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암 (休庵, 1941~1997)]

1. 들어가는 말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불교는 붓다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지만 동시에 불교는 붓다에서 끝날 수 없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의 역사를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단(heresy)의 역사’라고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단을 문초하고 추방해 온 반면, 불교는 그들을 추방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단을 통해 불교의 새로운 생명이 샘솟아났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종합하여 조금 완곡하게 해석한다면 불교의 역사는 ‘개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교 교단의 근본분열을 초래한 대중부(大衆部)도 결국은 불교의 교단적 또는 교리적 문제점을 개혁하고자 출현하였고, 대승불교 또한 아비달마 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대두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전통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개항 이후, 급격한 사회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불교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힘들고 뒤틀린 역사의 질곡을 빠져나오며 불교는 시대를 이끌 동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불교인들은 불교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의견과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20세기 후반을 살다간 휴암(休庵)은 한국불교가 호국불교, 기복불교로 흐르면서 종교로서 불교의 정체성과 생명력을 잃었다고 개탄한다. 동시에 불교는 그 책임을 외부에 전가해서는 안 되며 뼈아픈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위기의 시대를 ‘불교적으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님의 신랄한 비판과 직설은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불교계에 자극제가 되어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이 글에서는 휴암의 생애와 핵심 사상을 간략하게 알아보고, 그가 개혁을 부르짖은 시대적·불교적 배경과 그 개혁론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그의 몇 가지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가 현대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한다.


2. 휴암의 생애와 사상

 

휴암(休庵, 1941~1997)
휴암(休庵, 1941~1997)은 속명이 성경섭으로 1941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실제 나이는 이보다 2, 3년 많은 것으로 전한다. 또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공부를 잘하여 마산고를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휴암은 재학 중 법대 기독교학생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나, 친구 김규칠(현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의 인도로 신소천 스님 등으로부터 불교를 공부했으며 어느 날 청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인간의 실존적[존재론적] 한계상황을 타파하고자 해인사의 성철 스님, 용화사의 전강 스님 등을 모시고 공부한다. 마침내 1967년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1968년 혜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동화사 금당선원 안거를 시작으로 제방 선원에서 선 수행에 매진한다. 스님은 주로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참구하였다 한다. 1980년부터 경북 영천의 기기암 선원에 주석하면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걱정하며, 여러 글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피력한다. 스님은 《대중불교》를 비롯하여 《신행불교》 《수다라》 《동학》 등의 여러 잡지에 기고하기도 하고, 선우도량의 수행 결사라든가 대학생불교연합회 수련대회 등에서 설법과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1986년 《한국불교의 새 얼굴》(대원정사)에 이어 1989년에는 《승가의 양심과 불교탄압》이라는 소책자를, 1994년에는 《장군죽비》(명상) 등을 펴냈다. 스님은 1997년 8월 23일 조계종 기초선원 운영위원회를 마치고 강원도 화천의 무자산방에 들렀다. 그 무자산방 앞 파로호에서 입적하였는데, 그가 평소 주장하던 대로 길에서 죽어간 것이다. 그의 세수 56세, 법랍 29년 되던 해의 일이다.

 

스님이 수행 생활 29년을 통해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생사의 사바세계로부터의 인간 구제였다. 스님은 생사해탈이야말로 불교의 영원한 핵심 주제라고 갈파하고, 그것은 선(禪)의 정신과 온전한 깨달음을 통해 성취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궁색한 여러 ‘방편’을 강하게 비판하고 배척하였다. 그러한 방편은 타성과 미혹의 일상을 조장하여 사람들을 생사윤회에 더욱 깊이 함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반불교적인 역기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인간 구제의 순수하고 궁극적인 불교 정신이야말로 오히려 현대 사회의 문명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한 불교적 가치관과 인생관을 지향하는 승가 정신이 바로 설 때, 비로소 불교는 인류 사회에 산 종교로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3. 휴암 개혁론의 배경

휴암은 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갔다. 일제강점 말기에 태어난 그는 일제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님의 나이 5~6세 때인 1945년은 광복의 해였다. 1950년에는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우리나라는 전쟁의 참화 속에 빠지게 된다.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가 발표된 이후, 비구―대처 분쟁은 끊일 줄 몰랐고 마침내 1960년 11월에는 대법원 마당에서 6명의 비구스님이 할복을 시도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4월 19일에는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4·19혁명이 일어났고, 1961년에는 5·16쿠데타가 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유신체제를 구축한바, 이를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갔고, 끝내 그는 측근에게 피살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전두환은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였으며, 광주 시민이 이에 저항하면서 5·18 민주항쟁이 일어난다. 1980년 10월 27일 계엄사령부는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조계종 총무원 및 전국 주요 사찰에 계엄군을 투입하였으며, 승속 포함 153명을 연행하였고 30일에는 18개 종파 3,000여 사찰을 수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기만이 분신하였고 원철 스님이 사망하였다.

