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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의 획일화 현상과 짝퉁 불사(佛事) 문제
[49호] 2011년 11월 10일 (목) 윤범모 younbummo@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본고는 가람 불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이렇다. 20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불사라는 이름 아래, 현대 불교미술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불교적 조형품 가운데, 역사에 남을 걸작이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이다. 물론 이 같은 가치 평가를 위해서는 현대 시기의 불교 조형물 백서와 같은 자료집의 출간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태껏 불교조형물 시장은, 아니 불사 시장은 평가 없는 사업 위주의 질주만 강행해 왔다. 평가제도 없는 사업은 부실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일정 규모 이상의 불사는 반드시 사후 평가제도에 의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본다. 비평 없는 창작이 없듯, 역사에 남는 걸작은 역시 비평의 잣대를 통과한 작품들이다. 비평 부재는 창의성 부재와 직결된다. 오늘의 불교미술 혹은 불사 시장의 현실과 이어지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시기 불교 조형물 가운데 역사에 남을 작품은 과연 몇 %나 될까. 20%? 아니, 10%? 대답이 궁색해지는 부분이다. 백서 출판과 더불어 제도적 평가 장치의 신설을 촉구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필자는 그동안 여러 차례 현대판 불교미술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창의성과 시대정신 결여의 불사 현장을 강한 어조로 비판도 했다(졸저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 현암사, 2005; 졸고 〈현대불교미술의 시대미감과 창의성〉 《불교평론》 23호, 2005). 하지만 필자의 주장은 메아리 없는 소수의견으로 항상 묵살되어 씁쓸하게 했다.

그럼에도 여기서 한마디를 추가하고 싶다. 차라리 어설픈 짝퉁보다 폐허가 아름답다. 폐허의 법문은 감동을 자아낸다. 짝퉁은 자본의 사생아이다. 언제까지 오늘의 가람을 짝퉁과 창의성 부재의 ‘물건들’ 집산지로 놔둘 것인가.


2. 범종 불사의 현장, 과연 바람직한가

지난 반세기 동안 불사라는 이름으로 범람했던 분야는 건축물을 비롯 단청, 불상, 불화 그리고 범종 등이었다. 그 가운데 범종 불사는 한때 유행을 탔을 만큼 흥성했던 분야였다. 범종, 하기야 우리는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세계적 보물을 지니고 있는 민족이다. 신라 범종의 우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전통 계승이라는 말은 귀가 아프도록 들려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전국 도처에서 범종 불사라는 이름으로 종 만들기 유행이 거세게 불었다. 하지만 범종 불사의 현장을 대하는 필자의 심정은 정말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오늘의 범종 불사가 지니고 있는 두 가지의 문제점은 이렇다. 무엇보다 범종 제작기술의 낙후성이다. 그것은 완벽한 전통 방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기술에 의한 현대식도 아닌, 정말 애매한 절충식이었다. 차라리 현대의 범종은 현대식 기술에 의해 제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제작기술자도 보기 어려웠다. 한결같이 범종 회사들은 전통 방식의 제작임을 주장하고 있다. 전통 기술이라고? 이 부분, 정말 냉정한 검증이 필요하다. 두 번째 문제점, 그것은 양식의 문제이다. 범종 모델은 ‘무조건’ 신라 범종을 교과서로 삼고 있는 오늘의 관행이 과연 바람직한가. 현대사회의 범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공통점은 신라 범종의 복제였다. 신라 범종의 우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나, 현대 범종의 길은 따로 있다고 본다. 이 부분에서 창의성과 시대정신의 결여를 지적하게 한다. 그러니까 지난 반세기 동안 제작된 대한민국 시대의 범종은 ‘신라 범종의 짝퉁(?)’이었다는 것, 21세기 새로운 범종이기를 포기했다는 것, 이 같은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 물론 예외는 있으리라고 본다.

현재 법정에서는 범종 문제로 희한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웬 소송사건? 보도에 따르면, 현재 제조되고 있는 범종 기술이 전통적이냐, 아니냐 하는 싸움이다. 이름하여 문화재 복원이라면서 그 문화재가 과연 전통 기법으로 제작된 것인가, 아닌가.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의 새 종은 전통기법으로 제작한 범종인가, 아닌가. 불경스럽게 무슨 질문이 이런가.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음의 인용문은 소송 관련 신문기사이다. 사건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기사를 길게 인용하겠다.

