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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점(頓漸) 논쟁 새로 읽기* / 박태원
[51호] 2012년 05월 18일 (금) 박태원 twpark@ulsan.ac.kr

성철(退翁性徹, 1912~1993) 선사(이하 존칭 생략)의 돈오점수 비판과 돈오돈수 주장은 가히 선불교 돈점논쟁사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성철이 《선문정로(禪門正路)》(1981)에서 제기하고 있는 돈점론에는, 깨달음(悟)과 닦음(修)의 문제를 돈(頓)과 점(漸)이라는 상반된 개념 조합으로 소화하는 선종 내 모든 통찰의 요점들이 계보학적으로 승계되어 얽혀 있고, 관점의 차이와 쟁점이 가장 선명한 형태로 표출되어 있다.

성철의 돈점론은, 선종의 돈점론을 가장 체계적이고도 성공적으로 종합하여 깨달음과 닦음의 선불교적 모범 답안을 마련한 분으로 평가받던 지눌(知訥, 1158~1210) 선사(이하 존칭 생략)를 정면적인 비판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한국 선불교의 표준 수행 준칙으로 간주되어 온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선문 정통의 배반이며 정법(正法)의 최대 장애물이라고 맹공하고 있다. 초인적 수행을 통해 탁월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으로 존중받던 성철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진정성을 가지고 실참(實參) 현장에서 던진 돈오점수 비판이었기에, 성철의 돈점론은 한국 선불교의 관행과 토대 자체를 흔들어 버리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성철의 돈점론이 촉발시켜 전개된 돈점 논쟁을 구성하는 주제들은, ‘돈오(頓悟)/점수(漸修)’ ‘증오(證悟)/해오(解悟)’ ‘지해(知解)/해애(解碍)’ ‘화엄적 해오/화엄 성기사상에 의거한 원돈신해(圓頓信解)/화엄선’의 문제로 그 초점이 모아진다. 지눌에 대한 성철의 비판이론은 ‘지눌의 돈오=해오=지해=해애=화엄=교가(敎家)’의 일관된 등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돈점 논쟁에서 대답해야 할 핵심 질문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1. 지눌의 돈오/해오는 분별 알음알이 지해인가?’ ‘2. 지눌의 돈오는 화엄사상, 특히 성기사상의 반영이고 그 선문적 전개인가?’ 그리고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돈오란 무엇이고, 해오와 증오와 구경각은 어떻게 겹치고 어떻게 갈라지는가? 또 돈오와 점수의 관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의 문제와 곧바로 얽힌다.

이와 같은 돈점 논쟁 논란거리들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독법의 구성이 요청된다. 필자는 그 새로운 독법의 구성 조건으로서 “언어로 인한 분별의 구성과 그 극복” “분별의 두 가지 통로−‘이해/관점에 의한 분별’과 ‘마음에 의한 분별’” “분별 극복의 두 가지 방식과 돈오−‘정견/혜학적 돈오’와 ‘정학적 돈오’” “돈오와 반조/회광반조”의 문제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마련된 독법에 의해 돈점 논쟁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관점들이 가능해진다.

1) 지눌의 돈오/해오는 ‘화엄적 돈오/해오’에 국한되지 않고 두 가지 맥락의 돈오로 이루어져 있다. ‘화엄적 돈오/해오’와 ‘선문적/정학적 돈오’가 그것이다. 그리고 ‘화엄적 돈오/해오’는 삼학적 불교 수행론의 분별 극복 방식 가운데 ‘정견/혜학적 돈오’ 계열에 속하고, ‘선문적 돈오’는 ‘정학적 돈오’의 계승이다.

2) ‘화엄적 돈오/해오’는 ‘정견/혜학적 돈오’ 계열이기에 정견/혜학적 돈오의 문제점과 한계를 계승한다. ‘지식/이성/논리를 통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인 ‘정견/혜학적 돈오’가 안고 있는 한계는 그 내용상 성철이 비판하는 지해/해애의 문제다. 따라서 지눌의 돈오를 화엄적 돈오/해오로 규정하고 돈오점수를 화엄 성기사상을 담는 선문적 용기(容器)로 간주하는 시선을 유지하는 한, ‘지눌의 돈오/해오는 지해에 불과하고 선문에서 화엄선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야 한다.’는 성철의 주장은 타당하다. 지식/이성/논리를 통한 정견적 돈오만으로는 내면화된 분별문법에서 탈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3) 선문은 마음의 분별문법에서 빠져나오는 정학적 돈오에 집중하는 전통이다. 그리고 정학적 돈오인 선종 선문의 돈오를 성취하는 수행방법의 요점을, 선종에서는 ‘반조/회광반조’라는 말에 담고 있다. 지눌은 돈오와 반조를 연결시키고, 반조에 의해 ‘언어에 의한 분별적 이해’의 극복을 설한다. 따라서 지눌이 설하는 ‘반조를 통해 성취하는 돈오’는 화엄적 돈오/해오가 아니라 정학적 돈오로 보아야 한다.

4) 정학적 돈오로서 지눌의 돈오는 지해라 할 수 없다. 그 방식의 속성상 지해 범주에서 탈출하기가 좀처럼 어려운 정견적 돈오와는 달리, 지해적 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오는 것이 반조/회광반조를 통한 정학적 돈오이기 때문이다. 지눌은 이 정학적 돈오를 성취하는 최고의 수행법으로서 간화선을 지목한다. 간화선은 반조/회광반조법의 새로운 버전이므로, ‘반조를 통한 정학적 돈오’와 ‘화두 참구를 통한 정학적 돈오’는 지눌에게 불화나 단절이 아닌 연속이다.