휴암이 살았던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불교 교단도 내적으로 격심한 갈등과 대립에 휩싸였다. 단적인 예로, 조계종의 총무원장은 휴암이 출가한 해인 1967년에서 1990년까지 23년 동안 대략 23번 바뀐다. 총무원장 재임 기간이 평균 1년이 채 못 되는 것이다. 1983년에는 신흥사 사태가 발생하였고, 크고 작은 폭력 사태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전국적으로 번진 민주화운동은 불교계에도 유입되어 1985년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이 결성된다. 민중불교는 불교의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반외세 민족통일, 민중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현실참여를 지향하였다.

이처럼 불교 교단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휴암 스님은 이것이 교단 외적인 원인보다도 교단 내적인 원인에 더 크게 기인한다고 보았다. 스님의 눈에는 출가자들이 진정한 출가수행자이기보다는 세속적 명리를 좇는 속한들로 비쳤다. 그는 한마디로 한국불교는 종교로서의 불교 본연의 방향을 잃고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질타했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불교는 조선조 500년간의 박해와 일제의 핍박을 겪으면서 쇠약해졌고, 광복 이후 서구 물질문명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6·25전쟁으로 말미암은 절대 빈곤은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사회 풍조를 형성시켜 문화적 전통을 파괴하고 공동체 의식을 붕괴시킨다. 불교계 역시 이러한 물질지향적 가치관에 오염된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20세기 후반의 한국불교는 대략 다음 몇 가지 경향성을 띠고 있었다.

첫째, 산중불교 또는 은둔불교의 경향성이다. 숭유억불의 역사적 질곡을 빠져나오면서 한국불교가 입은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지가 않았고, 그것은 은연중에 사회와 역사에 은둔적이고 소극적인 불교로 남게 하였다.

둘째,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성향의 불교이다. 많은 불교인들은 불교를 개인적인 복락의 성취 수단으로 생각하고, 인과업보설을 곡해하여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주 보고 관상 보는 데 열중했다. 예컨대 입시철이 되면 입시기도 현수막을 내걸지 않는 사찰이 별로 없을 정도로 기복불교적 경향이 농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스님들은 신도들을 불교의 궁극적 목표로 향하게 해야 하는데 불교의 근본을 소홀히 하고 ‘방편불교’에 치중하여 방편을 남발하였다.

셋째, 관제불교 또는 호국불교의 경향이다. 한국불교는 ‘호국불교’라는 명분으로 정부 편들기에 급급하였고 권력의 하수인처럼 처신하였다. 조선시대 정치권력으로부터 받은 핍박과 수모로 인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권력에 약하고 권력지향적인 면모가 강하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머물고 있을 때 불교계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백담사를 참배한 것은 이를 잘 증명해주었다. 휴암 스님은 그러한 불교인들을 갈까마귀떼에 비유하며 질타한 바 있다.

넷째, 개인주의 또는 파벌주의의 경향이다. 불교 승가는 화합과 유대가 생명이다. 출가자는 현전승가에서 사방승가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출가공동체 모델에서 많이 벗어나, 승가 구성원들은 상호유대감이나 일체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상좌를 만들기 일쑤였고 일불제자(一佛弟子)라는 의식보다는 파벌적 문중의식이 더 강했다. 이러한 개인주의 또는 문중의식이 팽배하게 되면 불교는 더 넓은 세계와 역사에 소홀하게 되며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통찰력을 상실하게 되기 쉽다.

다섯째, 민중불교의 새로운 흐름이다. 1989년대 민중불교에 관해서는 후반부에 다시 간략하게 서술할 것이다.


