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명 교수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선해야 할 과제를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두 가지 기본 문제가 있다. 한 쪽에서는 너무 신비화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이 너무 신비화되고 다가가기 어려우니까 일반 대중은 건전하고 합리적인 신앙생활을 못하고 그저 복 비는 데 매달린다.

한국 선불교는 그들끼리의 잔치일 뿐 대중을 끌어들이기에는 너무 어렵고 신비롭다. 대중과 일상 생활인에게 맞는 수행과 신앙 생활을 개발해야 한다. 절에서 시행하는 합격기원 예배 같은 것이 일단 대중의 신앙(?)생활에서 주를 이룬다. 점집에 드나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당을 보살이라 부르고 점집이 절과 흡사한 모양인 것도 다 까닭이 있으리라. 이를 벗어나 생활인 신도들이 합리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불교가 덜 신비화 될수록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건전한 신앙 생활을 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 본다.

2) 불교 교리를 더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한다. 새 교리를 만들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있는 교리들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님들도 이런저런 지식들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불교 교양서, 입문서들을 읽어보아도 아주 근본적인 연기법, 4성제 등을 제외하면 다 주먹구구식으로 자기 입맛대로 소개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각 교리 내용의 차원들(큰 묶음인지 더 세부적인 작은 묶음인지 등등)이 합리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소개 내용들의 중요도 역시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분류되지 않는다. 쓰는 사람 입맛대로 어떤 건 너무 간단하고, 어떤 건 아예 빠져 있고, 어떤 건 지나치게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체계적이고 간단명료한 정리란 좀 자세한 백과사전에 실을 만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러려면 핵심 요체를 가려내야 한다. 마치 한국사 교과서를 쓰는 데 핵심 요체만 서술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작업이 매우 부족하다. 그래서 새로 입문하려는 사람들은 좋은 교과서를 못 만나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좀 나쁘게 말하면, 스님들이나 전공자들은 이렇게 초보자가 헤매는 걸 원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자기들의 존재가 중요해지니까... 그러나 제대로 된 한글 불교 입문서가 없는 근본 원인은 우리 스님들이나 불교학자들의 실력 부족에 있다고 본다. 내 전공인 정치학의 경우를 보면 안다.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정치학 교과서를 못 쓴다. 그럴 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학자들이 정치학자들보다 더 능력 있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빨리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실력은 세부적인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쉬운 말로, 자기 목소리로 하되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3) 한문의 멍에를 벗어라. 위에서도 썼으므로 간단히만 말하겠다. 한문이 주는 심오한(?) 느낌, 그 착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위 2)에서 말했듯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있다. 한문에 갇혀서 그것 해석하고 설명하느라고 진을 다 빼면 정작 중요한 이론 개발이나 교리 체계화·정리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주요 한문 경전들이 거의 다 번역된 지금 상황에서 아직도 한문에 매달리는 것은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한문 경전이란 중국화된 불교를 이름인데, 한국 불교가 중국 불교에 갇혀 있어서야 되겠는가? 팔리어, 산트크리트어 교본들도 다 익혀서 한국 불교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불교가 세계에 설 수 있다. 지금 한국 불교가 세계 어느 나라의 불교보다 세계화되지 못하고 안 알려진 것도 다 위 이유들 때문이다. 한시바삐 벗어나야 한다. 용어들도 일상용어와 동떨어진 이상한 한문 용어들이 너무 많다. 이를 당장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는 없겠지만,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로 차츰 바꾸어나가야 하리라 본다.

4) 언어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불교는 좀 더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국 불교가 다른 주요 종교에 비해 대중화가 부족하다는 점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시대 때부터 절이 산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 얘기이니 요새까지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스님들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동안 불교계 자체가 대중화나 포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적인 선불교가 면벽수행이니 공안이니 하면서 대중과 동떨어진 쪽으로 매진하였으니, 대중들은 기복신앙에 떨어지거나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아무리 멋있게 말해 봐야 대중은 못 알아듣는다. 나도 뭘 말하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그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지, 뭐 어쨌다는 말인가? “그 곳에 든 심오한 뜻을 너희들이 헤아려 보아라.” 이따위 소리 제발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 바로 해라. 그래야 나 같은 사람도 알아듣는다. 그것이 불교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다. 어렵고 심오한 얘기는 그대들끼리 하고 즐기되, 그것을 쉬운 말로 바꿔서 대중들에게 해 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중생 구제의 한 방편으로 사회 복지, 구호 활동 등에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참여해야, 아니 이를 주도해야 한다. 절에 가면 맛있는 밥 준다고 꼬드겨서 신도들도 확보해야 한다. 지금 개신교처럼 그렇게 하면 물론 안 되지만, 지금보다는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절이 사회에 많이 봉사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이 원하는 바다. 어려운 주문이나 외우고 있지 말고 사회 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라.

5) 좀 더 긍정적인 교리를 개발해야 한다. 인생이 고해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이다. 이렇게만 말하지 말고 “그래, 고통이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 불교가 그 해답을 갖고 있어, 절에 열심히 가면 다 해결돼!” 하고 말해야 한다. 불교가 인간 고통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 고통 자체를 너무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극복과 해탈의 가능성, 행복한 삶의 길에 대한 인도를 강조하자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삶은 고통이고 덧없다, 모든 것은 죽어 없어진다 하면서 고뇌하는 부처님의 얼굴을 보여주기 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지혜와 자비를 얻어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강조하는 교리를 더 개발하고 설교도 그 쪽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불교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꼭 오해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불교 교리 자체에 그런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고,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쪽으로 불교를 더 발전시켜 나가자는 뜻이다.

6) 더 적극적으로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이 책에서 불교의 자비행 또는 중생구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고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계속 할 것이다. 이에 반발할 사람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그런 점에서 크게 뒤지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도 중생구제를 주로 법공양, 즉 부처님의 법을 전해 사람들의 해탈을 돕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무외 보시, 재 보시 같은 것도 얘기했지만 주안점은 거기에 있었다. 그 뒤 2500년 동안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한국 불교가 적극적인 자비행에 나서고 있는가? 어려운 사람, 억압받는 사람, 장애인, 병든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의 횡포에 대해 어떤 일을 해 왔는가? 템플 스테이 예산 삭감 같이 자기 이익이 걸린 데에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는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

전세계의 억압 받는 민중을 위해서는 어떤 목소리를 내었는가?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종단 안에서 권력 투쟁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권력에 복종하고 입신영달을 꾀하는 것이 종단 지도자들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스님들의 설교에서도 자비행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들을 듣기 힘들다. 유식학을 얘기하고 화엄학에 도취해본들 그것이 전정한 자비행과 해탈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또 하나의 쓸데없는 지식 쓰레기에 불과하다. 혹시 한국 불교가 이런 지식 놀음이나 권력 놀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중생구제 사업이나 복지사업은 한국 불교 뿐 아니라 불교 자체의 핵심이 아니다. 따라서 그 방면에서 약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이는 선교 목적이 강하고 ‘사랑’ 실천의 교리 때문에 복지사업이 한 핵심이 되는 기독교와 대비된다. 불교는 또 본질상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측면이 강할 수 있다. 이런 본질적인 교리상의 약점들을 극복해야 한다. 좀 더 적극적인 사회 봉사의 교리도 개발하고 실천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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