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이 글을 쓰는가
 
이 글은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일찍부터 기독교는 사랑, 유교는 인, 불교는 자비를 표방하는 종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뜬금없이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는 무엇인가. 이 주제는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진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제를 다루려 하는 것은 그동안 한국 불교 현실에서 자비가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불교의 현대화, 생활화, 또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 등에 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려면 이 논의의 중심에 ‘자비(慈悲)’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 자비는 열반으로 가는 수단이면서 또한 불교의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불교는 자비보다는 깨달음이라는 주제에 지나치게 집착해 왔다. 

근래에 이 깨달음의 신비를 벗기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신비화되지 않은 붓다의 육성 가운데서 진정한 깨달음의 의미를 찾으려는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 깨달음은 열반의 길로 가는 수단이지 깨달음 자체가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또한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수행 방법 중에서도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으뜸이 되었으며, 이와 함께 깨달음이 신비화되었고, 특히 간화선 전통이 강한 한국불교가 그러하다는 비판도 일부 있다.

깨달음과 자비는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깨달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자비에서 깨달음이 나온다. 그런데 자비는 깨달음의 그늘 속에서 그 위대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상구보리(上求菩提)’는 잘난 형님이 되었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은 못난 동생이 되었다. 이 글은 결코 깨달음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국불교의 역할을 역동적으로 확장시키고 붓다의 자비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즉 자비와 자비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소망으로 쓰는 글이다.

2. 자비와 깨달음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 사회가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개탄의 소리는 귀에 면역될 정도로 회자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개탄의 소리는 오래전 동서양 현자들의 저술 속에서도 언제나 있어 왔기에, 중생이 사는 이 세상이 그렇게 도덕적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 정도 스스로를 위안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보기도 끔찍하고, 듣기도 무섭고, 말하기도 두려운 일들을 우리는 매일 겪으면서 이러한 위안이 얼마나 안이한 것인가를 느낀다. 이웃의 야채장수 아주머니가 뺑소니차에 숨져 가고 있는 동안에도 주변 행인들은 지폐를 향해 날뛰고 있었으니, 우리 모두가 살인자가 되고 도둑이 된 것 같은 자괴감을 갖게 된다. 더욱 두려운 것은 많은 윤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은 이런 비도덕적, 무도덕적 현상들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구조와 제도의 모순과 문제점으로 나타나는 사회윤리적 차원의 문제도 매우 심각하다. 공동체 붕괴, 종교와 인종 갈등, 불평등, 사회 양극화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지구촌 곳곳에서 “점령하라”는 구호가 퍼져 나가면서 ‘바른 사회’가 무엇인가에 논의도 다시 일어나고 있다. 또한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 핵무기 확산 등으로 인한 인류의 생존과 지구촌의 위기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아수라가 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너 나 할 것 없이 도덕성 회복에 대한 목청을 돋우고 있으나, 마치 찢어진 거미줄을 손가락으로 수리하려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아수라적인 현실은 왜 생기는가? 바로 지구촌의 인간이 탐(貪), 진(瞋), 치(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교의 역할과 기능은 자명해진다. 붓다 사상의 근원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살게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터전, 즉 ‘정토’를 만드는 것이다. 상구보리를 통해 지극한 행복을 얻고, 하화중생을 통해 바른 정토를 만드는 것이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함께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열반의 세계이다. 상구보리는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고, 하화중생은 자비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열반의 세계로 가기 위해 깨달음과 자비의 두 바퀴가 있어야 한다. 한 바퀴가 고장 나면 수레는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깨달음과 자비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리고 이 바퀴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바로 수행이다. 그러면 깨달음과 자비는 어떤 관계로서 하나가 되는가? 먼저 깨달음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 자비와의 관계를 살펴본다.      

