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 스님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2002년도에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에서 중국불교의 교판사상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제출하여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도에 그 박사학위논문을 좀더 다듬어 The History of Doctrinal Classification in Chinese Buddhism: A Study of the Panjiao Systems(Lanham, Marylan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6)를 최근에 496페이지 분량으로 출판하였다. 필자는 동아시아 불교학의 핵심 연구과제인 교판을 이 저서에서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이 저서를 통해서, 필자는 중국불교의 교판사상사를 통합주의와 종파주의의 교차로로 인식하였다. 이 저서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이 저서는 중국불교의 교리의 분류체계(교판)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 연구이다. 교판을 다룬 전문 서적이 아시아와 서구에서도 없다. 몇 명의 근대 불교학자들은 그들의 연구 영역에 기반하여 특정의 교판을 다루고 있다. 이 경우에,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상가를 그들의 저서에서 다룰 경우에, 그들은 그 사상가의 교판사상을 그의 사상의 일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그들은 특정의 학자의 사상의 일부분으로 교판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근대의 교판 연구자는 그 자신의 학문적 또는/그리고 종파주의적 배경에 기반하여 화엄, 유식 또는 천태의 교판 체계를 주로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화엄불교를 다루는 저서에서는 화엄교판을 그 저서의 일부분으로 다루고 있고, 천태불교를 다루는 저서에서는 천태교판을 그 저서의 일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교판사상을 포괄적으로 다룬 저서는 현재까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저서는 교판에 관한 최초의 포괄적 연구 업적이다.

둘째, 이 저서는 전자 텍스트를 통해서 중국 불교의 교판을 종합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고찰하였다. 필자는 이 저서에서 중국불교의 교판 체계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고 제안하였다. 이 두 가지의 유형은 종파주의적 교판과 통합주의적 교판이다. 종파주의적 스타일은 근대의 학문적 업적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스타일은 종파주의적 성향을 가지는 개별적 학자의 저술을 통해서 쉽게 드러난다. 통합주의적 스타일은 종파주의적 성향보다 더욱 더 미묘하고, 다양한 형태의 교판이 비교될 때 잘 드러난다.

필자는 통합주의적 교판 사상의 계보를 중국 불교의 역사에서 충실하게 검증하였다. 게다가, 필자는 중국 불교의 교판이 통합주의적 스타일과 종파주의적 스타일의 상호 교환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발전 계승되었는지 검토하였고, 이 상호 연관성이야말로 중국 불교의 교판의 역사의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제안하였다.

2. 동아시아 불교학: 통합주의와 종파주의

중국의 교판 사상은 불교의 전적과 교리를 분류하는 것이며, 기원 후 5세기에 시작되었고, 법장(法藏: 643?712)에서 대충 마무리된다. 이 교판은 중국의 불교 사상가들이 한역된 경전의 불교 사상의 다양성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 불교의 교판의 역사는 불교 전적의 번역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교판은 구마라지바(334?412)의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번역 이후에 나타나게 되고, 현장(602?668)의 번역을 통해서 대충 마무리된다. 현장의 번역에 기반하여, 법장은 기존의 불교의 경전과 교리를 그 자신의 교판의 체계로 정리한다. 법장의 이후에는 주목할 만한 번역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적인 교판의 체계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필자는 이 저서에서 최초의 교판의 체계에서부터 법장의 교판 체계까지 포괄적으로 검토하였다. 불전의 한역이 법장 이전에 일반적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법장은 중국의 교판의 역사에서 마지막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교판론자이다. 법장의 이후에는 (밀교를 제외하고) 불전의 한역이 거의 새롭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새롭게 교판을 만들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지 않았다.

필자는 이 저서에서 일본의 불교학자의 교판체계의 연구성과를 대단히 많이 참조하였다. 동아시아 불교학의 연구에서, 우리는 일본의 불교학의 성과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일본의 근대 불교학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일본에는 많은 종립대학이 있다. 이 종립대학에서, 일본의 불교학자는 특수하게 말해서 종학,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불교학을 연구한다. 그들은 그들의 종파주의적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불교를 학문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종립대학의 불교학자는 종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일본에는 몇 개의 주요 종파가 있다. 일본의 종파는 법화계열, 정토계열, 선불교계열 그리고 밀교계열로 대충 분류될 수 있다. 법화계열은 천태종과 일련종이 대표하고, 정토계열은 정토종과 정토진종이 대표하고, 선불교계열은 조동종과 임제종이 대표하고, 밀교계열은 진언종이 대표한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지만, 밀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조동종의 고마자와 대학의 교수는 조동종의 종파주의적 시각에 기본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고마자와 대학의 교수는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도겐(道元: 1200?1253)의 학문을 체계화하고 변론하기 위해서 불교학을 연구한다. 이와 같이, 다른 종립대학의 불교학자들도 각자의 종파의 종파주의적 시각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

