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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에 관한 불교적 관점
[49호] 2011년 11월 10일 (목) 이찬훈 bulidang@naver.com

1. 들어가는 말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의 하나는 사성제(四聖諦)이다. 이 중 고성제(苦聖諦)는 인생은 고통이라고 하는 깨달음이며 불교에서는 인생의 수많은 고통에 대해 얘기한다. 집성제(集聖諦)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지와 욕망으로 인한 집착이라는 깨달음이다. 멸성제(滅聖諦)는 고통을 극복한 열반의 상태가 존재하며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얘기이다. 도성제(道聖諦)는 고통을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여덟 가지의 올바른 실천 방법인 팔정도로 얘기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현실세계 속에 어떤 문제점과 고통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만약 현실세계가 아무런 문제나 고통 같은 것이 없는 극락(천국)이라면 종교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의 고통을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난 온전히 행복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종교인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다. 또한 종교에서는 현실세계의 고통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는가를 진단하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한다. 이처럼 모든 종교는 현실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여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사성제는 어떤 것보다도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구조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의 기본구조와 불교의 사성제에 비추어 봤을 때, 우선 중요한 점은 현실세계에는 어떠한 고통이 존재하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일이다. 모든 문제는 그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만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수없이 많은 고통과 그 원인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겪는 고통에는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고통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고통이 있다. 물론 모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은 분리할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는 일차적으로 그 자신의 무지나 욕망으로 인한 집착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과 그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운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중생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으로 얘기하는 병과 죽음 등을 예로 들어 보자.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노화로 인해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경우도 있고, 또 개인의 잘못된 생활습관 등으로 인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주변에 있는 핵 시설이라든지 환경오염 시설로 인해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경우처럼 그 개인의 책임과 무관한 사회적 요인에 의한 질병의 고통도 있다. 죽음도 수명이 다하여 죽는 자연사나 질병에 의한 사망처럼 개인적인 죽음도 있지만 전쟁과 같은 사회적인 요인에 의한 죽음도 있다. 이처럼 인간이 겪는 고통에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것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역시 이 두 차원 모두를 아우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오랫동안 개인적인 신앙과 깨달음이라는 차원에만 매몰된 채 사회적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사회적 차원의 고통을 낳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에 소홀했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불교계 내부의 자기반성을 통해 근래에 들어와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개인적 신앙의 차원을 넘어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불교의 깨달음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개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고통받는 인간의 궁극적 구원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여전히 턱없이 미흡한 것으로서 불교적 관점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그 대안을 어떻게 제시하고 실현해 나갈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구조와 그 기본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유 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관점에서 현대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그로 인한 사회적 고통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와 그에 기초한 산업문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 해결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에 관련된 일련의 글들을 발표해 왔다. 필자는 2001년 《불교평론》 9호에 발표한 〈불이사상과 미래문명〉이라는 글을 통해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산업문명이 막다른 위기상황으로 몰아갈 정도로 심각한 문제들을 낳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를 초래한 원인을 밝히고 현대사회와 문명에 대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불이사상(不二思想)’에서 찾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 시론적 성격의 글을 기초로 삼아 그 이후 졸저 《둘이 아닌 세상》이라는 저서에서 불이사상의 틀로 세계를 읽으면서 현대문명 전체의 방향을 돌려 보다 행복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전망을 나름대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예문서원, 2006)라는 저서를 통해서도 이와 관련된 여러 생각을 펼쳐 낸 바 있다.

위에서 얘기한 필자의 글들에서 이미 밝힌 바 있듯이 불이사상은 동서고금의 위대한 수많은 철학과 종교 사상들이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가장 분명하고 풍부하게 포함하고 또 표명하고 있는 것은 불교이다. 그래서 필자는 화엄사상을 필두로 한 수많은 불교사상에 들어 있는 불이사상을 근간으로 삼아 현대사회와 문명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필자 역시 한 사람의 ‘불교사회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사회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2006년 《오늘의 동양사상》에 실린 〈현대인의 삶과 깨달음-불교와 현대사회〉라는 글에서 현대사회 속에서 불교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고, 또 불교가 어떤 사회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하는가, 불교적 깨달음의 구현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필자 나름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거기서도 필자는 무엇보다도 불교적 관점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평가하고 또 그것을 변혁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야말로 불교가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그간 필자뿐만 아니라 여러 불교학자가 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밝혀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교계 전체에는 이러한 관점이 폭넓게 공유되어 불교도들의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시점에 마침 지난 2010년 《불교평론》 42호부터 45호에 걸쳐 ‘불교사회철학’과 ‘자유주의’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다시 한 번 불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논쟁이 벌어진 지 1년여가 된 이 시점에서 필자는 그간의 논쟁을 되짚어보면서 자유주의(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에 대해 불교도가 어떻게 인식하고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분명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이미 이루어진 논쟁에 관련된 글이기 때문에 기존의 논쟁에서 제기된 논지와 중복되는 부분도 있을 수밖에 없겠으나 필자 나름의 견해를 덧붙여보는 것은 앞선 논쟁이 던져준 문제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문제점

