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종단 (1983~1984)]

1. 서론

1983년 여름 초입 신흥사에서 스님들 간에 물리적 충돌로 심각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새로 부임하려는 주지와 이를 막는 기존 주지 사이에 다툼이 오가다 벌어진 일이었다. 한국불교계에 폭력은 오래된 고질병이었다. 한국불교 중심부인 서울의 조계사는 승려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주 전장(戰場)이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정치적으로 악용한 10·27 법난에 대해 많은 불교신자들이 사건 당시 심정적 지지를 보낸 이유도 고질적인 종단 내부 폭력 때문이었다. 10·27 법난의 아픔이 채 가시기 전에 초유(初有)의 살인사건이 발생해 한국불교계와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충격이 컸던 만큼 이를 해결하는 방안도 예전에 없던 파격적이었다. 정쟁(政爭)의 당사자로 종단 운영을 책임지던 중진(重鎭)을 제외한 원로와 소장 그룹이 직접 나서 종단 운영을 대신했으며, 재가자들을 승단의 일원으로 포함시키는 가히 혁명적 개혁안이 나왔다.

1950년대 한국불교 과제는 정화(淨化)였다. 정화의 구체적 내용은 교단의 정체성 확보며 그 핵심은 청정독신 비구승이었다. 청정승가의 무소유 공동체를 지향하는 정화의 목표는 1983년 신흥사 사건 이후 2부승 주도의 승단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난다. 1970년대 말 조계사 개운사 분쟁과 10·27 법난으로 왜곡된 승려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이후 사찰 주지 인사를 둘러싼 폭력 다툼으로 인해 승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높았다. 승가 내에서는 현대식 교육을 받은 젊은 승려들이 종단 운영을 책임진 중진들의 행태에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직접 종단 운영을 책임지는 개혁적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재가자들과 활발한 교류와 사회과학 학습을 통해 종단운영에 이들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진보적 생각을 한다.

1983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한 비상종단은 가장 급진적인 개혁안을 내놓지만 종단권력에서 소외된 중진들의 공세와 급진적 개혁안에 대한 원로들의 거부감 그리고 의욕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험 부족, 군부가 장악한 정부의 방해 등으로 인해 좌초한다. 하지만 종단 운영에 나섰던 소장파들은 이후 사회민주화 운동, 불교자주화 등 불교의 대사회적 영역을 넓히는 데 공헌하면서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한다. 1994년 종단 개혁으로 다시 종단 운영의 전면에 등장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지금까지 20여 년 가까이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다.

이 글은 불교개혁운동사 중에서 1983~4년 비상종단 시기의 개혁안을 다룬다. 비상종단이 출범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신흥사 사건과 사건이 일어난 배경, 그리고 비상종단을 주도한 소장승려들의 특성, 비상종단에서 마련한 불교개혁안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분석했다. 끝으로 실패로 끝난 비상종단과 개혁안이 오늘날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비상종단 출범 배경

비상종단은 1983년 9월 5일부터 시작해서 1984년 8월 1일까지 활동했던 조계종의 임시중앙 권력 기관이다. 행정부 격인 총무원, 입법부 격인 중앙종회, 사법부 격인 호계원 기능을 모두 관장하던 혁명기관이었다. 비상종단은 1983년 6월 발생한 신흥사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조계종과 한국불교를 개편하기 위해 종단운영 책임자를 배제하고 원로와 소장 승려들이 주축이 돼 운영했다.

1)직접적 배경-신흥사 사태

비상종단이 출범한 직접적인 계기는 신흥사에서 벌어진 물리적 충돌 때문이다. 1983년 7월 11일 당시 황진경 총무원장은 신흥사 신임 주지로 혜법 스님을 임명했다. 혜법 스님은 은 신흥사와는 관련이 없는 인물인 데다 사찰 대중들의 반감이 컸다. 한 달간의 조정을 거쳤지만 여의치 않자 혜법 스님은 무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진입을 시도했다. 1983년 8월 6일 총무원의 임명을 받은 신흥사 신임 주지 혜법 스님이 부임을 반대하는 신흥사 스님들과 맞서는 과정에서 유혈난투극이 벌어지다 결국 스님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전에도 불국사 월정사 등에서 주지 인사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지만 사망자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가해자 피해자가 모두 스님이라는 데 종단과 사회의 충격은 특히 컸다. 신흥사 사건이 발생하자 종단 전체가 나서 대책수립에 나선다. 원로, 소장 측이 지도부 퇴진과 혁명적 개혁을 요구하는 반면 사건의 책임 당사자인 집행부와 종회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미온적 태도로 일관한다.

