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光德, 1927~1999)]

1. 들어가면서

 

광덕(光德, 1927~1999)
광덕(光德) 고병완(高秉完, 1927~1999)은 현대 한국불교의 전개사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혁신운동을 펼쳐온 ‘전법보살’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광덕이 추구해온 사상적 혁신과 불교운동의 양상을 고려할 때, 광덕의 활동 영역이 ‘전법’으로 제한되고 그의 역할이 ‘도심포교의 선구자’ 정도로 평가되는 것은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광덕이 발표한 문헌과 활동의 궤적들을 검토할 때, 그는 한국불교의 전면적이며 본질적인 개혁과 개척운동을 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통하여 국가와 역사 발전의 역동적인 변화까지 도모하고 있다. 불교의 사상적 체계와 가치관, 수행·신행 방식, 사회적 실천체계, 불교도 공동체의 형성, 의식(儀式), 심지어 ‘형제 여러분’이라는 호칭까지, 실로 그는 불교의 모든 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변화시키며 개척하고 있다. 따라서 광덕의 행적은 한국불교의 유구한 과정에서 역동적인 새 물결을 불러일으킨 혁신적 사상운동으로서 조명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는 1974년 11월, 월간 《불광(佛光)》 창간호 서두에서 스스로 이 운동을 ‘순수불교’로 규정하고 이렇게 천명하고 있다.

 

이에 본지 《佛光》은 감히 우리 역사와 생활 속에 부처님의 위광을 전달하는 사명을 자담(自擔)하고 나선다. 이로써 조국의 발전이 기초할 정신적 기반과 동력을 공여하기를 기도하며 전진하는 민족사의 방향과 저력을 부여함에 보탬이 되기를 기약한다.

광덕은 그의 순수불교를 월간 《불광》을 통하여 선포하고 불광법회, 불광법등, 불광사 등을 통하여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광덕의 사상은 불광사상(佛光思想)으로, 광덕의 개혁·개척운동은 불광운동(佛光運動)으로 규정되어도 좋을 것이다. 불광(佛光)은 한 개인의 사유체계이거나 한 단체의 활동 양상이기를 넘어서 만인 속에 부처님의 위광을 드러내는 보편적 가치, 보편적 개념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불광을 탄생시킨 광덕의 기본적 문제의식을 규명하고, 불광운동의 사상적 기조와 그 구체적 전개 양상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갈 것이다.


2. 광덕의 기본적 문제의식

입산과 수행, 선각자들과의 만남, 선적(禪的) 각성, 이런 한국불교의 일반적인 이력 과정들이 광덕사상/불광사상 형성의 한 요인이 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광덕이 ‘광명찬란’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역동적인 활현과 민족사의 동력을 자임하고 나선 것은 한국불교사의 오랜 침체적 상황과 근대 이후의 중층적 딜레마를 고려할 때 실로 의외(意外)이다. 괄목상대라 할 만하다.

