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상 (孫珪祥, 1902~1963)]

1. 서 론

 

손규상 (孫珪祥, 1902~1963)

개항 이후 근대에 접어든 불교계가 시급하게 갖추어야 할 것이 개혁적 사고였다. 그것은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인한 정체성의 부재가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0세기 초 한국불교계는 혁신적 변화를 추구한 개혁론들이 발표되었다. 많은 변화가 논의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주체적 활동이 통제되었던 까닭에 많은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불교계는 8·15광복 후 들어온 미 군정의 기독교적 편향정책으로 다시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의 통제에 의해 세가 약해진 불교는 기독교의 급진적 선교정책에 밀려 사회적 역할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 과거의 불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주장한 분이 회당(悔堂) 손규상(孫珪祥, 1902~1963)이다. 근현대 격변기를 보낸 그는 불교와 인연을 맺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깊게 인식하였고,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불교를 정립하였다. 왜냐하면 불교가 오랜 시간 동안 우리 국민의 심성을 이끌어 오면서 국민 정신세계 통일과 고유한 문화의 형성 그리고 정치적 통일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외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주체의식이 불법(佛法)에 있고, 그것은 시대와 사회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사회변화에 따른 불교 변화를 절실하게 바랐다.

회당은 개혁적 변화를 주장하면서 기존 질서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감각의 사고를 창출해 냄으로써 이원적 가치체계의 변모를 꾀하였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일원주의에서 벗어나 한국사회는 물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향이었다.

회당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몇 편의 글로 남겼다. 대부분 1950년대에 집필되어 청장년 시대를 겪으며 보았던 한국불교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소견이 들어 있다. 따라서 그런 개혁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시기 한국불교 변화의 방향을 살펴보는 일이며, 현대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초석이라 할 수 있다.


2. 회당의 생애와 근대의식

회당 손규상은 1902년 5월 10일 경북 울릉도에서 태어나 1963년 10월 16일 대구시 북구 침산동 불승심인당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생애는 대략적으로 한국사에서 외압과 내란이라는 격동의 시대와 일치한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은 이 속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회당의 시대인식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시사한다.

회당의 유년 시절은 사회적으로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민족의 현실이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1910년 일제의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무단통치의 극한적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식민지 체제의 종속적 현실이 가중되었다. 일제는 1911년 6월 총독부 제령 7호로 사찰령을 반포한 이후 7월 8일 총독부는 전문 8조로 된 사찰령 시행규칙을 제정하여 그해 9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한국불교를 30본산으로 구분한 일제는 본산 주지를 총독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하도록 하였다.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된 한국불교는 30본산 체제로 변경되었다. 많은 권한이 주지에게 일임되자 그 자리를 고수하거나 종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본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출가제도, 법계 그리고 의례가 일제의 의도대로 변하였다. 그리고 본사 주지를 공선(公選)으로 선출하면서 본말사의 관계는 관료적으로 변하였다. 계율에서 벗어나 속화된 모습이 나타났다. 그 후 일제가 사찰령을 개정하여 대처식육이 용인되자 한국 불교의 지계(持戒) 정신은 급속도로 변질되었다. 1930년대부터 일제는 전시 체제에 맞게 한국불교를 총본산제로 개편하고 친일을 강요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생겨난 총본산은 경제적 후원과 함께 일제의 불교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기를 보낸 회당이었지만 일제의 강점에 굴하지 않고 자의식을 형성시켜 나갔다. 1916년 15세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보통학교 입학, 1922년 2월 대구 계성학교 입학과 동경 유학, 그리고 1924년에 시작된 사회 활동 등 어려운 현실에 도전하여 자신의 의식을 키워갔다. 그런 의식의 전환은 실제 우리 현실을 체험하고 싶은 생각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우리의 현실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여 끊임없는 유민(流民)을 양산하자 조국의 현실을 체험하고자 두 번에 걸친 국토순례를 단행하였다.

첫 번째 순례는 울릉도에서 어렵게 진학한 계성학교가 휴교하자 그 틈을 이용해서 친구와 함께 2개월에 걸쳐 시도하였다. 조국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때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와 조국이 일제의 강점에 들어간 것은 역시 힘이 없어 생겨난 사실임을 통렬히 느꼈다. 이런 체험은 후일 회당이 국가가 외세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면 정치적으로 자주력이 있어야 하며, 뒷날 종교적으로 진호국가불사(鎭護國家佛事)로 귀착될 수 있었다.

두 번째 국토 순례는 1940년에 시도하였다. 젊은 혈기로 본 첫 번째 순례와 달리 장년의 원숙함이 배어 있는 순례였다. 이때 불교의 실태는 물론이고 민생들이 겪는 고초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회당의 청년 시절은 그의 사상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이 시기에 불법과의 인연은 물론이고 조국 현실의 이해 그리고 회당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방향이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살펴볼 때 회당의 청년 시기는 정치적으로 일제의 강점과 민초들의 현실적 괴로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제의 속성을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의 축적을 인식한 시기이다. 일제를 알기 위해 계성학교가 휴교하자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일본행을 감행한 것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비록 일본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분명 강대국의 현실은 약소국보다 무엇이 앞서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뒤에 불법에 의거 다양한 사회 활동은 물론 교육적 가치가 높이 드러나는 사상 형성의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회당에 있어 장년과 노년의 시기는 1945년 8·15해방에서부터 입적한 1963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회당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사회에 실현되었던 기간이다. 이때 한국사회는 미 군정의 지배, 좌·우의 갈등, 6·25 그리고 정치적 갈등 등 혼돈과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는 개인의 일생으로 보아도 험난한 시간이며, 민중 전체로 보더라도 역경의 시대였다.

