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불교사회복지의 이념을 언급하고자 할 때 먼저 생각해볼 문제는 복지라는 용어가 갖는 의미다. ‘복지(福祉)’라고 하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인류의 행복과 평화의 추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사회복지의 이념은 이러한 평화와 행복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길일 것이다. 반드시 딱 맞는 말은 아닐지 모르나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말은 불교의 종교적 목적인 ‘해탈과 열반’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기실 불교는 해탈과 열반의 성취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회복지란 고원한 종교적 이상의 구현 못지않게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누구나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고통을 어떻게 구원해줄 것인가가 사회복지의 1차적 관심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복지의 궁극적 과제는 영원한 인간의 행복이라 할 때 불교가 제시하는 ‘해탈과 열반’은 불교복지의 궁극적 이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사회복지는 인간의 현실적인 행복 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완전한 행복, 완전한 복지를 이룰 것인가가 궁극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우선 불교사회복지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어서 불교사회복지의 이념적인 문제를 붓다의 복지 이념과 복전(福田) 문제, 자비 정신, 공생(共生) 사상을 중심으로 요약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불교사회복지란 무엇인가

1) 복지의 의미
복지(福祉, welfare, 범어는 hita)란 인간생활의 공동(共同)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것을 말한다. 원래 복지(welfare)란 신(神) 혹은 천제(天帝)로부터 주어진 ‘행복’을 뜻하였으나 점차 ‘운이 좋은 행운’으로 이해되어 왔고 근래에는 행복을 공감케 하는 ‘함께 어울림’ 즉 생활의 공동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영어 welfare의 ‘well’과 독일어 wholfart의 ‘wohl’은 모두 ‘좋은 상태’ 혹은 ‘만족스런 상황’을 의미하고, ‘fare’ ‘fafren’은 모두 ‘되어간다’ 혹은 ‘진행한다’ 는 의미이다. 서양에서 비롯된 ‘welfare’라는 말을 동양에서 복지(福祉)라고 번역함으로써, 복지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복지 개념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일본의 키요사와(淸澤滿之, 1863~1903)가 “사회국가의 복지를 발달시키는 것은 오히려 정신주의를 장려하는 것이다”(《精神主義》 1901)라고 설한 것은 근대의 정신적 자유의 확대에 ‘행복’으로서의 복지를 발견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지는 하늘로부터 내려진 ‘행복’을 받아서 인간 자신이 만들어 ‘행운’의 생활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유교의 자혜(慈惠)나 불교의 자비 이념을 통하여 구체화되어, 함께 ‘행복’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자비에 ‘일체중생’의 공제(共濟)를 사실상 내포케 하는 상황의 진전임과 동시에,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복지란 현재는 인간의 생존이나 생활에 대한 지원과 그 지원을 통하여 행복해지기를 구하는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불교복지와 불교사회복지
불교에 있어서 복지와 사회복지라고 하는 것은 불교와 복지의 이념 또는 불교와 사회복지의 이념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말한다. 불교복지는 불교와 복지 관계 또는 불교 자선사업 그리고 불교에 의한 복지의 이념, 사업, 역사, 제도를 지향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에 대해 불교사회복지는 역사와 사회에 규정된 사회복지 문제에 대응하는 사회복지사업으로서 불교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는 동시에, 불교 정신 즉 불교의 이념과 가치를 주체적인 계기로 하여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사업의 실천적인 가능성과 고유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불교복지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불교복지의 원류는 전통적으로 붓타의 정각(正覺)으로부터 비롯된다. 붓다의 정각은 중생에의 구제사상으로 나타나게 되고, 역사적으로는 그 구제사상으로 상징되는 보살도(菩薩道)의 실천으로서 전개되어 온 것이다. 사회제도가 발달하지 못하고 지역이 개발되지 못했던 고대, 중세, 근세의 전근대사회에 있어서는 특히 자연재해나 역병과 빈곤에 대한 대응으로서 자조(自助) 또는 상조(相助), 호조(互助)의 원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협소하고 폐쇄적인 지역, 시골 마을이라는 동질적 사회는 기본적으로는 안전과 안주의 지역으로서 사회적 응집성이 강한 상호부조의 사회를 형성해 왔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불교 승려들의 자발적인 자선행위는 지역사회에 수용되고 평가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자선 또는 불교복지의 실천은 생활상의 모든 어려움, 빈곤, 병고, 고독, 액고(厄苦) 등에 대한 구제와, 보호 활동 및 생활상의 편익과 향상을 꾀하기 위한 토목, 교통, 주거, 목욕 등의 지역 공익사업의 두가지 형태로 대별할 수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모든 불교 승려들의 활동은 포교 또는 교화사업과 동시에 자선 또는 구제사업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사회복지는 그와 같이 전근대적 형태로서 상호부조나 자선사업과 같이 국가가 정책적 개입을 하지 않는 단계를 거쳐 국가가 정책적 개입을 하는 구빈사업(救貧事業), 감화 구제사업, 사회사업, 사회복지사업의 단계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계보의 흐름 가운데서 불교복지와 불교사회복지의 의미는 그 개념 규정에서 혼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자는 자선, 선의, 친절, 보살핌, 봉사에 의한 모든 행위나 활동을 심정적, 이타적 행위로서 미덕화한 결과 오히려 이념적 개념으로서 취급받게 되고,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도 불교가 있는 곳에는 항상 복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후자는 사회문제로서 사회적 장해 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분명히 하는 실체개념(實體槪念)이다. 즉 사회문제의 본질적 파악을 전제로 하여 법률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복지사업을 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지역의 실태에 즉응한 사회복지 실천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원조의 프로그램화와 자발적인 서비스의 제공이 불교사회복지를 특징 지우는 것이다.
