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현대 한국불교의 네 가지 병통

현대 한국 불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 또는 병폐로 흔히 ‘기복불교’ ‘문중불교’ ‘조폭불교’ ‘호국불교’를 든다. 물론 이런 표현을 불교계 내에서 내놓고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통상은 불교계에 대한 비난의 의미가 섞여 교계 바깥에서 얘기되고 있다. 필자가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기복불교’는 쉽게 말해 개인의 소원성취를 비는 것이 주된 신앙이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나 불안한 현실에서 안정된 삶을 희구하는 이들에게 기복은 너무나 간절한 현실문제이기에 어떠한 종교든 기복적 속성이 없을 수 없다. 가진 자는 가진 자 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건강한 자는 건강한 자 대로 병든 이는 병든 이 대로 저마다 간절한 세속적 욕망을 희구하는 행위는 지금껏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을 때 초월자나 절대자에게 의존하게 되고, 종교는 기복의 요람이 된다. 따라서 유독 불교에 대해서만 기복적 성격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억울한 측면이 있다.

더구나 인간의 바람에서 무엇을 기복이라 하고 무엇을 기복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지 그 구분이나 기준이 매우 어렵다. 약사여래 신앙이나 관음구세(觀音救世)의 신앙에서 보이듯 불교에는 중생의 근본 구제(종교적 깨침) 외에도 일상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방편들이 매우 많다. 중생에 대한 이타행의 다양한 방편과 중생의 절대자에 대한 다양한 기복이 상호 대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응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기복신앙을 배격하더라도 무엇을 기복이라 하고 무엇을 기복이 아니라고 할 것인지 의외로 쉽지 않다. 험한 산길을 마다치 않고 오르내리며 자손이 잘되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비는 할머니의 마음을 기복불교라고 몰아치기에는 그 간절함에 오히려 가슴 저미지 않던가. 일체중생의 기복 관념 그 자체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중생이니까!

사찰을 운영하는 스님들로서도 항변할 사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기복신앙은 포교의 초기 단계에서 일반 시민에게 손쉽게 접근하고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효과적 수단으로 기능한다. 신도와 ‘일상적 관계를 유지(신도 관리)’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다양한 욕망과 바람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도 있다. 사찰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기복의 성격이 짙은 ‘재 올리기’가 불가피한 경우도 많다.

문제는 그러한 기복적 요소를 과도하게 받아들여 불교의 근본정신마저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각종 ‘재’나 ‘○○기도’라는 명목으로 시주를 받는 데 열중하는 사찰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소위 ‘기도발이 잘 되는 사찰’들이 생기고, 이에 따라 불자들이 이 절에서 저 절로 옮겨 다니는 일도 적지 않다.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이다. ‘서원성취’의 종교가 아니라 ‘소원성취’의 종교로 불교를 변질시키고, 중생이 참된 불성을 깨치는 데 장애로 작용하는 한, 그러한 입장의 기복불교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버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곧 불교의 세속화와도 연결되기도 한다.

‘조폭불교’란 1950년대 ‘정화불사의 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정화불사란 일제의 종교 탄압과 통제 아래 ‘왜색화’되거나 타락한 불교계를 쇄신하고 불법을 여법하게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세속의 폭력배들을 정화불사에 끌어들임으로써 이른바 청정비구 조계종단의 탄생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에 오점을 남겼다. 게다가 ‘정화불사’의 물리적 행동대 역할을 한 폭력배들이 사찰에 눌러앉게 되어, 사찰분규에 조직폭력배가 연결되는 불상사가 끊이지 않았다.

‘정화’ 추진 과정도 불교계의 자정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비구측은 여러 차례 이승만 독재권력에 의존했다. 공권력에 의지했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의 정치논리가 불교개혁 속에 침투하는 결과를 빚었다. 불교계가 이승만 독재정권을 지지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조계종단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종조 논란마저 빚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불교계의 자정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그러한 폭력에 의존한 사찰분규는 줄어들고 그 업도 점쇠하고 있다 하겠다.

