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말

한국불교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은 교단의 재건과 정화운동일 것이다. 불교는 한반도에 전래된 이후 고려조까지 1천 년 동안 국교(國敎)의 위상과 역할을 해왔으나, 고려 말기 승풍의 타락과 유교 이념을 앞세운 신흥사대부 세력이 조선을 개국하자 500년 동안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교단의 해산과 승려의 환속 및 도성출입금지, 사찰의 폐쇄 등과 같은 가혹한 탄압을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교는 명맥을 이어와 개화기에 다시 경허, 용성 선사와 같은 걸출한 스님들이 결사운동을 통하여 선원을 재건하고 수행종풍을 회복하여 불교중흥의 씨앗을 뿌렸다.

그런 까닭에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일본불교의 사상문화를 이식시키려 하거나 서양의 기독교 사상문화가 사회에 주된 흐름을 형성하여도 불교는 짧은 시간 안에 교단을 재건하고 국민의 정서와 문화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 글은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한 분기점을 이루었던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과 그 개혁적 성격을 앞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역사적 배경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현재적 시점에서 평가하고 과제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정화운동의 배경과 원인

1)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불교정책과 전통수호의 흐름

1954년 비구승들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불교정화운동은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던 모순이 표면화된 결과다.
그렇다면 당시 불교계의 모순은 무엇인가? 불교교단의 핵심이자 삼보의 하나인 승려의 구성에서 대처승이 다수이고, 교단과 사찰 운영의 주류였음이 문제였다. 불교의 계율이나 전통에서 ‘대처승(帶妻僧)’이라는 제도는 성립될 수 없는 이단이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직후 사찰령을 제정하여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각 본산별로 본말사법을 만들도록 강제한 뒤에 주지의 인사권과 재산처분권 등을 총독이 관장케 제도화하였다. 1926년 10월, 본말사법에 비구계 자격을 삭제하도록 종용하여 1929년까지 대부분의 본사가 이를 수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처자식을 가진 승려도 본말사의 주지가 될 수 있게 되자 사찰은 급속히 세속화되어 갔다. 주지의 조건에 비구 조항을 삭제하여 대처승도 주지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1920년대에 들어 한국불교계에 대처승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일제 말기에는 다수의 스님들이 대처화되었다.

그러자 당시 교계 일각에서는 이 대처승 제도에 반대하여 청정비구의 지계정신을 지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백용성 선사를 필두로 한 127명의 스님들이 1926년에 두 차례나 총독부에 대처 허용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이 건백서는 당시 〈동아일보〉(1926. 5. 19)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의 관심도 높았는데 기사의 요지는 이렇다.

취처육식은 ……불교 교지에 버스러진 일로 조선불교를 망케 할 장본이라 ……불교의 장래를 위하야 취처육식 등의 생활을 금하야 달라는 뜻의 장문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사찰이 대처승들의 생활공간이 되고 부인과 자식 등 부양가족이 생겨나자 필연적으로 경제 문제가 대두되었다. 자연 대처승들은 사찰 신도들의 시주금과 부속된 토지의 산물로 생계가 어렵자 사찰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거나 심지어 술과 고기를 팔고 기녀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1935년 경기도에서 ‘28개 사암을 조사한바 개운사, 신흥사 등 10개사에서 30호가 음식점을 경영하여 250여 명의 승려들이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대처승들의 타락에 대하여 만공 스님은 1936년 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주지회의에서 총독에게 이렇게 ‘할(喝)!’을 하였다.

일한 병합 이전에 우리 조선 사원 안에서 파계자에게는 뒤에 북을 울려 산문 밖으로 쫓아내어 우리 조선 승려들은 규모 있는 교단생활을 계승하여 불조의 혜명을 이어 왔습니다. 합병 이래로부터는 사찰령 등의 법령이 반포되고 또한 삼십일본말사의 사법이 인가된 후로 소위 주지들 전단이 감행되자 승풍이 문란되었으니 곧 취처하는 승려와 음주식육을 공공연히 하는 것을 공인화 되어 이때부터 조선승려들 전부가 파계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불제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법령인 계율이 지엄하니 이 율법에 의준하여 삼천 년이라는 장구한 동안에 교법을 계승하여 왔는데 일본불교도의 공공연하게 파계하는 영향을 받아 조선불교 승려들은 전부가 파계승이 되어 버렸으니 나는 이 책임이 전부 당국에서 이같이 불철저한 법령으로써 조선불교를 간섭한 데서 인유한 바라고 생각합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한 비구로 하여금 파계케 한 죄악은 삼아승지겁 동안 아비지옥을 간다’ 하였사오니 이 같은 칠천 명 승려로 하여금 일시에 파계케 한 공 이외에는 당국자에게 무슨 그리 대단한 업적이 있습니까?