2) 간접배경-10·27 법난 이후 종단 난맥

종단을 비상사태로 몰아넣은 신흥사 사건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당시 언젠가는 일어날 사건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0·27 법난 이후 3년여간 이어온 종단의 불안정성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권력에 의한 10·27 법난 이후 비상종단 격인 정화중흥회의가 종단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를 통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종단의 고승, 중진들이 파렴치범으로 낙인 찍히면서 승려와 불교의 위신만 하락하고 권위가 상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화중흥회의가 물러난 뒤 1981년부터 1983년 여름 신흥사 사건 때까지 종단은 통합종단 후 가장 혼란한 시기로 기록된다. 잦은 총무원장의 교체, 사회적으로 떠들썩하게 만든 본사주지를 둘러싼 폭력 다툼이 이 시기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당시 종단의 혼란은 승려들의 자질보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종단 지도부의 능력 한계와 제도의 불비(不備)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1981년부터 1983년 12월 황진경 원장이 퇴진할 때까지 3년여간 모두 4명의 원장이 바뀌었다. 그중 2년을 채운 황 원장을 제외하면 2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3명이 바뀔 정도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유는 총무원장을 선출하는 제도에 있었다. 총무원장 중심제는 1980년 제17대 송월주 총무원장 시절에 처음 시작돼 정화중흥회의에서 확정, 실시된다. 통합종단 이후 20년간 실시하던 종정 중심제가 1970년대 말 심각한 분란의 요인으로 작용하다 종정 대신 총무원장이 권력의 중심을 차지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종단 권력을 차지했던 종정을 총무원장이 곧바로 대신하지는 못했다.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과두제(寡頭制)가 운영되었다.

1980년대 초반, 종단은 권력을 선출하는 합의된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종단 내 몇몇 실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사와 종단 운영이 좌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몇 재정이 양호한 사찰을 둘러싸고 불합리한 인사와 폭력이 자행되다 있을 수 없는 극단적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3)소장 개혁 주체-청년불교도연합

 

비상종단 출범의 시발이 된 조계사 전국승려대회(1983년 9월 5일).
비상종단을 주도한 세력은 청년불교도연합 소속 소장파 승려였다. 이들은 10·27 법난 이후 그들의 선배들과 달리 대중 속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주체는 중앙승가대학 졸업생들이었다. 1980년 10·27 법난 전에 개교한 중앙승가대학은 불교와 현대학문을 함께 수학하는 승가 중심 교육기관이었다. 이들은 10·27 이후 전국의 강원을 다니며 젊은 학인들을 규합, 1982년 6월 동국대, 중앙승가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운문사, 봉녕사 등 전국 강원 500여 명의 학인들이 모여 수련대회를 열고 전국학인승가연맹을 발족한다. 이들은 대학생불교도연합회 학생들을 지도할 전국법사단을 결성해 대학생 불자들과 연결된다. 당시 대학가에는 광주민주화 항쟁 이후 한국사회를 새롭게 분석하는 사회과학 학습 모임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중앙승가대학의 지도법사들은 사회과학으로 무장한 대학생들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 사회의식을 갖게 된다. 이들 소장파 승려와 청년 대학생들은 1983년 7월 17일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를 결성했다. 이들이 비상종단을 주도한다. 성향상 이들은 중진들이 주도하는 종단운영에 부정적이었으며 재가불자들을 깊이 신뢰하고 사회의식이 강했다. 이러한 특성은 비상종단 개혁안을 수립하는 데 그대로 투영된다.

 


3. 비상종단 활동

1) 비상종단 출범과 폐막-단계별 구분

1983년 9월 5일 조계사 승려대회를 통해 출범한 비상종단은 1984년 12월 총무원을 인수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쳐, 1984년 여름 제도개혁안을 발표할 때까지 강력한 개혁 조치를 시행한다. 하지만 제도개혁안이 성철 종정을 비롯한 종단 중진들로부터 반발을 사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전락, 급속하게 힘을 상실한다. 1984년 8월1일 해인사 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은 부정당하고 종헌 개정안도 모두 무효화된다. 실제 활동 기간이 8개월가량인 비상종단을 출범, 활동, 퇴조 3단계로 나눠 각 시기별 내용을 살펴본다.

