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구독신청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세미나중계
     
한국불교 역사상의 조계종* / 최병헌
―조계종의 역사와 해결과제
[51호] 2012년 05월 18일 (금) 최병헌 shilrim9@snu.ac.kr

1. 머리말: 조계종의 위상과 문제점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는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을 비롯한 기존의 종단 외에도 새로운 종단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난립하여 그 수가 이미 200여 개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역사성과 정통성, 종지와 종풍, 소의경전, 종무행정 체제와 포교활동 등 종단으로서 기본적인 요건과 골격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어서 불교계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 위에 불교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러한 유사종단이나 사찰들 가운데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을 연상시키는 비슷한 종명을 사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계종이 아니면서 ‘한국불교조계종’ ‘현대불교조계종, 세계불교조계종’ ‘근본불교조계종’ 등 대한불교조계종과 혼동을 주는 ○○○○조계종이라는 유사 조계종의 명칭을 사용하는 곳이 무려 30여 곳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명성에 편승하여 프리미엄을 챙기기 위한 이러한 명칭 도용은 종교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양식도 저버린 행위임은 물론이요, 조계종의 정체성을 훼손시키고, 나아가 한국불교계 전체의 도덕성까지 상처를 입히는 해악을 끼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조계종 측에서는 지난 2004년부터 종명의 무분별한 도용과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특허출원 및 업무표장 등록을 추진하고 관련 법령을 정비하는 한편, 조계종에 속하지 않은 단체나 사찰의 무단도용을 적극 제지하기로 하는 등 종단 차원의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리고 조계종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명칭 사용의 혼돈 상황을 막아내는 일에 머물지 않고 조계종의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를 통하여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계종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조계종이라는 명칭 자체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는데, 한국불교는 참선, 교학, 염불 등을 아우르는 통불교의 전통을 이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의 명칭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선종의 역사성만을 강조하는 조계종이라는 명칭은 한국불교 스스로의 영역과 역사성을 축소시키고 있기 때문에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변할 수 없는 이름이고, 선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거나 간화선 지상주의에 빠지는 것은 1,700여 년 이어온 한국불교의 전통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체성 논의에서 일차적으로 걸리는 문제가 ‘선인가? 간화선인가? 통불교인가?’ 하는 성격 규정인데, 이 문제는 조계종의 정체성의 확립, 그리고 나아가 한국불교의 발전 방향을 모색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는 단순히 종지와 종풍과 같은 사상적인 차원의 논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계종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가 관념적인 성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국불교사에서의 역사적 사실의 문제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조계종의 명칭과 정체성의 문제가 불교계의 현안으로 대두된 것을 계기로 하여 조계종의 역사를 재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계종이라는 종명은 중국이나 일본불교사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한국불교사에서만 중국의 선종을 도입하여 조계종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중국의 선종은 9세기 이후 임제종, 위앙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등이 성립되어 이른바 5가7종으로 발전되었으며, 한국은 신라 말기 이후 이러한 중국 각파의 선종을 단계별로 받아들여 왔음에도, 그것들을 종파 이름으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일본불교계가 중국의 임제종과 조동종을 전수해 가서 각기 그것을 그대로 종파의 이름으로 삼았던 사실과도 달랐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불교 종파들이 대부분 중국의 종파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과도 구분된다.

조계종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불교의 고유한 종명으로써 한국 선종의 주체적인 의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조계종이 차지하는 비중이 모든 면에 걸쳐 매우 크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으며, 오늘날 조계종의 명칭을 도용하는 불교단체나 사찰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조계종의 커다란 위상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조계종이 구체적인 종파의 명칭으로 등장한 것은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12세기 전반에 대두된 고려의 조계종이었는데, 조선 세종 6년(1424) 모든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할 때까지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조계종이었는데, 1945년 해방되면서 조선불교(뒤에 한국불교로 개칭)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54년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개칭되고 1962년 통합종단으로 발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고에서는 조계종의 역사를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하여 각각의 창립 경위와 역사적 의의를 밝혀보려고 하는데, 각 시기 불교교단의 상황과 관련지어 이해를 추구하려고 한다. 특히 현대 조계종의 출범과정에서의 문제점과 역사적 과제를 지적해 보려고 한다.

