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애인에 대한 정의

장애의 개념을 알기 위해 먼저 장애가 없는 건강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의 첫 항목에 명시된 건강의 정의에 의하면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상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쾌적한 상태를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건강이란 사회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활 현상을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측면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생명현상을 갖는 생물체이면서도 정신적인 기능이 특히 발달되어 있는 영적인 존재라는 점, 그리고 다수의 개체가 모여서 협동과 분업을 하는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점에 그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장애인에 대한 개념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일의적으로 장애의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장애의 원인이나 종별 그리고 그 정도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문제에 접근하는 측면에 따라서도 서로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장애란 심신의 기능에 어떤 결함이나 손상이 있음으로 해서 특수한 활동이나 기능이 제약되거나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이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되면 일반적으로도 일상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 필요로 하는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직업적인 모든 요건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기 스스로 확보하기가 곤란한 사람을 흔히 장애자라 하는데, 여기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기본적인 관념은 장애에 대한 판단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 또는 기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장애란 사회의 요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미치기 위해 특별한 원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절대적인 편견이나 차별 의식은 철저히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비록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원조, 즉 예방, 치료, 교육재활과 기타 서비스 등을 통하여 장애가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고, 또 상당한 사회적 요구에 도달할 수 있어서 결국에는 장애인 개개인이 지역사회는 물론 나아가서 전체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신의 결함 상태가 일상생활에 장해가 되지 않는다면 장애인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장애인복지법 제2조에 의하면 “장애인이란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신체적 장애란 주요 외부 신체 기능의 장애, 내부기관의 장애를 뜻하며 정신적 장애란 발달장애 또는 정신 질환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어서 장애인을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고 있다. 
1) 세계의 장애인관
인간은 법적 권리 이전에 존재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인간에게 자체의 존엄성에 의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즉, 생존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 복지를 위해서는 장애인의 존재를 인식하여 장애인들도 시간적 공간적으로 함께 삶을 누리는 동등한 인권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올바른 장애인관을 확립하고 인격체로서 대우받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의 인권보장이며, 사회의 양심과 인간성의 회복이며, 그 사회 모든 사람의 인권에 대한 철학의 확보이다.
그런데 인간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활하므로 어느 사람이나 그 특정한 공간이 장구한 시간을 거쳐서 전승되어 온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배워서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언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속해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가치체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 역사를 더듬어볼 때 장애인에 대한 사회 전체의 태도는 그 시대의 사상적 배경에 따라 크게 변천하여 왔으며, 이에 따른 장애인 복지의 방향도 많은 변화를 거쳐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장애인들은 사회에서 버림을 받거나 유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장애인들은 폐기물 정도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스파르타에서는 미(美)와 건강을 존중하여 장애인을 추한 인간의 표본으로 생각하여 유기하는 것을 제도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기독교사상과 함께 장애인은 종교적인 자선 차원에서 수용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 근대에 와서는 의학의 발달, 문예 부흥, 종교 개혁 등의 사회변화를 통해서 인간 존중의 사상이 발달하면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한 복지 시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2) 한국인의 장애인관
한국 사람의 전통적인 장애인관은 장애의 원인을 미신이나 천벌로 여겨 객관적으로는 멸시와 조롱으로, 주관적으로는 열등감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견해는 한국 민족 특유의 동질의식으로 인한 보편적 인간의 지향에서 비롯되었다.
그 동질의식은 이질성을 강하게 배척하는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같은 민족만으로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누리며 수천 년을 살아왔기에 이질성에 미숙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질의식이 더욱 강해지는데 그럴수록 동질이고 평균적인 보편적인 것에 가치를 두게 되며 평균과 동떨어진 이질의 개성 있는 것일수록 비가치화(非價値化)한다. 그러기에 사람의 경우도 평균인간, 동질인간, 보편인간을 지향하게 되며 그 기준에서 이탈될수록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이렇게 개성이 평가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질에 대한 개성 지향보다 이것저것을 고루 갖춘 완전지향을 하게 되며 이것이 한국인에게 강한 완전의식의 형성 요인이 되었다.
이런 완전의식이 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편견을 갖게 했다. 개별자요, 불완전자로 말이다. 그리고 양반제도 또한 편견 구조를 조성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더욱 조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2. 장애인에 대한 불교적 관점
 