(1) 1단계: 1983년 9월 5일 조계사 전국승려대회~1983년 12월 1일 황진경 원장 퇴진

1단계는 총무원과 종회 일부를 제외한 원로 반(反)황진경 원장 측 종회의원, 소장 승려들이 힘으로 황진경 총무원장의 집행부를 퇴진시키고 비상종단 운영을 결의해 이를 관철하기까지의 3개월간이다. 이 시기는 책임을 묻는 원로 소장 그룹과 퇴진을 거부하는 집행부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고 무력으로 청사를 점거하는 등 양측의 대립이 극심한 시기다.

(2) 2단계 1983년 12월1일 총무원 이관~1984년 7월5일 제도개혁 발표

2단계는 비상종단이 불교개혁을 위한 제도 개혁을 성안, 발표한 시기다. 처음에는 소장 승려들이 성철 종정을 비롯 원로회의의 전폭적 지지 속에서 파격적인 개혁안을 만들고 집행부도 젊은 엘리트 승려들이 직접 담당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단 분규의 당사자로 몰려 있던 종단 중진들이 세를 규합하며 비상종단을 위협한다. 특히 제도개혁에 대해 중진들의 반발이 심했다. 정확하게는 제도개혁 자체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권력에서 소외된 데 대한 불만으로 비상종단 자체를 뒤흔들기 위한 의도였다.

(3) 1984년 7월 14일 성철 종정 교시 발표~8월 1일 해인사 승려대회

비상종단이 거센 저항을 받고 해체되는 시기다. 젊은 승려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성철 종정이 비상종단이 8개월간 각고의 노력 끝에 마련한 종헌개정안을 부정하자 움츠렸던 중진들이 들고일어나 비상종단을 부정한다. 결국 비상종단은 많은 숙제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성철 종정은 7월 14일 비상종단운영회의가 통과시킨 새 종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교시와 함께 종정직을 사임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성철 종정은 종헌 개정안 중에 종단의 주체는 사부대중을 고수할 것, 교역자는 신도라는 점을 명시할 것, 상임위원회의 권한을 축소시킬 것, 비상대권을 설치할 것, 새 종단 임원진은 직접 선거할 것, 승려교육을 강화할 것 등을 반영토록 했다. 그러나 소장승려 중심의 비상종단 집행부 측은 일부분만을 수용하겠다고 하여 타협점을 찾지 못한 것이 종정 사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비상종단에 반발하는 세력은 1984년 8월 1일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1,500여 명이 참가한 해인사 승려대회에서는 비상종단에서 통과시킨 새 종헌을 무효화하고 비상종단 폐지를 결의하였다. 조계사를 접수한 이들은 제24대 총무원장으로 오녹원 스님을 선출하였다.

2) 비상종단 주요 개혁안 내용

(1) 3권분립 해체-화백회의 기능 상임위원회 설치

1980년대 이후 잦은 총무원장 교체와 갈등의 근원을 비상종단은 3권분립 제도에서 찾았다. 1950년대 정화 후 줄곧 종단은 대한민국 헌법체계를 딴 입법, 행정, 사법 3권분립을 종단권력 체제로 삼았다. 권력의 남용을 막고 권리 보장을 확보하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체제의 기본을 조계종단은 승단의 특성을 무시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비상종단은 이로 인해 상호 권력 간의 지나친 견제와 대립이 종단분규의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 아래 ‘권력 융화 기구’로 내놓은 제도가 상임위원회다. 종단 최고정책결정기관이라는 권한을 갖는 상임위원회는 비상종단이 가장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이 상임위원회에는 종회의원, 각 위원회 위원장들이 포함됐다. 지금으로 치면 총무원장을 비롯한 각 원장, 종회의장, 중앙종회의원 등이 모두 참여하는 합의 기구에 해당한다. 상임위원회 구성원은 21~31명의 교정회의 의원, 8명의 당연직 위원(교정회의 의장, 부의장, 총무원장, 부원장, 사정위원회위원장, 부위원장, 포교원장, 교육원장)이다.

교정회의는 중앙종회를 대신하는 입법기관이다. 종단입법권을 갖는 입법회의 구성원은 임기를 6년으로 하고 인원도 70~90명 선으로 기존 50여 명에서 대폭 늘였다. 현재 81명의 종회의원보다도 많다. 총무원장은 상임위원회에서 선출토록 했다.