1) 맹목적 숭배와 옹호

민경국에 따르면 불교사회철학자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심각한 현대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을 신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 문화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는 오히려 ‘불교철학이 강력히 거부하고 있는 바로 그 자유주의 이념이야말로 인류의 번영의 해법’이다. 민경국은 자유주의를 주로 시장경제라는 경제학적 의미로 사용하면서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야말로 인류 번영의 해법이 되는 셈이다.

민경국이 자유주의(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지금까지 수많은 맹목적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이 되뇌어 왔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 한 가지는 ‘자유주의가 번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심지어 민경국은 다른 어떤 사회도 번영을 가져올 수 없으며 오직 자유주의(자본주의)만이 번영을 가져온다고 간주한다. 이것은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발달한 1800년대 이전까지 인류의 경제 수준은 거의 발전하지 않아 동물 수준과 다름없었으며 경제를 발전시켜 인류를 동물과 구분케 해 준 것은 자유주의(자본주의)였다고 하는 그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주의(자본주의)를 찬양하기 위해 자본주의 이전에도 인류는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동물과는 확연히 다른 높은 수준의 문명을 꽃피워 왔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까지도 왜곡하는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맹목적인 숭배는 눈물겨울 정도이다.
민경국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장점은 단순히 경제적인 번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경제적 번영은 인간의 수명, 건강, 여가, 교육의 수요 등 비물질적 번영도 가져다준다.”더 나아가 그것은 “사회적 갈등도 적게 하고 사회적 평화, 국제적 평화도 촉진한다.” 그러므로 요컨대 자유주의(자본주의)야말로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모든 측면에서 인류 번영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민경국이 자유주의(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이성 또는 지식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맡겨두어야지 인위적인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민경국은 전면적인 계획경제는 물론이고 가격 규제나 수량 규제 등 시장경제를 필요에 따라 규제하는 것조차도 모두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경제를 규제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부 수집하여 가공할 능력이 없으며, 그럼에도 그런 걸 시도하면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처럼 몰락할 수밖에 없다.

민경국이 보기에는 ‘시장을 구성하는 원칙만을 제대로 지킨다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자유주의(자본주의) 사회는 아무런 문제 없이 무한히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시장경제 아래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자유의 보장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에서 성장은 무한하다.”

