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 교수

지난 제3회에는 성경에 포함된 4복음서 기록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출생, 성장, 시험, 갈릴리에서의 활동과 가르치심,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등에 대해 대략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4복음서에 나온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여러 가지 다른 시각에서, 여러 가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있었다. 오늘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몇 가지를 예로 들면서 이런 것들이 어떻게 다른 시각,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문자주의를 넘어

성경을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자세를 ‘근본주의적 태도’라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는 사실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폴 틸리히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는 어느 종교에나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고질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문자주의를 넘어서서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을 깊이 읽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각 있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중에는 궁극 실재나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의 표피적이고 문자적인 뜻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성경이나 기타 경전, 그리고 의식(儀式) 등 외부적인 것들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강조하는 선불교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 퍼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성경을 읽을 때 표피적 문자를 넘어서서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문자주의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를 억누르게 되고 이에 따라 그 이후 천6백년간 그리스도교에서는 문자적 성경 읽기가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하여 소개하고 싶은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영지주의(Gnosticism)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혹은 영지주의적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1) 물리적(physical, hylic, 땅) 차원,
2) 심리적(psychological, psychic, 물) 차원,
3) 영적(spiritual, pneumatic, 공기=영) 차원,
4) 신비적(mystical, gnostic, 불) 차원.


첫째 차원은 종교와 별로 관계가 없는 일상적 차원이다. 이른바 육이나 땅에 속한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데 따라 극히 표피적으로 이해하는 세상이다. 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 둘째 차원으로 들어가는데, 이 단계에서는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 등의 종교적 진술이나 이야기를 ‘문자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심리적 기쁨이나 안위를 얻는다.

‘그리스도교의 외적 비밀(the Out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영으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 등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셋째 차원의 뜻, 곧 ‘유비적(allegorical)’ 혹은 ‘은유적(metaphorical)’ 혹은 '영적(spiritual)' 의미를 파악한 영적 사람이 된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내적 비밀(the Inn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불로’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라는 신비 체험에 이르고, 더 이상 문자적이나 은유적이나 영적인 차원의 뜻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일 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쓴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 동네에 500집이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지금 호주는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눈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자기 아빠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하는 단계로 올라간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것이다. 예전처럼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똑 같이 ‘징글벨’을 불러도 이제 자기가 산타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좀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사회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좀 더 장성하면, 사실 장성한다고 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의 신비적 의미를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된다.

물론 이 예화에서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사회공동체적 의미, 신비적 의미 등 점진적으로 심화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이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네 가지 발전단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깊은 신앙이란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비롯한 종교적 진술들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으로 혹은 중층적(重層的)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지금 서양에서는 종래까지의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가 많은 이들에게 “반지성적, 문자주의적, 독선적, 스스로 의로운 척, 우익 정치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된(anti-intellectual, literalistic, judgmental, self-righteous, uncritically committed to right-wing politics)” 종교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식의 그리스도교는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고, 더욱이 여러 가지로 말썽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교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느끼고 또 비그리스도인은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주류(mainline) 그리스도교는 점점 쇠퇴하는 실정이다.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 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만이 유일한 선택일까? 일단의 사람들은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비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는 공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택이 바로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 (the newly emerging Christianity)와 함께 하는 것이다.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

여기서 잠깐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려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필자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바라는 희망사항의 일부분을 투영한 것이기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중에 특히 세 가지 조목만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예수의 ‘천국 복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성경의 말씀의 표피적, 문자적 차원의 뜻을 넘어서는 심층적, 영적 차원의 뜻을 찾는 한 가지 구체적인 예로 예수님의 이 핵심적인 기별인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말씀을 어떻게 길이 이해할 수 있는가 한 번 보기로 한다. 사실 이 기별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처음으로 선포하신 기별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 계속해서 외치신 기별이기도 하다. 성경 표현대로,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시니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마태복음 4:17, 23) 다니셨다는 것이다.