문제는 이들 복원·복제종이 모두 현대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주철장 원광식(69) 씨는 2006년 낙산사 복원종을 제작하면서 종 모형(몸체)을 전통 방식에서 쓰는 밀랍 대신 주물용 왁스로 만들었고 주물사(거푸집을 만드는 모래)도 현대식 재료를 썼다. 원 씨가 1982년에 만든 상원사 동종(국보 36호) 복제종도 옛 방식대로 만들지 않아 무게가 원종보다 222㎏이 무겁다. 특히 원 씨가 각각 2006년과 2007년 만든 내소사·청룡사 복제종은 시방서에 ‘원형 복제에 가장 적합한 밀랍주조 공법’으로 적시돼 있으나 낙산사 동종을 만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됐다. 범종 전문제작업체인 A사도 2006년 통도사 동종을 복제하면서 종 모형 몸체를 현대식 소재인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로 만들고 주물사도 현대식 재료로 썼다. 5개의 국보·보물급 범종의 복원·복제종이 현대 방식으로 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기법이 사라진 탓이다. 정부는 2001년 전통적인 범종 제조 방식인 밀랍주조 기법을 재현했다면서 원광식(69) 씨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러나 범종 전문가들은 기술상 한계로 원씨가 전통 방식으로 제작할 수 있는 종은 최고 1m 높이밖에 안 되는 중·소형 범종이라고 보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청과 종 제작업체인 성종사가 펴낸 ‘낙산사 동종 복원 제작 보고서’ 등에 따르면 1980년 이후 복원·복제된 보물급 범종 5개 중에 상원사종을 제외한 4개 복제·복원 종에는 ‘세라믹 몰드 기법’ 또는 전통 방식인 밀랍주조 기법과 혼용하는 방식이 쓰였다. M16 소총 등 정밀기계 주조에 쓰인 세라믹 몰드 기법은 2000년대부터 종을 만드는 데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내화력이 좋은 세라믹(콜로이달)을 첨가해서 주물사를 만든다. 상원사종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도입된 주형절삭법(일명 ‘마와시’법)으로 만들어졌다.
범종은 설계→문양·용뉴 조각→거푸집 제작·조립→쇳물 거푸집 주입→거푸집 제거 과정을 거쳐 만든다. 이 과정에서 거푸집 제작 방식이 가장 중요하다. 거푸집 제작 방식에 따라 문양과 종소리가 달라진다. 전통 기법은 밀랍주조법과 회전주형절삭법이다. 밀랍주조법은 내형틀 위에 종의 형태를 밀랍으로 만든 뒤 흙과 섬유질 등으로 외형틀을 만든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내고, 그 공간에 쇳물을 주입하는 방법이다. 불상처럼 섬세한 문양 표현이 가능하고 종 두께가 일정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회전주형절삭법은 회전축을 이용해 내·외형 거푸집을 따로 만든 뒤 3등분한 외형틀을 내형틀에 덧씌우는 방법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종 제작 방식으로 대형 범종을 만들 수 있지만 우리 종과 같은 화려한 문양이 없고 가로와 세로띠로 구성된 선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소리도 밀랍기법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일부 전문가는 이 방식을 우리 고유 방식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전통 범종 제작 방식이 사라지면서 장인들은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로 종을 만들었다. 회전주형절삭법을 일부 이용하지만 주물사 등은 현대식 재료를 썼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자연경화수지를 주물사로 쓰는 ‘펩셋 기법’이 도입됐지만 청동의 강도가 약해져 소리가 좋지 못하다. 지금은 이를 개선한 ‘세라믹 몰드기법’이 쓰인다.
―〈세계일보〉 2011. 4. 25