자유주의(자본주의)를 무한히 신뢰하는 민경국은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그것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자유주의(자본주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간섭 탓으로 돌린다. 이를테면 그는 ‘환경위기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이도흠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환경문제의 하나인 ‘온난화는 문제가 아니라 추위와 더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정상적인 자연현상’이라는 식으로 문제 자체의 존재를 부정해 버린다. 또한 그는 ‘빈곤, 대량실업, 환경문제, 소득의 불평등, 경제위기 등, 좌파가 자유주의의 탓이라고 열거하는 모든 문제는 실제로는 자유주의 탓이 아니라 정부의 간섭주의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가 보기에는 금융위기도 자유시장에 간섭한 ‘정부의 시장 개입’ 탓이요, 빈부의 격차도 ‘분배 결과를 시정하는 정책으로 분배를 더 악화시키고 새로운 빈곤층을 야기한’ 탓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모든 것을 맡겨두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민경국은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열린사회에는 ‘연대감이나 이타심 도덕 같은 소규모 사회의 공동체 도덕’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는 그런 도덕을 설하기보다 “건설적인 담론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사실로 인정하고 이것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임 규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게임 규칙은 결국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유시장에서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민경국은 자신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와 다르며 ‘가짜 자유주의’와도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은 자유주의의 문제점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려고 애를 쓴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자유주의가 자유방임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에서 국가의 과제는 법과 질서의 유지, 재산권의 규정, 재산권 분쟁 해결, 계약의 준수 확립, 책임 원칙을 집행하는 과제, 경쟁 촉진, 통화 질서의 확립, 생활 능력이 없는 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찬양하면서 그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부정하면서 모든 것을 자유경쟁을 통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고 있다. 사실 앞에서 그가 자유주의에서 국가의 과제로 든 ‘법과 질서의 유지, 재산권의 규정, 재산권 분쟁 해결, 계약의 준수 확립, 책임 원칙을 집행하는 과제, 경쟁 촉진’ 등도 대체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통화 질서의 확립, 생활 능력이 없는 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 같은 것은 어쩌면 시장경제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한 국가의 간섭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시장에 대한 일체의 간섭을 배제하는 그의 입장과 심각한 모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가짜 자유주의’에 대한 언급은 민경국이 박병기의 글을 비판하는 가운데서 등장한다. 거기서 민경국은 박병기가 비판한 자유주의는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에 서 있는 자유주의로서 ‘가짜 자유주의’이며 자신의 자유주의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을 잇고 있는 ‘진짜 자유주의’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박병기의 비판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가 타자와 독립된 실체로서의 개인을 전제로 하는 개념으로 허구적이며 진정한 자유는 관계성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점, 그런 자유 개념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제를 어떠한 국가의 간섭도 없이 시장의 가격이라는 기제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는 시장 만능주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박병기의 자유주의 비판에 대해 민경국은 유럽의 서로 다른 계몽주의 전통에 서 있는 ‘가짜 자유주의’와 ‘진짜 자유주의’라는 현학적인 논의를 펼치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원자적 인간을 전제’로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진짜 자유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이에크의 주장을 인용한 선언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를 전제로 한 ‘진짜 자유주의’이기 때문에 그의 자유주의는 원자적 인간을 전제로 하는 ‘가짜 자유주의’와 달리 어떻게 인간관계를 고려하고 배려한다는 말인가? 사실 그의 자유주의에는 그런 배려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자유시장이요,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이며, 그것을 통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목적 숭배일 뿐이다. 그러므로 민경국의 자유주의는 박병기가 행한 자유주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며 박병기의 비판은 ‘번지수가 틀린 것’이 아니다.

2) 맹목적 숭배의 문제점

민경국이 대변하는 바와 같은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 속에 존재하는 엄청난 문제와 고통을 무시한 채 현실을 장밋빛으로 미화한다. 그것은 현실세계 속의 그 엄청난 문제와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은폐한다. 또한 그것은 문제와 고통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