5) 정학적 돈오가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오는 것이고, 지눌의 돈오에는 그런 돈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왜 점수가 필요한가?’가 그것이다. 돈오점수에 관한 지눌의 설명을 보면, 돈오 이후에도 돈오 국면으로써 대처해야 할 분별망상 습기를 거론하고 있다.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왔을지라도 다시 돈오 자리를 놓치고 분별문법 안으로 말려들어 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돈오 국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간수해 가는 오후보임(悟後保任)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돈오점수의 비(非)궁극성을 문제 삼는 성철의 관점에 따른다면, 이러한 돈오는 비록 지해의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오는 국면을 열었을지라도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 진정한 돈오라 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다.

6) 그런데 진정하고 완전한 돈오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돈오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돈오의 수준 문제이다. 돈점론의 돈오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정학에 집중하는 선문에서 ‘점’과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돈’에 어떤 내용을 부여해야 하는가이다. ‘돈’ 고유의 정체성이 어떤 내용으로든 부여된 이후에야, 그 ‘돈’의 수준이 거론될 수 있다. ‘돈오의 정체성’과 ‘돈오의 수준’은 구분되어 거론되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정체성 따지기’가 ‘수준 따지기’에 선행해야 한다. 분별지해의 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오는가 아닌가를 돈오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이 정학적 돈오의 핵심이며 돈오점수의 돈오도 그런 것이라면, ‘점수’는 돈오의 수준 문제가 된다.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옴’이라고 총칭될 수 있는 돈오의, ‘다양한 정도와 수준’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인 것이다.

7) 남종 선문 전통에서 지해종사가 아닌 본분종사로 존숭되는 분들도 돈오 이후의 수행 노력을 역설하고 있다. 간화선을 집대성한 대혜선사 역시 ‘오매일여(寤寐一如)’로까지 나아가야 함을 설하는 동시에, 돈오 이후 돈오에 의거한 점수라 할 수 있는 오후보임(悟後保任)의 필요성을 설한다. 수행 현장을 보거나 역사적 증언을 보더라도, 돈오를 곧장 깨달음의 궁극적 경지(究竟覺)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돈오와 구경각 사이의 중간지대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수행의 실제와 현실에 부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중간지대는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온 국면/자리를 지속적으로 간수해 갈 수 있는 정도나 수준의 편차’를 의미한다.

그 ‘통째로 빠져나옴/휘말리지 않음’이 선명하고 강할수록 그 국면을 지속시켜 가기도 용이할 것이다. ‘휘말려 들어감과 휘말리지 않음’의 분기점과 차이가 직접 체험으로 확보되고 간별(揀別)되지만, 대상을 대할 때 방심하는 순간 또다시 분별문법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수행 현실에서는 다수일 것이다. 놓쳤다가도 언제든지 반조를 챙겨(화두를 챙겨) ‘말려들지 않는 자리’를 다시 확보할 수 있는 정도의 돈오가, 아마도 돈오와 구경각 사이 그 중간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문득 ‘통째로 빠져나온 국면’을 챙긴 사람이라 해도, 그 빠져나옴의 선명도와 강도가 아직 미흡하여, 방심하면 곧 빠져들고 챙기면 곧 다시 빠져나오는 정도의 돈오가 일반 유형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통째로 빠져나오는 국면’을 열고 그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돈오로서의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돈오군(頓悟群)’에 속한다.

8) ‘삼관(三關) 돌파’며 ‘돈오돈수적 완결’이며 하는 지침은, 돈오와 구경각의 중간지대에서 어기적거리거나 안주하는 태도를 겨냥한 것이라면 타당하다.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자신에 관한 증언 역시 ‘자나 깨나 탐/진/치에 전혀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니, 부처 되고자 뜻한 장부라면 ‘다시는 빠져들지 않는 돈오’ ‘빠져들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휘말리지 않고,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환하게 드러난 돈오’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 지당한 지침이 수행 현장에서는 힘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데 문제가 있다. ‘통째로 빠져나옴’과 ‘못 빠져나옴’의 그 현격한 차이를 체험적으로 확보한 것만 해도 존재 차원의 엄청난 도약이기에, 자칫 그 성취에 도취하거나 허세를 부리며 ‘안 말려들기의 오매일여적 완결’을 향한 행보에 느슨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철의 장군죽비는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9) 언구로 나타난 것만을 보면, 성철이 돈오점수에 관해 전개하는 비판의 초점은 ‘화엄적 돈오/해오’에 있다. 화엄적 돈오/해오가 내용상 정견/혜학적 돈오 계열에 속한다는 관점이 타당하다면, 성철은 ‘선문의 돈오는, 지해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운 정견/혜학적 돈오가 아니라, 분별의 지해문법 자체에서 쑥 빠져나오는 정학적 돈오’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셈이다. 성철은 정견/혜학적 돈오의 한계와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화엄 원돈신해의 언어를 통해 선문 안에 정견/혜학적 돈오가 혼입되면 정학적 돈오와의 차이가 불투명하게 되고, 그 결과 선문의 초점인 정학적 돈오의 정체성과 지위가 혼탁해지는 것을 염려했을지 모른다. 간화선을 찬양하면서도 집요할 정도로 화엄 원돈문을 선문 안에 포섭하는 지눌의 태도에서, 성철은 정학적 돈오의 면모와 생명력이 자칫 묻혀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배타적으로 보일 정도의 강한 어조로 지눌의 화엄 수용을 비판하며 선문과 원돈문을 분리시키려 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성철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최대 공헌은 불교 수행론에서 ‘정학적 돈오의 제자리 돌려놓기’일 수 있다. 