많은 경에 깨달음과 수행 단계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에서 나오는 깨달음이다. 여기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과정을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여러 견해를 참작하여 필자는 깨달음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즉 1단계 ‘인지적(認知的) 깨달음’ 2단계 ‘수행적(修行的) 깨달음’ 3단계 ‘전일적(全一的) 깨달음’으로 유형화하였다. 그러면 이 세 단계의 깨달음의 특징은 무엇이며 자비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1단계 깨달음은 붓다의 사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무엇을 깨달았느냐에 대한 이론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붓다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과 이에 기초한 ‘무아(無我)’와 ‘공(空)’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걸음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를 ‘인지적인 깨달음’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열반의 세계로 여행하는 지도를 얻은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붓다 재세 시 생긴 많은 아라한은 1단계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이러한 인식론적 깨달음에서 자비의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트게 된다.

인식론적 깨달음의 핵심 대상인 연기법은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의존적 상호발생(dependent co-arising)’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 나와 자연계와의 관계, 생물체와 생물체의 관계 등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으며, 이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도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와 현상은 하나의 그물코 안에 연결되어 있다. 물과 해가 없으면 우리가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의 사회성이라는 것도 한 그물코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비의 토대가 형성되며 동체대비(同體大悲) 사상의 출발점이 된다. 

2단계 깨달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가슴으로 품고 느끼면서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의지를 행동으로 연결해 가는 단계이다. 이를 ‘수행적 깨달음’ 또는 ‘체험적 깨달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적 깨달음은 열반으로 향하는 수행의 여행길을 떠나는 것이다. 수행적 깨달음은 자비의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비료를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단계다.

우리가 속계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수행적 깨달음이다. 삼라만상이 연기적 관계라는 인지적 측면을 넘어서서, 연기법을 자비행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열정과 욕구를 구체적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모든 ‘고(苦)’의 근원이고 불행한 삶의 원천인 탐, 진, 치의 뿌리를 뽑기 위한 치열한 수행의 과정이 요구된다. 이 수행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다. 또한 참선, 주력, 기도, 간경 등 다양한 수행 방법들은 모두 수행적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수행적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자비 체험’과 ‘자비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3단계 깨달음은 열반의 경지에 이른 깨달음을 일컫는다.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번뇌로부터 해방되고 자유스럽다. 깨달은 자는 탐욕, 분노, 어리석은 생각 없는 진공(眞空)에서 묘유(妙有)를 즐길 것이다. 그는 팔정도를 생활화하고 내면화하여 의식적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된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으니 그 자비심은 헤아릴 수 없이 높고 깊고 넓은 무량 자비이다. 자비의 숲이 온 산을 덮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경지이고 붓다의 경지다. 이러한 경지의 깨달음은 깨달음 자체도 없는 것이리라. 이를 ‘전일적 깨달음’이라 표현하고자 한다. 전일적 깨달음의 단계에서 비로소 열반과 깨달음이 일치된다고 본다. 깨달음을 위와 같이 구분하였지만 이 세 단계는 서로 교류하고 삼투압 작용을 하는 상호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무엇으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전일적 깨달음을 깨달음의 표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일적 깨달음과 무량 자비를 일반인에게 지표로 제시한다면 불교는 우리에게 멀어지고 사념적인 종교로 평가받을 위험성이 있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깨달음의 첫 출발은 연기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면 동체대비의 자비 씨앗이 뿌려진다. 그리고 자비의 실천과 수행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면서 전일적 깨달음, 즉 열반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깨달음, 자비, 수행의 관계를 하나의 도표로 제시해 보면 위 그림과 같이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도표는 ‘원’으로 그려진 열반의 공간에 깨달음과 자비, 그리고 수행이 세 꼭지를 이룬 ‘삼각형’이 들어 있다. 이 원과 삼각형은 서로 환류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자비, 깨달음, 수행은 열반의 바다에서 원융무애(圓融无涯)의 관계에 있다.    