1) 불교 경전 속의 장애인
부처님이 살아 계실 당시를 중심으로 해서 각 장애 유형별로 어떤 장애인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시각장애인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시각장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는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 사람은 바로 아나율이다. 아나율(阿那律 Aniruddha)은 카필라 성 출신으로 곡반 왕의 아들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나율을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했는데(증지부 경전), 천안이란 멀고 가까움, 안과 밖, 낮과 밤을 불문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또 아주 미세한 물질도 능히 보고, 시간을 초월하여 중생들의 내세에 관한 것도 알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아나율이 이런 천안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실명으로 인해서였다. 그런데 아나율이 실명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어느 날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아나율이 깜빡 잠이 들었다. 그것을 본 부처님은 아나율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가?” “지금부터 부처님 앞에서는 잠자지 않겠습니다.” 아나율은 이렇게 맹세하고 불면(不眠)으로 정진했다. 그래서 아나율의 눈에 병이 났다. 부처님께서는 치료를 받도록 권했지만 아나율은 거절하고 계속 정진했기에 완전히 실명해 버렸다. 그런데 아나율은 그 실명으로 천안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실명은 잠을 자지 않을 정도의 지독한 노력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 전생의 업 때문에 빛을 잃은 것이 아니다. 실명은 노력을 뜻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실명으로 천안을 얻은 것으로도 잘 나타난다. 그러니까 실명은 빛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 눈이 할 수 없는 인식 기능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도 실명을 한 제자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나율은 앞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늘귀를 꿰기가 아주 힘들었는데, 부처님께서 아나율을 위해 바늘귀를 끼워주셨다고 한다(증일아함). 부처님께서 바늘귀를 손수 끼워주시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부처님이 아나율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부처님은 참 인간적인 사랑의 실천자임을 알 수 있다. 만약 다른 종교의 교주였다면 아나율을 위해 바늘귀를 끼워주지 않고 그가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장애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지적장애
지적장애라고 하면 잘 모를지도 모른다. 지적장애는 정신지체의 새로운 명칭이다. 부처님은 그때 이미 조금 늦어지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주리반득(周理般得)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다.
주리반득은 주리반특(周理般特)이라고도 하는데 범어로 츄리판타카(suddhipanthaka)라고 한다. 주리반득은 길에서 태어났다. 주리반득의 부모는 여행을 하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쌍둥이를 낳았다. 첫 번째 태어난 아들은 반득, 두 번째 태어난 아들은 주리반득이라고 이름 지었다. 반득은 길이라는 뜻이고, 주리는 작은 아이라는 의미여서 길에서 태어난 작은 아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런데 형 반득은 아주 총명했는데 주리반득은 아주 어리석었다. 요즘도 쌍둥이를 낳으면 영양상태가 고르지 못한 경우 한쪽 아이가 지적장애가 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상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주리반득은 어찌나 둔했는지 3년 동안 수행을 했지만 글귀 하나를 제대로 못 외웠다.
요즘도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화장실 청소를 맡게 하듯이 주리반득도 청소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리반득은 자신의 신세가 너무 한심해서 청소하다 말고 엉엉 울었다. 그때 지나가던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이유를 묻자 주리반득은 자기는 아무래도 부처님 법을 배울 수 없을 것 같다고 한탄했다. 그런 주리반득에게 부처님은 청소와 빗자루라는 말만 외우도록 하셨다. 그러나 주리반득은 청소를 외우면 빗자루를 잊어버리고 빗자루를 외우면 청소를 잊어버렸다.
그런 주리반득에게 부처님은 수행자들의 방을 청소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주리반득은 겸손하게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여 자기 동료인 수행자들의 방을 청소했다. 주리반득은 아주 열심히 청소를 해주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주리반득은 그 깨달음을 부처님께 전했다. “부처님, 빗자루는 이 세상의 더러움을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 사람들도 지혜의 빗자루로 마음속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 말에 부처님은 환히 웃으며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뻐해 주셨다. 그 후 주리반득은 동료들 앞에 나가 설법을 할 정도로 존경받는 수행자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바사익 왕이 크게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반드시 많이 배우는 것을 요하지 않습니다. 행하는 것이 으뜸입니다.”
지적장애인에게 인간 취급을 안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그들도 지식의 습득이 아닌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경우에도 인격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장애인에 대해 편견을 갖지 말도록 충고해주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3) 지체장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요소요소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은 시녀 웃다라는 척추장애(곱사등이)를 가지고 있었다. 우다야나 왕의 왕비 샤마바티는 불교에 깊이 귀의했는데, 왕비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녀인 웃다라에게서 바깥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왕비가 원하는 소식은 법회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이었다. 그래서 웃다라는 법회에 참석하여 들은 이야기를 왕비에게 전해 주곤 했는데, 그녀는 머리가 좋아서 법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어 왕비의 신심(信心)이 더욱 돈독해져 갔다. 그런데 둘째 왕비 마간디야가 샤마바티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왕에게 샤마바티 왕비를 중상모략했다. 화가 난 왕은 당장 부인을 죽이려고 했지만, 왕비의 자비스런 얼굴을 보고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왕비에게 자기의 잘못을 사과했다. 그런 왕의 태도에 마간디야는 더욱 질투심이 끓어 올라 왕이 출타한 틈을 타서 샤마바티 내전에 불을 질렀다.
그때 다른 시녀들은 모두 도망가기에 바빴지만 웃다라는 도망가지 않았다. 샤마바티를 구하려고 끝까지 불 속을 헤매다 불 속에 묻히고 말았다. 변하지 않는 그 마음, 그것을 몸에 장애가 있는 웃다라만이 가지고 있었다. 웃다라는 총명할 뿐만 아니라 의리도 있었다. 이것으로 불경 속에는 장애인이 아주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불교의 장애인관
 장애를 전생의 업(業)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인과론(因果論)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탄생한 윤회설에 대한 오해로 전생의 잘잘못이 현생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적인 해석이 만연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불교는 인과와 업의 개념으로 민중에게 도덕을 가르쳐왔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사회에 전파시켰다. 불교의 인과설은 통속적인 인과응보설이 아니므로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해석이 사회적 편견을 만들었는데 그 편견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장애인이다.
이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업이 무엇인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업을 의미하는 산스크리스트어인 카르마(Karma)는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에 영향을 주는 행위가 업인 것이다. 업에는 몸, 입,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三業)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으면 업이 아니다.
부처님은 인도를 들끓게 했던 극단적인 사상들(육사외도)과 맞서 종교적인 혁신을 일으켰다. 부처님은 무연무인론자도 숙명론자도 아니었다. 전생의 업이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는 견해를 부정하였고 동시에 과거의 업의 영향이 현재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생각도 부정하였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의 극단을 거부하고 중도의 관점에서 업을 설하였다.
그러니까 장애의 원인이 과거의 어떤 바르지 못한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숙명론적인 장애인관은 부처님이 타파하고자 하는 외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애 원인의 90% 이상이 교통사고나 산업재해 등으로 인한 후천적 원인이라는 통계자료에서도 장애를 숙명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업을 만드는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불특정 다수이다. 그것을 연(緣)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혼자 만든 업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그 개인적인 업으로 판단할 수 없다. 자동차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업의 필연성은 외면적인 것, 즉 신체적인 남녀 구별과 같은 외적 생물학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업의 작용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불교는 인간적 생존에 관한 종교이기에 내적인 의지를 조건으로 해야 한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출생을 묻지 말고, 단지 행위를 물어라.”
이렇게 본다면 장애를 개인의 또는 한 가정의 업으로 볼 수 없다. 긍정적인 장애인관의 걸림돌이 되어온 업 문제를 이렇게 해석하는 데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 불교에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정립시킬 수 있다.