우선 하는 문장에서 이 ‘회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회개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 같이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회개의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의식을 바꾸라’, ‘보는 법을 바꾸라’, ‘눈을 뜨라’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는 ‘repentance’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은 ‘conversion’으로 하는 것이 원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은 그러니까 “눈을 떠서 천국이 가까이 있음을 알라.” 혹은 “정신 차려라. 천국이란 여기 있느니라.”라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이를 좀 더 깊이 하여,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의식 자체를 바꾸라. 그러면 천국이 바로 옆에 있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의식의 바뀜’을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의식의 변혁)’이라 할 수 있다.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신국’과 똑같은 뜻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는 대신에 ‘하늘’이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하늘 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나 같은 뜻이지만 어느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더 좋지 않는가 생각되기도 한다.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이라고 하면 저 하늘 어디에 떠있을 지리적, 물질적 나라로 생각되기 쉽지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그런 지리적 개념이 덜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을 때 ‘나라’ 혹은 ‘왕국’의 본래 말인 말쿠스(히브리어)나 바실레이아(그리스어)에는 영토 혹은 장소라는 뜻보다는 주권, 통치, 원리라는 뜻이 더 강하다. 영어로도 the Kingdom of God보다는 sovereignty of God, reign of God, rule of God, principle of God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어디 있다고 하는가? 표피적, 문자적 의미에 집중하는 경우 하나님나라, 혹은 천국은 하늘 어디에 있고,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으로 임할 곳 등, ‘장소’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믿어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산타 이야기에서 문자적인 뜻보다 깊은 뜻을 알아볼 수 있듯,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의 더욱 깊은 뜻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선 예수님 스스로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21)고 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저 하늘 어디 떠 있다가 이리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에’, 혹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임을 주목하라는 말씀이라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이 하나님 나라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 틀릴 것이 없다. 영어로 ‘God within’이다.

그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을 때 그것을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을 두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그의 생전에 곧 임할 임박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이중적인 뜻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하는 등 ‘언제’의 문제로 논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가까움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거리’, ‘공간’, ‘어디’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영어로 ‘at hand’라는 번역이 더 실감난다. ‘손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어느 때쯤에 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바로 내 손닿는 지근(至近) 거리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다. ‘먼저’라는 것을 보면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당연히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기본 진리에 따라, 또 무수한 믿음의 용사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증언에 따라, 세계 여러 종교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근본적인 가르침에 따라, 그것이 바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일부분, 내 속에 들어있는 신적인 요소, 내 속에 임해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라 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더욱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나의 바탕, 나의 근원이란 뜻에서 결국 나의 ‘참나’이기도 하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성 캐더린(St. Catherine of Genoa)의 말, “나의 나는 하나님이다. 내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나를 볼 수 없다”(My Me is God, nor do I recognize any other Me except my God Himself.)고 한 것은 나의 진정한 나는 결국 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은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나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제나’가 죽고 나의 참된 나, ‘얼나’로 부활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폴 틸리히의 말, 하나님을 ‘높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깊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한 말이라 보아야 한다.

영국 사상가로서 The Perennial Philosophy(영속철학)이라는 책을 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들을 열거하면서 힌두교에서 말하는 “tat tvam asi,” 곧 범아일여(梵我一如) 개념을 첫 번째 항목으로 들었다. 헉슬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신비주의 전통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신이 내 속에 있다,” “가장 깊은 면에서 신과 나는 결국 하나다” 하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내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불성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성 사상보다 좀 더 시각적으로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tath?gatagarbha) 사상이다. ‘장(garbha)’이라는 말은 ‘태반(matrix)’과 ‘태아(fetus)’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생래적으로 여래 곧 부처님의 ‘씨앗’과 그 씨앗을 싹트게 할 ‘바탕’을 함께 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잠재적 요소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 이해한다면 그의 ‘천국 복음’도 결국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보아 지나칠 것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신관은 신의 내재(內在)만을 주장하고 신의 초월(超越)을 무시하거나 신과 나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입장은 나와 신을 구별하여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의 내재성을 함께 수납하는 이른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 신관이라 할 수 있다. 범재신론은 다른 모든 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속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 “나의 바탕은 신적인 것이다”, “나의 가장 밑 바탕은 신의 차원과 닿아 있다” 하는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신의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함께 강조하는 ‘변증법적 유신론’이라 할 수도 있다.