자본주의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생산력의 증대와 경제적 성장을 가져온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민경국이 자유주의(자본주의)는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인간의 수명, 건강, 여가, 교육의 수요 등 비물질적 번영도 가져다준다’고 했던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은 그것이 열어 놓은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의 실현을 좌절시켜왔으며 그것이 초래한 번영에 못지않게 인류를 심각한 위기로까지 몰아넣는 문제와 극심한 고통도 동시에 초래했다는 것이다.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이 초래한 위기는 지구 생태계를 절멸의 위협에 빠트릴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라는 위기, 기아와 실업과 빈부격차, 폭력과 범죄, 전쟁, 인간 간의 극심한 소외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위기, 진정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인위적으로 조작된 선정적 욕망에 사로잡혀 허망한 소비주의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왜곡된 주체성의 추구라고 하는 인간 삶과 주체성의 위기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현대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각한 문제점과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가 가져온 눈앞의 물질적 풍요에 눈먼 자들은 그 대가인 환경 파괴로 이미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태계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한다. 지구 생태계가 환경오염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는 증거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도처에 널려 있다. 예컨대 온실가스의 증대가 초래한 지구 온난화 때문에 발생하는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한 고통을 우리는 주변에서 빈번하게 목격하고 있다. 또한 그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전 세계적인 현안으로 등장해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본 것처럼 ‘온난화는 문제가 아니라 추위와 더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정상적인 자연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의 단꿈에 취해 현실의 심각한 문제와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생태계 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물질적 풍요만 이루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생산력 지상주의, 성장 제일주의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력 지상주의, 성장 제일주의는 지금껏 자본주의가 추구해 온 것이었으며 아무런 규제 없이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극복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해서든 소비를 부추기고 생산력을 높여 최대의 이윤을 획득하려고만 한다. 그 때문에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소위 ‘돈이 되기만 하다면’ 귀중한 지구 자원의 낭비나 생태계의 파괴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고삐 풀린 자본주의는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민경국은 여전히 ‘시장경제 아래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없다’고 강변하면서 자유주의(자본주의)를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현대사회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와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자유주의(자본주의)가 발달한 이래 기아와 실업과 빈부격차, 폭력과 범죄, 전쟁, 인간 간의 소외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위기는 계속 심화되어 왔다. 물론 이런 사회적 문제들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사회적 문제들은 자본주의 사회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이전에도 전쟁은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한 이래 수없이 벌어졌고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많은 전쟁은 자원이나 시장을 둘러싼 쟁탈전으로서 자본주의 사회 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얘기하듯이 자본주의는 심각한 빈부격차를 초래하여 현대사회는 소수의 부유층과 다수의 빈곤층으로 나뉘어 대립이 격화되는 ‘20:80의 사회 또는 15:85’의 사회가 되었다. 또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살벌한 경쟁을 통해 오직 이윤 획득만을 꾀하는 냉정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극심한 인간 간의 소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된 사회 속에서는 극렬한 폭력과 잔인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벌어진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모든 사회적 문제들이 자본주의 사회체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민경국 같은 자유주의(자본주의) 예찬론자는 이러한 문제들이 자유주의(자본주의) 탓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초래한 빈부격차를 오히려 거꾸로 뒤집어 ‘분배 결과를 시정하는 정책으로 분배를 더 악화시키고 새로운 빈곤층을 야기한’ 탓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민경국은 18세기부터 자유주의(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달한 이래 인류는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해 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와 함께 초래된 현대사회의 모든 심각한 문제들은 자유주의(자본주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간섭 탓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모든 선은 자유주의 시장경제 덕분이요 모든 악은 그에 대한 간섭과 방해 탓이라는 참으로 편리한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주의(자본주의)가 활짝 꽃폈기 때문에 인류는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자유주의(자본주의)가 제대로 꽃피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주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현대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사회문제의 원인을 알 길이 없게 된다.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 속에 존재하는 엄청난 문제와 고통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다. 앞에서 보았듯이 민경국은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를 자유주의(자본주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간섭 탓이라고 진단한다. 그렇게 되면 문제의 해결책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것뿐이다. 민경국은 자유 시장경제에 간섭하려고 했던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케인스주의나 복지국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사회주의나 케인스주의나 복지국가의 이념 같은 것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느냐는 차치하더라도, 민경국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면 도무지 그런 이념들은 도저히 이해하기조차 곤란하다. 주지하듯이 그러한 이념들은 규제가 없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경제공황을 비롯한 심각한 경제 사회적 문제들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민경국의 관점에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그러한 경제·사회적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이념들은 이해가 불가능한 이념들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두는 것, 즉 시장에서의 무한정한 자유경쟁을 보장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만사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지금은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벌어져도 상관하지 말고 참고 기다려라. 계속해서 참다 보면 언젠가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이것이 현대사회의 문제와 고통에 대한 자유주의자 민경국의 처방전이다.


3.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불교적 성찰

앞에서 우리는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 속에 존재하는 문제와 고통을 무시하고, 그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려는 불교도라면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이런 맹목적 숭배에서 벗어나야 함이 너무나 분명하다.

불교도라면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중생이 겪는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고 그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는 어찌 보면 부족할 것 없는 왕자의 신분임에도 중생들이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끼고 공감했기 때문에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의 길을 찾아 제시할 수 있었다.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수많은 중생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의 출발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편중된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들의 편에만 서서는 현대사회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고통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동식물을 포함한 수많은 중생들의 고통, 기아와 실업과 빈부격차, 폭력과 범죄, 전쟁, 소외 등으로 인해 겪는 중생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불교적 이상의 실현은 출발해 나갈 수 있다.

