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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생활 속의 간화선 수행 / 월암
2012년 5월 18일 열린논단
[0호] 2012년 05월 18일 (금) 월암 스님
   

1. 생활선으로서의 간화선 대혜의『서장』에 의거하면, 그 내용의 대부분이 사대부 거사들에게 보낸 서간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혜스님이 간화공부법에 대해 주로 거사들에게 보낸 편지가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에게 보낸 내용도 있긴 하지만 제자들이나 출가 대중들에게는 굳이 편지를 하지 않더라도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내릴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대혜의『서장』에 의거하면, 그 내용의 대부분이 사대부 거사들에게 보낸 서간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혜스님이 간화공부법에 대해 주로 거사들에게 보낸 편지가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에게 보낸 내용도 있긴 하지만 제자들이나 출가 대중들에게는 굳이 편지를 하지 않더라도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내릴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조사선의 전통이 그렇듯이 선수행이 일부 출가집단의 전유물이 아닌 출가와 재가 남녀노소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자선(文字禪)의 경우에는 일부 문화적 소양이 있는 선승들과 사대부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선풍이었으며, 무사선(無事禪)은 조사선의 전통에서 보면 너무나 고준한 최상승의 선법임과 동시에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저급 해태승(懈怠僧)들이 가자(假資)하는 하마선(蝦蟆禪)이었으며, 묵조선(黙照禪)은 오로지 좌선일변도의 선풍으로 인해 일부 선승들과 사대부들만의 선이 되었다.

간화선은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고 출가이든 재가이든 수선(修禪)에 관심이 있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누구나 화두수행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화두공부는 특별히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세속에 살면서 생활에 바쁜 재가자들에게 매우 합당한 수행법이기도 하다. 참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최상근기들이나 하는 것이며, 재가자들은 염불이나 주력을 하고 가끔 선방에 대중공양이나 가서 선방문고리나 잡고 오는 것으로 내세를 기약하는 하열심(下劣心)을 가져서는 안 된다.

간화선이 묵조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성립되었다고 해서 묵조선적인 요소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좌선의 효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처음 간화선에 입문하여 참구하는 행자는 마땅히 조용한 가운데서 정중공부(靜中工夫)에 진력을 다해야 한다. 좌선은 선의 실천에 있어서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조용한 곳만을 찾아 좌선에만 집착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참구의 태도는 아니다. 초참자(初參者)가 정중공부(靜中工夫)를 익히는 것은 전 생활 영역에서 참선을 순일하게 하고자 하는 기본과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세간의 번뇌 망념은 마치 타오르는 불과 같으니, 어느 때에 그 불길이 멈추겠는가.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결코 대나무 의자와 방석위에 앉아 공부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평소에 고요한 곳에 마음을 두는 까닭이 바로 시끄러운 곳에서 마음을 쓰려는 것이다. 만약 시끄러운 곳에서 힘을 얻지 못했다면, 거꾸로 이는 고요한 곳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다.

간화선 수행은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초월하는데 있다. 수선자가 조용한 곳만 좋아하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한다면 이것은 고요함(靜) 속에서 고요함(靜)을 구하는 것이라 진정한 고요함(眞靜)이 아니다. 혜능선사는 일찍이 진정한 고요함이란 “움직이는(動) 가운데 고요한 것(靜)”이라고 말한바 있다. 만일 고요한 곳은 옳다하고 시끄러운 곳을 그러다 한다면 이는 세간상(世間相)을 없애고 출세간(出世間)의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며, 번뇌를 여의고 보리를 구하는 것이며, 생사를 떠나서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법문에 어긋난다. 세간이 공한 것이 출세간이요, 번뇌가 공한 것이 보리요, 생사가 공한 것이 열반이다. 시끄러운 것을 떠나서 고요한 것을 찾음은 토끼 뿔 거북 털을 찾는 격이다.

일상생활을 떠나서 불법을 추구하게 되면 단멸공(斷滅空)에 치우친 외도가 될 수 있다. 시끄러운 일상생활 가운데서 항상 불법이 현전할 때 살아있는 공부가 된다. 그러므로 대혜도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할 때가 힘써서 공부해야 할 좋은 시기라고 말하고, 시끄러운 속에서 갑자기 고요할 때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 힘이 좌복에 앉아 있는 공부보다 천만억 배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끄러운 일상생활 가운데서 화두가 여일하고 공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간화선 수행이다. 불법은 일상생활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 조사선의 특성이기도 하다.

불법은 일상생활 하는 그 곳에 있으며,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고, 말로 서로 대화하는 일상의 모든 마음 쓰는 곳에 있다. 또한 그렇지 않다면 불법이 아니다. 알겠는가? 만약 지금 바로 이러한 줄 알면 걸림 없이 자재한 참사람(無碍自在眞人)이다.

불법은 일상생활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화두로 무심하고, 의정으로 깨어있는 것이 올바른 수행이요, 간화의 참선이다. 그러니까 간화선에서의 좌선이란 앉아있는 것을 포함해서 전 생활 영역에서 마음이 집착 없이 순일한 것으로 앉음(坐)을 삼고, 근원적인 문제의식(話頭)으로 깨어있음으로 선(禪)을 삼고 있다. 그런데 지금 여기의 생활을 떠나서 적정한처(寂靜閑處)에 몸을 앉히고 마음을 거두어(攝心) 모아(凝心) 편안히 안주하는(住心)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면 이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동정을 초월해 동정이 일여한 경계에서 참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선은 조용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 사량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일상생활의 인연이 이루어지는 곳에도 있지 않다. 비록 이와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요한 곳과 시끄러운 곳, 일상생활의 인연이 이루어지는 곳, 사량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는 곳에서 참구해야 한다. 홀연히 안목이 열리면 모든 것이 자기 집안의 일(家裏事)인 것이다.

일체를 버리고(捨) 버리지 않음(不捨)에 머물러 있는 것은 “도중사(途中事: 미완의 경지)”요, 버리고 버리지 않음을 일시에 초월해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이 바로 “가리사(家裏事: 일을 마친 경계)”이다. 본색종사(本色宗師)는 도중사에 머물지 말고 가리사를 밝혀야 한다. 진실로 시끄러운 가운데서 고요함을 보고, 고요함 가운데서 시끄러움을 볼 줄 알아야 제대로 공부를 하게 된다. 무이선사도『참선경어』에서 인연과 경계가 얽힌 일상 가운데서 참구해야 득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참선할 때 시끄러운 것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고요한 곳을 찾아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도깨비굴 속에 앉아 살아날 궁리를 하는 셈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흑산(黑山) 밑에 앉아 있으면 사수(死水)가 젖어 들어올 때 어느 쪽으로 건너겠는가?”라고 한 말이 이를 경계한 말이다. 그러므로 경계와 인연의 굴레 속에 있으면서 공부해 나가야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선(禪)은 동과 정, 시간과 공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또한 그 어디에나 속해 있다. 일체처(一切處)와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공부에 진력하면 생활 그대로가 공부요, 공부 그대로가 생활이다. 일상생활을 떠나서 화두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면 납월 삼십일(죽음)이 다가와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왜냐, 떠나도 일상이요, 떠나지 않아도 생활이기 때문이다. 즉 떠나도 번뇌요, 떠나지 않아도 번뇌인데 번뇌가 있는 그곳이 참다운 공부처이다. 번뇌를 대치하는 것이 참선이므로 번뇌 망념이 일어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번뇌가 일어나는 곳을 향해 반조(返照)하면 된다.

종색의『좌선의』에 “한 생각 일어난 사실을 바로 자각하면(念起卽覺), 자각하는 즉시 소멸한다(覺之卽失)”고 하였다. 이것은 번뇌 일념이 공하기(一念卽空) 때문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그 곳을 향해 간절히 화두를 들면 번뇌는 저절로 소멸되고 화두만이 역력해 진다.