밀랍 주조기법은 밀랍(벌집)과 쇠기름을 섞어 종의 모형을 만들고, 밀랍 모형 위에 흙물을 발라 두께를 올린 뒤 건조시킨 다음 열을 가해 내부의 밀랍을 녹여내는 방법으로 거푸집을 만드는 기법이다. 원 씨는 1990년대 말 ‘10여 년간의 독자 연구 끝에 사라졌던 밀랍 주조공법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 지난 2001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보유자가 된 후 2005년 산불로 녹아내린 강원도 양양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을 비롯해 부안 내소사 동종, 안성 청룡사 동종 등 보물급 범종 문화재 복원을 도맡았고 주요 사찰에도 범종 수십 개를 설치했다. 원 씨는 이날 시연을 하면서 “송진 30%, 밀랍 60%, 쇠기름 10%를 섞어서 밀랍을 만들었다”고 했다. 전날 이(*이완규) 씨는 “밀랍에 쇠기름을 섞으면 끈적거리는 젤(gel) 상태가 되어 범종 모형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원씨는 “쇠기름을 섞으면 초의 온도가 높아진다”고 반박했다. 원 씨는 이날 주물사를 거푸집에 매끄럽게 바르는 장면도 보여줬다. 이암(뻘돌)가루와 고운 모래, 숯가루, 전분 등을 섞어 만들었다고 했다. 2006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제작한 기록 책자 《주철장》에는 ‘뻘돌가루 33%, 고운 모래 33%, 진흙 33%의 비율로 조합한다’고 돼 있다. 전날 이씨는 “이 조합으로는 점성이 없어 거푸집이 굳지 않고 흘러내린다”고 시연해 보이면서 “실제로는 현대 기법인 세라믹을 사용해 종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원 씨는 “전분을 써서 주물사의 점성(끈기)을 높인 것”이라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주철장》 책자를 만들 때 기록한 사람이 잘못 쓴 것이지 내 기술은 한결같았다”고 했다. 전날 이 씨는 또 “범종 문양은 이암에 조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사실상 이암이 아닌 석고를 썼다”고 주장했다. 원 씨 측은 “이암을 물에 담갔다가 빼서 물러지면 조각이 잘 된다”며 쇠칼을 긁어서 조각을 재현했다. 이틀에 걸쳐 양측의 ‘시연’이 반복됐지만 ‘검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양측이 만들어놓은 원재료에 무엇을 섞어 놓았는지 과학적으로 전혀 검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양측이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주장을 ‘검증’한다며 시연을 했지만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공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학을 ‘말’로 푸는 상황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 원 씨는 그러나 보물급 범종을 전통 방식으로 제조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인정했다. “낙산사 동종 등 국가에서 주도한 보물급 범종 복원을 할 때는 이 전통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현대 공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찰에서 주문받은 10여 개 종은 크기가 작아 전통 기법으로 만들었지만 보물급 범종은 워낙 커서 전통 기법을 쓰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데 주어진 예산으로 불가능했다”는 게 원 씨의 설명이다. 원 씨가 전통 기술을 복원했다며 보유자로 지정됐는데도 정작 국가 복원사업에는 전통 기술을 쓰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문화재청은 “지정 당시의 기술을 생업에서 쓰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규정이 없다”며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만큼 방법을 고민하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1. 10. 27

국회 국정감사까지 올라간 범종 복원 문제, 게다가 특허 문제까지 연결되어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범종 제작 전문가에게 문의한바,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거대한 크레인이 없던 신라시대에 수십 톤의 범종을 어떻게 제작 운반했을까, 이 같은 의문은 신라 범종의 전통기법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결론은 범종을 걸 위치에 임시 거푸집을 가설하고, 왕릉의 봉분처럼 흙을 쌓아 올린 다음 주물 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 밀납기법이었고, 이 기술을 이완규는 특허청에 제출해서 밀납을 이용한 범종주조기법이라는 특허를 얻었다. 이에 범종 사업의 독점적 지위에 누리던 성종사 측에서 전통기법이 어떻게 특허의 대상이 되냐고 특허 무효 신청을 했다.

범종 주물 기술 문제의 재판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신라 범종의 전통기법 논쟁. 현대 기법을 사용하면 경비절감 등 편하게 제작할 수 있지만 올바른 종 복원과 거리가 멀다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밀납에 의한 거푸집 사용과 같은 전통기법이 아닐 때 제대로 된 종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전통적 거푸집을 사용해야 주물 속의 기포나 불순물을 위로 떠오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성덕대왕신종의 윗부분이 지저분하게 마무리된 것이다. 특히 종 꼭대기의 음통(혹은 만파식적) 부분은 주물 기법상 꼭 필요하다. 주물 기법상 그 원통은 가스 배출구이다. 그러니까 원통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다. 이 원통을 열어놓고 혹은 막아놓고 맥놀이 현상을 비교했을 때, 소리는 똑같다. 따라서 원통은 그동안 음통이라고 불렸던 것과 달리 사실 소리와 무관한 것이다.

신라종의 특성은 아름다운 소리에 있다. 종의 밖에서 소리를 들을 때와 안에서 들을 때, 종소리는 똑같다. 성덕대왕신종이나 상원사종의 모습은 마치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이다. 아래가 오므라지기 때문에 주물기법상 매우 어려운 형태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이런 모습을 선택하지 않았고, 한국도 시대가 내려오면서 수직으로 벌어졌다. 주물 기술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일반인은 신종의 비천상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4개 모두 각기 다르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발달한 현대 기법으로 종을 만들면 경비절감이나 편리성에서 장점이 있으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전통적 주물 기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 전통기법은 밀납주조 기법이다.