따라서 광덕의 불광사상/불광운동은 불교 풍토 일반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전통적 수행의 산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을 지니고 있고, 여기에는 광덕의 특수한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출가 전후 끊임없이 사회적 문제들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그 해결을 추구하는 사회적 문제의식/사회의식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광덕은 입산 초기 1953년부터 소천 스님이 주도한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반야사상을 만나서 사상적 지표를 확립하였다. 또 이 시기에 그는 이미 부산 좌천동에서 가정법회/법등가족법회를 열어 ‘가정의 불교화’를 추구하고, 이어서 대각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대중교화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러면서 광덕은 그가 대면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고뇌와 모색으로 10여 년 고(高) 처사 신분으로 인고하였고, 불법과 중생을 위해서 한 번 죽기를 다짐하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의 출가 결의가 섰을 때, 1960년, 마침내 출가를 결행하였다. 순서가 뒤바뀐 듯한 이 출가 이력에서도 광덕의 치열한 사회의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수행만이 능사인 종단 분위기’를 고려할 때, 광덕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 사회의식은 그의 개인사(個人史), 그리고 시대적 상황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덕의 성장 과정은 매우 곤궁하고 암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27년 경기도 오산에서 평범한 빈농(貧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광덕은 형의 도움으로 통신강좌를 이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났고, 1942년, 열여섯 살 때 형이 죽고, 곧이어 아버지도 돌아갔다. 1947년, 스물한 살 때 믿고 의지했던 어머니마저 돌아갔다. 이 해 광덕은 폐결핵에 걸렸다. 1949년 어머니 노릇을 대신하던 둘째 누님이 죽고 뒤이어 매형도 돌아갔다. 둘째 누님을 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가난과 죽음, 중병, 이 중첩된 고통과 암울한 좌절은 어린 광덕―청년 광덕의 감성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다. 이 우울한 그림자는 출가 이후의 삶에서도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광덕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내가 불문(佛門)에 들어온 뒤에도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형과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인생, 누구나 죽음으로 부모·형제를 잃은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그때, 왜 나만이 그런 슬픔을 안겨 주면서 죽는가, 하는 의문이 가슴을 짓눌렀다. 바윗덩어리마냥 나를 짓누르는 의문과 슬픔은 차라리 절망이었고 어둠이었다.

성장 과정에서 광덕이 겪은 이런 바윗덩어리 같은 절망과 어둠은 집안의 몰락과 개인적인 고통뿐만 아니었다. 그가 살았던 1930~196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이 그에게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어 다가왔다. 일제강점, 해방, 좌우분열,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 군사혁명과 유신…… 이러한 암울한 시대적 상황,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 젊은 광덕은 깊이 고뇌하였다. 일제강점 치하 십 대의 광덕은 특히 망국민의 비애와 전쟁으로 인한 인간파괴에 대하여 매우 괴로워하였다. ‘조선 사람으로서 자신을 가지고 자립해서 사는 길은 없을까?’ 이것이 젊은 광덕의 화두였다. 그는 시대적 고뇌를 안고 그 출구를 찾아서 친구들과 밤새워 토론하고, 도서실에서 독서에 몰두하였다. 그러면서 ‘인생의 끝이 어디인가?’ 하고 고뇌하였다. ‘정의와 진실의 궁극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서 추궁하였다. 이러한 광덕의 시대적 고뇌는 출가 이후의 삶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출가 이후의 삶에서는 민족의 분단이 그의 문제의식의 핵심적 과제로서 작용하였다.

