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라디오를 틀었더니 원양어업으로 성공한 스페인 교포가 자신의 사업 성공담과 철학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의 말인즉, “기업은 절대적으로 이익을 내야 선(善)이다.”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장사는 돈을 벌어야 하고, 농사꾼은 많은 수확을 거두어야 한다. 경제의 원칙은 최소자본으로 최대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야 망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인정사정없이 돈 생기는 일에 혈안이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특성이자 한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잣대로는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는 집단도 있다. 아무리 모든 가치는 돈으로 좌우된다 해도 종교집단만은 달라야 한다. 만약 종교단체가 이념집단이 아니라 이해집단이나 이익집단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종교단체는 더 이상 성스럽다거나 신성하다는 평가나 존경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속사회가 종교인이나 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종교인이나 단체가 가난하지만 신성하고 성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극히 정신적이어야 할 종교인들마저도 세속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무엇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불교를 비롯해 다양한 종교가 판을 펼치고 있는 종교백화점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종교 간의 대립과 투쟁이 빈번한 다른 나라의 환경과 비교한다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일견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가 우리나라만큼 잘 보장되는 나라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국의 종교들은 국가로부터 많은 보호와 혜택을 받고 있다. 우선 국민의 종교 선택에 대한 헌법적인 보장이 있고, 법률적인 면세 혜택도 있다. 그런 종교가 국가사회에 기여하는 길은 올바른 교리전파와 종교적 헌신을 통해 평화와 자비의 봉사와 호혜평등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종교가 우리 사회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우리나라 불교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부끄러운 일은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비롯된 일인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교리]을 설하고 돈을 받는 일이다. 이른바 사찰에서 하는 교양대학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돈을 받고 입학시키고 돈을 받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건 부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생각해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주의 근본법칙이며 질서로서 불교도나 우리 국민뿐 아니라 전 인류의 공유 가치다. 그걸 불교교단에서 선점하였다고 하여, 그 설명의 대가로 돈을 받으면 ‘대동강 물을 판 일과 뭐가 다른가?’ 하는 의심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절에서 메주와 차를 팔고 생수도 버젓이 팔고 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는 것이 없다는 소릴 들을 법도 하다. 물론, 이런 일련의 일들은 절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불사(佛事)를 이루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렇게까지 하랴!’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한갓 평범한 사람에게도 체통이 있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수행자들이나 집단은 더 큰 체통이 있어야 한다. 우리 불교의 체통은 경률론 삼장에 대한 믿음과, 오랜 역사와 세상을 이롭게 하고 인도하는 깨달음의 실천에서 형성되는 존엄과 자긍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이런 체통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해선 위엄이 있어야 한다. 위엄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여 알맞게 행동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설령, 아무리 굶어 죽을 처지에 있어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끝내 뿌리쳐야 하고, 많은 이익이 있어도 의롭지 않으면 외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성철 스님의 올곧은 언행은 불교가 지켜야 할 체통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정신적인 집단인 불교가 가야 하는 길이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불교의 위엄과 덕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절 안의 가게를 절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절 밖의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손대지 말아야 한다. 나라의 면세 혜택 속에서 포교전법의 본분사보다 장사를 우선하면 대기업의 빵집보다 더 가혹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거나 불사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해도,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한다는 소릴 더 이상 들어선 절대 안 된다. 경률론을 벗어나는 비법이나 탈법, 무법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옛 전거를 편리하게 아전인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장사는커녕 철저하게 ‘보시와 공양’에 의존해 살아야만 한다. 신도들의 신앙인 헌신적인 이 ‘보시와 공양’을 절약하여, 가난한 이웃들과 나눠야 한다. 이런 원칙과 검소한 생활로 절은 우리 사회에서 부의 분배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인이 못하고 자본주의가 못하는 일을, 불교도들은 평상심의 일상적인 수행으로 할 수 있다. 그래야 비로소 불교의 위엄이 서고 영(令)이 설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달려와서 지혜를 구할 것이고,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아도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어 올 것이다. 하물며, 누가 절에서 하는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랴? 원래 부처님은 인류의 스승이시기에 우린 의당 그렇게 살아야 하리라. 

설령, 백번 양보하여 절에서 템플스테이 등으로 부득이 돈을 받는다 해도 명분이 두렷해야 하고, 매우 싼 값으로 겨우 받는 흉내만 내어야 한다. 우리 국민이 들으면 기분 좋을 만큼, 세계인들이 알면 딴 세상의 일로 입이 딱 벌어지도록 말이다. 얼마나 훌륭한 자비문중이며, 얼마나 놀라운 포교이겠는가?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서민들에겐 절망적인 이 세상에서……. 적어도 부처님의 후손들이라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엄숙히 자문해 보고 싶다. 지나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안성 도피안사가 시설한 자연장의 모란동산은 ‘대웅전 봉건 동참’ 기념으로 동참자들에게 증여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불교가 나라로부터 면세혜택을 받는 신흥귀족 집단이라는 말을 들어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오로지 본분사에 충실해야 하고, 그를 통해 세상의 횃불이 되어야 한다.

라디오에서 했던 교포의 그 말이 옳다. 기업은 선해야 하고, 나라는 정의로워야 한다. 그리고 불교는 끝까지 성스러워야 하리라!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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