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이 수행 현장, 소외된 이웃이 공덕의 숲

상구보리 하화중생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 대승불교의 꽃은 ‘보살(菩薩)’이다. 보살은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음차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인데,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원래는 정각을 얻기 이전의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대승불교로 접어들면서 ‘자타일시 성불도’를 추구하는 모든 수행자를 보살이라 했다. 보살도의 슬로건이라 할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대승불교의 지향이면서 보살이 존재하는 이유다. 말하자면, 깨달음과 실천을 통한 참세상의 구현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보현, 문수, 지장, 관음 등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지는 ‘보살님’들도 많지만, 절에 다니는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 부른다. 남을 위한 좋은 일, 이타행(利他行)을 하는 사람에게도 보살이라 존칭한다. 심지어 무속(巫俗)을 하는 여자들도 ‘△△보살’이란 간판을 내건다. 어떤 단어가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다양하게 쓰인다는 것은 그 본래의 가치가 상당한 보편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불교 정신을 가장 첨예하게 표방하는 보살이라는 개념은 복지사회를 추구하는 현대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세상이 고통스러울수록 이상향을 향한 열망이 강한 법이고, 극락정토와 용화세계 등의 피안(彼岸)을 건너다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안이 바로 보살의 존재였으니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곁에는 많은 보살이 존재한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의미의 보살인지 일일이 풀어헤쳐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살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운전하는 ‘기사보살’이 없다면 출근길은 난리 통이 될 것이다. 땀 흘려 농사짓는 ‘농부보살’이 없다면 우리의 밥상은 무엇으로 차릴 것인가? 길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보살’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지저분해지겠는가? 대승불교는 자신의 행동을 보살행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권유하고 있고, 보살을 보살로 보는 ‘눈’을 뜨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제도에 나서라는 지침이고 남과 더불어 부처를 이룬다는 목표설정인 것이다. 여기에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의 차별은 없다.

돌아보면 이렇게 많은 보살들이 세상을 이루어 가니 우리 사는 세상은 보살의 세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토록 험악하고 정떨어지는 일이 많은가? 경전은 보살의 수만큼이나 많은 중생이 있고 중생마다 번뇌가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격랑’의 한국불교 현대사

태공당 월주(太空堂 月珠) 스님을 이야기할 때 ‘보살행’이라는 단어를 제외한다면 그 이야기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현대사와 그 안의 조계종을 빼놓아도 월주 스님의 생애는 이야기될 수 없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현대사는 격랑(激浪) 그 자체였다. 왜색불교의 청산을 둘러싸고 불거진 소위 ‘불교정화(佛敎淨化)’는 1954년에 시작되어 1970년 태고종이 별도의 종단을 등록할 때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진행된 내적 갈등이었다. 이 기간에 발아한 많은 문제들이 한국불교의 현대사에 다양한 폐해로 드러났고 그 뿌리는 아직도 다 고사(枯死)시키지 못했다.

조계종 입장에서의 ‘정화’와 태고종 입장에서의 ‘법난(法難)’ 그 간격에 뿌리내린 악습들을 다 제거하기도 전에 1980년 신군부에 의한 ‘법난’이 일어났다.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봄’을 잃어버린 시점에 ‘조계종의 봄’도 군홧발에 짓밟혔던 것이다. 1994년 개혁종단이 들어섰고 많은 것이 변했다. 제도 개선을 통해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치유하면서 세상을 향해 눈길을 돌려 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불교로 변모했다. 그런 가운데 또다시 종권을 둘러싼 갈등이 표출됐고(1998년과 1999년), 세상에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들을 지나치게 많이 보여주기도 했다.

그 격랑 속에 월주 스님이 있었다. 조계종도라면 누구도 그 격랑에서 열외일 수는 없었겠지만, 월주 스님의 ‘위치’는 언제나 중심이었다. 갓 출가한 1954년 이후 ‘불교정화’의 중심에서 선배 혹은 스승을 모시고 동분서주했고, 1960년대 통합종단 이후에는 종단 행정의 가닥을 잡아가는 종무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또 1980년 법난 때는 조계종 총무원장이었으므로 중심 중의 중심이었고, 1994년 개혁종단에서 다시 총무원장에 당선되어 종단 개혁과 세상을 향해 손 내미는 조계종을 지휘했다. 1998년에는 뜻하지 않게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출마가 2선이냐 3선이냐를 둘러싸고 불거진 시비가 종단분규의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이에 월주 스님은 용기 있게 ‘재선 후보’를 사퇴하여 종단분규를 종식시키고 세계의 중생을 향해 눈길을 돌려 국제사회에 보살행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

1935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해 20대 중반 법주사에서 금오(金烏, 1896~1968) 스님의 문하로 출가한 월주 스님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조계종 스님으로 살아왔고 종단 안팎으로 ‘누구보다 많은 직책’을 맡아왔다. 누구보다 많은 직책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월주 스님의 삶이 그만큼 광범위하고 다양한 일들로 점철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다. 물론 그 많은 일들이 ‘보살행’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살도가 어떤 것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준 ‘말 없는 법문’이기도 하다.

