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의 배경과 전제

몇 년 전 일반 사회복지계 일각에서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역사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현대적인 사회복지사업의 이전 단계로서 개화기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종교계의 사회사업적 활동들을 조사하는 가운데, 불교 부분은 필자가 맡게 되었다. 그 결과가 이 글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당시 보고서의 내용 일부를 본고에 전재한 경우는 각주로써 명시할 것이다.
불교학 가운데서 우리가 현상과 경험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매체는 다양하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현장의 관찰조사와 관계자의 경험에 관한 설문조사가 있을 것이고, 다소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출판된 문헌이나 신문·방송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본 원고는 아쉽게도 다양한 도구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1924년에 창립된 월간잡지 《불교(佛敎)》를 가장 크게 활용하였고, 기타 몇 편의 연구결과물에 의존하였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시간상 제약이 있었던 게 문제지만, 당시 일차로 조사된 결과만으로도 일반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상당히 놀라는 반응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지금껏 대부분이 근대기 전후로 불교계는 우리 사회를 위해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불교계 외부자들의 그러한 식견은 그들만의 탓이 아니라, 사실은 불교계 내부에서부터 사회 공헌에 관련된 정보를 더 열심히 발굴하고 공유할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로서도 다소 예상 밖의 수확이라 느꼈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겨서 조계종단의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앞으로 추가 문헌을 통해서 파악하자면, 《불교》 외의 잡지들과 주요 신문기사·사지(寺誌)들을 분석해 볼 수 있고, 혹은 지역별로 사찰 및 신행단체 활동을 보고 들은 노불자(老佛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면담과 구술을 통해서 근대불교 활동사를 어느 정도 수집할 수 있다고 본다.
당대의 불교계 잡지들 가운데서도 필자가 일차로 월간지 《불교》를 선택해서 내용을 살펴본 것은, 총 108호(+ 《新불교》 67호=175호; 1924년~1944년)로 비교적 긴 기간 동안 발행되었고, 1933년에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인수하기 전까지는 순수 민간 잡지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영인본으로 묶여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는 점도 그 이유의 한 가지라고 하겠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이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등 온라인에 근대기 여러 잡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불교계 잡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불교》의 영인본이 있을 뿐이다.
이하 본고는 연대기처럼 각 호의 순서대로, 주로는 불교계 소식란의 공익적이고 사회참여에 관련된 기사들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그중에서 특히 사회사업적으로 의미가 있는 기사들은 표로 묶어서 재정리하도록 한다. 참고로 당대의 개신교와 천주교의 활동들도 일부 소개하고자 한다. 《불교평론》에서는 금번 필자에게 1970~80년대 정도까지 불교계 사회사업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으나, 개인적 판단으로 일제강점기까지만 기술하는 점에 양해를 구하고 싶다.


2. 《불교》의 내용 발췌

1924년 창간호에서 제3호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 가운데는 승려의 비리나 주지 갈등의 사건들이 지적되고 있다. 특히 제1호는 근본적인 시설로서 참선도량을 신설하고 재래의 도량은 개선할 것과 불교전수학교를 신설하고 재래 전문학교는 개량, 그리고 법식 및 범패의 연구와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재미있는 글 한 가지는 ‘이 시대 열 가지 사람들의 후회’라는 제목 아래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제3호).