신라의 주물 기술, 종 만드는 기술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종은 돈벌이 수단일 뿐인가. 대종인 성덕대왕신종의 기술력은 가히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신라 사람은 어떻게 이 같은 기술을 개발하여 최고의 아름다운 걸작을 만들어 냈을까. 작가정신과 신앙심이 바탕을 이루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의 장인은 요즘 종 공장 사장과 달리 무엇보다 돈벌이를 먼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돈벌이로 종을 만들었다면 성덕대왕신종은 결코 불가능했을 터인데, 이 대목에서 현대인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지난번 가짜 국새 사건은 문화재 복원사업 혹은 전통에 먹칠을 하지 않았던가. 신라인과 같은 작가정신, 천직으로서 장인정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무튼 낙산사의 복원 범종은 전통 방식에 의한 제작이 아니라는 고백,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통문화재 복원사업 혹은 불사 시장의 재점검을 요구하는 사안이 아닐 수 없다.


3. 김해 정토원 ‘호미를 든 관음상’의 파격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화산 아래의 봉하마을, 그곳은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노 대통령은 퇴임과 동시에 청와대에서 고향인 봉하마을의 사저로 이주했다. 대통령은 고향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그러면서 생태마을의 꿈을 실현시키는 곳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봉하마을은 국민적 관심의 마을로 급부상했고, 이어 전국 각지에서 관광버스가 줄을 잇는 순례지로 꼽혔다. ‘바보 노무현’은 청와대 시절보다 퇴임 이후 인기를 더 얻는 듯 보였다. 2009년 5월 23일 새벽, 노무현은 마을 뒷산 봉화산의 부엉이바위에 올랐다. 그는 수행원을 시켜 봉화산 정토원의 선진규 원장(조계종 전국신도회장 역임, 〈불교신문〉 2009. 11. 25 참조)을 불렀고, 이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천년 가야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는 봉화산은 이렇게 하여 더욱 유명한 산이 되었다. 봉화산, 사실 봉화산은 노무현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불교도에게 강한 인상을 자아내게 하는 정토원이 있는 곳이다. 정토원은 1958년 동국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선진규가 백성욱 총장의 지원을 받아 농촌계몽운동 차원에서 고향 봉화산에 새롭게 일군 사찰이다. 나무 한 그루 없던 봉화산은 울창한 숲으로 변했지만, 정토원은 화재로 폐허가 되기도 했다. 선진규는 1983년 폐허의 절터에 천막을 치고 사찰 재건이라는 원력을 세웠다.

   

추가 봉안된 호미 관음상.

이 대목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바로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이다. 봉화산 정상에 조성된 관음보살입상은 1959년 31명의 불교학도가 4대 개발(심신, 사회, 경제, 사상)을 상징하는 뜻으로 관음보살의 손에 호미를 들게 했다. 호미를 든 관음보살! 이는 한국 불상조성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기록으로 남는 사례이다. 호미를 든 관음보살상! 호미는 노동을 상징하는 것. 전쟁 이후의 피폐했던 사회 상황을 집약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예시한 호미 든 관음보살상, 실로 현대 불교미술의 획기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호미 든 관음보살상은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풍화작용으로 마멸되는 아쉬움을 초래했다. 원형 인조석 대신 FRP 자재로 재차 조성했으나, 이 역시 태풍으로 무너지는 비운을 맞았다. 결국 관음상은 지난 2005년 석조 관음상으로 축대 포함 24척의 규모로 재탄생했다. 더불어 정토원은 2004년 대통령 탄생을 기리면서 세계 중심국가 건설을 기도하면서 호미 든 관음상의 원형을 대나무밭 아래에 봉안하기도 했다.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은 우아한 자태에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왼손은 들어 감로수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내려 호미를 들고 있다. 호미를 든 관음보살상, 이는 한국 불상 조성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시대상황을 집약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호미 관음상은 모범적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이 같은 창의성은 현대 불교미술 혹은 가람 경영에서 절실한 부분이다. 구태의연하게 과거에만 함몰되어 있는 불교계와 비교한다면,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믿어진다. 2009년 4월 호미 든 관음상 봉안 50주년 기념법회가 지관 총무원장 등 5백여 명이 참석하여 현장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관음상을 두고 노무현은 ‘방안에 있던 부처가 밖으로 나온 날’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금강신문〉 2009, 4, 21).