가난한 살림, 고향 떠남, 진학 좌절, 형과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누님의 죽음, 폐결핵, 폐 절제, 위장 수술…… 일제강점, 전쟁, 해방, 좌우분열과 민족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 군사혁명과 유신, 정화불사 이후의 한국불교의 처참한 몰락상……. 광덕이 겪어왔던 삶의 궤적들을 관찰할 때, 광덕은 이런 암울한 개인사적 고통과 시대적 아픔을 짊어지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으로 고뇌하고 도전하였다. 폐를 잘라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생명을 찾고 절망의 어둠 속에서 밝은 광명을 찾아서 헤매고 부딪쳤다. 입산 후, 그는 병든 몸으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독서하고 참선하고 기도하는 치열하고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 역경을 겪어냈다. 이러한 몸부림은 한갓 철학적 고뇌를 넘어서는 생존적인 차원의 절박한 것이었다. ‘사는가? 죽는가?’ 하는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었다. 그는 관념적 공안으로서가 아니라 대사일번의 막다른 삶을 현실(現實)로서, 현장(現場)으로서 직면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광덕의 이러한 도전과 부딪침은 자기 혼자 살아남으려고 하는 자기 보전적 욕구를 넘어서는 초자전적(超自傳的, transpersonal)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인 고통과 가족들의 불행 속에서도 그는 항상 조국을 생각하고 세계의 평화를 생각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였다(KBS 대담). 이것은 이러한 시대적 고뇌, 사회적 문제의식이 광덕의 출가와 수행과정을 일관하는 기본적 동기로서, 기본적 의식으로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광덕의 삶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가장 기본적 동기로, 기본적 의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출가 전에도 출가 후에도 끊임없이 사회적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던 광덕의 특이한 이력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삶의 현장에서, 고통과 좌절의 현장에서 목숨 걸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형성된 이러한 광덕의 사회적 문제의식은 곧 현장의식(現場意識)의 발로로서 이해된다. 또 어둠 속에서 생존의 빛을 찾으려는 광덕의 이러한 현장의식은 ‘광명의식(光明意識)’/‘빛 찾기 의식’으로 규정되어도 좋을 것이다. 광덕이 끊임없이 ‘무한생명’을 노래하고, ‘생명’ ‘광명’이 광덕의 언어 속에 수없이 드러나고, 불광사상이 ‘광명찬란’ 일구(一句)로 환원되는 것도 그의 이러한 빛 찾기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KBS 대담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아침 해 수평선에 떠오르는 찰나처럼 만인의 생명의 지평선에 진리의 태양은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억겁 전제 빛나고 오늘 빛나고 있고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광덕의 이러한 현장의식/사회적 문제의식은 불광사상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야바라밀/보현행원/구국구세 등 불광사상의 핵심적 담마들은 화려 심오한 교학체계이거나 철학적 사변이기 이전에 이러한 치열한 현장의식의 결정으로서 산출된 것이다. 이 담마들은 전쟁의 어둠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실제적 처방으로서 선택된 것이다. 광덕은 반야바라밀을 깨닫고 사회현장으로 나간 것이 아니고, 사회현장에서 반야바라밀을 찾아낸 것이다. 광덕이 소천 스님의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광덕은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자. 이 세상의 전쟁은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집착해서 견해를 일으키고 대립하는 데서부터 수많은 파괴와 죽음과 불행이 양산되는 것이다. 이 중생의 대립 감정, 미혹한 감정을 깨뜨려서 모두가 참으로 평화롭고 진리로써 하나가 되고 진리가 가지고 있는 공덕을 한결같이 누리자면, 육체에 물질에 감각에 타성에 매달린 관념들을 다 깨버려야 한다. 그것은 반야(般若), 반야사상밖에 없다. 반야의 진리가 능히 일체 대립, 일체 고난, 일체 투쟁, 일체 악의 요소를 뿌리로부터 무(無)로 돌려서 모두를 소멸시킨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전쟁의 불이 꺼지고 평화가 오고 세계 평화로 이어진다.


3. 불광운동의 사상적 기조: 반야행원의 구국구세 사상

논자들은 불광사상을 말하면서, ‘선(禪)사상’ ‘반야사상’ ‘화엄사상’ 등을 거론한다. 회통성(會通性)이라는 한국 불교사상의 일반적 특성을 고려할 때, 불광사상이 이런 다양한 사상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는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불광사상이 곧 선(禪)사상, 또는 반야·화엄사상이라고 규정하기도 곤란할 것이다. 불광사상이 전통적 선·반야·화엄과는 전혀 다른 전개 양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광사상이 이런 다양한 전통적 사상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특유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는 한 논문에서 불광사상의 체계를 다음과 같이 시론한 바가 있다.

반야바라밀다(정견)·보현행원(대행)
바로 이것이 광덕 스님이 전 생애를 바치며 열렬히 추구해 온 불광사상의 사상적 기조이다. 광덕사상의 진실관이며 실천원리이다. 그리고 반야·행원의 이 광덕사상은 붓다의 담마에 깊이 입각하고 있으면서도, 그 입론과 전개방식이 전혀 새롭고 독창적이라는 의미에서 광덕 스님의 출중하고 탁월함이 인정되고 있다.

불광사상이 반야바라밀과 보현행원을 사상적 주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불광 대중들이 ‘마하반야바라밀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라고 일상적으로 염송하고 인사말로 주고받고 있을 정도로 ‘반야―행원’은 불광사상의 중심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광덕도 이러한 사실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 그는 《보현성전》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행이 ‘보현’을 만났다. 우리는 보현보살을 배워서 자신을 회복하고 인간복권을 성취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역사와 운명에 인간의 길을 부여하고 인간 진실을 개현하여, 인간권위를 회복하고, 무한창조의 평원을 열어 가야 하겠다.

