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기 (黃晟起, 1919~1979)]

1. 들어가는 말

고봉 황성기(杲峰 黃晟起, 1919~1979)는 암운이 감돌았던 일제강점기와 교단분규로 점철된 현대기를 살다간 인물이다. 그는 당대가 당면한 불교개혁의 사상적·실천적 토대로서 보살불교를 몸소 실천한 승려요 대학교수이다. 일찍이 전통 교육방식인 강원교육과 현대 교육방식인 대학교육을 모두 섭렵함으로써 학자로서 실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學)·행(行)을 겸비한 보살운동의 선구자로서 그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역사는 고봉의 생애와 불교사상, 그가 학·행을 담보했던 불교개혁론과 보살불교의 실제 등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나 학문적 고찰 내지 불교사적 평가를 남기고 있지 않다. 이는 그가 일평생 보살운동에 매진한 삶의 궤적과 역사적·사상적 가치 등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하는 다양한 접근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다만, 보살운동의 사상적·실천적 기반이 되었던 ‘불교사상연구회’가 입적 10주년을 맞아 고봉이 남긴 원고들을 모아 세 권의 불교문집을 간행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정황은 먼저 그가 주창했던 불교개혁론의 논리적 전거와 실천 방향이었던 보살불교의 개념 정의가 당시 교단정화의 명분으로 지속된 분규의 와중에서 빛이 바랜 점과 근현대기 불교교단사에 대한 곡해가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교단의 정서는 한국불교의 나아갈 지표에 대해서조차 이분법적 사고논리로 함몰되었고, 결국은 교단 구성원들 간의 상호 인연의 범주에서만 서로 소통하는 폐쇄성에 갇히고 말았다.

따라서 고봉의 불교개혁론을 논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시기, 특히 분규로 점철된 현대기 불교교단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모색하는 일이요, 이는 곧 오늘날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을 다시금 곱씹어보는 일대 전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고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봉을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자료적 전거는 그의 불교문집 세 권이 전부이다. 그 밖의 접근 방안은 생전에 고봉과 인연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이나마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본 논문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본론은 그가 남긴 세 권의 불교문집을 면밀히 분석해 고봉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사상성을 연관 짓고, 아울러 그가 주창했던 불교개혁론과 보살불교의 실제를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황성기의 생애와 불교개혁론  

황성기(黃晟起, 1919~1979)
고봉(杲峰) 황성기는 1919년 11월 19일 강원도 고성에서 부친 평해(平海) 황씨 필홍(弼弘)과 모친 성천(成川) 라(羅)씨 순길(順吉) 사이에서 다섯 형제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길(五吉)이다. 부모는 염전을 생업으로 삼아 생활을 지탱했던 것으로 전한다.

고봉이 태어나던 시기는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민족적 암운(暗雲)이 길게 드리운 시절이었다. 탄생지 고성은 불보살의 고향이라고 일컬어지는 금강산의 영봉(靈峰)과 해금강의 절경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동해를 거울로 삼고 있는 성역의 고장이다. 고봉의 성품이 영민하고 종교적 심성이 두터웠던 것은 아마도 태어난 고장의 자연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고봉은 어린 시절에 고향에 있는 건봉사로 입산하게 되는 기연(機緣)을 만났다. 불교와의 인연은 이로부터다. 건봉사에서 고성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며 초·중등교육을 마쳤다. 그가 어려서부터 불교와 친숙한 삶을 살았던 것은 이런 환경적 요인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6세인 1934년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로 옮겨 그해 8월 5일 경하(耕荷) 화상을 은사로 득도·수계했다. 고봉은 이때 수지한 법명이다. 이후 이곳 전문강원의 성능복문(性能福文) 문하에서 1941년 초까지 사미과부터 대교과에 이르는 일대시교를 이수했다. 강원 시절 고봉의 뛰어난 한문독해 능력과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는 발군의 실력이었다고 전한다.