당대의 선지식이 조선총독을 앞에 두고 일제의 정책이 한국불교를 어떻게 파계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하자 총독부는 서둘러 각 도지사에게 사찰정화 대책을 지시하였고, 각 도는 본산 주지들에게 ‘승려의 부녀 기타 가족을 사찰 내에 상주시키며 속인적 생활을 함은 조선 사찰의 승규에 적당치 않은바 금지할 것’ 등 주의사항을 시달했다. 이처럼 총독부까지 나서서 사찰의 세속화를 막아보려 애썼지만, 승려의 대처화가 확산될수록 사찰은 청정성을 잃어 가면서 타락상은 더욱 만연해 갔다.

이러한 타락은 광복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확산되던 대처승들의 양복 착용과 머리를 기르는 세속화 풍조는 점점 일반화되어 공식적인 교단 회의나 의식에서도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은 채 참석할 정도로 승풍의 쇠퇴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경찰 당국이 1947년과 1949년, 강력한 사찰 정화대책을 수립하기도 했다. 청정한 수행도량에서 대처승들이 가정생활과 호구지책으로 음주가무가 난무하는 유흥지로 타락해 가는 것에 대하여 일반 시민들의 비난 여론은 점증하였고 불교와 승려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 상황에서도 한편에서는, 부처님의 정법을 지켜가려는 치열한 정진이 사찰의 한 귀퉁이 선원(禪院)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899년 해인사에서 경허 선사를 중심으로 제창된 결사와 선원 재건운동은 영호남의 사찰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선승들이 육성되었는데 이들은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였다. 참선을 하는 선승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계율에 따라 청정 비구승으로 수행의 본분사에 매진하였다. 이들은 대처승들이 대다수인 사찰의 구석진 선방에서 오로지 참선에만 전념하면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자 하였는데, 일제의 억압이 심화될수록 비구승들은 대처승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어갔다.

일제강점기 동안 확산된 대처승제도로 말미암아 대처승이 된 주지들이 사찰을 책임지게 되자, 선원의 선승들은 청정 비구 전통을 지키면서도 점점 사찰 운영에서 배제되어 갔다. 그리하여 사찰은 자연스럽게 운영과 경제는 대처승 주지들이 맡고, 선원은 비구 선승들이 정진하는 공간으로 이원화되어 흔히 말하는 사판(事判)과 이판(理判)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찰 운영의 권한을 가진 대처승 주지들이 선원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선원의 비구승들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통치가 강화되자 전국의 뜻있는 비구 선승들은 사찰 선원 이외에 독자적인 공간 확보를 위해 1921년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을 건립하였다. 이 선학원은 일제 사찰령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寺)’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院)’자를 붙였다. 이후 광복 때까지 선승들의 거점이 되어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는 산실이 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교단 정화의 본산이 되었다.

이렇듯 일제하 대처승들이 주지를 맡아 사찰 운영의 전권을 행사하게 되자 부처님 당시부터 유래된 대중공의제는 파괴되고 청정 수행도량의 면모는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처승의 홀대와 경제적 곤궁 속에서도 선원과 비구 선승의 수는 꾸준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에는 58개 선원에 하안거 대중 5백40명, 동안거 대중 4백82명이 정진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선원 수가 50여 개를 넘고 선승들이 5백 명이 넘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즉 당시 선원에서 안거결제에 참가한 선승들은 대부분 비구·비구니였기 때문에 당시 전국 비구승·니의 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 말기 한국불교계에 비구승니 수는 최소 540명 이상이었던 것이 확실하고, 이들은 대처승에 비해 절대적으로 미약한 숫자였지만, 하안거와 동안거 기간 함께 정진할 정도로 수행력과 조직력을 갖춘 매우 정예화된 수행자들이었다.