2. 고려시기의 조계종: 천태종의 창립과 조계종

고려시대의 조계종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성립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으나, 12세기 전반기에는 종파를 의미하는 조계종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조계종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조계(曹溪)’라는 말은 이미 사용되어 오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조계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중엽 신라의 선승들이 중국 남종선 계통의 선을 받아와 선문을 개창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나말여초의 선승들 비문에 기록된 조계의 의미는 남종선의 6조 혜능을 일컫는 말이지 종파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혜능이 광동 지방의 조계 보림사에서 조사선을 크게 선양하여 뒷날 조계는 곧 혜능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사실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9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선종은 이른바 5가7종으로 종파가 나뉘어 발전되었고, 한국의 불교계에서도 5가 7종의 선종을 차례로 받아왔음에도 중국의 종파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 적이 없었다. 줄곧 혜능 곧 조계에 기원을 두어 그의 문손이라는 의식이 이어져 오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교종의 종파에 대응하는 선종의 공식적인 명칭은 구선선문(九山禪門)으로 불려 왔었다. 구산선문은 각기 독특한 기풍을 가진 종파의 의미보다는 혜능의 선풍을 계승한 법손들의 9곳 근거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12세기 이후에는 구산선문 대신에 조계종이라는 구체적인 종파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한 천태종(天台宗)의 창립이었다. 11세기 이후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 계통의 화엄종과 법상종이 중앙 불교계의 양대 주류를 이루면서 사상적으로는 일승불교와 삼승불교로 대립하고, 정치적으로는 고려 왕실과 문벌귀족 간의 권력 싸움에 연루되어 파란을 겪게 되었다.

반면에 9~10세기 불교계의 신주류로 등장하였던 선종 계통의 구산선문은 제3종단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때 화엄종 출신의 의천은 왕실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불교계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그 방법은 천태종을 개창하여 구산선문의 승려들을 포섭함으로써 법상종에 대한 화엄종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의천은 천태종의 본산으로 국청사를 새로 개창하고 교단을 조직하였는데, 오로지 선승들만을 개종시켜 천태종으로 옮겼다.

이 결과 구산선문의 승려들은 천태종 개창에 참여하는 부류와 선문을 지키려는 부류로 양분되게 되었다. 원응국사 학일(1502~1144)의 비문에는 새로운 천태종으로 옮겨 간 사람이 60~70%였다고 하였는데, 이 숫자는 물론 과장된 것이지만, 처음 천태종을 개창할 당시에 참여한 구산선문 승려가 약 1,000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로써 천태종의 개창은 고려의 불교계에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종파를 추가하는 데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고, 기존 종파 간의 균형에 변동을 일으켜 불교계의 전면적인 개편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구산선문에는 두 그룹으로 분열되는 커다란 타격을 입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구산선문을 고수하려는 선승들은 천태종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결속을 다질 필요성에서 혜능의 선종을 계승하는 종파라는 의미의 조계종이라는 새로운 종명을 칭하여 천태종과 양립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구산선문은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나뉘었는데, 구산선문 가운데 천태종에 주로 가담한 산문은 희양산문, 봉림산문, 사자산문 등이었던 반면에 조계종의 중심을 이룬 산문은 사굴산문과 가지산문이었다. 의천이 세상을 떠난 뒤 사굴산문에서는 혜소국사 담진이 예종 대의 왕사, 국사로 책봉되고, 가지산문에서는 의천의 끈질긴 천태종에로의 참여 권유에도 끝까지 불응하였던 원응국사 학일이 인종대의 왕사로 책봉된 것을 계기로 하여 이후 이 두 산문이 조계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고려 말기의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에까지 이어졌다.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칭하기 시작한 분명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숙종 2년(1097) 이후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로 보며, 늦어도 대감국사 탄연의 비석이 세워지는 명종 2년(1172)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추측건대 사굴산문의 담진과 가지산문의 학일이 활약하던 예종-인종 대(1106~1146)에는 천태종에 대응하는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칭하게 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일찍이 이능화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조계산 정혜사(뒤에 수선사로 개칭)를 개창하여 선풍을 크게 선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계종이 창립된 것으로 보았으나, 지눌은 원래 사굴산문의 출신으로서 정혜결사를 통하여 새로운 수행공동체를 조직하였으나, 교단을 이탈하여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하였을 뿐이고, 새로운 종파를 개창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다시 사굴산문으로 재편입되었다. 이 점에서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정면에서 교단의 개편을 추구하였던 의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지눌은 자신은 “해동 조계산수선사” 또는 “대승선종 조계산수선사”라고 칭하였을 뿐이고, 조계종이라는 종파 이름을 지칭한 적이 없었던 것을 보아 혜능의 법손으로서 정체성 확립을 통하여 세속화된 조계종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구산선문은 의천의 불교계 개편 작업으로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 두 종파는 조선 태종 6년(1406) 11개에서 7개의 종파로 통폐합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이 두 종파 가운데서도 특히 조계종에서는 무인 집권기에 지눌을 배출하여 한때 기성 종단에서 이탈하면서까지 사상적으로 선교통합을 추구하면서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지눌의 사법제자인 혜심에 의해 다시 조계종에 재편입됨으로써 조계종의 발전에 커다란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중국 임제종의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선종으로서만이 아니고 고려 전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어 크게 번성하였다.

