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性徹, 1912~1993)]

1. 들어가는 글

 

성철(性徹, 1912~1993)

성철은 1912년에 태어나서 1993년에 입멸하였다. 올해는 그의 탄생 백 주년을 맞는 해이며 입멸한 지 20년에 접어드는 해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지만, 그는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론에 대한 글이라고 할 만한 것도 꽤 있다. 성철의 개혁론만을 주제로 다룬 글들 가운데서 출간 연도로 가장 앞서는 것은 김경집의 〈퇴옹성철의 개혁사상 연구〉가 있다. 그러나 출간은 늦지만 발표는 이보다 앞선 김광식의 〈이성철의 불교개혁론〉이란 글이 있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쓴 김광식의 글은 성철이 조계종의 제도개혁과 관련해서 행한 일들과 표명한 입장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필자가 쓴 〈한국불교 현실에 대한 성철의 대응과 돈오돈수〉 역시 그의 개혁론에 관한 글이다. 그간 성철에 관한 연구는 주로 그의 돈오돈수 사상에 관한 것인데, 이 글은 돈오돈수사상이라는 수증론을 사회적 맥락에서 논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시대 상황에서의 의미를 다룬 〈1960년대 한국불교와 성철의 활동: 봉암사 결사와 해인총림〉 역시 성철의 개혁론에 관한 글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신규탁의 〈성철 선사의 불교관에 나타난 개혁적 요소 고찰〉, 김경집이 2010년에 발표한 〈1980년에 발표된 성철 스님의 종단개혁론〉, 최원섭의 〈불교의 현대화에 담긴 퇴옹성철의 의도〉 등이 있다.