4. 휴암 불교개혁론의 내용

 

한국불교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개혁을 강조한 휴암의 저서 《한국불교의 새 얼굴》과 《장군죽비》 상, 하권.
유승무에 따르면, 한국불교계의 개혁과 관련한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의식개혁이나 수행풍토 개혁을 포함한 정신적 차원의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적 차원의 개혁이다. 휴암 스님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전자에 해당되는 정신적 차원의 개혁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먼저 스님의 불교 개혁 사상을 총론적인 입장에서 개괄하고, 다음으로 각론에 해당되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불교의 근본 및 정체성 회복[기복불교 비판]

 

휴암이 그의 저술과 기고문, 그리고 강연 등을 통해서 시종일관 가장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불교가 불교답지 못하다’는 점이다. 불교가 불교답지 못하다는 것은 결국 불교가 그 근본적인 또는 궁극적인 가치의 실현을 외면하고 세속적인 가치 추구에 매몰되어 있다는 말이다. 휴암은 지나치게 세속적 복락을 추구하는 한국의 불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꾸짖는다.

복에 환장이 된 한국의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렸는데 너희는 그 스승에게 오늘도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복은 실로 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며, 복은 끝내 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고뇌다. 천금의 보화, 만금의 재산도 그것이 곧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인생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인생이 그만큼 깊은 것이다. 그런데도 종교인들이, 걸핏하면 소유나 외양이나 사주 같은 것으로 신도에게 복 운운하고, 그런 것으로 근기니 방편이니 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가공할 무지가 아니랴. 더구나 거기에 덩달아 같이 춤추는 신도란, 유무식을 가릴 것 없이 얼마나 희극적인 어릿광대이더냐?

석가세존은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우리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음을 알았다. 인간은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존재, 더 엄밀하게 말하면 실존적 한계상황에 처해 있는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인 것이다. 경전에서 이 세상을 불난 집[三界火宅]에 비유한다든가 고통의 바다[苦海]에 비유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불교경전 가운데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을 가장 치열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른바 ‘우물가 등나무(井藤)의 비유’이다. 잘 알려진 가르침이지만 휴암의 근본사상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에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아주 먼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를 거닐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가 나타나 그를 쫓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마른 우물 속에 간신히 몸을 피했다. 우물 곁의 큰 등나무 뿌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데 바닥을 보니 독룡(毒龍)이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라 나무뿌리에 매달려 우물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에서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대며 노려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그가 위를 쳐다보니 자기가 매달려 있는 가느다란 나무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갉아먹고 있고 먹이를 놓친 코끼리는 더욱 성을 내고 있었다. 벌판을 휩쓰는 맹렬한 들불은 등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의 온몸을 쏘아댔다. 그런데 그때 나무에서 뭔가가 떨어져 그의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맛을 보니 달콤한 꿀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도 잊어버린 채 다섯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꿀을 받아먹는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휴암 스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가치요 존재 이유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깨달음이요 해탈이요 열반에 다름 아니다. 스님은 이 깨달음 또는 해탈 또는 열반을 ‘존재론적 구제’ ‘존재의 근원적인 실현’ ‘존재의 근원적인 해방’ 등으로 표현한다. 스님은 존재의 근원적인 해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방에서 윗목과 아랫목을 구별하는 것은 지극히 우습다. 더구나 윗목은 박복이라 하고, 아랫목은 복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어디가 윗목인지 아랫목인지, 네가 그 칠흑 속에서 알기나 하였더냐. 너는 자기를 근원적으로 직참적(直參的)으로 부정하여, 즉시 궁극적인 존재에 있어서 환원된 빛을 받을[실현] 생각은 안 하고 그런 상대적인 긍정과 상대적인 부정 속에서 한량(限量)을 기약하려 하는가? 칠흑같이 어둡고 꽁꽁 얼어붙은 방에서는 불을 켜고 온기를 불어넣는 일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 그 아무것도 긍정될 건덕지가 없다. 그 세계, 존재에의 세계, 소위 견성(見性)의 세계는 직선의 연장선상의 세계가 아니다. 질적인 전환인 것이다[百尺竿頭進一步]. 불이 켜지면 문득 윗목 아랫목이 전면적으로 본래의 가치를 회복한다.