천(千)의 손과 천(千)의 눈으로

삼계는 우물의 두레박처럼 돌고 도니
백천만겁 많은 세월을 겪은 티끌이로다.
이제 이 몸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월주 스님은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이 무상송에 이끌려 출가했다. 서울 조계사에서 승복을 입고 있는 고향 친구[혜정 스님]를 만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 친구를 만나러 법주사로 갔다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좋아서 발심했고, 그 친구가 들려준 무상송이 그 발심에 힘을 실었다. 그러니까 월주 스님의 출가는 금생에 이 몸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상구보리에 대한 열망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망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호랑이 스승 아래 큰 뜻을 품은 사형들 사이에서 열심히 수행했다. 부모의 정을 뿌리치고 나선 길이기에 목숨을 걸고 공부했다. 은사가 준 화두는 ‘이뭐꼬’였다. 20대 후반 한때 건강이 나빠 잠을 청하기도 어려운 때가 있었다. 백약이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화두삼매에 빠졌고, 그 순간 병이 사라지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면서 나의 수행 근기(根氣)는 참선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선 위주로 수행하기에는 내 몸이 체질적으로 약한 데다 정화운동 중 은사를 도와 여러 소임을 맡아 사찰 내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개인적 수행뿐 아니라 종단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원력(願力)도 더 강해졌다.

월주 스님이 2011년 11월 〈동아일보〉에 기고한 회고록 일부다. 산중의 선방에서 수행하는 것만 수행일 수 없다는 자각이 보살행을 통한 자기와 세상을 구원하려는 원력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진술하고 있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이 고답적인 질문에 골머리를 싸맬 필요가 없다. 자신을 바루어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보살도에 충실하기! ‘다른 사람들을 돕는 보살행’으로 수행의 가닥을 잡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세상이 원하는 수행자는 앉아서 참선만 하는 ‘구들장 도사’가 아니라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천촌만락을 누비는 ‘원효’이기 때문이다.

월주 스님은 비교적 일찍 자신의 길을 본 것이다. 20대 중반에 ‘상구보리’에 대한 열망으로 출가를 했지만, 20대 후반에 ‘하화중생’의 실천이 절실함을 깨달았다는 회고록의 진술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보통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위에 있고 중생은 아래에 있다는 말인가? 일체중생의 고난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의 길에 상(上)과 하(下)의 구별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의심을 낳을 만하다. 위와 아래라는 공간 개념이든 먼저와 나중의 시간 개념이든 상대적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참된 보살의 길은 아닐 것이다.

부모의 연까지 애써 외면한 출가자가 어찌 깨달음에 목마르지 않을까. 그러나 60년 가까운 승가 생활에서 얻은 것은 ‘깨달음과 이를 실천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이다.

월주 스님이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회고록을 마무리하며 내놓은 ‘결론’이다. 이 글이 지면에 소개된 것이 2012년 1월 13일이니 최근의 술회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결론 앞에서는 상하와 선후를 따질 겨를도 의미도 없다. 금생에 이 몸을 제도하는 것은 금생에 이 몸으로 무한한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보살행은 남을 제도하는 동시에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다.

월주 스님의 보살행은 범위가 넓다. 국내의 활동도 다양하지만 국외 활동의 결실도 한국불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지만 그간의 성과를 일별해 보자.

월주 스님의 해외 보살행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사단법인 지구촌공생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선구적이고 큰 성과를 낸 분야가 우물 파주기다. 2003년 이후 지금까지 물이 귀한 캄보디아의 오지 마을을 찾아다니며 1,660여 개의 우물을 파주었다. 몽골, 케냐, 라오스, 네팔, 스리랑카, 미얀마 등의 국가에서도 대형우물을 파거나 급수시설을 준공해 목마른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었고 유치원, 초등학교, 도서관, 청소년센터 설립 등 각종 교육시설도 지원했다.

국내에서의 보살행은 앞에 언급한 ‘누구보다 많은 직책’이 잘 대변한다. 1998년 IMF 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성장일로를 달리던 한국경제가 외환위기라는 파도에 쓸려 혼비백산했다.