상임위원회와 교정회의는 형식상은 결정기구와 입법기구로 나뉘지만 영역은 충돌한다. 상임위원회 구성원에 교정회의 의원 3분의 1가량이 참여하는데 이 숫자는 영향력을 가진 비중 있는 교정의원 대다수를 포함한다. 입법과 정책결정 기능 구분이 쉽지 않아 사실상의 권한을 상임위원회가 갖게 되는 구조다. 비상종단이 기능이 중첩되는 두 기구를 둔 것은 종단운영에 대중들의 참여를 넓히려는 데서 발생했다. 대중 참여폭 확대는 소장승려들을 염두에 둔 조치다. 실제 상임위원회에는 소장파 승려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비상종단 측은 이렇게 해명했다.

종도참여폭을 넓히는 데 주안점을 두다 보니 교정회의 구성 인원이 많아져 일관성과 전문성 결여 우려가 대두돼 그 보완책으로 상임위원회 제도를 채택했다. 상임위원회는 대체로 종단의 지도급 인사로 구성하게 된다. 다만 지금은 제도개혁 추진의 과도기 임으로 만부득이 뜻있는 젊은 층이 다소 참여하게 되겠지만 차후 종단이 정상화되면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될 것이다.

상임위원회 중심의 종단 운영은 제도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1960년대부터 종단중진회의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체계다. 1967년 종정 청담 스님이 경산 스님을 총무원장직에서 끌어내리려 할 때 종단중진회의를 구성해 종회를 압박한 일이 있었다. 중앙종회는 입법기구면서 총무원 견제기구이지만 견제가 본격화된 것은 조계사, 개운사 간 분쟁 때부터였다. 이전까지 종회는 입법기구도 견제기구 아닌 종단 협의체 성격이 더 강했다. 종회가 종단 협의기구에서 점차 견제 기능을 회복한 것은 종단 규모가 확대된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시대의 합리적인 발전 방향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최고 권력자를 선출하는 방식을 합리적으로 정하는 것이 종단 분쟁을 막는 길이었는데, 권력분산 해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2) 승려교육-교육 후 수계, 교육원 신설

승려 자질향상을 위한 방책으로 승가대학 졸업 후 승려 자격을 부여하고 기성 승려도 연수교육을 실시하며 연수교육을 법계와 연계해 종무 직책을 부여토록 했다. 이 방안들은 1994년 개혁회의에서 제도화해 지금 모두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스님들에게 모두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고 거소를 정하며 일정 정도의 활동비를 지급토록 한 점도 눈길을 끈다. 비상종단 측은 이 제도가 유랑잡승을 일소하고 승단의 질서 확립을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사찰 주지 다툼으로 나타난다고 본 비상종단은 노후 병약한 승려의 요양을 위한 요양수도원 운영과 복지기금 적립책을 제시했다. 이 제도 역시 실시 중이거나 준비 중에 있다. 이러한 승려들의 자질향상과 안정적인 활동 보장으로 이동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종단은 이를 담당할 기구로 교육원을 설치했다. 비상종단은 교육원을 총무원 산하에 별도 기구로 구성, 교육에 관한 제반 계획과 시행을 맡으며 전문가로 구성된 교육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3) 중간교역자-전법사 제도

전법사 제도는 비상종단의 가장 핵심적인 개혁안이며 비상종단의 발목을 잡은 제도이기도 하다. 개혁 주체세력들은 당시에 이미 출가자 수가 줄어들 것으로 보고 스님과 재가자 사이를 이어줄 전법사 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전법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할지, 종단 내 위상, 월급 지급 여부 등 세세한 규정은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상종단이 해체되면서 무산됐다. 분명한 것은 신도 교화와 포교 역할은 분명하게 부여됐다는 점이다. 신도 교화와 포교는 스님들이 맡고 있는 소임이다. 신도의 역할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전법사는 처음에 종헌에 구성원 조항에 포함됐었다. 종헌 제9조에 조계종은 승려와 전교사(남자는 전교사, 여자는 전교), 신도(청신사, 청신녀)로 구성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 조항이 승려의 한 구성원으로 오해를 받자 교역자를 별도 조문으로 독립시켰다.

전교사 자격은 아주 엄격했다. 적어도 승려 생활 10년 이상의 불교 경험과 지식을 요구했다. 전법사 자격 규정은 다음과 같다.