조선 초기 11종이 7종으로 통폐합되는 과정에서도 가장 커다란 종파로서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세종 6년(1424) 7종을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함으로써 조계종이라는 종파의 명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양종도 연산군과 중종 대를 거치면서 폐지되었다. 명종 대에 일시 부활된 적이 있으나, 명종 21년(1566) 문정왕후와 보우의 사망을 계기로 하여 선교양종이 완전히 폐지됨으로써 무종파의 산중불교 시대로 들어갔다. 서산대사 휴정 이후 간간이 선교양종 또는 조계종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종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실체가 없이 관례적으로 사용되었던 것뿐이었다. 한국불교사에서 조계종이라는 종파의 명칭은 1941년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1424년 폐지된 이후 실로 517년 만이었다.    

3. 일제강점기의 조계종: 조선총독부의 식민지불교정책과 조계종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억압을 받아 침체하였던 불교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일본 불교인들을 해외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삼아 한국에 진출해 오면서 한국불교인들은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라는 두 가지의 모순된 과제를 놓고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궁내부 소속으로 관리서를 설치하고 사사관리세칙을 제정하여 오랫동안 방치하여 왔던 전국의 사찰에 대한 관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 중에 성과 없이 2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불교계에서는 1906년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불교연구회를 창립하였으나, 2년 만인 1908년 원종 종무원으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원종이 1910년 일본 조동종과 연합조약을 체결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에 반대하여 창립된 임제종과 대립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찰령이 반포되고 한국의 모든 사찰을 직접 통제하는 직할체제가 시행되면서 원종과 임제종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완전히 강점하게 되자, 병합 이전 침략 과정에서 침략의 첨병으로 앞세웠던 일본 각 종파의 불교인들 대신에 한국불교인들을 직접 장악하여 식민통치에 활용하려는 방향으로 불교정책을 변경하였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사찰령과 본말사제를 통하여 분할통치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조선불교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한편으로, 선교양종이라고 하는 조선 초기의 불교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주겠다는 취지를 표방함으로써 1566년에 완전히 없어졌던 선교양종이라는 종명이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한국불교계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교묘한 술책의 산물에 불과했다.

한편 한국불교인들은 사찰령 폐지와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불교계 문제의 근원이 분할통치 방식에 있음을 인식하고 불교계의 통일과 총본산의 설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29년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종지와 종통을 다룬 종헌을 제정하고 통일적인 중앙의 통제기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방해와 친일적인 본산주지들의 비협조로 좌절되고 말았다. 불교계의 통일과 총본산 설립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변화와 본사주지들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하면서 지금까지의 분할통치 방식에서 통일기관의 설립 방향으로 불교정책을 변경하여 총본산 설립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지원하였다. 그리고 전쟁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가던 1940년에는 총본산 건설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오던 방식에서 직접 주관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변경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총본산건설위원회를 새로 조직하여 직접 주관하게 되면서 총본산 건설 사업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전되었다.