3. 자비를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자비 수행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비를 체감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덕교육 이론에서는 도덕교육의 영역을 ‘인지적(認知的) 영역’ ‘정의적(情意的) 영역’ ‘행동적(行動的) 영역’으로 나누면서 도덕적 지식, 도덕 감정, 도덕적 행위가 통합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세 영역은 독립적인 성격보다는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상호의존하는 관계이다. 이러한 도덕교육 이론을 자비의 덕목에 대입해 볼 때 자비의 체험은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이 합쳐진 과정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서 자비의 체험은 먼저 연기법을 이해하고 공감한 후(인지적 영역), 이를 가슴으로 품고 자비의 진동을 느낄 때(정의적 영역) 일어난다.

먼저 인지적 영역의 측면에서 자비를 보자. 가치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다양한 ‘가치의 위계’를 제시하고 있다. 가치의 위계가 높을수록 그 가치는 통합적, 포괄적이고, 지속성과 만족도가 높다. 자비는 연기법이라는 위대하고 웅대한 토대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자비는 최고의 위계에 서 있는 가치이다. 또한 대개의 윤리적 덕목들이 정서적ㆍ감정적 요소인 파토스(pathos)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비는 만물의 존재 양식인 연기법이라는 에토스(ethos)에서 출발한다.

자비는 사랑, 배려, 겸양, 절제, 용기 등 일반적인 윤리적 덕목을 포괄하고 통합하는 덕목이다. 때문에 추상성이 매우 높다. 이 추상성을 일상성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즉 자비를 우리의 일상성에서 친근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기법과 이의 줄기인 무아 그리고 공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식론적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붓다 자신도 ‘연기법이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게 좋지 않겠나.’라고 고뇌할 정도이다. 붓다에 대한 신앙 없이 처음부터 연기, 무아, 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적 고뇌와 스승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가시밭길을 지나야 한다. ‘나’ 혹은 자아라는 것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더구나 ‘나’라는 것은 수십 개의 껍질로 겹겹이 싸여 있는데 이를 어떻게 쉽게 깨버릴 수 있는가. 게다가 오늘의 근대 문명은 개인주의와 이성이라는 틀에서 생성된 것이니 연기적 사유를 가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연기론을 현대과학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복합체계이론(complexity system theory)’으로서, 이 이론은 카오스 이론, 양자역학, ‘자기 조직화(self organization)’ 이론 등 현대 첨단과학에 토대를 둔 것이다. 복합체계이론은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 이론의 뼈대가 바로 연기법이다. ‘비평형열역학’ 이론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프리고진(Iliya Prigogine)도 자신의 이론이 불교의 사유방식과 유사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자기 조직하는 우주(The Self-Organizing Universe)》라는 유명한 저서를 낸 에리히 얀치(Erich Jantsch)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연기법과 동일함을 알고 열렬한 불교신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연기법을 현대과학 이론과 다양한 학문을 통해 인지적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인지 윤리학’과 연관시켜 연기법과 자비 인식의 문제를 논의해볼 필요도 있다. 인지 윤리학은 도덕 판단에 있어 개개인의 윤리적 인지 능력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사회구조와 인간관계가 간단한 전근대사회는 도덕적 판단과 평가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그 구조의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인해 도덕적 판단과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윤리학적인 인식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더구나 오늘날 도덕적 관계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까지 확장되고 있어 윤리적 인식능력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윤리학적인 인식능력이 많다고 해서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문으로서 경영학을 잘하는 것과 회사를 잘 경영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잘 안다는 것과 올바로 실천한다는 것이 별개의 문제라 하더라도 대상을 명료하게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사람이 옳고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지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비 행위의 근거가 무엇이며, 자비의 규칙은 무엇이며, 자비 행위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능력이 매우 필요하다. 그래야만 자비의 의미가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인식론적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를 지속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했다고 해서 그 내용이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깨달음을 유지하고 깨달음의 신선도를 높이기 위하여 법문을 듣고, 경전을 보고, 자비의 염송을 하는 등 끊임없는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자비의 출발점인 붓다의 지혜와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다음으로 정의적 측면에서 자비의 체험 문제를 보자. 