불교도라면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사회를 이룩한 자유주의(자본주의) 이념이 포함하고 있는 논리와 가치라는 것을 뚜렷이 인식해야만 한다. 자유주의(자본주의) 이념은 두 가지 근본적인 가정을 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분리된 고립적인 이기적 존재라는 가정이다. 또 하나는 이기적인 인간들의 욕망에 따른 자유로운 경쟁에 맡겨두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번영과 행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은 나와 타자를 분리하여 나와 타자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내가 어떻게 타자를 누르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뿐이라는 분리와 경쟁, 정복과 지배의 논리를 내포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생태계의 위기, 사회적 위기, 인간 삶과 주체성의 위기)는 이러한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논리와 가치가 필연적으로 가져온 것이다.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두 가지 가정은 독단적인 가정일 뿐 사실이 아니며 불교의 가르침과도 정면으로 대립한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연기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 세상 만물은 상즉상입하는 불이적 관계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에 입각하면 독립적인 이기적 개인이라는 가정은 애초부터 잘못된 가정이다. 이런 불교적 관점에서는 만물의 연기적·불이적 관계를 무시한 채 고립적인 이기적 개인의 무한정한 욕망 추구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이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불교에서는 인간이 욕망과 탐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절제하고 통제해 나가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가르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절제하고 통제하기는커녕 그것을 마음대로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저절로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가정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도라면 현대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문제와 고통을 방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 길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맹목적 숭배자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시장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 관점에서 그것이 낳는 병폐를 극복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와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1) 성장 지상주의에 대한 성찰

불교적 관점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 속에 존재하는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를 여기서 모두 논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유주의(자본주의)가 자신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경제적 번영(경제적 성장과 발전)과 효율적인 경쟁 체제라는 문제만을 논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유례없는 생산력의 증대와 경제적 성장을 가져온 것은 틀림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는 문제와 극심한 고통도 함께 초래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무한정한 성장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또한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멸의 위협 앞에 놓여 있는 생태계의 파괴가 보여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둘로 분리하고 자연을 단지 착취와 이용의 대상으로만 삼아 추구해 왔던 성장제일주의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심화되어 온 사회적 관계와 인간 삶의 위기와 고통은 경제적 성장만이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인간, 나와 타자는 둘이 아니라는 불교의 연기와 불이사상의 관점에서 성장제일주의, 무한정한 경제적 성장의 추구에 반대해야 한다. 불교도라면 무분별한 개발, 무제한적인 성장 위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자연과의 조화와 모든 중생의 공생을 도모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모든 제도와 정책을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소련의 체르노빌과 최근 일본의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를 좋은 예로 삼을 수 있다. 단기적인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원전 개발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원전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냄으로써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원전 찬성론자들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급속도로 증대하는 에너지의 수요량을 충당하기 위한 다른 효율적 방법이 없다거나, 심지어는 원전이야말로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적 에너지라고 주장하기조차 한다. 그리고 시장에만 맡겨 놓으면 효율적인 이윤 획득의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원전 사업자들은 원전 개발을 악착같이 추구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런 논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여지없이 폭로해 주었다. 이 사고는 원전이 과연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인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생명을 해치고 다음 세대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할 드넓은 땅을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이것은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핵폐기물 때문에 피할 수 없다) 원전 개발 정책을 근본적으로 반성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환경문제에 상당히 선진적인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원전 개발을 중단하고 조기에 원전을 완전히 폐기하겠다는 정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건 내 일이 아니라면서 여전히 원전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 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다. 원전 개발 정책을 포기하고 원전의 가동을 중단한다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에너지를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마련할 수 없어 경제성장이 둔화되거나 경제가 위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 세대를 포함한 인류와 모든 생명체, 그리고 지구생태계 전체의 관점에서 우리는 원전 개발 정책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의 막대한 희생을 요구하는 경제성장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원전 개발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려는 사기업을 규제해서라도 경제성장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더뎌도 친환경적인 재생에너지를 개발해 나간다든가 경제 시스템과 삶의 방식 자체를 에너지를 적게 소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온 나라를 들쑤시며 전 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는 4대강 개발 사업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4대강 사업이 과연 경제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며 홍수 등의 자연재해를 막아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전문가가 문제를 제기한 바 있기에 여기서 다시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설령 4대강 개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효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과연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을 흘러오면서 수많은 생명의 젖줄 노릇을 해 온 4대강을 하루아침에 제멋대로 파헤치고 바꿔 버릴 권리를 도대체 누가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어느 정도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강이 가진 전통적·문화적·생태적 가치 등 수많은 경제외적 가치들을 희생해야만 할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자연을 제멋대로 변형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이기주의와 오만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연기와 불이의 관점에 서 있는 불교도라면 이런 개발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를 단호히 비판해야만 한다.

