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로 모색하는 한국불교의 활로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
김재영 지음

1.
초기불교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역사적 사실만을 말하자면 2,500년 전쯤 인도에서 시작되었으며,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ttha)라는 인물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주도된 신흥종교 정도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인 수준의 답변을 넘어서는 순간 상반되는 입장들과 마주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초기불교를 오로지 개인적인 평안을 얻기 위한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다른 일부에서 사회적 부조리의 해소에 주력했던 혁명적 가르침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대립적 시각은 좀처럼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기불교라는 명칭 자체도 그렇다. 일부에서는 근본불교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모든 불교적 가르침의 근원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원시불교 혹은 소승불교라고 부른다. 후대의 원만한 가르침으로 성숙되기 이전의 불교라는 의미이다. 상좌부불교니 빠알리불교니 하는 명칭도 그러하다. 특히 이러한 명칭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여타의 불교와 구분되는 정통성을 강조한다. 이렇듯 특정한 명칭에 친숙해 있는 이들은 그것만이 초기불교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보탬이 된다고 믿는다. 거기에는 각자가 속한 전통적 이해방식의 음영이 깃들어 있다.

초기불교에 접근하는 태도의 폭은 이처럼 넓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시각으로 초기불교에 다가가는 것이 온당할까? 임기응변(臨機應變)이라는 교화 방식에 따른다면 고정된 답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이것에 대한 해답은 초기불교를 접하는 각자의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를 바라보는 저자의 입장 또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생존 기반 자체가 급속히 붕괴되는 위기상황으로 파악한다. 저자는 근본 의도는 초기불교의 사례를 통해 한국불교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열반에 들기까지 붓다는 철저한 이타적 삶을 일관했다.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라.”라고 이를 정도로 교화와 봉사의 삶을 강조했다. 그 결과 불교는 짧은 시간 안에 영향력 있는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 나타나고 있는 한국불교의 양상은 어떠한가? 대중에 대한 봉사를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이기적 권력구조에 편승하여 스스로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타적 삶을 일관했던 붓다의 모습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그 결과 사회적 리더십을 상실해 가고 있지 않은가.

한국불교의 문제 양상은 무엇보다 사회의식의 결핍에서 기인한다. 또한 출세간적 교리체계, 참선 중심의 수행법, 출가 우월적 교단구조, 구시대적 사고방식 등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낸 총체적 난국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인들은 불교의 사회적 리더십은 물론 사회적 존재로서의 역할마저 훼손시키고 있다. 아무런 사회적 역할도 담당하지 못하는 종교란 더 이상 생존을 영위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한국불교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답습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간의 불교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둔감하여 시대적 과제 해결의 출구를 열어주지 못하였다. 저자는 참담한 심경으로 묻는다. 과연 이것이 초기불교 당시부터의 모습인가? 저자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초기불교는 세계의 종교사상 유례없는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폭력과 차별이 만연해 있던 땅에서 폭력과 차별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 비폭력과 평등의 메시지를 확고히 정착시켰다. 저자는 초기불교의 성공 사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특히 한국불교의 침체 양상을 극복하는 데 활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초기불교의 성공 원인을 교리나 수행법이 아닌 ‘사람들’ 혹은 ‘대중’에서 찾는다. 그간의 선행 연구들은 자비, 무아, 연기, 사성제 등에 관한 문헌학적 문제에 천착하여 살아 있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놓쳤다. 그 결과 메마른 현학적 담론의 틀 안에서 생명력을 지닌 종교로서의 불교를 질식시켜 왔다. 따라서 저자는 그간의 불교학에 대해 철저한 반성적 시각을 견지한다. 현장 중심의 접근법을 통해 붓다 자신과 그의 제자들이 걸었던 치열했던 삶 자체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력히 권한다.

3.
이 책이 이루어 낸 주요 성과는 빠리사(parisa) 즉 대중(大衆)에 대한 재인식이다. 그간 한국불교는 승가(saṅgha) 중심의 지배구조 아래 놓여 있었으며, 재가자들에게 허락된 공식적인 역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실천 주체는 승가 구성원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무사(武士)와 상인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빠리사 대중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데 헌신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초기불교는 지리적·문화적 장벽을 넘어 전 인도로 확산될 수 있었으며, 세계종교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저자는 광범위한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사부(四部)의 빠리사 대중이야말로 붓다의 계승자였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로 구성된 빠리사 대중은 합당하게 도를 닦고 법에 따라 실천하면서 삿된 교설이 나타날 때마다 법으로써 제압하였다. 초기불교의 경전에서 이들 모두는 붓다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며, 또한 엄연히 전법운동 혹은 사회적 실천의 주역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부의 빠리사 대중은 출가불교와 재가불교라는 쌍벽을 이루면서 초기불교의 확산을 이끌어 낸 양 날개 구실을 하였다. 