10) 그렇게 볼지라도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 이론은 간과하기 어려운 문제점도 안고 있다. ‘돈오’를 구경각인 증오(證悟)로 정의해 버림으로써, 돈오와 구경각의 중간지대를 없애 버린 것이 그것이다. 이 중간지대를 부정해 버릴 경우,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옴’이라는 정학적 돈오 고유의 정체성과 지위가 불투명해져서, 돈점론의 수행론적 의의와 가치 자체가 희석되거나 묻혀버린다. 수행의 선행조건으로서 돈오를 거론하는 돈점론적 통찰의 의미와 가치가 증발해 버릴 위험성이 있다. ‘오직 화두 의심으로 삼관돌파하여 구경각인 증오를 성취해야 돈오’라는 식의 정의(定義)는 돈오에 대한 너무 과격한 단순화이다. 이 점에서는 수행 현장에서 확인되고 증언되는 다양한 ‘돈오군(頓悟群)’을 수용할 수 있는 언어적 공간이 성철에게 요구된다.

11) 돈점 논쟁은 의미는 결국 언어 문제로 귀결된다. 지눌은 화엄 원돈문이 언어적 분별인 지해의 해애를 한계로 안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하면도, 또한 반조로써 화엄원돈의 그 언어적 분별지해의 덫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면서도, 성철의 지적처럼 끝내 화엄 원돈신해를 선문에 끌어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 성철은, 그 어떤 유형의 언어적 지해일지라도 그것을 선문에 연루시키는 순간 선문 고유의 생명력은 사라진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화엄의 원돈신해는 명백히 언어적 지해인 교가(敎家)일 뿐이므로 돈오점수에 화엄 원돈문을 포섭하려는 지눌의 태도를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라 판결한다.

언어는 분별의 구성과 해체 과정 모두에 관여한다. ‘이해와 관점’ 및 ‘마음’에 의한 분별 구성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가 하면, 지식/이성/논리를 통해 ‘이해와 관점의 분별’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핵심 통로가 되거나, ‘마음의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오는 ‘전환의 매개 역할’을 한다. 언어가 지니는 존재 구속과 존재 해방의 상반된 양면성을 모두 포착하여, 존재 해방의 길에서 언어 부정과 언어 긍정을 쌍으로 굴리는 것이 불교의 전통적 언어관이다. 언어를 통해 언어의 함정을 깨우쳐 주고, 언어를 통해 언어의 덫에서 풀려나는 도리와 방법을 알려줄 뿐 아니라, 언어를 통해 분별 극복장치를 작동시킨다.

지식/이성/논리를 통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은 결국 언어에 의한 언어의 자기 교정이다. 그런데 이 교정 방식은 사후적으로 생겨난 언어적 성찰과 개안을 누적하고 이월시키는 형태여서, 지각 현장에서 즉각적/전체적 교정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선행하는 언어 관념의 범주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이런 점에서 근원적으로 ‘언어 분별적 교정’에 그칠 수 있다는 한계를 잉태하고 있다. 지눌과 성철이 지적하는 ‘화엄 원돈신해의 지해적 측면과 그 장애(解碍)’는 ‘지식/이성/논리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이 지니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해/견해 바꾸기’를 이지적으로 추구하는 정견/혜학적 수행이 봉착하는 일반적 문제 상황이다.

지눌과 성철은, 화엄 원돈신해 속에서, 지식/이성/논리를 통해 이해와 관점을 바꾸어 가는 수행에 내재하는 언어 분별(言解, 知解)의 덫을 공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엄 원돈신해를 취급하는 태도에서는 상반된 길을 걷는다. 언어 분별의 덫에 걸리기 쉬운 ‘언어에 의한 언어 교정’을, 한 분은 수용하고 한 분은 배제한다. 갈림길의 분기점은 무엇일까?

지눌은 선과 교의 소통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언어를 통한 지적 탐구와 이해의 향상이 돈오 견성의 필수적 기반이라 보고 있다. 그의 선교일치 사상이나 돈오점수 사상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이 점을 충분히 확인시키고 있다. 그의 통합적 선사상에는 ‘언어에 의한 지적 향상’을 수행론의 필수 요건으로 수립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눌의 이러한 언어 긍정은, 그 문제점과 한계를 충분히 알면서도, ‘지식/이성/논리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이 돈오 견성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불교 수행론의 삼학적 구성체계가 지니는 의미를 정확히 계승한 것이다.

‘돈오 견성’이라는 용어로 번역된 해탈/열반의 궁극적 관문, 존재 구속의 타향에서 존재 해방의 고향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턱은, ‘제대로 보지 못함(無明)’을 ‘완전하게 제대로 봄(明)’으로 바꾸는 일이다. 따라서 돈오견성/해탈열반의 이 마지막 관문은 ‘이해와 관점의 완벽한 치유’로써 통과된다. 온갖 종류와 수준의 분별 환각을 지탱하던 ‘이해/관점의 병증의 뿌리’는 ‘궁극적 통찰/지혜/해탈지/해탈지견’에 의해 완전히 뽑힌다.

그런데 ‘지식/이성/논리를 통한 이해와 관점의 치유’ 방식만으로는 ‘언어적 분별/지해’의 덫에서 탈출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언어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치유’는 존재 해방을 위한 모든 과정에서 선행/전제되어야 한다. 타향살이에 대한 반성적 성찰, 고향으로 시선을 맞추는 목표 설정과 조준의 정확한 안목, 타향에서 헤매게 하는 길과 고향으로 가게 하는 길을 제대로 간별해 내는 지성의 수준과 힘을, 먼저 그리고 항상 튼튼하게 다져야 한다. 존재 해방의 여정은 출발지에서 종착지까지 ‘언어의 자기치유적 인도’를 받아야만 한다. 이것이 팔정도 정견 수행의 핵심 역할이며, 또한 이 정견은 모름지기 ‘돈오적 정견’이 되어야 그 혜학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한다.