앞서 1938년 10월 총본산 각황사의 이전공사가 완료된 데 이어 1940년 12월에는 총본사 태고사법을 제정하여 인가 신청을 한 것이다. 그리고 1941년 4월 23일 ‘조계종총본사태고사법’이 인가 반포됨으로써 마침내 통합종단으로서 조선불교조계종이 발족되었다. 조계종은 1424년 선교양종으로 통합된 지 517년 만에 다시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총본산의 설립 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총본사의 인가를 앞두고 그 직전인 3월 4~13일에 개최된 유교법회였다. 조선총독부의 권유와 후원에 의해 개최된 법회를 통해 청정불교전통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획득하면서 그동안 총본산 건설운동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선학원 계열의 인물들을 포섭하기 위한 술책의 소산이었다. 그 결과 1937년 총본산 건설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주도하여 왔던 본사주지 계열의 인물들 외에 새로 청정비구로서 명성을 얻은 선원수좌들이 포함됨으로써 새로 발족한 총본산은 명분과 실제 양면에서 통합종단으로서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총본사의 명칭은 처음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총본산 각황사’라고 하였으나, 뒤에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 태고사’로 변경하고 전연 관련이 없는 북한산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새로 제정된 사법을 ‘태고사법’이라고 칭한 것과 함께 새로운 종단의 법통을 고려 말기의 태고보우와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이라고 칭한 것도 고려시대 선종의 대표적 종파였던 조계종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려는 의도의 소산이었다.

그러므로 태고사와 조계종이라는 명칭은 표면적으로는 한국불교계의 오랜 염원에 부응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명칭의 이면에는 한국불교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준다는 미명으로 불교계의 자발적인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고차원적인 술책에 기인한 것이었음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1911년 사찰령에 의해 30본산체제를 성립시키면서 조선 초기의 ‘선교양종’을 끌어다 종지와 종명으로 내세운 조선총독부의 정치적인 의도가 재연된 것이며, 한 단계 발전한 형태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1941년의 조계종은 당시 한국불교계의 여망에 부응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조선총독부의 필요성에 의해 새로 창립된 신흥 종단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조계종이라는 통합종단을 설립하면서도 태고사법의 상위 법령인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을 그대로 존속시키고, 아울러 그러한 법령에 의거한 31본산체제라고 하는 교단체제를 변경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계종의 총본사에 31본사 주지의 임명권이나 사찰 재산처분의 인가권 등의 실질적인 권한은 부여하지 않고 조선 총독이 계속 장악했으며, 주지들의 특권도 그대로 유지토록 하였다.

이러한 점은 조계종이 창립된 뒤에도 불교교단의 기본적인 구조는 여전히 31본산체제였음을 말하는 것이며, 불교계의 실질적인 통제권은 여전히 조선 총독이 장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총독부가 조계종과 총본사를 설립한 것은 명실상부한 통합종단의 설립과 자주적인 운영체제를 마련하려는 한국 불교계의 염원과는 무관하게 조선총독부가 31본산체제를 효율적으로 통합 관리함으로써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총동원체제에 효과적으로 부응하려는 술책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조계종의 창립은 한국불교의 발전과는 무관한 것이며, 친일적이고 어용적인 식민지불교의 완성이라는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한 중앙의 통합 관리기구와 지방 본사 사이의 교단행정 체제상의 구조적인 모순을 갖고 출발한 것이었다. 통합종단 조계종의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는 어용적인 성격과 교단행정 체제상의 구조적인 모순은 전시총동원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뒤에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식민지불교의 잔재로 계속 이어져 옴으로써 오늘날 불교 발전의 심각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4. 현대의 조계종: 불교정화운동과 조계종