이와 덧붙여 한마디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출생하자 말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는 말을 두고서도 여기의 ‘나(我)’란 ‘고타마 싯다르다’라는 역사적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불성, 혹은 ‘참나’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 참나야 말로 천상천하에서 오로지 높임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 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고 본다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을 때 그 ‘나’도 결국 역사적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보다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던 그리스도, 그의 바탕이 되는 신적 요소, 그의 ‘참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런 믿음’

복음서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요한 복음서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 26) 하는 등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결국 ‘믿음의 종교’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믿음’일까?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믿음’ 이라고 할 때 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에서부터 가장 덜 알려진 것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더 깊은 차원을 알아보도록 한다.

1) 승인으로서의 믿음

첫째 종류의 믿음이란 “남의 말을 참말이라 혹은 정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고 할 때 그가 서울 남대문에 문턱이 있다고 하면 그 말을 정말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내가 직접 서울에 가서 남대문에 문턱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 유무를 알았으면 믿을 필요가 없는데, 내가 가 본 일이 없어, 내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식의 믿음은 남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한 다리 건넌 앎’(second-hand knowledge)이라 할 수도 있다. 좀 더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확인할 길이 없는 것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전문적 용어로 하면 ‘assensus’로서의 믿음이다. 이 라틴어 단어는 영어 assent 의 어근이다. 우리말로 ‘승인(承認)’이라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라고 하면 우선 이런 ‘승인으로서의 믿음’을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린다. 이런 식 믿음이 현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제일 강조되고, 어느 면에서는 제일 강요되는, 가장 보편적인 믿음 형태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경우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면 무조건 모두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지적할 사항은 이런 종류의 믿음이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가장 보편적 형태의 믿음으로 내려 온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근대에 와서야 이런 형태의 믿음이 ‘믿음’으로 강조되기 시작하다가 근래에는 급기야 믿음이라면 바로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 이유가 뭔가? 역사적으로 가장 큰 원인은 서양을 휩쓴 계몽주의 사상이다. 17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 사상이 발전하고, 이와 더불어 진리를 ‘사실(factuality)’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사실이라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것들을 ‘사실’이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결국 믿음이란 이처럼 성경에서 사실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사실로, 참말로, 정말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대로 “무조건 믿으라,” “묻지 말고 믿으라,”하는 것은 사실 이런 종류의 믿음이다. 이런 종류의 믿음이란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 순리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 뭔가 이상하지만 믿는 것, 이른바 ‘지성의 희생’이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라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 받들고, 이런 종류의 믿음이 없는 상태를 ‘의심’이나 ‘불신’, 나아가 그것을 그대로 죄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런 식 믿음도 물론 믿음이다. 그리고 이런 식 믿음도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알 수도 없기에, 남의 말을 듣고 그 중에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믿음만이 믿음이 아니다. 이런 식 믿음만 가지고는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실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믿음은 이런 믿음 그 이상이다.

예를 들어, 믿음이 이런 ‘승인으로서의 믿음’만을 의미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셨을까? 믿음이 이런 뜻이라면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셨다. 믿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체험하고 알았을 뿐이지 구태여 하나님에 대한 무슨 진술이나 명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만이 아니다. 물론 좀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초대교회로부터 종교개혁 시대나 계몽시대 이전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이런 종류의 ‘믿음’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계몽주의 이전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억지로 믿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땅이 판판하다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해가 움직인다고 했으면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이성이나 지성의 희생에 의해서 받아들이는 ‘승인으로서의 믿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믿음이 이런 것만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종류의 믿음은 무엇인가?

2) 맡김으로서의 믿음

둘째 형태의 믿음이란 ‘믿고 맡기는 것’이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내 친구를 보고 “나는 자네만 믿네.”할 때의 믿음 같은 것이다. 이 때 그 친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 친구가 한 말을 참말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거의 관계가 없다. 이런 식의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 교리나 신조 같이 ‘말’로 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의와 능력을 믿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fiduncia’로서의 믿음이다. 영어로 'trust'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신뢰로서의 믿음’ ‘턱 맡기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나 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의 모두를 턱 맡기고 의탁한다는 뜻이다. 이런 믿음은,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골이 표현한대로, 천만 길도 더되는 깊은 바다 물에 나를 턱 맡기고 떠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잔뜩 긴장을 하고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더 빨리 가라앉고 말지만, 긴장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물에 턱 맡기면 결국 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뜨게 하심을 믿고 거기 의탁하는 것이다.