연기론을 인지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자비행의 강한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인지적 단계에서 정의적 단계로 넘어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를 도덕적 나약함(moral weakness), 또는 도덕적 무관심(moral indifference)이라고 표현한다. 도덕적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인지적 능력을 정의적 영역, 행동적 영역으로 확대 연결시키고자 하는 윤리 이론으로 ‘체험주의 윤리학’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의 주된 논지는 우리의 도덕적 사고가 신체적, 물리적 차원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은유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체험을 통해 도덕적 상상력과 정서를 확장해야 한다는 도덕교육의 과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체험주의 윤리학이 자비의 체험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일반 사람들에게 자비라는 용어는 ‘선한 동기’와 ‘자기희생’이라는 무거운 짐이 담겨 있는 덕목으로 느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스스로 체험되어 나오는 자비행을 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비 행위를 위한 ‘체험 학습’이 필요하다. 체험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입적 상상력을 계발하는 것이다. 봉사활동이 체험 학습의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 도덕교육자들은 봉사활동 학습이 지니고 있는 교육적 중요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종래의 교육 방법이 주로 학생들의 인지적 활동에 국한됨으로써, 도덕 교육의 포괄적 목적을 구현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최근에 미국 도덕 교육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인격 교육(character education)’과 ‘배려를 위한 교육(education of caring)’ 운동 모두 봉사활동을 도덕 교육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불교의 실천윤리로서 보살행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상구보리를 먼저 이루고 하화중생 하는 보살행을 뒤로 미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의 긴 흐름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많은데 왜 큰 보살행을 한 스님들은 왜 많지 않은가?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랑의 실천자를 왜 불교는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자성과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자비의 실천, 즉 보살행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사회봉사이다. 자비를 체험하고 자비 수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봉사 체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제도적, 의무적인 계기에서 시작한 사회봉사의 과정 속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체험한 후, 이를 통해 삶의 가치와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한국불교가 지닌 일부 기복적 요소에서 자비 불교로 가는 촉매의 역할을 할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기복(祈福)’이라는 행위는 붓다의 교리에서 볼 때 있을 수 없다. 기복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자신을 의탁하는 행위이다. 불교는 스스로의 수행 과정을 통해 열반의 경지, 즉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 수행 과정에서 ‘작복(作福)’이 있고 이것이 스스로에게 복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된다. 복을 짓는 것도 수행이다. 이를 ‘작복적 수행’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을 가진 일반인들은 기복을 통하여  불교를 만나고 붓다를 만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전파되고 제도화 되는 과정에서 기복이 불교와 인연을 맺게 하는 하나의 수단, 즉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방편이 목적으로 변질 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복에서 작복으로 이끌면서 자비를 이끌어 내는 지혜를 모으고, 이를 구체화 시키는  여러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기복적 기도에서 작복적, 수행적 기도로 변화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도는 아심(我心)을 버리고 ‘하심(下心)’으로 참회하고 탐, 진, 치를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숭고한 행위이다. 이 기도 행위가 자비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고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필자는 도덕적 행위의 정당화에 관한 여러 이론 중에서 ‘자기 이익설’을 자비 체험과 연관시켜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일상생활에서 ‘이기적(selfish)’이라는 말과 ‘자기이익(self-interested)’이란 말은 행위의 동기에 적용할 때, 같은 의미가 아니다. 이기적 행동과 달리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불공정하거나 남을 해치게 하는 경우도 아니다. 오늘날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윤리 도덕적 행위가 삶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 도구로 간주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성공 윤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덕목들이 결코 의무적인 무거운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 성공과 행복을 가져오는 유용한 도구라는 인식이 있다. 이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통계적 사례를 제시하기도 한다.