우리는 간화선이 문자선, 무사선, 묵조선의 병폐를 극복하고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간화선 안에는 이미 이들 기존의 선이 이룩해 놓은 성과가 내장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간화선이 기존의 선법에서 야기되어진 단점을 보완하여 선사상을 수립했다면, 이 말 속에는 그 장점은 그대로 계승되어지고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문자선이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교학적 성과와 무사선이 이룩해 놓은 무사무위의 임운자재(任運自在)한 선지(禪旨) 및 묵조선의 좌선방편의 수행방법 등이 그대로 계승되어지고 있는 상태로써 간화선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위에서 열거한 장점의 바탕위에 문자선의 병폐로 지적된 지해(知解), 무사선의 병폐인 안일(安逸), 묵조선의 폐풍인 좌선(坐禪)에의 집착 등의 극복이 바로 간화선의 사상으로 정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를 겸수하고, 노동과 선수행의 병행, 행주좌와의 생활전체가 선이 되는 생활선으로서의 간화선이 그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화의 수행은 전체생활을 떠나지 않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생활 그대로가 수행이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한결같이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간화행자가 될 수 있다. 만공선사는 “장맛이 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참선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한 생각 일어나는 그곳을 돌이켜(一念返照) 그 자리에서 화두를 지속적으로 들면 된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지속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언제 어니서나 무슨 일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공부가 여일해 질 수 있다. 그러면 일상이 그대로 공부요, 공부가 그대로 생활이다. 이것이 간화선이 지향하고 있는 생활선의 면모이다. 이 생활선이 바로 간화선의 하나의 특성이다.

간화선의 수행 방법론 역시 화두의심의 일념을 통해 바깥 경계로 향하는 의식작용을 멈추어, 즉 망념을 끊어 진여본성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은 일어난 바 없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실로 있는 것도 아니요, 실로 없는 것도 아닌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마음이다. 불이중도에서 보면 번뇌가 곧 보리이며, 생사가 곧 열반이며, 중생이 바로 부처다. 중도의 깨달음은 보되 본 바 없이 보기 때문에 색으로부터 해탈이며, 듣되 들은 바 없이 듣기 때문에 소리로부터 해탈이며, 생각하되 생각한 바 없이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의 대상(법)으로부터 해탈이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닌 해탈자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이선(不二禪)의 수행이다. 간화선은 이뭣고라는 물음의 현전일념을 통해 생각 없음(無念)과 생각 있음(有念)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는 불이(不二)의 수증이다.

간화선 수행이 형식주의와 선정주의의 함정으로부터 탈피하여 망념이 그대로 정념임을 통찰하는 반야의 눈이며, 깨어있고 열려있는 일상의 삶 자체이기 위해서는 철저히 불이중도의 실상을 체득해야 한다. 나아가 간화선 수행이 시대 대중의 아픔을 치유하고 전 삶의 영역에서 해탈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화두참구의 일념 가운데 육도만행(六度萬行: 육바라밀)이 두렷이 드러나야 한다. 선수행은 한 법도 세운바 없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기에 실상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돈오이지만, 방편에서는 늘 부지런히 털고 닦는(時時勤拂拭) 만법의 점차를 세우게 된다.

간화선 수행을 단순히 화두참구의 방법론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전체 선수행의 영역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증의 해탈론으로 승화되어져야 만이 진정한 의미의 선수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간화선 수행을 통해 시대 대중들이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해탈법문에 들어갈 수 있으며, 동시에 화두하는 현전일념의 바탕에 보현행원(普賢行願)이 원만하게 드러나 중생회향이 이루어져야 명실상부한 최상승의 수증체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견성성불, 광도중생이라는 선의 근본종지를 회복해야 하며, 선의 대중화, 세계화를 위한 체계적 방법론에 의거한 간화수증론이 정립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뭣고의 물음이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물음임과 동시에 어떻게 사는 것이 역사와 사회에 대한 바른 회향인가를 묻는 물음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물음과 역사에 대한 실천론적 물음이 동시에 제기되어져야 간화선의 대중화와 세계화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활선으로서의 간화선 수행이 현실적 삶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2. 화두 결택의 중요성

현재 선문에서는 공안과 화두라는 말을 동일하게 사용할 때도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공안과 화두는 구별되어 진다. 불조(佛祖)의 깨달음의 기연을 시설해 놓은 것을 공안(公案)이라고 했다. 그 공안 가운데 핵심이 되는 일구(一句) 혹은 일자(一字)의 대답을 선택하여 의심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의심의 대상이 되는 말(話)이 곧 화두가 되는 것이다.

화두에는 일체 사량분별이 끼어들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엇이 부처냐? 혹은 무엇이 모든 부처님이 나신 곳이냐? 라는 물음에 “마른 똥막대기(乾屎橛)”,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東山水上行)”라고 대답하여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을 초월하고 있다. 즉 “판단정지”를 명령하여 일체 이성적 사유를 정지시키고 말과 생각(분별)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 그 곳에서 화두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운선사는 화두의 뜻을 “말의 머리(話之頭) 혹은 생각의 머리(念之頭)”라고 해석하고, 화두란 한 생각 이전의 소식이기 때문에 화두에 나타난 표면상의 의미를 가지고 사량분별하는 것은 마치 “말의 꼬리(話尾)”를 잡고 시비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요, 생각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이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인 것이다. 기실 화두는 바로 생각의 머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바로 마음이다. 바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 바로 화두(말의 머리)인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란 마음자리이다. 이 마음자리가 바로 화두가 된다. 즉 화두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생각 이전의 마음자리(心地)란 뜻이다. 즉 화두의 지시내용이 생각 이전이므로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생각으로 분별한다는 뜻이 아니고, 생각 이전 자리인 ‘오직 모를 뿐’인 무분별로써의 참구를 한다는 것이다. 한 생각 이전이기 때문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므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의 길이 소멸했다(心行處滅)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념으로 사량하고 분별할 수 없는 그 자리를 오로지 일념으로 참구하는데 화두참선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앞의 일념은 분별로써의 일념이며, 뒤의 일념은 무분별로써의 일념을 말한다. 따라서 원오은 “독으로써 독을 공격한다(以毒攻毒)”라고 표현하고 있다. 독을 제거하기 위해 더 강력한 독으로써 독을 치게 하는 처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병이 없으면 굳이 약을 쓸 필요가 없다.
간화선 수행에 입문하면 우선 하나의 화두를 선택하여야 한다. 화두의 선택은 원칙적으로 선지식의 지도에 의거하여야 함이 통설이다. 그런데 혜능은 선지식에는 안의 선지식과 밖의 선지식이 있다고 말하였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십이부경전이 모두 사람의 성품(人性) 가운데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므로 반드시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해야 비로소 보게 된다. 만약 스스로 깨닫는 자는 밖으로 (선지식을) 구할 것이 없다. 반드시 다른 선지식을 의지해야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결같이 집착하여 말하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런가? 자신의 마음속에 선지식이 있어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만약 삿되고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켜 망령된 생각으로 인해 뒤바뀌게 되면 비록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해도 구할 수 없다.