휴암이 추구한 세계는 망념이 사라진 세계, 다시 말해 비교급의 세계가 사라진 ‘온전한 존재’의 절대세계였다. 그리하여 그는 ‘99.9점인데 이 정도면 됐지’ 하는 태도는 꿈속의 잠꼬대요 사바세계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휴암의 눈에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도림 선사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서 있지만 번뇌망상과 허랑(虛浪)한 식(識)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는 백낙천이 더 위험하다. 그는 경전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데 대해 부정적이다. 경전을 통한 이해[解悟]는 해탈적 노력의 방향과 자각의 계기는 마련해 줄 수 있으나, 그 본질은 번뇌와 생사와 윤회의 범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휴암은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역시 욕망을 줄이고 마음을 평정하게 하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근원적인 깨달음’ 또는 ‘존재의 근원적 해방’으로까지 나아가게 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인도나 남방불교에서보다도 중국불교에서 근원적인 수행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많은 조사들이 일상성의 타성을 깨뜨리기 위해 방과 할 같은 독특한 수단과 방법을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수단과 방법들의 구조 속에는 보편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두’이다. 스님은 “화두는 조사들의 이 예측 불허의 극적인 방법들에 일관된 내용적 특징들의 최대공약성에 착안하여, 그 예측 불허의 방법을 종합하고 응축시켜 그것을 만인 보편의 수행의 길로서 정형화시켜 주었다는 점에 그 특징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고 언명한다. 스님은 결국 ‘존재의 근원적 실현’을 위해서는 궁극적 전통의 간화선에 의한 참선 수행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의 존재 이유는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을 통한 근원적인 깨달음의 성취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무자화두를 들고 참선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불교답기 위해서는 이러한 간화선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핵심적인 사상이요 주장이다.

2) 숙명론적‧개인주의적 인과사상의 혁파

많은 사람들이 인과응보와 윤회 사상을 불교의 특징적인 사상으로 이해한다. 불교의 인과업보윤회설에 의하면, 의도적인 선이나 의도적인 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도 전생의 업 때문이다. 나아가 사람이 장수하거나 단명한 것, 건강하거나 병이 많은 것, 외모가 수려하거나 못 생긴 것, 부유하거나 가난한 것 등의 차별도 모두 과거생에 지은 선업과 악업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분별업보약경》에 의하면, 벙어리와 소경의 장애는 전생에 성자(聖者)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은 악업의 결과요, 가난한 사람의 가난은 전생에 잘 살면서도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지 않은 악업의 과보이다. 이러한 인과응보 사상은 지극히 단순한 개인주의적 인과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휴암은 이러한 식의 인과업보 사상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부정한다. 이러한 숙명론적 인과 교리가 한국불교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그는 인과화복의 원리가 미신의 온상이 되고, 불교의 궁극적 가치를 상실케 하며, 사바세계를 권장하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인과교리는 비굴의 상징이다. 또한 비리의 상징이요 미신의 샘터요 현실 영합과 현실 회피의 통로이며, 세속주의·물질주의의 기수요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복 사상의 시녀인 것이다.”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그는 숙명론적 개인주의적 인과업보설의 폐해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운명적, 기계적으로 소화된 인과정신이 팔자(八字) 사상을 심어 주고, 우리에게서 진취적인 기상을 고갈시켜 우리를 애매모호한 신비적 풍토에 빠뜨렸다면, 개인주의적으로 소화된 인과정신은 책임을 각자의 개인으로만 떠밀어 버리게 하여 우리를 개개로 분산시키고 고립화시키는 경향으로 이끌어 필경 우리의 업사상도 상호 불가분의 관련성 속에 책임을 함께 나누는 연대감을 고취시켜 주지 못하고, 도리어 인과사상이 모든 책임을 각자의 자기 탓에만 돌려버리게 함으로써 나는 얼마든지 상대방으로부터 손 털고 책임을 외면해 버릴 수도 있게끔 만드는 상호 무책임주의와 방관주의를 유발시키고 만 듯하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수용된 인과정신은 불교인에게 전체정신이란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불교인을 대단히 일차원적인, 평면적, 개인적 인간상으로 만든 감이 없지 않다.