당시 월주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다. 불교계의 얼굴이었던 셈이다. 1994년 개혁종단 출범과 더불어 총무원장에 당선된 월주 스님은 조계종의 업무력을 총동원해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매우 폭넓게 펼쳐 나갔다. 세상을 향해 손 내미는 불교를 실현하고자 했다가 1980년 10^27 법난으로 좌초되었던 원력을 활기차게 실현하던 참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불교계의 얼굴인 월주 스님은 천주교의 얼굴인 김수환 추기경과 개신교계의 얼굴인 강원룡 목사와 더불어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민간이 주도하는 최대 규모의 실업대책 기구였다. 이 위원회는 당시 1,150억 원의 성금을 조성해 230여만 명의 실직자와 그 가정을 도왔다. 이후 위원회를 (재)실업극복국민재단 함께일하는사회라는 법인체로 등록했고 현재는 (재)함께일하는재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실업환경에 대응하는 각종 연구와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의 결성을 통한 대북 지원, 나눔의 집 건립을 통한 종군위안부 문제 제기와 피해 할머니들의 주거 제공, 공해추방운동 불교인 모임 결성,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등에서도 월주 스님은 독보적인 활동을 보였다. 왜 이렇게 다각적인 분야에서 활동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월주 스님은 언제나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나만 성불하자고 산에 앉아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참다운 보살도를 실천하는 보현행원이다.

보현보살은 10대 원을 근간으로 하고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표상한다.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을 굽어살피고 지장보살은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중생구제를 하겠다고 서원했다. 모든 보살은 서원을 세우고 시공을 초월해 그 실천에 나선다. 모든 보살은 이미 깨달음을 완성한 상태에서 그 깨달음을 중생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중생계를 불국토로 장엄한다. 그래서 산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내려와 우물을 파고, 학교와 도서관을 짓고, 실업자를 격려하며 새 일을 찾아주어야 한다.

월주 스님의 길은 늘 새롭게 개척하는 길이었다. 이미 있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적절한 단체를 만들어 효과적인 활동을 한 것이 월주 스님이 펼쳐 온 불교 안팎의 일들이 갖는 공통점이다. 특히 이웃 종교 지도자들과 연대한 각종 사회계몽 운동은 다종교 사회에 오래 남을 ‘기념비’다.
각각의 보살이 각각의 서원을 세우는 것을 별원(別願)이라 하는데, 월주 스님에게도 많은 별원이 있어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그 일들의 결과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의 손과 천의 눈을 갖지 않고서는 세상의 구석진 곳을 샅샅이 살피는 지혜와 자비도 얻기 어려운 것임을 알게 한다. 월주 스님의 많은 별원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었음에도 그 빛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 것이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다.

‘깨달음의 사회화’ 다시 점화할 수 없나?

세상은 이제 사람의 손바닥 안에 들어 있다. 아무리 도술을 부려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던 손오공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스마트폰 시대’의 신세대는 손바닥 안의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부모나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통신과 교통수단의 변화는 삶의 질을 아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아울러 인과의 그물코도 점점 촘촘하게 분화되고 있다. 생활의 전반에 가속(加速)이 붙는 것도 막을 길 없다. 이것을 발전이라고 보는 데 이견은 없겠지만, 이 발전이 가져다주는 행복지수는 과연 얼마나 상향될까?

성범죄가 그칠 날이 없고, 학교는 폭력의 도가니가 되었다. 저출산 현상은 이미 국가적인 고민이 된 지 오래이고 공교육의 붕괴는 누구도 정답을 내놓지 못하는 지경이다. 이혼율의 급증과 고령화 사회의 본격화,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국민을 외면하는 오만과 불손, 정경유착의 오랜 관행, 인터넷의 부정성 등등. 법과 제도, 정서와 문화 등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사회 환경의 변화는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낼 뿐, 인간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과는 별개의 흐름이다. 여기에 ‘깨달음의 사회화(이하 깨사)’라는 구호를 다시 외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깨사는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고 자타일시성불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그 진리를 중생을 위해 설파했듯이, 불교계의 선지식들이 펼쳐 보인 깨달음의 내용들을 우리 사회에 실천적으로 적용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월주 스님이 1995년부터 개혁종단을 무대로 연출했던 깨사는 나와 이웃과 사회와 자연은 하나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중생계의 일체화로 승화되는 자비실천 운동이었다. 불교계 내부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대사회적인 보살도 실천이 핵심이었는데, 1998년 분규를 지내고 몇 차례 종권이 바뀌면서 낡은 구호로 묻혀 버렸다. 깨사의 정신은 월주 스님이 60여 년 승가에 몸담아 이판과 사판을 넘나들며 온몸으로 체득한 영골(靈骨)이다. 앞에서 살펴본 많은 월주 스님의 일들은 모두 깨사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필자는 깨사 운동이 한창이던 즈음에 현장을 뛰는 취재기자였고 조계종 총무원이 출입처였다. 그 당시의 신선한 프로그램들과 그 활기찬 추진이 기억의 저편에서 아물거린다.