전통적인 강원교육을 이수한 고봉은 불교학에 대한 목마름이 컸던지 1941년 4월, 23세 때 근대학문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해 새로운 학문과 교화의 원력을 세운다. 그의 이러한 원력은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한 이후 교단 일선에서 그대로 구현되었다. 1943년 용주사 수원포교소(지금의 수원포교당)를 개창하고 포교사로서 교화 현장을 누볐으며, 1944년부터 1953년까지 탄생지인 고성의 남공립국민학교 교사와 고성의 송강국민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후 고성의 고성중·송탄중 교사 및 거진여중 교감과 용주사 자혜원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학교교육과 대중포교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이념을 현실 속에 실천해갔다.

고봉은 8·15광복 직후 우리 사회를 비롯한 교단의 혼란상과 6·25 참극을 몸소 체험하면서 불교도로서 정진해야 할 방향을 더욱 분명하게 끌어안았다. 혜화전문학교 시절 은사인 뇌허 김동화(雷虛 金東華, 1902~1980)의 권면으로 불교학 연구를 더 깊게 하고 이를 통한 포교원력을 더욱 확장하고자 했다. 그래서 1953년 35세 때 다시금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3학년에 편입해 학부와 석·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그 무렵, 수원에 마하사(지금의 대승원)를 창건해 대중교화에도 열성이었다. 1960년부터는 불교학과 교수로 동국대 강단에 서게 되었다. 불교개혁사상과 생활불교에 바탕한 포교활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다.

고봉의 학문세계는 구사(俱舍)·유식(唯識)·인명(因明)·삼론(三論)·기신(起信)·화엄(華嚴)·천태(天台) 등 불교학 전반에 걸쳐 통효(通曉)했다. 그의 논리적 명료함과 사상적 심오함과 이론적 체계의 정치성(精緻性) 등 탁월한 식견은 당대 학자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이 가운데 특히 구사·유식 분야의 해박함은 놀라웠다. 그는 혜화전문학교 시절부터 뇌허 김동화의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며 그 학맥(學脈)을 계승했다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봉의 제자이자 유식학의 거장인 동국대 명예교수 오형근은 “유식학과 인명학은 당시 한국불교학에서는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척박한 분야로서, 불교학계에서 유식학과 인명학이 연구되고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고봉의 학문세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회고한다.

고봉의 불교학문적 탁견은 그가 일생을 두고 추구하고자 했던 보살불교와 생활불교의 이론적 전거를 제시해주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불교학문이 고양될수록 고봉의 교단을 향한 지속적인 불교개혁론은 더욱 빛을 발했고, 불교개혁을 위한 실천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는 토대로 작용했다.

고봉이 당대의 절체절명한 당면과제로서 목소리를 높였던 불교개혁의 요체는 첫째 불교교육(佛敎敎育), 둘째 불법포교(佛法布敎), 셋째 불교의식(佛敎儀式) 등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정화유시가 선포된 1954년 5월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정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심한 갈등을 빚었던 교단분규는 불교현대화의 큰 걸림돌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침체할 대로 침체했던 불교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교육, 포교 의식 세 분야가 현대화·대중화·생활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첫째, 불교교육개혁에 대해 고봉은 당시 불교학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학자들로 하여금 의도적인 외면과 침묵에서 깨어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봉이 불교학계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내용을 보면, 불교학 발전의 전제로서 언어의 장벽을 깨뜨리는 일을 제일과제로 내세웠다. 역경(譯經)의 효과적인 실효를 거두기 위한 과학적 연구를 주문한 것이다. 또한 교재 선택과 교수방법(敎授方法)의 과학적 개편이다. 학문적인 면을 전연 무시함으로써 전일(全一)의 불교를 이해하기 힘든 습선(習禪) 위주의 강원 교육과정을 전면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대학교육의 객관적이고 밀도 있는 이론 강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지목행족(知目行足)이라는 이론과 실천을 겸전할 수 있는 불교교육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고봉이 부파불교의 대표 논전인 구사학과 대승불교의 대표 논전인 유식학 연구에 천착하게 된 배경이 이에 해당한다. 불교역사와 불교의식(佛敎儀式)의 필수교육도 고봉이 주창한 빼놓을 수 없는 교육개혁의 범주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교단의 동정(動靜)에 대해 불교학자가 침묵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이다. 불교학계가 교단의 진로 향방을 과감하게 제시해야 하며, 불교학이 대중에게 강한 영향력을 구사할 수 없다면 무가치할뿐더러 불교 자체의 존망에 직결되는 지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불법포교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향과 그 방법 등을 제시한 개혁 방안이다. 고봉은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몇 가지 근본 문제를 먼저 지적하고 있다. △제도에 앞서 기본태세(基本態勢) 확립 △사원 중심의 소극적이고 정적(靜的)인 방식을 지양하고 대중을 직접 찾아가는 적극적이고 동적(動的)인 포교활동 △잡신앙을 일소하는 신앙정화로써 과감한 자기혁명 단행 등이 그것이다.