국립대학의 불교학자는 종립대학의 불교학자와 매우 다르게 불교학을 접근한다. 그들의 관심을 특수한 종파의 창시자와 종학에 고정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상당히 자유스럽게 불교학을 검토할 수 있다. 종립대학의 불교학자들이 종학과 종학의 학문적 배경인 동아시아 불교학에 치중한 반면, 국립대학의 불교학자들은 동아시아 불교학보다 불교의 원류인 인도 불교학의 연구에 치중한다. 종립대학의 불교학자들이 보다 종파주의적인 반면, 국립대학의 불교학자들은 덜 종파주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불교는 종파주의적 색채를 기본적으로 강하게 가지고 있고, 불교학자 자신들이 대부분 승려 또는 승려의 자제이기 때문에, 그들은 종파주의적 연구에 무의식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서구, 특히 미국의 학자들에 비교해서,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그들의 관심 분야를 세분화시킨다. 게다가, 일본에는 불교학자의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그들은 불교학의 경쟁적인 연구 분위기에서 그들의 연구영역을 세분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독자는 불교문화에 어려서부터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불교학자는 서구의 불교학자보다 보다 더 특수한 맥락에서 구체적인 용어로 그들에게 불교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독자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불교의 매우 특수한 주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불교학자는 서구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동아시아의 불교를 일반적인 용어로 그리고 광의의 맥락에서 검토한다. 상당수의 서구의 동아시아 불교학 전문가들은 일본에서 직접 공부한 적이 있거나, 본인들의 지도교수가 일본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그들은 일본어로 쓰여진 서적들을 참고로 하여 그들의 동아시아 불교학을 심층화한다. 일본의 불교학의 영향에 알게 모르게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본의 불교학자만큼 그렇게 종파주의적 시각에 심하게 경도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어떠한 학문적 그리고/또는 종파주의적 관련성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일본의 불교학자는 그들의 연구의 분야에서 문헌학적 방법론을 채용한다. 우리는 일본어로 쓰여진 불교학의 논문과 저서에서 해석적 방법론을 찾기가 무척 어렵다. 특별한 해석을 하지 않고, 일본의 불교학자는 현대의 일본의 독자들을 위해서 한문으로 쓰여진 중세 시대의 불교를 현대의 일본어로 다시 소개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비록 서구의 학자들이 동아시아의 불교 원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헌학적 지식과 방법을 기본적으로 필요로 할지라도, 그들은 그 원전을 해석적으로 접근하는 데 관심이 많다. 서구의 종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는 서구의 독자와 학자들에게, 해석적 방법은 외래 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효율적이고 유용할 수 있다.

필자는 한국과 일본에서 불교학을 배웠다. 그래서 필자는 이 저서에서 동아시아, 특히 일본의 불교학자의 교판에 대한 연구업적을 통합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다루어진 바와 같이, 일본의 불교학자의 연구 주제는 매우 구체적이다. 일본의 불교학자가 교판을 다룰 때, 특정의 교판의 체계 또는 특정의 교판 사상가를 선택하여, 그들은 그 교판과 그 사상가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연구를 통해서 광의의 맥락에서 특정의 교판과 교판론자를 이해하기 힘들다.

필자는 또한 미국의 대학에서 불교학을 배웠고, 미국의 대학에서 불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동아시아 불교학의 많은 연구업적이 일본어로 쓰여져 있지만, 서구어로 쓰여진 동아시아 불교학 관련의 연구업적은 매우 한정적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미국의 학문 스타일은 매우 귀중한 영감을 필자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미국의 학문 스타일은 광의의 맥락에서 그리고 해석학적 방법으로 교판을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필자는 이 저서에서 미국의 불교학의 학문적 분위기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고, 근대의 일본의 불교학을 통합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교판을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다.

교판을 광의의 맥락에서 검토하면서, 필자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사실은 중국의 모든 교판을 두 가지의 그룹으로 기본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그룹은 통합주의적 교판과 종파주의적 교판이다. 이 저서의 전체에 걸쳐서, 필자는 중국 불교의 모든 교판 체계를 통합주의와 종파주의로 포괄적으로 해석하였다.

불교의 전적이 수 세기에 걸쳐서 중국으로 수입되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번역된 전적들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불일치와 모순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이 불일치와 모순은 중국에서 교판의 논리적 시초를 제공하였다. 번역된 모든 경전들이 붓다의 진설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불교 교설의 어느 것도 거짓일 수 없었다. 어느 경전의 권위도 부정하지 않고 불교의 교설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중국의 불교학자들은 다양한 교판의 체계를 고안하였다.
교판의 체계는 다양한 전통의 종파주의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비판적 도구로 기능하였다.

그 체계는 다른 가르침을 자신의 가르침의 하위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 교판의 체계는 해석학적 틀로 다양한 불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해석한다. 그 체계는 또한 수증론(깨달음)의 과정으로 다양한 가르침을 배열한다. 교판의 체계에서는 가장 초보적인 가르침에서 가장 수승한 가르침으로 나아간다. 각 교판은 종파주의적, 해석학적 그리고 수증론적 시각에 기초하여 고안되었다. 그리고 이 교판은 학문적인 측면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고 있다.

각자의 종파주의적 그리고/또는 학문적 배경에 기반하여, 근대의 교판의 많은 연구자는 종파주의적 교판 체계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그 (종파주의적) 교판 체계는 천태종, 화엄종, 그리고 법상종의 교판 체계로 대표된다. 필자는 교판 체계를 두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였다. 그 두 가지 그룹은 통합주의적 체계와 종파주의적 체계이다. 그리고 필자는 종파주의적 교판 체계와 통합주의적 교판 체계를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고찰하였다. 이 저서는 중국 불교에서의 교판의 시초에서 법장까지의 교판 체계를 광범위하게 고찰하였다.