‘지식/이성/논리에 의한 이해와 관점 교정’(정견, 정견/혜학적적 돈오)은 ‘마음의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오는 수행(정학, 정학적 돈오)’을 제대로 가동하는 기초가 된다. 정학적 돈오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의한 이해와 관점 교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삼학의 구성 형식에서는 계학과 혜학과 정학이 별개로 설정되고, 또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 선후관계가 의미를 갖지만, 실제로 수행이 가동된 이후에는 이들 삼학은 곧 내용상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연루되고 상호의존/상호작용하면서 각각의 내용과 수준을 향상시켜 간다.

이런 점에서 언어적 통로에 따라 이해/견해를 교정해 가는 수행(정견/혜학)과, 분별문법 자체에서 마음의 시선을 돌이켜 통째로 빠져나오는 수행(정학)은, 별도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결합하여 ‘이해와 관점의 완벽한 치유’로써 ‘완전하게 제대로 봄(明)’을 구현한다기보다, 이미 정학의 체계 안에 ‘언어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 작업’이 기초 조건으로 들어와 필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팔정도의 ‘올바른 선정 수행(正定)’의 내용인 사선(四禪) 가운데 초선(初禪)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위따카(vitakka, 尋) 위쨔라(vicāra, 伺)가 포함되어 있는 점을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음미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눌이 화엄 원돈신해의 지해와 해애를 지적하면서도 선문 안에 화엄 원돈신해를 포섭하려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지눌은 존재 해방의 여정에서 ‘지식/이성/논리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이 왜 필요하고 얼마나 요구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결과 ‘언어 수용’에 대해 적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동시에 그는 선문 고유의 생명력인 정학적 돈오의 의미와 가치도 정확히 파악하였기에, ‘언어를 통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에 도사리고 있는 언어적 분별(知解)의 덫을 반조와 화두참구를 통해 풀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지눌의 선사상이 지니는 체계적 종합성과 균형성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 종합적 선사상 체계를 통해 지눌은 일관되게 ‘언어(敎)는 충분히, 적절하게, 적극적으로 쓰자’는 입장을 천명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성철의 적대적일 정도의 언어(敎, 知解) 부정적 태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지눌은 화엄종에게 선종을 이해/설득시켜야 하는 종파적 지형을 대면하고 있었고, 성철은 이미 우위와 주도권을 확보한 선종에서 그 내부의 병폐를 일소해야 하는 문제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상황적 접근만으로는, 성철의 돈점론을 해명 내지 수긍하기가 어렵다.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은 무엇보다도 돈오 견성이라는 선문의 보편적 과제를 실존적 관심에서 본질적으로 다루는 것이지, 시대 배경이나 환경적 요청에 응하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엄 원돈신해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로서의 돈오’=‘분별 알음알이 지해’=‘언어적 분별의 덫(解碍)’=‘이론적 탐구(敎)’라는 등식에 의거하여, ‘언어적 알음알이에 걸린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언어적 분별이 뿌리째 뽑혀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무분별/무념이 저절로 펼쳐지는 돈오돈수’를 천명하는 성철의 언어 부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불문(佛門)에 들어온 유일한 목표는 ‘부처 되기’라는 점을 철저한 의미로 확인시켜 수행 목표를 분명히 하고 수행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것이 성철의 의도였고, 돈오의 내용과 의미를 가장 완전한 수준으로 천명해야 선문의 생명력이 회복/유지될 것이라 하는 것이 성철의 문제의식이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성철 돈점론은 사실상 특별한 사상적 의미를 지니기가 어렵다. 지눌이 포섭하고 있는 화엄 원돈신해의 지해/해애를 정면으로 비판하여 지눌 선사상에 대한 과대평가나 편향성 여부를 점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의미를 부여해도 역시 아쉬운 점이 남는다. 관점에 따라서는 성철의 돈점론은 지눌 선사상의 체계적 종합성과 균형성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받을 수 있다.

성철이 원색적인 ‘교학 무용론’을 펼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수행 과정에 지식이나 이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외면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지식이나 이론 축적과 관련된 그분의 공부 이력이나, 교학의 필요성에 대한 그분의 설법을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하다. 지해와 관련된 성철의 언어 부정적 태도가, 모든 지식/이론/논리를 해로운 분별 알음알이(知解)라고 간주하여 외면하는 형태의 언어부정이라면, 그런 태도는 불교적이지도 않고 인류 보편의 합리적 통찰과도 충돌한다. ‘지식이나 이론, 논리에 눈 돌리지 말고, 그런 것들은 다 내려놓고 오직 화두 의심 하나만 제대로 들고서 오매일여가 될 때까지 가라’는 성철의 언어 부정은, 특수하고도 제한된 맥락에서 그 의미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 특수한 맥락은 바로 선문의 생명력인 정학이고, 더 세밀하게는 ‘정학적 돈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도의 사유 능력을 지녔고, 그 사유 능력은 바로 언어 능력이다. 그리고 언어에 의한 존재 환각을 치유하려면 ‘이해와 관점’을 치유해야 하고, 이 치유 과정에서 지식/이성/논리라는 언어적 통로를 활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식/이성/논리를 통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은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불교의 삼학 수행론에서는 혜학과 더불어 정학을 시설한다. 언어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을 토대로, 혹은 그것과 상호작용하면서, ‘분별문법’ 자체에서 통째로 빠져나오는 ‘정학적 돈오’를 겨냥한다. 이 정학적 돈오를 통해 분별문법에 휘말리지 않는 국면/자리에서 대상을 만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와 관점의 완전한 치유’가 구현된다. 정견/혜학적 수행과 정학적 수행이 비록 내적으로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그 정체성이나 성격, 초점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언어와 수행의 관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인간적’ 삶과 경험이 언어적 사유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존재 환각에 의한 분별이 ‘언어적 구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환각과 분별 치유 또한 ‘언어적 방식’에 치우쳐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행위의 분별’이나 ‘마음의 분별’을 치유하는 방식보다는, 지식/언어/논리를 통해 ‘이해와 관점’을 치유하는 방식에 기울어질 수 있는 존재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삼학으로 본다면, 계학이나 정학보다 정견/혜학의 선호와 편향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불교 교학의 전개 양상이나 수행 현장에는 ‘분별의 언어적 치유방식’으로의 편향적 선호가 목격된다. 아울러 정견/혜학과는 그 성격과 초점이 다른 정학마저 ‘이해와 관점의 언어적 치유 방식’ 맥락에서 읽어내는 경향이 있다.