요컨대, 불교사회복지적 의미는 불교를 위주로 하는 구제활동이나 자선사업은 사회복지의 원류로서 불교가 존재하면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 승려에 의한 공헌이 현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는 기본적인 인권을 옹호하는 사회복지의 이념과 실천으로 크게 전환되고 발전한다. 따라서 불교사회복지의 현대적 과제는 민간사회복지의 일익을 담당하고 대승불교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마음의 치유 혹은 터미널케어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사회복지 실천 활동의 구현이 필요하다.

3)보살행과 보은행
(1)보살행(菩薩行)
보살행이란 보살의 실천행을 말한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구도자를 보살(菩薩)이라고 하며, 그 보살의 실천을 행하는 행위 또는 수행을 보살행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보살사상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보살은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 부르는 호칭의 하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거기에 이타적(利他的) 의미를 강조하여 스스로 불도(佛道)를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서원을 일으키고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보살행 가운데에는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이라고 하는 사홍서원이 있는데 이것은 보살의 실천행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또 보살이 그 서원을 성취하기 위한 실천덕목으로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있다. 그리고 보살이 지켜야 하는 계율로서는, 일체의 악(惡)을 단절하고 계율을 지키는 ‘섭율의계(攝律儀戒)’ 일체의 선행을 실행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베푸는 ‘섭중생계(攝衆生戒 혹은 饒益有情戒)’의 삼취정계(三聚淨戒)가 있다. 《해심밀경》 권 4에서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를 포함한 3종의 계(戒)를 설하고, 정진(精進), 정려(精勵), 혜(慧)에도 요익유정이 포함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요익유정(饒益有情)이라는 불교에서의 사회복지 이념과 실천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사홍서원이나 육바라밀 및 삼취정계라고 하는 보살행은, 모두 불교인에 있어서 사회복지 실천 그 자체이고, 깨달음으로의 길을 걷는 실천행이 그대로 모든 사람을 이익게 하는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이익이란 예컨대 질병이나 심신의 고통스러운 사람에 대하여 치유, 간병 내지는 개호(介護) 등의 원조를 하는 행위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의료적으로도 환자들을 구애받지 않고 걸림없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불안하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다.
여러 경전에 등장하는 보살들도 각기의 중생을 구제하는 서원을 세우고 있다. 그 서원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보살의 모습에 불교사회복지의 이념과 실천행이 있다. 이 보살행으로서의 이념과 실천에 대해 중생 측으로부터의 실천행으로서 보은행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보은행(報恩行)
아쇼카 왕에 의하면 정치란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국왕의 보은(報恩)의 행(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하여도 그것은 모두 첫째는 내가 중생에게 진 채무를 반환하는 것임과 동시에, 또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는 안락하게 하고, 저 세상에서는 하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摩崖紹勅〉). 이와 같은 그의 보은행 사상은 깊은 종교적 의의를 갖는다. 그는 불교에서 설하는 중생은(衆生恩)을 확인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보은의 사상으로서는 사은(四恩) 즉 네 가지의 은혜를 들고 있다. 네 가지 은혜에 대한 여러 경전의 설 가운데 《정법염처경》에서 이르기를 “네 가지 은혜가 있다. 아주 갚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네 가지란 즉 ①모(母) ②부(父) ③여래(如來) ④설법(說法)의 법사(法師)이다. 만일 이 네 사람을 공양한다면 무량의 복을 얻어, 현세에 사람들의 찬탄을 받을 것이고 미래세계에 보리(菩提)를 잘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대승본생심지관경》에서 이르기를 “세출세(世出世)의 은혜에 네 가지가 있다. ①부모의 은혜, ②중생의 은혜 ③국왕의 은혜 ④삼보의 은혜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은혜는 일체의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행(行) 가운데서도 특히 중생은(衆生恩)에 보답하는 행의 사상이 불교사회복지의 이념으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불교사회복지의 이념

불교에 있어서 사회복지의 기본 이념은 불교사상에 입각한 중요한 덕목을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불교사회복지 사상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이념으로 볼 때 대체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붓다[世尊]의 복지 이념
2) 복전사상(福田思想)
3) 자비정신(慈悲精神)
4) 공생사상(共生思想)

이상과 같은 문제들을 시대를 따라 살펴보면 1) 2)는 초기불교 시대로부터 중요한 덕목이고 3) 4)는 대승불교에 이르러 크게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그 순서에 따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붓다[世尊]의 복지 이념
성도 후 입멸까지 45년간에 걸쳐 교화활동을 하셨다고 하는 세존의 전기를 보면 현재의 세상에서 중생들을 위해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세존의 실천행에 대한 것은 세존의 전기나 경론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개별적인 사례나 행동에 대해 관련 전기나 경론을 통하여 세존의 교화 방법이나 복지이념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대기설법(對機說法)
대기설법은 응병여약(應病與藥), 즉 질병이나 나쁜 버릇에 맞추어 약을 준다고 하는 것과 똑같이 사람 사람의 소질이나 능력에 맞추어 법을 설하는 것으로 세존의 교화 방법이었다. 이렇게 볼 때 세존의 설법의 특징인 대기설법이라는 것은 사실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보다 1대 1의 대면관계로서의 법담(法談)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팔만사천의 법문이 이루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대상자의 경우에 적응한 세심한 배려심의 근저에는 그 사람에 대한 가장 잘 어울리는 활동을 하는 것이 복지활동의 정신적인 기본 이념이다. 복지활동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인 것이다. 상대방을 자신의 수준에 두고 추상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수준에 맞추어 구체적인 방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실천의 요체임을 세존은 전도교화의 실천을 통하여 보여 주었다.