저자는 초기불교의 교리 또한 이러한 대중들의 삶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적 세계관의 전파는 실제로 어떠한 양상을 띠었는가. 또한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수용되었는가. 저자에 따르면 불교적 세계관의 전파는 무지와 탐욕으로 왜곡된 비이성적인 사회현실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바로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지혜와 자비의 과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저자는 자칫 고답적으로 비칠 수 있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이러한 관점에 입각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지닌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초기불교에 대해 역사적 현상으로 보려는 입장을 수용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발전의 총체적 과정에 연관시켜 사회적 변화를 견인하였던 시대정신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교리적 가르침 또한 정치적·사회적 조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초기불교의 시대적 상황을 규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당시 대중들이 겪고 있었던 괴로움들, 그들이 지녔던 대망의식(大望意識), 그렇게 이루어진 사회의식 등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이 책의 주요 과제이다. 

사실 초기불교에 대한 역사·사회적 통찰 방식은 많은 분석가들의 의해 기본적인 관점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여건이 초기불교의 담마·가치관·세계관 등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도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정신적 가치를 과도하게 사회·경제적 조건의 산물로 환원시키려는 유물론적 경향에 대해서는 경계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붓다의 교법에 대해 명상적·철학적 통찰과 역사적·사회적 통찰이라는 중층적·시스템적 통찰의 산물로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초기불교가 유구했던 인도 정신사의 계승자였던 동시에 기원전 7~5세기 새로운 사회적 조류를 대변하는 시대정신의 담당자였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 수많은 자료들이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들로 볼 때 초기불교의 역사성과 사회성은 부정할 수 없는 본질적 특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초기불교 고유의 정신적 가치인 깨달음·해탈·열반 등의 가르침을 단순히 역사적·사회적 현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명상적·철학적 통찰과 역사적·사회적 통찰이라는 중층적 방법론을 취하는 저자의 관점은 충분한 설득력과 타당성을 지닌다.

4.    
저자는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초기불교에 일단의 초점을 모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요 가르침에 대한 교리적 해석으로 넘어간다. 나아가 실제적인 사례의 분석을 통해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 과정을 밝힌다. 이러한 구도는 튼튼한 짜임새를 지닌다고 할 수 있으며 일관된 안목으로 초기불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을 통해 저자는 초기불교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지양하는 개가를 올린다. ‘오로지 개인적인 평안을 얻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시각과 ‘사회적 부조리의 해소에만 주력했던 혁명적 가르침’이라는 주장을 한꺼번에 뛰어넘는다.

특히 저자의 교리 해석은 오온·십이처·십팔계 등에 대한 설명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오온에 대한 전형적인 잘못된 해석 방식의 하나로서 요소론적(要素論的) 접근이 있다. 이러한 요소론적 이해는 인간 자신을 물질적 요소로 환원시켜 인격적 가치마저 회의하고 부정하게 만드는 논리적 위험성을 내포한다. 《밀린다팡하》에 등장하는 나가세나(Nāgasena) 존자의 ‘수레 분해의 비유’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은 외도의 유물론적 사고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며, 니까야 도처에서 붓다 자신에 의해 강력하게 비판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온은 요소적 실체가 아니며 ‘자아의식’ ‘나라는 생각’ ‘나라는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즉 부딪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위하고 식별하는 가운데 형성된 자아의식의 흐름이다. 붓다는 바로 이것이 차별과 탐욕과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며 모든 개인적·사회적 괴로움의 뿌리가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기적 자아의식을 치유하고 해소하기 위한 의도에서 오온의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오온은 무아(無我)의 교설과 연계되어 등장한다. 그 이유는 오온으로부터 벗어나는 실천적 체험의 과정이 곧 무아이기 때문이다.

십이처와 십팔계의 가르침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이처와 십팔계는 여러 갈래의 의식이 발생하고 증장하면서 존재를 조작해 내는 과정을 밝힌다. 특히 중층의 사회적 조건들이 연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오온적 자아의식을 형성하고 마침내 개인적·사회적 괴로움을 유전시켜 나가는 구조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십이처와 십팔계에 따르면 개인적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거대한 사회적 조건이 존재해 있으며, 사회적 의식화의 시스템 안에 놓인 개인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기적 집단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는 실마리는 과연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을까. 일단은 잘못된 견해 혹은 세계관이 성립하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며, 그릇된 세계관을 변화시키려는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라야만 한다. 십이처와 십팔계에 대한 통찰은 의식이 형성되는 사회적 조건을 해명하는 동시에 그릇된 세계관을 해소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이것의 구체적 사례로서 뿐나(Puṇṇa) 비구의 전법 운동을 지목한다. 십이처와 십팔계에 대한 무아 통찰은 사회적 재난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실천적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오온·십이처·십팔계·십이연기·무상·고·무아·사띠 등의 교리를 해석해 나간다. 이러한 시도는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축적된 선행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해석에서 저자만의 독특한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기존의 연구물이 안고 있던 논란의 여지를 그대로 떠맡는 경향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간의 단편적인 성과들을 저자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꿰뚫어 일관된 맥락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는 높게 평가할 만하다. 바로 이 점에서 저자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책 전체를 관통하여 드러나는 저자만의 뚜렷한 시각은 추후 이 분야에서 계속될 후속 연구들에 대해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임승택 / 경북대 철학과 교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박사). 주요 논문으로 〈대념처경의 이해〉 〈선정의 문제에 대한 고찰〉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궁극 목표에 관한 고찰〉 등이 있고, 역·저서로 《바가바드기타 강독》 《빠띠삼비다막가 역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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