불교대학 또는 이에 준하는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상당기간 포교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사람,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불교의 수행과 교양을 쌓은 사람, 10년 이상 승려 생활을 경험하고 대교과를 이수한 사람.

현재 포교사단에 소속된 포교사들도 포교를 하지만 위치가 일반 재가신도로 규정되어 있다. 반면, 전법사는 교역자법에 규정된 종단의 정식 구성원이었다.

전법사 제도를 도입한 취지에는 사회의 유능한 인재를 확보해 포교에 활용한다는 적극적 배려 외에 기성 승려에 대한 불신도 내포돼 있었다. 비상종단은 1950년대 대처승을 축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정화운동에 비판적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계 안에서 노닐던 교육받은 많은 지식인을 슬프게도 정화 이념 때문에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역사적 비운을 겪게 되었다. 사람을 쓸 수 있도록 기르려면 몇십 년이 걸리는데,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채 혁신만 해놓으니 자연히 쓸 만한 인재의 고갈을 빚게 된 것은 불문가지. 궁여지책으로 64년에서야 인재 양성에 종단이 손을 썼지만 이미 실기하고 난 뒤였다. 60년대 70년대를 살면서 산업은 급진적으로 발달하고 사회 발전 속도 또한 급속해지는 시기에 이르렀는데, 사회발전 속도에 버금하는 불교발전을 유도할 엘리트 계층이 불교계에는 없었다.

다른 개혁안은 성안(成案)은 되었지만 비상종단 종헌 개정안이 승려대회에서 거부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반면 전법사 제도는 실제로 시행돼 2기까지 모집했다. 비상종단은 1984년 6월 제1기 전법사를 선발했다. 1기 선발 시험에는 300여 명이 응시해 98명을 선발했다. 7월 15일 조계사에서 제1기 전법사 품수식이 열렸다. 합격자 중에는 현직 판사, 대학교수 4명, 병원장 3명이 포함돼 있을 정도로 사회 엘리트들이 많이 지원했다. 2기에는 더 많은 사람이 응시했지만 비상종단이 막을 내리면서 중단됐다. 전법사 제도를 핵심으로 오늘날 재적 사찰제도와 비슷한 신도법 등 각종 개혁조치를 담은 종헌 개정안은 7월 통과됐지만 성철 스님이 이를 거부하고 종정직에서 사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비상종단은 급격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장 개혁적 조치며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전법사 제도가 비상종단의 발목을 잡았다. 전법사 제도는 6부중에 의한 종단 운영으로 언론에 포장되면서 정화 후퇴, 대처승 유입 등으로 오해를 사 비상종단의 최대 후원자였던 성철 종정이 종정에서 사퇴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4) 사찰 체계 개편-본산제도 폐지 및 사찰운영 공영화

비상종단이 출범한 직접적 계기가 주지 인사 문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찰 행정과 관련된 개혁을 비중 있게 취급했다. 비상종단 개혁안은 이 문제와 관련해 본 말사 제도 개편과 사찰공영화를 제시했다.
비상종단은 본 말사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구역에 따른 교무원을 두도록 했다. 본 말사 제도가 문중 파벌을 낳았다고 보았다.

종래의 교구본말사제는 일제의 한국불교 분할 통치정책상 만들어진 것으로 이것이 오늘날 문중파벌 조성의 핵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종단의 지방기구를 일반행정 단위로 재편함으로써 일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장기적으로는 문중의식을 배제함과 아울러 효율적인 종단운영에 이바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교무원은 행정구역에 따라 특별시, 직할시에 두고 시, 군, 구에는 교구를 두어 교무원은 총무원에서, 교구는 교무원에서 관할토록 했다. 본말사 제도가 문중 파벌을 낳았다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비상종단 측도 관련 사례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중앙정부, 광역시도, 기초자치단체로 구성된 국가 지방행정체계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찰의 독단적 폐쇄적 운영을 막기 위해 공영제를 도입했다. 사찰운영위원회를 조직, 재정의 합리화 공영화를 꾀하고자 했다. 이 외에 총림특별수도원, 직영사찰제도를 두었으며 인사분규를 막고 문중 중심주의를 막기 위해 주지 임기를 10년으로 대폭 연장했다.