①아들에게 상속 주고 돈 못 쓰는 부호 ②여학생 며느리 보고 대접 못 받는 시어머니 ③도제가 환속할 줄 모르고 유학시키는 사승 ④인정에 빚 연대보증선 채무자 ⑤시대가 이럴 줄 모르고 자손을 학교에 안 보낸 완고한 양반 ⑥일확천금하려고 땅 팔아서 실패한 투기업자 ⑦생활을 예료(預料) 못하고 풍조에만 뜨여서 취처한 승려 ⑧자유결혼 하다가 가장 잘 못 만나 고생하는 신여자 ⑨소작인 상조회 바람에 지주(地主) 메고 탈경(奪耕)한 농민 ⑩평상시에 독실히 공부 안 하다가 시험에 낙제 당한 학생
교계 소식란에, 보성고등보통학교의 학생 보결을 모집한다는 내용과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부속사업으로 야학 강습소인 능인여자학원에 불교중앙교무원이 보조금을 지급하고 학생을 추가로 모집하는 중이라는 기사도 있다(제4호). 전남 순천군 송광면 장안리 정동사숙(正東私塾)은 1922년 봄에 창설하여 유지가 어렵다가 1923년 9월부터 송광사와 장안(壯安)불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부흥하였고, 남녀 학생이 50 여 명에 이른다. 경남 남해군 화방사, 용문사가 남해군의 관유물인 객사를 임대하여 포교를 확장함과 동시에 고등보통학교 정도의 강습소를 개설하여 교육사업을 한다(제5호).
1925년 1월에 경남 산청군에 산청불교청년회가 창립되었고, 2월 강원도 월정사는 본말사 및 개인에게서 기근동정금을 모아 경성의 기근구제회에 송금하였다. 진주불교진흥회는 정기총회에서 진흥회관을 이용하여 동년 4월부터 부인야학회를 개설할 것을 결의하고, 김계송(金桂松) 여사를 강사로 임용하였다(제8호). 전북 남원군 실상사 주지는 백미를 모아서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주민들의 기근을 구제하였다(제11호). 경남 산청군 대원사는 사재(寺財)를 모아서 자선사업에 나섰는데, 전년부터 유치원을 설립하여 여교사 1인을 고용했고 진주의 해외 유학생과 남해의 경성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제12호). 평북 영변 보현사 포교당에는 무료 도서종람소를 개설하였다.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 본말사는 총회를 개최하여 사립(寺立) 석왕사학교를 원산으로 이전할 것과 원산 포교당에 일요학교를 개설할 것을 결의하였다(제13호). 한강에 홍수가 나서 봉은사가 8일간 7백여 명의 이재민을 구하고, 쌀·옷·배와 현금 등을 보시하였다. 이재민 구호활동에는 불교중앙교무원·삼장석회(백용성 선사)·백련사·조선불교단 조선불교중앙교회(정동)·봉선사 등이 동참하였다(제14호). 강원도 철원군 심원사를 중심으로 성주암·석대암·천일회 지장암 등에서 쌀을 모아 주민 23세대에게 배분하였다(제15호). 전남 순천군 송광면 장안불교회는 조선 각지의 수재에 의연금을 모아서 〈동아일보〉로 송금하였고, 여러 사찰에서는 이재민 추도회를 열었다(제16호).
1926년 제20호에는 학교 설립의 필요성에 관한 기고가 있다. 전남 담양군 용흥사에서 빈민가 자녀들을 대상으로 남학생 18명과 여학생 11명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환자에게 약을 주고 치료하는 사업을 하였다. 경남 양산군 통도사 극락암에서는 승속을 떠나서 빈궁고독한 노인들과 ‘양로염불 만일회’를 설치하였고, 50여 명이 동참하였다. 마산 불교소년단 위원회에서는 “마산 공립보통학교 교장이 조회 시에 일반학생에게 소년단 혹은 소녀회에 입회한 자를 탈퇴하도록 지시”한 것에 대한 조사와 경고를 결의하였고, 일본 동경 청산회관에서 불교민중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혁신연맹회’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제20호).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장양면 장안사 부근 마을의 자녀들이 거리가 먼 보통학교에 통학하기가 곤란하므로 장안사와 표훈사의 주지 스님들과 지역 유지들이 총 1,000여 원을 모아 개량사숙을 신축하였다. 해운 정경수에 의해서 卍자 부인회가 창립되고 회원이 100여 명에 이른다. 조선불교소년회가 창립되어 매주 일요일 경성 각황교당에서 소년들을 교육한다(제23호). 김태흡이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하며 ‘종교와 사회사업발달사의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유학생 최초의 문학사를 취득하였다(제24호). 그 논문은 《불교》 제25호부터 33호에 걸쳐서 전재되고 있다.
제25호에서는 “①종교는 인간사회의 부산물인가, 사회구제 목적으로 발생하는가 ②세간 외에 천국이나 극락만을 이상으로 하고 인간사회와는 몰교섭인가 ③세간 구제를 하려면 기독이나 석존처럼 완전한 성자라야만 가능하고 우리 범부는 절대로 불가능한가.”라는 내용의 글을 통해서 사회적 구제를 강조하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 신흥사 내원암 비구니 김수영은 인근 부락 빈민들에게 2백 원 상당의 쌀을 사서 나눠주었다(제25호).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말사인 강릉포교당은 3주 동안 경성유치원장과 주임보모를 강사로 초빙하여 유치원 보모들에게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경북 김천군 불교청년회는 금룡사 포교당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고아원 건립기금 3천 원을 목표로 하고 이미 5백여 원을 모았으며, 나머지는 지방사찰을 중심으로 모금할 것을 결의하였다. 충남 공주포교당의 아리다라 부인회는 창립 1주년 기념회에서 자선사업 실행을 결의하였고, 능인불교소년회는 빈곤 세대에게 교육확대의 건을 결의하였다(제26호).
1927년 공주포교당 ‘아리다라 부인회’는 100여 명의 회원을 가지고 전교부인 9명과 강습생이 40여 명이다. 능인불교 소년회원은 130여 명에 이르고, 실달(悉達)강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빈곤아동들(남자 70명·여자 80명)에게 종교·조선어·산술 등을 교육한다(제30호). 부산포교당 내 능인유치원은 1925년 4월에 개원하였고, 현재는 아동 62명이 재원 중이다. 능인여자야학회는 1925년 5월에 설립되어 현재는 두 반에서 학생이 58명이고 3년제로 운영되고 있다. 전남 순천 선암사는 노동 야학원에 백탄을 지원하였다. 경성 정동의 卍자 부인회는 불교소녀 교육기관을 개설할 방침이며, 공주포교당에 불교소녀회가 개설되어 회원이 50여 명에 이른다(제31호). 경성의 각황교당 불교소년회 등은 성도재일에 팥죽을 쑤어 시내에서 나누어 주었다(제32호).