요컨대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와 고통은 경제적 성장이 덜 되어서, 물질적인 재화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는 이미 인류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물질들이 차고 넘친다. 한쪽에서는 부가 넘쳐나는데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이 문제다.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런 문제는 경제가 더 성장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한정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언제까지나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허황된 논리에 속아서는 안 된다. 무한정한 성장보다는 재화를 좀 더 효과적으로 분배하여 소외된 사람이 없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도록 사회제도와 정책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복지국가가 실패했다고 단언하는 것은 독단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복지사회를 이루려는 모든 노력들이 성공적일 수는 없으며, 이것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다. 그럼에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자유주의(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문제와 고통이 존재하는 한 그것을 극복하고 복지사회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고 또 계속되어야만 한다.

2) 경쟁제일주의에 대한 성찰

앞에서도 보았듯이 민경국 같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맹목적 숭배자들은 이기적인 개인들이 아무런 간섭 없이 무한경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번영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끝없는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촉구하는 자유주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거의 장악한 사회이다. 자유주의자들(신자유주의자들)은 경쟁을 통해서만 사회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경국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차원의 번영은 바로 이 경쟁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며, 경쟁을 통해 이룩한 경제성장은 ‘물질적 증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려의 윤리, 선행의 윤리, 관대함과 너그러움 같은 도덕을 증진시킨다’고 주장한다.
물론 경쟁은 성취 욕구를 자극해서 성장을 촉진하는 점이 있고,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으며 잘 활용한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경쟁의 방식이다. 자유주의(자본주의)자들이 주장하고 그에 따라 현재 우리 사회의 수많은 기관에서 행하고 있는 경쟁의 방식은 상대평가를 통한 무한경쟁의 방식이다. 이것은 상대평가를 통해 구성원들을 서로 끝없이 경쟁하도록 하고. 요구되는 수준을 점점 더 높임으로써 무한경쟁을 유도한다. 그런데 이런 경쟁 방식은 어떻게 해서든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쓰게 만들며, 구성원들 서로가 평화롭게 협력하고 상생하기보다는 승리의 전리품을 두고 끝없이 싸우게 하고, 더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해 쉴 새 없이 점점 더 빨리 달려가게 하기 때문에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필자가 몸담아 살고 있는 대학사회에서 행해지는 상대평가에 의한 무한경쟁의 예를 들어 보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따라 대부분의 대학에서도 상대적 교수업적 평가에 의한 연봉제나 성과급제, 그리고 승진제도 같은 무한경쟁 방식이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다. 상대적 교수업적 평가는 교수들의 연구, 교육, 봉사 활동 영역에서의 업적을 점수화하여 상대적인 등수를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든 교수를 점수에 따라 1등부터 꼴찌까지 일렬로 세울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연봉이나 승진 등에서 차등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상중하 식으로 나누어 상위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일정한 보상을 더 해주고, 하위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연봉 동결 또는 삭감이라든가 승진 누락 등의 징벌을 가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런 상대평가 방식 아래서 교수들은 어떻게 해서든 상위에 속하기 위해서 또는 적어도 하위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치열한 업적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필연적으로 하위 등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절대평가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예전에는 교수들이 몇 년간에 걸쳐 연구, 교육, 봉사 업적 부분에서 일정한 요구 기준을 넘어서기만 하면 징벌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평가 방식에서는 설령 모든 교수가 열심히 일해서 이전에 요구되던 기준 이상의 업적을 달성한다 해도 필연적으로 일정 수의 교수들은 하위 등급에 속하는 자로서 징벌을 당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들은 어떻게 해서든 업적 점수를 올려 하위 등급을 벗어나기 위해서(또는 상위 등급에 오르기 위해서) 기를 쓰게 된다.

언뜻 보면 이것은 교수들의 업적을 크게 향상시키는 효율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다한 문제점이 곧 드러난다. 상대평가 방식 아래서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당장 점수를 올릴 수 있고 점수를 올리기 쉬운 연구 등이 위주가 되고 점수를 올리기 어려운 힘든 연구 등은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창의적이고 오랜 공을 들여야 하는 연구와 같은 것은 점점 하기 어려워진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고 흥미 있어 하는 연구가 아니라 실적을 올리기 위한 각종 프로젝트의 수주와 수행에 열을 올린다. 심지어는 중복 게재, 자기 표절 등을 통해 실적을 부풀리는 온갖 편법까지도 횡행한다. 근래에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났던 일부 교수 출신 인사들의 연구 관련 불법 사례들도 이것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이 등수 경쟁을 벌이다 보니 현재 다행히 하위를 면했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바로 하위로 떨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멈춰 서거나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오직 점수를 올리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유를 갖고 나만의 장기적인 연구 계획을 세워 고집스럽게 추구해가는 학문의 길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연구하고 교육하고 봉사하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더 높은 점수를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야 하는 스트레스와 고통은 점점 더 쌓여만 간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촉망받는 학자였던 어떤 교수가 업무 과다와 스트레스로 자살이나 사망을 한 사건, 카이스트에서 아까운 여러 청춘이 자살을 한 사건 같은 것도 대학사회에 만연한 무한경쟁 논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이처럼 대학사회의 상대평가에 의한 무한경쟁 방식은 그 구성원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연구와 교육활동 등을 왜곡시키며, 결국 그 폐해는 우리 사회 전체에까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문제점은 상대평가에 의한 무한경쟁 방식만을 제일로 삼는 모든 사회에서 똑같이 일어난다.