고봉에 지론에 따르면 포교의 기본태세는 대·소승의 교리를 통효(通曉)해 이론으로 무장하며, 자내(自內)의 실수력(實修力)과 실천력을 수반하는 자세를 일컫는다. 파사현정의 이론 확립 없이는 자리자각(自利自覺)의 독선기신(獨善其身)에 빠져 이타각타(利他覺他)의 보살행을 할 수 없을뿐더러 체험 없는 이론은 한갓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하등의 감화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원 중심의 포교를 지양하자는 논리는 출·재가를 막론한 불교인들의 소극적이고 정적인 포교활동을 지적한 현안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전도 선언 이후 열반 때까지 멈추지 않았던 부처님의 전법여정은 물론, 화려장엄한 사원을 떠나 홍진만장(紅塵萬丈)한 잡답(雜沓)과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초동촌부(樵童村婦)들까지도 불교에 귀의시킨 원효의 보살행각을 불교인 모두가 앞장서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앙정화로써 자기혁명에 과감하자는 것은 팔부신중을 위시해 북두칠성·명부시왕·조왕·산신 등 전시대 유물인 잡신앙을 버리고 신앙정화를 단행하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곧 만해 한용운이 일찍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염불당과 각종 소회(塑繪)의 폐단을 성토하고 나선 그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봉은 이러한 몇 가지 근본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는 실천운동에 나서야 하는데, 그 전개 방법으로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생활화를 제시하고 있다. 불교의 현대화는 현대인의 고민을 해결하고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불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현대인의 공통된 고민인 빈곤과 불안의 절망을 희망으로 건져 올리는 일이요, 교육포교·불교의식과 생활제도·신앙대상 등을 모두 현대적 감각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불교의 대중화는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모두 믿는 불교여야 하며, 어디에서나 행할 수 있어 일상생활과 상충되지 않는 불교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생활화는 대중이 일상생활을 가치화해 불교와 생활을 구분하지 않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칭한다.

