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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불교 옹호론 재비판 / 김종만
―명법스님의 〈여성불교 관점에서 본 기복불교〉를 읽고
[51호] 2012년 05월 18일 (금) 김종만 purnakim@empas.com

1. 들어가는 말

기복신앙 문제는 한국불교의 해묵은 과제다.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신행할 것인가,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불교를 교리적 측면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비판적 입장에 섰다. 반면 신앙적 측면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 옹호하려는 입장에 섰다. 물론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지식불교는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그러나 바른 목표를 정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기복불교를 무작정 옹호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대중적 요구가 있다고 해서 교리 자체를 왜곡하고 이에 바탕한 신행을 부추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는 교리와 신행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데 있다. 교리는 지혜를 강조하는데 신행은 무명을 지향하고 있다. 간극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문제는 옹호론자들의 말마따나 다른 나라의 불교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기복불교 옹호론은 이 괴리를 메우고자 방편론을 앞세운다. 그러나 기복불교 옹호론은 어떤 이유를 내세우든 옹호돼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마치 계율에서 금하는 살생이나 도둑질을 교묘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것과 같다. 해서는 안 될 일을 방편이라는 명목으로 허용하다 보면 본질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기복불교와 관련한 비판과 옹호론은 2003년 《불교평론》을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진 바 있다. 당시 필자는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이란 글에서 “기복불교는 불교의 본질과 아무 상관 없는 신행체계”라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필자의 논지는 기도나 기복이 초월적 절대자를 상정하는 유일신적 교리에서는 가능할지 모르나 불교와 같이 깨달음과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에서는 기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옹호론은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최근 《불교평론》 49호에 명법 스님이 기고한 〈여성불교의 관점에서 본 기복불교〉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쓴 비판론을 재비판하면서 옹호론적 논점을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성불교’의 입장에서 전개한 이 글은 종래 옹호론의 또 다른 변형일 뿐 논쟁의 핵심에서 비켜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이 글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에 대한 본질적 오해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 여성불교의 관점이라고는 하나 근거 없는 오해를 사실로 간주하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이에 필자는 앞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아직도 방편론을 내세워 기복을 옹호하는 주장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이 글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본론에 앞서 먼저 검토해 볼 것은 명법 스님이 이 글에서 전제하고 있는 ‘기복불교 비판 담론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초기불교 교리가 바로 서양 근대학문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전제다. 스님은 “기복불교 비판 담론은 객관적이고 진보적인 담론인 양 주장하지만 사실은 서구적 모델을 추종하는 연구자 자신의 편향적 사고가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전적 근거를 들어 ‘기복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째서 ‘서구적 모델’의 사고인지도 이해가 안 될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기복불교 옹호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논쟁의 핵심은 ‘기복’이 불교교리에 맞는가 아닌가에 있다. 그렇다면 불교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을 놓고 따져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사고의 기초가 동양이냐 서양이냐 하는 접근은 진실을 밝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가까운 것이냐가 해석의 열쇠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을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2. 기복불교 옹호론의 몇 가지 문제

1) 부처님은 초월적 능력의 존재인가
명법 스님은 부처님이 초월적 능력을 갖지 않는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초기불전에도 명백히 표현되어 있는 부처님의 초월적 능력을 부정하는 오만한 주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전 어느 곳에 부처님이 신이(神異)를 보이고, 기적을 행하였는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때문에 ‘부처님의 초월적 능력’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명법 스님이 말하는 부처님의 초월적 능력은 모세가 땅을 가르고 예수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성격으로서의 초월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라면 불교는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그 특장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초월적 능력에 의지해 인간의 운명을 신에 의탁하는 기존종교를 비판하면서 출발한 것이 불교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불교의 출현은 기존 다신론으로 이루어진 ‘낡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배격을 통해 그 존재 가치가 드러났다.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인도의 종교적 상황을 보면 운명론이나 신의론 우연론이 지배하는 삼종외도(三種外道)의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신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해 기도하는 종교가 주종이고 대세였다. 라다크리슈난은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광활한 인도대륙에서 온갖 신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놀라운 능력과 다신론에 대한 끈질긴 충동이 무한히 펼쳐졌다. 복을 주고 용기를 북돋울 뿐 아니라 해를 가하거나 고통을 내리는 힘을 지닌 신과 악령들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대중들은 베다의 종교와 제의식(祭儀式)을 높이 받들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불교의 출현은 하나의 경이였다. 부처님은 재래의 의식과 기존의 관념을 배제하는 것으로 중심을 삼았다. 그 사정을 라다크리슈난은 이렇게 말한다. 