지눌과 성철이 대면했던 교학의 대표는 화엄학이다. 그리고 그들 눈에는 화엄 원돈신해가 ‘언어적 방식을 통한 이해와 관점 교정’의 전형이었다. 화엄 원돈신해문에 대한 지눌의 관점에는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화엄에서 말하는 뜻과 이치가 가장 원묘(圓妙)한 것이지만 이 모두가 식정(識精)이 듣고 이해하여 두루 헤아린 것이기 때문에, 선문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경절문에서는그 모든 것을 ‘불법을 알음알이로 이해하는(知解) 병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문 가운데 이와 같은 원돈신해의 ‘실상(實相)을 담는 언어와 가르침(如實言敎)’이 마치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 그것을 ‘죽은 글귀(死句)’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에 따른 장애(解碍)’를 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초심 학인을 위하는 것이라는 것은, (초심 학인들이) 아직 경절문의 활구를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일컫는 언어(稱性圓談)’를 드러내어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 또 원돈신해문에 의한다면 이 열 가지 지적 이해(知解)의 병도 진성연기(眞性緣起)라서 취하고 버릴 수가 없는 것이라 하지만, 그러나 언어로 의미를 따져 듣고 이해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처음 발심한 사람도 믿어 받아들이고 받들어 지닐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경절문에 의한다면, 직접 증득하고 은밀히 계합함에 언어로 뜻을 따지는 것이 없어 (언어를) 듣고 이해하여 헤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비록 ‘법계가 걸림 없이 연기한다는 이치’일지라도 ‘언설에 따라 이해하는 장애(說解之礙)’가 된다.” 

어디 화엄뿐이랴. 정학의 핵심 내용인 ‘지관(止觀)’에 대한 천태의 언어를 보면, 인간에게 거의 본능으로 새겨진 ‘언어적 사유의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절감케 된다. ‘지식/이성/논리를 통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이 분별 극복에 필요하고 중요한 수행 방식이긴 하지만, 그것은 결국 언어적 분별의 덫에 걸리기 쉬운 속성을 안고 있다는 점, 그리고 팔정도 삼학에서 정견/혜학 수행에 해당하는 ‘언어(지식/이성/논리)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이 바로 화엄 원돈신해의 핵심이라는 점-이것이 교학/교가에 대한 선종 선문의 시선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성철은 ‘교가의 정견/혜학적 수행과 선문의 정학은 혼동하지 말아야 할 상이한 수행법이며, 정견적/화엄적 돈오를 선문의 돈오에 결합시키면 정학이 생명력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혜학과 정학이 혼동되고, 그에 따라 정견적 돈오와 정학적 돈오의 차이가 묻혀버리면, 인간의 그 강력한 ‘언어적 면모’로 인해 정학적 돈오마저 정견적 돈오에 편입되어 정학의 정체성과 생명력은 상실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문의 언어를 반야공(般若空)/무아정견(無我正見)의 논리에 의거하여 소화하려는 경향이 범람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추정에 힘을 싣게 된다.

선종 선문은 불문(佛門)의 후학들에 의해 갖가지 맛으로 풍성하게 차려진 언어 성찬의 영양가를 못 미더워한다. 비록 법(法)의 언어를 표방하기는 해도, 정작 또 다른 형태의 희론 분별을 증식시킬 수 있는 언어 수용방식들을 경계한다. 팔정도 정념(正念)에서부터 선종의 돈오 견성과 간화경절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문에서는 당장의 마음 국면으로 하여금 희론 분별의 언어 계열과 범주, 그 분별문법에서 ‘통째로(頓)’ 빠져나오는 자리와 능력 확보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선문은 그 어느 불교 전통보다도 언어에 예민하다.

언어가 희론 분별의 물줄기를 타고 흘러가는가, 아닌가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다룬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각기 언어를 희론 덫에 걸리는 쪽으로 쓰는가, 풀려난 자리에서 혹은 풀려나는 쪽으로 쓰는가를 세밀하게 간변(揀辨)하는 안목과 능력의 계발 및 성취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 선종 선문이다. 선종 선문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기치를 세우는 것, 그러면서도 가장 독특한 언어를 고안하여 펼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사정의 산물이다. 육조혜능의 돈오견성 법어 이래 간화선어(看話禪語)에 이르기까지, 선문의 생명을 이은 자손들에 의해 펼쳐지는 그 강렬하고 독특한 언어 개성들을 보면, 역설적으로 선문이야말로 최고의 언어 전문가 집단이라 칭하고 싶어진다.     