이런 식 믿음의 반대 개념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니라 바로 불안, 걱정, 초조, 앙달함이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려 하신 믿음도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마6:25-32)하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믿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런 믿음은 어떤 신학적 진술이나 교리를 믿는가, 혹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는가 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8:5-10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야훼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의 신성이나 인성이 뭔지도 모르던 이방인 로마군의 백부장에게 이런 신뢰의 마음이 있음을 보시고 “이런 믿음”이라고 인정하여 주신 것이 아닌가?

오늘처럼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와 긴장이 많은 사회에서 우리에게 이런 신뢰로서의 믿음, 마음 놓고 턱 맡김으로서의 믿음은 어떤 진술에 대한 승인이나 동의로서의 믿음보다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에 대한 이런 믿음, 예수의 대한 이런 믿음은 이런 면에서 우리를 이 모든 어려움에서 풀어주는 해방과 자유를 위한 믿음이다.

3) 믿음직스러움으로서의 믿음

믿음의 세 번째 종류는 ‘믿음직스러움’, ‘믿을 만함’이라고 할 때의 믿음이다. 내가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을 만한 사람,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라틴어로 ‘fidelitas’라 한다. 영어로 faithfulness라 옮길 수 있다. ‘성실성’으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을 이렇게 생각할 경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계속 믿음직스러움, 믿을 만 함, 성실함, 충성스러움을 견지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해 성실함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교리’나 ‘진술’이나 ‘신조’에 대해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충성과 성실함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은 시대에 따라, 개인의 신앙 성숙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바뀔 수밖에 없다.

내가 어머니에 대해 자식으로서의 도리에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움을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어머니에 대해 가지는 나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내가 잘못했을 때는 꾸짖으시고, 잘 했을 때는 칭찬하시는 분이셨다. 크면서 이런 생각이 바뀌어 어머니는 이제 무엇보다 우리 형제들을 서로 묶어주는 열쇠고리 같으신 분이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처럼 바뀌지만, 나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끈끈한 부모 자식으로서의 유대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믿음직스러움으로서의 믿음이 없다는 것을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는 것, 심지어 간음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참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아닌 것에 우리의 절대적 충성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당시 사람들을 두고 ‘사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을 때 그들의 간음이나 동성애 같은 것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배신과 불성실을 꾸짖으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믿음은 궁극적이 아닌 일체의 것, 예를 들어 돈이나 명예나 출세나 성공이나 권력이나 교회나 교리나 교단이나 국가나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무슨 주의나 사상 같은 가짜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일을 금한다는 뜻이다. 특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절대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교리를 우상화는 것, 하나님이 아닌 가짜와 간음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믿음 없음’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에게 성실한다는 의미로서의 믿음을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또 그가 사랑하시는 것, 우리의 이웃과 그가 만드신 이 세계를 사랑하는데 성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4) 봄으로서의 믿음

이제 마지막으로 앞에 예거한 것들과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일종의 믿음이라 할 수 있는 “봄으로서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다. 이른바 ‘visio’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seeing things as they really are)이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사물의 본성(nature)이나 실재(reality), 사물의 본모습, 실상, 총체적인 모습(the whole, totality)을 꿰뚫어 봄이다. 이런 믿음은, 말하자면, 직관, 통찰, 예지, 깨달음, 깨침, 의식의 변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일종의 확신(conviction) 같은 것이다. 일종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역사관 같이 세계와 삶에 대한 총체적 신념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가지게 되는 확신을 꼴지우는 봄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 “적대 관계”로 보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이다. 상극(相克)의 세계관이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 믿음은 결국 우리를 방어적인 사람, 일종의 피해망상증 환자로 만들기 쉽다.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면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우리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하며 사느라,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한없이 고달프게 되고 만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데서 온 비극적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두 번째 방법은 세상을 아름다운 것, 좋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 우리를 ‘살리기 위한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상생(相生)의 세계관이다.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세계를 신묘막측한 것으로, 은혜스러운 것으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보살피시는 세계로 보는 태도다.