성철은 사실상 동시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진 만큼 새로운 자료나 사실이 발견되어 이를 토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실과 자료에 기초하더라도 어떠한 관점에서 이 사실과 재료들을 평가하느냐에 따라 글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위에 소개된 글들은 개혁에 관한 글들이긴 하지만 주로 당대 조계종의 어떠한 제도나 관행을 바꾸려고 했느냐를 구체적 사실 위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그의 개혁론들이 의미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논의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성철의 불교개혁론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심도 있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첫째로 그가 한국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고, 둘째는 그의 개혁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상적 성격 때문이다. 먼저 성철의 한국불교사에서의 위치를 보면, 성철은 한국불교사를 통틀어서 원효, 지눌, 만해 다음으로 많은 주목을 학계로부터 받은 인물일 것이다. 성철이 한국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앞으로 한국불교가 어떻게 전개될지, 또 연구자들이 성철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과 평가를 보여줄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는 원효, 지눌, 만해처럼 한국불교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로 평가될 가능성이 있다. 성철은 사상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한국 현대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철은 그는 한국불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조계종 종정의 위치에서 조계종이 나아갈 방향을 사상과 제도 두 면에서 모두 제시하였고 이를 상당 부분 실행에 옮겼다. 그가 죽은 지 2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조계종은 그가 제시한 방향성을 중심에 두고 씨름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의 불교개혁론의 독특한 사상적 성격인데, 이는 이 글 전체에 걸쳐서 논의될 문제이다. 다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불교개혁론은 일반적인 개혁론과 달리 매우 근본주의적인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본주의란 일반적으로 반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성철의 사상은 근본주의적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개혁적인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의 개혁론이 이러한 독특성을 가지게 된 데는 불교의 철학적 성격, 그리고 근대사회의 성격, 그의 시대에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 성철의 조계종 개혁 추구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은 명백히 보수적인 사람이며, 또 그렇게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성철이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불교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조계종에 대해 아무런 개혁적인 조치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한국불교계와 한국사회에서 유명해지고 또 중요해진 것은 그가 기존 한국불교계의 풍토, 제도, 관행을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변화시키려고 시도하고 앞장섰기 때문이다.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법회(문경 봉암사 2007. 10. 19).
성철은 나름대로 일관되게 조계종의 변화를 추구했는데, 그 방향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그가 봉암사 결사에서 행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다. 그는 1947년에 봉암사로 들어가서 이른바 봉암사 결사를 시작한다. 그가 봉암사 결사를 하게 된 것은 한국불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성철은 당시의 한국불교의 상황을 단적으로 ‘불교 교법이 전연 민멸된 말법시대’로 규정하고 있으며, 결사의 목적을 다소간이나마 그렇게 민멸된 교법 복구에 두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칠성각, 산신각을 부수고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를 제거하였으며, 기복적인 불공과 천도재를 거부하였다. 칠성각과 산신각 그리고 이와 연관된 탱화들은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라 불교가 한국의 토착신앙을 습합하면서 불교에 들어온 것들이다. 불교의 원래 교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불교 내의 비불교적 요소를 제거하고 불교 고유의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유의 불교는 또한 기복성이 제거된 불교이다. 불공과 천도제를 거부하는 것은 대중적 신앙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매우 비타협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찰 내로 들어온 민간신앙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일본강점기 가장 급진적인 불교 개혁론자라 할 수 있는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주장하던 바이기도 하다.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을 미신하고, 또 칠성을 미신하고, 또 시왕을 미신하고, 또 신중을 미신하고, 또 천왕, 조왕, 산신, 국사(局司)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찰 내의 비불교적 요소 혹은 민간신앙적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이처럼 성철과 만해는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이 점에서는 만해보다 성철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더욱 철저하다고 할 수 있다. 만해는 이론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데 그쳤으며 불상의 철거까지 주장하지 않았으나, 성철은 모든 전각들에서 비불교적 신앙 상징물들을 모두 실제로 없애 버렸다. 심지어는 불상조차도 없애버렸다. 또 모든 기복적인 행위들도 그만두게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성철은 매우 근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산신신앙이나 불공, 천도재 같은 행위는 근대의 과학적 사고로는 용납할 수 없는 미신적 행위이며, 이것을 제거하는 것은 근대적 사고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철은 불교가 근대의 과학적 사고가 정당한 것이며,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있고, 불교는 이러한 근대의 과학적 사고와 일치한다고 보고 이를 부각시키려 하기도 하였다. 성철은 《영원한 자유》 전권에 걸쳐서 불교와 과학과의 유사성에 대해 장황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의 과학에 대한 인식은 체계적이거나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 과학과 과학적 사고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래 인용문은 기독교 교리의 허구성을 비판할 의도에서 진술된 내용인데, 과학과 과학적 사고에 대한 거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과학의 발달로 그 전에는 신비롭게만 여기던 자연 현상이나 우주의 모습이 신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이 갖게 된 당연한 변화입니다. 우주의 모습까지 밝혀낸 현대에 와서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나 천당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통하지 않는, 설득력 없는 강요에 지나니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믿으라고만 강요하기에 앞서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객관성이 없는 이론은 그야말로 아무 근거 없는 공론이라 하여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단의 서두는 현대의 과학상의 발견 자체가 인간의 종교 활동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고, 문단 끝의 ‘객관적 증명’이란 말은 과학적 사고방식 자체가 진리 판단의 기준이며 이것이 종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적 진리를 기준으로 종교를 비판하면 기독교 같은 종교가 가장 큰 타격을 받지만 불교 역시 전적으로 예외는 아니다. 성철은 과학적 진리를 기준으로 불교의 관행도 비판한다. 성철에 의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나 서방정토 역시 ‘거짓’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무지한 중생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과학의 발달로 이러한 방편들이 더 이상 그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사회적 조건이 창출되어 이제 버려야 한다고 본다.