선문에서는 지금 당장 언어를 내거나 듣는 자의 바로 그 마음이, 언어를 어떤 집안으로 드는 문으로 삼는가를 예의 주시한다. 말하는 자가, 듣는 자가, 둘 사이의 대화가, 말을 통해 희론 분별의 마구니 집안으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희론 분별경계(相)를 좇아가지 않는 자리에 서는가, 그리하여 비틀어지거나 가려지지 않은 온전한 모습(實相)과 그대로 만나는 여래 집안으로 들어가는가를, 곧바로 직접, 면밀히 알고 스스로 조정하는 능력 계발과 확보에 전념한다. 마치 관문에 버티고 서서 안팎을 살피며 드나드는 것을 검찰(檢察)하여 문을 여닫아 주는 수비대장처럼, 선문의 학인은 순간순간의 마음 국면에서, 언어로 인해 열리는 희론 분별의 문은 닫고, 분별문법에서 통째로 빠져나와 무분별(無分別) 여실지(如實知) 자리로 가는 문은 활짝 열 수 있는 능력에 사활을 건다.

그러기에 선문에서 득력(得力)한 이들은 그 성취 수준에 비례하여 언어 능력이 향상된다. 이때의 언어 능력은 지식의 양도 아니고, 지식 습득 능력이나 구사력도 아니며, 정교하고 풍성한 사변 지식력도 아니다. 선문의 언어 능력은 그 초점이 언어 관문(關門)의 관리 능력에 있다. 언어 관문이라 함은, 분별의 산물인 경계(相)를 좇아가 매달리는 마음 계열과 그렇지 아니하는 마음 국면(정념/화두의심)이 갈라서는 문이며, 언어를 매개로 희론 분별과 무분별 여실지(如實知)의 자리가 나뉘는 문이다. 선문 학인이라면 희론 분별의 언어경계(相)를 좇아 나가는 문과, 멈추어 상(相)에 휘말려 들지 않는 문, 그 나들목 언어 관문의 열고 닫힘을, ‘곧바로 직접’ 미세하게 아는 능력의 확보와 향상에 모든 역량의 초점을 맞춘다. 선문의 정학에서 제대로 득력한 이들은 이 언어 관문의 관리력에서 가히 최고의 수준과 기량을 보여준다. 지식이 많든 적든, 어눌하든 달변이든 간에, 선문에서 밝아져 쉬게 된 이들은 그 성취 수준에 상응하여 관문 언어의 감별(鑑別)과 관리 능력이 고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진정한 고수들이다.

성철은 이러한 선문적 언어 능력을 극대화시킨 분이라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언어가 분별문법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지 아니면 통째로 빠져나오는 문이 되는지, 그 두 문의 열고 닫힘을 한 생각 사이에 간별하여 관리하는 능력이 고도화된 분으로 보인다.

그리고 ‘언어에 의한 이해와 관점의 교정’으로서의 정견/혜학에서는 언어가 자칫 ‘분별의 문’에 그칠 수 있다는 점, 선문의 정학과 정학적 돈오에 의해 ‘분별문(分別門)인 언어’를 ‘진여문(眞如門)인 언어’로 굴릴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하는 선문 종사가 바로 성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해오인 돈오=화엄 원돈신해=지해=해애=교’라는 등식에 의거한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의 맥락과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에 의한 이해와 관점 교정’ 수행의 전형인 화엄 원돈신해를 선문 안에 끌어들이는 것은, 정견/혜학과 정학의 차이도 식별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의 언어 본능 때문에 결국 선문의 수행도 정견/혜학에 편입시켜 돈오를 지해 범주에서 파악하게 되고, 그 결과 선문의 정학적 생명력은 고갈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지눌에 의해 선문 안에 혼입된 화엄 원돈신해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지 않으면, 인간에 내면화된 강력한 언어적 유혹으로 인해 정학의 정견/혜학화(化)와 정학의 고갈이 초래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화엄 원돈신해에 대해 포섭과 배제로 갈라지는 지눌과 성철의 태도는, 결국 삼학 가운데 특히 혜학과 정학의 관계에 대한 태도 설정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지눌과 성철은 모두 정견/혜학에 내포된 ‘언어적 분별(知解)’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런데 지눌은 정학을 통해 비로소 혜학이 완전해진다는 점을 확신하는 선사이면서도, 혜학과 정학의 분리할 수 없는 결합 관계와 상생적 상호작용을 주목한다. 자신이 몸담았던 불교계의 현실에서, 그는 혜학과 정학의 상호 소통과 상호 의존이 교단적/사상적으로 재확인/재확보 되어야 할 필요를 절감했던 것 같다. 혜학적 언어 능력과 정학적 언어 능력의 상호 포섭을 시대적 요청으로 읽었고, 그래서 그는 화엄 원돈문의 언어적 기여와 간화경절문의 지해 용융(鎔融)능력을 선문 안에 공존시키려 했다.