‘문중불교’는 쉽게 말해 인맥 또는 파벌불교이다. 본디 문중불교는 선종의 법맥이 조사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조사선’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조사의 인가를 전제로 한 법맥의 계승은 자연 인물 중심 또는 조사가 주석한 도량을 중심으로 재생산되었다. 깨달은 자에 의한 올바른 인도와 인가라는 ‘전등(傳燈)’의 전통 아래 중국 선종은 조사의 법맥을 중심으로 5가(家) 7종(宗)으로 찬란하게 개화했다. 이 과정에서 임제종의 간화선과 조동종의 묵조선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 선의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해 불교의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문중불교는 5가 7종처럼 자기 철학이 뚜렷한 가운데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의 문중불교가 불교를 풍부하게 하거나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기보다는 문중의 세력화라는 수단으로 변질해 오히려 부정적 역할을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문중불교는 깨달음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논쟁 속에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기왕에 형성된 인맥 구조와 총림불교의 재생산 구조에 안주하면서 교권에 대한 세력 다툼에 악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교계는 대체로 기복불교, 조폭불교, 문중불교를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로 여기는 분위기인 듯하다(실제 그 현실을 개혁하든 안 하든 간에). 그런데 ‘호국불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더 나아가 한국불교가 앞으로도 현양할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이를 ‘병통(病痛)’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호국불교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경우 불교계 내의 반발도 적지 않다. 요컨대 호국불교는 전통인가 병통인가의 논쟁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호국불교를 말하자면, 과거 박정희 시대 독재정권에 봉사한, 불교의 외피를 쓴 관제 안보 이데올로기이다.(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이데올로기는 불교를 해석하는 하나의 논리 즉 ‘호국불교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한국불교계는 ‘호국불교’라고 말하면서 한국불교의 기본 특성의 하나로 공식화하고 있다.) 종권에 눈먼 일부 권승이 독재정권과 야합해 기득권을 보장받기 위한 얄팍한 술수와 권력자의 종교 통제를 통한 지배 체제 유지 강화라는 이해가 맞물려 한국불교를 느닷없이 호국불교라는 안보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이다.

호국불교는 1970년대 이래 기독교의 비약적 성장과 사회적 활동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던 한국불교계의 콤플렉스와 현실에 대한 무기력함을 배경으로 저변화되었다. 불교계는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발생한 다양한 사회갈등과 독재정권의 억압 그리고 분단체제라는 구조적 구속성에 대해 어떠한 혜안이나 실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대신 불교계는 불교가 천 수백 년간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했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찬란한 전통으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받고자 했다. 현실 대신 과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러한 콤플렉스성 위안 위에서 일부 불교학자들이 호국불교론을 한국불교의 자랑스러운 기본 속성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요컨대 분단 구조에서 독재정권의 안보논리와 권승의 세속적 욕망과 불교계의 콤플렉스가 합작해 호국불교론이라는 체제이데올로기를 양산하거나 또는 수용, 선양함으로써 한국불교를 호도한 것이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나 사명대사가 의승을 조직해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나 그 역사적 의미를 폄하·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승려가 호국 행위에 나섰다는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더라도, 이를 호국불교로 명명해 독재체제를 옹호한 관제성 이데올로기로서 호국불교론과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호국불교로 명명해 관제 안보 이데올로기로 삼은 1970, 80년대의 한국불교의 흐름을 비판하자는 것이다. 더구나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을 내세워 불교 안에 호국이 교리화되어 있듯이 주장하면 더욱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수많은 승려들이 이적(異蹟)이나 도술(道術)을 부렸다고 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도술불교로 부르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적이나 도술과 관련된 내용이 팔만대장경에도 나오지만 팔만대장경에 나온다고 모두 부처님 근본 가르침과 동격으로 놓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호국삼부경 운운하며 이를 사성제·팔정도에 근본한 진리의 말씀과 동격으로 섞어버려서는 곤란하다. 그럼 호국불교란 무엇이며 문제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2. 전근대의 호국불교란 무엇인가

젊은 세대들이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의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호국불교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호국신앙[護國信仰] : 호국불교
한국 불교의 일관된 신앙으로, 숭신(崇信)으로 호국한다는 사상.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써 국가와 왕실(王室)의 번영을 생각하는 이른바 현세불교적 신앙에서 나왔다. 불교와 왕권은 이 호국신앙과 굳게 결부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역대 제왕들은 더욱 불교를 숭상하고 장려해 왔다. 이와 같은 신앙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우리의 정신계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이 왕조의 무궁함을 바라는 호국 기원에서 세워졌고, 문무왕(文武王)이 당병(唐兵)의 내침을 물리치고 백제·고구려의 옛 땅을 통합한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한 사실, 또한 전설에, 문무왕이 평소 지의법사(知義法師)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우리 나라를 수호하고 싶다”고 한 사실 등은 모두 이에서 연유한 사상이다.
이 같은 사상은 고려시대에도 일관되었는데, 사원(寺院)은 불교 자체를 위하기보다 국가를 위한 비보사원(裨補寺院)으로서 의의가 컸다. 고려 태조의 《십훈요(十訓要)》 제1조에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제불호위(諸佛護衛)의 힘에 의존한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문종(文宗) 때 불교의 법력(法力)에 의해 국가의 복리를 증진한다는 목적에서 흥왕사(興王寺)를 세운 것 등도 이 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또 외침을 막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한 것은 더욱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책(抑佛策)으로 불교의 발흥을 보지 못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승군(僧軍)의 활동은 모두 호국신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출전: 네이버백과사전)

한편 어느 고등학교 국사 시험에 호국불교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왔다. 제시문은 문무왕릉의 유래와 황룡사9층석탑 건립이었고 제시문과 관계없는 것을 보기에서 고르라는 것이었다. 보기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1. 신라는 업설과 미륵불 신앙을 주로 받아들였다.
2. 원광 법사는 신라의 화랑도에게 세속5계를 가르쳤다.
3.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 왕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붙였다.
4. 현종 때 70여 년에 걸쳐 경, 율, 논의 삼장으로 이뤄진 초조대장경이 제작되었다.