필자는 불법이 인간을 그의 실존 차원에서 확립시키고 무한한 긍정의 평원으로 해방시키는 지혜이며 힘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무상법(無上法)의 현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결론이다. 그리고 ‘보현’이야말로 마하반야바라밀의 개현자이며 실천자인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반야공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반야공―보살도의 구조는 초기불교 이래 불교사상의 한 중심적 주류로서 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반야사상은 과도하게 공(空)사상으로 치우치고 악취공(惡取空)으로 변질되어 ‘오히려 공에 걸려 죽은 것이다’. 광덕은 이런 죽은 반야/죽은 공을 타파하였다. 그는 반야바라밀의 정견에 입각하여 공(空)과 더불어 불공(不空)을 조견함으로써 반야를 다시 역동적인 보살의 입각처로 살려내었다.

반야는 곧 대행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반야대행(般若大行)이다. 이 반야대행이 곧 보살도이고 보현행이다. 거의 모든 대승경전에서 반야를 논하고 보살도를 설하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 보살도는 수행도가 되고, 불교는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반야대행의 보살도가 역사적 현실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고 한갓 화려한 이론으로 관념화(觀念化)되고, 경전 속에 퇴장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선·화엄이 아무리 우월한 사상이라고 주장해도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광덕은 이 반야대행을 살려낸 것이다. 보현행원을 살려낸 것이다. 절대적 자존성의 전성적 즉시적 발로라는 정견에 입각해서, 보현행원은 진실 생명의 숨결이며 체온이라는 직관에 입각해서, 그는 반야의 행/보살의 행을 살아 있는 현장의식으로, 역동적인 사회의식/역사의식으로 살려낸 것이다. 광덕은 이렇게 논하고 있다.

원래 행은 즉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며, 역사적 현실을 움직이는 실질인 동시에 동력(動力)이다. 그러므로 행은 역사성·사회성과 직결된다. 행이 없다는 것은 곧 반야바라밀의 결여를 의미한다. 대개 역사의식·사회의식이 없는 종교는 그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현실을 진리로 개혁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명상 속 진리를 찾는 종교에서 현실을 개혁할 의지가 없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상사회라 할 진리세계는 이미 명상, 또는 삼매 너머에 완성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은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매나 정신수양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이 땅의 영광을 위한 행동이 나올 여지가 없게 된다.

광덕의 궁극적 관심은 ‘역사이며 사회’이다. 곧 ‘국가이며 세상’이다. 그에게 불교는 역사를 창조하고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힘이고, 현실을 진리로 개혁할 의지이다. 광덕과 불광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이 사회와 역사의 개혁, 능동적이며 청조적인 개혁의지/개혁열정이다. 반야도 보현도 이러한 과제를 위해서 요구되고 있다. 따라서 반야의 이론에 빠지고 보현의 행원에 도취하는 것은 불광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광덕의 사회적 문제의식/현장의식은 여기서도 새삼 확인되고 있다. 그의 대표적 논서인《반야심경강의》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다.