1945년 해방이 되자, 불교계는 식민지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개혁이라는 과제를 안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8월 17일 조계종의 종무총장 이종욱 이하 집행부 전원이 총사직하고, 이어 18일 재경 유지 승려가 주축이 되어 임시집행부인 조선불교혁신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음날 종단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9월 22~23일 태고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식민지불교의 근간 법령인 사찰령, 동시행규칙, 태고사법, 31본말사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교단기구 구성과 본말사를 대체할 13도별 8교무원제를 결의하였다. 또한 ‘조선불교 조계종’이라는 종래의 종명을 ‘조선불교’로 바꾸고, 교정에 박한영, 총무원장에 김법린을 추대하여 교단의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일제 식민지불교의 산물인 조계종이라는 종명은 역사에서 다시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불교는 1946년 3월 7일 제1회 중앙교무회의를 열어 종지와 종통, 불교의식, 승니의 자격 등의 내용을 종합한 조선불교 교헌을 통과시켰고, 5월 28일 반포하였다. 새로운 교헌의 제정은 종명의 개정과 함께 사찰령 등의 일제 법령 폐지, 교구제와 교도제의 시행, 불교 재산의 통합 등을 통한 식민지불교 청산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법령의 폐지는 미 군정 당국이 인준을 보류함으로써 1962년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미 군정의 기독교 편향의 태도와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 교단 개혁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교단에서는 교구제를 결의하였으나, 31본산제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본사주지의 퇴진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친일지주적인 성격을 가진 본사주지들이 그대로 눌러앉은 상태에서 자주적인 성향을 지닌 중앙총무원의 간부들과 공존하는 모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중앙총무원의 임원진도 1948년부터는 조선불교 교정에 방한암, 송만암이 연이어 추대되고, 중앙총무원장에 박원찬, 이종욱 등이 연이어 취임함으로써 중앙의 종무행정기구도 일제강점기의 조계종과 실제 내용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었다. 결국 본사주지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시 퇴진하였던 조계종의 인사들이 연이어 교단의 교정과 총무원장으로 재등장함으로써 조계종이라는 종명만 바뀌었을 뿐이고, 실제 내용 면에서 식민지불교의 청산과 교단 개혁이라는 당면과제는 전연 해결되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교단 밖의 재야에서는 당시의 수많은 정치 사회단체의 출현에 편승하여 청년승려, 진보적인 대처승, 재가불자 등 다양한 부류에서 각기 단체를 결성하여 식민지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혁신단체들은 1946년 12월 선학원을 중심으로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을 발족하고, 1947년 5월 조선불교 총본원이라는 별도의 종단기구를 구성하여 교도제와 사찰의 토지소유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안을 중앙교무회에 제출하였으나 채택되지 못하였다. 결국 혁신단체 측은 당시 교단 집행부로는 식민지불교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반면 집행부는 혁신단체의 노선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의구심을 표명하였다.

이렇게 교단 집행부와 총본원이 대립하여 이념 공방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총본원은 좌우익의 이념적인 갈등, 토지개혁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입장 차이 등의 문제로 내분을 겪다가 남북의 각기 다른 단독정부의 수립 이후 소멸되고 말았다. 그리고 교단 집행부는 교단의 운영 노선을 둘러싸고 폭력 사건이 벌어지는 등의 불안정한 사태가 이어지면서 불교개혁은 유야무야된 채 농지개혁과 6·25전쟁으로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

불교를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활용한 일제 종교정책이 한국불교계에 남긴 폐해는 실로 심각한 것이어서 쉽게 극복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가운데도 당장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은 비구승 중심의 교단 전통을 파괴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급속히 진행된 세속화와 대처승 양산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비구승단의 존립 자체를 크게 위협하였다.