강원도 월정사 본말사 연합의 영월포교당에는 금성유치원이 1925년 4월에 개원되어 현재는 아동 70명과 보모 2인이 있다(제33호). 나남 석왕포교소는 명성여자학원 강당에서 관북불교여자청년회를 창립하고 〈회우〉라는 회보를 발행하며, 매주 1회의 토론이나 강연 및 도서실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나남 관북불교청년회는 효성유치원 강당에서 60세 이상의 노인 152명에게 위안회를 개최하였다. 부산부 초량정 중앙포교당 부설 능인유치원에서는 50여 명에게 제2회 보육증서 수여식을 가졌고, 능인여자 야학회의 수업식이 있었다(제34호). 경남 동래군 동래읍 복천포교당 야학교생들이 제등행렬에 참가하였다.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창대리 주민에게 금강산 신계사 비구니 유경화가 백미를 배급하였다. 나남 관북불교회가 경영하는 명성여자학원의 제2회 졸업식이 있었고, 효성유치원에서는 수료 아동 38명에게 보육증서 수여식이 있었고 재적생은 현재 117명이다(제36호).
경북 의성군 고운사 불교전문강원에서는 학우회를 창립하고 “불타의 정신으로 사회사업에 선구자가 되기를 목적”으로 결의하였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개운사 불교소년회는 창립한 지 3년이 되었고 “야학을 하며 보시 활동도 할 것”을 다짐하였다(제38호). 대구부 덕산정 동화사 포교소 대강당에서 조선불교 포교사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제40호).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심원사 부근의 빈민가 아동의 학업을 위하여 사내에 대각강습소를 개설하였고 25명이 입학하였다. 경북 의성군 고운사 본말사 연합으로 경영하던 지방학림 후신으로서, 안동으로 이전하여 안동 면민과 고운사 본말사가 연합하여 경영해오던 안동 보광학교의 지원을 중단키로 하였다(제41호).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는 노동야학원을 낙성하였고 개학 시 70여 명이 지원해서 일어·조선어·산술·수신·한문·시사상식 등을 교육한다. 성도재일을 맞이하여 충남 강경 채운암에서는 팥죽을 쑤어서 시장 주민들에게 배급하였다. 조선불교부인회 창립총회가 경성 돈의동 조선불교부인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조선불교소년회는 수송동 각황포교당에서 동요무용가극대회를 열고, 북간도 동포를 위한 기금을 마련 자선공연을 하였다(제44호).
1928년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 주지는 음력설에 인근의 50여 가구 빈곤 주민들에게 설 경비를 부조하였다.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사는 불교학원을 설립하고, 학생 10명에게 공비를 제공하고 불교·역사·국어·산술 등을 교육하였다. 전북 옥구군 미면 은적사 주지는 취임 이래 근 500명의 빈민을 지원하였고, 그들이 포덕비를 세웠다. 함경남도 석왕사 나남포교소에서는 관북불교부인회 후신으로 관음대자회를 조직하였다(제45호). 제46호·47호·48호에 계속해서 김태흡의 기고문 〈불교와 사회사업발달의 연구〉를 게재하였다. 진주불교청년회가 창립되었고, 불교중앙교무원은 당국의 허가를 취득한 불교전수학교를 개교하였다(제48호).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부속사업으로서 대자유치원이 개원식을 가졌고 30여 명의 아동이 입학하였다. 진주 포교당은 수재의연금을 모연하였다(제52호). 함흥군 관북 수해민에게 의연금을 송달하였다. 경남 하동 쌍계사는 19년 동안 단독 운영하던 진명학교를 하동면에 공립학교가 없다는 이유로 면에 기부하고 대신에 4천 원의 포교보조비를 받았다(제53호). 보육시설이 없던 함양에 유치원을 개원하여 칭송이 있다(제54호). 은해사 불교소년회를 창립하였다(제55호).
1929년 봉은사 나청호 화상이 이재민을 구제하였다(제58호). 포교사 김태흡이 대자유치원장을 겸임하도록 위촉되었다. 전북 남원 실상사 신도인 박정연이 빈민을 구제하였다(제59호). 진주 통도사 포교당에서는 성탄기념 법요식에서 빈민들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하였다(제60호). 경성의 수송동 대자유치원의 보모들을 중심으로 불교여자청년회 조직을 발기하였다(제62호). 불교여자청년회가 창립총회를 가졌고 간부조직의 명단을 발표하였다(제66호). 경북 김천 금용사 포교당이 불교소년회를 창립하였다(제67호).
1930년 경성의 각황포교당은 성도재일을 맞이하여 걸인 300여 명에게 음식과 옷을 전달하였고, 동 행사를 후원한 송 원력심의 공덕을 소개하였다. 경성의 간동 불교포교당은 동안거에 들어온 쌀을 인근의 빈민들에게 보시하였다(제68호). 봉은사 포교당이 불교소년회를 창립하고 소년들에게 불전공부를 제공하였다. 불교여자청년회는 대자유치원에서 간담회를 열고, 일요학교 개설·부인강좌 개설·재봉기술 교육 등을 논의하였다(제69호).
1931년 《불교》 제79호와 80호에서는 ‘불교와 사회사조’라는 주제의 특집을 싣고 있다. 한용운의 ‘정교분립을 주장’하는 기고문이 실렸다(제87호). 한용운이 〈조선불교개혁안〉을 기고하였다(제88호). 불교여자청년회가 발기한 재봉학원의 후신인 명성여자실업학교를 개교하였고, 14세에서 40세까지 여성의 입학을 허락하고 양복·편물·사진·염색·자수·세탁 등을 가르친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통한 여성해방’을 강조하는 기고문이 실렸다(제90호). 김진원이 ‘불교와 사회문제’라는 제목의 기고를 하였다(제98호). 《불교》 발행 100호를 기념하여, 불교와 정치·재정·교육·포교·정교분립·청년운동·세계불교 대세 등 다양한 주제의 특집을 꾸미고 있다(제100호).
이상과 같은 《불교》는 1932년까지 제108호를 끝으로 민간인 발행이 종료되었다. 1933년부터는 발행인이 중앙교무원으로 변경되었고, 내용에 있어서도 종전의 제호와 다른 구성을 보인다. 교계 소식란이 주로 교단의 종무행정을 중심으로 공보(公報)의 성격을 가진 반면, 자발적인 민간 활동에 대한 소식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1937년부터 1943년까지 다시 발행된 신판(新板) 《불교》 역시 중앙교무원의 행정을 중심으로 소식란을 구성하고 있어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불교인들의 지역사회 활동 동정들이 이전만큼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 같다.
필자가 겨우 발견한 기사를 소개하자면, 1939년 경남 해인사 말사인 진주 의곡사에서 여자야학교 아동 100여 명이 천도대법회에 참석했다(신판 제19집). 1942년 신판 《불교》 제37집에 실린 조선불교조계종 종보에 의하면, 전남 송광 본말사구 교육기관의 현황으로 벌교읍 사립 송명학교(松明學校) 학생 수 402명, 포교소 여자야학 학생 수 60여 명이 기재되어 있다. 또 강원도 월정 본말사구 교육기관 현황으로서 강릉읍 금천유치원 생도 99명(월정사), 영월군 영월읍 금성유치원 생도 60명(보덕사), 삼척군 삼척읍 죽장학원 생도 376명(삼척군 내 4사찰 연합, 국민6학년 정도)이 적혀 있다. 함경도 석왕 본말사구 교육기관 현황으로는 함북 청진부 나남사립 명성학교 458명(석왕사), 함남 안변 석왕사유치원 40명(석왕사), 함남 원산부 명성 사립학술강습회 215명(석왕사)이 나와 있다.