4. 창의성 넘치는 현대의 사리탑

사리 신앙은 곧 불탑 신앙으로 이어졌다. 사리를 봉안하는 가구물, 그것은 탑이다. 애초 진신사리를 위한 사리탑이었지만, 후세에 이르러 법신사리로 대체되면서 불탑 신앙과 더불어 불탑 건축은 줄을 이었다. 인도 산치대탑처럼 복발형의 탑은 중국에서 누각식 형태로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불탑은 건립하는 지역의 건축자재 생산과 직결되어 민족의 특색을 띠기도 했다. 하여 중국이 전탑의 나라라 하면, 일본은 목탑의 나라이고,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명명할 수 있다. 동북아 삼국이 흙, 돌, 나무라는 재료상의 특성을 각기 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 같은 불탑의 재료적 특색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양식의 특성도 보이고 있다.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조형물이 제각기 특색을 달리한다는 사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이다. 그러니까 시대가 변했는데 과거의 모습에만 매달리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조형물은 하나의 생명체와 같아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꿈틀거리면서 모습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불탑과 달리 승탑(부도) 형식도 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한마디로 강조할 것은 천편일률이라는 금기어, 조형물에서 획일화 현상은 절대적인 금지사항이다. 아무리 전통적인 승탑형식이 있다 해도 시대미감은 변하기 마련이다. 21세기에 살면서 신라 혹은 고려시대 양식을 답습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창의성의 비중을 강조하게 한다. 천편일률의 승탑 형식 속에서 파격을 이룬 대표적 사리탑의 실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예산 수덕사 만공사리탑, 해인사 성철사리탑, 해인사 일타사리탑의 경우가 그것이다.

수덕사 만공사리탑

   

만공사리탑 전면.

2011년 4월 필자는 문화재청의 요청으로 예산 수덕사 만공사리탑의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만공사리탑의 근대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였다. 필자는 만공사리탑의 조형적·역사적 의의를 들어 문화재로서의 ‘등록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뒤에 문화재청은 만공탑을 근대문화재로 공식 지정했다. 문화재청에 보고한 필자의 조사 보고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만공탑은 전통적 승탑(부도)형식에서 벗어나 현대적 감각으로 조성한 20세기 최초의 승탑 계열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만공탑은 팔각기둥 3개가 모여 보름달 같은 구체(球體)를 떠 받들고 있는 형상이다. 구체는 만공 스님(1871~1946)의 법호인 월면(月面)을 의미하며, 3개의 팔각기둥은 삼보(三寶)를, 팔각기단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높이 3.1m, 너비 3.76m). 도력이 높았던 고승의 정신세계를 단순한 구조로 집약했으며, 이 같은 단순미와 더불어 곡선과 직선의 조화를 통해 현대적 감각을 자아냈다. 이같은 조형성은 마치 현대 추상작품의 조형의지와 맥락을 함께할 정도로 선구적 사례로 꼽힌다.

   

만공사리탑 후면.

만공탑의 정면 면석은 한글로 ‘만공탑’이라고 각이 되어 있는바, 이 같은 한글 제자(題字)의 사례 역시 초유의 일로 파악된다. 한자(漢字)의 시대에 한글로, 그것도 근래의 컴퓨터 자체(字體)일 듯 현대감각을 살렸다는 점에서도 만공탑의 선진성을 확인하게 한다.

탑의 후면은 만공 스님의 ‘세계일화(世界一花)’ 같은 친필이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해방 직후 붓 대신 무궁화 꽃봉우리로 쓴 것(槿花筆)으로 알려져 눈길을 끈다. 세계일화는 그야말로 세계는 하나라는 뜻으로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도 적지 않다. 또 다른 친필 글씨로 ‘백초시불모(百艸是佛母)’ 같은 내용도 있어 탑의 건립 의미를 높여주기도 한다.  

