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法性)’으로 가늠하는 한국불교 정체성

《한국 근현대불교사상 탐구》
신규탁
한국불교의 정체성

신규탁 교수는 중국 화엄학과 선불교를 전공하는 철학자다. 그가 화엄과 선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바로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에 대한 연구였기 때문이다. 종밀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 박사학위 논문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문학자의 숙명이고 또한 정직함이다. 박사 논문은 그저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고, 박사 혹은 교수라는 타이틀을 끼고 다른 분야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은 요즘 세태에, 그는 영판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라고 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양복 입은 스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늘 합장하고 인사하는 행동거지와, 만나면 뭐든 하나라도 챙겨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꼭 마음 좋은 절집의 스님을 닮았다. 한국선학회를 대표하며 봉선사 월운 스님의 문도이기도 한 송묵 스님은 그를 대하면 “우리 사형, 우리 사형” 하고 부른다. 그러면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이고 씩 웃는다. 그렇게 부끄럼을 잘 타는 그가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 탐구》(새문사, 2012)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탐구’라는 두 글자가 좀 멋쩍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을 이리저리 들춰보면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종단의 출현, 불교 관계 법령, 불경의 한글번역, 그리고 대웅전 예불 등 네 방면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다. 정체성이란 참 어려운 말이다. 국어사전에는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나온다. 심리학에서는 ‘자기 동일성’이라는 말로 쓴다. 한 개인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이어지는 어떤 통합성을 갖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또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어떤 것이 시간이나 장소 등의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속에 무엇인가가 변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을 때에, 이 ‘무엇인가’를 가리켜 그것이 지닌 동일성 또는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이라고 했다.

이런 얘기들은 종합해 보면 정체성은 결국 ‘어떤 것이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고유하게 내포하는 특징’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이란, 한국불교가 다른 지역의 불교와 구별되어 고유하게 내포하고 있는 특징이라는 말이 된다. 저자는 그 특징을 종단의 출현과 불교 관련 법령 그리고 불경의 한글번역과 예불문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네 가지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책에서는 먼저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탄생 과정부터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심인물로 방한암(方漢岩, 1876~1951)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출가수행자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를 실천하고 불교 고유의 가치를 세워 세속의 이념에 휘둘리지 않으며, 현 조계종의 봉건적 요소와 일제의 잔재 요소도 청산하는 것이 중요하고, 아울러 세속 정치의 좋지 못한 전례들은 불문(佛門) 안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 관계 법령에서는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의 사례를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중국의 경우 국가의 통제 속에서 철저하게 종교를 관리해 온 역사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한국의 경우 역시 유교적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한 조선시대부터 원천적으로 중국의 법 전통에 철학적 기반을 두었고,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감정기 그리고 해방 이후의 시기까지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교단의 통제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또한 불경의 한글 번역과 예불문을 한국불교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파악하였다. 조선조 간경도감의 불경언해 작업이 선(禪)과 교(敎) 그리고 진언(眞言―염불) 관련 불교서적에 걸쳐 골고루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백용성과 해방 후 봉선사 문중에서 불경의 한글화에 앞장섰다는 점을 두고 저자는 묵은 밭을 가꾸는 일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조계종의 현행 예불 형식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과 단절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재래의 전통 예불형식을 되살릴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불교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이런 대상에 주목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학문적 통찰과 사무침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게 한다.

근현대 선사들과 법성(法性)

이 책의 제2부와 3부에서는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선사들에 대한 인물 연구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근대불교 시기의 대표적 승려상으로 백용성, 방한암, 이운허, 김성숙, 이홍선 등 네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백용성(白龍城, 1864~1940)에 대해서는 선교는 물론이고 염불과 주력 등 다양한 수행 방법을 포용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방한암은 당송(唐宋) 사이의 선 수행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저자는 송 대의 간화(看話)와 돈오무심(頓悟無心)을 근간으로 했던 당대의 반조(返照)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 한암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이운허(李耘虛, 1892~1980)를 두고 저자는 “겸손한 화엄 학승”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운허는 저자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봉선사 월운 강백의 스승이니 그 애틋함이 남다를 것이다. 저자는 근대불교사에서 운허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이제 겨우 학문적 연구가 시작단계에 있음을 많이 아쉬워하면서, 현재까지 확인된 운허의 사상적 궤적을 소상히 분석하고 있다. 김성숙 역시 봉선사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저자가 평가하는 김성숙은, 사회주의 운동가이며 반봉건주의 운동가요, 반제국주의 운동가요, 민족 단위의 새 국가 건설을 추구한 정치가였다.

이홍선(李泓宣, 1904~1979)은 비구―대처의 분규로 불교계가 떠들썩했던 1960년대, 법화계열 종단인 대한불교입종(大韓佛敎入宗)을 창종했다. 저자는 불교사의 주류에서 한발 물러선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도모했던 그에게 눈길이 갔던 모양이다. 이홍선의 불교가 법화사상 자체를 중시했고, 승속일체의 종단을 모색했으며,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관을 고취했고, 의식(儀式)을 새롭게 제정하려 했다는 점 등이 저자의 연구를 통해 새롭게 부각되었다.