사전이나 국사 교과서에 나오듯이 호국불교는 한국불교의 매우 중요한 전통으로 서술되거나 가르쳐왔다. 구체적으로는 불교가 신라의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는 ‘세속5계’나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룡이 되었다는 설화, 거란과 몽고 침입 때의 대장경 조판과 승려 김인후 등의 대몽항전,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약 등을 제시하면서 불교가 국난 극복에 기여한 사실, 팔관회 등을 통해 왕과 귀족 그리고 백성들이 일체화되었다는 서술 등을 한국불교의 자랑스러운 호국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지금도 불교텔레비전을 보면 호국사찰을 자임하거나 호국사찰의 전통을 자랑하는 사찰 홍보 영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교과서를 통해 불교 그 자체보다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더 많이 배우고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호국불교는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에 박혀 있고 불교계 또한 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전근대에서 호국불교란 왕=국가라는 관념 속에서 파악되어야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즉 전근대의 불교는 왕을 중심으로 한 제도불교 또는 체제불교의 성격을 지녔으며, 이를 현대적 관념의 호국불교로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고 의미의 혼란이 발생한다. 삼국시대 이래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왕의 종교(불교)에 대한 태도(정책) 또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할 것들이 있다.

먼저 전근대란 왕이 곧 국가인 시대였기 때문에(그래서 왕조이다), 특정 종교가 포교되기 위해서는 왕의 공인이 필요했다. 종교의 자유라는 관념이 시대의 보편적 가치로 수용되기 전이므로 자칫하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또 보다 빠르고 보다 광범하게 포교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적·행정적 지원도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의 공인이 필요했다. 그것은 공인종교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그런데 개인 포교로는 국왕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전근대에는 어떤 종교이든 해외포교를 할 경우 대체로 자국 국왕의 사신(사절)의 자격(요샛말로 신임장을 얻어)을 얻어 방문국의 국왕을 만나 위로부터 왕의 신임을 받아 포교의 합법화와 신속화를 꾀하는 것이 상례였다. 순도(順道)가 전진의 왕 부견의 사신으로 고구려에 파견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두 번째로 아무리 세속적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 왕이라도 죽음이나 내세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종교라는 보완물을 통해 자신의 구원(그것은 숭고한 영적 가치이거나 아니면 세속적 가치의 영속화이거나 간에)을 희구할 수밖에 없었다. 왕 자신의 욕망에서도 종교는 절실한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왕의 욕망과 종교의 교리가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세 번째로는 왕의 입장에서는 어떤 종교를 공인하더라도 그 종교가 왕권 강화 또는 체제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거나 최소한 체제에 위협적이지 않아야 했다. 따라서 왕은 왕실이나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기능을 종교가 일정부분 담당해 줄 것을 요구했고, 종교는 이런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즉 체제에 일정하게 봉사함으로써 성속(聖俗)의 공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왕사니 국사니 승통이니 하는 것들도 한편으로는 불교의 신장을 보여주는 지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불교가 ‘체제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체제화 과정에서 ‘왕=국가’라는 관념은 ‘왕즉불(王卽佛)’이라는 과잉관념의 형태로 비약하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서 전륜성왕 관념을 차용하거나 미륵신앙을 차용하여 왕이 자신을 왕불(王佛)로 자처하면서 성속을 통섭하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만 우리 역사에서는 신정국가와 같은 극단적 형태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신교(信敎)의 자유’라는 관념이 희박했던 전근대 사회에서 종교가 국왕 또는 국가와 유착하는 것은 시대적 제약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었다. 신교의 자유가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상황, 국왕이나 권력자에 의해 포교가 제한되거나 박해마저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불교는 기득권층의 이해와 불교계의 호교론이 중세 수준에서 절충해서 존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제 양상을 자꾸 호국의 전통으로만 꿰맞추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앞서 네이버백과사전의 호국불교 설명은 전근대의 체제불교·제도불교의 주요 양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애국 또는 호국과는 별개의 성질이었다. 역사적으로 파악된 전근대 제도불교의 특성일 뿐인데 이것을 느닷없이 호국불교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여러 가지 혼란이 발생한다.