성철의 근대성 수용은 근대과학의 수용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철은 1967년 8월 말 해인총림 방장으로 취임하면서 승려 교육제도 개혁에 나선다. 그는 근대적 교육방식을 도입하여 조계종의 교육체계를 개혁하려 한다. 사실 승려교육은 20세기 초부터 근대문명과 전면적으로 만난 불교계의 지속적인 과제였다. 20세기 초에 여러 불교개혁론이 제시되었는데, 승려교육은 이들 개혁론 일반에서 가장 주요한 과제로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내부적 혼란으로 교육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1967년 5월 25일 ‘전국불교도대표자대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승가에 있어서는 불교의 백장청규에 의한 총림이 설치되어야 한다. 총림에는 엄격한 규제가 선행되어야 하며 총림에는 선·교·율을 병수해야 한다. 또한 승려의 현대적인 자질향상을 위하여 교과목은 외전 및 일반사회과학도 선택할 수 있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승가대학이 설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승려에게 정례적인 특별교육을 실시한다. 해외유학제도를 마련하여 유학을 장려한다.

전통적으로 근대 이후 승려대회는 혁신적인 방향을 추구해 왔는데, 위 대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승려대회의 혁신적 결의는 조계종의 입법기관이라 할 수 있는 ‘중앙종회’에서 훨씬 보수화되었던 모양이다. 성철은 중앙종회의 보수성을 비판하면서 ‘전국불교도대표자대회’의 개혁적 취지를 되살리려 하였다. 1967년 12월 7일 자 〈대한일보〉의 인터뷰 기사는 풍문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성철의 해인총림 구상에 대해서 쓴 것인데, 이 구상의 보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강원의 학과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전심법요傳心法要》 《돈오요문頓悟要門》 《영가집永嘉集》 《육조단경六祖壇經》 《임제록臨濟錄》 《종경록宗鏡錄》 등으로 대체한다는데 과연 이런 교과 내용에서 시대와 사회가 갈망하고 있는 종교적인 인물이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정규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바 없다는 ‘순수성’만으로 현대교육의 최고학부인 대학을 어떻게 구상하고 운영해 나갈 것인가는 차치하고라도…….

그런 다음 그는 해인총림의 방장으로서 총림의 당면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암중모색에서 새어 나오는 소린즉, 첫째 환경정리, 둘째 선실 개조, 셋째 교육시설이라고 한다. 환경정리란 관광객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서 일주문 밖에 담쌓는 일이고, 선실개조는 참선하는 데 적합하도록 방사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며, 교육시설은 수선도오(修禪道悟)를 목표로 한 체계 아래 승가대학의 설립을 뜻한다.

환경정리, 선실 개조, 교육시설을 해인총림의 삼대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환경정리는 절에 관광객 출입을 제한하여 수행 분위기를 갖추려는 것이고, 선실 개조는 방사를 참선에 적합하도록 바꾸려는 것이며, 교육시설은 승가대학의 설립이었다. 참선수행을 중시한 성철이 사찰의 환경정리와 선실 개조를 통해서 선풍을 진작시키려고 한 것은 방장이 된 그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과제 설정으로 보인다. 그런데 승가대학을 설치하겠다는 것은 의외로 비칠 수도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개혁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이 승가대학 설치안을 구체화하여 1967년 12월 종회에 자신의 이름으로 ‘해인총림계획안’과 ‘승가대학설치계획안’을 제출하였다.

우선 총림의 성격을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고 종단 각 기구 및 현대불교를 담당할 기간요원을 양성한다”고 하고 있고, 교육방침을 “불조홍원(佛祖弘願)의 실현을 현대에서 담당할 불자의 자각과 사명감과 서원을 굳게 한다”고 하여 승려의 교육에도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계획안에는 불교인들도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총림이 이러한 필요성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곳곳에 배여 있다. 계획안의 ‘5. 기능’에서는 “종학원은 광범한 일반교양과 심오한 종학을 연구하여……”라고 하고 있으며, 또 “승가대학은 불교학의 현대적 개명을 연구하며 보편적이고 종합적인 일반 학문을 겸수함으로써 현대불교의 행동자이며 종문의 정예를 양성한다.”라고 하고 있다.

