도 상엿소리 중 관 운반소리인 ‘가난님 보살’소리

가난보살로 길을 닦아 생왕극락을 인도를 하세
악취무명원 쉬어가고 성취숙명원 쉬어를 가고
사십팔원에 쉬어가고 무타악도원 쉬어가고
가다 가다 저물어지믄
요내 염불로 길을 닦아 왕생극락을 인도하고
왕생이 머다는데 몇 달 걸어 극락을 가면 몇 날 걸어 극락을 갈거나
여보시오 시주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누 덕으로 나왔는가
석가여래 공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빌고 어머님전 살을 빌어
이내 일신 탄생하야 한두살에 철을 몰라 부모 은공을 못 갚으고
이삼십이 근근해도 어이없고 애닯구나
무정한 세월은 유수같이 원수백발이 돌아왔네 [후략]

탁발승이 〈회심곡〉을 부르며 탁발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부정적 소견을 보이기도 했다. 다음은 탁발승에 대한 이능화의 글이다.

조선에는 예로부터 양식을 비는 중이 있었는데, 이를 동냥승이라 한다. (중략) 동냥이라 함은 중이 사람들에게 보시를 권하여 불사(佛事)를 운영하고 만드는 것을 말한다. 조선의 동냥승 중에는 목탁을 치며 여러 번 천수주(千手呪)를 외우는 자가 있다. 수행하는 중도 또한 그것을 한다. 그리고 꽹과리를 치며 회심곡(송운대사 지음)을 부르는 자도 있는데, 오직 신세가 가난하고 도력 또한 보잘 것 없는 이들이나 하는 것이다. 이들을 속칭 땡땡이중이라 하였는데, 꽹과리의 소리를 본떠 이름한 것이다. 이 또한 신라 대안대사(大安大師)의 유풍이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 分衛托鉢公 携帶)

탁발승이 〈회심곡〉을 부르는 것에 대해 “오직 신세가 가난하고 도력 또한 보잘것없는 이들”이 하는 짓이라 설명하며 이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범패승 또한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65호 《화청》(문화재관리국, 1969)에 기록된 장벽응, 박송암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화청은 소위 동냥승들로 말미암아 나쁜 인상을 받아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스님들로서는 그것을 부르기를 피한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화청은 염불회심곡과 같은 탁발염불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산재와 같은 장엄한 불교의례의 주재자인 범패승들은 절 안에서 연행되던 불교음악을 관장하였기 때문에, 절 밖에서 탁발승, 절걸립패 등에 의해 연행되던 세속적인 불교음악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세속의 음악을 차용하여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다는 점에서 탁발승과 절걸립패의 이러한 행위는 〈무애가〉를 통해 민중을 포교하고자 했던 원효 대사의 족적에 비견될 수 있다고 본다. 세속적인 음악어법으로 포교를 했다고 해서 불교의 정통성과 권위에 손상을 입혔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간 정서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세속적인 음악 어법을 이용한 포교는 종교적인 신성한 영역에 대한 왜곡이나 침해가 아니라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본질의 발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맺는 말

민속음악 도처에 산재한 불교 용어와 짙은 불교적 색채는 불교가 민중 생활의 기층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적 관점에서 민속음악을 살펴보면, 민속음악은 불교적 요소를 차용한 것에서부터 불교 또는 재가불교 집단의 영향 아래 생성되어 발전한 것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불교적 요소가 가미된 민속음악의 바탕에는 불교의 내세관과 미타신앙, 관음신앙이 짙게 깔려 있다. 대중 지향적인 불교, 염불신앙 중심적 불교의 모습이 이러한 민속음악에 투영되어 나타난다.

불교 또는 재가불교 집단의 영향 아래 생성되었으나 세속적인 음악어법으로 변화하며 나타난 민속음악은, 그 발생에서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다. 억불숭유 정책을 일관하였던 조선시대에 사찰은 재정 유지를 위해 사당패, 굿중패, 절걸립패 등의 유랑예인 집단과 전략적으로 제휴하였다.

특정 사찰과 관계를 맺은 유랑예인 집단은 민간에 나가 염불을 하며 회중을 축원하고 그들의 기예를 팔아 시주를 걷어 해당 사찰에 바쳤다. 이렇게 재가자의 신분이나 사찰과 관계를 맺고 불사를 했던 유랑예인 집단은 재가불교 집단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재가불교 집단이 불사(佛事)를 행하는 과정에서 연행한 곡목들은 이후 민간으로 흘러들어 가 세속화되면서 민속음악의 한 장르 또는 악곡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절 안에서 범패승에 의해 연행되던 화청류의 〈회심곡〉은 탁발승, 절걸립패 등에 의해 그 연행 공간이 절 밖으로 옮겨지면서 염불회심곡이라는 탁발음악을 파생하였고, 이것은 다시 세속의 전문소리꾼인 경^서도 창자들의 공연 레퍼토리로 흡수되면서 경기민요 〈회심곡〉으로 재창조되었다.

불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민속음악이든, 재가불교 집단에 의해 불교문화의 토양 위에 새롭게 생성된 민속음악이든 양자는 모두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와 관계하여 음악을 연행하던 집단은 대중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사와 음악으로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세속의 음악어법을 차용하기도 하였기에 일부 불교계에서는 이를 두고 세속적이며 종교적 신성함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배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불교에 뿌리를 둔 민속음악의 현존은 불교가 민중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던 노력의 반증이라 할 수 있으며, 아울러 민속음악은 불교가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되었다. 당대의 민중과 함께 숨 쉬고자 한 불교의 음악, 그리하여 민중 속에 녹아든 불교음악의 족적을 우리는 민속음악을 통해 찾아볼 수가 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보존하고 전승하고자 하는 민속음악은, 그것이 민중 속에서 연행되고 향유되었던 시대에는 당대의 대중음악이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대중음악에 어떻게 불교의 숨결을 담을 것인가?

사찰 안의 불교음악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한 고민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제 사찰 밖으로 나와 대중과 함께 호흡하기 위한 오늘날의 불교음악에 대해 고민을 할 때이다. ■

 

임란경 / 한국음악학자. 국립국악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가야금 전공), 동 대학원 음악과(국악이론 전공) 졸업(석사). 서울대학교 협동과정음악학(한국음악학 전공) 박사과정 수료. 〈불교 경전 독송에 관한 음악적 고찰〉(석사학위논문), 〈유성기 음반에 수록된 불교 독경 연구〉 〈천수바라의 선율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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