선지식에 두 종류가 있어서 마음속의 선지식과 밖의 선지식으로 나누어진다면 화두선택 역시 자기 마음 안의 선지식과 스승으로서의 바깥 선지식의 역할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종래에 막연하게 화두의 결택(決擇: 결정하여 선택함)은 선지식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바깥의 선지식을 찾아가 화두를 결택받는 것이 공식화 되어 있었다. 수행자가 선지식을 찾아 화두 받기를 원하면 선지식은 수행자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일칙의 공안에 의거해서 하나의 화두를 간택해 주었다. 이때 안으로 참문자의 근기가 수승하고 신심과 발심이 견고함과 밖으로 선지식의 가르침이 주도면밀함이 서로 잘 계합하게 되면, 수행자가 결택된 화두를 참구함에 의정이 면밀히 지속되어 공부에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발심이 깊지 못하고 참구의 의지 또한 빈약한데다가 지도해주는 스승마저 참문자의 근기와 숙세의 인연을 잘 살펴 주도면밀하게 방편을 사용하지 못하고, 가볍게 기존의 공안에 의거하여 하나의 화두를 가려 참구하라고 일러준다면, 수행자 자신의 화두참구는 십중팔구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먼저 안의 선지식에 의해 화두 선택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 수행과 깨달음 및 중생구제에 대한 사무치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가 바로 발심과 정견과 화두참구가 만나는 지점이다. 간절한 발심의 토대 위에 중도정관을 확립하고, 기필코 참선수행을 통해 생사를 해탈하고 일체 생명에 이익을 주겠다는 자세가 투철하게 갖추어져야 한다. 이러한 발심과 결정심이 바탕이 되면 저절로 간절하고 사무치는 마음으로 우주와 인생에 대한, 즉 존재의 실상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실존적 과제와 직면하게 된다. 지금 여기서 나의 실존적 과제가 바로 화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간화선이 이 시대의 중심 화두가 되기 위해서는 천년전의 죽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 존재자체의 실존적 문제로부터 화두가 결택되어 실참실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너의 이야기(공안)가 아닌 나의 문제(화두)로 다가와야 화두로서의 생명이 담보될 수 있다. 그리고 또 절절한 나의 문제의식으로 자리매김 되지 않는 화두에 대해서는 간절하고 절박한 의정(疑情)이 일어나지 않는다.

거듭 말하면, 기존의 전통적 공안과 거기에서 추출된 화두 자체가 잘못되고 쓸모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부처님과 조사로부터 기연된 기존의 화두라 하더라도 참구자 자신의 근원적 문제의식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화두로서의 의정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절절하게 사무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선지식의 철저하고 친절한 점검에 의해 화두가 선택되어져야 지금 현재 나에게 의심으로 이루어지는 현성공안이 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좋은 화두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의 이야기(話)로 남아 있고, 나의 문제(의심)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의 옛날이야기(古則公案)는 될지언정 지금 현재 나의 영성(靈性: 신령스런 성품)을 밝힐 수 있는 생생한 거울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간절하게 사무치는 자신의 현존(現存)의 고민으로 꽂혀지지 않는 화두는 시대 대중들에게 자신의 실존적 과제로서의 절박한 문제의식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화두로서의 효용가치가 없어 자칫 간화선수행의 토대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즉 화두는 절박한 자신의 문제로 주어질 때 강렬한 의심의 동기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화두는 사구(死句: 죽은 말귀)에 지나지 않으며, 절박한 자기의심이 수반되어야 활구(活句: 산 말귀)로서의 생명이 부여된다.

이와 같이 안의 선지식에 의해 화두를 결택하려는 준비가 성숙되었다면, 마땅히 밖의 선지식을 참문하여 자신의 문제의식을 폭로하고 자세하고도 친절한 지도를 받아야 한다. 선지식을 친견하여 자신의 전 인생을 투영한 신심으로 하나에서 열까지 수행의 전반에 걸친 상담으로 철저히 자신의 문제의식에 바탕을 둔 입장에서 자상한 지도에 힘입어 화두가 결정되어야 한다. 즉 선지식은 참문자의 인생 전후에 걸친 인연과 수행자로서의 발심과 정견 그리고 화두에 대한 절박한 인식 등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하나의 화두를 결택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안의 선지식과 밖의 선지식의 상응(相應)에 의해 하나의 본참화두(本參話頭)가 탄생되는 것이다. 안의 선지식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참구할 당사자의 문제의식이 결여된 화두, 즉 밖에서 들어온 화두는 간절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밖의 선지식의 점검과 지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정법(正法)에 의거해 원만하게 화두결택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간택되어진 화두는 지금 현재 나에게 간절한 의심으로 참구가 이루어지게 되므로 바로 현성공안(現成公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현재 선문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화두 결택의 방법은 대단히 편의적이고 무책임한 행태라고 비판 받을 충분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초심의 간화행자들에게 제대로 된 발심의 계기와 정견의 수립 및 화두결택의 지도가 병행될 수 있는 간화선 지도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3. 화두참구의 자세

1) 간절한 마음

중봉명본은 “공부를 해도 영험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경책하고 있다. 첫째 고인들과 달리 도업(道業)을 이루려는 의지와 기개가 없다. 둘째 생사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큰일로 여기지 않는다. 셋째 무량겁(無量劫)동안 익혀온 습(習)과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좌복에 앉아서는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에 빠져 있다. 넷째 깨달을 때까지는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신심을 갖추지 못했다.

어떤 수행을 선택한 수행자이든지 간에 수행을 통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 광도중생(廣度衆生)하려고 하면 먼저 발심(發心)이 전제되어야 한다. 화두참선 역시 발심이 바탕이 되어야 함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발심이 있는 곳에 화두가 있고, 화두 있는 곳에 발심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발심은 무상을 절실하게 느끼는 마음(無常心)과 간절한 마음(懇切心)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박산무이는『참선경어』에서 간절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참선하는데 있어서는 ‘간절함(切)’이라는 한 마디가 가장 요긴하다. 간절함은 무엇보다도 힘이 있는 말이니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이 생기게 되면 편한 곳으로 내쳐 마음대로 놀게 되며 못할 짓이 없게 된다. 만일 공부에 마음이 간절하면 방일할 겨를이 있겠는가. 간절하다는 이 한 마디만 알면 옛 스님들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근심할 필요도 없고,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 간절하다는 말을 버리고 따로 불법을 구한다면 모두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로서 형편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엉터리와 참선하는 사람을 어떻게 동일시 할 수 있겠는가.

역대 간화선사들은 한결같이 이마에 간절 “절(切)”자 한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라고 말하고 있다. 간절함이 이론에 있지 않고 생각에 있지 않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절체절명(絶體絶命)으로 우러나는 것을 친절(親切)이라 한다. 친절에는 안의 친절과 밖의 친절이 있다. 안의 친절이란 마음을 밝혀 생사를 벗어나겠다고 하는 간절함이 직접적으로 자신 스스로를 일깨우는 것이다. 즉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친(親)히 간절하게 사무치는 것이 안의 친절이다. 이 안의 친절로 인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선이란 늘 깨어있고 열려있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깨어있는 마음은 안의 친절이요, 열려있는 마음은 밖의 친절로 나타난다. 밖의 친절이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친절이다. 수행자가 제대로 수행한다면 수행 그대로가 인격으로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안의 친절로 인한 사무치는 수행이 그대로 밖의 친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고, 본래부처라고 한다면 나와 너의 분별, 범부와 부처라는 차별은 사라지게 된다. 일체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섬기는 마음이 밖의 친절이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계, 이것이 바로 안과 밖이 서로 사무치는 친절이요, 간절한 마음이다.

간절한 마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무상심(無常心)에서 비롯된다. 경에 설하기를 “일체의 유위(有爲)의 법은 마치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과 같고 전기불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라.”고 하였다. 어젯밤 꿈은 작은 꿈(小夢)이요, 인생 백년사는 큰 꿈(大夢)이다. 꿈 가운데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그네가 우리 인생이다. 꿈속에서 꿈을 꾸면서 깨어있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꿈을 완전히 깨서 꿈밖으로 나와야 한다. 이것이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이다.