3) 불교의 장애인복지
불교와 장애인은 거의 관련이 없거나 아니면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장애인을 무시한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이다. 불교에서야말로 장애인을 편견 없이 대하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로 등장하거나 아니면 시녀일지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애인의 모습이 소외가 아니라 이끌어가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부처님은 장애를 고쳐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 예로, 앞을 볼 수 없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부처님께 이렇게 설법을 요청했다. “부처님, 사람들은 세상에 빛이 있다, 색깔이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부처님께서 빛이 있는지 없는지 말씀해주시고 있다면 제가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그때 부처님은 설법하지 않으시고 지바라는 의사를 불러 그 바라문의 눈을 치료해 주도록 했다. 다행히 수술로 시력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 시력을 찾은 바라문은 자기 눈으로 빛과 색이 있음을 확인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부처님은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다. 만약 부처님께서 바라문이 불쌍했다면 어떤 위로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장애인의 문제를 감상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사회복지 차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만약 다른 종교의 교주였다면, 그 자리에서 자기 손으로 바라문의 눈을 뜨게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의사를 시켜 수술을 해주도록 했다.
이 두 가지로 불교의 장애인관은 충분히 정리된다. 불교에서는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에 장애인관은 긍정적이다. 그리고 장애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주어 사회 속에서 그 능력을 평가받게 하기 때문에 장애인복지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1) 불교 장애인복지사상
불교의 복지사상은 자비사상, 보은사상, 평등사상, 보살사상이다. 자비는 고통을 제거해주고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종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랑과는 다르다. 자비사상을 불교 장애인복지사상으로 보는 것은 장애로 생긴 문제를 해결해주고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것이 최상의 장애인복지이기 때문이다.
보은사상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의 장애인복지제도가 시혜적인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사상이다. 장애인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의 보답이기 때문에 장애인 입장에서 당당하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보은사상으로 장애인복지를 실시하면 장애인이 소외계층이 아닌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평등사상은 장애인복지의 목표이다. 장애인, 비장애인이란 구분을 없앨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평등사상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끝으로 보살사상은 불교 장애인복지의 실천에 대한 이론이다. 불교는 하화중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하화중생이 바로 자원봉사이다. 그리고 보살은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자원봉사자이다. 그러니까 자원봉사의 기원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은 자원봉사가 아닌 자원활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 위에서 아래로 베풀어주는 희생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 행위를 받는 입장에서는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원봉사 대신에 활동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보살행에는 이미 그런 교만이 없다. 자신의 수양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보살행은 수준 높은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고쳐서 다듬을 것도 없는 보살행을 사회에 일반화시켰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어서 빨리 보살행을 자원활동과 접맥을 시켜야 한다.