3. 사회사업활동의 시대별 재구성
 
1) 개항기(개항 이후~1910) 종교계 사회복지활동
 종교계 민간 정부
 개신교 천주교 불교  
육영
구료
구제
사업 1885 제중원
        시병원
1885 배재학당
1886 이화학당
1887 보구여관
1889 평양맹아  
        학교
1909 메리놀즈
      지역복지관
1909 나병원 1885 천주교
        고아원
1888 양로원
1909 계성학교 1879 부산자선교사와 동인회가 행한 구료 활동
1906 명진학교(동국대 전신) 설립
1910 현재 20여 개 지방사찰에 보통학교과정 설립
1908 진주불교부인회 1898 여성단체 찬양회,
1898 순성회(여성단체)
1899 자선부인회
1903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1907 평양양로원 1901 총혜민사,  혜민사
1905 양정의숙
1906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
1906 광제원

 이 시기 불교계의 사회사업적 활동은 외국으로부터의 지원과 경험 정보를 가지고 활동한 개신교나 천주교와 다른 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의 오랜 억불정책을 거치고 개항기의 사원경제는 척박해진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행기관으로 존속해온 지역사찰들을 중심으로 그 나름 자선활동에 대한 책임감과 노력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찰은 별도의 복지시설을 설립하지 않으면서도 수시로 빈곤 아동이나 노인들을 받아들여 생활보호기관 역할을 하던 전통이 있었고, 불교계 기념일(성탄절·성도재·열반재 등)이나 홍수가뭄 등 재해 시에는 긴급구호활동을 하였다. 물론, 불교종단이나 사찰들이 이와 같은 과거의 활동들을 제대로 기록·보관하지 않은 탓에 오늘 우리가 입증자료를 발굴하는 데 어려움은 있다.
당시 불교연구회를 주도하던 홍월초·이보담 스님 등이 신학문 연구와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보통학교과정의 명진학교를 최고교육과정으로 승격시켜 공식 개교(1906)를 하였고 전국 사찰에 학생을 모집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 학교는 뒤에 불교사범학교·불교중앙학림 ·혜화전문학교 등으로 학교명을 변경하면서 현재의 동국대학교로 이어진다. 위의 명진학교를 최고교육과정으로 승격시킨 후에 불교종단은 산하 주요 사찰마다 명진학교의 기초가 될 지방학림을 운영하도록 방침을 정하였고, 그 결과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많은 보통학교과정들이 개설되었다. 1910년까지 20개로 늘어난 보통학교과정은 스님과 일반인이 함께 교육을 받고, 이와 별도로 개설된 전문강원은 스님들만의 교육과정이었다. 불교계가 종래의 구호구제사업은 차치하고도 신교육에 역점을 두었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불교사찰의 지방기초학교 설립 상황표
설립연도 지역 사찰명(학교명) 총 20개소
1906 수원 용주사(명화학교) 고성 건봉사(봉명학교)
양산 통도사(명신학교) 합천 해인사(명립학교)
동래 범어사(명정학교) 안변 석왕사(석왕학교)
순천 선암사(승선학교)해남 대흥사(대흥학교)  8개소
1907 전주 위봉사(봉익학교)대승사 등 6개
경북사찰연합(경흥학교) 2개소
1909 승주 송광사(보명학교) 산청 대원사(강명학교)
화엄사 등 전남 4개사찰연합(신명학교) 3개소
1910 하동 쌍계사(보명학교) 문경 금용사(금용학교)
장단 화장사(화산강숙)합천 해인사(해명학교) 4개소
미상 달성 동화사(광명학교) 장성 백양사(광성학교)
경성(일동학교) 3개소

그 밖의 자료에 드러난 예로는, 1908년 진주 불교부인회가 결성되어 구제사업을 행하였다. 합병 전 일본인에 의해서 행해진 사회복지사업은 불교를 동원한 행려인(行旅人) 구호 사업이 위주가 되었고, 부산자선교사(1879년)와 동인회가 구료(救療)활동을 하였다.

2) 일제 식민통치 시기별 사회복지사업 현황
 1910년대
(근대사회사업 성립기) 1920년대
(근대사회사업발전기) 1931~1945
(근대사회사업의 왜곡기)




부 아동보호: 제생원
감화사업: 인천구호원(1910) 방면위원제도: 1927년 경성부 동부와 북부에 방면사무소 설립
인보(隣保)사업: 경성부의 사회관(1928), 동화인보관(1929) 토막민 대처
감화사업 : 감화령 공포(1923), 총독부 감화원을 조선총독부 영흥학교라고 개칭.
조선사회사업연구회 관여. 사회복지 정책, 제도의 이름을 빌려 전쟁 목적 수행의 수단으로 이용. 총독부에 의한 공적 사회복지가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을 목적으로 하여 행하여짐.
1944년 3월 1일 공포, 실시된 조선구호령.
방면사업: 서울의 서부와 용산 지역까지 확대(1931).