반면 성철은 혜학과 정학의 상생적 상호작용보다는, 혜학에 의한 정학의 왜곡과 훼손 가능성을 더 주목한다. 선문에 화엄 원돈문 같은 혜학을 끌어들이면, 본능과도 같은 인간의 언어적 면모로 인해 선문 구성원들의 수행 풍토도 혜학의 언어적 방식으로 편향되어, 결국 정학 고유의 면모는 왜곡되고 망실되어 정학 자체의 토대가 훼손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정학적 돈오는 정견적 돈오에 편입되어 결국 ‘지해로서의 해오’를 정학적 돈오로 착각하게 되고, 그 결과 ‘분별문으로서의 언어’를 ‘진여문으로서의 언어’로 바꾸어 굴리는 선문 특유의 언어능력도 묻히고 말 것이라 판단했을 수 있다. 성철은 인간의 언어 본능으로 인한 지해의 문제를 그가 몸담은 교단의 현실에서 여러 형태로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철은 화엄 원돈문의 흔적을 선문에서 일소(一掃)하는 것으로써 혜학과 정학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그렇게 해야 혜학도 살고 정학도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눌은 ‘분별의 언어적 치유’에 우호적이다. 그래서 지해의 덫을 알면서도 화엄 원돈신해를 끌어안는다. 불교 수행론의 삼학적 구조를 감안할 때, 그의 이러한 태도에서는 종합성/체계성/균형성이 돋보인다. 반면 성철은 ‘분별의 언어적 치유’를 경계한다. 혜학의 언어적 속성으로 인한 정학의 왜곡과 훼손에 극히 예민하다. 화엄 원돈문이 선문 안에 들어와 행세하게 되면, 사자 몸 안의 기생충처럼 결국에는 언어 분별적 지해가 정학적 돈오를 오염시킬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과격할 정도로 원돈신해의 언어적 치유 방식과 해오를 공격한다.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뿌리 깊숙이 ‘언어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성철의 판단과 문제의식 역시 만만치 않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화엄의 원돈신해를 매개로 삼아 혜학과 정학의 관계를 각자의 현실 인식 속에서 파악하는 지눌과 성철의 관점과 태도는 분명 상반된다. 그리고 그 차이를 초래한 각자의 문제의식과 대응은 모두 선문의 활로와 생명력을 확보하는 데 요긴하다. 따라서 두 분의 차이를 굳이 시비나 우열 판단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눌과 성철의 차이와 불화는 해소나 봉합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대상이다. 두 분의 차이와 불화를 그대로 두자. 그래야 선문에 대한 두 분의 기여가 서로를 살린다.

12) 돈점 논쟁의 의미가 결국 ‘인간과 언어’의 문제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한 가지 더 짚어볼 대목이 있다.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은, 깨달음의 성취와 진리 파악이 자신에게 제공할 변화에 대해 예비적 전망을 품기 마련이다. 구도의 동기와 의욕의 토대가 되는 그 깨달음의 전망에 대해 붓다는 일관된 지침을 설하고 있다. 진리나 깨달음은 삶의 결핍과 불안(苦)을 궁극적으로 해소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탐욕·성냄·어리석음으로 분류되는 존재 불안의 세 요인들(三毒心)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지혜와 자비가 대체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진리에 접근한다는 것, 이를 위해 삼학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두 탐욕·성냄·어리석음의 해소 과정인 동시에, 삶과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지혜)과 보편적 사랑 및 공감 능력(자비)을 계발, 확장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붓다가 설하는 선정도 일상의 경험과는 층이 다른 신비 경험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정의 심화 과정은 바로 인식의 미망 극복 과정이며, 그 내용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의 해체로서 설명된다. 선정 수행은, ‘끝없이 가열되는 자아적 욕구(탐욕)’ ‘타자들을 향한 부정과 공격의 태도(성냄)’ ‘존재와 관계에 대한 이해와 관점의 결핍(어리석음)’에 휘말려 들지 않게 되는 자기 변화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선정은 불가사의한 신비 의식이라기보다는 삶의 미망과 오염을 구체적으로 극복해 가는 자기 변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선정 수행의 과정이나 내용 및 목표를 일상에서 확인 가능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언어’로써 설하는 것이, 붓다가 제공하는 ‘깨달음의 전망’이고 ‘언어적 예비그림’이다.

이에 비해 성철이 제시하는 ‘깨달음의 언어적 전망’에는 주목해야 할 언어적 변이가 목격된다. 《선문정로》에 의하면, 견성이라고 하는 선문의 깨달음은, ‘제8식의 미세한 무명과 망상까지 극복한 상태로서,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한결같은 경지(寤寐一如, 熟眠一如)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豁然大活, 廓徹大悟) 내외명철(內外明徹)하며 무심무념(無心無念)하고 상적상조(常寂常照)한 경지’이다. 그리고 이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이론적 탐구나 지성적 이해를 배제하고 오직 공안만을 참구해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의 전망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일상 인식의 영역과는 다른 매우 특수한 의식 영역을 그려보게 한다. 비록 무명이나 번뇌의 극복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일상 인식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제8 아뢰야식이라는 깊고 깊은 층의 식(識) 영역에서의 일이라는 점에서, 아직 견성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그 아뢰야식 차원에서의 무명과 번뇌를 극복한 경지가 어떤 것인지를 일상의 구체적 삶과 연관시켜 전망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한결같은 경지(寤寐一如, 熟眠一如)’여야 하고 또 거기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豁然大活, 廓徹大悟) ‘내외명철·무심무념·상적상조한 경지가 되어야 깨달음’이라고 하는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깨달음이란 것은 일상 인식의 영역과는 전혀 다른 매우 특별한 식(識)의 어떤 국면’이라는 전망을 지니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것은, 일관되게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일상적 삶의 오염 요인과 관련하여 깨달음의 전망을 설하는 초기불교의 입장과 비교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언어적 변이’를 반영하고 있다.

만약 깨달음에 대한 ‘언어적 예비 그림’이 듣는 이로 하여금 ‘일상의 경험을 벗어난 매우 특수한 식(識)의 층에 관한 그 어떤 신비 체험’이라는 전망을 지니게 한다면, 그것은 구도의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선문의 길에 들어선 구도자가 ‘일상 인식의 영역을 초월한 매우 특수한 의식 상태나 신비 영역’을 깨달음의 조망으로 간직하게 된다면, 그것은 초기불교에서 제공하려는 깨달음의 전망과 비교할 때 과연 ‘불교적’으로 적절한 것일까?