총림과 승가대학을 통하여 한국불교를 현대사회에 적응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입학자격과 교과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입학자격을 사회 일반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승가교육만으로는 현대사회에서의 승려교육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또 교과목에 “국어, 논리학, 법학통론, 심리학, 체육, 문화사, 문학개론, 정치학, 윤리학, 음악, 자연과학개론, 사회학, 경제원론, 생물학, 영어, 철학개론, 철학사, 교육원리, 교육행정학” 등을 넣어 교육 내용의 현대화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려고 하고 있다.

성철의 이러한 해인총림 계획안과 승가대학 설치안은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승가대학은 문교부가 인가하는 정식 4년제 대학을 계획하고 정부에 서류를 제출하였으나 인가받지 못했으며, 해인총림 역시 종단의 재정지원 부실 등으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 계획안에 나와 있는 승려교육안의 개혁에 성철이 근대적 계획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엇보다도 승가교육의 혁신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0·27 법난 직후에 승가교육 개혁의 의지를 재천명한다. 그는 1980년 12월 21일에 발간된 〈불교신문〉 창간호와 28일의 〈불교신문〉 2호에 걸쳐서 ‘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이란 제목의 글을 상, 하로 나누어 발표한다. 상편은 승려교육에 관한 것이고, 하편은 재정에 관한 문제인데, 재정에 관한 문제 역시 승려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이 기고문에서 그는 불교 중흥의 핵심은 승려 자질의 향상이며, 승려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승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재정의 중앙집권화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1960년대 말 해인총림 방장 취임 직후에 시도했던 승가 교육제도 개혁 시도가 실패한 근본 이유가 재정 문제였기 때문이다. 신문에 기고한 글이어서 제도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제시되고 있지 않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1960년대 말에 종회에 지시했던 ‘해인총림계획안’과 ‘승가대학설치계획안’이 그대로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승가대학의 위치를 “산중의 절에다 승가대학을 세움이 바람직하지만 교수의 확보와 문화중심지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대학이 운영되는 것이 좋으므로 서울 또는 서울 근교의 사찰”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서 승려들에게 현대문화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성철의 근본주의

성철은 이처럼 주로 승려 교육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불교의 중흥을 꾀했으며, 그 개혁의 방향성은 전통시대에 머물러 있는 불교에 현대문화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근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확고부동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과학적 사고를 진리의 확정 기준으로 인정하면서, 불교에 들어와 있지만 이러한 과학적 발견과 과학적 사고와 어긋나는 민간신앙적 요소들을 미신으로 간주하면서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 점에서도 그는 현대성을 수용하면서 불교문화를 개혁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그의 불교개혁론 역시 20세기 초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다양한 불교개혁론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성철의 불교개혁론은 근대적 사고방식에 기초하여 불교를 개혁하려는 불교개혁론자 일반과는 전혀 다른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성철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것과 현대적 승가대학 같은 승려교육제도를 갖추고자 한 것은 현대사회의 문화나 현대적 가치들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과학과 교육제도 외의 면에서는 그는 비타협적으로 전통을 고수하고 부흥시키려 하였다. 성철은 기본적으로 근대주의자가 아니라 전통주의자이며, 또 근본주의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에는 만고에 일관된 진리가 있을 뿐,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시하처(何時何處)를 막론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만사를 행할 따름입니다…… 천겁을 지나도 과거 아니요, 만세에 걸쳐 항상 지금이로다.

근본주의자로서의 성철의 이러한 철학이 실제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단적 예는 그가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면서 만든 승가의 생활규칙들이다. 성철은 봉암사 결사 참가자들이 함께 살면서 지켜야 할 생활규칙[共住規約]을 18가지로 제시하였는데, 이 규칙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다.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사견은 절대 배제함” “가사는 면과 마에 한하고 괴색으로 칠함” “발우는 흙발우 외의 사용을 금함” 불교 승려들이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견을 배제함’이란 말 속에는 전통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을 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면과 마로만 된 옷에 괴색을 칠하라는 것, 그리고 흙발우를 사용하라는 것은 그러한 전통을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그러한 태도를 생활상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다.