만공탑은 만공스님의 사리탑에 해당하는 조형물이다. 사리탑이라 칭하지 않고 만공탑이라고 명명한 것은 수덕사 문중의 독특한 풍습에 기인한다. 덕숭산 수덕사 문중은 다비식에서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때문에 만공 사리탑의 경우,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공탑이 사리탑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만공탑을 제작한 작가는 만공 스님의 제자인 박중은 스님이다. 중은 스님은 출가 이전에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작가 출신으로 알려졌다. 수덕사 소장 방함록에 의하면 중은 스님은 늦게 출가한바, 1946년 37세의 나이로 선원(禪院) 안거(安居)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1950년 동안거까지 동참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수덕사에 전해 오는 구전에 의하면, 중은 스님은 6·25 전쟁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전쟁의 와중인 1·4 후퇴 당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수덕사박물관 정암 관장 전언). 중은 스님은 재주가 비상하고 박학다식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출가사문으로 수덕사에서 지낸 기간은 불과 5년 미만이었고, 특히 만공 스님 문하에서 지낸 기간은 큰스님 만년의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술학교 출신답게 중은 스님은 스승 만공스님의 정신을 획기적 조형물로 표현하는 진취성을 보여주었다.

만공탑이 보여준 창의성은 전통 사찰에서 하나의 범본(範本)이 되었다. 3대사찰의 하나인 해인사의 경우도 만공탑을 하나의 참고 선례로 삼았다. 20세기 한국이 낳은 고승 성철 스님의 사리탑을 봉안할 때이다(1998). 성철 사리탑은 현상공모를 실시한바, 작품의 성격은 모방이 아닌 전통의 계승, 청빈사상, 올곧은 수행정신의 표현, 우리 시대의 독창적 조형물 등으로 삼았다. 이 같은 정신은 뒤에 재일작가 최재은의 작품에 반영되어 시공되었다. 사리탑은 상륜부를 생략하고 커다란 구체를 반원형의 기단이 떠받치고 있는 매우 단순한 형상이었다.

   

성철사리탑.

현대작가가 사리탑을 설계했다는 자체부터 불교계는 물론 미술계에까지 화제에 올랐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건립 당시 사리탑의 상륜부 없음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사리탑 봉안을 주관했던 원택 스님은 이렇게 답변했다. “상륜부 하시지만 50~60년 전에 벌써 만공 큰스님의 부도탑에서 상륜부를 없앴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변하고 있는데 왜 옛것에만 매달려야 합니까?”(원택 지음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참조). 이로써 보면 현대식 성철사리탑 건립의 좋은 선례로 만공탑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같은 창의성과 현대화에의 의지는 성철 사리탑 바로 아래 건립한 일타 사리탑으로 이어지는 사례로도 발전되었다(2008).

일타 대종사 사리탑은 작은 규모의 단순 사각형 석물의 네 군데에 사자가 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새긴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현대조각을 전공한 작가(이영섭)에 의해 건립된 일타사리탑은 현대조형물로 손꼽힐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만공탑은 전통 사찰의 전통적 승탑(부도) 양식에서 벗어나 현대적 감각에 의한 새로운 사리탑 형식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는 종교성을 감안하면서도 현대적 조형성을 가미한 선구적 사례로도 역사적 평가를 할 만하다. 만공탑은 근대기 사찰 조형물로 가치가 높은바, 근대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하자가 없다고 평가된다.

1947년 해방정국이라는 어수선한 시국에 획기적인 사리탑이 탄생하였다는 의미는 매우 크다. 사각의 기단에 원형 탑신이라는 단순 구조는 획기적 조형의지의 발로였다. 만공 스님의 제자 가운데 미술학교 출신이라는 박중은의 역할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파격은 뒤에 다른 사리탑 건립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바로 해인사 성철 스님 사리탑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상륜부의 생략 등 현대적 조형성은 만공사리탑 정신과 맥락을 함께한다. 성철 스님 사리탑은 뒤에 같은 비림에 건립된 일타 대종사의 사리탑으로 연결된다. 조계종 전계대화상으로 41명의 가족이 출가했다는 특이한 예의 큰스님이다. 2008년 사리탑 제막식에 즈음하여 필자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사실을 주목하고 일타대종사(日陀大宗師) 사리탑의 의의에 대하여 아래처럼 생각한 바 있다.

해인사 일타사리탑

해인사 경내 일타 대종사 사리탑은 주목을 요한다. 큰스님은 계율(戒律) 정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비심을 실천한 승단(僧團)의 어른이었다. 해인사 주지, 은해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 전계대화상 등을 역임하시며 불교 발전에 헌신한 분이다. 율장(律藏)의 상징적 존재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계사(戒師)였다. 이러한 큰스님의 사리탑은 스님의 엄정한 분위기와 한 시대를 이끈 지도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일타 스님 사리탑의 작가는 석조각가 이영섭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영섭은 오랫동안 불교미술 연구에 매진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업을 추구해 왔다. 그는 고달사지(高達寺址) 부근에서 7년간 거주하면서, 고달사지 발굴과정을 지켜보며,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는 석조문화를 체감했다. 이 같은 연찬의 결과로 강화도에 건립한 설산당 원명 스님 부도탑이 있다. 이 부도탑은 전통을 감안하며 새롭게 시대미감을 가미한 작품이다.