(5) 신도법 제정

비상종단의 개혁안들은 모두 종헌에 담았다가 종헌이 부정당하면서 함께 사장된다. 하지만 딱 하나 살아남는 법이 있는데 바로 신도법이다. 신도법은 1984년 3월 6일 제3차 비상종단운영회의에서 통과 제정 공포됐다. 그 이전에 초대 종회에서 제정한 교도단체보호법이 있었지만 이는 신도단체에 관한 내용으로 신도의 의무 권리 교육 등을 담은 신도법과는 달랐다. 통합종단 출범 22년이 넘도록 종단 구성원의 한 축인 신도에 관한 법이 없는 상태로 지내오다 비상종단에서 신도법을 제정한 것이다. 비상종단에서 제정한 신도법은 이후 1993년 한 번 개정을 하고 1994년, 1999년 중요한 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상종단이 마련한 신도법의 주요 내용은 재적사찰제, 교육 후 신도자격 부여, 교무금 납부, 신도지도자 자격 규정, 그리고 신도 조직이다.

주목할 점은 신도의 정의다. 제4조는 신도에 대해 ‘이 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입교하고 종헌 종법과 제반 규정을 준수하며 신도로서의 각종 의무를 이행할 것을 다짐하며 신도교적부에 등록된 자를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현 신도법은 ‘삼귀의와 오계를 수지하고 삼보를 호지 하며 본종의 종지를 신수봉행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둘을 비교하면 제정 신도법이 훨씬 까다롭고 엄하게 신도 자격을 규정하고 있다.

신도로서 입문하는 과정은 3단계로 규정했다. 입교 전 종단에서 정한 바의 교과와 절차에 의해 불교인으로서의 신앙과 일상 생활에 지침이 될 예비교육을 받는 예비교육단계, 교육을 마치고 시험을 치러 합격한 후 선서와 5계 수계, 그리고 입교신고 의식 순이다. 모든 신도는 교무금을 납부토록 했는데 교무금은 모든 신도들이 일괄적으로 내는 기본교무금과 각자의 신심과 경제력에 따라 내는 자원교무금 두 가지가 있었다. 신도의 의무에는 법회참석, 교육, 종단유지, 봉사, 교무금 납부, 법규준수가 있는데 이중 1년에 최소 3명 이상을 종단에 입교시킬 포교의무가 있었다. 권리는 선거권 피선거권, 재적사찰과 종단 유지 운영 참여권, 종단시설 무료 이용권, 종단발전 제안권 등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종단운영에 깊이 참여토록 보장한 셈이다. 신심이 깊은 신도 간부는 두 단계로 구분, 35세 이상의 남녀 중에 남의 모범이 되는 자로 책임과 지도적 위치가 있는 신도를 원사라 칭했다. 45세 이상의 남자 신도는 거사, 여자 신도는 교화사로 칭호 했다. 모든 신도에게 해당하는 호칭은 아니고 신심, 지식, 경력, 교양, 덕행 등 여러 여건을 파악해 엄선토록 했다.

신도 조직은 기본 조직은 사암별로 하되 지역 직장 직능 단위 조직을 가능케했다. 신도로서 부처님과 종단, 사찰의 품위와 이익을 훼손하고 질서를 문란시킨 자는 절차와 법규에 의거 징계할 수 있었다.

제정 신도법은 신도 자격을 엄격하게 규정한 점과 종단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한 점이 특징이다.

비상종단에서 제정한 신도법은 이후 1993년 개정을 거친다. 신도법을 제정하고 비상종단을 이끈 지형 스님이 서의현 총무원장 시절 개정한 것이다. 두 신도법은 원사를 교무로 바꾸고, 신행 경력 30년 이상 신도를 장로신도로 호칭하는 등 일부 용어와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 것 빼고는 대부분 동일하지만 결정적으로 신도들의 종단운영 참여 등 권한을 전부 삭제했다는 점에서 제정 신도법보다 후퇴했다. 1994년 개혁종단에서 개정한 신도법 역시 신도권한을 복원 시키지 않았으며 신도자격 규정도 느슨해졌다.

(6) 불교사회화-사회 관련 위원회 설치 및 비구니 전담부서

비상종단은 종단의 사회적 기능을 강화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사회 관련 각종 기구를 신설하고 총무원에도 해당 부서를 신설했다. 또 비구니 전담 부서를 만들었다. 이러한 점들은 비상종단의 사회지향적이면서 개방된 모습을 나타낸다.