성철이 불교에 습합되어 있는 민간신앙적 요소를 제거하려 한 것 역시 그것이 비과학적인 미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이러한 민간신앙적 요소들이 바로 전하기 어려운 불법을 전하기 위한 방편들이며, 방편이란 결코 진리에 이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믿는 성철에게서 일체의 방편가설은 해로운 거짓이다. 그것은 삿된 믿음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얽어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루바삐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불교에 방편이 있었던 이유는 중생의 어리석음 때문인데 이제 우리는 그러한 방편을 버려야 할 때인 것이다. 성철에 따르면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오직 참선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방편가설을 버리고자 한 것은 그러한 방편이 불교의 진리는 영원불변의 진리라는 근본주의적 사고에 위배되기 때문이지, 그것이 과학적 세계관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다.

성철은 과학적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적 지식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고 과학자체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이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있어서, 한 시대성을 완전히 여의어서는 우리가 불교를 소개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요새 현대과학을 갖다가 불교를 소개하는 한 도루로, 한 중개물로 삼아 이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다 이 말이여. 안 할 뿐 아니라 거기 완전히 배치된다면 또 불교는 서지 못하고, 그래서 내가 여러 가지 얘기하는 긴데.

성철은 과학을 절대적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절대진리는 불교이며, 과학은 그 절대진리에 포섭되는 부분적 진리인데, 요행히 현대인들이 과학에 매료되어 있어서 과학을 매개로 불교를 우수성을 알리겠다는 것이 성철의 과학에 대한 태도이다. 때문에 그는 과학적 상식과는 상관이 없는 사이비 과학조차도 그것이 불교 교리를 증명한다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는 초심리학(Parapsychology)적 연구 사례를 통한 불교적 정신세계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경우이다. 심지어는 현대과학이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고 불교의 윤회설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과학적 증명이란 과학적 증명과는 상관없는 신비적인 이야기들이다. “성철은 결코 과학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과학적 진리를 보편타당한 진리로 보고 과학적 진리기준을 토대로 불교의 교리를 검토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적 진리의 절대성을 믿는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과학을 포섭하려 한다. “손오공이 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이 성철이 파악하는 과학과 불교의 관계이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영원한 절대 진리이고 과학은 부분적 진리이다. 만약에 과학적 진리들이 그가 믿는 불교 교리와 충동했다면 그는 과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불교는 영원불변의 절대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불교와 맞지 않는 동서고금의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허위이며, 서양의 어떤 위대한 철학자, 종교가, 과학자라고 해도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나서 말하는 것은 한마디도 없다고 본다.

이처럼 성철이 현대과학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과학적 진리 자체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현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현대적 교육체계를 도입하려 한 것 역시 그것이 불교 진리를 깨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들을 불교로 끌어들이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철의 ‘해인총림계획안’과 ‘승가대학설치안’에는 현대의 문화와 교양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임에 분명하지만, 그가 근본주의적 사고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해인총림계획안’에 따르면 그는 총림에 7개의 기구를 두는데, 여기서 최우선시되는 것은 역시 선원이다. 승가대학과 현대교육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에게서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참선수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며, 현대교육은 이 깨침의 내용을 사회에 전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성철의 근본주의적 보수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측면은 승려와 신도의 관계 설정이다. 근대적 인간관계의 핵심은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근대의 인간 평등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신분제도의 철폐, 귀족의 특권 폐지 등으로 실현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의 경우 일반 신도와 신을 매개하는 사제의 위치를 부정하고 평신도가 바로 신과 관계할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성철은 이 점에서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는 승려와 신도와의 관계에서 승려의 절대적 권위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조선시대 이후 승려의 지위는 사회계층상 최하위를 차지하였으며, 이러한 위치는 승려와 신도들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사회가 근대에 들어서고 승려들의 법적 지위가 회복되었지만, 승려와 신도 간의 관습적인 관계는 성철이 봉암사 결사를 하던 무렵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성철은 이 관습을 타파하고 승려와 신도와의 관계에서 전자를 절대시하는 관계로 회복시켰다. 봉암사 결사에서의 수좌들의 철저한 수행이 산 밖으로 알려지면서 신도들이 모여들자 성철은 법회 참가 신도들로 하여금 승려들에게 삼배를 하게 하였다. 성철에 따르면 그것이 부처님이 법도였다. 그는 “이것은 부처님 법이니 어디서든지 스님 만나면 꼭 세 번씩 절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도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절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근대불교사에서 신도가 승려들에게 처음으로 절을 하게 된 것이라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승려와 신도의 이러한 관계는 분명 근대적 인간관계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4. 나가는 말