셋째, 고봉의 또 하나의 개혁 요체인 불교의식(佛敎儀式) 개혁론을 보면 △의식의 간소화 △현대인에 맞는 생활감각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의식의 간소화는 현행되는 불교의식이 너무 복잡해 의식주의종교(儀式主義宗敎)의 난(難)을 면할 수 없는 현실을 개선하자는 취지이다. 객관을 무시한 비대중적 행사는 오히려 포교의 효과보다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적한다. 현대인의 생활감각에 맞아야 한다는 것은 승려 본위로 전문화되면서 재가불자나 일반 대중에게 하등의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로 지목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원칙하에 ①신앙의 대상을 정화하고 ②동일한 내용을 단일화하며 ③범패로 할 수 있는 의식문은 취사선택하되 그 밖에 현대인, 특히 청소년의 감각을 맞추는 성가(聖歌)를 제정해 일상법회에서 가창(歌唱)하도록 하고 ④의식할 때 사용하는 악기류를 최소화해 의식의 형식을 쇄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봉이 불교교육·불법포교·불교의식 등의 분야에서 주지시키고 있는 개혁의 요체는 이미 40~50년 전에 제시된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안들은 어떤 것은 이미 현실화된 것도 있으나 다수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들이라는 점에서 그의 개혁론이 학문적 깊이와 넓이는 물론 그에 기반한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당대를 아우르고 시대를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고봉은 이러한 불교개혁론의 당위적 가치기반을 보살도사상(菩薩道思想)에서 찾았다. 불교개혁론의 사상성과 실천강령을 대승보살불교로 귀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국대 교수를 지낸 박선영은 보살도사상으로 상징되는 고봉의 불교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인간사회의 삶으로부터 멀리 떠나간, 그래서 사회의 제도(濟度)에 대해서는 전연 무관심한 소승불교를 전환해 지혜와 자비의 원력으로 세상을 정화하고자 나타난 것이 대승불교이다. 그러하기에 대승불교경전에는 초기경전과는 다르게 예외 없이 부처님의 설법 대상자로 보살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에게는 항상 부처님께서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들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등으로 타이르고 바로잡아 주는 대상으로 등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이념적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가 하면, 근세 조선조 500년의 찌들고 일그러진 불교의 모습과 인습에 절어 진취성을 잃고 있다. 갖고자 하는 소망이나 얻고, 목전에 직면한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성취를 위한 복전이 됨으로써 만족하고 있다. 어느 하나 살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불교는 점차 인간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시대적 발전이나 요청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비불교적 난신(亂信) 속에서 미신으로 오해되거나 전락되고 있는 것이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한국불교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그것은 삶 속에서 삶을 통해 구현되는 불교에로의 방향이다. 생활 속에서 함께 불법을 찾고 실현하면서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불교여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살불교의 실현이다. 그 보살불교란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생활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고봉 황성기가 불교사상연구회에서 펴낸 월간지 《불교생활》 창간호(1964. 12).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를 내세웠다.
고봉은 보살불교를 현실 속에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1964년 7월 25일 ‘불교사상연구회’를 설립해 은사인 김동화를 회장으로 모시고 고봉 자신은 부회장에 취임한 후 이를 기반으로 대중교화에 박차를 가했다. ‘불교사상연구회’는 ‘사찰중심 불교를 교리중심 불교로’ ‘승려본위 불교를 신앙본위 불교로’ ‘형식주의 불교를 구제주의 불교로’를 실천 모토로 삼았다. 이와 함께 봉사[布施]·인내[忍辱]·노력[精進]으로써 불교를 현대화·대중화·생활화해 광제중생(廣濟衆生)이라는 불교 본래의 사명을 다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고봉은 ‘불교사상연구회’를 기반으로 1961년부터 자비를 들여 발행해오던 월간지 《불교사상》의 문서포교 기치를 더욱 고양시켰다. 또한 1964년부터 서울 을지로 5가에 있는 통일예식장을 빌려 매주 ‘불교교리 토요강좌’를 일반부와 청년부로 나누어 실시했다. 나아가 서울·부산·광주·대구·서산·충주·영주 등 경향 각지를 찾아 연중무휴 순회포교에 전력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행보는 모두 그러한 실천 모토의 현실구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불교사상》은 한때 재정난으로 중단 위기에 놓였으나 고봉의 원력에 힘입어 《현대불교》 《불교생활》 등으로 제호를 바꿔가면서 간행이 지속되었다. ‘불교사상연구회’를 설립한 해인 1964년 12월 24일의 수원 지부 결성을 시작으로 1965년 4월 11일 경북 영주에 불교동인회를 결성하고, 그해 4월 18일 충남 서산과 4월 20일 경남 고성에 지부를 결성하는 등 ‘불교사상연구회’의 전국조직화를 모색한 것도 고봉의 그러한 원력의 소산이었다.

고봉은 동국대 교단에서는 전문학도들에게 체계적인 불교를 교육하고, 학교 밖 세간에서는 평이하고 대중적인 법문으로 일반인에게 강연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그가 전문인 양성과 평신도운동에 일가견을 가진 선구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일련의 행적을 보더라도 고봉은 ‘보살승(菩薩僧)’으로서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정체성은 평소에 몸소 실천했던 보살행과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글들은 다수가 대승보살도를 주제로 쓴 내용이다. 이는 곧 그의 평소 지론이요 사상의 표출이며 삶의 실천 목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반증이다. 그의 역저인 《불교학개론》 제3편 제3장에서 ‘대승불교의 보살관’을 주제로 대승의 붓다관·대승의 보살관·대승의 수행관을 논술하고 있다. 또 〈동대신문〉에 기고한 ‘대승보살과 바라밀사상’ 제하의 소논문에서 보살의 만행(萬行)·보살의 대원(大願)·보살의 사섭법(四攝法)·보살의 부주열반(不住涅槃)·보살의 계율관(戒律觀) 등 보살을 주제로 그 정의를 적시하고 있다.