사회 관련 위원회 중에는 아직도 종단에 없는 조직이 많다. 사회관계위원회, 국제문제위원회, 청소년교화위원회, 사회교육개발연구위원회, 농어촌교학위원회, 사회복지위원회, 재정개발위원회, 여성인력개발위원회, 불교문화예술위원회, 홍보위원회가 비상종단이 종단 내에 설치한 위원회다. 대부분이 사회, 문화 관련 기능을 수행한다. 총무원 내에도 봉사실과 문화복지실을 두어 아동복리국, 청소년선도국, 문화국을 두었다. 조사통계국, 기획연구국도 보인다. 봉사실과 문화복지실은 비구니들이 부장과 국장으로 전담토록 했다. 비구니가 총무원 부장으로 임명된 것은 이보다 20년 뒤에 실행됐다.

(7)재정정책

각종 사회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재정 확보가 관건이다. 하지만 재정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은 눈에 띄는 점이 없다. 비상종단은 재정 공개를 통한 재원 확보와 교육 사회사업 투자만을 언급하고 있다. 수익사업 담당, 교무금 분담금 등의 관리를 맡는 종단재산관리 기구가 있다.


5. 결말-비상종단이 남긴 영향

비상종단은 8개월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던진 파장은 크고 넓었다.

첫째,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승·재가 연합체로 재가자와 역할을 분담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비상종단은 형식적으로는 스님들이 책임지고 종단을 운영하는 기존의 종단과 같았지만 지향하는 바는 재가자들을 주체로 끌어안는, 명실상부한 사부대중 공동체를 지향했다. 1994년 개혁회의에서도 재가 대표를 종회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재가단체의 주장이 나왔지만, 실제 반영되지는 않았다. 비상종단은 우수한 재가인력을 종단 구성원으로 확보해 종단에서 일정 정도 역할을 부여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전은 물론 그 이후 개혁과 확연히 구분된다. 특히 비상종단 관계자들이 예측한 것처럼 갈수록 출가자 수가 줄어드는 현실에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중간 단계에서 기존 승려들이 담당하던 포교, 교화, 사찰 종무행정 등의 역할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는 심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비상종단의 개혁안과 경험은 사장되지 않고 이후 한국불교의 중요한 자양분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비상종단은 실패했지만 그 주체세력은 이후 종단 운영의 일꾼으로 그리고 1980년대 중·후반 불교계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며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비상종단의 일천하고 중진을 배제한 독단적 운영은 10년 뒤 개혁회의를 운영하는 데 참고로 작용했다. 비상종단의 개혁안은 대부분 개혁회의에서 그대로 반영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한국불교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비상종단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은 실패한 개혁인 데다 일부 주역들이 그 뒤 보여준 부정적 행보 때문이다.

비상종단이 8개월 만에 좌초한 것은 급진적인 제도개혁안과 주체세력의 경험미숙 때문이었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된 것은 경험 미숙이었다. 이들의 경험 미숙은 두 가지 분야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중진들을 적대시하며 종단 운영에서 소외시킨 사실이다. 반대파를 최소화하지 못하고 중도적이며 우호적 인사까지 등을 돌리게 한 것은 중요한 실책이었다.

또 하나는 사회민주화 운동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점이다. 청년불교도연합에는 재야 세력과 학생운동권까지 망라돼 있었다. 사회정의를 표방한 5공 정권은 여론의 지탄을 받던 조계종을 혁신하는 비상종단 측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가 이들의 반정부 성향을 의심해 방해책을 구사한다.

급진적 제도개혁안은 사실 반대운동의 빌미에 불과했다. 개혁안은 성철 종정부터 원로회의의 인가를 받아 만들어졌다. 어느 순간 여론이 돌아서면서 제도가 명분이 된 것이다. 여론을 좌우한 것은 일간지였다. 외부 언론은 겉으로는 불교의 개혁과 청정성 회복을 주창하면서도 막상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면 종권탐착 세력으로 몰아 개혁을 방해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종단은 언론, 정보기관원 등 외부 권력에 취약했다.

전방위적 공격에 시달리던 비상종단은 결국 1984년 8월1일 해인사에서 열린 승려대회에서 거부당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지만 10년 뒤 개혁회의의 밑거름으로 작용,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 재가불자들의 영향이 커지고 신도 중심의 종단 운영이 정착되면 비상종단에서 시도했던 개혁안들은 다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박부영 / 불교신문 전략기획실장. 한국외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 역임. 저서로 《불교풍속고금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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