사실 호국불교는 불교의 교리나 근본정신과 거리가 멀다. 흔히 호국불교의 근본으로 받드는 호국삼부경(《인왕경》 《금광명경》 《법화경》) 또한 호국불교라는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경전의 본래 취지를 곡해할 위험이 있다. 호국삼부경의 내용은 왕권이 자의적으로 행사되어 불교(도)가 탄압을 받는다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인근 국가가 불교국가를 침범할 때 불교(도)를 지켜내려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편이 온당하다. 즉 호국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호법이라는 차원에서 논의되는 내용이다. 왕은 이것을 역으로 불교의 위력을 빌어 왕실과 국가의 안녕 보장으로 삼고자 하는 차원에서 호국삼부경을 중시했다. 불교계는 왕이 불교를 믿음으로써 공권력을 통해 불교의 존립을 보장받고자 하는 불안한 시대의 고민이 담겨 있다. 즉 불교가 위협받는 그런 시대가 오면 그런 경전이 주목받거나, 그런 내용을 경전에서 임의로 추출해 재구성하는 것일 뿐이다. 지배세력이나 왕실의 경우 호법이 아니라 호왕과 호국이라는 맥락에서 이 호국삼부경에 기대는 것이다.

《인왕경》이나 《금광명경》은 호법적 성격이 강하기에, 여기에는 불교의 근본 교의인 사성제나 팔정도나 삼법인과 같은 교리가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력을 지닌 명왕의 출현이나 주술과 비의(秘儀)가 횡행한다. 결국 호국삼부경이란 왕실의 입장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왕실 번영의 슬로건 아래 경전의 특정 내용만을 강조해 ‘도구화한 불교’로 파악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불교 또한 호법의 수단으로 일정하게 호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부동명왕을 하나의 전쟁 아이콘으로 상정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어찌 이것을 근본 교의와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대승불교의 근본경전인 법화경이 어찌 호국삼부경의 지위에 그치겠는가! 호국삼부경으로 동원된 것일 뿐이다.

호국불교를 대외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흔히 호국불교를 얘기할 때 호국불교를 주로 외침에 대한 국가 수호를 예로 들지만 사실 호국불교란 내치(內治)에도 적용된다. 국태민안 왕실 번영은 외침만이 아니라 내부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왕의 입장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내부로부터 위협 모두 해소해야 한다. 따라서 불교국가인 신라에서 왕실을 옹위하는 제도불교가 요샛말로 하면 애국불교요 호국불교인 셈이다. 이에 대해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왕실에 반기를 든 아래로부터 불교도의 움직임은 왕실의 입장에서는 배교이며 반역이기도 하다. 반호국 종교인 것이다.

호국의 개념이 적용되기 곤란한 경우도 많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에게 보낸 승려 도림[道琳]의 경우, 고구려 입장에서는 애국자이지만 백제의 입장에서는 스파이였다. 삼국시대는 첩보전이 횡행했고, 삼국 모두 불교국가인지라 승려들이 이러한 첩보전이나 심리전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것을 호국불교로 부르면 어색할 수밖에 없다.

흔히 원광의 세속5계를 대단한 양 칭송한다. 그러나 승려가 살생유택이란 말을 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원광이 전사공동체인 화랑 무리에게 준 세속5계란 불교의 당시 사회적 영향을 간접 판단하는 요소일 수 있어도 교리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속5계의 내용도 불교적이라기보다 유교적이다. 충군애국이라는 권력 담론이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기에 충효와 총력안보를 미명으로 유신독재를 강화한 박정희 세력에게 세속5계는 매우 유용한 것이어서 교과서에서 실제 이상으로 강조해 가르쳤다.

호국불교의 사례로 지목받는 고려의 팔관회, 백고좌회도 되짚어봐야 한다. 한마디로 팔관회는 전통 신앙적 요소와 불교가 결합한 국가 차원의 재 올리기이다. 국가의 기복 행위가 팔관회이다.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비는 범국민적 조찬기도회라고 할 팔관회에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재정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빌어주는 대가로 불교는 더욱 왕실과 유착되었다. 불교를 믿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믿었더라도 어떻게 믿었고 그 영향은 어떠했는가를 같이 보아야 한다. 호국적 성격이라고 무조건 긍정할 면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와 함께 고려 말 불교는 사회 혼란상에 휩쓸리기도 했으며, 그 혼란상을 부추기는 역할도 했다. 사원의 횡포와 승려의 타락은 제도불교가 지나치게 되면서 나타나는 병폐이다. 이 때문에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은 불교계의 타락상을 규탄하면서 배불숭유 정책을 내세웠다. 단순히 유교와 불교의 대결이기 이전에 제도불교, 어용불교, 권력화된 불교계가 빚은 피폐상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권력과 유착한 제도불교의 타락화가 있었기에 배불숭유의 논리도 먹혀들어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려 후기 불교계에 대해 비교적 후하게 서술하고 있다. 무신란 이후 등장한 불교의 쇄신운동(지눌), 팔만대장경 조판과 승려의 대몽항전 등이 그것이다. 정작 민중에게는 거대한 지주로서 고통을 준 사찰의 횡포나 타락 승려들의 폐해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신라 이래 천오백 년이나 이어온 불교국가가 왜 유교국가로 바뀌었는가를 충분히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게 호국했는데!