2) 광복 이후 교단 개혁의 좌절과 농지개혁 대두

광복 이후 한국불교계의 과제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교단의 모순인 사찰령 폐지와 친일파, 대처승을 정화하면서 시대에 맞게 교단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교단 운영의 책임을 맡았던 지암 종무총장 집행부가 자진해서 물러나자 이를 인수한 집행부는 거의 대부분 대처승들이었다. 1945년 9월 서울 태고사(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출범한 집행부는 교단 이름을 ‘조선불교조계종’에서 ‘조선불교’로 바꾸고, 31본산제를 도 교무원제로 개혁하였다.
대부분 대처승이었던 교단 지도부는 일제강점기 교단의 근본 문제인 대처승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이들은 일본불교계가 남긴 적산(敵産) 사찰과 정당 활동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교단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청년불자들의 대중운동으로 나타났다.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도동맹, 조선불교혁신회, 불교여성총동맹 등의 개혁적인 단체들은 교단 지도부가 개혁에 미온적이자 연대를 꾀하며 교단 개혁을 압박하였다. 당시 불교개혁 세력은 교단혁신 즉 교단의 정화운동인 ‘교도제(敎徒制) 실시’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교도제란 ‘일제 잔재인 대처승을 일반 신도와 같은 교도로 하고 청정비구승만 승적을 부여하자’는 개혁안이었다.

또한 당시 선학원 쪽 선승들은 교단 집행부에 선승들의 교단 참여 보장, 중앙선원 확장, 지방선원 자치제 실시 등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비구선승들은 교단개혁 세력들과 연대를 모색하여 1946년 11월에 선학원에서 7개 단체가 연합하여 불교혁신총연맹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2월에는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을 발족했다. 선학원계 비구선승들이 참여한 혁신총연맹은 교단 집행부의 무능과 현실 안주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교단 개혁을 압박하였다.

교단 집행부에 대한 비판이 늘어나자 교단 간부들은 혁신총연맹을 좌익으로 매도하고 미군정 경찰의 탄압을 유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 경봉 스님과 석주 스님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혁신총연맹은 이에 반발하여 1947년 3월과 5월에 연달아 태고사에서 전국불교도대회를 개최하여 중앙교단 간부의 총사직과 교도제 실시를 위한 대중불교 실시안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교단 집행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혁신계는 1947년 5월에 불교도대회를 열어 총무원을 부정하고 조선불교총본원이라는 대안의 교단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혁신계의 총본원은 총무원과 미군정 경찰의 탄압, 그리고 핵심세력이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내려오지 않아 점점 위축되어 갔다.

그런 한편 깊은 산중에서는 시대 현실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고민하는 비구승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가야산 해인사였다. 광복 이후 선승들은 수행종풍을 진작하기 위해 총림(叢林) 설립을 간절히 교단에 건의하였다. 교단도 이 총림 설립에는 관심을 가지고 협조하였다. 1946년 10월 총무원 직속기구로 가야총림을 세웠다. 총림은 수행기간을 3년으로 해서 50명을 정원으로 추진하였다. 1947년 11월에 가야총림의 조실로 효봉 스님을 초빙하였는데, 동참 인원은 110명에 달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해인사의 총림 운영과 별개로 일단의 비구승들이 1947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로 공주규약을 정하고 수행에 전념하니 이것이 유명한 봉암사 결사이다. 이 결사를 처음 발의한 이는 성철, 청담, 자운, 보문 스님이었다. 이들은 칠성각과 불공와 천도재 등이 부처님 법에 어긋난다며 없애고, 일본풍의 가사와 장삼 등을 없애고 전통적인 가사와 장삼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숭유억불정책으로 천민의 위상으로 전락한 스님들의 위의를 세우기 위해 신도가 스님들에게 3배 하는 전통도 이때 만들어졌다. 일부 비구선승들이 규율이 너무 엄격하다며 떠나기도 했지만, 봉암사에서 제대로 결사 수행하고 있다는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1948년경에는 20~30명으로 늘었다.

봉암사 결사는 당시 불교계의 모순인 비구―대처 승려 문제와 이를 파생시킨 불법에 대한 혼란스러운 인식을 쇄신하고자 추진한 수행결사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조 이래 와해되었던 불법의 가치와 교단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사상적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결사를 계기로 조계종은 정체성을 정립하기 시작했고, 의례와 복식도 통일시켜 나갈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봉암사 결사도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결사 정신과 체험은 비구승들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새로운 수행 동력으로 확산되어 갔다.