고봉은 대승보살관의 입장에서는 비구와 대처승의 구별이 무의미하며,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출·재가자는 그 형식에 구분 없이 모두 보살승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고봉의 이러한 주장은 비구와 대처승으로 나뉘어 내분을 겪고 있던 당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처승 측의 명분 논리로 작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비구 측으로부터 마땅한 대우를 받을 리 만무했다. 고봉은 대승보살도의 논리가 대승불교 교단에서 치부되는 정서에 못내 안타까움을 삭였으며, 때로는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고봉에게는 불교에 있어서 학문과 수행, 포교와 조직운동 등의 모두가 하나의 다양한 전개였다. 이 다양한 전개 모두가 보살정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세간과 출세간도 동시통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한 그의 불교개혁론은 분규로 점철된 당시 교단의 암울한 상황에 대한 반성이자 과제였다. 보살불교로 한국불교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그의 원력과 호소는 1979년 과로로 쓰러져 중환을 앓는 순간까지 계속됐지만 쉽게 성취되지 않았다. 급기야 1979년 12월 4일(음 10.15) 세납 61세 법랍 46세로 입적하자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3. 보살불교의 논리와 실제

고봉(杲峰) 황성기의 평소 지론인 보살불교는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의 교육·포교·의식 등 3대 분야에서 현대화·대중화·생활화를 갈망했던 불교개혁의 사상적·실천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고봉의 보살불교의 논리와 실제에 접근해보는 작업은 그의 불교사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다. 아울러 보살도사상에 입각해 불교개혁을 추동했던 배경과 관련해 그가 고뇌했던 당시 불교계의 제문제와 통철한 분석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대승불교임을 자임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그 지표와 향방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거듭 확인하는 일일 수 있다. 고봉은 보살불교의 요체(要諦)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승하는 사람은 ‘비구’라고 일컫는 데 반해 대승(大乘)하는 사람은 ‘보살’이라고 일컬어 ‘위로 불지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함[上求佛智 下化衆生]’에 근본이념을 두고 있다. 또한 소승은 해(解)를 주로 하여 스스로 구제받은 뒤 남을 구제한다는 자리주의적(自利主義的)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대승은 행(行)을 중히 여겨 스스로 구제받기에 앞서 남을 먼저 구제하는 이타주의적(利他主義的) 입장을 취하고 있으니, 소승은 생사에 머무르지 않는 데[不住生死] 반해 대승은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다[不住涅槃]. 그렇듯 대개 보살이란 성불을 최상 구경(究竟)의 목적으로 하되 구제중생(救濟衆生)으로 그 방편을 삼는 것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부처가 되기 위해 그 목적수행의 방편수단으로서 중생을 제도하는 데 전력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보살의 육도만행(六道萬行)인 것이다.