제2부의 등장인물이 일제강점기의 승려였다면, 제3부에는 해방 이후의 선승들이 주로 등장한다. 저자는 이 부분의 소제목을 “하늘을 치솟는 선승들의 세상”이라고 붙였다. 한국불교가 숙성된 시기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등장인물을 일일이 거명해 보면 금오(金烏, 1896~1968), 청담(靑潭, 1902~1971), 구산(九山, 1909~1983), 성철(性徹, 1912~1993) 등 네 선사이다. 저자는 이들의 친필 유묵(遺墨)과 기타 여러 문헌자료를 통해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관련 문헌의 소략함과 각 문도들의 분발을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진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근현대의 유명한 선승들을 살피는 저자의 눈길에서 뭔가 귀속되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면서 저자의 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개념인 ‘법성(法性)’이다. 얼른 와 닿지 않는 이 개념은 저자 자신이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법성은 인도불교 전통의 연기성(緣起性)과 구별되어 중국불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개념이며 화엄과 선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중국불교 전공자라면 다 알고 있다. 이런 불교사적 사실에 머물지 않고 법성은 저자의 철학으로 표방되어 법성철학으로 명명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법성철학은 아직 완결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법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화엄과 선 염불을 관통하고, 중국과 한국의 불교도 가늠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 개념과 씨름했던 것 같고, 여전히 부둥켜안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동안 밤잠을 설칠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근현대 선승에 대한 연구가 단순히 유명 인물에 대한 연구에 머물지 않고 뭔가 다른 큰 모색의 일환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불교의 기체(基體)

길어도 별 내용이 없는 글이 있는가 하면, 짧지만 많은 고민과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 있다. 이 책의 제4부가 그렇다. “오늘을 사는 한국불교”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이 부분은, 책 전체의 결론 격에 해당한다. 앞서 게재된 글이 학계에 발표된 논문을 수정 보완 확장한 것인 데 비해, 이 글은 형식 자체에서부터 앞의 글들과는 다르고, 굳이 논문의 형식을 갖추려고 애쓰지 않았다. 저자 역시 앞서의 내용들은 오직 연구의 대상에서 주목했던 데 비해서, 여기서는 이때까지 내재시켜 두었던 연구의 방법에 대한 속내를 살포시 보여주려고 한다고 적고 있다.

‘불교는 어떠어떠하다’라고 말하려고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입이 턱 막히는 경험을 한 사람이면 이 글에 내포된 저자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 인도불교만 해도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다르고,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다르고, 중국불교에서도 교학불교와 선불교가 또 다르다. 그러니 ‘불교는 어떠어떠하다’라고 대답할라치면 저절로 말문이 막힌다. 이런 막막함의 바탕에 저자가 기체(基體, substratum)라고 부르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기체를 두고 어떤 특정한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 또 그 사상이 그 사회 속에서 이미 공론화되어 있고, 그것들이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라고 적고 있다. 다시 말해서는 기체는 불교가 감당하고 수용해내야만 했던 인문사회적 조건이고 환경이다.  인도 초기불교 교단의 기체와 대승불교 시기의 기체 그리고 중국불교의 기체의 차이가 저자를 짓누르는 문제의식의 정체일 것이다. 그리고 이 기체의 문제는 다시 한국불교의 문제이기도 해서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한 대안 모색의 출발점이 된다.

요즘 불교계의 경향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원형에 대한 지향성을 들 수 있다. 근본불교, 남방불교, 위빠사나 수행, 팔리어 경전에 대한 관심의 저변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의식이 원형 지향성이다. 이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주장의 근간이 되는 의식이면서, 불교 혹은 부처님 말씀의 원형을 실재화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종교 전통에서 인문·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도외시하거나 무력화하는 힘이기도 하다. 저자의 기체에 대한 주목은 이런 힘에 대한 응전으로 보인다. 

기체에 대한 주목은 저자가 중국불교 전공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불교사의 끝자락에 있는 선불교를 이해하자면, 인도에 이르기까지 그 이전의 불교전통을 도리 없이 읽어내야만 하고, 게다가 중국지성사를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런 과정 속에서 지역별 시대별 사회별 환경과 조건에 뒤섞이는 불교를 저자는 목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체의 모습은 어쩌면 고귀하고 순결하다고 여겼던 부처님 말씀보다 더욱 엄숙하고 다급한 현실이지 않았을까.

기체 속의 불교 혹은 기체 위의 불교를 보면서 저자는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해 조감하고 있다. 저자가 제안하는 ‘제 나라 말로 번역하기’와 ‘일상어로 토론하기’는 한국불교의 기체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되돌아보는 과정이고, 이것이 끝내 한국불교의 미래를 열어가는 단초가 될 것이라는 저자의 통찰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알 것 같다. 왜 저자가 운허―월운으로 이어지는 봉선사 학풍에 그렇게 목을 매고, “우리 스님, 우리 스님”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저 오랜 인연에서 비롯된 살가움이나 문도로서 사명감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자에게 봉선사는 단순히 존경하는 스승의 거처가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고 세워나가려고 했던 곳, 그리고 한국이라는 기체가 응집되어 몸부림치는 곳이었다.

격의(格義)와 선(禪)이 중국불교의 정체성이었음을 간파한 저자는, 광릉 숲 속의 봉선사를 드나들며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불교가 가혹한 역사를 담아내야만 했던 이유는 유교적 봉건을 청산하지 못했고 뒤틀린 근대를 비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음험한 그늘 아래서 햇빛을 찾아 몸을 비틀어 올리려고 애쓰는 소나무처럼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 탐구》에서는 광릉 숲의 송진 냄새가 진하게 풍겨온다. ■

 

박재현 / 불교철학자. 서울대학교대학원 철학박사.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현재 프레시안(www.pressian.com) 인문학습원 ‘선불교학교’ 교장.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과 《깨달음의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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