자기이익설과 관련해서 볼 때, 많은 경전에 표현되어 있듯이 자비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위이다. 즉, 나도 좋고 너도 좋고, 그래서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이 자비의 기능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제일 큰 주제는 무엇을 자기 인생의 제일 큰 자기이익으로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다. 무엇이 자기 삶의 최대의 이익이 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붓다의 가르침이 큰 지혜의 빛이 될 것이다. 붓다의 지혜로 기복의 목표와 그 대상을 확대해 간다면, 바로 자기이익의 추구가 자비와 열반의 경지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윤리학 이론에서 그 당위성으로 인해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론으로 ‘자아실현설’이 있다. 붓다의 지혜와 자비심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자아실현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자비수행은 왜 중요한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보현행으로 보리를 이루겠다(以普賢行悟菩提)”는 서원이 나온다. 내가 자비수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위의 서원에서 볼 수 있듯이 깨달음에서 자비행이 나오기도 하지만 자비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윤리교육 이론에서 보면 앞에서 살펴본 ‘자비 체험’은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이 합쳐진 과정인 데 비해, ‘자비 수행’은 정의적 영역과 행동적 영역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정의적 영역과 행동적 영역 또한 서로 환류적 관계, 즉 피디백(feed back) 관계에 있다. 

자비수행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경전이 《자비경》이다. 《자비경》은 불교의 가장 초기의 경전으로 인정되는 《숫타니파타(Sutta-Nipata)》에 포함된 경전으로 전해진다. 10개의 게송으로 된 《자비경》은 그 내용이 너무 넓고 깊고, 또한 오늘날의 윤리적인 덕목을 모두 포괄하고 있어 윤리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도 놀라움과 감동을 느낀다.

《자비경》은 우안거 시절을 보내는 붓다의 제자들이 나무 신들의 방해를 받아 정진할 수 없게 되자 붓다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이 경을 설하고 염송하게 한 것이다. 《자비경》의 등장 배경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왜 나무의 신들이 비구들의 수행을 중간에 반대하고 훼방을 놓았을까? 나는 그 해답을 아래 구절에서 찾았다. 그 구절의 내용은 이러하다(1, 2, 3 게송을 조합한 것임).    

유능하고, 정직하고, 고결하고
말이 점잖으며, 온유하고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알아서 남들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
분주하지 않고 생황이 간소하며,
감관은 고요하고 사려 깊을지니
속인들에겐 뻔뻔스러워져도 알랑대서도 안 된다.
또한 현자의 질책을 살 어떤 행동도 삼가야 할지라.
모두 탈 없이 잘 지내기를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처음에는 비구들을 환영했던 나무의 신들이 왜 갑자기 방해를 했을까? 여기서 나무의 신들은 수행처 주변에 있는 마을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비구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수행자는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 독선적이 되기 쉬울 가능성이 있다. 그 독선이 우쭐대고 건방도 떨게 하고 남을 낮추어 보는 행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저항한 것으로 짐작된다. 위의 게송에서 ‘유능하고(should be able)’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흔히 ‘유능’이라는 단어는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이다. 그런데 왜 이 단어가 《자비경》의 첫 게송에 등장했을까? 여기서 필자는 유능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효율성을 가진 단어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는 자세와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테크닉을 갖추라는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윤리학과 도덕교육에서 자주 거론되는 ‘배려 윤리(care ethics)’에서도 배려의 방법과 테크닉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비구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있지 않은가 짐작해 본다. 수행자들이 《자비경》을 염송하면서 자비수행을 하자 마을의 주민들이 비구들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이것은 자비수행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자비로운 스님과 자비스러운 도량은 포교의 제일 큰 마당이라고 생각해 본다.

아차리야 붓다락키타(Acharya Buddharakkhita) 스님이 지은 《자비관(Metta-The Philosophy and Practice of Universal Love)》은 자비에 대한 이해와 신심을  높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스님은 인도 태생으로 1956년 미얀마 양곤에서 열렸던 빠알리경의 완전 결집을 이룩한 제6차 불교도회의의 결집진의 일원으로서 미국을 비롯해 해외에서 많은 포교 활동과 저작 활동을 하였고 《법구경》을 영역하기도 했다. 필자는 자비가 가치의 위계 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 바 있다. 붓다락키타 스님도 자비를 ‘보편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일체를 포용하는 사랑’으로 표현한다. 