선(禪)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으라고 말한다. 본래면목이란 존재의 실상이자,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은 시작과 끝이 있는가? 태어남은 어디로조차 오는 것이며(生從何處來) 죽음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死向何處去)? 이 문제는 선에서 제기하고 있는 본분사요, 일대사이다. 아울러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이 근원적인 본분사를 대하는 대혜선사의 문제의식이 바로 “무상신속(無常迅速), 생사사대(生死事大)”인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편의주의에 빠져 도를 구할 마음을 내지 않는다. 아무리 뒤바뀐 세상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나고 죽는 일만큼은 인생의 가장 큰 일임에 변함이 없다. 나고 죽음의 근원적 문제에 소홀한 사람은 선근인연이 희박한 사람으로서 생사를 벗어날 기약을 할 수 없다.

나고 죽음의 일이 크고 덧없는 세월의 흐름은 빠르다. 태어나되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지 못함을 삶의 큰일이라 하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함을 죽음의 큰일이라 한다. 이 나고 죽음의 일대사(一大事)가 참선하며 도를 배우는 이들의 목구멍이며, 부처님이나 조사가 되는 수행처이다.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이 육신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 몸은 조금 일찍 혹은 조금 늦게 조만간 무상(無常)으로 돌아갈 뿐이다. 삼계의 불난 집에서 무엇을 해탈이라 할 수 있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밥 한 끼 먹고, 몸을 가리기 위해 옷 한 벌 입고, 몸을 편히 쉬기 위해 집 한 칸 마련하고자 평생을 소진하고 있다. 물론 최소한의 의식주는 꼭 충당해야 되겠지만 항상 맑은 가난으로 도업을 증장시키는 수행에 몰두해야지 쓸모없는 일에 세월을 허비하고 시간을 탕진해서는 안 된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무상하여 죽음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한 생각 일어남이 태어남이요, 한 생각 사라짐이 죽음인데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하루살이 인생 정녕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소중한가. 하루 빨리 무명의 삶을 청산하고 지금 여기 불법 만난 시절인연 헛되이 버리지 말고 머리에 불이 난 듯이 생사의 미망을 떨쳐야 한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항상 무상이 신속함을 알아 “생사(生死)”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이 일을 해 마쳐야 되겠다는 결심이 확고부동하게 서야 한다.
근세의 선지식인 만공스님은 참선공부의 과정을 첫째 지무생사(知無生死), 둘째 계무생사(契無生死), 셋째 체무생사(體無生死), 넷째 용무생사(用無生死)를 들고 있다. 지무생사란 생사가 본래 없음을 아는 것을 말하고, 계무생사란 생사가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을 말하고, 체무생사란 생사가 없는 도리를 체달(體達)하는 것을 말하며, 용무생사란 생사 없는 경지를 수용하여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만공은 네 종류의 생사의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두참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모든 납자는 화두공부밖에 할 것이 없다는 서원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다. 발심납자는 출가자 재가자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무상이 신속하고(無常迅速), 생사의 일이 크다(生死大事)는 생사화두(生死話頭)에 간절해야 한다. 이것이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는 바탕이 된다.

2) 삼요(三要)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이 하나가 되어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마음이 참선수행의 기본이다. 고봉의『선요(禪要)』에서는 신심, 분심, 의심을 참선하는데 가장 요긴한 세 가지 요건이라 하여 이를 갖춤을 “삼요(三要)”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간화선 수행의 기본이 되고 있다.

만약 착실한 참선을 말한다면 결단코 세 가지 요점을 갖추어야 한다. 첫 번째 요점은 큰 신심(大信根)이 있어야 하니, 신심이 수미산(須彌山)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두 번째 요점은 큰 분심(大憤志)이 있어야 하니, 이 분심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 바로 두 동강 내버리는 마음과 같아야 한다. 세 번째 요점은 큰 의심(大疑情)이 있어야 하니, 이 의심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큰일을 저질러 은폐되었던 일들이 막 폭로되려고 할 때와 같은 것이다.

고봉은 주장하기를 “의심은 믿음으로 체(体)를 삼고 깨달음은 의심으로 용(用)을 삼는 줄 알아라. 믿음이 십분(十分: 전부)이면 의심이 십분이고, 의심이 십분이면 깨달음이 십분이다.”라고 하여 신심과 의심과 깨달음이 하나의 바탕(一體)임을 강조하고 있다. 곧 화두참선은 나고 죽음(生死)에 대한 무상심(無常心)으로부터 신심과 용맹심이 일어나고, 신심과 용맹심이 충만하면 화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저절로 들어지는 화두라야 하루 24시간에 일념상응(一念相應)하여 화두일여(話頭一如)로 무념(無念)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화두참선은 활구(活句)에 대한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옛 조사가 말하기를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에 작은 깨달음이 있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라고 하였다.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우리가 어디로부터 태어났는지 모르니 그 온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사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이로부터 의정이 불같이 일어난다.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것에 상관없이 버리려야 버릴 수 없고, 떼려야 뗄 수도 없어 항상 나와 더불어 하나 된 의심을 지어가야 한다. 모든 존재가 공적한데 공적한 가운데 신령한 앎이 있으니, 눈앞에서 법을 들을 줄도 알고 법을 설할 줄도 아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몽산화상은 말한다.

화두 위에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으면 참된 의심이라 한다. 만약 의심이 한 번 일어났다가 잠깐 사이에 또 의심이 없는 것은 참된 마음으로 의심을 내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의심을 지어내는 것에 속한다.

만약 움직이는 가운데나 고요한 가운데서 의심하는 화두가 흩어지지 않고 부딪히지 않으며, 화두가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아 자연히 앞에 드러나면 이와 같은 때에 공부에 힘을 얻는다.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화두를 자연화두(自然話頭)라고 한다. 자연화두가 되어서 적적(寂寂)하면서 성성(惺惺)하고 성성하면서 적적하여 의심덩어리가 깨어져 홀연히 마음길이 한 번 끊어지면 곧 깨달음이 열린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나옹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실로 이 일대사인연을 기어코 이루려 하거든 결정적인 믿음을 세우고 견고한 뜻을 내어, 하루 종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 늘 참구하던 화두를 들어야 한다. 언제나 들고 늘 의심하면 어느새 화두가 저절로 들리고, 의심덩어리가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는 몸을 뒤쳐 한 번 내던지고 다시는 부질없고 쓸데없는 말을 말아야 한다.”

3) 순일한 마음

경전이나 어록에 의거하면, 부처님 당시나 조사선 시대에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바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거나, 조사의 한 마디 말 아래 바로 깨달음(言下便悟)을 얻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숙생에 닦은 인연이 금생에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근성이 뛰어난 최상근기의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시설하는 방편이 뛰어나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요즘 우리 수행자들과는 너무나 판이한 수증의 기연인 것만은 분명하다. 위에 열거한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추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되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그때의 수행자들의 마음 바탕에는 순수의식이 깔려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지금은 시대가 흐리고 사람이 흐리고 사람의 생각마저 흐려져 버렸다. 예전보다 여러 방면에서 발전되었지만 인간의 품성만은 오히려 영악하게 변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렸다. 수행자의 기본 품성은 밝고 맑은 순수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우직하면서도 순수한 영혼을 가진 수행자가 도 닦기 훨씬 수월하며, 더군다나 화두에 몰입하기 더욱 용이하다. 순수한 사람은 믿음이 여일하고, 발심이 굳건하며, 한 가지 일에 전념하기 쉬운 성정으로 말미암아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해 나가는데 큰 도움으로 작용될 수 있다. 이러한 순수성은 화두일념의 상태인 순일무잡(純一無雜)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도를 깨달은 도인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성품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밀은 달마의 9년 면벽의 벽관(壁觀)을 정의하여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外息諸緣), 안으로 헐떡임이 없어서(內心無喘),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心如牆壁), 도에 들어갈 수 있다(可以入道)”라고 말한 바 있다. 밀운선사 또한 이 말에 대해 일찍이 해석하기를 “밖에서 들어오는 바가 없으니 곧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것’(外息諸緣)이요, 안에서 일어나는 바가 없으니 곧 ‘안으로 마음이 헐떡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이다. 이미 안으로 마음이 헐떡이지 않고,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즉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一念不生).”라고 하였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임이 없다는 것은, “온갖 인연을 다 놓아 버리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萬緣放下, 一念不生)”을 말한다. 이른바 “만연방하, 일념불생”이라고 하는 것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경지이다.