(2) 보살행(菩薩行)과 장애인활동보조
보살(Bodhisattva)은 보제살(菩提薩)의 약어로 Bodhi와 sattva의 복합어이다. Bodhi는 깨닫는다는 뜻이고 sattva는 존재라는 뜻으로 중생을 가리킨다. 즉,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다. 경전에서는 보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보살은 많은 중생을 완전한 열반으로 이끌어들인다.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자기를 이롭게 하는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다. 보살은 큰 서원을 세워 마음이 부동하며 정진하여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보살은 불성의 자비심을 내어 항상 모든 사람을 도와서 복되게 하며 즐겁게 해야 한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대신해서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나쁜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좋은 일은 타인에게 주어야 한다.
―《범망경(梵網經)》
보살은 비록 집에 있더라도 모든 욕망을 조절하여 탐욕과 인색함이 없이 목숨을 버릴지라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보살은 집에 있으면서 마땅히 중생을 안락하게 해야 한다.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보살은 중생들의 부모가 되어 그 괴로움을 제거해 준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경전에 나타난 보살행을 분석해 보면 남을 위해 자비심을 내어 자비행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최대의 선행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살은 항상 고통 속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광야나 산에는 연꽃이 피어나지 않고 방죽의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열반 속에서는 보살이 생겨나지 않고 애욕 속에 보살법이 생긴다.
―《유일마니보경(遺日摩尼宝經)》

중생의 고통이 있기 때문에 보살이 있는 것이고 그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보살이 할 일이며, 그런 행동을 보살행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보살은 사회 속에 뛰어들어 복지증진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보살의 자세에 대해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였다.

한 사람의 중생을 위함도 같고 일체중생을 위함도 같아서 큰 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에 안주하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한 생각도 피곤하고 염증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 해야 하고 피곤하다거나 싫어졌다거나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
―《화엄경(華嚴經)》

이상에서 보살행과 자원활동이 왜 한 묶음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원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웃 종교인들이기 때문에 불교에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교의 사상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봉사 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꼭 짚고 가야 할 것은 보살의 개념을 자원활동가와 접목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지 보살과 자원활동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살은 넓고도 깊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일시적인 봉사가 아니라 영원한 봉사이고, 보살은 도와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중생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보살은 겸손하다.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은 만나는 사람마다 공손히 합장하며 “나는 당신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해탈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모든 중생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는 겸손함을 보살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보살은 자기 자신의 수양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마음이 건실하다. 그 자기 수양은 《승만경》에서 찾을 수 있다. 승만 부인이 부처님 앞에서 10가지 서원을 하는데 그것이 곧 보살의 길이다. 그 10대 서원은 다음과 같다.

1. 계를 범할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2.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3.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4.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5. 인색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6. 재산을 가난한 중생을 위해 쓰겠다.
7. 애착하지 않는 마음과 만족함이 없는 마음과 거리낌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겠다.
8. 고독한 사람, 갇혀 있는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등 가지가지의 고통과 재난을 당하는 중생들을 본다면 잠시도 버리지 않고 반드시 이익되게 하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
9.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거두어들이겠다.
10. 이 모든 것들을 끝내 잊지 않겠다.