조선시대의 경우 호국불교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 또는 승병의 활약이다. 서산대사가 의승을 일으킨 것은 국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측면도 있고, 보우 화상의 죽음 이래 배불숭유의 질식할 분위기를 돌파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라는 추론도 할 수 있다. 아니면 서산의 충군애국 정신이 투철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 시기 의승군의 활약을 충군애국이라는 동기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서산대사는 물론 불교를 폄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산대사의 거병 동기는 선조의 부름에 응한 것이라는 형식을 띠긴 했지만,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수만의 인명이 죽어가는 기아와 살육의 아수라가 현실세계에 펼쳐진 데 따른 것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교리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일대종사인 서산대사가 전장에 나선 것을 어찌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체중생이 전쟁−그것도 침략전쟁의 참화에서− 아수라판이 되어 있는 그 현실에 대한 대비심(大悲心)이 근본 동기라 할 것이다. 이것을 호국불교로 좁게 규정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불교를 너무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충군애국을 근본이념으로 표방하는 유생의 거병과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불교 안에는 호국불교로 엉뚱하게 지칭된 제도불교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 불교의 흐름이 있었다. 선종 또한 그러한 흐름에서 존재했었다. ‘불심천자(佛心天子)’ 양무제와 달마의 만남 그리고 양무제의 질문에 대해 ‘일체무공덕(一切無功德)’이라고 한 달마의 대답은 불교가 체제옹호나 국왕의 욕망을 충족하는 종교이기를 거부하는 선의 자유로운 정신적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신은 호국불교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 중국의 어느 선승이 황제를 만나면서 신하의 예를 올리지 않아 황제가 이를 나무라자, 그 선승이 “허공이 국왕에게 인사를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한 예화도 새겨둘 만하다. 일본의 경우에는 민중 속에서 불교를 포교하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하려 한 흐름이 매우 강했다.

한국불교계 일각에서 말하는 민중불교 또한 제도화된 불교 밖에서 존재했다. 당대 민중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민중의 염원을 불교의 연결시켜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을 민중불교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민중불교는 지배자의 종교, 체제의 종교와 대립적 위치에 존재한다.

대내적인 모순이 격화한 조선 후기의 경우 제도불교의 바깥에서는 미륵신앙 등을 배경으로 한 민중결사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부 승려들은 왕실이나 중세 지배 질서와 대립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다. 이 경우 호국불교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지 난감하다. 당시 호국을 논하자면 국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호국을 대외항쟁사 속에서만 해석할 경우 불교는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편안하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같은 시기 현실의 중생의 고통을 보고 왕조마저 바꾸고자 한 불교는 과연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기존의 호국불교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쩌면 현대 한국불교가 내세운 호국불교도 그런 대외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정작 독재 치하라는 내부 모순에 대해서는 눈감았던 1970, 80년대의 한국불교계를 변호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 것은 아닐까.


3. 현대의 호국불교론-‘전통’이 아닌 ‘병통’

현대 한국불교계가 내세운 호국불교는 아마도 1950년대에 처음 그 용어가 등장해서 1970년대와 신군부 독재의 1980년대에 극성을 떨쳤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 왜 호국불교가 강조되었는가, 그리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사실 호국불교는 독재정권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 또는 종교의 외피를 쓴 안보 이데올로기이다. 삼국시대 원광의 세속오계나 대몽항쟁과 임란 승병 등은 박정희 시대 특히 유신체제에서 ‘호국불교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강조되었다. ‘북괴’가 호시탐탐 대한민국을 노리고 한반도 주변의 사대 강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충돌하는 위기의 한반도라는 상황을 강조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 종교도 호국의 이념에 서야 한다는 국가이데올로기 주입과 연결되는 것이 곧 호국불교였다.(불교계가 나라를 지킨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호국불교’라는 명칭을 만들고 독재권력의 유지수단으로 이데올로기화한 측면을 비판하는 것이다.)

화랑의 세속5계는 통일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고, 육사생도는 오늘 화랑으로 둔갑했다. 총력안보라는 미명 아래 종교마저 호국종교로 탈바꿈시켰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이 호국룡이 되었다는 사실은 마치 지금의 지도자(박정희)가 그러한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몽골란이나 임진왜란에서 승병의 활약은 마치 군관민(軍官民) 일체의 총력안보의 역사적 기원으로 취급되었다. 호국불교는 분단시대 총력안보와 장기독재를 유지하는 체제 이데올로기로서 과장되었다.

현대의 한국 호국불교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1975년 만들어진 ‘호국승군단’이었다. 본래 호국승군단이 창설되게 된 배경은 1975년도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고산이 승려들이 군대에 가지 않고 수도(修道) 생활을 잘할 수 있는 법을 만들려고 청와대로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여 논의한 결과 탄생했다.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신분제에 구속된 직역으로서 가혹한 노역에 시달렸던 조선시대에 이어 현대 국가에서조차 출가사문의 몸으로 병역 의무를 지게 된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호국승군단을 만들 것을 요구했고, 불교계는 1975년 12월 21일 조계사에서 승려와 신도 5,000여 명이 모여 발대식을 가졌다. 호국승군단은 17세 이상 60세 이하 승려들로 구성하였다. 특별한 사유 없이 불참한 이는 승적 박탈 또는 중벌을 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창단된 호국승군단은 사실 일반 군인과 큰 차이가 없었다. 종단의 중진 승려들은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병영에 입소해 사격훈련을 받았다. 승려들은 사찰에서 향토예비군으로 편성되어 예비군복을 입고 소총을 메고 문화재를 지키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유명 포교사들은 전국을 돌며 안보강연회를 열어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20세기에 되살아난 ‘항마군’이었다.