이 순일무잡한 순수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화두참구는 그냥 앉아서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온갖 인연에 얽매이고 번뇌가 죽 끓듯 하며, 망념이 폭포처럼 솟아져 잠시도 쉴 수 없는데 어느 곳에 발을 붙여 화두를 참구한단 말인가. 이런 경우를 옛 조사들은 “모기가 쇠로 된 소가죽을 물래야 물 도리가 없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공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순수해야 한다. 순백의 영혼이 참선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화두에 대한 의심은 순일하여 일체 잡념이 없는 일념이어야 한다. 일체의 반연을 다 놓아버리고(萬緣放下), 한 생각도 잡념이 일어나지 않을 때(一念不生) 화두일념이 현전하게 된다. 이것이 화두참구의 자세이다.

   


4. 화두참구

1) 일념반조(一念返照)

화두의심의 본질은 한 생각을 통해 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를 깨닫는데 있다.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이 생각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라고 일념반조(一念返照)로써의 의심을 함으로 해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를 알아차린다. 생각이 잃어나기 이전 자리는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경계이다. 화두의심이라는 창조적 긴장을 통해 본연자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대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번뇌를 생각할 필요가 없고, 불법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법과 번뇌가 모두 바깥의 일입니다. 그러나 또 바깥의 일이라는 생각을 지어서도 안 됩니다. 다만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십시오(廻光返照).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오며, 행위를 할 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행위하는 바가 이미 갖추어지면 내 마음의 뜻을 따라 빈틈없이 준비되면 모자람도 남음도 없으니, 바로 이러한 때에 누구의 은혜를 입어서 이와 같이 공부합니까? 날이 가고 달이 가다보면 마치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저절로 적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혜는 “이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묻고 있다. 번뇌이니 보리이니 하는 분별은 망상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별을 떠나서 불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화두의 특징은 생각을 돌이켜 물어 생각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데 있다. 범부는 일상에서 경계(境界)에 빠져 망상을 주인삼아 살아가고 있다. 즉 인식의 대상을 부여잡고 생각을 일으켜 집착하는 분별 망념으로 울고 웃는 것이다. 바깥 경계는 분별이다. 문제는 분별로서의 생각이다. 이 분별과 망상은 언제나 대상을 향해 있다. 화두는 일단 분별과 망상의 생각을 돌이키는 작용을 한다. 생각을 돌이킨다는 것은 분별 망념을 멈춘다는 것이다. 화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질문을 통해 생각을 돌이키는 것이다. 반드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설사 선지식에 의해 물음이 제기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 물음을 통해 알아차리는 그 자리를 비춰보게 한다. 이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 혹은 일념반조(一念返照)라고 말한다.

양좌주가 경론을 강의하다가 마조를 뵈었다. 마조가 물었다. 듣자하니 좌주는 경론을 많이 강의한다는데 사실인가? 양좌주가 말했다. 감히 그렇다 하기가 민망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강의하였소? 마음을 가지고 강의하였습니다. 마음은 재주부리는 아이와 같고 뜻은 아이를 부리는 자와 같거늘, 어떻게 경전을 강설하겠는가? 양좌주가 언성을 높여 말했다. 마음이 강의를 못한다면 허공이 강의를 한다는 말입니까? 허공은 강의할 수 있다. 양좌주가 수긍하지 않고 바로 나가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마조가 불렀다. 좌주여! 양좌주가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是甚麽)? 양좌주가 활연대오(豁然大悟) 하고서 예배하였다.

좌주는 경론에 정통한 강사이다. 생각의 지해(知解)로써 강설함에 걸림이 없다. 그러나 마조는 이 생각을 멈추게 하고 있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생각이 멈춘 생각 이전의 자리이다. 즉 분별을 멈추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바로 보게 지시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조사선의 수증 방편이다. 분별과 망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분별과 망상을 바라보는 그 자리를 직시하게 한다. 오직 바라보는 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일체의 분별 망념을 초월할 수 있다. 번뇌 망념에 물든 생각을 돌이켜 자신의 본래 마음을 곧장 들여다보게 하여, 보는 그 자리로 복귀하게 하는 것이 반조의 방법을 활용한 조사선의 방법론이다. 마조의 한 마디 말 아래 양좌주가 바로 깨닫게 하는 방식의 조사선 수증방편을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말한다.

육조가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때 어떠한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혜명이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이른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일체의 분별 망념을 멈추라는 것이다. 일체의 이원(二元)적 분별을 하기 이전 자리로 돌아가 그 자리를 비추어보아라. 그러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그대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일체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선악에 물들기 이전의 본래 그 상태로 존재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를 체험하여 깨달으면 된다. 이것이 조사선에서 구사하는 질문을 통한 반조의 방법이다. 반조를 통해 알음알이(지식)에 의한 일체의 분별의식이 사라져야 본래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위산영우는 지식이 출중하고 언변이 뛰어난 향엄지한을 향해 이렇게 지시하였다.

내가 듣기로 그대는 백장 선사(先師)의 처소에 있을 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했고, 열을 물으면 백을 답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뜻으로 알아차리고 알음알이(識)로 헤아리는 것이니 바로 생사의 근원이 된다. 이제 부모가 그대를 낳아주기 이전의 일을 한 마디 일러 보아라.

배우고 익혀서 아는 알음알이로는 생각 이전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수 없다. 마조선사가 일깨운 “이것이 무엇인가?”와 육조혜능이 말한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라는 물음과 위산영우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일구(一句)”는 스승이 제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에 의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바로 마음자리인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이것이 조사선의 수증방편이 되는 것이다. 조사선의 물음은 밖의 경계를 향해 있는 생각을 안으로 돌이켜 본래심, 즉 본래부처(중도실상)를 비춰보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회광반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번뇌 망념 <바라보기>, 둘째 분별 망념의 <멈춤>, 셋째 생각 이전 자리의 <직면>, 넷째 본래심의 <깨달음>이다. 사실 이러한 한 생각은 단계를 거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찰나적 심리현상을 단계적 과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은 초심자들이 실제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바로 일념이 현전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망념에 휘둘러 제대로 참구하기가 어려움을 호소하는 현실적 고충 때문이다. 화두가 바로 일념으로 참구되어진다면 이러한 단계적 방편의 지시는 전혀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제방 선덕들의 방망이를 기다리며 눈썹을 아끼지 않고 방편을 세우고자 한다. 시대에 맞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화두만 들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는 간화선 대중화는 어렵기 때문이다.

첫째, 번뇌 망념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인식의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고 생각과 생각하는 자를 분리시켜 지켜본다는 의미이다. 마치 위빠사나에서 생각의 대상인 법을 알아차려 지켜보는 것과 같이 분별에 끄달리지 않고 분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초보자에게는 이러한 단련을 거쳐 번뇌 망념을 철저히 객관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질 필요가 있다. 생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결국 번뇌 망념이 공(空)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때에 번뇌가 본래 공하므로 바라보되 바라봄이 없는 바라봄이 되는 것이다. 즉 번뇌 망념에 휘둘려 고통을 느끼는 인식의 체계를 전환함으로 해서 분별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국면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다. 이 첫 번째 단계인 <망념 바라보기>만 잘 단련하여도 의식을 전환하고 오염식인 말라식을 바꾸어 인격적 수양에 현저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평생을 수행하고도 수준 높은 인격적 소양을 함양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수행의 첫 단계에 대한 단련을 소홀히 한 원인도 작용하고 있다.