제  은사진휼자금궁민구조규정(1910)
행려병인구호자금관리규칙(1917)  조선이재구조기금령(1938)
직업소개법(1940)
조선구호령(1944)

교 불교:정토종교우회(1913), 불교중앙학림(1915, 명진학교의 개명, 후의 혜화전문, 동국대학), 경성 불교자제회(1917), 평양 불교광제회(1917), 대전 불교자제회(1918), 인천 불교자전원(1918) 등.

천주교: 숭공학교(1910). 숭신학교(1911). 인애회(대구.1917)

기독교: 영나병자구료회(1910)과 나병격리원, 파크월프 나병원(1912) 등.
성공회고아원(1911)과 이화학당유치원(1914)과 평양유치원(1915) 창립. 미국 감리회가 사립중앙유치원설립진흥회(1916) 설치. 불교: 화광교원(1920), 향상회관 조선지부(1922), 조선맹아자협회(1921), 진해입정자교원의 설립(1922), 경성 불교제중원(1923), 각황사 불교부인회(1921), 전주불교부인회 구호활동(1922), 조선불교여자청년회 능인여자학원(1924경, 야학강습소), 보성고등보통학교 인수(1924), 강릉 불교포교당 금천유치원 개원(1924), 순천송광사 장안불교회 정동사숙(1923), 진주불교진흥회 부인야학회(1925), 산청 대원사 유치원 설립(1925), 양산 통도사 빈곤노인 양로염불만일회 개설(1926, 양로원), 공주포교당 아리다라 부인회 실달강습원(1926, 빈곤아동학원), 부산포교당 능인유치원개원(1925), 영월포교당 금성유치원 개원(1925), 마산복수야학회, 경성불교구제원 양로사업(1925), 마산 포교당 배달유치원 개원(1927), 함양 영각사 노동야학원 개원 및 불교포교당 유치원 개원(1928), 경성 대각교회 일요학교 설립(1928), 경성 각황사 중앙불교교무원에 대자유치원 개원(1928), 조선불교부인회 창립(1928), 의성 포교당 여신도정각회 초등교육과정 개설(1929) 등.

천주교 : 에긍회(1924). 성심병원(함경동 청진. 1926). 바자회(1928)

기독교 : 태화여자관(1921년)과 여자맹인학교(1925) 개설. 중앙영아관 설립(1924), 평양연합기독병원시료부(1920), 평양구활원구세군의 자선남비 설치, 경성만리교회 유치원(1926), 폐결핵요양원(1928),  이화유치원에 오후반을 신설. 불교: 조선불교조계종 종보(월간 불교 게재)에 의하면 1940년을 전후로 각 사찰에 설치된 유치원·학원·학교 등의 학생 수 현황이 고정된 지면으로 보고되기도 함(벌교 송명학교, 강릉 금천유치원, 영월 금성유치원, 삼척 죽장학원, 나남 명성학교, 안변 석왕사 유치원, 원산 석왕사 강습소 등). 경성 불교청년여자동맹의 명성여자실업학교 개교(1931), 대전포교당 성덕보육원 개원(1934), 평양 불교광제회 정신질환자수용사업(1931), 경성불교자제원 법인화(1936), 불교부인회 구호활동에 관한 기사 10건 이상 주요 일간지에 소개됨.

천주교 : 성요셉 병원(대구. 1934).나자렛 양로원(평양. 1935). 해성병원(인천. 1935).성모병원(1936).
기독교 : 조선 기독교 절제운동(1932) 금주. 단연 가두행진(1933)활동.
연희전문학교를 적산으로 하여 몰수한 것(1942)부터 선교계의 사립전문학교를 적산으로 하여 차압하기도 하고, 천주교회당까지 군대용 시설로서 강제로 이용 (1944). 그리스도교계의 사회복지활동도 모두 쇠퇴.

간 YMCA, 곽제회(1912, 공창폐지운동단체), 계동풍덕원(1913, 박인묵)과 호계풍덕원(1914), 전주교풍회(1915), 김제구제원(1918), 인천조선자선회(1916),동부인보관(소림원육), 부식농원(1910), 정토종 개교원(화광학원의 전신, 1913), 겸창보육원경성지부(1913) 설치
경성고아구제회(1919년)
청주박인회(1919) 조선노동공제회(1920), 조선소작인상조회와 조선맹아협회(1921), 조선사회사업연구회(1921), 사회봉사회(1922), 영남심안공제원, 경북구제회
화광교원, 입정학원(경기도 내), 천리교내선동경회(경상북도), 부산공생여학교, 마산사설복수회야학교, 진해입정자교원(경상남도), 순안사립의명학교(평안남도)
YMCA, YWCA(1922년 조직)
인천조선인자선회(1920), 평양고아구제회(1921), 경북고아구제회(1921)
교북동노동주책(1921), 경성양로원(1927), 광희주택(1927). 청진사립탁아보호원(1930), 평양민중도서관(1930), 애국부인회 경성 유치원(1922), 일본육아원 평양지부(1922)  좌각원(坐脚院, 1931), 보화원, 한국보육원. YMCA 노동야학


