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혁명을 꿈꾼 장타이옌의 생애와 사상

《불교와 무의 근대》김영진

불교의 언어는 삶의 곳곳에 퍼진 고(苦)를 응시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일상과 가까운 듯하지만, 사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가볍게 뒷덜미를 들어 올려주는 ‘정신’의 고양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고양의 느낌보다는 위로의 느낌이라고 할까. 온갖 번민을 들추어내고 대결하는 불교의 언어들은 삶의 구체적 상처를 다루고 언급한다. 하지만 이 언어들은 보통 인연과 떨쳐버릴 수 없는 세속의 욕망에 지친 보살과 처사들의 삶을 위무하는 지푸라기가 되어 있을 때가 잦다.

세속, 21세기의 거대하면서도 미세하게 구조화된 이 속물의 세계를 지금은 간단하게 부정하기 어렵다. 개인에게 혹은 각양각색의 공동체, 집단에게 자기 통치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언제나 지치지 않는 자가발전의 건전지가 되기를 요구하는 상황, 즉 ‘유용성(有用性)’이 세계를 미세하게 구조화하는 상황에서 ‘세속’의 고통은 간단하게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통치의 능력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극대화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자본의 흐름에 회수될 배터리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을 먹고 살아야 한다. 이 거대한 ‘불안’ 앞에 불교의 언어들은 위무(慰撫)의 모습으로 간신히 서 있다.

1.

김영진(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의 《불교와 무의 근대: 장타이옌의 불교와 중국근대혁명》는 이런 시선에서 보면 낯선 책이다. 종교의 힘을 내면의 상처의 치유와 위로에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다루는 장타이옌(章太炎, 1869~1936)이라는 학자와 불교의 문제가 낯설 수 있다. 낯설기보다는 불편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불편함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불온한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청나라 말기에서 새로운 중국의 건설을 욕망하던 20세기 초, 이른바 중국의 “국학대사(國學大師)”로 불리는 장타이옌은 1900년대 학자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학술 언어를 구사했던 학자였다. 김영진 선생의 사유와 필력 덕분에 이 책에서 장타이옌의 학술 언어들은 비교적 쉬우면서도 매우 정밀하게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자 장타이옌의 사유가 편안한 위로나 치유의 논리로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학자 장타이옌의 불교적 사유를 쉬우면서도 정밀하게 해석하는 가운데, 장타이옌에게서 나타나는 매우 강력한 ‘부정’의 윤리 문제를 부각하고 있다. 

굳건한 고증학자 장타이옌이 혁명가가 된 것은 개인적인 성향과 시대의 탓이다. 불교가 그를 혁명가로 만든 건 아니다. 불교는 그를 철학적으로 단련시켰고 그의 정치활동에 휘발성을 더했을 뿐이다. 이 휘발성은 한마디로 하면 부정성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무’라고 표현했다.

책의 첫 부분에서 장타이옌을 정리하는 이 구절은 책 전체를 관통한다. 청나라 거대한 고증학의 수맥에 뿌리를 둔 뛰어난 학자가 제도적인 것들과 끊임없이 긴장하는 혁명가가 되었다. 물론 개인의 성향이나 시대의 탓에 가까운 인연들의 죽음 속에서, 감옥에서, 어두운 나락과 대면해야 했지만, 나락을 응시하는 장타이옌의 사유에 매개된 불교는 휘발성 강한 정치적 에테르가 되어 세계에 가득 채워졌다. 이 책이 다룬 또 하나의 인물 탄스퉁(譚嗣同)의 말로 하면 세계에 가득한 에테르, 즉 세상의 온갖 속박의 그물을 뚫고 나가는(衝決網羅) ‘마음의 힘(心力)’이 휘발성 강한 에너지로 바뀌어 이 세계를 새롭게 채운다.