(2) 생명존중 사상
다음은 생명존중 사상이다. 자비의 이타행은 당연히 이 생명존중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세존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생명을 존중할 것을 설하고 있다. ‘생명을 소중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복지활동의 원점(原點)이다. 생활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편안케 한다고 하는 복지의 목표는 결국 생명을 지킨다는 것이 그 결론이 된다.
생명존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존중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 인간은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 근거를 명확하게 설하고 있는 것이 세존으로부터 비롯된 불교사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다. 모든 사람은 모두 부처의 ‘생명’을 받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 똑같이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동시에 또한 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슬플 때는 나 역시 슬픈 것이고 상대방의 고통은 나에게도 고통이 되는 것이다. 동비(同悲), 동고(同苦)의 공감(共感)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는 자타평등의 관계를 인간이라고 한다. 불교 복지활동의 이념은 이러한 인간관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3) 평등사상
세 번째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세존 당시의 인도사회에서 부처님은 사성평등(四姓平等)을 설하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계급의 차별 관념이 엄격한 인도사회에서 세존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선언하고 주장하신 것이다. “태어나면서 천민이 아니고, 또 태어나면서 바라문(귀족)이 아니다. 행(行)에 의해 천민으로 되고 행에 의해 바라문(귀족)으로 된다”고 하는 유명한 말씀에 의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계급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인격을 평등하게 존중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이 또한 복지활동의 근본 이념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정신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있어서 복지 활동의 원천이 되어 있다.

2) 복전사상(福田思想)
(1)시여(施與)의 윤리
복전사상의 근저에는 시여의 윤리가 있다. 시여(施與; 布施, dāna) 를 중시하는 사상은 초기불교에서는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재산도 자기 혼자서 독점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복리(福利)를 나누어 주기 때문이라고 하여 시여의 윤리가 매우 강조되었다.
《자타카》에서 어느 대왕은 민중에 대하여 부모와 같은 입장에 서서 가난한 사람이나 여행자, 지방을 도는 행상인, 걸인 등에게 커다란 시여를 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만이 시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타카》에서 이르기를 “가난해도 베푸는 사람들이 있고, 부유해도 베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부족한 가운데 베푸는 시여는 그 천 배의 가치가 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가난한 여인’의 한 등불이 크게 칭찬을 받고 있다. 부족한 가운데서 나누어 준다는 것에 종교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아쇼카 왕(Asoka, 기원전 296~232경 재위)은 고래로부터의 보시(布施)의 윤리를 존중하면서도, “생각건대 광대한 시여를 해도 극기(克己) 마음의 청정, 보은의 염(念), 신앙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은 실로 천한 사람이다.”(〈摩崖紹勅〉)라고 하여 그 정신적 내면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이렇게 재시(財施)보다도 법시(法施)를 강조하는 사상은 대승불전에서 볼 수 있다.
보시에는 금품을 주는 재시를 비롯하여 법시와 무외시(無畏施)의 3가지가 있다. 중국불교에서는 무재(無財)의 칠시(七施)도 설하고 있다.
재시란 금전이나 재물, 음식물 등 주로 경제적으로 베푸는 것이고, 법시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공덕을 설하는 것이며, 무외시란 불안이나 공포에 질린 사람들에게 넓은 정신적인 안심과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심지관경(心地觀經)》에서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에 대해 이르기를 ①봉사를 하는 측, ②봉사를 받는 측, ③봉사의 수단이 되는 시물(施物) 이들 세가지는 공(空)으로서 청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하고 있다.
