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림 시인
며칠 전 k가 어린 당귀 잎이며, 부추, 머위, 천궁 등 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채소가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목요일,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매주 목요일 여섯 명의 여자들이 모여 책을 읽고 시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한 것이 십수 년 되었다.

혼자 읽기에는 아무래도 벅차고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같이 공부하는 심정으로 소리내어 한 행 한 행 더듬듯 읽고 분석하는 일이 모임의 성격이다. 그간 장자 노자 하이데거, 후설, 흄, 들뢰즈, 보르헤스 조주, 임제, 벽암, 막스 피카르트, 르클레지오 등 동서고금의 빛나는 철학자, 소설가, 시인들이 우리의 토론 속으로 끌려나와 읽히고 토론되었다.

때로 얕은 사유의 틀 속에서 헤매다 길을 잃는 철학자들도 있었으나 몇 번씩 되풀이 읽고 생각하는 동안 대게는 실마리를 풀어놓았고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뇌리에, 가슴에, 한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 시간은 우리가 무엇이고 무엇이라는 온갖 이름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는 시간이었으며 온갖 그럴듯한 이론과 말도 안 되는 분별의 세계로부터 한발 물러나 불가지(不可知)의 시공 너머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경이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난 뒤 회원들은 외양에서 풍기는 이미지뿐 아니라 인생관까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본인들의 실제 생활도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시라는 요물을 정복해 보리라는 생각이 언뜻언뜻 드러나던 초기의 그들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유롭고 깊은 사유를 가진 기품 있는 시인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물을 들고 온 k는 그들 중의 하나다. 그녀는 처음 만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깊이가 보이긴 했지만 수년의 독서를 통하여 더욱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처음 만날 때 그녀는 30대 초반의 어린 주부였다. 남편은 삼 형제 중 차남이었지만 그녀가 홀시아버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장남도 아닌데 왜 굳이 시아버님을 모시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그저 웃음으로 답을 대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타고난 효부였다.

그녀의 효도는 누가 시킨 것도 누구의 강압에 의한 것도 아니고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비교적 일찍 혼자된 시아버님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사는 젊은 애인을 만나는 것을 알고는 10년이 넘도록 매달 용돈을 드리고 아이들 학비까지 보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따금 그녀가 두 분을 태우고 남해안 쪽을 돌아왔다고 말할 때는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해 멤버들은 안타까움을 넘어 위선이 아니냐고 힐난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랑곳없다는 그녀는 듯 그저 웃었고 자신은 그렇게 20년이 흘러갔다고 했다.

수년 전 연세가 너무 많아진 시아버님을 배신한 그 젊은 애인 때문에 노인은 우울증과 함께 치매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시아버지를 위해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시 살림을 정리하고 강화로 거처를 옮겼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시설에 보내자고 성화였는데 그녀는 어떻게 아버지를 그런 곳에 보내고 잠을 자고 밥을 먹느냐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남편은 외국에 발령이 나 떠나고 커다란 집에 치매 할아버지와 그녀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또 몇 년, 시아버님은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노쇠해져, 그녀는 시아버지를 누인 채 대소변을 받아내고 식사 수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우미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외출은 한 주일에 한 번 독서회에 나오는 것이었다.

작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그 와중에도 적지 않은 농사를 혼자 짓던 그녀가 오늘은 도저히 못 나가겠다고 전화를 해 왔다. 어디 아프냐고 했더니 며칠 전, 지붕에 낙뢰를 맞아 집안이 아수라장이라며 팔다리에 힘이 없어 걷기도 힘들다고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집에 누가 있느냐고 물으니 시아버님과 자신뿐이라고 했다.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져 시아버님 상태는 어떠냐고, 의식은 있느냐고 다그쳤고, 그녀는 담담하게 의식은 있으신데 전혀 곡기를 못 드신다고, 벼락이 떨어진 것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도 두어 달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무슨 소설 속에서나 볼 그 낙뢰의 밤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바로 머리 위에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집이 흔들 했어요. 순간 집안의 모든 전기 콘센트에서 불꽃이 튕겨 나왔어요. 그리고 캄캄해졌어요. 무심코 밖을 보니 칠흑 속에서 주먹만 한 불덩어리들이 집을 휩싸고 굴러다니고 있었어요. 그냥 아득했어요. 한참 후에야 시아버님 방에 가 보니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여전히 눈을 치켜뜨고 고요히 누워 계셨어요. 캄캄한 우주 속 작은 행성에 아버님과 단둘이만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아버님께 다가가 미음 한술을 떠서 조금 열린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는데 그분은 그걸 삼키셨어요. 얼마나 감사하던지 눈물이 울컥 쏟아졌어요. 그리고 문득 무섬증이 사라졌어요. 내 곁에는 살아계신 아버님이 있다. 내 곁에는 아버님이 있다…… 내게 최면을 걸듯 정신없이 중얼거렸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고 물들지도 더럽혀지지도 않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환한 존재의 실상을 보았다.

얼마 전 그녀의 시아버님은 구십오 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그녀는 말한다.

“참 이상하죠. 불과 몇 달 전 일인데 왜 이렇게 까마득 옛날처럼 생각되는 걸까요? 하루에 두어 번 그분이 누워계시던 방에 들어가 그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봐요. 그리고 혼자 묻죠.  ‘여기 누가 있었지?’”

 오늘 우리는 임제를 읽었고 그녀가 가지고 온 당귀며 머위 잎으로 쌈을 싸 먹었다.

임제가 물었다

“한 사람은 무궁한 세월 길에 나와 있었으나 집을 떠나지 않고, 한 사람은 집을 떠났으나 길에 있지 않으니 어느 쪽이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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