스님은 자비의 기능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자비는 인간 삶을 유익하고도 도량이 넓고 당당한 나무처럼 해 주는 역할을 한다. 둘째, 명상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정신적 개화를 가져 오며 그 결과 우리의 삶 전체가 만인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일체를 포용하는 정신적 사랑의 결실을 맺어 사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자신은 저 높은 초월적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스님이 제시한 자비의 기능에서 자비와 깨달음은 일란성 쌍둥이로서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는 수레바퀴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붓다락키타 스님은 자비수행을 거목의 성장에 비유하고 있다. 자비의 씨를 뿌리고 싹트고, 나무가 잘 자라게 비료를 주고, 전지도 해주고, 그 결과 그 자비의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으로 덮여 있는 모습이다. 필자가 앞에서 분류한 깨달음의 세 단계와 스님이 분류한 자비의 세 단계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즉 자비의 씨를 뿌리는 단계가 ‘인식론적 깨달음’의 자비이고, 나무를 튼튼하게 키우는 과정이 ‘수행적 깨달음’의 자비이고,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 가득 찬 숲이 바로 ‘전일적 깨달음’의 자비이다. 

스님은 ‘자비윤리’와 ‘자비심리학’이라는 현대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자비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자비수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노여움, 원한, 공격성 같은 오염물뿐만 아니라 남의 마음에 있는 오염물까지 다 제거해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마음 수행 또는 명상 수행에 나오는 것들이다. 또한 최근 유행되고 있는 ‘긍정심리학’의 내용과 근래 관심을 끌고 있는 행복에 관한 지혜가 모두 다 들어 있다.   
자비수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비심의 ‘방사(放射)’이다. 방사는 자비심의 대상과 그 영역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즉 자비를 보편화시키는 기법이다. 이를 위해서 욕계, 색계, 무색계에 이르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하여 가없는 자비심을 방사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세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비수행법은 각자가 처한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에서부터 출발하여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지구촌, 우주 자연의 영역으로 확대, 방사하면서, 자비수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각자가 계발해야 한다. 

자비수행과 함께 생각해 볼 문제가 자비와 계(戒)의 관계이다. 불교의 수행 체계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국불교가 깨달음에 치중하면서 계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있다. 기실 깨달은 자는 계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자유인이라는 인식도 얼마간 있을 것이다. 계의 많은 내용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계를 지키는 청정한 불자의 모습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본다. 계에서 벗어난 자비 수행은 결코 자비 수행이 아니다. 계·정·혜는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한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계율을 오늘날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4. 자비윤리학의 정립을 위하여
 
오늘날 현대문명과 지구별의 위기에 대한 우려와 한탄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회자되고 있다. 그 위기를 불러일으킨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종이다. ‘sapiens’라는 단어는 ‘지혜’라는 뜻인데, 지혜로운 종으로 자처하는 인간이 지금 지구별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 삶의 사유와 삶의 양식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여러 가지 대안이 나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생명론 패러다임’의 등장이다. 세계를 거대한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생명론적 세계관의 전환이다. 이와 함께 탈인간 중심 가치관 정립, 전일적 우주관의 정립 등이 주장되면서 환경윤리, 생명윤리, 생태윤리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구별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이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이론들을 볼 때마다 그것은 붓다의 연기론 변용이고, 화엄사상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새롭게 받아들여지는지 어리둥절하다. 기계론적 세계관, 인간중심 세계관에 익숙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 문명을 창출한 서구인에게는 생명론적 패러다임이 새롭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자비사상의 틀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론이다.  