①1910년대 무단통치기−근대사회사업 성립기
이 시기에도 불교계는 앞서 세워진 교육과정(보통학교)을 토대로 지역민을 위한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었을 것으로 본다. 교육 서비스의 공간은 포교당을 그대로 이용하는 경우들이 많고 학생 수가 늘어나면 교사를 신축하게 되기도 한다. 그에 필요한 경비나 인력을 순수하게 사찰과 신도회들이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있다. 특히 일본불교의 사회사업 활동을 보았거나 신학문을 접한 스님들에 의해서 조선불교가 산중의 은둔수행을 벗어나 현실세간에서 실천적이기를 촉구하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경성 불교자제회(1917), 평양 불교광제회(1917), 대전 불교자제회(1918), 인천 불교자전원(1918) 등을 설치하여 구제활동을 하였다.
②1920년대 문화통치기−근대사회사업 발전기
여기서 소개되는 불교계의 활동은, 앞서 보았듯이, 우리글 월간잡지 《불교》의 불교계 소식란을 위주로 해서 수집된 것이다. 당시의 월간 《불교》는 나중에 조계종 종보의 성격을 가질 만큼 전국적인 취재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단 신뢰성이 크다. 반면에 창간 이전 즉 1920년대 이전의 불교계 활동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있는 경로가 정연하지 않은 셈이다. 당시 불교계 사회복지활동을 촉구하고 기대하는 분위기를 짐작게 하는 자료의 한 가지는, 1926년 김태흡 스님이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하여 유학생으로서 최초로 문학사를 취득했다는 기사와 함께 실린 학위논문이 〈종교와 사회사업발달사의 연구〉라는 점이다. 그 논문은 월간 《불교》에서 여러 회에 걸쳐 전재되고 있다. 일본과 서양의 사회사업을 소개하면서 불교계의 참여를 권장하는 내용이다. 개화기에 많은 스님들이 일본을 비롯한 국외 유학을 하고 불교 외의 다른 학문을 전공한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인지 사찰에 개설된 교육과정도 불교 이외의 과목들을 포함하였다.
앞의 표에서도 보았듯이, 이 시기의 불교계 사회서비스로서는 사찰신도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유치원이나 강습회(사설학교)나 기숙사를 개설하는 등의 교육장학사업이 크게 드러나고 있다. 대개가 빈곤한 가정의 남녀 아동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정이지만, 특히 여성만을 위한 야학회나 강습소들이 적지 않게 개설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 같다.
불교계는 경성의 명진학교를 최고교육과정으로 승격시키며 공식적으로 개교한 1906년 이후 1910년까지 무려 20여 개소의 기초교육과정(보통학교)을 산하 사찰에 설립하였음은 이미 소개했다. 각 학교의 교육 활동들이 소상히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시대적으로 보아 빈곤가정으로부터 호응은 있었을 것이다. 1924년에는 불교계가 경성의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교 전신)를 인수하여 1935년 무렵까지 운영하였다. 불교종단의 총무원 격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대자유치원, 불교전수학교(불교 외에 문학·법제·철학·경제학 등의 과목도 교육)와 야학강습소인 능인여자학원(경성 간동)을 운영 지원하였다.
1920년대 유치원이나 강습소(사설학교)를 개설하고 있는 사찰 단체들의 이름을 재정리하자면, 순천 송광사(정동사숙), 남해 용문사(강습소), 진주불교진흥회(부인야학회), 산청 대원사(유치원과 경성유학생 장학금), 영변 보현사(무료도서관), 고양 개운사(불교소년회 야학), 의성 고운사와 안동면 연합(안동보광학교), 의성 포교당 여신도정각회(초등교육학원), 철원 심원사(대각강습회), 함양 영각사(노동야학원), 예천 명봉사(불교학원), 진주 의곡사(여자야학회), 담양 용흥사(강습소), 회양 장안사와 표훈사(보통학교 기숙사), 공주 포교당(실달 강습원), 부산 포교당(능인유치원과 능인여자야학회), 동래 복천포교당(야학원), 순천 선암사(노동야학원), 영월 포교당(금성유치원), 마산 포교당(배달유치원), 나남 관북불교청년회(명성여자학원과 효성유치원), 강릉 포교당(금천유치원) 등이 있다.
한편, 당시에도 복지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자원을 마련하는 것이 관건일 텐데, 여러 사찰이 연합하거나 스님과 재가신도들이 공동모금을 하는 방식으로 추진한 것 같다. 그 예로서, 김천 불교청년회가 고아원 설립을 추진하는 데 금룡사·대승사·남장사·법주사·봉선사·귀주사·보현사·화엄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와 신도들이 모금하는 사연이 소개되고 있다(〈동아일보〉 1926년 5월 13일 자). 또한 아동의 교화를 목적으로 진해 입정자교원(立正慈敎園) 설립(1922), 양산 통도사에 빈곤노인들의 양로염불만일회(1926)와 경성 불교구제원에서 양로사업(1925), 경성 불교제중원의 의료사업(1923) 등이 있다. 불교제중원은 현재의 정동 자리에서 100병상 규모로 내과·외과·조산과를 갖추고 시작했으나 재정문제 등으로 오래 운영되지 못하였다.
기근이나 홍수에 사찰이 구제활동을 한 소식도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다. 즉, 월정사 본말사가 경성의 기근구제회에 송금한 것(1925)을 비롯해서 남원 실상사(1925)·광주 봉은사(1925)·양주 봉선사(1925)·철원 심원사(1925)·순천 장안불교회는 〈동아일보〉사에 수재의연금을 송금(1925)하였고, 양양 내원암(1926)·금강산 신계사(1927)·의성 고운사 학우회(1927)·고성 건봉사(1928)·옥구 은적사(1928), 남원 실상사 신자 박정연 여사 등의 각종 구제활동이 소개되었다. 자연재해가 있는 때 외에 불교계 성탄절(부처님오신날)이나 동지 등에 사찰에서는 지역 내 빈곤주민을 돕는 행사가 있었다.