만약 오늘날의 한국불교가 소극과 회피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거나, 안이한 현실긍정으로 구체적이며 창조적 열의를 결여했거나, 또는 명예로운 극가와 민족을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평화 번영을 위한 적극적인 책임감과 행동이 저조하다면, 그것은 반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그 일반(一半)의 이유가 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명예로운 국가와 민족의 건설, 세계 평화와 번영, 이것은 곧 구국구세(救國救世)를 일컫는 것이다. 광덕은 끊임없이 이렇게 구국구세를 주장하고 추구하고 있다. 광덕은 이렇게 구국(救國)을 불광운동/바라밀결사운동의 이념적 지표로서 확립하고 있다. 구국이 반야바라밀-보현행원의 당처(當處)이며 현장(現場)이라고 주장한다. 불광대중이 명념하는 ‘반야바라밀다결사 정법호지 발원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희들은 이 땅에 감로법을 널리 펴, 부처님의 정법이 영원히 머물며, 겨레와 국토를 법성광명으로 빛낼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국토는 단순히 영토적 개념으로서의 우리 국토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국토는 가정·사회·직장·우리나라·우리 세계·중생들의 모든 삶의 마당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래서 광덕은 반야행원의 실천으로 우리 가장·사회…… 세계·중생들의 삶을 진리광명으로 개혁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가 가정의 행복을 논하고 노동자들의 복지를 주장하며 사회과학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광덕의 삶은 구국구세의 동기로서 일관되고 있다. 광덕은 스스로 병든 몸을 이끌고 구국구세의 삶을 살았고, 구국구세로서 보현행자의 길을 삼았다. 이렇게 반야행원의 구국구세는 불광운동의 사상적 기조로서 관철되었고, 불광운동의 사명으로서, 의지로서 확립되고 추구되었다. ‘보현행자의 선언’에서는 이렇게 선포되고 있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4. 불광운동의 전개 양상

불광운동은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해에 〈한마음 헌장〉이 발표되고, 불광회가 창립되고, 월간 《불광》이 창간되면서 〈순수불교선언〉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불광운동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 10월 종로 대각사에서 불광법회가 개설되면서 불광운동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제 필자는 이러한 불광운동의 전개 과정을 그동안 불광이 추구해온 다음 세 가지 양상으로 구분하여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1) 시민중심의 개척불교운동

광덕은 반야바라밀의 깨달음(覺), 곧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을 통하여 인간 가치의 절대적 존엄성/자존성을 선포하고 있다. 불광운동은 이러한 인간 가치의 절대적 자존성을 그 이념적 지표로서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불광의 이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조용길은 불광운동을 ‘사부대중의 민중불교’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논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부대중의 불교를 광덕 스님은 오늘(1960년에서 1999년)이라는 약 30년의 짧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풍부하게 이끌어가신 현대의 불보살이시다. 경허 선사가 꺼져가는 조선의 불교를 일깨웠다면, 스님은 현대불교의 방향타를 잡아준 선장이요 조타수였다고 확신한다. 스님께서 불 밝힌 반야의 법등, 사부대중의 민중불교운동의 깨우침은 끊어지지 않고 타올라야 한다.

광덕이 불광운동을 전개하면서 뿌리 깊은 승단중심주의/출가우월주의를 지양하고 사부대중을 운동의 주체로 삼은 것은 한국불교사의 오랜 전통에서 볼 때 실로 파격이며 변혁이다. 만해·용성·소천 스님을 거치면서 이러한 사부대중의 불교운동은 부단히 주장되고 시도되었지만, 사부대중이 구체적 실체로서 확립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대각회(1956년)·불광회(1974년)가 창립되면서 사부대중이 구체적 실체로서 등장하고, 1975년 불광법회가 창립되면서 사부대중은 불교운동의 실체로서 확립되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재가대중이 그 실체로서 확립된 것이다. 불광법회는 거의 전적으로 재가대중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출가중들은 불광대중에게 도움을 주는 일종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광덕은 당시까지 금기로 되어왔던 목탁 치는 일부터 재가들에게 가르치고, 법회의 진행도 재가가 맡아 하게 했다. 연화부를 만들어 장례의식까지 재가가 담당하도록 했다.

불광운동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광운동은 사부대중의 울타리까지 뛰어넘고 있다. 사부대중의 개념까지 뛰어넘어 시민 속으로, 시민대중/국민대중 속으로 바로 들어가고 있다. ‘사부대중’이라고 했지만, 불광법회에 참가한 대중의 실체는 곧 시민들이다. 불광대중은 산업화되고 교육받은 시민들, 즉 지식인·중소상인·기업인·직장인·자영업자·주부·청년 대학생·군인 등 중산층 시민들이었다. 따라서 불광운동은 이들 시민 그룹에 의하여 주도된 시민 중심의 개척불교운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개척이란 시민 속으로 도심 속으로 찾아가는 공간적 개척일뿐만 아니라, 기존의 출가 중심 기복 중심의 낡은 틀을 깨고 교리·의식·수행·사회활동 등 불교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바꾸고 창출하는 총체적 구조적 혁신의 개척이다.