매우 파격적이고 날카로운 지적이다. 불교의 왜곡된 인과사상이 한국의 불교도들을 은연중에 숙명론적 신비주의적 인생관으로 이끌고, 동시에 개인주의적 인생관으로 이끌어 사회의식과 역사의식, 연대의식과 공동체의식[휴암의 표현으로는 전체정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도 개인주의적 인과설의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공업(共業)이라는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 휴암이 ‘공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 안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휴암은 공업의 개념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이러한 개인주의적 인과업보 사상은 한시바삐 폐기되어야 하며, 한국불교 침체의 원인을 사상의 빈곤과 타락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자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 불교는 영원히 고립된 개인주의적 수렁에서 헤어나올 수 없고 마침내 한국 땅에서 소수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더 나아가 휴암은 숙명론적 인과사상이 불교의 평등사상 실현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보았다.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 절대평등한 구경가치의 존재이다. 그러나 오늘의 승가는 현실의 인간을 늘 과보적 존재로 보아, 외모가 빼어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전생의 복 때문이라고 하여 우대하고, 가난하고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전생의 악업 때문이라고 하여 은연중에 차별하고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또한 역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하지도 못하고, 잘못된 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통찰하게 하지도 못하며 결국은 현실과 운명을 창조적으로 극복게 하지 못하게 된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인간을 인과화복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려고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근원적이고도 존재론적인 가치를 간과하고 끝내 지금 여기에서 ‘존재의 근원적 해방’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3) 호국불교 비판

흔히 호국불교는 한국불교 전통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규정된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불교와 왕권은 대체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황룡사 9층탑이나 사천왕사의 건립, 그리고 고려대장경 조조(粗造) 불사는 호국불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가로부터 억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등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스님들이 승병을 일으켜 왜적의 퇴치에 앞장섰던 것은 호국불교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민주화운동이 확산되면서 호국불교에 대한 비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 호국불교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불교’라는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고 잘못된 정부를 옹호하는 어용불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호국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은 최근 박노자 교수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른다. 박노자는 “한국의 불자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호국불교’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으며, 일제시대 친일승들이 스님들을 동원하기 위해 조작된 산물”이라고까지 주장한다.

휴암 스님은 이 ‘호국불교’라는 말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낸다. 호국불교는 곧 망국불교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스님은 이른바 ‘호국불교’가 아무런 내용도 없는 구호일 뿐 아니라, 사회와 인류를 평화롭게 하지도 못하고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며 백성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렸다고 비판한다. 스님은 호국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탄해 마지 않는다.

우리가 ‘호국불교’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미 고등한 종교로서 인류나 세계를 넘겨다 볼 기백과 사상적 자각을 스스로 짓밟고, 국가라는 낮은 울타리 안에 갇히자는 생각으로 주저앉은 것임을 천만 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국가나마 제대로 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불교가 세상의 불신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소위 ‘호국불교’ 때문이었고 불교가 자기 본래의 정신적 기백이 꺾이고 자기 모습을 상실하고 침체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도 자력종교임을 내세우는 불교가 도리어 제 집안일을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상성 없는 빈 구호뿐인 소위 ‘호국불교’와 결탁하여 사사건건 해결을 권력에 기대려 했던 탓으로 우리의 불교가 오늘날 이 모양으로 되었으며, 스님들끼리 사분오열 되어 서로 존경심이 사라지게 된 원인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슬프고도 원통한 일이다.

이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세계종교로서 불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실현을 위해 민중과 인류생명, 그리고 세계로 나가야 하는데 호국불교는 국가의 개념을 왕실이나 특정 정권으로 한정시켜 불교의 원대한 목표와 이상을 실추시켰다. 다음으로, 호국불교는 불교 교단을 권력과 결탁하거나 권력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불교의 자립과 자주화를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교단의 생명인 화합을 깨뜨리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휴암은 ‘호국불교’에 반기를 든 것이다. 스님은 한국불교가 ‘호국불교’의 기치를 내던져버리고 권력의 편이 아니라 민중과 가난한 백성의 편에 서야 하며, 권력과 부호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여 국가를 감시하고 백성을 돌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스님은 “불교의 진정한 호국이란 불교적인 것이 세속 국가와 사회에 침투하여 세속적인 현상이 불교적인 것으로 변혁되어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보다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왔을 때 비로소 불교가 호민, 호생, 호국했다는 말이 성립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불교적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한 국민 생활 전체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4) 민중불교 비판

민중불교운동은 1980년대 위기의 한국 사회에서 민중이 겪었던 사회적 고통에 대한 불교적 성찰이며 민중의 삶을 구제하고 계도하기 위한 불교적 참여 운동이었다. 그것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의 사회화’ 운동이었고, ‘민중·민족 해방’ 운동이었으며, 정치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불교 교단을 확립하고자 한 불교의 자주화 운동이기도 하였다. 민중불교운동은 호국불교라는 미명하에 타성과 안일에 빠져 있던 보수적 교단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고, 민주화 투쟁에 동참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크게 이바지하여 불교의 사회적 이미지를 제고하였다.