숭배 행위에 반드시 동반되었던 무자비한 제의식은 붓다의 마음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신에 대한 맹신에 의하여 인간의 도덕적인 본성에 가해진 엄청난 손상이 있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악마의 행위를 그것이 신성한 정화의 힘을 지닌다는 믿음으로 스스럼없이 행한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서 영성의 불꽃을 거의 없애버릴 정도로 만연했던 잘못된 소견들은 붓다의 가슴을 사무치게 했다. ……붓다는 이 세계가 초자연력 숭배에 대한 자연적인 이법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개의 모든 사람들이 사제의 매개나 신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종교를 선포함으로써 그는 인간 본성의 존엄을 고양시키고 도덕의 풍조를 드높였다. ‘타자(他者)가 행·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붓다의 활동 이후에, 자연적인 이법의 영원성과 보편성에 대한 믿음은 인도인의 정신 속에 거의 본능처럼 남게 되었다.

당시 부처님이 신 중심으로 팽배해 있던 재래의 믿음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즉 부처님은 ‘사제의 매개나 신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로 종교를 선포했다. 불교는 이러한 메시지로 세상에 나온 종교다. 이렇게 본다면 명법 스님이 말하는 부처님의 ‘초월적 능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해진다.

더욱이 “대승불교의 보살서원은 기만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정토의 존재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십념염불로 왕생극락이 가능하다”는 논지는 오히려 명법 스님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기복불교를 옹호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는 “가피가 자신의 노력이나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타자에게 맡겨져 있다는 관념은 자기의식의 오만을 없앨 수 있는 좋은 방편”이라면서 “그러므로 불보살의 가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종속’이 아니라 ‘무아’의 체현이며 ‘타자로의 열림’과 ‘겸손’을 가져다준다”는 말에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에서도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도를 ‘타자로의 열림’ ‘겸손’에 비유하는 것은 기독교계에서도 흔히 해석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형제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는 기도문이나 “기도는 당신의 지경을 삶 속으로 넓히는 것이다. 당신이 기도하는 것은 다른 공간에서 바로 그 시간에 기도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과도 같다”는 해석 등이 이와 비슷하다.

엄밀히 말해 제불보살은 신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제불보살은 깨달음에 이르는 계위(階位)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즉, 제불보살이 깨달음을 이루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로 변이되는 타락이 현재 기복불교 논쟁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 언급되는 제불보살에 대한 개론적 설명은 역사적으로도 다음과 같은 의미를 안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체계들 사이의 가장 명확한 차이는, 전자는 아라한으로 이끄는 단계들을 계획했고, 후자는 보살을 붓다 됨으로 이끈다는 점에 놓여 있다.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7지(地, bhūmi)의 체계를 나중에는 10지의 체계로 전개했다. 대승불교도들이 사용한 bhūmi 라는 말은 ‘수준’ 또는 ‘단계’를 의미할 수 있다. 수준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문, 연각, 붓다 들이라는 세 가지 ‘수준’들을 갖는다. 이 수준들은 평행하며, 각각은 그 자신의 형태인 깨달음으로 이끈다. ‘단계’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a)아라한으로 끝나는 소승불교의 7개의 연속적 단계들 (b)붓다 됨으로 끝나는 대승불교의 10개의 연속적 단계들 (c)보살의 생애에 특히 중요한 국면들, 즉 성도(聖道)에 도달한 초심자의 단계[豫流], 한 번 태어날 것이 남아 있는 단계[一來],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는 단계[不還], 명상의 고요와 현명한 통찰력이 완전히 평정 상태에 있는 단계[應供] 등이다.