이런 세계관, 이런 실재관을 가지고 있으면 넉넉해질 수 있다. 자유와 기쁨과 평화와 사랑과 자비로 특징지워지는 삶을 살 수 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나도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상호의존, 상호연관, 상즉상입의 원리로 세계를 바라보므로, 화해와 조화의 삶을 즐길 수 있다. 사실 이런 믿음, 확신, 세계관이 있을 때 하나님께, 혹은 우주의 원리에 나를 턱 맡길 수 있는 신뢰로서의 믿음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적극적 세계관에 입각한 올바른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될까? 여기에 기도라든가 성경 공부라든가 예배 등과 같은 종교적 실천과 수행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바르게 보는 ‘관(visio)’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실천과 수행 문제는 별도의 문제이기에 다른 기회를 기다려 본다.

대략 이렇게 믿음에 대한 뜻을 정리해 보았다.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할 때 무조건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성직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는 믿음이라고 할 때 새로운 깨침, 의식의 변화에 의해 우주와 삶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새로 뜨임,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자비의 마음 같은 것을 더욱 중요시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기적의 더욱 깊은 뜻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위를 걷는다든가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든가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든가 하는 기적이다. 특히 요한복음 11장1-45절에 보면 죽었던 ‘나사로’라는 청년을 다시 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이 기적은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기적 중에 최후 최고의 기적이다. 물론 이런 엄청난 기적 이야기도 문자적, 표피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깊이 들어가면 또 다른 의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 깊은 뜻을 찾기 위해 우선 몇 가지 관찰할 수 있는 사항들이 있다.

첫째, 이렇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같이 경천동지할 대 사건이 어찌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다른 문헌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 세상 문헌에서야 그 당시 예수님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으니 그의 행적에 해당되는 이런 일을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다른 복음서들이 어찌 예수님이 행하신 이렇게 중대한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말인가?

둘째,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베다니(Bethany)에서 죽은 나사로(Lazarus)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정말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술한 것일까?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書)??에 보면 Anu 라고 하는 이집트 도시에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예식이 매년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명 Anu를 히브리어 식으로 부르면 ‘베들레헴’(떡의 집)이라는 지명처럼 ‘집’이라는 뜻의 ‘Beth’가 덧붙여져 BethAnu가 되고 여기서 ‘u’ 가 ‘y’로 바뀌어 Bethany가 된다는 것이다.

또 이 예식에서 이집트 신 호루스(Horus)는 죽은 자기 아버지 오시리스(Osiris) 신이 묻힌 동굴 무덤 안을 향해 “일어나 나오십시오”하고 외친다. 오시리스 신이 살아서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오시리스 신은 예전에 아사르(Asar) 혹은 아자르(Aza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이름에다 “주님”과 같은 용법의 히브리어 엘(el)을 붙이면 El-Asar가 된다. 여기에다 라틴어 남성 명사 어미인 ‘us’를 끝에다 붙이면 El-Asarus가 된다. 그 후 앞의 모음 ‘e’가 탈락되어 Lasarus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울었다”는 것, 마리아와 마르다의 등장, 마리아가 예수를 모시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했다는 것 등 모두가 요한복음보다 5천년 이상 오래된 이집트의 이야기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역사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우리에게 역사를 가르쳐주기 위한 역사 교과서를 쓴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해주려고 하는 본의는 우리 속에 있는 참된 자아, 참 ‘나’가 부활해야 함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해 줌으로, 우리도 우리 속의 참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런 기적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어야할 더욱 깊은 뜻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가면서

미국 성공회 주교였던 스퐁 신부는 ??그리스도교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라는 책을 썼다.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산 종교는 변할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에 저항하느냐 이를 환영하느냐 하는 것이 현재 그리스도교의 사활이 걸린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지금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렇게 변하기 시작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가 불교와 의미 있게 만나 서로 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 사는 불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그만큼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교수.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학위논문은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1983), 『도덕경』(1995),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1996), 『장자』(1999), 『예수는 없다』(2001),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2002), 『세계종교 둘러보기』(2003)가 있고,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기독교서회, 1993),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1997), 『귀향』(2001), 『예언자』(2003) 등이 있다. 제17회(1987) 코리아 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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