이러한 민중불교운동의 기본 정신은 휴암이 주장하는 불교 개혁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휴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철학이라면 관념의 유희를 위한 지식철학을 철폐하고, 돈이나 물질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실질적 변화를 강요하는 행동철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불교철학이라면 이젠 반드시 백성들의 생활을 일체적으로 취급하는 사회정의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태도부터 밝혀야 한다. 불교이론이 단순히 실존의 심화에만 이바지하고, 현대인들이 갈 길을 밝히고 선도하는 산 철학을 목말라하고 있는 점은 도외시하면서 묘유를 논하고 보살행을 들먹거린다면, 이는 불교가 현실과의 연관성이 박약한 절름발이 진리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존재의 근원적인 해방’을 강조하는 휴암의 입장과 사뭇 다르게 생각된다. 하지만 이 발언은 민중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상 휴암은 여러 차례 민중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한 바 있다. 그가 민중불교를 비판한 것은 그 개혁 정신이 아니라, 민중불교의 태동 배경과 행동 방식이나 실천 방법 또는 일부 불교 교리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었던 것 같다. 스님은 ‘불교의 내적 동기와 원칙에 근거한 사회참여’라는 점에서 민중불교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스님은 “민중불교의 연원과 순수성에 대해 의구심이 간다. 즉 기성정치권에 대한 ‘호국’불교의 관계와 같은 또 하나의 (재야정치적 신종 제도권) 정치에의 종속 형태”라고 꼬집는다. 민중불교운동에 불교적 색깔보다도 재야권의 정치적 색깔이 더 짙다는 지적이었다. 이러한 휴암의 발언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일문 스님, 노부호 교수, 현기 스님, 소암 스님, 효림 스님 등이 휴암의 발언을 둘러싸고 《대승불교》를 통해 약 6개월간에 걸쳐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였다.

스님은 민중불교가 그 내용보다는 ‘민중’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데 주력한 구호주의, 간편주의 위주의 불교였다고 비판한다. 민중불교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스님은 민중불교가 처음부터 정의, 자유, 평등, 민주, 분배 등의 설득력 있고 호소력 있고 그야말로 일반 민중들에게 쉽고 낯익은 ‘법(法)’을 제창해 주는 내용 면에서 절실성과 진실성, 성실성을 보여주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깨달음을 향한 기본자세가 없는 현실참여는 총칼 없이 전장에 나서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로, 당장 현실에 몸담는 것만이 참여가 아니라 내가 이룬 깨달음의 향기로 전 사부대중을 바른길로 이끄는 것이 더 큰 참여라고 경책한다.

5) 몇 가지 불교 발전 방안의 제안

휴암은 기본적으로 제도 개혁이 아니라 의식 개혁 또는 정신 개혁을 주창하였다. 하지만 제도적 측면에서 몇 가지 발전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불교발전을 위한 스님의 제안은 크게 다음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교육의 개혁이다. 한국 스님들의 학력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고 재래의 서당식 교육방법도 개선되어야 한다. 불교사상에 대한 논리적 체계, 역사적 체계를 확립하여 통일적, 체계적 이해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화엄’ ‘법화’ ‘열반’ ‘반야’ ‘미타’ 제논서(諸論書) 및 선서(禪書) 등에 산재돼 있는 방대한 불교사상을 하나의 맥락 속에 통일시키고 하나의 초점을 향하여 집중시켜야 한다. 또한 그것이 현실적 활동과 사회적 실천에 접목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지도자가 실천적 모범을 통해 교육해야 한다. 또한 모든 승려가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고서야 선원이나 강원에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산중의 절과 도시의 교당은 수행과 포교 면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둘째, 승려의 출가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개인이 사적으로 승려를 만드는 전통을 철폐하고 전국의 모든 행자를 공동으로 교육하고 수련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려의 교육을 소홀히 하게 되어 승려의 질적 향상이 어려워진다.