여기서 고봉이 정의하는 육도만행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요, 둘째 사회를 정화하는 일이며, 셋째 자아를 완성하는 일이다. 고봉은 보살이 이러한 육도만행을 실천하기에 위해서는 보다 자율적이고 자각적인 마음과 몸가짐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사홍서원·삼취정계·사섭법을 기본자세로 하고, 육바라밀 또는 십바라밀을 아우르는 보살행도의 진수로서 보시[無報酬 奉仕]·인욕[無嗔恨 忍耐]·정진[無放逸 努力] 바라밀을 육도만행을 성취하기 위한 철학적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고봉이 바라보았던 당시 불교계의 제 모순과 그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공식 출범한 지 3개월쯤 지난 1962년 7월, 그가 발행하던 《불교사상》 제10호에 기고한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제하의 글이 주목된다. 고봉은 이 글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통합시책의 주효로 겉모양으로는 분규가 종료되고 종단이 통합된 듯이 일반사회에서는 속단할 수 있겠으나 여전히 교단의 전도(前途)를 낙관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전제하고 역사적 고찰을 토대로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고봉이 본 당시 교단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병을 고치려면 병의 근원을 알아야 하듯이 불교분규를 해결하자면 그 원인과 진상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분규를 건설적인 의미에서 평가한다면 일련의 발전과 정의 피치 못할 현상이라고 하겠으니, 그것은 인도불교가 부처님 입멸 이후 상좌(上座)·대중(大衆)의 두 부로 분열되어 점차로 20개 부파를 형성한 것이라든지, 그 후 대승불교에 의해 소승부파불교가 부정된 것이라든지, 중국불교가 주로 대승불교였지만 각종(各宗)으로 분립해 난국의 미(蘭菊之美)를 다툰 것이라든지, 한국불교가 신라의 오교구산과 고려의 오교양종의 분파로 전체 불교를 발전시킨 것들은 일향에 분열이라고 나무랄 수 없는 발전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경우에 있어서 피차의 대립은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논리와 철학과 신념과 명분 있는 투쟁이었으나, 오늘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함을 유감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생명인 신앙, 신앙의 토대인 교리에 시비(是非)의 중점이 있지 않고 세속적 주권쟁탈을 위해 인신공격으로 시종(始終)한 듯한 인상을 준 것이 오늘 한국불교 분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고봉은 이 글에서 당시 비구 측이 주장한 대처승에 대한 왜색승 운운의 개념정의와 파계 여부, 종조 문제 등에 대한 시시비비를 역사성과 소·대승의 계율 등을 들어 본질을 설명하면서 비구 측이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고봉은 대처승이 주장한 ‘비구의 소승유물론(小乘遺物論)’과 취처(娶妻)가 파계가 아니라는 등의 교리상 정당한 근거를 갖고서도 정부 당국이나 일반 사회의 지지와 동정을 받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도 냉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대처승들의 종교적 실천생활(보살행)의 결여와 자기 신념의 박약이 근본 원인이라는 성토가 그것이다.

고봉은 이 글 말미에서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분규와 직접 관계되는 내용을 제외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제안이 곧 종명(宗名) 없는 ‘한국불교’로 통합하자는 내용이다. 분규 당사자로서는 통합이 단지 아름다운 공상 같은 얘기이겠지만 가능하다면 피차 양보해 무조건 통합하도록 추진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고봉의 지적도 지적이거니와 필자도 고봉을 조명하는 이번 기회를 빌려 조계종이든 태고종이든 한국불교의 정통성과 전통성을 모두 부여받고 있다고 자임하는 종단이라면 편협한 종파명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즉 현재의 종명보다는 ‘대한불교’ 또는 ‘한국불교’라는 단일교단명으로 통칭하는 작업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광복 직후 교단 명칭을 ‘조선불교’로 칭한 역사적 사례도 있었고, 총무원 체제가 다름 아닌 일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첨언하지 않더라도 가칭 ‘대한불교중앙본부(중앙교단)’ ‘한국불교중앙본부(중앙교단)’ 등 통합 명칭을 선점하는 종단이 향후 한국불교를 대변하거나 상징하는 교단으로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봉은 결론적으로 한쪽에 대해서는 “선(禪)만이 유일한 불교수행 방법이요 다른 것은 외도의 짓이라는 이론만으로는 불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실천(보살행)이 없는 공리공론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질타했다. 또 다른 한쪽을 향해서는 “종교적 실천(보살행) 없이 대처만을 대승불교라고 내세운다면 염치없는 권리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고봉의 이러한 입장은 보살승에 대한 그의 분명한 사상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의 보살승에 대한 개념정의를 살펴보자.