시민중심의 개척불교는 불광대중의 호칭에서부터 잘 드러나고 있다. 광덕은 법회에서 대중들을 호칭할 때, 반드시 ‘형제들―’ 하고 불렀다. 광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친애하는 바라밀 형제 여러분, 이와 같은 막중한 흥망을 지니고 성장의 발판을 드높여 온 우리 불광은 이제 새로운 전진의 16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이 다짐하는 바가 있어야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불을 가는 보살이라는 재화인 입니다. 우리는 미망과 죄업에 쌓인 중생이 아니라, 생사에서 벗어나고 일체 대립 관계에서 벗어난 바라밀 행자로서, 중생과 국토를 빛내는 성불의 길을 가는 보살이라는 사실입니다.

“친애하는 바라밀 형제 여러분―”, 여기서 불광운동의 시민중심주의가 인간의 절대적 자존성이라는 불광이념에 투철한 이념적 처방이라는 사실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불광의 시민중심 개척운동은 보다 깊은 비전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불광법회는 재가로서 운동의 지도그룹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잠실 불광사로 옮겨 불광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단계에서, 불광법회는 지도자 교육을 본격화하였고, 그 단계는 ‘명교사-포교사-전법사’의 구조로 기획되었다. 전법사가 되면, 출·재가를 가리지 않고 법사로서 평등한 권위와 위상을 부여받고, 법단에서 법을 설한다. 이 지도자 교육은 실제로 실시되었다. 1987년 1기 명교사 72명이 배출되었고, 1993년 1기 포교사 55명이 탄생하였다. 이들 포교사들은 뛰어난 역량과 원력을 갖춘 재가지도자/시민지도자였다. 불광은 이 시민지도자들을 앞세워 도처에 불광법등을 밝히고 불광법당을 세워서 궁극적으로 ‘불광특별시’를 건설할 원대한 비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것이 곧 ‘바라밀 국토’의 실체이고 구국구세의 전략이다.

이렇게 불광은 출가 중심주의의 울타리를 높이 뛰어넘었고, 사찰 중심의 한계를 멀리 벗어났다. 1982년 불광법회는 불광사(佛光寺)를 건립했지만, 불광사가 불광운동의 주체가 아니었다. 불광법회가 불광사의 신도회가 결코 아니었다. 불광사는 불광법회의 잠실법당이었고, 이런 불광법당이 마포구, 서대문구, 서초구 등 도처에 세워질 구상이었다.

2) 법등(法燈) 중심의 전법운동

돌이켜보면, 광덕의 불광운동은 법등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1954년 스물여덟 살 때, 고(高) 처사가 부산 좌천동에서 ‘법등가족법회’를 열어 가정의 불교화, 가족의 불자화를 도모한 것이 불광운동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법등 중심의 전법운동은 불광의 가장 본질적인 이념적 목표로서 추구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광운동은 곧 법등운동으로서, 법등 중심의 전법운동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 법등(法燈)/등불의 의의에 관해서 광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세간에 오신 것은 ‘이런’ 등불로 오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간 밝히는 등불이시며, 불법은 세간 등불이고, 불법을 믿는 것이 등불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법을 전하는 것이 세간을 밝히는 것이다. 불자의 생활도 활동도, 그 모두가 세간을 밝게 하는 것으로 그친다 할 것이다.