권력의 이동과 상관없이 조계종이 세상을 향해 펼칠 수 있는 최선의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깨사일 것이다. 그래서 문득 자문(自問)해 본다. 세상을 손바닥 안에 넣고 사는 이 시대, 깨사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다시 세상을 치유하고 사람을 어루만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10^27 법난, 정리되지 않은 불행

월주 스님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테마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1980년 신군부의 불교탄압, 10^27법난이다.

당시 월주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다. 그 직책에 합당한 어떤 예우도 없이 남산으로 끌려가 43일 동안 조사받았다. 조사라야 별것이 아니었다. 했던 질문의 반복이고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의 냄새를 풍길 뿐이었다. 결국 취임 7개월여 만에 총무원장직을 내놓고 향후 2년간 어떤 직책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풀려났지만, 그 상황은 월주 스님 개인의 고통일 뿐 아니라 조계종 전체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었다.

10^27 법난은 쉽게 아물지 못할 조계종의 생채기다. 법난의 주체는 외부에서 오고 피해 당사자는 내부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외풍이 불기 전에 안쪽의 바람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뒷말이 무성하다. 10^27의 바람은 분명 외부에 진원지를 두고 있다. 국무총리의 사과가 있었고 지금은 피해보상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정리되지 않은 불행이라 할 10^27 법난은 월주 스님의 수행 역정에서도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남산’에서 조건부로 풀려난 뒤, 1982년 11월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가서 1985년 5월까지 200여 회의 초청 법회에서 법문하며 새로운 눈을 떴다. 또 이 기간 동안의 유럽 8개국과 인도를 포함한 동남아 10여 개 나라 성지순례와 여행도 세상을 보는 눈을 확대시켜 주었다. 그리고 1994년 개혁종단에서 14년 만에 총무원장에 복귀했다. 이러한 역정은 월주 스님의 입장에서 당시에는 신산(辛酸)한 시간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의 소외 지역을 살펴보는 안목을 키웠으니 반면교사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계종만 바라보던 눈이 미주와 유럽, 동남아 여러 나라로 시야를 넓혔기에 깨사의 추진이 가능했고 1998년 이후 불교계 NGO 활동의 선봉에 서는 바탕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법난이 긍정적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시현된 현실을 가장 불교적으로 받아들이고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동력을 부여해 내는 안목과 추진력이다. 닥쳐온 불행도 행복의 밑거름으로 만드는 지혜 말이다. 이 점에서 월주 스님의 행보는 탁월했고 성공적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원력의 거울 앞에서

사람들은 한 수행자의 삶을 평가할 때 ‘도력(道力)이 얼마나 되느냐’를 이야기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불성설이다. 도력을 어떻게 측정하겠는가? 그 이전에 도력이란 도대체 어떻게 드러나는 것인가? 수행자의 삶에서 도력을 추출해 얘깃거리를 만드는 사람은 신비주의에 휘말려 결과만 바라보는 소인배일 것이다.

수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도력이 아니라 원력이다. 제불보살의 총원(總願)인 사홍서원과 각각의 보살들이 세운 별원은 중생계에 뜨는 아침 해다. 어느 원력이든 그 끝점은 중생계를 향해 있고, 무한의 노력과 각고의 정진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월주 스님의 원력 또한 지구촌 곳곳을 향해 있다. 여전히 천의 손이고 천의 눈이다. 그 원력은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할지라도 다함이 없다’는 보현보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오늘도 내일도 오지마을에 더 많은 우물을 파게 하고 더 많은 도서관을 만들게 할 것이다. 월주 스님에게 수행 현장은 지구촌 곳곳이고 소외된 사람들은 공덕의 숲이다.

정토는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계가 정토다. 보라, 지구촌의 구석구석을 수행 현장으로 삼은 월주 스님의 공덕이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으로 세상을 장엄하고 있지 않은가? ■

 

임연태 
시인^(사)백산생명환경포럼 사무국장. 경북 영주 출생. 대전대 국문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2004년 《유심》으로 시인 등단. 현대불교신문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역임. 시집 《청동물고기》와 기행집 《부도밭 기행》 《사찰기행》 《히말라야 행선 트레킹》 르뽀집 《철조망에 걸린 희망》 등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