무재(無財)의 칠시(七施)란 구체적으로 ①안시(眼視; 상냥한 눈) ②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우아한 얼굴 표정) ③언사시(言辭施; 상냥한 말) ④신시(身施; 다정스런 태도) ⑤심시(心施; 배려하는 마음) ⑥상좌시(床座施; 자리를 제공하는 것) ⑦방사시(房舍施; 장소를 제공하는 것) 등 7가지이다.
보시는 감사하거나 기쁜 마음으로 나타내는 자주적 행위이다. 은혜적인 태도가 아니고 이익이나 보수를 바라는 것도 아닌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 불교의 사회복지적인 의미가 있음과 동시에 공생과 공감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숙해 간다고 하는 불교 사회복지적인 실천의 과제가 있다.

(2) 복전사상의 전개
복전이란 선한 행위의 씨앗을 심어 공덕을 수확하는 것을 전지(田地)에 비유하여 설한 것이다. 이 복전사상의 전개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부처님께 보시를 하면 그 공덕에 의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 최초에는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이 복전의 대상으로 되어 있었다. 후에 보시를 하고 승가를 신봉함으로써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대상은 부모나 윗사람인 스승, 그리고 자비심을 닦아 빈곤자, 고독자에게 보시를 하는 것이 제창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①경전(敬田; 불법승 등의 종교적인 대상) ②은전(恩田; 부모, 스승 등의 윤리적 대상) ③비전(悲田; 빈곤자, 고독자, 병자 등의 복지적 대상) 등의 대상에 따라 세 종류의 복전이 있다고 하여 삼복전(三福田)이라 하였다.
《불설제덕복전경(佛說諸德福田經)》에는 사회적 실천의 보시의 근거로서 칠복전(七福田)을 들고 있다. 그것은 ①불도(佛圖), 승방(僧坊), 당각(堂閣)을 건립한다 ②과수원, 목욕 저수지, 수목 등을 조성하여 청량을 베푼다 ③항상 의약을 베풀어 대중들의 병을 고쳐준다 ④튼튼한 배를 만들어 사람들을 태워 건너가게 해 준다 ⑤다리를 설치하여 마음놓고 건너다니게 하고 ⑥길에 가까운 우물을 만들어 고갈을 해결해 준다 ⑦화장실을 만들어 놓는다 등 7가지 실천이다.  그리하여 복전은 사회적 실천으로서 의미가 강해지게 되었다.
5세기경에 중국에서 찬술된 《범망경(梵綱經)》에는 팔복전(八福田)을 제시하여 자비심에 의한 타인구제를 강조하고, 나아가 선행을 하고 사람들을 교화하여 그 이익을 위해서 힘을 다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행을 위한 계율을 실천하는 입장에서 간병(看病)을 제일로 하는 복전을 주장하여 “병든 자를 돌보지 않고 구하지 않으면 경범죄를 범한다”고 하였다. 경범죄는 청정행을 모독하는 죄로 가벼운 죄라고는 하지만, 보살행에 있어서는 이러한 죄를 범하는 것을 엄하게 경계하고 있다.
불교 사회복지적인 의미로 보면 이러한 삼복전(三福田) 사상의 대인원조를 포함한 실천행은 칠복전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세상의 공덕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환자를 정성껏 공양하고 가난한 사람을 정성껏 보시하는 보살행의 실천으로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복전사상은 자비에 대한 사상적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복전이라는 의미는 복지의 근원, 행복의 원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복전은 타인에 대한 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인 동시에 불보살의 본질 표명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여래는 무상(無上)의 복전이다.”(《대반야경》) “모든 복전 가운데 부처의 복전이 가장 수승한 것이다.”(《정법염처경》) “보살은 취하는 일이 없고 희론(戱論)을 멀리한다. 이것이 인천(人天)의 복전이다.”(《대반야경》)라고 설하고 있듯이 불보살이 불보살인 이유를 복전에서 찾은 것은 불보살의 본질이 중생을 위한 복지의 근원이 되는 그것 자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중생은 보살의 복전이다. 능히 대비심(大悲心)을 내기 때문에”(《지도론》)라고 한 것은 불보살이 지니기 전에는 단지 하화중생(下化衆生)으로서 복전의 행사이고, 이것이 없었다면 불보살이 있을 까닭이 없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복전에 대해 경전에서는 “반야(般若)에 주(住)하는 것을 세상의 복전이라고 한다.”(《대반야경》) “양전(良田)은 복이 많다고 하지만 마음에 따르지 못한다.”(《지도론》)라고 설하여 상구보리(上求菩提)로서 자기자신의 수행에 중점을 두는 경우도 있다.
《정법염처경》에서는 “네 가지 복전은 공양하여 선과(善果)를 얻는 것이다.(부, 모, 여래, 법사)”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한결같이 부, 모, 여래, 법사에 대한 공양을 말하는 것이다.(물론 이 경우는 그들의 지위에 있는 자의 본성, 본질에 따른 복전의 행사를 필요로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다. 