③1930~45년 민족문화 말살기−근대사회사업 왜곡기
불교계는 여전히 교육사업에 관한 기록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 같다. 종단중앙이 산하 사찰에서 개설한 교육기관들의 현황을 파악하여 총회결산과 함께 《불교》의 종보 면에 공개 보고하는 형식을 보여주었다. 이 무렵 일각에서는 사찰의 일요학교(1940년경 13개소 정도를 파악)를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교육사업의 내실을 기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일부는 기독교의 일요학교에서 자극을 받은 점도 인정하고,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입장을 인용하면서도, 아동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까지 지역사회 주민에게 사찰이 평생교육과 같은 체제로 서비스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의 전쟁과 민족착취의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경성의 봉익동 대각교회(사찰을 교회라고 부르기도 함) 일요학교에서는 우리말 우리글 교육이 제공되었다.
1930년 정초에 경성의 수송동 각황교당, 간동 불교포교당, 양주 봉선사 등의 빈민구제활동을 소개한 뒤에 월간 《불교》에는 불교계 소식란이 아예 없어졌다. 1932년에 다시 부활한 소식지 면을 보면 철원 심원사, 금강산 신계사 등 사찰에서 주로 지역 내 빈민구제를 하였다는 기사들이 있다. 불교계의 구호·구제활동은 특히 사찰에 속한 불교부인회들에 의해서 드러나고 기사화되고 있다. 주요 일간지에 나타난 경우만 보더라도 가장 먼저 진주불교부인회가 있었고, 공주불교부인회(〈동아일보〉 1925. 8. 15)·전주불교부인회(〈동아일보〉 1922. 12. 21)·회령불교부인회(〈동아일보〉 1934. 8. 15)·안동불교부인회(〈동아일보〉 1935. 1. 28)·하동불교부인회(〈동아일보〉 1938. 9. 27)·영안불교부인회(〈중앙일보〉 1932. 3. 24)·진해불교부인회(〈조선중앙〉 1934. 5. 2)·내금강불교부인회(〈조선중앙〉 1934. 8. 13)·안암불교부인회(〈조선중앙〉 1935. 2 .2) 등이 각종 의연금품 전달 행사를 하고 있다. 사회봉사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여성 파워를 불교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1934년 대전 포교당 묘각사 내에 성덕보육원이 설립되었고, 또한 의료사업 분야에서 평양 불교광제회의 정신질환자 수용사업을 개시하였고(1931), 재단법인 경성불교자제원과 인천불교심전원이 조선구호령에 의하여 경기도 내에서의 시설인가가 났다(〈매일신보〉 1944년 6월 2일 자). 이 중 경성 불교자제원은 1936년에 재단법인으로 공식 설립되기(조선총독부관보 1937년 4월 28일) 이전에도 〈시대일보〉(1925년 12월 19일 자), 〈중외일보〉(1930년 1월 29일 자), 〈중앙일보〉(1932년 2월 12일 자) 〈조선중앙일보〉(1933년 9월 30일 자) 등에 행려병자 치료·사회사업 국고보조 단체로서 소개된다. 불교중앙교무원은 명성고아원을 설립(〈동아일보〉 1946년 3월 16일 자)하였고, 조선불교 전재동포원호회, 불교연구회 전재동포구제회 등이 당시 서울시 후생원호과의 허가장을 받은 단체로 소개되었다(〈조선일보〉 1946년 1월 15일 자).


4. 불교계 사회복지 활동 예시

개화기 불교계 사회복지사업은 무엇보다도 교육계몽 분야에 치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불교계 사업은 사찰의 특성상 별도의 복지시설을 마련하지 않더라도 사찰 공간 내에 수시로 지역주민을 받아들여 생활보호를 하는 전통적 방식이 있다. 근년에도 대한불교 조계종의 경우 산하 사찰에 공문을 보내서 생활보호(사찰 거주)를 받고 있는 아동이나 노인, 장애인들에 대한 현황파악을 한 바 있다.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이 생겨났듯이, 개화기 당시에는 그 수를 조사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은 채로, 사찰에서 자연스럽게 기거하는 요보호자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앞서 소개된 유치원이나 학교 등의 사업도 불교포교당을 그대로 전용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불교계의 사회복지 서비스 연구에서는 그런 점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하간에 개화기 불교계의 특징적인 활동 사례를 말하자면 사찰에서의 교육 서비스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서도 수많은 유치원·보통학교·강습소 등 다양한 교육기관들의 활동 사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1개 사찰(범어사)의 교육 서비스 사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유치원(금천유치원), 최고(最古)의 보육원(자혜원)을 각기 소개하기로 한다.

1) 범어사의 사회복지 활동사
개화기 동래 범어사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만당결사운동’과 각종 교육과정을 개설함으로써 계몽적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즉, 1906년에 초등교육과정인 명정학교를 설립하였고 1916년에는 중등교육과정인 지방학림과 전문강원을 설립하여 빈곤층 자녀들에게 교육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범어사는 명정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많아져서 교사가 협소해지자, 1923년 12월 학교를 동래군 북면 청룡리로 이전하게 되는데, 거기서 명정학교 교장은 다시 노동야학회를 설립하였다. 1935년에는 북면 팔송리에 명정야학교를 설립하여 인근 지역사회에 근대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것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동아일보〉 1923년 12월 23일 자).
범어사는 전국 각처에 소속 포교당을 세워서 불교교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사회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예컨대, 동래포교당은 3·1 운동 당시 거사 모의 장소를 제공했고, 후에는 유치원·야학교·불교일요학교 등으로 활용케 함으로써 지역주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어 지역사회센터로서 역할을 하였다. 1921년, 동래포교당은 불교청년회 지원으로 실달야학회를 개설, 빈곤아동을 대상으로 교육했다. 야학회는 학생 수가 계속 증가하여 1923년에 교실을 신축하면서 야학이 확대되고 학생이 236명에 달하여 경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야학기관이 되었다. 실달야학회는 1929년 당시 4년제로 운영되었으며 일본강점 말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 1939년 8월 4일 자).
또한, 동래포교당의 불교여자청년회에서는 1928년 부인야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동래군에서 여자 야학생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동래포교당과 함께 초량 포교당은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포교와 교육계몽을 목적으로 능인유치원을 개설하였고(1925), 포교당 내에 빈곤 여성을 위한 능인여자야학회를 설립하였다(1925). 그 외에도 범어사는 동래포교당 부인회가 유치원 설립의 계획을 세우자, 당시의 거금 삼천 원을 기부하며 지원하였다(〈조선일보〉 1926년 12월 21일 자). 범어사의 이 같은 사회활동에 필요한 자원이란, 그 출처가 곧 불교 신도들의 후원인 것이므로, 결국 불교계 사회복지활동은 당시 국가적 민족적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사찰에 보시를 아끼지 않은 많은 불교 신자들의 공이 크다 하겠다.