봉암사 결사 이외에도 1947년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고불총림을 만들어 결사운동을 추진하였다. 고불총림 역시 전통 수행종풍을 회복하려는 결사운동이었다. 만암 스님은 총림의 법회와 의식에서 비구승은 정법승, 대처승은 호법중으로 구분하여 모이도록 하고 대처승을 현실적으로 당대까지 인정하여 점진적으로 정화하고자 하였다. 만암 스님은 실제로 1951년 교단의 제3대 교정에 취임하여 이러한 뜻을 교단적으로 추진하였다.

1950년 6·25전쟁은 한반도 전체는 물론이고 산사도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사찰이 전화로 불타고, 사찰의 문화유산도 소실되었다. 전쟁으로 교단의 행정력이 와해되어 이에 대한 집계조차 어려웠다. 6·25가 발발하자 교단 집행부는 부산 대각사로 이전하였다.

전쟁으로 국민의 경제적 곤란은 물론이지만, 사찰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대처승들의 처지는 더욱 곤궁한 것이었다. 사찰 경제가 어려워지자 선원에 양식을 대어 주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 사찰을 더욱 어렵게 만든 국가적인 사업이 바로 농지개혁조치였다. 1949년 이승만정권은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의 모든 농지는 경자유전의 원칙 아래 유상으로 몰수하여 유상으로 분배하는 국가 법령을 마련한 것이다. 이것은 대지주 농업 중심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기 위한 국가 정책이었다.

이로 인하여 전국 사찰은 대대로 전해온 방대한 농지 약 8백26만여 평을 하루아침에 몰수당하고, 별 가치도 없는 지가증권을 보상으로 받았다. 당시 사찰은 국보, 보물 등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면서 관리에 많은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또한, 신도 기반이 취약하여 경제적 기반은 전적으로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와 산림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농지개혁을 한다고 사찰 농지를 몰수하니 사찰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교단 집행부는 여기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에 1951년에 지암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어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서게 되었다. 지암 스님은 교단 차원의 사찰유지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대정부 요구사항을 정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하여 1952년 5월 7일, 총무원장 지암 스님과 김법린 국가고시위원장이 대통령 이승만을 면담하여 어느 정도 합의를 이뤄냈다. 당시 대통령은 불교계 요구사항에 대하여 사찰의 자경농은 부활시키고, 사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4월과 12월 국무회의에서 불교계를 지원하는 발언을 하였다. 특히 1953년 5월에는 ‘사찰을 보호 유지하자’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1953년 7월에 내무·문교·농림부 장관이 연명으로 사찰농지의 재사정을 통한 반환 조치를 시행하였다. 그 내용은 사찰 승려, 국보 및 천연기념물, 대웅전과 부속건물을 농토 보유 기준으로 정하여 토지를 반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사찰은 빼앗긴 농지를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는데, 그 규모는 몰수된 8백26만 평 중 자경농지로 확인된 2백31만 평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찰의 농지 5백95만여 평은 몰수당하여 배분될 수밖에 없었다.

농지개혁의 결과 사찰은 심각한 경제적 곤란에 직면하였다. 사찰의 자경농지로 되찾은 농지에서 나오는 도지로는 대처승과 그 가족들의 생계를 겨우 꾸릴 수 있어서, 선원에서 수행하는 선승들의 식량을 대주기가 점점 어려워져 갔다. 까닭에 선원의 비구승들은 이 문제를 더욱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부처님의 정법을 호지하고 수행을 통해 청정해야 할 도량이 대처승들의 가족 부양에 허덕대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정화운동의 전개과정

1) 교단의 자율적인 정화 논의와 무산

지금까지 살펴온 바와 같이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인 승려의 대처 문제를 개혁하고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단되었으나 농지개혁을 계기로 생존권의 문제로 첨예화되었다.

1951년 백양사 고불총림을 이끌던 만암 스님이 교정에 추대되었다. 당대에 존경받던 선지식이었던 만암 스님이 교정이 되자, 선학원의 비구승 대의 스님은 몇 개 사찰이라도 좋으니 수도하기에 적당한 사찰을 수좌들에게 제공해 달라는 건의서를 교정에게 제출하였다. 만암 스님은 집행부에 이 의견을 수용한 정화대책 수립을 지시하였다. 지암 총무원장은 1952년 가을 통도사에서 정기 교무회의를 열어 교정 만암 스님의 뜻을 수용하기로 결의하였고, 1953년 4월에 불국사에 개최된 교단의 법규위원회에서는 수좌 전용 사찰로 내놓을 18개 사찰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수좌 사찰로 선정된 사찰의 대처승 주지들이 물러날 수 없다고 반발하자, 총무원은 이를 시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 비구승들은 1953년 가을에 수좌대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으나 뚜렷한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동안거에 들어갔다.