“복전에 두 가지 있으니 연민(憐愍)과 공경(恭敬)이다.”(《지도론》)
“복전에 두가지 있으니 부모와 중승(衆僧)이다.”(《불보은경》)
이는 부모에 대한 공경, 중승에 대한 연민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윗사람에 대한 것과 대등한 위치에 대한 것, 두 가지이다. 혹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아함경에서 이르기를 “4종류의 인복전(人福田)은 신(信)을 지니고 법(法)을 받들고 신(身)으로 증명하고 견(見)에 이르는 것이다.”(증일아함)
위에서 지신(持信), 봉법(奉法), 신증(身證), 견도(見到)라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불법을 기준으로 하여 신앙을 지니고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몸으로 체득하고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 이것을 증명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통일적 전개를 기대하는 그 자체를 복전, 즉 복지의 근원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3) 자비 정신
(1)자비(慈悲)의 의미
자비란 자(慈; 범어 maîtri, 또는maitrya)와 비(悲; 범어 karuņā)의 합성어이다. 중생을 어여삐 여겨서 편안함 또는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고(苦)를 없애 주는것을 비(悲)라 한다. 일설에는 발고(拔苦)를 자(慈), 여락(與樂)을 비(悲)라고 하고 있다. 시여(施與)를 비롯한 이타행의 기초가 되는 기본 이념으로 자비정신을 들 수 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5에 이르기를, “모든 중생을 위해서 무이익을 제(除)하는 이것을 대자(大慈)라 하고, 중생에게 무량의 이락(利樂)을 주려고 하니 이것을 대자(大悲)라고 한다.”고 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에 이르기를, “자(慈)는 중생을 애념(愛念)하는 것으로 항상 안온락사(安穩樂事)를 구하여 이를 요익한다. 비(悲)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니, 오도(五道) 중의 여러 가지 신고심고(身苦心苦) 를 받는다”고 한다. 또 《구사론》 제29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초습업(初習業)’의 계위에서 어떻게 자(慈)를 수행하는가, 이르되 먼저 자소수(自所受)의 낙(樂)을 사유하고, 혹은 불, 보살, 성문 및 독각 등의 소수(所受)의 쾌락을 설하는 것을 듣고 즉 이 생각을 한다. 원컨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일체 이와 같이 동등하게 쾌락을 받게 해 주소서. 만일 그것이 본래 번뇌증성(煩惱增盛)하여 이와 같이 평등하게 마음을 쓸 수가 없으면 유정에서 나누어 삼품(三品)으로 해야 하리니, 소위 친구와 처중(處中)과 원수이다. 친(親)에 또 셋으로 나누니 이른바 하중상이다. 중품(中品)은 오직 하나이다. 원(怨)에도 셋으로 또 나누니, 이른바 하중상이다. 모두 칠품(七品)을 이룬다. 품(品)의 다름을 나누고 나서 먼저 상(上)의 친(親)에서 진성(眞誠)의 여락승해(與樂勝解)를 발기하고, 이 원(願)이 이루어지면 중하의 친(親)에서도 또한 점차로 이와 같은 승해(勝解)를 수행한다. 친(親)의 삼품에서 평등함을 얻으면 다음에 중품과 하중상의 원(怨)에서 또 점차로 이와 같은 승해를 닦는다. 수습력(數習力)에 의해 능히 상(上)의 원(怨)에서 낙(樂)을 주겠다고 하는 원(願)을 일으켜 상(上)의 친(親)과도 동등해진다. 이 승해(勝解)를 수행하여 이미 무퇴(無退)를 얻으면, 다음에 소연(所緣)에서 점수(漸修)하여 넓혀간다. 이르되 점차 상(想)을 옮겨 일읍(一邑), 일국(一國), 일방 (一方), 일체의 모든 세계를 사유한다. 낙(樂)을 주겠다고 하는 행상(行相)이 두루 가득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자무량 (慈無量)의 수습(修習)하는 것을 이룬다고 한다. (중략) 비(悲)를 수행하는 법도 이에 준하여 알 것이다.

이것이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의 자무량(慈無量), 비무량(悲無量)의 둘을 설하는 것으로, 즉 성문(聲聞)의 사람들이 중생에게 즐거움(樂)을 주고, 또 그 고(苦)를 없애 주겠다고 관상(觀想)하는 법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대반열반경》 등에는 자비에 중생연(衆生緣), 법연(法緣), 무연(無緣)의 세 가지가 있음을 설하고 있다. 즉 《열반경》 제15에 이르기를, “자(慈)에 삼연(三緣)이 있다. (1)은 중생을 연(緣)하고 (2)는 법을 연(緣)하고 (3)은 즉 무연(無緣)이다. (중략) 중생연(衆生緣)이란 오음(五陰)을 연(緣)하여 낙(樂)을 주기를 원하니 이것을 중생연이라 한다. 법연(法緣)이란 모든 중생이 기대하는 바를 연하여 이를 시여하니 이것을 법연이라 한다. 무연(無緣)이란 여래를 연하니 이것을 무연이라 한다. 자(慈)란 대개는 빈곤한 중생을 연고로 하고 여래대사(如來大師)는 빈곤을 영원히 여의어 제1의 낙(樂)을 받는다. 만일 중생을 연(緣)고로 하면, 즉 불(佛)을 연(緣)고로 하지 않으니, 법도 역시 이와 같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를 연하는 자를 이름하여 무연이라 한다. 세존의 자(慈)의 소연(所緣)은 일체중생이니 부모처자친속을 연하는 것과 같다. 이 뜻이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중생연이라 한다. 법연이란 부모처자친속을 보지않고 일체법(一切法)은 모두 연(緣)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법연이라 한다. 무연이란 법상(法相) 및 중생상(衆生相)에 주(住)하지 않으니 이것을 무연이라 한다.”고 한다.