호국승군단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불교신문〉은 매호마다 신문 지상에 ‘과시하자 민족단결, 완수하자 유신과업’ 등 유신 구호를 싣고 사설 기사 등을 통해 유신헌법을 홍보하였다. 적어도 유신체제기에 불교계가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저항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체제 유지 기능을 하는 데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강화된 것이 호국불교였다.

국가와 학계에 의해 국사 교과서는 호국불교의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호국 전통과 역사를 기술하는 데 불교사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리하여 한국불교는 불교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기보다는, 한국 불교가 천 수백 년 전 이래부터 어떻게 외침을 막아내고 안보를 지켰는가 하는 안보불교의 애국적 전통이 교육을 통해 보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 뒤에 숨어서 한국 불교는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침묵하고 자신의 존재 근거를 중생과의 관계가 아니라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보장받고자 했다.

게다가 일부 권력에 눈먼 승려들이 종단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지원과 보장을 받기 위해 독재정권과 결탁할 때 호국불교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안보의식에 투철한 승려’라는 이미지 메이크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의 서의현 총무원장도 그런 전형의 한 명이었다. 그가 1986년 9월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호국불교를 “특정정권에 봉사하는 불교가 아닌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불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 그의 철학이 아니다.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려는 처세론적 발언이었다. 더구나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이라는 표현 자체도 승려답기보다는 “공무원”스럽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 정도 발언만 가지고 당시 언론은 ‘불교계의 폭탄선언’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불교의 위신은 추락한 상태였다.

반면 개신교는 도시산업선교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의 경제적 권익과 인간적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에 나서면서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항거했다. 가톨릭은 지오세나 가톨릭농민회 등을 만들어 노동청년과 농민청년들 속에서 활동했다. 각종 시국 사건에서 기독교의 활약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명동성당은 소외받은 자의 요람이요 민주화의 성지로 상징되었다. 그런 시기에 조계사는 사찰분규의 진원지로 명성을 떨쳤다. 1970,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불교계의 위상은 범기독교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다. 마치 3·1 민족해방운동 당시 33인 가운데 불교계의 비중과 같았다. 일제강점기 항일승려들의 존재를 고려하자면. 현대 한국 사회, 특히 1970, 80년대의 불교계의 민주화 세력은 너무나 빈약했다. 대신 국가와 유착한 호국불교만이 혼탁한 총무원장 선거와 맞물리면서 커져 갔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호국불교를 통해 불교와 국가를 연결했고, 불교계를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켰다. 불교계는 이를 순진하게도 자랑스러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안아버리고 말았다. 물론 호국불교의 내용을 만들어 낸 불교학자들도 본인들의 의도가 어떠했던 종교와 국가(또는 권력자)의 유착을 초래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결국 호국불교란 심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역대 독재자와 유착 또는 어용화한 불교계가 자신의 처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서 사용한, 어용불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런데 왜 한국불교는 이러한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는 호국불교를 버리지 못하고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삼는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아래 관리되었던 불교계(특히 종단 중앙)의 오래된 관변적 체질이 철저하게 청산되지 못한 것, 현대사회에 대한 구체적 실천 부재와 맞물린 불교의 콤플렉스 그리고 이러한 콤플렉스를 메워내려는 대안 모색 등이 화학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사실 호국불교는 일제 식민지 시기 천황에 충성하는 ‘황도불교(皇道佛敎)’와 본질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차이가 난다고 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 황도주의는 모든 종교를 ‘살아 있는 신’인 천황 아래 종속시켰다. 일제는 불교를 철저하게 체제내화시키고 권력 집행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박정희 정권도 집권 정도는 덜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호국불교는 황도불교의 기능적 속성을 닮아갔다. 천황 대신 박정희 대통령 등을 찬양했고, 총후보국(銃後報國) 대신 총력안보를 외쳤을 뿐이다. 호국불교를 ‘호박(護朴)불교(박정희를 호위하는 불교)’라고 비아냥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한국불교계가 친일불교의 내용과 형식을 자주적으로 청산했더라면, 그리고 그런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면 유신체제의 지탱 요소로서 기능하는 호국불교는 쉽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대 정화불사조차 사실 친일불교를 제대로 청산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종교를 철저하게 권력 아래 예속시켰다. 비록 항일 승려가 적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도불교 자체는 조선총독부의 본산제 아래 재편 종속되었다. 글을 좀 한다는 학승들이나 어용적인 본산 주지들을 내세워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성전(聖戰) 독려, 총후보국(銃後報國)을 위한 국방헌납, 전승기원 법회 등을 열면서 조선의 청년들에게 전쟁 참여를 권유했다. 친일 승려들은 승군도 의승도 아닌 ‘황군(皇軍)’으로 ‘순국사절(殉國死節)’ 할 것을 떠들기도 했다. 친일행위가 심각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불교계 인사는 54명이다. 개신교 51명, 천주교 7명, 천도교 29명에 비하면 그 수효는 수위에 달한다. 대체로 일제강점기의 조계종 본산 중앙조직과 각 본산을 중심을 한 황도불교는 반민족적·반불교적 속성을 지닌 어용불교, 관변불교였다.