불보살은 이처럼 ‘깨달음’과 관련된 ‘지위(地位)’이자 단계의 의미를 갖는다. 기복신앙에서 말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행과 불행을 주재하는 신(神)이 아니라는 얘기다. 제불보살을 초월적 존재로 신격화하는 행태는 불자들에게 혼란을 가중하는 요인이다.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기복불교와 관련된 논쟁을 촉발하였고 최근 간행한 칼럼집을 통해 ‘정법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홍사성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불보살에 대한 역사와 그 의미를 종합하면 답은 명확해진다. 불교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기독교적 종교관에 의해 절대자를 상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과 ‘깨달음’으로 접근하기 위한 ‘수행’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절대자[神]를 상정하고 그의 능력에 의지하려는 것이 기도이고 기복이다. 이에 비해 깨달음과 해탈을 향한 노력은 수행이라는 형식으로 제시된다. 팔정도나 육바라밀 같은 수행체계에 기도나 기복은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초월적 존재의 가피를 입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구원으로 하는 불교와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만일 한국불교에서 ‘기복’을 허용하자고 한다면 이는 ‘불교의 힌두화’이며, ‘불교의 기독교화’를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해도 무방하다.  

2) 기복(祈福)인가 작복(作福)인가
기복과 관련해 또 하나의 핵심적 사안은 용어와 그 뜻에 대한 오해에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해야 복을 받고 행복해질 것인가 하는 것이 쟁점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거저 주어지는 복’은 없다. 더욱이 어느 특정 신의 주재로 말미암아 복이 주어지는 경우란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내세우는 불교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기복을 옹호하는 취지의 말을 하는 논자들은 기복을 ‘수복(修福)’ 또는 ‘작복(作福)’과 혼동하거나 혼용해 쓰고 있는 데서 오해를 부르고 있다.

‘기복’이란 단어는 불교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는 교리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불교 신행 속에 ‘기복’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다만 1998년 홍법원에서 나온 《불교대사전》 개정판에 ‘기복불교’란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데 “복을 비는 불교란 뜻으로 경전에는 없는 말이다.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아 참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오직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과 복만을 빌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복불교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기복불교를 설명하고 있으나 ‘경전에 없는 말’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기복과 어울려 혼합명사로 쓰인 것은 이전에 ‘기복도량(祈福道場)’과 ‘기복게(祈福偈)’로서 그 뜻풀이가 일부 사전에 등재돼 있을 뿐이다.

반면 ‘수복(修福)’에 대해선 “많은 선행을 실천하는 것, 여러 가지 선근을 닦는 것”으로 뜻풀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작선(作善)’이 언급된다. 작선에서 또 득복이 결합돼 ‘작선득복(作善得福)’이란 말도 나온다. 그러나 ‘선을 행한 과보로서의 복’이란 뜻풀이로 미루어 경전에서 말하는 ‘복 짓기’로서 ‘작복’이 아닌가 여겨진다. 작선득복의 좋은 예는 부처님이 시작장애를 가진 제자 ‘아니룻다’의 해진 옷을 꿰매주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이때에도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복 짓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러주셨다. 좀 길더라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복의 갚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이 즐거움을 누리는 원인으로서 매우 사랑하고 공경할 만한 것이다. 복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큰 갚음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복이 없음을 두려워하라.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괴로움의 근본으로서 근심과 괴로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복이 없는 것이라 한다.” (중략) 그때에 세존께서는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유쾌하여라, 복 지은 갚음이여./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얻고
어느새 모든 번뇌 다하게 되어/ 함이 없는 그곳에 이르나니.
수억의 하늘 악마 파아피이야스도/ 능히 그것을 유혹하지 못하리라.
복된 업을 닦는 이 그는 언제나/ 성현의 도를 스스로 찾아
온갖 괴로움 모두 버리고/ 후세에도 또한 근심 없으리.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복짓기를 싫어하지 말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부처님은 복이 있고 없음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복된 업을 닦는[修福]이’라거나 ‘복짓기[作福]를 싫어하지 말라’는 말씀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 복을 지어야 한다고 뜻이다. 이렇듯 경전에서는 ‘수복’과 ‘작복’에 대해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고 많은 경전 곳곳에서 이러한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나 부처님에게 기도해야 복을 받는다는 ‘기복’의 출전 예는 어디에도 없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그러므로 필자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판한 적은 없다. 또 행복해지기 위해 복짓는 행위도 비판한 적이 없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해 복을 비는 행위(祈福)’다. 그럼에도 명법 스님은 기복에 대한 용어를 확대 해석하고 있다. 일례로 “빈자일등의 예에서 보듯이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칭명염불이나 절, 기도 같은 행위만으로도 기도가 성립된다. 이 점에서 기복불교는 원시종교나 고대종교보다 더 정제된 선물 교환의 형태이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복과 작복수선을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이런 예는 이 글의 전반에 나타난다. 