또 《대지도론》 제40에서 이르기를 “자비심에 세 가지가 있으니, 중생연, 법연, 무연이다. 범부는 중생연이니 성문과 벽지불 및 보살은 처음은 중생연, 후에는 법연이다. 제불(諸佛)은 필경공(畢竟空)을 잘 수행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무연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정영(淨影)의 《관무량수경의소(觀無量壽經義疏)》 ‘권말’에 이를 해석하기를, 중생연이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낙을 주고 고(苦)를 없애주려고 하는 것을 말하고, 법연이란 모든 중생은 무아무인(無我無人)으로서 단지 오음(五陰) 생멸의 법수(法數)만 있다고 관(觀)하여 자비를 행하고, 혹은 중생은 망령된 마음으로 나와 다른 사람때문에 애정으로 얽혀 매이게 된 것을 생각하고 깊이 슬퍼하여 자비를 행하는 것을 말하고, 무연이란 오음공적(五陰空寂) 하여 본래 무소유이니 그러므로 제일의체(第一義諦)에  주(住)하여 무도(無度)의 도(度)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비는 범부 이승(二乘) 등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들은 소위 중생연 또는 법연이고 평등무연할 수 가없다.  그러므로 부처의 자비를 이름하여 대자대비라 한다. 《관무량수경》에 ‘불심(佛心)이란 대자비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대지도론》 제27에 이르기를, “물어 가로되, 대자대비는 이와 같다면 무엇이 소자소비(小慈小悲)이고, 이 소(小)로 인하여 대(大)라 하는가. 답하기를, 네 가지 무량심 중의 자비를 이름하여 소(小)라 하고 이 가운에 18불공법(十八不共法)의 순서대로 대자비를 설하는 것을 이름하여 대(大)라 하고 한다. (중략) 불(佛)의 대자대비는 진실이고 최대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소자(小慈)는 다만 마음에 중생에게 낙을 주려고 생각하는 것도 실제로는 즐거운 것이 없다. 소비(小悲)는 중생의 여러 가지 심신의 괴로움을 관(觀)하는 것을 말하고, 연민할 뿐으로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다.  대자(大慈)는 중생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도록 생각하는 것이고, 또 즐거움을 준다. 대비(大悲)는 중생의 고통을 연민하고 또 능히 고통을 벗어나게 한다. 그 다음에 범부들과 성문, 벽지불, 보살의 자비를 이름하여 소(小)라 하고 모든 부처의 자비를 이름하여 대(大)라 하고, 또 그 다음에 대자(大慈)는 대인(大人)의 마음 속에서 생기고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사무애지(四無碍智),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대법(大法) 가운데서 나와 능히 삼악도의 큰 고통을 파하고 능히 세 가지의 큰 즐거움(樂)을 준다. 천락(天樂)과 인락(人樂), 열반락(涅槃樂)이다. 또 그다음으로 이 대자(大慈)는 시방삼세의 중생 내지 곤충에 두루 가득하고 자(慈)는 골수에 철하여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의 삼악도에 떨어짐에 만일 사람이 있어 하나하나 모두 대신하여 그 고통을 받으며, 고통을 벗어나도록 하고 나서 오소욕(五所慾)의 즐거움(樂), 선정(禪定)의 즐거움(樂), 세간의 최상의 즐거움(樂)을 가지고 스스로 이를 주어 모두 만족하게 하나, 부처의 자비에 비하면 천만 분 중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간의 즐거움(樂)은 기광부실(欺狂不實)한 것으로서 생사(生死)를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로써 모든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의 광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사섭사(四攝事)
사섭사(四攝事)란 보살이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네 가지 행위를 말하며 사섭법(四攝法)이라고도 한다. 사섭사의 사섭(四攝)이란 보살이 중생을 섭취(攝取)하여 인도하기 위해서는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네 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증일아함 22 이하 《성실론》 권2, 《대반야경》 권438, 《대품반야경》 권24, 《대지도론》 권88 등에서 널리 설하고 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섭(攝)이라 하는 것을 보살이 이 네가지 방법을 가지고 중생의 정(情)에 접근하여 선교(善巧)로 이끌어 도탈(度脫)케 하기 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시섭사는 베풀어 나누어 주는 것이고, 애어섭사는 자비로운 말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이며, 이행섭사는 다른 사람을 위한 행위이고, 동사섭사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금전이나 물품을 베푸는 것을 보시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특히 그것을 재시(財施)라고 한다. 그 밖에 인간으로서 생활방식이나 불법의 가르침을 설해 주는 법시(法施)와, 여러가지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애어(愛語)는 다른사람에게 마음으로부터 친절한 말을 나누는 것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여 행하는 행위이며, 이행(利行)은 상대방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행위이다.  불이익의 입장에 있는 사람의 측에 서서 하는 행위이며, 동사(同事)는 서로 협력하는 것을 말하지만 중생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생활이나 사업 또는 생각을 함께 하는 것이다.