이처럼 성철은 한편으로는 과학적 사고의 수용, 미신적 신앙의 부정, 승려교육제도의 현대화 등 이른바 현대성을 추구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전통을 복구하려는 근본주의를 추구하였다. 성철은 왜 이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두 측 방향을 추구하였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종교의 속성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성철의 시대인식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종교란 그 자체가 보수적인 것이다. 위에서 이미 개혁이란 말을 계속 사용했지만, 종교라는 말과 개혁이란 말은 쉽게 결합되기 어려운 말이다. 종교에 대해서 다양한 이해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종교의 교리란 어떤 종교이건 쉽게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진리란 절대적으로 옳으며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종교는 늘 보수적 성향을 가지게 되며, 변화란 매우 조심스런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보수성은 그 종교의 교리는 물론이고 그 종교를 유지하는 제도와 관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진리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하면 종교의 교리적 정체성과 개혁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종교의 개혁은 결국 제도나 관행의 개혁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성철의 불교개혁에 관한 태도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다. 성철은 불교를 현대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한 개혁적인 제도의 구축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배후에 있는 그의 사상은 완강히 전통을 유지하려는 근본주의적 사상이었다.

성철은 1947년에 봉암사 결사를 시작할 당시의 한국불교의 상황을 단적으로 ‘불교 교법이 전연 민멸된 말법시대’로 규정하였는데 그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조선조 내내 억압받은 불교는 거의 고사직전의 상태에까지 이른 상황에서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근대문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근대문명과의 만남 과정에서도 한국 불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근대성을 수용하면서 활로를 찾기는 커녕 올히려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세속적 타락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한국불교는 자기정체성의 수립과 근대성 수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모두 않고 있었는데 성철의 근대성 수용과 근본주의 지향은 한국불교가 해결해야 할 이 두 과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과제는 모두 절실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실제의 추구 과정에서는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과제였다. 성철은 이 두 과제 가운데서 후자, 즉 정체성의 확립을 더 중시하였다. 그는 종단 내외의 사정으로 ‘해인총림계획안’과 ‘승가대학설치계획안’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산중에서 철저한 수행생활은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가 한용운이나 여타의 개혁론자들처럼 불교의 근대적 개혁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면, 수행을 잠시 접어두고 ‘해인총림계획안’과 ‘승가대학설치계획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불교의 정체성의 확립 없이는 불교의 대사회적 실천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종교가 정치 이념의 산실”이 되어야 하며 종교가 정치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또 “세속을 불교화(佛敎化)시켜야지, 불교가 세속화하면 불교는 죽어요.”라고 말했는데, 이 역시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믿음이고 말이다.

 

김종인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 저서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평설》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은 왜 몰락하는가》 《Philosophical Contexts for Wonhyo’s Interpretation of Buddhism》 등이 있다. 현재 국제재가불교포럼(International Lay Buddhist Foru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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