필자는 통합주의적 교판 체계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동아시아 불교학 전문가들은 필자가 통합주의의 계통으로 분류한 사상가 개개인의 교판을 많이 다루었다. 그렇지만, 필자의 저서는 통합주의적 교판 체계의 계통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학문적 업적이다. 필자는 통합주의의 계통에 위치매김하고 있는 각 사상가의 각자의 교판도 기존의 학문적 업적을 받아들여 이 저서에서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즉, 필자는 통합주의의 각 교판체계를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통합주의적 교판 체계는 구마라지바(334?412)에서 시작하여 승예(僧叡: 352?436), 보디루치(527년 사망), 혜원(慧遠: 523?592), 길장(吉藏: 549?623)을 거쳐서 원효(元曉: 617?686)로 계승되었다. 이 저서에서 필자는 디지탈 불교 텍스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통합주의적 교판 체계의 계통를 증명하였다. 디지탈 불교 텍스트를 통해서, 필자는 직접 인용과 대부분은 간접 인용을 효율적으로 검색할 수 있었고, 선대와 후대의 교판 사상가간의 그리고 동시대의 교판 사상가간의 인용관계를 검토할 수 있었다. 특히, 필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통합주의적 교판 체계의 계통를 세웠다.

중국불교의 맥락에서의 통합주의와 종파주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중국불교에서의 종파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불교에서의 “종파”(宗) 의 함의는 서구의 개신교와 일본 불교의 그 용례와 전적으로 다르다. 일본 불교와 서구의 개신교와 다르게, 중국의 불교에서 종파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종파의 개념은 배타적 개념이 아니다.

종파의 분류는 교리나 실천의 차이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종파”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명목상의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면, 어떤 한 스님이 화엄종의 스님에 의해서 개산된 사원에서 살고 있으면, 그 스님은 어떤 다른 종류의 교리나 실천의 형태를 (화엄종의 교리나 실천의 형태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화엄종의 스님으로 자동적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종파의 개념은 중국 불교의 교단사에서 계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승단의 계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고승들은 세 가지 계통에 소속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가정된다. 이 세 가지 계통은 은사, 계사 그리고 법사의 체계에 의해서 각각 성립된다. 그래서 어떤 한 명의 스님은 다양한 계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동시적으로 소속된다. 동일한 사원에 거주하고 있는 스님들조차도 이 세 가지 계통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스님이 천태종의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면, 그 스님은 천태종의 스님이 된다. 만약 그 스님이 어떤 특정의 율사 스님을 계사로 수계하였다면, 그 스님은 그 율사 스님의 계통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 동일한 스님이 임제종의 선사에게서 선 공부를 하였다면, 그 스님은 임제선의 법맥을 계승하게 된다. 각자의 스님은 다양한 종파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중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 스님은 법의 계통상 선종 계열의 한 종파에 속할 수 있고, 교리적 선호도에서 화엄종의 교리를 배울 수 있고, 실천적 방법상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반복해서 염송할 수 있다.

중국의 전형적인 사원(총림)에는 여러 가지 센터가 있다. 예를 들면, 선원, 율원, 강원, 염불원 등이다. 선원에는 선 수행자가 명상을 하고, 강원에서는 불교학자가 (불교학을) 연구하고 후학에게 불교 이론을 가르친다. 율원에는 율사가 계율을 엄격하고 지키고, 불교 윤리학을 초심자들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염불원에서는 염불행자가 자신의 수행의 방편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끊임없이 암송한다. 어떠한 모순도 없이, 그 사원의 대중 스님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위의 센터 가운데 어느 하나 또는 모든 센터에서 수행 정진할 수 있다.

중국의 불교종파는 일반적으로 세 범주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교리적 종파이다. 이 종파는 천태종, 화엄종 그리고 법상종으로 대표된다. 두 번째는 실천적 종파이다. 이 종파는 선종과 정토종으로 대표된다. 세 번째는 율종이다. 모든 스님들이 금강계단에서 동일한 계를 받기 때문에, 그들은 그 계를 항상 수지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스님들이 다른 종파에 대해서 경쟁심과 배타심을 그렇게 강력하게 가지지 않고서 살아갔다.

중국의 불교의 모든 스님들은 동일한 계율에 의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계율이 비종파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른 교리적 그리고 실천적 종파를 완벽하게 배제하지 않았다. 다른 종파를 배제하기 보다는 그들은 차라리 그들 자신의 교리적 그리고 실천적 체계 안에서 다른 종파의 교리적 그리고 실천적 체계를 종합하였다.

불교의 초전 이후 법장의 시대까지, 서구의 종파와 일본의 불교 종파와 상응하는 종파적 개념이 중국에는 없었다. 예를 들면, 법장에 의해서 사실상 체계화된 화엄종의 학자들은 일본 불교의 종파주의와 서구 개신교의 종파주의와 비교될 수 있는 (화엄종의) 강한 종파주의를 가지지 않았다. 화엄종은 화엄불교에 관심있는 학자 그룹을 단순히 지칭한다. 그러므로 화엄종의 범주에 속하는 학자는 사실상 다른 종파의 범주에도 속할 수도 있다. 그래서 “화엄종”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그 용어는 화엄불교를 핵심 교리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의 그룹을 의미한다.