2) 대전 성덕보육원(현 대전자혜원)
설립자 고(故) 양정묵 스님은 1898년에 태어나 1934년에 일본 도쿄 오타니(大谷)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동본원사의 대전 포교당으로서 소제동에 묘각사를 건립하고 그 안에 양로원과 성덕보육원을 설치하였다. 1943년에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으며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환동포 구제위원회 대전시 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46년에 불교사립 대전보문중고등학교 재단법인 이사장 겸 후원회장에 취임하였고, 앞의 성덕보육원은 1947년에 대자보육원으로 개명하였다. 미 군정청 후생사업 주무관으로부터 원조를 받았으며 그해 10월 공식적으로 시설인가를 받았다. 1953년 10월에는 후란시스 아동요양원을 설치하여 아동 결핵환자들을 수용 치료하였다. 1957년 3월에 대자보육원의 재단법인 허가를 얻고, 그는 1977년에 학교재단 보문중고등학교에 전 재산을 희사하였으며 1977년 12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보육원의 현 명칭은 1980년에 바뀐 것이며, 1994년에 옛 건물을 철거하고 대전시 동구 소제동 219-155에 원사를 신축하였다. 1998년에 수용 정원을 79명으로 늘리고 소식지 〈자비동산〉을 창간하였다. 1대 양정묵 원장은 1964년 말까지, 2대 이혜구 원장은 1992년 8월까지, 그 뒤를 이어 손자며느리인 윤부덕 원장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1년 9월에는 대전의 아동복지시설 평가에서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된 바 있다. 보호아동은 현재 50여 명(정원 65명)이며 직원 15명이 있다. 한편, 이 법인은 2004년에 별도의 부지에다 노인요양원(자혜은빛마을)을 신축 개원하였고 2009년 현재 보호노인 50명(정원 53명)에 종사자가 18명이다. 양 시설의 운영은 거의 정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3) 강릉 금천유치원
금천유치원은 1923년 5월 1일 오대산 월정사가 관리를 맡고 금강산 건봉사가 교육을 맡으며 유점사가 출자하여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초대원장으로 이대연 스님, 원감에 정보성 스님이 임명되었으며, 첫해는 62명의 원아가 입학하여 50명이 졸업하였다. 설립된 그해 공식인가를 받아서 한국불교계 최초의 유아교육 기관으로 기록되었다. 취학 예비아동은 ‘갑조(甲組)’ 그보다 어린 아동은 ‘을조(乙組)’로 구분했다. 연간 교육일수는 고정되지 않았으나 216~275일 정도였고, 3학기제로 운영되었다. 매일 평균 2시간 50분 수업을 했고 다 같이 불교의례를 했다.
수업 내용은 노래 부르기·율동·유희·종이접기·그림 그리기 등이었으며 조선문·일본문·수기·도화학 등의 학습도 있었다. 설립 초기에는 독립된 원사가 없었으며 8년 동안 포교당에서 더부살이한 뒤에, 여러 사찰과 신도유지들의 모금으로 포교당과 분리된 원사를 신축하였다(〈동아일보〉 1933년 1월 25일 자). 이 유치원은 초기의 활동사진들을 일부 가지고 있다. 2009년 현재 원아 40여 명(정원 60명)에 종사자가 6명이다.


5. 맺는 말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편집진에서 필자에게 요구한 시대 범위를 모두 포괄하지 못한 연구라는 점에서 아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필자의 소견으로는,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970, 80년대까지를 그 이전 일본강점기까지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안목의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로 묶어서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한 점도 예상된다. 적어도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불교계가 가진 자원이 어느 정도 자발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가능케 하였을 것이지만, 전쟁의 폐허에다 외원(外援)조차 전혀 없는 불교계의 입장은 외원기관을 등에 업은 기독교계와 대등하게 평가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 인용한 표들은 기독교계의 활동과 불교계 활동을 한 눈에 비교해볼 수 있도록 제시한 것이었고, 불교계 활동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 사료들은 불교사회복지 관계 문헌들이나 일반 사회복지학의 역사에서 대부분 누락되어 있던 내용들이다. 특히 불교계는 사찰 공간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지역 아동과 여성들에 대한 교육 서비스와 조직화에 역점을 두었던 것 같고, 사찰과 재가신도회의 협력이 곧잘 이루어졌던 것 같다.
필자의 조사 범위에 미흡한 점이 있다는 것도 이미 말했거니와, 앞으로 종단이나 지역사찰 혹은 개인 연구자의 입장에서라도 다각도의 활동 사례 조사가 반드시 필요함을 거듭 강조한다. 필자 역시 머지않아 주요 일간지에 소개된 불교계 봉사와 복지활동 기사들을 수집하여 근대기 사회복지적 공헌을 보완할 생각이며, 더 가능하다면, 지역사암연합회를 탐방하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구술사를 구축해 보고 싶다. ■

 

이혜숙 / 금강대 응용불교학과 객원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박사 수료.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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