감옥에서 나온 뒤, 새로운 학문전쟁(學戰)을 욕망하고 있었던 1900년대 도쿄의 중국 유학생들을 향해 장타이옌은 “사상은 광기에 이르러야 운동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뛰어난 학자가 광기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불교의 유식학을 축으로 공자, 맹자, 노자, 장자를 비롯한 기존 사상의 수맥들을 회통시키고, 메이지 유신의 근대 학술 속으로 갈마드는 서양의 개념어들을 응시하며 사유의, 윤리의 ‘광기’를 주장했다. 이 시기 언저리 서구에서도 자신들의 언어와 논리의 토대를 의심하며 니체, 쇼펜하우어, 비트겐슈타인, 러셀 등이 이성과 광기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 일련의 과정을 담백하게 ‘한마디’로 말했다. “부정성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무’라고 하겠다.”라고. 기름기를 뺀 담백한 문체로 정리된 이 문장은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한다. ‘부정성’은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활동하는 수행 주체를 요구한다. 20세기 초 ‘유용(有用)’과 ‘부강(富强)’의 논리가 수많은 중생의 삶을 구조화하기 시작할 때, 장타이옌, 탄쓰퉁 등의 ‘부정성[非有非無]’과 거기에서 포착되는 그들의 ‘무’의 문제는 이 쓸모 있음[有用]에 대해 깊이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 ‘마음의 힘’의 고투 과정을 ‘무’라고 하는 위험한 범주를 통해 해석하며 또한 여기서 ‘혁명의 윤리’를 사유한다.

2.

이 책은 장타이옌의 ‘무’를 해석하고자 하지만, 사실 근대 동아시아 곳곳에서 사유되고 있었던 ‘무’의 유형에 촉수를 뻗치고 있다. 김영진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무’의 문제는 장타이옌의 제자였던 “루쉰(魯迅)에게도 있었고” 루쉰을 평생 사유의 회심의 축으로 삼았던 일본의 현대 중국문학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에게도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서양의 박람회장과 전시물들 사이에서 오히려 어둠과 불안을 사유하며 ‘너는 무엇을 하러 태어났는가’라며 끊임없는 존재의 물음을 지속했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그렇다. 물론 이 책 3부 ‘순수경험과 공’에서 무의 철학과 무의 윤리를 다룰 때 염두에 두었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위험한 무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히 루쉰이나 다케우치 요시미처럼 ‘말의 간지’에 민감했고 그것의 속성을 껴안으며 저항하려 했던 문학가들의 경우, 말의 간지와 싸우는 과정은 당시 잡지매체에 오가는 수많은 개념어, 표상들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메이지 유신의 진원지 도쿄와 근대 학문의 확산의 새로운 진원지 상하이 사이에 만들어졌던 새로운 담론의 장에는 수많은 언어횡단의 실천들이 생겨났다. 《민보(民報)》에 글을 실었던 장타이옌도 물론이요, 이 책이 장타이옌의 사유와 대비하여 거론하는 량치차오(梁啓超)의 《신민총보(新民叢報)》의 언설도 마찬가지다. 량치차오를 비롯한 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문명’ ‘진화’와 같은 새로운 개념어들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이들을 사고하고 움직이게 하는 새로운 정치성 문제이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기 동아시아에는 개념어들이 이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지식의 장이 만들어지고 앎의 구조가 바뀌고 있었으며, 그것은 곧 새로운 정치성의 문제로 이어졌다.

김영진 선생이 “1900년대 장타이옌은 지(知)의 개방계에 서서 생각하고 말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는, 즉 장타이옌의 사유를 ‘전통학술의 대가나 민족주의자’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메이지 철학의 세례 속에서 전 지구적인 지적 환경에서 사유하고 있음을 주목하려고 했던 점은 흥미롭다. 이렇게 될 때 장타이옌의 불교의 유식학 문제는 기존 중국의 사상의 수맥들을 회통시킬 뿐만 아니라, 19세기 서양의 사유들을 매개하는 메이지 유신의 근대적 지(知)의 환경까지 포괄한다. 그것은 곧 이 시기 개념어, 말들의 존재 방식까지를 고려하고 염두에 두는 과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량치차오가 《신민총보》를 통해 새로운 학문의 지도로 그리려 했던 일본의 서양철학들, 예를 들면 19세기 벤담, 밀, 콩트 등 공리주의의 철학이라든가, 칸트의 독해라든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장타이옌이 불교의 유식학을 기반으로 〈오무론(五無論)〉 〈사혹론(四惑論)〉 등을 통해 ‘문명’ ‘진화’ ‘공리주의’ 등의 논쟁적인 개념어를 곱씹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장타이옌이 쇼펜하우어를 유식학의 입장에서 다시 읽고 개념어들을 사유하는 과정은 량치차오와 다르고 니시다 기타로와 다르다. 이 차이는 단순하지 않다. 이 책에 따르면 그것은 곧 개체, 공동체를 사유하는 차이로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문명, 진화, 인류, 국가 등 잡지매체의 개념어 문제에 대해, 장타이옌의 유식학은 ‘말의 간지’에 놀아나지 않고 철저히 사유하고 고투하는 끊임없는 부정의 사유를 수행하고 있다. 이 부정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기존 중국의 규율들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의 강박을 초월하며 보편규율을 벗어나려는 수행주체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불교에 대한 장타이옌의 사유를 소환한 이 책에서, 사실 우리는 세계의 다양한 사상의 수맥들을 발견하게 된다. 불교에 대한 사유이지만 그것은 다시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 현실 세간에 녹아든 사유들을 다시 환기시킨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유식학을 통해 세계의 지(知)를 사유했던 장타이옌을 통해 쇼펜하우어, 칸트, 니체, 스피노자. 들뢰즈도 불교의 언어와 함께 다시 환기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의 ‘윤리’는 끊임없는 ‘무아주체’의 활동을 통해 논의되고 있다. ‘무아’와 ‘주체’가 결합된 이 말은 이 책의 저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굳이 ‘주체’의 의미변형을 요구하면서도 무아주체를 쓰고 있는 것은 주체를 주어가 아니라 그 ‘활동’  ‘술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장타이옌의 개체초월은 “번뇌를 벗어난다고 해서 세간을 벗어나지 않으며” “세간에 있으면서도 출세간” 한다고 하며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무아주체는 세간에서 끊임없이 무아적 활동을 수행한다.