셋째, 문중 개념을 타파해야 한다. 인간은 불공정하고 부당한 것을 싫어하고 절대공정, 절대무사의 정신으로 천지에 자기 사람이라고는 따로 없는 범인류적인 동포형제애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하물며 출가수행자가 문중이나 찾고 사형사제니 형님이니 사숙님이니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출가자는 모두가 일불제자이니 정법으로 문중을 삼고 전 인류적 자비와 우애로써 범종단적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넷째, 법회 중심으로 사찰 운영 형태를 전환해야 한다. 모든 교당은 법회 중심으로 운영하고 불공은 부차적인 것이 되도록 하며 법회는 일요일 중심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산중 사찰은 음력 날짜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법회 중심의 운영을 위해서는 스님들이 균등하게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하고 설법의 방향도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사찰 수입을 공금화하여 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든 사찰 재정을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운용하도록 해야 한다.


5. 휴암의 개혁론 평가

서두에서 간략하게 살핀 것처럼 휴암 스님은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갔다. 불교에 대한 신념과 사랑이 뜨거웠던 그는 그 혼돈의 시대에 불교가 어떻게 하면 산 종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했음 직하다. 그러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불교는 불교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석가세존이 왕궁을 버리고 출가수도의 길을 간 것은 한 마디로 ‘생로병사’의 문제, 즉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석존은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함으로써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휴암은 이것이 바로 불교의 근본이고 핵심임을 간파했다. 스님은 그것을 ‘존재의 근원적 해방’이라고도 하고 ‘존재론적 구제’라고도 했다. 현대인이 아무리 풍요로운 물질과 문명의 이기를 누린다 하여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깨달아 실현하지 못한다면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스님은 기복불교나 호국불교 등을 비판하고, 간화선의 수행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해방을 성취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공덕행과 사회참여보다는 항상 수행을 최우선시하였다. 물론 사회참여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자기완성이 이루어지면 사회참여의 올바른 방향이 드러날 것으로 믿었을 뿐이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스님은 상구보리 없는 하화중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은 대승불교 정신에 비춰볼 때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스님의 입장은 인간의 조건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의 삶은 정신적 차원, 사회·역사적 차원, 생물학적 차원을 갖는다. 이들은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어느 한 차원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기에 인간을 총체적으로 또는 대승적으로 보면 자신의 무상정각(無上正覺)을 미루고 지옥 중생을 구하는 지장보살이 대두될 수도 있는 것이다. 스님은 혹시 ‘삶을 위한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삶’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불교학자들이 ‘불교의 국가관’이나 ‘불교의 경제관’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오늘날 지구촌의 불교는 참여불교, 인간불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휴암은 오히려 이것을 미리 꿰뚫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참여불교 또는 인간불교가 참답게 작동할 수 있게 하려고 불교 가치의 원형을 유지하도록 그토록 역설했는지도 모른다.

휴암은 솔직하고 질박한 성품을 타고났지만,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가끔은 파격적인 독설을 서슴지 않고 쏟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승가의 양심과 불교탄압의 문제》라는 소책자에서는 1980년 10·27법난과 동국대 총장 구속 사태와 관련하여, 그것이 국가 기관의 불교 탄압이라고만 매도하는 것은 승가의 비양심적 태도라고 비판하여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문중을 타파해야 한다든가, 민중불교라는 이름은 온당치 않다는 주장 등에 대해서도 많은 반발과 항의가 있었지만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만큼 굳건한 소신이 있었고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휴암이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비판하고 주장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오늘날 한국불교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음 몇 가지 점에서는 일정 정도 휴암 스님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이를테면 대한불교조계종이 최근 종단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간화선을 체계화하고 강조하는 점, 승가 교육의 현대화와 체계화를 위한 교육개혁 불사를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점, 파벌 혁파를 출가 제도를 ‘단일 계단’으로 통일하고 있는 점, ‘자정과 쇄신’ 등으로 승가 내부를 먼저 성찰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물론 현재 한국불교계가 추진하고 있는 이 같은 개혁과 변화는 휴암의 주장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에는 인과관계의 검증이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한 휴암과 같은 스님들의 개혁적 주장이 하나의 대세를 이루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면 굳이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자 하는 것은, 휴암에 대한 불교계의 평가가 상당히 크게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에서는 그가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날카롭고 심도 있게 짚어냈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매사에 너무 비판적이어서 비판을 위한 비판, 대안 없는 비판을 일삼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경준 /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불교적 관점에서 본 자연〉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불교적 접근〉 〈불교사상으로 본 사회적 실천〉 등과, 저서로 《민중불교의 탐구》(공저) 《원시불교 사상론》 《불교사회경제사상》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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