또 하나는 기복을 윤리적 가치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본을 넘어 지나친 자의적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자면 수복과 작복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기복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고통을 부를 수 있는 신의 개입을 요구한다면, 수복과 작복은 스스로의 행으로 이루는 것으로 다른 이와 갈등 또는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복과 작복에 대해 부처님께서도 한없이 권장하고 무량히 지어내도록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제일 조건이며 방법이다. 이와는 달리 기복은 말 그대로 신과 그 어떠한 초월적 힘에 의지해 복을 비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초월적 능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교리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건대 부처님은 깨달은 성자이자 스승이다. 중생의 요구를 초월적 능력을 발휘해 들어주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논의는 매우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3) 여성불교와 기복문제
명법 스님이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치마불교=여성불교=기복불교’로 등식화하는 일부 편견에 대해서는 필자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기복의 문제를 여성 불자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은 객관적이지도 않고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복과 관련해 남녀의 특성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 기복이 문제라면 함께 책임지고 극복해야 할 과제다. 그럼에도 혹 누군가가 방관자적으로 지적한다면, 그래서 ‘남성 우월주의’를 내세운다면 이는 지식불교에 물든 이들의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명법 스님은 기존의 이러한 시각에 대해 여성불교의 신행을 두둔하며 깊은 애정과 관심을 글 속에 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여성 불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신행 형태를 ‘기복’의 명제라는 공집합에 결합해 진단함으로써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명법 스님의 ‘여성들은 왜 기복을 하는가?’라는 논제는 기복의 정당성을 논하기보다 현상과 현실에 대한 두둔과 옹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논지의 본질과 거리가 있다. 이러한 궤도 이탈은 결국 명법 스님이 말하는 ‘젠더’ 즉 여성성에 대한 변명과 옹호에 치중함으로써 여러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개인적 소감을 말하면 과연 신행 형태도 ‘성별’에 의해 특정되고 구별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과연 여성 불자의 기복을 정당화하는 논지가 될 수 있는지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특히 정당화의 문제를 넘어 기복을 미화하는 주장까지 전개되는 것은 뜻밖이다. 명법 스님은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여성들의 기복 행위에서 더 순수한 불교 정신을 볼 수 있다”면서 “나는 그것을 ‘책임과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러므로 여성은 초월적 존재의 구원만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책임과 희생’을 다하는 주체적이고 이타적인 존재이다. 기복불교는 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남을 잘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불교적으로 볼 때 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남을 위하는 것이냐에 의해 기복의 정당성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는 행위’ 자체가 불교와 상관없는 종교 행위라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의 기도 행위에서 ‘더 순수한 불교 정신을 볼 수 있다’고까지 말하는데 부처님은 이에 대해 ‘어리석다’고 경계하셨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초월적 능력자가 행과 불행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서 비이성적이고 허무맹랑한 종교행위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분이 부처님이다.

불교에서 남을 위한 이타적 행위나 나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방법은 기복이 아닌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보시와 지계의 실천이다. 불교교리서 한두 권만 읽은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부처님은 중생이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으로 보시와 지계 두 가지를 대표적으로 제시하셨다. 이 두 가지를 실천함에 있어서 성별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여성 불자만 기복을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남성 불자는 기복을 하지 않고 부처님 법대로 신행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에 관한 명쾌한 답변 대신 명법 스님은 ‘젠더’와 관련된 여러 학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당위성을 찾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해답은 불전에 있다. ‘복 받으려면 꼭 해야 할 실천과제’, 즉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보시와 지계의 실천에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상윳따니까야 제1권 《알라와까 경》(S10:12)에서도 확인된다.