둘째, 분별 망념의 멈춤이란 앞의 바라보기를 통해 바로 망념의 분별심을 타파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개념적인 분석으로 아는 분별심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므로『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 오직 분별심을 멀리하고(唯嫌揀擇), 다만 미움과 사랑만 버리면(但莫憎愛), 툭 트여 밝게 깨달을 것이다(洞然明白).”라고 말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해 있는 분별의 망념은 개념과 분석으로 아는 알음알이(知解)에 불과하다. 이 지해의 알음알이는 이원적 분별에 의한 번뇌 망념이기 때문에 분별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분별 이전의 자리란 불이중도의 경계이다. 생각 이전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량분별을 타파하여야 한다. 첫 번째 망념의 바라보기와 두 번째 분별심의 멈춤은 거의 간격없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앙산스님이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참 부처의 머무는 곳입니까?’ 위산이 말하였다.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無思) 묘한 이치로써 돌이켜 신령스러운 불꽃(靈焰)의 무궁함을 생각하라(返思).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상(性相)이 상주하여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요, 진불이 여여(如如)하리라.’ 분별심의 멈춤은 반조(返照)로 이루어진다. 이때에 지금까지 분별로써 알고 있던 알음알이를 멈추고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인 마음이 되어야 한다.

오직 모르는 마음은 분별 이전을 향한 마음이다. 모든 사량분별을 멈추어 판단을 정지하고 일체를 부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분별의 세계를 한꺼번에 내려놓고(放下着) 오직 “판단정지”를 외침과 동시에 모름의 장벽에 부딪쳐야 한다. 따라서 종문 제일의 책(宗門第一書)이라 불리는『벽암록』에서도 제1칙으로 “달마불식(達磨不識)”과 제2칙으로 “조주의 명백함에도 있지 않음(趙州不在明白)”의 공안을 시설하고 있는 것이다.

양무제가 달마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성스럽고 가장 으뜸가는 진리입니까?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不識).

조주가 대중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하지만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 분별함에 떨어지거나 명백함(明白)에 떨어진다. 노승은 명백함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대들은 오히려 명백함에 머무는 것을 보호하고 아낀다. 그렇지 않은가. 이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이미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합니까? 나도 모른다(不知).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모름은 알고 모르고의 모름이 아닌 절대의 모름이다. 오직 모를 뿐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여 간택(揀擇)하면 어긋난다. 일체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모름을 유지하라. 오직 모를 뿐인 그곳에서 하나의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봉스님은 “부지불식(不知不識: 생각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듯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오늘 밤에 다 끝나는데, 열에 다섯 쌍은 선수행을 하면서 선을 알지 못하며(不知) 도를 배우면서도 역시 도를 알지 못한다(不識).

다만 이 부지불식(不知不識)의 네 글자가 바로 삼세 모든 부처님의 골수이며 일대 장교(一大藏敎)의 근원이다.” 오직 모름은 간화의 출발점이다. 알지 못하기에 알려고 하는 그 마음, 알지 못하기에 꽉 막힌 답답함이 화두의심의 동력이 된다.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온 정성으로 간절하게 의심하라. 의심뿐인 그 상태를 유지하여 참구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참구의 관건은 “저절로(自然)”에 있다. 억지로 작위적으로 참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이 저절로의 의심이 일체 분별의식을 부수고 본래면목을 깨닫게 한다. 즉 일체의 분별이 다하여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무념(無念)으로 나아가라. 그곳이 우리가 돌아갈 자리이자 본래면목 자리이다. 본래면목을 깨치기 위해 모든 분별과 망념을 내려놓은 그 부정의 자리에서 간절히 의심하여라. 화두를 의심한다는 것은 일체의 정식(情識), 즉 분별 망념이 끊어진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다만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가 진실하게 참구하려고 한다면, 다만 일체를 놓아 버리고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곳을 향해 문득 이 한 생각이 부서지면, 부처님도 그대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된 것이 바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앉아 의심의 한 생각마저 부서질 때 깨달음이 열리게 된다. 사량하고 분별하는 일체의 알음알이를 부정하고 망념이 끊어진 자리에 앉아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뭣고? 라고 참구하라.
셋째, 생각 이전 자리의 직면이란 대상을 향해 분별하던 마음을 멈추고 지금 여기의 마음과 마주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마음이란 일체의 분별을 떠난 본래심을 말한다. 즉 밖으로 향하던 생각을 현전일념(現前一念)인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의해 안으로 돌이켜 생각 이전 자리와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생각 이전 자리는 생각이 일어난 바 없이 일어났음으로 그 실체가 없기에 공(空)한 것을 말한다. 공한 그것마저 공하므로 창조적 보리정념(菩提正念)이 일어나게 된다. 일체의 분별의 마음을 멈추고 지금 여기의 마음, 즉 즉심(卽心)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즉심이 부처이기(卽心是佛) 때문이다. 분주의 무업선사는 원래 좌주였다. 어느 날 마조대사를 뵙고 물었다.

삼승(三乘)의 문자는 거의 다 그 뜻을 궁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듣기를 선문에서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말한다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조가 말했다. 단지 그대가 모르는 그 마음이 곧 즉심시불이다. 달리 어떤 것이 있겠느냐.

모르는 마음으로 사량분별이 끊어진 자리가 생각 이전 자리이다. 생각 이전과 직면하는 것이 즉심이요, 즉심이 바로 부처이다. 달리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으면 삿된 외도이다. 부처가 무엇인가. 일체 분별 망념을 떠난 불이중도의 참마음이다.
넷째, 본래심의 깨달음이란 분별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는 중도의 무심(無心)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도의 무심이 바로 생각 이전의 자리인 본래의 마음이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며, 본연불성(本然佛性)인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선지식의 지시에 의해 즉각적으로 단박에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화두참구를 통해 망념을 소멸하여 점진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이 마음은 곧 없는 마음(無心)이니, 일체의 모습을 떠나서 중생과 부처가 전혀 차별이 없다. 다만 무심하기만 하면 바로 구경의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당장에 무심하지 못하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해도 마침내 깨달을 수 없으니, 삼승(三乘)의 수행에 매여서 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깨닫는 데에는 빠르고 더딤이 있다. 법문을 듣고 한 생각에 바로 무심한 자도 있고,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回向)에 이르러서 비로소 무심한 자도 있고, 십지(十地)에 이르러서 무심한 자도 있다. 그러나 빠르건 더디건 무심하면 그만이지, 다시 수행하거나 깨달을 것은 없다.

어떠한 수행이 되었든지 간에 모두 무심(無心)에 계합하는 것이 목적이다. 공안과 화두 또한 방편이다. 한 순간에 바로 계합하든 삼현(三賢) ․ 십성(十聖)에 계합하든 결국 무심에 계합하는 것이다. 염불로 계합하면 염불선(念佛禪)이 되며, 주력으로 계합하면 지주선(持呪禪)이 되며, 화두로 계합하면 간화선(看話禪)이 된다. 화두 참선을 곧바로 질러가는 문이라 하여 경절문(徑截門)이라 부른다. 일체가 공한 그 자리, 즉 본래부처의 자리에서 바로 화두를 보아 직지인심(直指人心)을 깨쳐 들어가는 것이 간화 경절문이다. 일념에 상응하여 무심을 체득하기 위해 “이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전일념을 돌이켜 그대로 무심에 상응하여야 한다.