‘무아(無我)’라는 개념은 사실 20세기 초 국가와 문명, 부강과 생존이 논의되는 담론장에서 개체를 호출할 때 논의되던 것이기도 하다. 개체의 존립 근거를 다시 묻고 국가의 서사를 쓸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량치차오뿐만 아니라 신채호, 박은식에게서도, 그리고 니시타 기타로에게서도 논의되었던 이 개념에 대해, 이 책은 장타이옌의 ‘무아’에 술어성을 강조하여 ‘무아주체’의 윤리를 해석하고 있다.

량치차오 등의 ‘무아’가 곧 ‘국가’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무아주체’는 이러한 1900년대의 ‘무아’와 거리를 두는 것이기도 하다. 무아주체의 윤리는 모든 존재자를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즉 마음과 대상의 구분이 사라지며 지혜가 활동하는 진여(眞如)를 향한다. 부단히 활동한다. 그리고 이 활동을 수행하면서 모든 존재자를 통찰하여 개념과 인식의 집착[名相]을 타파하고 차별을 극복하면서 ‘내성외왕(內聖外王)’ 한다. 강박하는 개념이나 인식의 집착을 타파하며 “스스로 주인됨[自主]”에 이른다. 하지만 그것은 모놀로그적인 상태가 아니다. 타자가 부재하는 독백이 아니라, 무아주체는 ‘타자’를 배려한다. 타자는 자아의 한계를 스스로 확인하게 하고 그 유한성을 비집고 들어오지만, 타자에 대해 자연스러운 공감, 자비심을 통해 나와 남의 차이를 넘어서는 평등을 향한다.

 ‘윤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난다. 탄스퉁에 따르면 소통(通)이며 장타이옌에 따르면 ‘차이 있음[不齊]의 평등(《齊物論釋》)’이다. ‘마음의 힘’이 세계에 휘발성 강한 정치적 에테르가 되는 과정에는, 세간에서 타자와 차이를 사유하며 부단히 움직이는 무아주체가 있다. ‘혁명의 윤리’의 진정성, 마음의 진정성은 말의 간지에 놀아나지 않는 무아주체의 수행에서 생겨날 수 있다.

어쩌면 21세기 거대한 속물의 세계에 짓눌린 개인의 불안은 위무(慰撫)가 아니라 20세기 초 장타이옌의 ‘무아주체’ 같은 수행을 통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20세기 초 불교는 혁명의 윤리를 발아시키는 에테르였다는 점. 이 책은 비장한 자의식에 빠지지 않고도 마음의 진정성 문제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

 

천진 / 서울대 강사.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20세기 초 중국의 ‘智’ ‘德’ 담론과 ‘文’의 경계〉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근사재에서 100년 전 잡지들을 뒤적이며 《중국근대의 풍경》을 함께 썼고, 루쉰의 글을 번역하고 고민하는 루쉰전집 번역에 참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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