“믿음이 여기서 인간의 으뜸가는 재화이며
법을 잘 닦아야 행복을 가져오느니라.
진리가 참으로 가장 뛰어난 맛이며
통찰지를[구족하여] 살아야 으뜸가는 삶이라 부르느니라.”(847)

여기서 ‘법을 잘 닦는다’는 것은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후략). 부연해 말하자면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하는 종교다. 중생들이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누렸으면 하는 게 부처님이 중생에게 품는 연민이며 자비심의 발로다. 여기 인용한 경전 구절도 이고득락 하려면 보시를 행하고 지계를 엄수하라는 부처님의 당부 내용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불자다. 그렇다면 불자로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보시와 지계를 실천해야 한다. 행복추구의 방법은 보시와 지계이며 보시와 지계가 작복 또는 수복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곧 ‘작복=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보시와 지계 이외에 하나 더해서 말해지는 것이 무루복(無漏福)이다. 욕망을 줄여서 무루복을 닦을 때 세속의 행복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행복 추구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는 복을 받기 위해 복 받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중략) 부처님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강조했다. 이웃과 나누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은 세속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불가결의 조건이다. 이를 교리적으로는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고 한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루복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유루복은 어디까지나 윤회의 고리가 되는 것이므로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무루복을 닦으라는 것이다. 이 권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불자다.

보시와 지계의 실천, 즉 작복과 수복을 하자는 데 있어서 여·남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특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복을 어떠한 방법으로 추구하느냐의 문제다. 또한 그 방법이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하다. 특히 방편이란 이름으로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까지 포용하려는 일부 기복론자들의 주장은 불교의 왜곡과 타락을 조장할 뿐이다. 불자다운 삶은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4) 기복 없는 불교는 불가능한가
기복불교를 말하면서 반드시 검토해 볼 문제의 하나는 과연 한국불교가 기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특히 교계의 일부 스님들은 방편론을 내세워 기복 수용은 당연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여기에 일부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스님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거들기도 한다.

 “(기복을) 고치려고 하다가는 대중적 신행력의 원동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우선은 기복의 방법을 불사 위주에서 자비의 실천, 중생에 대한 희사 등으로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객관적 기준에 따른 ‘복 채점표’를 만들어 보급하자”고 제안하거나 ‘기복도 공덕 짓기의 한 방편이다’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또한 “기복을 없애자는 것은 편협한 것으로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거나 “기초신행으로 기복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불교학에도 깊이가 있는 중진 스님들의 언론 인터뷰에서 나온 발언 등이다. 심지어 전문 불교학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복적인 면에서 절을 찾는다. (중략) 물질적 어려움이나 정신적 불안에 대한 해결을 얻고자 부처님께 복을 구하고자 절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기복이라고 비판하기 이전에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마음 저변에 이렇게 하면 부처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라는 순수한 마음, 간절한 마음,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라며 기복불교를 현실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물론 이들 주장은 대부분 지혜를 강조하는 교리와 현실적으로 무명을 지향하는 신행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방편론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한국불교는 어떠한 방편과 포교 전략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기복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오히려 기복의 수단을 동원한 물량주의에 빠져 불교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될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 불교의 타락과 변질을 가속화할 뿐이다. 특히 기복의 논쟁에 있어서 마치 ‘현실불교를 무시하는 것’으로 몰아 기복반대론을 비판하는데 그럼 언제까지 그 ‘현실론’을 옹호해야 하느냐도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멀리 있지 않다. 부처님 당시의 교단 운영이 좋은 전범(典範)이다. 당시 부처님은 다신(多神) 중심으로 지배되고 있던 인간의 삶을 팔정도의 실천과 같은 올바른 가치관의 삶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해 재속의 불자들은 오히려 불교교단에 대한 더 큰 존경과 귀의의 이유로 삼았다. 다시 말해 무욕과 걸식의 청빈한 삶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수행자의 치열한 구도와 전법의 서원에 뜻을 같이하는 재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교단은 크게 성장하고 발전했다. 죽림정사, 기원정사, 녹자모강당, 암라수원 같은 4대정사의 건립은 교단 발전의 물적 기반이나 동력이 어디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다. 교단이 청정하고 수행자가 바른 법을 실천하면 모든 불사는 절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의 성패는 정법의 서원에 기초한다. 정법이 널리 선양되면 모든 불사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만, 정법이 쇠퇴하고 방편만 남은 곳에는 사법(邪法)이 횡행할 뿐이다. 흔히 걱정하는 ‘사찰재정 문제’와 ‘불교의 대중화’는 그릇된 방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법으로 갈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는 점을 재인식해야 한다. 