3. 중국불교교판: 역사적 고찰

불교는 동한 시기(기원후 25?220)에 전래되었다. 불교는 독신과 출가를 권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중국의 엘리트와 일반 대중들에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교의 윤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보였다. 동한 말기에, 유교의 영향이 정치적 혼란으로 점차 약화되고 불교의 전적들이 번역되었을 때, 중국의 지식인 가운데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학자들은 불교에 대해서 사전 지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와 중앙아시아 선교사들, 그리고 중국의 불교학자들이 불교를 중국의 상응어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 해석학적 방법은 격의(格義)로 불리었다. 불교학자들은 불교적 용어를 그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도교적 용어로 해석했다. 그 이후에, 도안(道安: 312?385)은 그 격의적 방법의 약점을 간파하고 격의적 해석을 거부하였다. 그는 불교는 맥락이 전혀 다른 전통의 용어가 아니라 불교적 용어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마라지바가 401년에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왕의 도움으로 불교의 전적을 대량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한역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중국의 불교도들은 구마라지바의 한역의 이전에 비해서 불교를 좀 더 광범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의 학자는 한정된 수의 경전들 때문에 불교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불교에 대한 그러한 피상적 이해로, 중국의 학자들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구마라지바의 대량 번역은 중국의 불교도들이 불교를 좀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구마라지바의 번역이 중국의 불교도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을 때, 교판의 체계는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구마라지바 이전에는, 몇 가지의 불교의 전적이 비체계적으로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구마라지바의 번역 프로젝트는 대량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고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번역 프로젝트는 중국의 역사에서 최초였다.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무수한 텍스트들이 번역되었을 때, 텍스트들 사이의 모순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교판(교리의 분류 체계)이 긴급하게 요청되었다.

구마라지바는 대반야경의 포괄적인 주석서인 대지도론을 직접 번역하였고, 그 대지도론에 기반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대승과 소승, 두 그룹으로 분류하고, 대승을 소승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는 (대승의 경전들 간에는 우위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대승 통합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교판 체계에서는 경전들이 시간적 순서로 배열되었다. 중국에서 소승불교는 교단적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대승과 소승의 분류는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는 명목상의 소승을 대승보다 하위의 가르침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소승처럼 살지 말고, 대승처럼 살라.”는 교훈적이고 선언적 의미에서 소승과 대승을 분류하고 있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승예, 도생(道生: 355? ?434)그리고 혜관(慧觀: 453년 사망)이 교판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승예는 그의 스승인 구마라지바로부터 대승경전을 통합적으로 보는 관점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의 스승인 구라마지바로부터 경전을 순차적으로 분류하는 해석을 받아들여서, 혜관은 붓다의 가르침을 다섯 가지 시기로 분류하고 종파주의적 교판을 발전시켰다. 이 다섯 가지 시기의 경우에서, 후기의 가르침의 시기는 가치와 내용의 측면에서 (이전의 가르침의 시기보다) 점차 심화된다. 그렇지만, 구마라지바는 붓다의 초기의 가르침과 후기의 가르침 사이에 우열을 두고 있지 않고 있다.

사령운(謝靈運: 385?433)과 함께, 도생은 돈오의 옹호론자이다. 도생은 법화경에 보이는 다양한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네 가지 법륜의 교판을 세웠다. 그의 교판은 단지 법화경 하나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협소하고 포괄적이 못하다. 그래서 그의 네 가지 법륜의 교판은 후대의 교판 사상가들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혜관은 점오론자로 두 가지 가르침의 교판을 고안하였다. 돈점논쟁의 시대적 배경에서, 그는 점오와 돈오의 대립 구도로 두 가지 가르침을 이해하였다. 이 두 가지의 가르침은 돈교와 점교이다. 그 가운데 점교는 다섯 가지 시기의 가르침으로 다시 분류된다.

후대의 길장과 지의에 의하면, 혜관의 다섯 가지 시기의 가르침은 (1)삼승별교(三乘別敎), (2)삼승통교(三乘通敎), (3)억양교(抑揚敎), (4)동귀교(同歸敎), 그리고 (5)상주교(常住敎) 이다. 첫째의 가르침은 소승으로 아함경에 포함되어 있고, 둘째의 가르침은 반야경에 포함되어 있고, 셋째의 가르침은 보살의 가르침을 선양하고 성문의 가르침을 억제하는 유마힐경에 포함되어 있고, 넷째의 가르침은 삼승을 극복하여 일승으로 환원시키자는 법화경에 포함되어 있고, 다섯째의 가르침은 불성의 영원성을 설파하는 열반경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다.

남북조(386?589)의 시기에 거의 모든 교판론자는 화엄경, 열반경 또는 이 두 경을 교판의 체계에서 궁극적 가르침으로 위치매김 하지만, 그들의 교판의 체계를 상세히 검토해보면, 각자의 교판의 체계는 조금씩 다르다.