육방(六方)을 예배하고 있던 싱가라카에게 설하는 경전 즉 장부(長部) 경전에서는 제일 끝부분의 시구(詩句)를 가지고 보시, 애어, 이행, 동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이 없으면 부모도 존경 받을 수 없다고 설하고 있다.  또 핫타 장자는 세존이 설하신 사섭사에 따라 대중을 통솔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사섭사는 보시 가운데서는 법시가 최상이고 애어 가운데에서는 법을 구하여 경청하는 자에게 계속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 최상이며, 이행 중에서는 믿지 않는 자로 하여금 믿음(信)을 성취케 하고 파계자로 하여금 계(戒)를 성취케 하며, 간탐자로 하여금 간탐의 마음을 여의케 하고 열혜자(劣慧者)로 하여금 혜(慧)를 성취케 하는 것이 최상이고, 동사에 있어서는 예류 내지 아라한에 있어서의 동사가 최상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사섭사(四攝事)란 자기라고 하는 존재가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일어나는 행위이다. 스스로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려주고자 하는 것에 사회복지의 실천적 의미가 있다고 보면 사섭사는 이타적 행위로서 사회복지 활동의 기본적 이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타적 행위 가운데 자타(自他)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점에서 불교의 사회복지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구제(救濟) 사상
불교에 있어서 구제(救濟)란 고뇌로부터 행방되어 평안함을 얻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구제(救濟)와 섭취불사(攝取不捨)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구제는 구하고 돕는다는 것으로 고뇌로 부터의 해방이고 안온(安穩;평안)을 얻는 것이며, 섭취불사는 아미타불의 광명 가운데 거두어 받아들여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구제법을 말한다(《관무량수경》 〈眞身觀〉). 불교에서는 이것을 다시 구원(救援)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초기불교 이래의 해탈의 귀착점에 ‘구원의 사상’을 두고 있다.  현세적인 욕망이나 쾌락을 멀리하는 곳에 ‘구원’이 있는데, 이것은 극히 한정적인 구원이고 출가한 소수자에게 추구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가신자 수준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으로는 염리예토(厭離穢土) 흔구정토(欣求淨土)의 구제관(救濟觀)이 있고, 싫어해야 할 현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극락정토는 완성된 세계로서 이해된다.
불교적 이념으로서 ‘구원’은 질병, 위약(萎弱), 기아(飢餓), 사(死), 죄(罪)의 영역에 있는 한없는 괴로움(苦)에 차 있는 고해(苦海)로부터의 탈출이고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사회복지의 실천으로서 ‘구원’은 무차별 평등의 원리, 원칙에 즉응한 공생(共生), 공제(共濟), 연대공동의 이념에 의해서 형성되는 점에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모든 사람의 복지를 모든 사람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고, 구제하는 사람과 구제받는 사람의 울타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구사론(俱捨論)》 〈계품(界品)〉에서 이르기를 “귀의(歸依)는 구제를 뜻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귀의가 구제라고 하는 것은 심신(心身)의 고뇌로부터 해방된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귀의를 가지고 구제의 뜻으로 보는 교설도 일반적이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공경이나 예경의 뜻을 존중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일상의 도의적 심정을 풍부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구제이고, 마음속으로부터 만족감, 충족감, 달성감으로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와같이 불교경전에서는 귀의로부터 구제로 인도한다는 설도 있다.
한편 자제(慈濟)라고 하는 자비의 마음과 구제의 마음을 합친 의미로서의 개념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자비심을 가지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생존의 가치를 공유하는 의지와 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도선(道宣, 596~667)이 지은 《광홍명집(廣弘明集)》의 〈계공편(誡功篇)〉에서는 자제 행위의 실천을 맹세케 하여 깊이 참회하는 자립적인 생활방식을 제창하면서 사람의 뛰어난 감성을 기르는 의의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제편(慈濟篇)〉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들에 대해 자연환경과의 바람직한 순환을 관찰하고 그 자연이나 환경에 대해 보전해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제의 행위는 스스로 생명이 있는 모든 자연이나 환경의 순환을 올바로 관찰하고, 자신의 심신의 총체에 관한 자연이나 환경에 친절한 공생의 마음을 키워가도록 하는 것이다. 깊은 자비심이나 사고방식의 마음을 형성하는 것이 불교사회복지의 기본 정신이다.