여기서 법등은, 흔히 생각하듯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방법상 조직의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법등은 결코 조직이 아니다. 법등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믿는 신앙운동이고, 법을 전파하는 전법운동이고, 이 세상을 밝히고 바라밀국토를 실현해가는 불자들의 삶운동이다. 법답게 살아가는 불자들의 살 자체가 법등이다. 이러한 취지는 불광수행의 요체인 ‘법등십과(法燈十課)’ ‘법등오서(法燈五誓)’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법등이 구체화된 것은 1976년 7월 법회대중들을 10개 법등으로 구분하면서부터이다. 1978년 4월 ‘문수, 보현……’ 등 불보살의 명칭을 따라 11개 법등으로 다시 나뉘었고, 1979년 3월 ‘동·서·남·북·중’ 등 5개 지역 법등으로 전환되면서 ‘마하, 반야, 보리’ 등 법등 리더들이 생겨났다. 1980년 법등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법등들이 모여서 ‘구법회’가 결사되면서 ‘법등-구법회’의 체계가 갖춰졌다. 이와 더불어, 연령·특기 등 공통분모를 매개로 하는 법등들이 결성되면서 법등은 보다 다양한 기능으로 분화되어 갔다. 2010년 8월 현재, 구법회 8, 법등 416, 계층법회 3개가 결집되어서, 불광대중들이 법등신앙/법등수행을 중심으로 자기를 확립하고 전법하는 불광운동을 확장시켜 나갔다. 법등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불광의 노력은 문서 전법·교육 전법·연구 전법·인터넷 전법·음악 전법 등 다양한 형태의 전법 활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3) 호법 중심의 사회적 실천운동

불광운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호법(護法)활동이다. 호법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법등운동의 구체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구국구세의 구체적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호법은 곧 반야바라밀의 실천이다. 반야바라밀을 실천하여 겨레의 생명을 지키며 국토를 수호하고 세계평화를 건설하려는 사회적 실천이 바로 호법이다. 광덕은 이렇게 논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호국법문은 반야바라밀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천재지변이 있고 국가에 내우외환이 일고 전란이 터져나올 때, ‘반야바라밀’을 수지하라 하셨다. 오늘을 당하여 우리 겨레 모두는 경건하게 반야바라밀을 배우고 실천하여 겨레의 생명을 지키고 국토를 지키며 안녕과 번영을 가꾸어 갈 결의를 다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평화에 직결되고 불보살님의 크신 뜻의 실현임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 불자는 모두 반야바라밀 법문의 선양으로 조국의 평화번영을 향하여 앞장서야 한다.

호법은 1983년 〈호국발원법회보〉를 창간하고 1985년 1월 ‘호국발원법회’를 시작하면서 가시화되었다. 매월 첫째 주 수요일에 ‘호법발원법회’를 열고 ‘호국발원금’을 봉납하면서 호법은 사회적 실천의 물적 토대를 획득하는 데 주요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호법은 호법발원금을 기금으로 많은 목적 사업을 꾀하였는데, 그 중심은 전법과 사회봉사에 있었다.

 

불광운동의 본산 불광사( 2013년 완공 예정인 잠실 불광사 조감도).
보현행자로서 본분을 다하려는 불광법회의 봉사활동은 호법 이전부터 이미 실천되어왔다. 1981년 연화부(蓮花部)를 만들어 장례봉사를 시작하였고, 1984년 12월 연꽃어린이들이 기아(飢餓)로 죽어가는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을 위하여 자선공연을 벌였다. 1992년 6월 LA 흑인 폭동 때는 우리 교민들을 돕기 위하여 성금을 모았다. 1986년 6월 보문부(普門部)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했고, 1995년 9월 불광봉사단이 정식으로 출법하여, ‘가야산 국립공원 내 골프장건립 반대운동’ ‘북한어린이 돕기운동’ 등 사회적 실천의 폭을 넓혀갔다. 호법발원금이 축적되면서 명교사-포교사 육성 등 전법 활동이 탄력을 받게 되었고, 동국대가 일산에 대규모 병원을 건립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 2억 원을 지원하였다. 호법/호법발원금을 통하여 불광운동의 사회적 확산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이 나라/사회를 불교적으로 변혁하려는 광덕의 염원은 그의 사후에도 불광대중들에 의하여 치열하게 추구되고 있다.