결국 전근대의 체제불교야 그렇다 치더라도 일제강점기의 체제불교인 황도불교로 재편된 한국불교는 이러한 관변·어용적 전통과 유약성이 교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속성을 청산하는 것이 해방 후 불교계의 과제였다. 불교 내부의 비불교적 요소의 척결은 물론 불교를 매개로 이루어진 수많은 부끄러운 행적(친일의 죄업)을 함께 씻어냈어야 했다.

그런데 해방 후 한국불교계는 친일불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혹자는 1950년대의 정화불사를 왜색불교의 일소로 파악하고 이를 불교계의 친일청산으로 내세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화불사란 친일불교의 청산이 아니었다. 왜색불교라는 구호는 나왔지만 현실은 대처와 비구의 대결로 나아갔다. 청정비구가 이끄는 새로운 불교를 얘기했지, 정작 일제강점기 불교계가 저지른 친일 행위에 대한 반성도 그 책임을 지는 자도 없었다. 비구−대처라는 용어만이 두드러졌고, 이 과정에서 대처승의 축출 명분에 ‘왜색불교 일소’라는 용어가 동원된 것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천황의 만세와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한 종단 차원의 그 엄청난 친일 행위를 단순히 비구−대처의 문제로 치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일제강점기 체제와 영합해 구조적 친일을 한 불교계의 콤플렉스야말로 비구−대처의 대결을 애써 불교계의 친일청산으로 덮어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던가.
친일불교를 대처승의 문제로 치부함으로써 불교계가 안고 있는 ‘친일의 업’을 대처승에게만 전가하는 것도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백번을 양보해 불교계의 친일을 조계종과 무관한 타 종파나 축출된 대처승의 문제로 국한한다면, 불교계의 항일 또한 종단 차원에서 한 것은 아니기에 그 공로를 오로지 현 조계종단이 안고 가는 것도 부당하다는 논법도 가능하다.

사실 친일에 대해서는 한국의 어느 종교의 주류도 반성과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는 감추거나 외면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만 내세운다. 기득권을 쥔 세력이 흔히 취하는 태도이다. 기독교는 교단 차원의 수많은 친일 행위를 덮어둔 채 소수가 참가한 신사참배거부 운동만을 일제강점기 기독교의 일반적 양상인 양 내세운다. 천도교는 친일은 신파가 했고 구파는 항일을 했다고 내세워 신파에게 책임을 돌린다. 3·1운동을 기독교가 주도했는가 천도교가 주도했는가를 두고 벌이는 낯 간지러운 논쟁도 있다. 그 모든 종교가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함구한다. 반성, 참회, 회개, 회향의 용어가 무색해진다.

어찌 됐건 ‘청정비구’가 이끄는 불교를 표방하며 조계종이 등장했지만, 그 이후 청정비구란 말이 무색하게 터져 나온 종단 내 권력 투쟁이나 사학(私學) 분규보다 더 격렬한 사찰 분규가 이어졌다. 부처님의 근본 자리를 떠난 자리다툼과 이권다툼은 자연 불교 내부를 벗어나 공권력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공권력은 그 대가로 권력에 대한 충성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현대 한국불교가 그러한 비불교·반불교적인 욕망을 공권력으로부터 보장받는 것을 감추는 수단으로 호국불교가 또 활용된 것은 아닐까.

권력의 비호 속에 성장한 세력은 언제나 자신을 지켜줄 권력을 그리워한다. 호국불교를 내세워 정권 안정을 기한 독재자를 아직도 사모하는 이들이 불교계에 많다. 민중을 학살한 독재자 전두환을 백담사가 받아들인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전두환을 법당에 모셔 설법을 하게 한 일은 지나친 일이었다. 전국이 민주화의 물결로 요동치는데도 전국 사찰의 비구나 신도들이 전두환을 ‘친견’하려고 줄을 잇던 광경이 1980년대 말 불교계의 풍광이었다. 십 여년 전 사월초파일경 학생들과 함께 불국사를 방문했을 때 석가모니불 초상과 나란히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대형 초상을 동격으로 걸어놓고 영산회상을 펼치는 모습에서 호국불교의 망령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불국사는 중세 시대 왕의 원찰처럼 특정 권력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호국불교의 발가벗은 모습은 이런 것들이다. 부처님의 말씀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한편 호국불교는 현대 한국불교의 콤플렉스가 왜곡되게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한국불교는 찬란한 전통문화의 산실 또는 보고라는 민족문화사적 긍지와 호국불교라는 대외항쟁사적 공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자랑하곤 한다. 불교 사상이나 불교의 실천 그 자체를 통해 대중과 만나기보다 과거의 유산을 통해 불교를 설명하고 존재의 정당성을 확인받으려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도가 아닌 한국인들의 경우 의천의 천태종 사상이나 지눌의 돈오점수의 내용, 서산 대사의 사상은 모르고 임란 승병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부처님 말씀이나 불교의 근본 교리 대신 호국불교를 더 많이 아는 현실이다. 팔만대장경이나 다보탑이나 석가탑 또는 고려불화 등 불교예술은 높이 평가받으면서도 정작 불국사나 다보탑과 석가탑 등에 담긴 불교적 의미를 아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해보자.