3. 불교 쇠망의 역사적 교훈

불교의 고향 인도에서 불교가 쇠망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단언하면 다양한 신들로 이루어진 힌두교에 동화돼 정법을 지키지 못한 데 근거한다. 힌두이즘은 수많은 신들과 그에 따른 복잡하고도 다양한 신앙 행태를 가지고 있다. 비슈누로 대표되는 일신교적 신앙은 물론 시바 숭배와 결합된 원시적 신앙 형태가 인도인의 삶을 지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이라 할 대승불교가 나왔다. 그러나 대승불교 역시 초기 대승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즈음 나타난 것이 불교의 힌두화다. 힌두화된 불교는 부처님이 그토록 비판했던 주술주의 의례주의를 불교 안에 도입했다. 결국 인도에서 불교는 서서히 힌두교에 동화되고 말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교도들이 인도에 침입, 불교사원을 파괴함으로써 불교는 13세기 무렵 마침내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인도불교의 쇠망은 결국 ‘습합과 동화’라는 과정을 거쳐 종말에 이르렀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습합과 동화’란 ‘기존의 낡은 인식과 관념’을 깨지 못하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정법의 왜곡과 타락은 스스로의 존재 명분과 보호기능을 잃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정법의 타락이란 비법과 사법이 불교인 양 행세함을 말한다. 그중 가장 큰 타락이 부처님 가르침으로부터의 일탈이었다. 인도불교의 쇠망 원인을 분석한 다음과 같은 지적은 섣부른 방편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일깨워준다.

“첫째, 종래의 지방어를 통한 가르침을 포기하는 대신 지성인들의 표준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둘째, 기원후 1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대승불교 운동은 붓다를 깨달은 사람에서 점차 신격화하는 형태를 취했다. 따라서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한 깨달음의 종교는 점차 절대신에 의존하는 브라흐마니즘과 유사한 종교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셋째, 불교의 승단은 왕과 상인계급의 재정적 도움으로 크게 성장했다. 승단의 재정적 안정은 간편한 입문의식과 더불어 승려의 자질과 같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넷째, 승려들 각자는 일반인을 위한 대중적 노력보다 붓다가 거부했던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불교는 점차 대중들의 호응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도들과 소통하기엔 너무 큰 간격을 지니고 있는 한문 경전과 해석조차 불가한 온갖 주문(呪文), 제불보살을 신격화하는 기도의식, 기복으로 충당하려는 사찰재정, 정법 대신 부처님 말씀을 현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불명확한 학문적 태도 등이 실제로는 한국불교를 나락의 길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임시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하지만 하나 둘 빼먹다 보면 결국은 빈 막대기만 남는다. 아직도 기복옹호론의 단맛에 빠져 있다고 한다면 내일의 불교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4. 맺는 말

변화와 변질은 분명 엄격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종교의 변화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가르침을 보다 효율적 또는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선 시대에 맞는 조건에 따라 변화가 수반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변질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한마디로 ‘화장발’로 근본을 위장한 채 동기와 목적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이비’를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복은 불교를 타락시키고 변질한 최대 요인이었다. 가르침마저 왜곡돼 불교학자들조차 기복과 작복의 개념을 혼란스러워하는 게 현실이다. 이와 관련 “부처님이 그토록 비판하고 배격한 주술주의, 기복주의, 의례주의, 물질주의에 대한 개방이 오늘날 세계 거의 모든 불교가 이 점에서 비불교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른바 방편주의에 매몰되어 무엇이 불교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불교적인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서 우리에게 일러주는 성찰의 대목이다. 

한국불교가 정체성을 찾아 부처님의 말씀대로 중생들에게 구원의 종교로 보다 넓고 가까이 다가서려면 기복불교부터 극복해야 한다. 기복은 불교라는 간판을 달고 그 내용은 기독교나 힌두교를 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현실론을 들어 기복을 옹호하는 주장은 지양해야 한다. 그것은 불교 스스로의 변화를 외면하는 행위다. 뼈를 깎는 자정과 쇄신이 있을 때 훌륭한 불교의 미래를 견인할 개혁가와 불교운동가가 배출될 것이다. 무엇보다 타락과 변질의 요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를 망치는 해악과 독이 된다는 것을 먼저 깨달을 일이다. ■

 

김종만 / 불교저널 편집장.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불교신문〉 등 교계 언론 기자로 일했다. 현재 월간 《선원》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 〈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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