 


5. 맺으면서

광덕의 삶과 불광사상/불광운동을 일관하는 기본적 동기는 곧 치열한 사회적 문제의식/사회의식이다. 그는 삶의 현장/시대적 현장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죽음과 좌절·절망의 어둠을 온몸으로 대면하면서 이 어둠을 광명찬란한 생명의 빛으로 전환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생명의 빛을 반야행원/반야행원의 구국구세 사상으로 개척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붓다 석가모니가 치열한 카띠야적(khattiya的, 戰士的) 사회의식으로 동체대비의 불교사상을 창출한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광덕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통적 불교/수행불교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있다. 선(禪)·반야·화엄·정토·보살도 등 전통불교들이 함몰되어 있는 관념성(觀念性)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이분화하고 절박한 역사적 현실, 고통스러운 민중들의 현실을 관념/일심 속으로 끌어넣고 사상으로 수행으로 삼매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몽상하면서, 중생제도는 ‘오후(悟後)의 일이요 달도(達道)한 사람의 경계라 하여 외면하면서’, 실제로는 행동하지 않은 전통불교의 허위의식(虛僞意識)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불교는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불광사상이 선(禪)이면서 선(禪)이 아니고 반야·화엄이면서 반야·화엄이 아닌 이유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물론 광덕의 불광사상/불광운동이 진선진미한 것이거나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의 무한자존성’이라는 광덕의 아이디어가 내포하는 현실상황과의 괴리, 절대적 긍정주의가 초래하는 비판의식의 결여, 수행방식의 불명료성, 사회체제의 변혁이라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광덕과 불광운동의 사회변혁적 소극성, 광덕 이후에 점차 드러나고 있는 사찰·출가 중심의 운동 방식 등 앞으로 규명되고 극복되어야 할 문제들이 새로운 과제로서 제기되고 있다.

1910년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선포한(정확히는 탈고한) 이래 한국불교의 개혁운동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시도되었다. 1950~70년대 부끄러운 자해(自害)의 고통 속에서도 조계종이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개혁운동의 성공으로 결실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종단은 점차 탐욕스런 권력적 지배구조로 변질되고, 역사에 없는 ‘정통’을 내세우며 승려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다. 민중을 두려워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종단/승단[지금의 종단은 정확하게 말하면 승단], 열심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bahujana)/시민대중이 자발적 동기를 박탈당한 채 떠나가고, 재고(在庫)가 얼마 남지 않은 한국불교의 에너지는 거의 탕진되고……. 이렇게 한국불교는 생존의 토대 자체가 붕괴되는 실로 유례없는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 번 만해의 불교유신론이 선포되고 1960~80년대의 자력개척시대로 돌아갈 것이 긴절히 요구되고 있다. 원각회·삼보법회·관음회·대원회·불광법회·대불련·청보리회·청소년교화연합회·대불청…… 수많은 대중들의 헌신적 열정 속에 들불처럼 번져갔던 이 자생적 개혁운동이 거대한 ‘순수불교’의 불길로 거듭 솟구치기를 대망하고 있다. 붓다의 초기불교운동이 그러했던 것같이, 많은 사람들/대중들의 자발적 동기와 민중적/시민적 주체의 확립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불교개혁/불교중흥의 거의 유일한 대안이고 희망이다. 이 희망을 실체화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키워드는 ‘치열한 사회의식’이란 사실을 현실적으로 입증해 보였다는 점에서, 광덕의 불광사상/불광운동은 우리 시대 개혁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2, 3장은 졸고 〈광덕 스님의 삶과 불광사상〉 《전법학 연구》(불광연구원, 2012년 1월) 47-75쪽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김재영 / 동방불교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졸업(불교학박사). 1970년 이후 동덕/청보리 학생회·청년대학생회를 창립하여 지도법사로 활동. 저서로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 《우리도 부처님같이》 《광덕스님의 생애와 불광운동》 《초기불교개척사》 《붓다의 대중견성운동》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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