선원 중심의 비구승들은 일찍이 1921년부터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비판하고 전통불교의 수호와 선풍의 진작을 표방하면서 선학원, 선우공제회, 선리참구원 등을 설립하는 등 선원수좌들의 수행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이들은 본사주지들의 비협조로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어 침체와 부흥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1935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조선불교 선교양종에 대항하여 선종이 주류인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내세우려는 의지에서 '조선불교선종'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선원수좌들은 수좌대회를 개최하여 선종 종규를 비롯한 각종 규칙을 제정하고 종정 이하 임원들을 선출함으로써 종단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로 선원수좌들만의 모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실제 종단의 설립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선원수좌들의 수적 열세와 열악한 수행 환경은 해방된 뒤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54년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될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박성하의 증언에 의하면, 승려 총수 6,500여 명 가운데 비구승은 4%에 불과한 260명이었던 데 비하여 대처승은 96%인 6,240명이었다. 1952~1954년 일부 사찰을 수도도량으로 지정하여 달라는 비구승들의 끈질긴 요구가 있었고, 송만암 종정도 비구승 측에 인도해 줄 것을 지시하였지만 대처승들이 주도하고 있던 교단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비구승들은 분개하여 대처승 중심의 교단을 쇄신할 것을 결의하고, 재차 중앙교무원 측에 18개 사찰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정화유시’는 불교계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담화는 이른바 ‘정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해 12월 8일까지 8차의 유시를 내려 교단의 주류를 대처승에서 비구승으로 바뀌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제 불교계의 자정노력보다는 공권력의 힘을 빌면서 파행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정화운동은 1954년에 시작되어 1962년 비구·대처승의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성립됨으로써 외형상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970년 대처승단이 태고종이라는 별개의 종단을 창립하여 비구승단인 조계종과의 분리를 선언할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되자,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처승들은 1954년 6월 20일 제13회 중앙교무회의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교헌을 개정하고, 새 총무원장으로 박성하를 선임하였다. 개정된 교헌의 내용은 교헌을 ‘종헌’으로, 종명을 조선불교에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바꾸고, 교단의 구성원을 수행승단과 교화승단으로 이원화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해방되면서 폐기되었던 조계종이라는 종명이 9년 만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선학원 중심의 비구승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정화의 좋은 계기로 간주하고 1954년 6월 24일 불교교단 정화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이어 9월 28~29일 선학원에서 제1차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여 기존의 교단기구와 종헌을 부정하고 새로 ‘조계종 종헌’을 제정하고 종회의원 50명을 선출하였다. 또한 대처승은 승적에서 제거할 것, 대처승은 호법중(신도)으로 할 것, 교권은 비구승에게 환원할 것, 종조를 보조지눌로 정할 것 등의 결의사항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임시종회를 개최하여 비구승 중심의 간부진을 구성하였는데, 종정 송만암 이외에 부종정에 하동산, 도총섭에 이청담, 아사리에 자운 등이 선출되었다.

비구승들의 이러한 결의에 대해 대처승들은 태고사에서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종래의 입장에서 삼보사찰은 비구승에게 제공하되, 호법중은 될 수 없다고 결정함으로써 양측의 현안에 대한 인식의 현격한 차이가 노정되었다. 양측의 주장이 대립되는 가운데 10월 15일 조계종 종정 송만암이 정화 취지는 찬동하나 방법론은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보조지눌의 종조설을 비판하는 환부역보설을 제기하면서 정화운동에서 이탈함으로써 비구승 측에 혼선을 일으켰다.

한편 비구승 측은 이에 대응하여 11월 3일 선학원에서 제2차 임시종회를 개최하고 간부진을 새로 구성하여 종정에 하동산, 부종정에 금오, 도총섭에 이청담 등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이어 태고사를 강점하여 ‘불교조계종 중앙종무원’과 ‘조계사’ 간판을 내걸었다. 이로써 양측의 대립 갈등은 폭력이 동원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제 조계종이라는 한 지붕 밑에 종정이 동시에 2인이 존재하여 각각 대처승 측과 비구승 측을 대표하면서 두 집 살림이 되었다. 그리고 총본사의 이름이 태고사와 조계사, 종조가 태고보우와 보조지눌로 각기 다르게 주장되었는데, 이 종조설은 불교의 전통이나 역사적인 사실의 문제라기보다는 대처승과 비구승의 대립 과정에서 명분의 수단으로 제기된 것에 불과하였다.