북조에서 6세기에 활동한 라트나마티와 보디루치(527년 사망)가 4세기에서 5세기에 인도에서 활동한 세친이 저술한 십지경론을 공동으로 한역했다. 이 둘은 특히 아라야식에 대해서 심각한 불일치가 있었다. 그럼으로써, 지론종은 남북으로 쪼개졌다. 북조의 대부분의 교판론자는 직간접적으로 지론종과 학문적 연대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론종의 소의경전인 십지경과 화엄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간주했다. 십지경은 화엄경의 일부분으로 십지품으로 불리어지고 포함된다. 십지경론은 인도의 유식학자인 세친이 유식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활동영역을 옮긴 후, 도생은 열반경을 남방에 소개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 열반경을 남방에서 널리 퍼뜨렸다. 그런 연유로, 열반경에 대한 무수한 주석서가 중국의 남방에서 저술되었다. 그 주석서 가운데 칠십 하나의 주석서가 보량(寶亮: 447?512) 등이 양무제(통치년도: 502?548)의 칙령으로 편찬한 열반경집해 (涅槃經集解) 에 수록되어 있다. 열반경이 남조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학문적 경향 때문에, 남조의 대부분의 교판론자들은 열반종과 학문적 관련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열반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간주하였다.

혜관의 두 가지 가르침과 다섯 가지 시기의 가르침의 교판이 남조의 대표적인 교판이지만, 남지론종의 창시자인 혜광(慧光: 468?537)의 사종판은 북조의 대표적인 교판이다. 지의에 의하면, 혜광의 사종판은 (1)인연종(因緣宗), (2)가명종(假名宗), (3)광상종(?相宗), 그리고 (4)상종(常宗)이다. 첫째의 인연종은 원인과 조건을 다루는 아비다르마의 가르침이고, 둘째의 가명종은 성실종의 가르침이고, 셋째의 광상종은 대품반야경과 삼론종의 가르침이고, 넷째의 상종은 열반경과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남북조 교판의 일반적인 기능은 (1)모든 경전을 상세히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이고, (2)모든 경전을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 것이고, (3)열반경 또는/그리고 화엄경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분류하는 것이고, (4)교판의 체계화에 경전적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리고 (5)다양한 경전들을 설법의 순서 그리고/또는 설법의 내용으로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교판의 체계는 구마라지바가 무수히 많은 새로운 텍스트(경전)를 번역한 결과로 나타났다. 후대에 진제(眞諦: 499?569)가 주로 유식 계통의 많은 중요한 논서들을 번역하였을 때, 중국의 교판론자들은 자신의 교판의 체계에 (경전뿐만 아니라) 논서를 포함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전의 교판론자들이 경전만을 그들의 교판의 체계에 포함한 반면에, 수대(581?618)의 교판론자들은 경전과 논서를 교판의 체계에 동시에 포함하였다. 그 교판의 학자들은 교판의 체계의 범위를 수대와 당대(618?907)에 확장하였다.

초기 교판의 학자들은 각 경전의 주요한 특성만을 선택하여 그것을 그들의 교판의 체계에 배당하였다. 그 교판의 기준은 설법의 순서 그리고/또는 설법의 내용에 기반하였다. 그들은 경전들을 이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하였고, 그것들을 단순한 일반화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수대의 교판론자들은 다양한 특성들이 심지어 하나의 경전에도 포함되고, 동일한 교리를 가진 것으로 분류되는 여러 가지 경전들도 다양한 시기에 설해졌다는 것을 인식했다. 교판의 중요한 측면이 수대에는 순차적 배열에서 교리적 배열로 점차 이동하였다.

설법의 순서 또는 설법의 내용이라고 하는 단순한 표준이 이전의 교판의 체계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된 반면에, 다양한 표준이 경전들과 논서들을 분류하기 위해서 수대에는 소개되었다. 예를 들면 지의(智?: 538?597)는 세 가지 표준에 의해서 그 자신의 교판 체계를 세웠다. 이 세 가지 표준은 설법의 순서, 교리 내용 그리고 설법의 방법이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의 종파주의적 교판을 세우기 위해서 그 세 가지 측면에서 각 경전을 포괄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길장도 경전을 이해할 때 매우 다양한 요소를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 요소들은 주변적 측면과 중심적 측면, 비밀적 측면과 드러난 측면, 등등이다. 지의는 그 자신의 교판의 세 가지 기준을 천태종의 종파주의적 교판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한 반면, 길장은 이 여러 가지 교판의 기준을 그 자신의 통합주의적 교판 체계를 변론하기 위해서 이용하였다.

학문적 시각이 이전의 교판의 체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반면, 종파주의적 시각이 수대에서는 점차 강조되었다. 지의는 종파주의적 교판의 체계를 대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마라지바, 승예 그리고 보리루치를 계승하여, 수대의 혜원과 길장은 그들의 교판의 체계에서 통합주의적 시각을 강조하였다.

통합주의적 교판론자와 다르게, 종파주의적 교판론자는 자신의 종파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종파주의적 시각에 기초하여 다양한 경전을 전형적으로 주석하였다. 그 종파주의적 시각에 기반하여, 그들은 수당의 시기에 자신의 종파적 전통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석학적 전통을 발전시켰다. 천태종의 교판론자들은 그 종파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을, 화엄종의 교판론자들은 그 종파의 소의경전인 화엄경을, 그리고 법상종의 교판론자들은 그 종파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 그리고 각종의 유식논서들을 종파주의적 시각에서 광범위하게 주석하였다.

남북조 시기의 200년의 분열의 시기를 거친 후, 중국은 수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그 때, 수대의 교판론자들은 남조와 북조의 서로 다른 지역과 환경에서 발전한 이전의 다양한 교판의 체계들을 통합할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지의는 역사상 최초로 그의 저서인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남북조의 교판론자들을 열 가지 교판으로 열거하고 포괄적으로 요약하였다.