   

해인사 일타사리탑.

일타 스님 사리탑은 단순구조이면서 법고창신의 정신을 담으려 했다. 무엇보다 석종형의 사리탑 양식에서 사각형을 기본으로 한 ‘우리 시대의 조형물’로 창작했다. 사각형의 탑신은 전통적인 선을 현대적 감성으로 단순화한 세련미를 바탕에 깔고 있다. 네 군데에 사자상을 배치했는데 이는 사실적 각법(刻法)을 억제한 형상으로 남아 있다. 이는 사자가 사각 안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때문에 형태가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구태의연한 양식화를 거부하려다 보니 문양도 전통적 용이라든가 연화문 대신 감각적인 현대 소재를 활용했다. 연화문은 사리함 속에 치장하여 외부에서는 볼 수 없다. 비석은 꽃구름으로 장식되어 아름답다. 일타 스님 사리탑은 불교미술의 새로운 범본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주목을 요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정과 망치를 들고 전 과정을 수작업(手作業)으로 마무리했다. 일반적인 예와 사뭇 다른 정성이다. 예술혼(藝術魂)보다 쉽게 작업하려는 대부분의 장인들은 기계를 들어 돌을 깎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조물에서 유연한 선과 그윽한 내면의 울림을 담지 못한다. 돌은 망치소리의 정성을 들으며 새로운 탄생의 생명성을 담보해준다.

일타 스님 사리탑은 전통성을 담보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조형품이다. 꾸미기보다는 담박한 고졸미(古拙美)를 추구한 격조 있는 미술품이기도 하다. 예전에 성철 큰스님의 사리탑을 20세기의 미술품으로 조성하여 찬탄을 받았던 해인사가 이번에 다시 박수를 받을 쾌거를 보여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일타 스님의 사리탑은 불교미술의 역사에 새롭게 기록될 명품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믿어진다.

사리탑 건립의 보수적 상황 속에서 만공, 성철, 일타 사리탑의 현대적 조형성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시대미감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획기적 사례에 해당한다. 이들 사리탑은 과거 사리탑의 단순 복제라는 창의성 결여의 행렬에서 벗어나 창의성을 앞세운 ‘현대 작품’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을 요한다고 믿어진다. 사리탑 건립에 따른 이 같은 창의성은 두고두고 상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정부에서 괜히 만공사리탑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역사성과 독창성이라는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사례에 해당한다.


5. 짝퉁 불사에서 창의성 기반의 국제무대로

한국불교계는 20세기 후반의 전쟁 폐허를 딛고, 이름도 좋은 불사라는 명목으로, 토목공사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전국 도처에서 불사라는 이름 아래 벌어졌던 많고도 많았던 공사, 과연 바람직한 불사였던가. 이 대목에서 의문 사항이 없지 않다. 바로 ‘불사’라는 단어는 ‘불교사업’의 약자, 그러니까 불교의 진리를 함양하기 위한 사업이라기보다 돈벌이 사업으로서의 불사는 없었던가, 반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한국 불교계에서 성행했던 불사는 과연 부처님의 말씀과 여법하게 이루어진 사업이었던가.