부처님 말씀이나 불교사상보다는 정작 호국불교나 찬란한 전통문화라는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불교가 존립의 정당성을 얘기하는 현실이 문제라고 하겠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불교계가 내놓을 만한 현재의 자산이 무엇인가. 임제선은 중세에 등장한 것이니 현재의 창조물이 아니다. 내놓을 자산이 없을 때 너무 쉽게 타자에게 인정받고자 안주하고 싶은 게 혹시 호국불교는 아니었던가? ‘찬란한 전통’만을 얘기하면서 과거의 유산을 갉아먹고 있었던 1970, 80년대까지의 구습이 오늘날 변화하는 한국사회와 그와 파생되는 중생들의 고뇌를 파악하고 제도하는 역할을 소홀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만큼 불교계는 현재와 미래를 향한 자신감은 없단 말인가? 다시 호국불교를 전가의 보도로 들고 나와야 하는가? 현대 한국불교가 자신을 민족문화의 핵심 요소로서, 애국적 종교로서 내세울수록 정작 불교 본연의 문제의식은 그 뒤로 감춰져 버린다. 현실에 유약한 종교는 과거의 전통에 안주하기 마련이다.


4. 맺음말

중복되지만 간곡한 마음에서 말하고 싶다. 호국불교란 용어 자체가 본래 없던 신조어이다. 불교의 근본교리하고도 거리가 있으며, 한국불교의 핵심 특징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불교사를 왜곡할 수도 있다.

비판적 의미에서 보자면 호국불교는 전통사회(전근대사회)에서는 왕실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불교의 권력과의 유착관계에 다름 아니다. 왕이 곧 국가이며 국법이던 시대, 불법을 포교하기 위해서는 왕 또는 중앙 귀족의 동의와 지원은 불가피했다. 지역의 후원을 받을 경우 토착 유력자들의 후원이 필요하기도 했다. 단순한 재정적 후원만이 아니라 포교의 자유나 신변의 보장을 받기 위해서도 그러했고, 나아가 왕과 귀족을 움직일 경우 비약적으로 교세가 확장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한 시대에 불교는 여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왕실 또는 국가와 유착할 수밖에 없었고, 국가나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국태민안을 비는 국가적 제의를 주관했다. 나아가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서는 승군이 되어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을 호국불교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럼에도 호국불교란 이름으로 그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타당한지는 더욱 의문이 든다.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을 호국불교라는 용어를 붙여 고정된 실체이자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오히려 불교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장애가 된다.

호국불교론은 분단체제에서 독재정권의 도구로서 기능한 이데올로기이다. 보다 적나라하게 말해 유신체제기를 정점으로 한 종교의 외피를 쓴 안보 이데올로기이자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불교계 스스로가 최면에 빠져 만든 관제 어용불교 이데올로기이다. 호국불교란 말에 심취되어 군종법사가 군인에게 애국을 가르치러 가서는 곤란하다. 불교를 포교하러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인들의 마음속에 부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본연의 목적이다. 군종법사는 정훈장교와 전혀 다른 존재이다.

호국불교는 전통이 아니라 병통이다. 호국불교란 개념 자체도 문제가 매우 많으며 그것이 불교의 근본정신과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는 점에서, 호국불교의 전통을 강화할 때마다 불교 자신의 모습은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기복불교나 조폭불교와 달리 호국+불교의 조합어인 호국불교는 이제는 그 결합이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불교의 자연스런 일부로 재생산되면서 둘을 분리하거나 묶어서 비판하기도 버거워졌다. 무엇보다 승려와 신도가 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기고 호국불교를 빼버리면 무엇이 이 공백을 대신 메울 것인가 하는 당혹감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긍정성 속에 숨은 부정성을 파헤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호국불교가 사라진다고 신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말씀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호국불교를 부정하는 가운데 오히려 호국불교라는 용어 속에 갇혀 있던 보다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이다.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노숙인과 함께하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역사담당 교수. 저서로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1, 2(공저), 《우리민족해방운동사》(공저) 《영주독립운동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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