남북조의 교판의 체계에 대한 지의의 포괄적 연구는 법장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과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충실히 계승된다. 이 두 저서에서 법장은 지의의 설명을 좀 더 명확히 하였고, 지의 이후의 교판의 체계를 첨가하였다. 법장은 이 두 저서에서 열세 가지 교판을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 두 학자의 교판의 역사적 연구로, 우리는 남북조의 교판 체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초기의 교판 체계를 다룬 본래의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지의와 법장의 저서는 초기의 교판 체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당 의 초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현장(玄?: 602?664)에 의한 새로운 불교의 수입이다. 현장이 신불교를 중국에 소개하였을 때, 중국불교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전의 번역에 비교해서, 현장의 번역은 신역불교라고 불린다. 그는 주로 유식불교의 전적을 번역하였다.

그의 수제자인 규기(窺基: 632?682)는 법상종을 중국에서 세웠다. 그 당시에 법상종은 새로이 번역된 유식불교의 전적에 기반하여 번영하기 시작한 반면에, 이전의 전통적인 학파인 열반종, 지론종 그리고 섭론종은 쇠망하였다.
전통적인 학파들, 특히 열반종이 일천제를 비롯하여 일체의 중생이 성불할 수 있고 일승이 궁극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 반면, 법상종은 다섯 가지 존재 범주 가운데 최하위의 존재의 범주인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고 일승조차도 방편이라고 주장하였다. 참고로, 다섯 가지 범주의 존재는 일천제, 성문, 연각, 보살, 그리고 붓다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학파들, 특히 남지론종이 제 8식은 실재하고 진여와 동일하고 불성은 변재한다고 주장한 반면, 법상종은 제 8식은 실재하지 않고 진여와 동일하지 않고 불성은 성불할 때 획득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 수증론을 전통적으로 이해하면서, 법장은 현장이 소개하고 그의 제자 규기가 법상종으로 체계화한 신유식불교를 공격하였다. 법장은 규기의 법상종을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법상종의 영향은 점차 시들어졌다. 법장은 일천제를 포함하여 일체의 중생이 성불할 수 있고 내재적인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통적인 수증론의 주장을 회복하였다.

당 초기에 거의 모든 불교학자들은 그 신불교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들 가운데 법보(法寶: 627?705)는 전통적인 시각을 그의 저서 ??일승불성구경론??과 ??열반경소??에서 체계적으로 요약하였다. 그는 그 저서에서 일체의 중생은 내재적인 불성을 가지고 있고 예외없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장이 신불교를 소개하였을 때, 원측(圓測: 613?696)은 기본적으로 현장의 유식불교의 이해를 따랐을지라도, 전통불교와 신불교의 화합적 관점을 가졌다. 이러한 화합적 태도 때문에, 규기의 제자인 혜소(慧沼: 650?714)는 원측을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지엄(智儼: 602?668)은 세 가지 가르침의 교판 체계를 북조의 지론종의 교판학자인 혜광(慧光: 468?537)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이 세 가지 가르침은 (1)점교(漸敎), (2)돈교(頓敎), 그리고 (3)원교(圓敎)이다. 현장이 호법 계통의 신유식불교를 중국에 소개하였을 때, 지엄은 신불교를 삼승의 초기의 가르침으로 분류하였다. 지엄은 또한 현장이 소개하고 신봉하였던 호법의 종성론을 반대하였다. 호법의 종성론은 종성은 생성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결정되어져 있다고 본다.

신불교가 당의 초기의 시기에 소개되었을 때, 종파주의적 시각이 이전의 종파주의적 교판의 체계에 비해서 한결 강화되었다. 화엄불교의 지엄, 의상(義湘: 625?702) 그리고 법장은 화엄의 종파주의적 시각을 그들의 교판 체계에서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유식의 현장, 규기 그리고 혜소는 그들의 교판의 체계에서 유식의 종파주의적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에서, 종성과 아라야식의 전통적 이해를 계승하여, 원효는 신불교를 비판적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전의 통합주의적 교판론자들인 구마라지바, 승예, 보디루치, 혜원 그리고 길장의 대승경전에 대한 통합주의적 시각을 계승하면서, 원효는 현장의 종파주의적 교판의 체계를 반대하였다. 현장은 법상종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과 유식 논서들의 우월성을 주장하였지만, 원효는 모든 대승경전들을 동일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법장은 신불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경멸적 용어인 “법상유식종,” “대승법상” 또는 “법상종”을 만들었다. 유식법상종의 표현에서, 유식은 “의식뿐이다”를 의미하고, 법상은 “존재의 특성”을 의미한다. 이 표현을 가지고, 법장은 현장과 규기의 신불교는 존재의 본질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존재의 (표피적인) 특성의 가르침만을 이해할 따름이라고 주장하였다.