1954년 11월 3일 비구승들이 태고사 진입을 시도하여 대처승과 충돌한 것을 시작으로 양측의 물리적 폭력은 가열됨으로써 유혈 사태가 확산되었다. 이제 불교 분규는 종단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화 되었고, 일반 여론은 점차 비구승 측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이승만의 유시가 거듭 내려지는 가운데 문교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1955년 7월 11일 비구 대처 각 5명으로 사찰정화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8월 1일 비구 측의 주도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된 것을 기점으로 하여 종권을 비롯한 전국 사찰의 운영권이 비구 측으로 넘어가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불교 분규는 험난한 고비를 넘기는 전기를 맞게 되고, 1955년 후반기부터는 물리적 충돌 대신에 지루한 법정공방으로 전환되었다. 1956년 이후 비구 대처 양측이 제기한 소송이 80여 건에 달하여 승소와 패소가 번복되는 과정에서 소송비용으로 사찰관리권의 보호 및 쟁취에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어 사찰 환경은 황폐화되었다.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하에서 비구승 중심의 조계종단은 급변하는 정치적 파동과 대처 측의 법정공방으로 혼미를 겪게 되어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발발하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정화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쿠데타는 불교정화운동의 완결과 통합종단 조계종의 등장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군사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여 정국을 장악하면서 그때까지의 불교정화를 ‘분규’로 인식하고 불교계에서 계류 중인 75건에 달하는 소송을 일체 중지하고,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구성하여 비구·대처 측을 통합하는 종단을 구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불교 분규 수습을 촉구하는 담화가 연이어 발표되는 가운데 1962년 1월 20일 문교부장관의 종용으로 비구 측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하동산과 한국불교조계종 종정 국성우를 문교부에 출두케 하여 통합종단 설립을 위한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선서문을 작성케 하였다.

그 이후도 비구 대처 양측의 계속된 대립으로 파란곡절을 겪었으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강경한 수습 지시와 문교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불교재건위원회와 9번의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거쳐 3월 25일 통합종단의 명칭을 ‘대한불교조계종’, 교조는 ‘태고보우’로 하는 새 종헌을 확정 반포하였다. 그리고 4월 11일 제1대 종정에 비구승 측의 이효봉, 총무원장에 대처승 측의 임석진이 취임함으로써 마침내 비구 대처승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발족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통합종단의 중앙종회의원 비율 문제로 비구 대처의 대립은 다시 폭발하여 대처승 간부가 전원 사퇴하고 별도의 ‘한국불교조계종 총무원’의 간판을 내걸게 됨으로써 각각의 총무원이 따로 설치되는 결렬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법정공방에서 비구승 측의 승소로 판결이 내려지고, 문교부는 대처승 측의 한국불교조계종을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사찰령을 대체한 불교재산관리법의 시행으로 대처승을 압박하였다. 이에 1970년 5월 8일 대처승 측은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고, 비구승단인 조계종과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길고도 험난했던 16년간의 종단분규, 이른바 정화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마침내 비구승 종단으로서의 대한불교조계종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통합종단은 불교계 분쟁을 교계 안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공권력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위협에 못 이겨서 성립된 것이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와해될 위험이 내재하여 있었다. 더구나 법정공방이 지속되면서 상호 간 불신의 벽이 두꺼워져 한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끝내 분종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5. 결론: 조계종의 역사적 과제
 
이상의 고찰에서 한국불교사의 전개과정에서 조계종이라는 이름의 종파는 고려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현대 3번 등장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첫 번째는 고려 중기인 1097년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새로 개창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계종이 성립되었다. 의천이 화엄종과 법상종이 대립하는 불교교단의 개편의지를 갖고 제3종단인 구산선문의 선승들만을 포섭하여 천태종을 개창한 결과 구산선문은 분열되었다.

그리고 천태종 참여를 거부한 선승들이 천태종에 대한 선종의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성에서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종파의 이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이 성립된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1097년 이후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로 추측되며, 조선 세종 6년(1424) 모든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까지 300여 년간 존속되었다. 조계종은 선종교단의 주류로서 사상적으로 선교통합을 주도하고, 이어 임제종의 간화선을 받아들이면서 고려 말기 이후는 가장 큰 종단으로서 불교의 변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한 바 있었다.

다음 두 번째는 일제강점 말기인 1941년 4월 23일 전시총동원체제 구축이라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의해 출범하여 해방될 때까지 4년간 존속하였다. 원래 사찰령과 본말사제에 의한 일제의 불교정책은 분할통치 방식이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표면적으로는 불교계의 총본산 건설의 염원에 부응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전시총동원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분할통치 정책을 변경하여 총본산을 설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총본산의 명칭을 태고사, 종명을 조계종이라고 한 것은 고려의 불교전통 계승이라는 명분을 통하여 한국의 불교계, 특히 극소수지만 명분을 가지고 있던 선학원 계열의 비구승들까지도 회유하려는 고도의 술책이 작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에 의거한 본말사제는 그대로 유지한 채 그 하위법령으로 사법에 불과한 태고사법에 의거하여 태고사라는 총본사를 설치함으로써 지방본사와 중앙의 통합관리 기구 사이의 교단행정 체계상의 구조적인 모순을 갖게 되었다. 일제 식민지불교의 잔재로서 정치권력에 순응하는 어용성의 체질화와 함께 교단행정 체계상의 구조적인 모순은 해방 뒤에 교단 통합과 불교 발전을 가로막는 어두운 그림자로 남게 되었다.