얼핏 겉으로 보기에는 소승의 비구는 그 금계(禁戒)가 혹엄(酷嚴)하고 대승의 보살은 편의(便宜)한 듯 하지만 내용은 그 반대이다. 비구계는 신계(身戒)이므로 마음으로는 어떠한 생각을 가졌던 몸으로만 범하지 않으면 지계(持戒)가 되지만, 보살계는 심계(心戒, 性戒)이므로 몸으로는 물론 마음으로 범해도 파계가 된다. 따라서 비구가 형식상 독신생활(獨身生活)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고승이라고 할 수 없는 반면에 보살이 외관상 취처생활(娶妻生活)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파계라고 단정할 수 없다. 요는 얼마나 거짓과 꾸밈의 안팎이 없는 양심적인 생활이냐가 지계(持戒)의 기준이요, 얼마나 경계를 대해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느냐가 수행의 척도요, 얼마나 중생을 위해 봉사의 이익을 주느냐가 승려의 가치표준일 뿐 다른 것은 문제 삼을 나위도 없는 것이다.

고봉이 당대의 불교개혁을 논하고 그를 통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했던 고뇌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뚜렷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오늘날 출가승려들의 삭발염의한 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고봉은 일찍이 그 해답을 제시해 놓았던 것이다. 고봉이 가졌던 이 같은 불교관과 교단에 대한 냉철한 분석은 오늘날 비구 측의 유산인 조계종과 대처승 측의 유산인 태고종, 교단의 진로 향방을 제시해줄 의무가 있는 불교학계의 현실을 객관화할 경우 그 이념적 차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뿐만 아니라 당해 구성원들의 현실직시와 발로참회를 강하게 촉(促)하는 경책이 아닐 수 없다.


4. 나오는 말

지금까지 고봉 황성기의 불교개혁론과 보살불교의 실제 등을 그가 남긴 자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단지 황성기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을 넘어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비애이기도 하다. 고봉에 대한 몇 가지 아쉬운 점과 그의 비원(悲願)이 시공간을 초월해 구현될 수 있기를 바라는 내용 몇 가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본 고찰의 마무리를 대신한다.

첫째, 고봉 황성기의 불교개혁론과 보살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의 구체적인 행장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평가가 요망된다. 고봉이 살았던 근·현대기, 특히 광복 이후 그가 입적한 1979년까지의 현대기 교단 상황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냉철한 분석과 객관적인 평가가 유보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한 역사성의 한가운데에 황성기라는 인물이 우뚝 서 있으나 전혀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본 고찰에서는 고봉이 대학 교단에 있으면서도 지난했던 교단사 뒤에 숨지 않고 전면에서 그 나아갈 방향과 논리를 제공하고 불교가 살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개진하는 등 불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현양한 사실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구체적인 생애와 사상을 심층 연구·분석해 그 가치를 현실에서 현현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둘째, 고봉 황성기의 불교개혁론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는 데 있어서 당시 불교계의 동향과 제 문제점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와 그 이유 등을 총체적으로 정리할 과제를 남겼다. 고봉에게 깊이 각인되었던 불교적 사고와 개혁의 원력도 모두 시대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기에 당시의 교단 상황을 위시해 여타 구성원들과의 인연관계와 작금의 교단 상황 등을 상호 비교·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셋째, 고봉 황성기의 철학적·사상적·실천적 기반이요 개혁사상의 토대였던 보살불교와 대승불교임을 자임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역학관계를 살펴 그 둘의 만남이 유용한 것인지 무용한 것인지 진지하고도 심도 있는 논의가 요청된다. 그의 보살불교와 생활불교가 대승불교의 요체를 벗어나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에 대한 연구가 전연 황무지였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고봉을 둘러싼 몇 가지 아쉬운 점과 과제를 정리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던져준 긴요한 교훈을 얻었다. 승자독식(勝者獨食) 내지 민감성의 논리로 근·현대기를 살다간 주요한 인물들을 역사에 묻어버리는 과오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근·현대기 한국불교 개혁론을 총합적으로 논하는 자리에서 고봉 황성기라는 새로운 인물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으나, 이를 계기로 역사 속에 묻힌 더 많은 인물들을 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춘생 / 동방불교대학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이사, 한국불교기자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 근·현대 비구니의 문중형성과 그 의의〉 등과 저서로 《깨달음의 꽃:한국불교를 빛낸 근세비구니 1,2》·《현대불교사의 이해와 실천사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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