법장은 그의 생애의 초기에 다섯 가지 가르침의 교판 (五敎判) 을 세웠다. 이 다섯 가지 가르침은 (1)소승, (2)대승시교, (3)대승종교, (4)대승돈교 그리고 (5)대승원교이다. 첫째는 아함경의 소승이고, 둘째는 반야경과 유식의 가르침이고, 셋째는 여래장의 가르침이고, 넷째는 유마힐경의 가르침이고, 다섯째는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그의 스승인 지엄을 충실하게 계승하여, 법장은 신불교를 둘째의 가르침인 대승시교로 분류하였다. 그의 스승인 지엄보다 보다 더 명확하게, 법장은 기존의 중국불교의 여래장 사상의 대승종교와 화엄의 가르침의 대승원교가 신유식불교의 대승시교의 가르침보다 월등히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규기의 팔종판에 기반하여, 법장은 그의 생애의 초기에 십종판(十宗判)을 그의 주요 저서들인 ??화엄오교장??과 ??화엄경탐현기??에서 세웠다. 규기의 여덟 가지 교리 가운데, 첫 번째 여섯 가지 교리는 소승의 교리이다. 일곱 번째의 교리는 중관의 가르침이고, 여덟 번째의 교리는 유식의 가르침이다. 법장은 규기의 팔종판 가운데 일곱 가지 교리들을 그의 십종판의 체계에서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8)여래장의 가르침인 불공종, (9)유마경의 가르침인 불이종, 그리고 (10)화엄의 가르침을 규기의 팔종판의 체계에 첨가하여, 법장은 그의 십종판의 교판 체계를 완성하였다.

십종판을 설명할 때, 법장은 십종판의 열 가지 교리를 오교판의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상응시켰다. 즉, (1)?(6) 교리는 (1)소승의 가르침에 상응하고, (7)교리는 (2)대승시교에 상응하고, (8)교리는 (3)대승종교에 상응하고, (9)교리는 (4)대승돈교에 상응하고, (10)교리는 (5)대승원교에 상응한다.

법장이 십종판의 체계에서 유식불교를 명확히 분류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십종판의 체계가 유식의 가르침이 중관의 가르침과 더불어 대승시교에 배당되어 있는 오교판의 체계에 상응하기 때문에, 유식의 교리는 십종판에서 일곱 번째의 교리에 배당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법장은 십종판의 체계를 규기의 팔종판에 대한 강한 대결의식으로 만들었다.

법장은 그의 생애의 후기에 사종판(四宗判)을 확립하였다. 이 사종판의 체계에서, 법장은 현장과 그의 제자 규기의 교판의 체계를 비판한다. 이 네 가지 교리는 (1)소승인 현상의 존재를 집착하는 가르침, (2)중관의 가르침으로 참된 공의 비현상의 가르침, (3)유식의 존재적 특성의 가르침, 그리고 (4)여래장 연기의 가르침이다.

초기의 오교판의 체계에서, 법장은 중관의 가르침과 함께 유식의 가르침을 대승시교에 할당하였다. 오교판의 또 다른 유형인 초기의 십종판의 체계에서, 법장은 유식불교를 명확히 분류하고 있지 않지만 중관의 교리를 대승시교로 할당하고 있다.

그의 후기의 사종판의 체계에서, 법장은 초기의 오교판과 십종판의 체계에서의 유식의 가르침의 위치의 애매모호성을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사종판의 체계에서 중관의 가르침과 유식의 가르침을 다른 단계의 교리로 분류함으로써, 법장은 유식 불교를 세 번째 교리의 위치로 명확히 분류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식불교를 경멸적 용어인 법상종으로 명명하였다

규기는 대승법원의림장에서 유식을 다섯 가지 측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규기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법장은 ??화엄경탐현기??에서 유식을 열 가지 측면으로 규정하고 있다. 법장은 규기의 유식의 다섯 가지 측면을 그의 유식의 열 가지 측면에서 저급한 수준의 다섯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의 스승인 지엄의 화엄불교의 교판체계를 계승하여, 법장은 신불교를 그의 초기의 오교판의 체계에서 대승시교의 범주로 분류하였다. 규기의 팔종판의 체계에 기반하여, 화엄 불교의 신불교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법장은 십종판의 교판 체계를 고안하였다. 법장이 그의 후기의 사종판의 체계에서 신불교를 경멸적 용어인 법상종으로 명명할 정도로, 그의 화엄종의 교판체계는 신불교에 대한 부정적 반응의 결과이다.

이전의 화엄학자들인 지엄과 의상을 계승하여, 법장은 초기에 화엄불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교판의 종파주의적 교판체계를 세웠다. 특히 신불교에 대한 강한 적대감 때문에, 법장은 일심과 불성의 내재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일심과 불성의 내재성의 정도에 따라, 법장은 초기에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다섯 가지 가르침의 범주로 배열하였다.

네 번째의 대승돈교는 갑작스럽게 불성과 일심의 초월성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세 번째의 대승시교와 최상의 다섯 번째의 대승원교간에 내재화의 과정이 단절된다. 불성과 일심의 내재성의 심화 정도라는 법장의 교리의 분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법장의 오교판의 체계에서 대승돈교의 위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일심과 불성은 대승종교의 교리이기 때문에, 대승종교는 다섯 가지 가르침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논리적 토대이고, 심지어 최상의 대승원교조차 가능하게 만드는 논리적 토대이다. 대승종교가 대승원교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론적 토대임에도 불구하고, 법장은 대승종교를 대승원교의 하위의 가르침으로 오교판에서 분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승종교와 대승원교의 분류도 그의 오교판의 체계에서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다.

불성과 일심의 초월적 측면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수행자가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된다. 신불교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불성과 일심의 내재적 측면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수행자가 성불할 수 있는 필연성이 배제된다. 불성과 일심의 내재적 측면을 궁극적으로 간주하는 대승원교가 이 오류를 가지게 된다. 즉, 이 경우에는 깨달음의 당위성이 없어진다.