필자는 연기론에서 생성된 윤리를 ‘상호윤리(mutual ethics)’라 표현하고자 한다. 상호윤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의존적 상호 발생으로 보고 출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아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와 그 경험을 해석하는 코드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상호윤리에서는 규범이 이성의 명령이나 어떤 절대적 존재의 승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 규범은 모든 존재의 조건이 되는 관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상호윤리의 규범과 가치들은 개인적인 행복과 사회적인 변화 사이에 깊은 상호 의존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이에 상호윤리는 다른 존재에 대한 깊은 배려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확장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종래의 도덕적 규범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따른 여러 가지 역기능의 문제, 생태계 파괴에 의한 환경 문제, 인류의 안전과 평화의 문제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를 독일의 저명한 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위험 사회’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윤리적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낸 문명은 모래성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사회에 인류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윤리적 패러다임, 즉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인의 합리성과 덕목에 기초한 도덕관으로서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윤리적 대안으로 체계윤리, 책임윤리, 세계윤리, 환경윤리, 생명윤리, 타자윤리, 평화윤리, 경쟁윤리 등 다양한 종류의 윤리관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종래의 윤리관을 ‘미시 윤리’로 칭하면서 ‘거시 윤리’라는 이름으로 오늘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윤리관의 근원은 상호 윤리적 사유, 즉 연기법에 의한 자비 윤리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자비의 문제를 깨달음과 수행의 차원을 넘어 지구촌과 모든 생물체가 행복하게 만드는 윤리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학문적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자비의 확대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자비는 개인윤리적 차원의 성격이 강했다. 개인윤리적 차원은 도덕적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도덕성, 즉 개인의 자유와 결단에서 다룬다. 그동안 자비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나오는 덕목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개인의 가치관 정립과 그 실천 방향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현대사회 구조의 복합성은 개인윤리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여기서 하화중생의 테제가 개인에서 사회로의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윤리는 개인 행위의 원인이나 사회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일차적 관심을 사회적 원인에 두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사회구조, 사회제도, 정책이 도덕적 사회의 비전과 얼마만큼 적합한가 하는 논의와 연결된다. 즉 사회윤리는 사회정의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와 함께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며,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등장한다. 이에 자비가 어떤 사회윤리적 기능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필요하다 하겠다. 이러한 자비의 사회윤리적 접근이 바로 진정한 ‘참여불교’이다.

앞으로 자비윤리의 정립을 위하여 자비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정교화하고 체계화하여 현대사회와 오늘날의 인간 삶에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자비 정신에 대한 ‘연금술’이 계발되어야 할 것이다.       

  5. 맺는 말

붓다가 제시한 지혜의 목적은 모든 존재에게 행복을 주고 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열반의 경지는 구체적으로 모든 존재가 행복을 누리며, 정토 즉 바른 사회에서 사는 것이다. 자비는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를 바르게 만드는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필자는 지구촌의 미래와 한국불교의 미래는 붓다의 자비 정신 구현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자비라는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처럼 큰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물을 뜰 생각은 안 하고 그릇 자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깨달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자비에서 깨달음이 나온다. 그래서 반야와 자비,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자아완성과 정토건설은 함께 굴러가는 바퀴가 아닌가. 깨달음만 강조되고 자비가 경시되는 불교는 없다. 오히려 한국 불교의 현실에서는 깨달음보다는 자비가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자비의 정신이 개인윤리적 차원을 넘어 사회윤리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는 길도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자비 실천은 결코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비라는 큰 그릇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즉 자비윤리학을 정립시키고 자비 정신을 확산하기 위한 정교한 틀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자비 포교의 구체적인 방안도 창출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비에 대한 종합학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현대사회에서 작동할 자비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섭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철학, 윤리학,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등 인문사회학의 영역과 생물학, 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자비의 문제를 접근하면서 이를 통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자비라는 중심 가치를 두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가치 위계에 대한 틀을 마련하고, 이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체감하고 실천할 수 있는 윤리 교육적인 정교한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불교는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만 의외로 자비 실천에 대한 것은 매우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불교가 현대사회와 인간 삶의 현장에서 생동감 있고 효율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비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붓다는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위해 수행의 길을 걸었고 전법의 길을 걸었다. 붓다의 긴 여정은 대자대비의 길이다. 자비 없는 깨달음은 없다. 자비 없는 수행은 없다. 그래서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 ■

 

방영준 / 성신여대 윤리교육과 교수.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 대학원 졸업(윤리 및 사회사상 전공). 성신여대 사범대학장, 자유공동체 연구회 회장 등 역임. 우관상 수상. 주요 저서로 《아나키즘-저항과 희망-》 《공동체, 생명, 가치》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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