화두 참구로 일념반조(一念返照)하는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참구)을 통해 ① 망념 <바라보기> ⟶ ② 분별 망념의 <멈춤> ⟶ ③ 생각 이전 자리의 <직면> ⟶ ④ 본래심(부처)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화두참구의 방법

스승이 던진 질문에 의해 바로 생각 이전 자리에 직면하여 본래 마음을 체험하여 깨닫는다는 것은 특별한 기연이 아니면 매우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화두를 장치하여 참구하게 만든 것이다. 생각하는 그대는 누구이며, 생각을 바라보는 이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현전일념(現前一念)은 어디서부터 일어나는가? 라고 되묻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줄여서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다.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무엇이 공겁(空劫) 이전의 자기인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팔만 사천의 의문도 결국은 이뭣고라는 의심으로 귀결된다. 대혜선사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오직 하나의 의심일 뿐입니다. 화두 위에서 의심이 타파되면 곧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타파됩니다. 화두가 타파되지 않았으면 바로 그 화두를 붙잡고 화두와 서로 맞붙어 버티고 계십시오. 만약 화두를 버리고 도리어 다른 문자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침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옛사람의 공안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에서 대하는 경계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모두 삿된 마구니의 권속일 것입니다.

화두 참구의 본질은 의심을 통해 사량분별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대혜가 지시하고 있는 화두를 의심하게 하는 방법은 수행자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활쏘기를 익히는 것과 같이 끊어짐 없이 지속적으로 제시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가 끼어들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번뇌 망념을 누른 그곳에서 오직 의심만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마치 야생의 망아지를 길들여 고삐를 다잡고 안장을 채워 눌러서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화두를 참구함에는 의심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이다.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 역시 자신이 깨달음을 얻는 계기에서 조사의 언구를 의심함으로 하여 기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원오)에게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도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이 조금 시원하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나(대혜)는 홀연히 앞뒤의 생각이 끊어졌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채, 도리어 맑고 텅 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입실하게 되었을 때, 원오선사는 말했다. “그대가 그런 자리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죽어 버려 활발발을 얻지 못한 것이 애석하구나. (조사의) 언구에 의심을 하지 않는 이것이 큰 병통이다. ……

노화상께서 이에 말씀하셨다. ‘내가 묻기를, 있다는 구절과 없다는 구절이 마치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댄 것과 같을 때에는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묘사하려고 해도 묘사할 수 없고, 그리려고 해도 그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물었다. ‘홀연히 나무가 넘어져 등나무가 말라 죽을 때에는 어떠합니까?’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서로 뒤따른다.’ 나(대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깨닫고는 말했다. ‘제가 깨달았습니다.’

대혜가 담당선사로부터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한 질문을 받은 이후, 원오선사의 회상에서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이 시원하다.”라는 법문을 듣고 첫 번째 깨달음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뒤 원오선사의 지시에 의해 언구를 의심하여 두 번째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간화선 수증의 정절(程節: 단계)을 엿볼 수 있다. 제1단계에서 “홀연히 앞뒤의 생각이 끊어지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채, 도리어 맑고 텅 빈 자리”로 표현되는 공적(空寂)한 경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때에 스승 원오는 점검하기를 “그대가 그런 자리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죽어 버려 활발발을 얻지 못한 것이 애석하구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2단계에서 조사의 언구를 의심할 것을 지시받아 참구하던 도중에 원오의 “홀연히 나무가 넘어져 등나무가 말라 죽을 때에는 어떠합니까?”라는 말 아래 바로 두 번째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때에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 활발발한 지혜가 펼쳐지고 있다.

화두 참구의 수증(修證)단계에서 말하면 첫 번째 단계에서 공적함을 깨닫고, 두 번째 단계에서 지혜를 성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증의 구조는 우리나라의 선사인 태고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사(生死)라 한다. 이 생사에 부딪혀 온 힘을 다해 화두를 들어라. 화두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사라짐이 다할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다한 그곳을 일러 고요함(寂)이라 한다. 고요함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하고, 고요함 가운데서도 화두가 어둡지 않음을 일러 신령스런 지혜(靈知)라고 한다. 이 텅 빈 고요함(空寂) 가운데 신령스런 지혜(靈知)가 있어 무너지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공부하면 멀지 않아 공(功)을 이룰 것이다.

여기서 화두 참구의 과정을 먼저 공적(空寂)을 이루고, 나중에 영지(靈知)를 이루는 과정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차제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공적과 영지가 분리될 수 없는 성적(惺寂)의 등지(等持)인 것이다. 먼저 생사의 마음에서 온 힘을 다해 화두를 들게 되면 생사의 마음이 다해 공적(空寂)함이 이르게 된다. 공적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에 떨어지고, 화두가 분명하고 또렷하면 영지(靈知)가 된다. 이것을 단계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 마음의 생사 ⟶ 화두참구 ⟶ 공적(空寂)한 마음
↳ 윤회
제2단계: 마음의 공적 ⟶ 화두참구 ⟶ 영지(靈知)한 마음
↳ 무기

제1단계에서는 생사(生死)에 물든 마음이 일어났다(起) 사라졌다(滅)를 반복할 때, 참선자는 힘을 다해 화두를 들면, 생멸이 다하게 된다. 만약 이때 화두를 들지 않고 생멸하는 마음에 끌려가면, 육도의 윤회에 빠지게 된다. 마음이 산란함을 화두로 대치(對治)함으로써 마음의 공적(空寂)을 이룰 수가 있다. 여기서 공적이란 마음이 텅 비워지고 산란함이 사라져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로서 선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2단계에서는 일단 마음이 고요해진 선정 상태(空寂)에서 출발하는데, 이때도 역시 지속적인 화두를 참구하게 된다. 만약 이때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에 떨어진다.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있어서 어둡지 않고 환하게 밝아진 것을 ‘신령한 지혜(靈知)’라고 말한다.

이러한 화두 참구의 구조는 조사선의 수증구조와 동일한 지평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마 이래 중국 선종의 수증 방편의 핵심이 다름 아닌 회광반조(廻光返照)에 있기 때문에, 간화선에서 화두참구의 구조 역시 이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깨달아 알고(念起卽覺), 깨달으면 바로 없어진다(覺之卽無).”라고 하는 것이 조사선의 반조(返照)이다. 공안이나 화두에 의해 물음이 주어지고 이 물음에 의해 자심을 반조하는 형태로 수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반조하여 바로 대오(大悟)하면 생사가 타파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화두를 참구하여야 한다. 다만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지속적으로 참구하게 하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는 언구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기본으로 전제되어진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혜선사가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 화두는 “있다는 구절(有句)과 없다는 구절(無句)이 마치 등나무가 나뭇가지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을 때에는 어떠한가?”라는 것이다. 공안의 일구(一句)인 화두를 의심하므로 해서 참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화두 참구의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항상 의심이 순일하게 지속되게 한다는 의미의 “시시제시(時時提撕)”이다. 곧 언제 어디서나 늘 화두의심이 현전하게 하여 “하루 24시의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끊어짐 없게 참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화두의 의정이 타파되는 그 순간까지 끊어짐이 없이 한결같이 이어져 가야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간화행자는 참구함에 오로지 화두의심에 전심전력할 뿐 분별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생각 생각에 간절히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지어 나가서 한 티끌의 망념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재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간화행자는 오로지 화두에 전념해야 할 뿐, 의식으로 분석하고 추리해서는 안 되며, 또 마음으로 이해하고 추측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분별망념을 화두일념으로 모아 마치 쥐가 쇠뿔의 덫에 들어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벽에 부딪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일체의 분별의식을 멈추고 오직 의심만 남게 하여 종국에 철저히 의단(疑團)으로서의 일념만이 역력(歷歷)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화두를 참구함에 온갖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결같이 간절하게 밀고나가야 한다. 간절하게 의정이 지속되어 마음의 길이 끊어지게 되면 조사의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한결같은 지속심이다. 이것을 “무간단(無間斷)”이라고 하는데 간단(間斷)이 없다는 것은 곧 “틈이 없다” 혹은 “끊어짐이 없다”는 말이니, 화두참구가 끊어짐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쳐야 한다. 옛사람들은 참선할 때 끊어짐 없이 참구하는 모양을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혹은 “닭이 알을 품을 때”에 비유해서 말하곤 한다.