이렇게 보살은 자기 자신부터 가지런히 닦은 다음에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이다. 보살은 행동으로만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은 4가지가 있다. 이것을 사섭법(四攝法)이라고 한다.

보시섭(布施攝): 중생에게 필요한 재물이나 법을 보시하여 이끌어 들이는 방법
애어섭(愛語攝):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이끌어 들이는 방법
이행섭(利行攝): 선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여 이끌어 들이는 방법
동사섭(同事攝): 중생의 근성에 따라 행동을 같이하여 이끌어 들이는 방법

보살은 다각적인 면에서 중생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교의 보살은 이타행의 표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타행이 자원봉사 이상의 큰 자비의 실천이다.
요즘 장애인계에는 활동보조인 제도가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다. 활동보조인은 유급 활동이지만 보살정신에 입각해서 활동한다면 장애인활동보조인제도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3. 불교 장애인시설 운영의 역사와 현황
 
자료에 의하면 불교 사회복지시설 가운데 장애인복지시설은 78개소로 전체 사회복지시설의 10.4%를 차지한다. 장애인시설로는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라 설립된 장애인 생활시설과 이용시설 그리고 직업재활시설과 생산품 판매시설이 있다.
장애인시설이 사회적인 관심사가 되기 시작한 세계장애인의 해인 1981년만 해도 불교 장애인시설은 운영자가 불자라는 것을 표명한 천마재활원이나 춘강 장애인근로센터가 고작이었다. 그러다 1985년 장애인 생활시설인 ‘소쩍새마을’이 개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소쩍새마을은 스님이 운영자였을 뿐 미인가 시설이었다. 1993년 청각장애인 배움터인 연화복지학원이 개원을 했지만 이 역시 스님의 원력으로 운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종단 차원에서 장애인복지시설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사회복지법인 승가원이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 1995년 사회복지법인을 인가받으면서 1998년에 불교계 최초로 장애인복지관인 강북장애인종합복지관을 수탁 운영한다. 이로써 장애인복지 분야에 불교가 발을 들여놓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는 보통 150~200개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데 불교계에서 운영된다 해도 프로그램에서 불교적인 요소를 강조하지 않고 모든 종교의 장애인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종교적인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14년이 지난 지금은 불교 장애인시설이 많이 확대됐다. 《2011 불교 사회복지편람》에 실린 불교 장애인시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생활시설: 가연마을, 관음의집, 극락마을, 금강반야마을, 기쁨있는집, 도림원, 룸비니동산, 문수마을, 반야원, 보람있는집, 보현마을, 불이원, 성북그룹홈1,2호, 승가원자비복지타운, 승가원장애아동시설, 월정사회복지재단그룹홈, 자광원, 지장의집, 천마재활원
▷이용시설: 강릉시장애인종합복지관, 강북장애인종합복지관, 개금장애인주간보호센터, 거제시종합사회복지관, 거창군삶의쉼터, 경주시장애인복지관, 곰두리네집, 광산구장애인복지관, 군포시장애인종합복지관, 금강장애인복지센터, 기원주간보호센터, 김포시장애아동재활치료센터, 단양노인장애인복지관, 도란, 마하재활병원, 배움터, 보람의 집, 서대구주간보호센터, 성북장애인복지관, 송광사회복귀시설, 수유해냄교실, 시흥장애인종합복지관, 안동시장애인종합복지관, 여주군장애인복지관, 영등포장애인복지관, 영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 울산남구종합사회복지관 부설 장애인단기보호센터, 의왕시장애인주간보호시설, 제천장애인종합복지관, 청락원, 컴,넷하우스, 해남군장애인종합복지관, 홍천군장애인복지관, 희나래장애인복지관
▷직업재활시설: 강릉시장애인보호작업장(해오름식품), 도봉장애인보호작업시설, 아나율장애인보호작업장, 연화직업재활원, 제석근로사업장, 천마도예의 숲, 하나되기보호작업시설, 함께일하는일터  
▷생산품판매시설: 강원공판장, 위드커피2호점