2)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1954년 5월 대통령 이승만은 갑자기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특정 종교계의 내부 문제에 대통령이 개입한 것으로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정화를 지지하는 담화는 섶에 불씨를 던진 것처럼 정화를 갈망하던 비구승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담화에 비구-대처승 양쪽 다 부산한 움직임 속에 6월, 교단 집행부는 중앙교무회를 열어 만암 교정이 지시한 정화 방안을 반영한 종헌 개정을 결의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교단 명칭을 ‘조선불교’에서 ‘조계종’으로 환원하는 것과 교헌을 종헌으로 승려의 구성을 수행단과 교화단으로 이원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수행단은 비구승, 교화단은 대처승을 말한다. 이 종헌 개정과 동시에 비구승들에게 48개 사찰을 수좌도량으로 제공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비구승들은 6월에 선학원에 모여 대처승 중심의 교단 집행부와 별개로 불교교단 정화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8월에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와 9월에 전국비구승대회를 잇달아 개최하여 정화 방안을 담은 전면적인 종헌 개정안을 결의하였다. 비구승들이 만든 종헌에는 대처승을 승려로 인정하지 않고 재가자인 호법중으로 정리한 사항이 핵심이었다.

 

1954년 8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
비구승들의 이러한 종헌 마련은 대처 측과는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해 10월, 비구 측과 대처 측은 타협을 위한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비구 측은 정법 중심으로 교단 운영제도를 개혁하자는 입장이었고, 대처 측은 현실을 유지하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또다시 대통령 이승만의 정화 지지 담화가 발표되었다. 요지는 대처승은 왜색 종교관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3) 비구승들의 교단 접수 과정

대화로는 정화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있던 비구승들은 대통령까지 정화를 지지하자 11월에 선학원에 모여, 조계사로 들어가서 종권을 인수받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종권을 접수하려는 비구 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처 측의 물리적 충돌이 시작되었다.

대처 측과 비구 측의 대립이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나자 불교정화는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대통령의 비구 측 지지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언론과 국민 여론은 대체로 비구 측의 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사회 여론이 이렇듯 비구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11월 말 대처 측 종단 집행부는 종권을 비구승에 이양하고 총사직을 결의했다. 또 전국 사찰에 공문을 보내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고 시달하였다. 그러나 생존권이 걸린 대처승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대처 측의 일부 강경파들은 비구승들의 퇴각을 요구하며 폭력적으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1954년 12월, 비구 측은 전국승니대회를 열어 440여 명의 비구·비구니가 논의한 끝에 정화의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이 무렵 문교부가 개입하였으나 양쪽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곧이어 다시 대통령 이승만의 정화 지지 담화가 나왔다. 대처승은 물러가고 순리에 따라 해결하라는 요지였다. 비구 측의 단호한 정화의지와 여러 차례 거듭된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 담화에도 불구하고 대처 측의 저항은 완강했다. 정화가 별 진전 없이 1955년을 맞이하자 문교부는 새로운 중재로 양쪽이 참가하는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승려 자격 8대 원칙을 정하고 이 기준에 부합하는 승려를 조사한 결과 1천189명이라고 집계하였다.

정부 당국은 이 8대 원칙에 맞는 승려들로 승려대회를 열어 종회의원 선출, 종헌 수정 등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비구 측 입장을 지지한 것이었다. 정부의 중재로 양쪽이 참여한 사찰정화대책위원회는 우여곡절 끝에 승려대회 개최를 결의하여 마침내 1955년 8월 12~13일에 전국승려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려 종회의원과 중앙간부 선출, 종헌 수정안 통과 등이 결의되었다. 종정은 석우 스님, 총무원장은 청담 스님, 감찰원장은 금오 스님이 추대되었다. 이로써 비구승들이 합법적으로 교단을 인수하게 되었다. 곧이어 사찰의 주지 인사를 단행하여 전국 6백23개 사찰의 주지 인선을 마무리 지었다.