유식학의 언어를 빌어 ‘제8식의 무명과 망상까지 뿌리 뽑히는 돈오 견성이 바로 탐욕·성냄·어리석음이 근절된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탐욕·성냄·어리석음의 해체 작업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제8식의 무명 망상’이라 칭할 수 있는 깊숙한 뿌리까지 들어내야 삼독심의 온전한 해소이고 완전한 해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에 관한 전망을 어떤 언어로 제공하는가의 문제 역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인식과 언어의 깊고도 밀접한 관계를 생각하더라도 언어 선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돈오 견성에 관한 《선문정로》의 언어 선택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을 극복하는 일상의 작업’이라는 불교적 초점을 흐리게 할 소지가 있다. 모든 형태의 해오와 점수 및 분증(分證)마저 강하게 부정하는 돈오돈수의 언어는, 깨달음의 전망과 과정을 ‘일상과 무관한 저 높은 신비 영역’으로 이동시켜 불교와 현실의 접점을 불필요하게 제한 내지 왜곡시킬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불교계에는 일종의 돈오돈수적 비약주의가 있다. 오직 화두의심만 들고 있다가 한번 터지면 곧바로 도인의 걸림 없는 경지가 펼쳐지리라는 기대가 의외로 흔하다. 그런 기대를 품은 이들은 단번의 비약적 완결을 선호한다. 모든 개인적 욕구와 기대의 완벽한 형태를 투영시킨 신비 영역의 그림을 깨달음의 전망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단번에 한꺼번에 이루고 싶어 한다. 난해한 선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운용하는 분들을 그 모범적 선구자로 흠모하면서.

그러나 화두의심만 들면 단기간에 이루어질 것 같아 보이는 깨달음의 비약적 완결은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깨달음의 비약에 성공했다는 소수의 득력자(得力者)도 있다.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난해한 선구(禪句)를 굴린다. 그런데 그들의 경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그들의 체득은 불교적으로 얼마나 적절하고 또 완전한 것인가? 그들의 깨달음은 불교적 진리 실현과 얼마나 상응하고 있는가? 그들 스스로는 자기 깨달음의 수준과 내용을 어떤 기준으로 재고 있는가? 오매일여는 삶의 어떤 지평이 끊임없이 연속되는 것인가? 

깨달음 여하를 가름하는 붓다의 기준은 분명하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해소 정도가 그 가늠자이다. 탐·진·치 삼독의 극복 능력이 도력이고, 번뇌에 휘말리지 않는 능력(漏盡通)이 신통이다. 다양한 형태의 아만과 아집, 자아적 소유욕, 배타적 독선과 폭력성, 무지와 오해와 편견과 선입관들에 갇힌 폐쇄성, 그로 인해 막혀버린 자기 치유력,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응축된 비루한 권력욕-이런 것들이 한 인격 속에서 얼마나 근원적으로 해체되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 해체 능력의 정도 여하에 따라 깨달음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언어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예비 전망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깨달음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이나 진리 실현의 의미와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우선 심사숙고하라. 깨달음의 길, 진리 탐구의 과정이란 것은, 걸어간 만큼 탐·진·치가 해체되고 지혜와 자비의 두 축이 내 몸에서 뿌리내리는 과정이다. 깨달음을 단번의 비약으로 성취되는 일회적 완결로 전망하지 말라. 그 어떤 질적인 도약도 탐·진·치 해소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해오(解悟)·분증(分證)이든 증오(證悟)이든 간에, 그 성취가 자기 일상의 삶에 과연 어떤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어떤 체득이 탐·진·치의 해체에 얼마나 근원적으로, 어느 정도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수행으로 인한 변화가, ‘탐욕에서의 해방’ ‘무집착의 자유와 평안’ ‘타자에 대한 보편적 우호’ ‘무지/편견/오해/독단/독선/선입견의 해체와 교정 능력’으로 얼마나 이어지는지, 그것을 깨달음의 경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깨달음의 길에서 일체의 해오와 점수 및 분증(分證)을 무시하고 있는 돈오돈수적 언어는, 자칫 이와 같은 깨달음 전망의 불교적 초점에서 일탈된 인상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선문정로》가 설하는 돈오 견성의 경지나 의미 역시 탐·진·치의 해소라는 불교 전통의 계승임은 명백하고, 또한 돈오돈수적 언어들이 탐·진·치 해체의 매우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맥락을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구도의 초심자에게 제공하는 깨달음의 전망과 관련하여 볼 때는 그 언어적 인상의 초점이 자칫 ‘탐·진·치’라는 일상의 경험 영역에서 비켜날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 구도자로 하여금 일상의 탐·진·치 문제를 제쳐놓고 ‘특수한 신비 영역으로의 도약’을 꿈꾸게 할 소지를 지니고 있다. 만약 이러한 우려가 일리를 지니는 것이라면, 깨달음에 관한 돈오 견성의 언어들, 특히 돈오돈수적 언어들은, 그 초점이 항상 탐·진·치라는 일상의 문제영역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을 애써 의식해야 한다. 돈점 논쟁이 한국 불교의 미래 구성에 바람직한 규정력을 지니려면,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 전망’을 흐리거나 그 초점에서 일탈하지 않게 하는 언어적 배려 내지 보완이 선문의 관심사가 되고 과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

 

박태원 /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양대 법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박사(박사학위 논문 ‘대승기신론 사상평가에 관한 연구’). 주요 논문으로 〈원효 화쟁사상의 보편원리〉 〈돈오의 대상 소고(小考)〉 〈화두를 참구하면 왜 돈오견성하는가?〉 등과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사상연구》 《의상의 화엄사상》 《인문고전 깊이읽기–원효》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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