4. 이웃 종교의 장애인복지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불평등 조건으로서의 장애인으로 《창세기》 29;17-18에서 레아는 시각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야곱의 선택에서 밀려나고 만다고 했고, 징벌로서의 장애로 《레위기》 26;16에서는 재앙을 받은 결과로 레아가 시각장애를 갖게 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죄인 혹은 불결한 존재의 상징으로서의 장애인을 묘사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인하며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킬 때 장애인을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 장애인을 이렇게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 생명 전체로서의 장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장애, 변화된 증거로서의 장애로 장애인을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을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보고 있고,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장애인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는 장애인이 치유 받은 사건을 수없이 기록하며 그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해줘야 하는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장애인복지에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전래된 이후 선교사들이 1894년 평양에서 오복녀라는 시각장애인 소녀에게 점자를 가르치며 장애인선교와 함께 장애인복지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장애인선교단체들이 세워지면서 기독교 장애인복지 활동이 활발해졌다. 베데스다선교회, 실로암선교회, 한국밀알선교단, 새빛선교회 등이 대표적인 장애인선교단체이다. 한국밀알선교단이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을 설립하면서 기독교 장애인복지를 공식적으로 펴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 장애인복지는 정부로부터 수탁받은 시설을 운영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시설의 장(長)이 기독교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장애인시설 대부분이 기독교시설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이에 반해 가톨릭은 한국가톨릭장애인복지협의회를 통해 교구별로 이뤄지고 있다. 한국 천주교 15개 교구에 170여 개의 장애인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1982년에 개관한 우리 나라 최초의 장애인종합복지관인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성모수녀회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는 것을 필두로 전국 장애인복지관의 10%를 가톨릭에서 운영하고 있다.
기독교와 가톨릭의 장애인복지시설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비법인으로 운영하는 시설이 많기 때문이다. 종교의 특성상 장애인을 서너 명씩 보호하며 선교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다 보니 시설 비리로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아서 이웃 종교의 장애인복지는 양적으로는 많지만 질적으로는 열악한 상태이다. 종교의 장애인복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감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5. 불교 장애인복지의 과제와 전망

그동안 불교 장애인복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약하다. 하지만 불교 경전에는 장애인과 장애인복지에 대한 이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불경에 나타난 장애 명칭은 신체적 장애, 병약, 기형, 정신적 장애, 악업(탐욕, 번뇌, 집착, 비방, 질투, 허언)이다. 현대적 장애 개념보다 훨씬 넓다. 인간의 잘못된 심리 상태까지 장애로 보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마음의 장애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장애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장애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삶의 조건의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불교 장애인복지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는 올바른 장애인관을 정립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불교 장애인복지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올바른 장애인관에 대해서는 앞의 불교의 장애인관에서 언급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불교 장애인복지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보시행이다. 보시라 함은 욕심을 거두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을 뜻한다. 보시를 할 때는 준다는 마음 없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의 기부는 준다는 것을 너무나 강조하기 때문에 받는 사람들이 부담을 갖게 되고 기부 활동이 선행으로 필요 이상의 칭찬을 받고 있는데 받는 입장에서는 큰 낙인이 될 수 있다.
둘째, 복전행이다. 복전이란 행복을 키우는 땅이란 뜻이다. 장애인복지가 단순히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 같지만 불교의 복전은 대가를 예상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로 장애인복지는 복전임에 분명하다. 장애인복지가 발전해서 자립생활이 가능해지면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비용이 감소하고 장애인이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 사회에 기여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의 미래를 여는 열쇠는 장애인복지에 달려 있다고 하며 장애인복지에 박차를 가해 미국의 성장을 일구어냈다.
불교 장애인복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종단 차원에서 불교 장애인복지 실천 체계를 갖추어야 하고
둘째, 불교 장애인복지에 대한 연구로 프로그램의 전문화를 꾀하고
셋째, 민간 자원을 모아 장애인복지 기금을 마련하고
넷째, 장애인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다섯째, 불교 장애인복지 사상을 계몽하며 불교적 장애인관을 형성해 가야 한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에 따라 장애인관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적 이념이 근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죄를 운운하는 업보 윤회는 업사상의 표피적인 면만을 가지고 유출한 왜곡된 논리이고,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이루게 하는 논리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모든 존재는 공간적, 시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 연기론이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고통과 아픔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교의 장애인관은 장애인과 일반인을 구분하지 않는 원융(圓融)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장애인들이 원하는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다.
2008년 4월 11일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됐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 이슈가 될 텐데 불교의 장애인관으로 장애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무너지고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다. ■

 

방귀희 / 한국장애인문화진흥회 대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석사),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석사) 졸업. 경희대학교 겸임교수, 솟대문학 발행인 등으로 활동 중이며 현재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 한국방송작가대상, 한국여성지도자상 등을 수상했다.  《작은 일에서 행복 찾기》 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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