4)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

1955년 8월의 전국승려대회를 기점으로 비구승들이 교단을 인수함으로써 불교정화의 큰 흐름은 정리되었다. 그러나 대처 측은 이에 불복하여 세속 법정에 제소하였다. 1심은 대처 측이 승소하고, 2심은 비구승이 승소한 후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던 중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에 대처 측은 비구 측 종단을 독재자 이승만이 만든 관제단체로 규정하면서 폭력적으로 사찰을 접수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비구 측은 11월에 제2회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불법대의를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 와중에 1960년 11월 대법원에서 비구 측 승소를 파기환송하는 판결이 나왔다. 이에 비구 측 대표 6인은 대법원장실에서 항의의 표시로 할복을 시도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4·19혁명 이후 정화운동은 지루한 세속 법정의 다툼으로 난관에 봉착하였지만, 비구승 주도의 종단은 지속되었다.

그러던 차에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 군부정권이 출범하였다. 군부정권은 불교정화를 분규로 인식하고 비구―대처 양쪽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통합시키려고 불교재건위원회를 가동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구 측은 불교정화의 당위성을 피력하며 강력히 이의제기를 하였다. 비구 측의 반발로 위원회 가동이 어렵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두 차례나 담화를 발표하여 불교계의 반성과 조속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였다.

 

정화운동의 분수령이 된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는 스님들(1960년 11월).
이러한 배경에서 1962년 1월에 출범한 것이 불교재건위원회이다. 위원회는 비구―대처 각 5인에 문교부 1인으로 구성하여 통합종단의 기틀을 만들고자 하였다. 몇 차례 회의 끝에 재건비상종회의원을 선출하고 1962년 2월 불교재건비상종회가 개원하여 종헌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역시 대처 측이 승려의 자격이 비구 측에 편향되었다고 반발하여 원만한 합의가 어려웠다. 이에 문교부는 재건비상종회를 해산하고, 비구―대처 각 5명과 사회 인사 5명으로 재건비상종회를 재구성하여 종헌의 일부를 수정하여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대처 측이 새 종헌도 인정하지 않자 군부정권은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강제권을 동원하겠다고 최후통첩하여 참여를 강제하였다. 1962년 3월 25일 마침내 종헌이 확정 공포되고, 이어 4월 1일에 재건비상종회에서 종정에 효봉 스님,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이 선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은 개원식을 갖고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4. 정화운동의 평가와 현재적 과제

지금까지 1950년대를 중심으로 교단 정화운동의 배경과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정화가 지니는 개혁적 성격을 정리해 보자.

첫째, 조계종단은 정화를 통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조선조에 해체당한 교단을 재건하였다. 이 재건 교단에서 인천(人天)의 사표라는 승려가 파계행을 하여 타락하였을 때 이를 정화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 승려상을 정립하여 정체성을 바로 세운 것이다.

둘째, 청정 승가상의 확립을 통한 조계종단의 위상 제고는 수행과 전법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0년경 한국불교의 신자 수가 2만여 명(인구 대비 1% 미만)이었고, 1942년경에는 24만여 명(인구 대비 1%)에 불과하였지만, 1985년 인구센서스 결과 8백만여 명, 1995년 1천만여 명으로 인구 대비 23%에 달하는 비약적 성장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교단 정화운동의 긍정적인 성과라 판단한다.

다음으로 정화운동의 현재적 과제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

첫째, 교단 정화운동 과정에서 교단 구성원들의 자율적인 해결이 안 되고 세속 권력의 개입을 초래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대의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그 과정 또한 여법해야 했다. 불교 교단 내부의 문제를 세속 정치권력의 개입을 통하여 해결한 사례는 이후 지금까지도 종단이 외부 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로 남아 있다. 이는 크게 자성하고 쇄신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 교단 정화는 한국불교의 종파시대를 다시 열었다. 이제 종파시대에서 각 종단이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큰 교단으로 연합하는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셋째, 교단 정화의 성과로 비구 중심의 인식과 제도화가 강조되다 보니, 교단의 사부대중 공동체 의식과 제도가 미비하다. 비구니의 참종권 확대 문제, 재가신도의 참종권과 역할의 확대는 정화 이후 교단이 안고 있는 큰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조계종단이 추진하고 있는 ‘자정과 쇄신 결사운동’은 기대가 크다.

 

박희승 /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차장. 동국대 사회학과, 동 불교대학원 졸업(석사).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등 역임. 〈조계사와 한국불교현대사〉 〈간화선의 현실 참여 문제〉 등 논문과 저서로 《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 《선지식에게 길을 묻다》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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