경쟁을 하면서도 경쟁의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여 과도하지 않은 일정한 기준을 만족하기만 한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경쟁으로 인한 격차도 과도하게 크지 않으며, 경쟁에서 패배한 약자에게도 최소한의 보호와 함께 다시 재기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방식이어야 한다. 무한경쟁을 시켜 승자 독식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격차가 벌어지게 해놓고는 어쩌다 승리한 개인이 베푸는 자선을 두고 배려의 윤리, 선행의 윤리, 관대함과 너그러움 같은 도덕이 증진되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물론 그런 자선을 베푸는 개인을 비난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개인들은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애초에 삶을 피폐하게 만들며, 엄청난 빈부격차를 가져오고, 약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해 주지 않는 경쟁의 방식 자체이다.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의 무한경쟁이 낳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경쟁의 방식을 바꿔야 하며, 나아가 경쟁보다는 서로 공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협력의 방식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퍼뜨려 나가야 한다. 불교도라면 경쟁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 성장과 번영을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라는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경쟁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벗어나 모든 중생의 공생과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협력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4. 맺는 말

만물은 서로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기적·불이적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고립적인 개인들이 오직 이기적인 욕망만을 마음껏 추구하게 내버려 두어도 시장에 의해 저절로 모든 일이 해결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거라는 맹목적인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믿음은 애초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잘못된 믿음이다. 불교가 가르쳐주는 우주 속의 만물이 상호의존적인 연기적 관계, 상즉상입하는 불이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진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맹목적인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신앙이 올바를 리 없으며 불교적 관점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도 없다. 자신과 뗄 수 없이 연결된 타자를 배려하지 않고 잘못된 욕망의 추구를 절제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따라서만 행동하게 내버려 두면 모든 게 잘 되어나갈 거라는 믿음 역시 이미 현실에 의해 반증된 터무니없는 독단일 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연기성은 공동체적 소규모 집단에서나 불가피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모든 곳에서 존재하고 따라야 할 진리이자 규범이다. 불교도는 언제나 연기적·불이적 관점에서 나의 욕망, 나의 이득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나와 관련 있는 모든 존재를 고려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한 것처럼, 성장 제일주의, 경쟁 제일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모든 사회제도와 사회적 관행들을 고쳐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거대한 익명의 사회에서는 배려의 도덕적 욕구가 엷어지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서로 둘이 아님을 느끼며 사랑하고 배려하는 삶은 소규모 공동체에서야말로 상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쉬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서로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함께하는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작은 공동체들을 만들어 활성화하고 그런 공동체들이 함께 연대해 나가려는 노력들은 매우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규모가 큰 열려 있는 익명의 사회라서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일수록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연기적·불이적 인식을 규범으로 삼아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잘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규범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면 세상 만물이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이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욕망을 절제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노력이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불교의 연기적·불이적 깨달음에 기초하여 현대자본주의 사회와 문명 속에 존재하는 문제와 고통을 직시하고, 그러한 문제와 고통을 불러일으킨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에서 벗어나 사회제도와 관행,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꿔나가는 일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의 길이다. 그것은 “역사를 먼 과거로 되돌리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길이 아니라 고통과 위기에 처한 현대 문명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희망의 길이다.

 

이찬훈 / 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부산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문으로 〈칼 마르크스의 사회과학 방법에 관한 연구〉 〈욕망과 현대 대중문화〉 〈불이사상과 미래문명〉 〈선과 화엄사상 회통의 현대적 의미〉 등과 저서로 《상생의 철학》(공저), 《둘이 아닌 세상》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 옮긴 책으로 《사회적 실천, 자연, 그리고 변증법》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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