해방되면서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양성된 식민지불교의 청산과 전통불교의 계승, 교단의 개혁과 청정승가·화합승가의 구현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갖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의 비우호적인 불교정책, 좌우익의 분열과 남북분단, 농지개혁과 6·25전란 등의 사회혼란과 민족의 시련은 불교계로 하여금 개혁의 여건을 마련할 수 없게 하였다.

해방되자 불교계는 즉시 일제 식민지불교의 청산을 표방하여 일제의 불교 관계 법령의 폐지, 31본말사제의 개편, 조선불교 교헌 제정, 조계종을 조선불교로 종명 변경, 이전 조계종 임원의 퇴진과 새로운 집행부의 구성 등을 추진하였으나, 교헌의 제정과 종명의 변경 이외에는 어느 것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우선 일제 법령의 폐지 문제는 미 군정 당국의 보류 조치로 1962년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될 때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리고 인적 청산의 문제는 교정 박한영, 총무원장 김법린 등으로 중앙집행부가 새로 구성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 조계종의 임원들이 연이어 종정과 총무원장으로 재등장하였다. 일제 불교계 모순의 핵심적인 주체인 본사주지의 퇴진과 대처승의 정리 문제 등은 거론도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를 촉구하는 담화는 이른바 ‘정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 대통령의 담화에 자극받은 불교계는 6월 20일 조선불교 교헌을 개정하여 종명을 조선불교에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변경하고, 교단의 구성을 수행승단과 교화승단으로 이원화하였다.

이로써 조계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은 세 번째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화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일제 식민지불교의 청산, 불교의 근본정신 구현과 청정승가의 구현, 한국 전통불교의 계승과 수행승풍의 회복, 계율수호와 사찰의 정화 등의 개혁 이념은 뒤로 한 채 비구승 측과 대처승 측이 각기 별도의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후 한 지붕 밑의 두 가족이 되어 태고사를 뺏고 빼앗기는 분쟁을 거듭하면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공권력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교단의 주도권은 점차 비구승 측으로 넘어가게 되어 1962년 4월 11일 비구승 주도의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0년 5월 8일 대처승 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새로 창립하고 비구승단인 조계종과의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길고도 험난했던 16년간의 종단분규, 이른바 정화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극심한 종단분규를 겪은 끝에 비구승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마침내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나,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비구승 측의 수적 열세는 지나친 정치권력과 법정소송에의 의존, 급조승의 양산, 일부 거리 깡패의 동원 등의 폭력적 방법의 반불교적 행태를 노출케 하였다. 그 결과 교단의 자주성 상실과 유사 정치집단화, 승려 자질의 하락과 파벌싸움의 고질화, 간화선 지상주의 풍토고착과 교학연구의 경시풍조 만연 등의 불행한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다.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으나, 정화운동의 개혁이념은 아직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종단분규 과정에서 남겨진 불행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조계종을 비롯한 현대 불교계의 역사적 과제로서는 우선 자기 성찰과 반성, 근본적인 개혁의식이 요구되며, 그것을 토대로 하여 ①일제 식민지불교 잔재의 청산 ②교단운영체계상의 구조적 모순의 개혁 ③정치권력으로부터 교단의 자주성 확보와 어용적 체질의 극복 ④세속화의 극복과 청정 승가의 구현 ⑤파벌싸움의 지향과 화합 승가의 구성 ⑥ 현대불교로서의 교학체계와 수행 방법 계발 등의 문제가 추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업화 민주화를 성취하고, 선진화에의 진입과 민족통일 달성의 문턱에 선 오늘날 한국사회의 역사적 과제에 불교가 어떻게 부응하고 무엇을 기여할 것인가 하는 역사의식의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최병헌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불교사 전공), 한국사연구회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고려불교사연구》 《일제침략과 불교》 등 다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