4) 공생 사상
 (1)공생(共生)의 의미
공생(共生, 범어 sahaja)이란 연기(緣起)에 기초하는 자타(自他)의 공존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현재 사용되는 공생이라는 용어는 단지 함께 산다, 공존한다 등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신체적, 사상적으로 다양한 특징을 갖는 개개인이나 집단 혹은 국가 간에서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가가 그 차이성을 서로 인정하고 또 차이성에 가치를 발견 하면서 공존해 가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 ‘공생’이란 자신과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개별적 존재인 것을 인식하면서도 모든 존재의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를 보여주는 연기 사상에 기초하여 자타의 공존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을 갖고 있다.  즉 함께 즐기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일을 통하여 자타의 존엄성을 깨닫고 생명을 완벽하게 해가는 가운데 공생이라는 의미의 가치를 갖는다. 

(2)공생의 조어(造語)와 불교사상
공생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본 정토종 승려인 시이오 벤쿄우(椎尾弁匡, 1876~1971)이다. 그는 선도(善導, 613~681)의 《왕생예찬》에 있는 “願共諸衆生 往生安樂國(원컨대 모든 중생과 함께 안락국으로 왕생하리라)”에서 ‘공(共)’과 ‘생(生)’의 문자에 착안하여 정토교 정신을 “왕생의 생은 함께(共) 산다(生)고 하는 것”이라고 해석함과 동시에, 인간이 정말로 살아서 참된 인생을 완벽하게 하는 것(眞生)이야말로 “연기(緣起)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연기’를 보다 근대적인 의미를 갖는 개념으로서의 ‘공생, 함께 살아감’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생물학상의 공생은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함께 생활하고 서로 행동적 혹은 생리적인 결합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 생물의 공존 양식을 의미하는 symbiosis의 번역어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용어가 상호간의 신뢰 관계가 상실되어 가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도출하기 위한 유효한 개념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시종 이익이나 이윤을 추구하는 것 같은 인격 부재의 사회에 있어서 성별, 연령, 직업을 불문하고 인간존재의 확인을 공유하는 곳에 공생, 즉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시 되는 것이다.
또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연기론적 상관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공생’사상은 현대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근거로 하여 상호교류와 연대를 강화할 수 있고 또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의 복지를 구현화(具現化)하는 불교사회복지의 중요한 가치와 이념의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3)공생의 사상
공생의 사상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대승불교의 실천법에는 이타행이 있다. 이타(利他, para-artha)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 실천이 이타행이다. 이 이타행의 사상이야말로 불교사회복지의 이념 중 가장 큰 것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타(利他)라는 말은 자리(自利, svārtha) 라는 말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발보리심경론》에는 육바라밀의 각개에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시여(施與)를 닦기 때문에 좋은 이름(善名)이 유포되고 태어나는 곳에 따라서 재물이 풍부하다. 이것을 자리(自利)라고 하고,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에 만족을 얻게 하고 교화조복(敎化調伏)하여 인색하지 않게 한다. 이것을 이타(利他)라고 한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실천행인 보살행이 이타행 우선의 사상을 대승불교의 인간관에 기초하여 보면 자타불이관(自他不二觀)으로 된다. 즉 공생사상의 불교적인 개념이다.
나카무라(中村元) 편 《불교대사전》에서는 자타불이관에 대하여 논하기를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를 지키는 자는 타인의 자기도 지키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지키는 것은 동시에 타인을 지키는 것이기도 한 것처럼 자기는 서로 대립하는 자기가 아니라 타인과 협력함으로써 더욱더 확실해지는 자기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부터 자타융합(自他融合, para-ātma-samatā) 즉 타인을 자기 가운데로 전회(轉回)케 하는 것(para-ātma-parivarta)이 대승불교도의 덕(德)이라고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승불교에 있어서 인간관에 기초한 자타불이관관은 즉 공생사상 (共生思想) 로서 불교사회복지의 이념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으로 불교사회복지의 의미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불교의 복지사상에 있어서 대표적인 개념으로서 보살행과 보은행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불교사회복지의 이념으로서는 붓다의 복지 이념과 복전사상, 자비)의 정신, 공생사상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세속적인 의미의 복지와 불교적인 의미의 복지가 다른 것은, 전자는 개인 개인의 자아를 기조로 하는 자타대립의 세계에서의 복지를 추구하는 반면, 불교에서 복지는 자타불이관 내지는 무아의 사상을 기조로 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복지라는 점이다. 불도를 실천하고 무아를 깨닫는 주체는 자아의 경계를 넘어선 본래의 자기이기 때문에 불교의 복지는 명확한 ‘자기 확립’이 되어 있어야 한다. 불법에 의하여 확립된 자기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불교에서의 복지는 이념적으로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

 

이광준 /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동서심리학 연구소장.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후, 서울대 학생연 인턴, 고려대 석사(카운슬링)를 거쳐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선심리학(禪心理學) 연구로 심리학 박사학위 취득. 백상창 신경정신과 임상심리실장, 한림성심대학 교수를 거쳐, 하나조노대학(花園大學) 선적교육연구소 연구원 등 역임. 저서로 《카운슬링에 있어서 禪心理學的硏究》 《카운슬링과 심리치료》 《불교의 참회사상사》 외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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