문제는 현대 한국 불교미술, 아니 사찰의 조형물이 과연 현대적 감성에 의한 창조물인가, 이런 의문을 제출하게 한다. 가혹하게 표현한다면, 20세기 한국의 불사(불교 조형사업) 시대는 짝퉁의 시대였다. 달리 표현한다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불사가 그만큼 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전통 수호라는 미명 아래 답습 혹은 과거 회귀에만 집중한 당연한 결과이다. 물론 전통문화의 계승 사업은 중요하다. 특히 전통미술의 기법 보존은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문화재 복원사업은 복원사업이고, 가람의 신축은 신축이다. 모든 불사를 획일화시켜 몰개성 일색으로 점철할 필요는 없다. 개성이 없는 사찰 조형물, 단지 옛것 흉내 내기의 경연장, 이것은 과거 불교미술의 짝퉁이 아닌가.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창의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창의성이 결여된 미술,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미술이 아니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이미 창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의성이 없는 작품은 진정한 의미의 작품이 아니다. 창작이 아닌 것은 짝퉁일 수밖에 없다. 20세기 한반도의 불사(시장)는 짝퉁의 시대였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출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재 복원사업과 가람 신축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모든 불사를 과거회귀의 원칙으로 획일화시킬 이유가 없다. 가람의 획일화 현상을 지적하고자 하는 필자의 충정을 이해했으면 좋겠다.(때문에 이 부분에서 전통성을 수호하고자 열악한 환경에서도 장인정신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는 장인들의 노고를 폄하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기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새 시대의 불교미술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석굴암이 8세기의 시대정신을 담았다면 21세기의 불교 조형물은 마땅히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여기서 역시 비중 있게 떠오르는 부분은 창의성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은 현대미술계와 전통미술계의 합작이다. 현대 작가의 현대적·국제적 감성을 수용한 창작성과 전통미술가의 전통성과 기법의 친절한 결합이다. 이 문제를 제도화하기 위해 조계종 종단 혹은 별도 기구의 구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불사’의 경우, ‘현대+전통’을 위한 제도적 자문을 제공하는 기구의 설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불사의 국제화를 추진할 때이다. 국제무대의 활동은 현대미술가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제 전통적 불교미술가들도 국제무대를 겨냥한 활동을 추진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정부와 불교계 그리고 미술계의 협력이 필요하다. 국내의 불사 시장에서 이제 국제무대로 진출을 도모할 때이다.

불사 아니 불교 조형물 조성, 이는 포교에도 매우 훌륭한 조력자가 된다. 현대사회는 감동을 요구하는 사회이다. 감동 산업이 급부상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달리 표현하면 스토리텔링 시대이다. 스토리가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스토리는 예술작품의 기둥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법문이라도 직설적 ‘강의 형식’보다 예술작품에 담아 전달하면 그 효과는 몇 배 이상 올라간다. 예술작품은 감동을 담는 훌륭한 그릇이다. 한국은 불교미술의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시대마다 창의성을 기본으로 한 걸작들이 즐비하다. 이 같은 진짜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껍데기의 형식에만 머물지 말고 내용으로 창의성을 담는다면,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은 배가된다.

하여 예술을 활용한 포교정책을 주장하고자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안한다면, 조계종 종단에 불교예술진흥원 같은 기구의 신설이다. 아니 불교계 사부대중이 동참하여 불교예술진흥 재단을 구성하여 운영한다면, 장단기 전망을 갖고 불교예술을 진흥시킨다면, 불교 교세 확장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아니 해외의 숱한 한류의 지지자들에게 감동을 안기는 한국불교의 진면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매년 각 장르마다 우수 작가를 선정하여 창작을 지원하고, 이들 창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관객과 독자와 즐겁게 만나는 마당을 상설화한다면, 불교예술의 면모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혹시 후원한 작품 가운데 ‘대박’이라도 터진다면, 투자액의 몇 배 이상 수익을 올리는 사업성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대박’ 영화 한 편이 주는 이득은 수천 대의 자동차 수출보다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어찌 외면만 할 수 있겠는가.

불교 소재를 기본으로 하여 영화, 오페라, 뮤지컬, 연극, 소설, 시, 미술품 전시 등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다면, 한국 불교의 위상은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스토리텔링 시대에 넘치고 넘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불교가 왜 이 부분을 활용하지 못할까.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다. 문화의 중심에 예술이 있다. 또 거기에 미술이 있고, 각종 조형물이 있다. 이 부분을 다시 보자는 것. 여태껏 불사라는 이름 아래 펼쳤던 불교 조형물 조성의 방향전환이 절실하다. 시대미감을 가미한 새로운 창작 정신이 중요하다.

불교미술의 짝퉁 시대, 이제 변혁을 요구하고 있는 시대이다. 짝퉁의 시대에서 창작의 시대로 진입하자, 우리 시대에 주어진 과제이다. 불사라는 이름의 과거 복제방식에서 이제 창작과 감동을 담는 새로운 조형활동의 시대로 진입해야 한다. 현대 불교미술은 감동을 안겨주는 창작물로 거듭나야 한다. 이는 포교의 차원에서도, 혹은 한류의 국제화 부분으로도 오늘의 불교미술 작가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과제이다.

 

윤범모 / 미술평론가. 가천대학교 미술대 교수.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문학박사), 뉴욕대 대학원 예술행정학과 수학, 사우스 플로리다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미술평론가 등단.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동악미술사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이다. 저서로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오대산 통신−아하! 절에 불상이 없네》 《화가 나혜석》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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