법장은 그의 생애의 후기에 초기의 오교판의 체계의 몇 가지 문제점을 제거하여 새로운 사종판의 체계를 세웠다. 법장은 이 사종판의 체계에서 초월적 측면과 내재적 측면을 긴장관계로 다룬다. 불성은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는 그의 초기의 교판인 오교판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대승돈교와 대승원교를 제거하고, 여래장 사상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내재성과 초월성이 분리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섞일 수도 없다고 보고 있다. 본체와 현상의 관계도 불가불리성과 불동일성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특히 그의 생애의 후기에는 주로 여래장 계통의 논서들을 주석하였고, 그의 주요 연구 과제로 삼았다. 여래장 사상을 강조하는 그의 후기의 교판체계는 그의 제자인 혜원(慧苑: 673? ?743?)과 후대의 화엄학자 종밀(宗密: 780?841)에 의해서 충실하게 계승된다.

법장으로부터 사종판의 교판체계를 계승하여, 화엄불교학자인 혜원은 교판의 범주를 비불교적인 인도철학과 중국의 전통사상까지 확대하였다. 혜원을 계승하여, 화엄불교학자인 종밀은 그 교판의 범주를 선불교까지 확대하였고, 교리의 분류체계를 실천의 분류체계로 대응시켰고, 선불교의 다양한 전통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이와 같이, 법장의 초기의 오교판의 체계와 더불어 그의 후기의 사종판의 체계는 동아시아의 불교의 전통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 나가는 말

필자는 중국불교의 교판을 사상사의 측면에서 이상과 같이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교판사상사를 통합주의와 종파주의의 교차로로 정의하였다. 필자는 각 불교 사상가의 교판을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다루려고 하였기 때문에 교판사상사를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각 사상가의 교판이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맥락에서 다른 사상가(들)의 교판과 어떠한 상호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 논문에서 밝히고 싶었다.

필자는 수많은 증거 자료를 찾아내어 중국불교 교판사상사를 관통하는 통합주의 계통을 밝혀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원효를 중국불교의 통합주의 교판의 계통을 계승한 사상가로 자리매김을 하였다.4) 즉 원효는 구마라지마, 승예, 보디루치, 혜원, 길장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불교의 통합주의 교판의 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필자는 증명하였다.

필자는 원효의 통합주의의 교판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또 다른 대표적 화엄 사상가인 의상의 교판도 동아시아 불교학의 맥락에서 다루었다. 즉, 의상은 중국 화엄불교의 종파주의 교판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원효와 의상을 한국불교라는 협의의 맥락에서 다루기보다 동아시아 불교라는 광의의 맥락에서 다루었을 때 그들의 사상의 맥락을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필자는 본다. 이 두 위대한 한국불교 사상가의 사상은 당시 중국불교와의 유기적인 관계성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유수한 고등교육기관과 종교기관에서 불교학을 연찬하면서, 필자는 한국불교학 연구자들이 알게 모르게 국수주의에 노출되어 한국불교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얼마나 고유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를 열심히 증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불교학자들이 한국불교를 좀더 넓은 맥락에서 검토할 때, 한국불교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오히려 더 확보해낼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 토양 속에서 형성되었다.

중국불교는 한국불교에 선불교 그리고 불교사상과 문학의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티베트불교는 한국불교에 불교 건축, 의식과 예술의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불교는 중국 불교와 티베트불교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한국불교는 초기 일본불교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근현대 시기에는 일본불교의 학문적 종교적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5)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한국불교는 중국불교, 티베트불교 그리고 일본불교와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불교를 주위의 불교전통과의 상호 관계성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다수 한국 불교도들은, 승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원효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원효를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원효가 통합주의의 전통을 한국불교에 정초하였다고 간주한다. 우리는 통합주의야말로 한국불교의 유일하고 가장 위대한 특성이라고 자랑스럽게 그리고 의문의 여지없이 믿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한국불교의 통합주의의 측면은 동아시아 불교라는 좀더 광의의 맥락에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원효의 통합주의의 교판체계도 동아시아 불교라는 맥락에서 검토되었다. 필자는 한국불교가 주위의 불교전통들과의 상호 유기적 관계성에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인 원효, 의상 그리고 원측의 교판체계 역시 동아시아 불교라는 토대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성원(문찬주)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동국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불교학과 철학을 공부하였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의 동경대학교와 인도의 티베트 데붕 로셀렝 승가대학에서 인도?티베트 불교학에 대한 그의 이해를 심화하였고, 미국의 웨스트 대학에서 동아시아 불교학을 가르쳤고, 2007년도 가을학기부터는 하와이 주립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철학을 가르칠 예정이다. 그는 불교와 평화를 주제로 (영문의) 몇 권의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였고, 독자들은 Chanju Mun을 키워드로 입력해서 이 책들을 미국의 유수한 서점 또는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구입해볼 수 있다. 그는 불교와 평화 시리즈의 총편집장으로, 매년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였고, 계속해서 편집하여 출판할 예정이고, 참여불교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불교와 평화만들기(Buddhism and Peacemaking)라는 영문 저서를 편집하고 있고, 곧 출판될 예정이다. 그리고 한국근현대불교사를 저술하고 있고, 이 저서는 하와이 주립대학교 출판부를 통해서 곧 출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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