무릇 참구하는 공안위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듯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듯 하며, 굶주린 자가 밥을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해야 하며, 어린 아이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투철히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참구함에 있어서 뜻대로 잘 되지 않는데 있다. “1년 참구하면 초참(初參)이요, 2년 참구하면 구참(久參)이요, 3년 참구하면 불참(不參)이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신심을 내어 조금 참구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지속심(持續心)을 잃어버리고 그만 퇴굴심(退屈心)을 내고 만다.

물러난다(退屈)는 의미는 보리심이 물러난다, 장원(長遠)한 마음이 물러난다, 정진하는 마음이 물러난다는 뜻으로, 부처님께 예배하기도 싫고, 선지식을 친견하기도 싫고, 도우(道友)를 가까이 하기도 싫고, 화두를 들기도 싫고, 그저 마음대로 방탕하고 싶은 마음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마음은 똑같다. 마음껏 놀고 싶고, 마음껏 편하고 싶고, 마음껏 먹고 싶고, 마음껏 자고 싶어, 이대로 살다 죽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퇴굴심이다. 지철선사는 이렇게 퇴굴심이 일어나는 것은 “용심이 너무 지나쳤거나 혹은 숙세의 업장은 깊고 선근이 미약한 탓”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때에는 불보살전에 나아가 간절하게 발로(發露)참회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참회하고 불보살이 도와주실 것을 기원하며 다시 용맹스럽게 화두를 들게 되면 망념이 마치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 사라지고 의정이 순일정념(純一淨念)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만약에 이와 같이 화두를 참구하는데 의정이 사라지고 화두가 잘 들려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혜선사는 이러한 때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생사대사(生死大事)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그 어떠한 화두라도 자신의 나고 죽는 문제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생사를 보는 것이야 말로 “생사화두(生死話頭)”를 참구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가장 큰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제기되어지는 것이 생사의 일이라면 생사화두가 현성공안이 되는 것이다. 대혜는 생사대사(生死大事)로 귀결되는 현성공안의 “생사가 겹치는 곳(生死交加)”에서 참구하여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옮겨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태어난 곳을 모르고 죽어 가는 곳을 몰라 의심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생사가 겹쳐지는 때(生死交加)이다. 이때를 당하여 반드시 생사가 겹쳐지는 곳을 향해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
화두를 하여도 화두가 되지 않고, 공부를 하여도 공부에 진전이 없을 때 물러나지 말고 더욱 용맹심을 내어 생사를 대적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생사가 겹쳐지는 곳(生死交加)”에서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넘어가야 한다.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심이 이어져 한 덩어리(打成一片)가 되니 털끝만치도 그 틈이 없게 되는 것이다. 흔들어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쫓아내도 쫓겨나지 아니하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늘 앞에 있되, 마치 물을 따라 흘러가는 배와 같아 전혀 손 쓸 데가 없는 바로 이때가 힘을 얻는 시절이다.

화두를 참구함에 화두 하는 자(能)와 화두 됨(所)이 하나가 되어 의정(疑情)이 타성일편(打成一片: 한 덩어리)이 되어야 한다. 즉 자신이 의심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의정이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 함에 힘을 덜게 된다. 화두참구에 힘을 덜고(省力) 힘을 얻으면(得力) 화두를 억지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지게 된다. 이것을 “자연화두(自然話頭)”라고 한다. 자연화두란 억지로 참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다만 바른 신심을 발해서 진력하는 마음 가운데 의심이 있으면 저절로 화두(自然話頭)가 현전하리라. 만약 용을 써서 화두를 들 때에는 공부에 힘을 얻지 못하리라.” 즉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지는 때가 되면 세월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자연화두로 간격 없이 깨어있는 상태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표현한다.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화두가 한결같아(話頭一如) 일체 번뇌망념을 여의어 고요한 상태를 적적(寂寂)이라 하고, 의정이 한결같이 지속되어 화두로 깨어있음이 성성(惺惺)의 경계이다. 이는 곧 적적하면서 성성하고(寂寂而惺惺), 성성하면서 적적한(惺惺而寂寂)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경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가(永嘉)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은 옳고 성성망상(惺惺妄想)은 그르며, 적적성성(寂寂惺惺)은 옳지만 적적무기(寂寂無記)는 그르다”고 말했다. 이미 고요한(寂寂) 가운데 멍하니 있는 상태(無記)를 용납하지 않고, 또렷한(惺惺) 가운데 어지러운 생각(亂想)을 일으키지 않으니 모든 망심이 어찌 일어나겠는가?

깨어있는 가운데 고요해야지 망상으로 산란함은 잘못된 것이며,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어야지 아무 생각 없음(無記)에 빠짐은 잘못된 것이다. 즉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고요하되 화두로 깨어있고, 화두일념으로 깨어있되 경계에 걸림이 없어 항상 고요한 순일무잡(純一無雜)의 상태로 화두함을 말한다. 화두를 함에 있어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상태가 유지 되지 않으면 혼침(昏沈), 도거(掉擧), 무기(無記)에 빠지기 쉽고, 또한 마군의 경계에 침범당하기 쉽다. 몽산덕이 역시 번뇌가 쉬어 고요함 가운데 화두가 현전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고요함(定) 가운데 반드시 화두가 현전해야 한다. 고요함(定)을 탐하여 화두를 놓치면 안 된다. 화두를 잊으면 공(空)에 떨어져 도리어 고요함이 미(迷)하게 된다. 고요함(定) 가운데서 힘을 얻기는 쉽다. 그러니 반드시 성성(惺惺)하여 어둡지 않아야 한다.

고요한 가운데 힘을 얻기는 쉬우나, 또한 그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혼침(昏沈)이나 무기(無記)에 떨어질 염려가 있다. 그래서 고요함 가운데(寂寂) 항상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몽산화상이 말한 “참선의 묘(妙)는 성성(惺惺)함에 있다”는 말의 의미이다. 사실 남종선의 “정혜등지(定慧等持)”의 사상에서 볼 때, 선정(禪定) 가운데 지혜(智慧)가 현전하고, 지혜가 현전하는 그것 역시 선정을 여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선가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화두참구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빈틈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모든 마음의 길이 끊어지는 화두삼매(話頭三昧)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하면 화두할 때 화두 함(能)과 화두 되어짐(所)이 하나 되어 주객(主客)과 능소(能所)가 끊어져 일여함이 화두삼매인 것이다. 즉 화두가 일여한 경계에 이르러 화두 하는 자도 없고(能空) 화두 함도 없으니(所空), 움직임(動)과 고요함(靜) 밝음(寤)과 어두움(寐)이 함께 공(空)하여 실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으며,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실은 움직임(動)도 없고 고요함(靜)도 없으며, 깨어있음(寤)도 없고 잠듦(寐)도 없는 화두삼매(話頭三昧)가 현전된다.


(이 논문은 필자의 저술인『간화정로』와『친절한 간화선』에서 그 일부를 발취하여 정리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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