회당은 8·15광복 후 불교계의 자정 노력을 지켜보았다. 전쟁 후 불교계에서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정화였다. 회당 역시 이런 정화에 대해서는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청년 시절부터 겪었던 일제의 한국불교 왜곡에 대한 정립과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화가 단순히 비구·대처 간의 사찰 소유가 아니고 일제하에서 불교가 부패한 것은 민족성의 부패였기 때문에 불교의 정화는 곧 민족혼의 정화로 생각한 것이다.

회당은 찬란한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 불교가 일제에 의해 그 전통이 변질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폐단은 신성한 사찰 경내가 방가취무의 유희장이 되어 부패로 이어졌다. 수행자들은 이것을 깊이 탄식하고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을 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로잡지 못해 승려들은 사십 년 동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그는 정화라는 문구 자체가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처럼 일제에 의해 탁해진 모든 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나라의 불교를 조금이라도 인식하는 국민들이라면 불교 정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생각한 정화는 단순한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에 형성되었던 모순을 척결하고 현대사회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다양한 견해와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불교였다. 그렇게 되려면 한국불교는 반드시 정체성을 회복한 후 여러 종파가 형성되어 자유 시대 자유로운 생각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이 복잡한 오늘날 정신이 병들어 부부, 부자, 형제, 민족 간에 투쟁하고 분열하는 사상병을 교화할 수 있도록 여러 종파로 분열되는 것은 시대적 요구임을 인식한 것이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불교 역시 고대부터 전승된 것 하나로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현대사회가 다양한 종교의 시대가 되며, 치열한 경쟁이 도래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실제 그의 생각대로 광복 후 제정된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모든 종교 활동이 자유롭게 되자 자연히 나라 안에는 종교의 주존, 곧 사상의 주인공이 많아졌다. 그는 이처럼 국교를 정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금지하지 않는 종교 자유 시대에서 불교인의 자세에 대해 역설하였다. 먼저 불교도가 불교를 신앙하는 데 있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전제시대는 나라에서 국교를 세우고 이단을 금지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그럴 수 없으므로 불교도들이 이단과 외도를 멀리해야 다양한 종교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면으로 볼 때 회당의 장년과 노년은 현실적 상황을 깊이 통찰하고 그 대안으로써 정신적 해결을 위한 노력으로 도덕이 강조된 종교적 사회변혁을 시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 개혁론의 저술과 지향점

근현대 격변기를 보낸 회당은 불교와 인연이 된 이후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청장년 시대를 겪으며 보았던 한국불교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소견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대부분 1950년대에 집필되어 원숙한 회당의 개혁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불교가 시대와 사회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사회변화에 따른 불교 변화를 절실하게 바랐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급성장한 타 종교를 보면서 새로운 불교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불교를 바탕으로 변화를 제시한 것은 불교에는 인간 심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사상이 있으며, 그런 사상을 바탕으로 국민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교였지만 근대 불교가 우리 사회가 다양화되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훌륭한 교리체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500년 동안 배척당하면서 도상(圖像)과 기복(祈福)이 심해졌다. 이런 분위기는 대중으로 하여금 불교는 불공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그런 영향으로 사람들도 현세를 허무하게 뜬구름같이 보고 추상적 이론을 내세워 내세 극락을 주로 하는 초세적(超世的) 방편만을 불교의 전통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부처의 진리와 언행을 가르쳐서 교화하던 종지는 점점 없어지게 되었고, 부처를 숭상하는 사찰만 남게 되었다.

그는 이런 유상신앙(有像信仰)은 봉건체제의 일원적인 시대에는 신앙적 가치를 지니지만 이원 내지 다원화된 시대에는 무상(無像)인 법신불 신앙이 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상불교와 무상불교로 나누어져 상호 영향을 주어 교화가 발전되기를 기원하였다. 그것은 근대 이후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불법승 삼보를 숭상하는 의례가 아닌 법신불의 진리가 교화의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대불교가 도상과 기복에서 생겨난 번잡한 의식에서 벗어나 새시대적 의례가 형성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는 불타의 교리 방편을 가진 새로운 종파가 형성될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변화되어야만 현재 명맥만을 유지하는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 대중적인 화도(化導)를 할 수 있게 되고, 불교가 사회 각계각층에 들어가 민주 체계에 맞도록 생활화·풍속화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불교가 적응하고 발전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길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첫 번째 민주시대에 불교가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세계는 봉건시대에서 민주시대로 전환되었다. 우리 사회 역시 민주 이원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유교의 영향 하에 일원주의 불교정신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이런 불교가 발전하려면 먼저 우리 사회의 변화처럼 민주 체제에 맞게 종파가 생겨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계층의 의견이 표출되는 민주사회 속에서 불교 내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변화가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우리 사회는 다원화되고 있는데 불교는 아직도 출가와 재가가 이원으로 분화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지금까지 단일한 모습에서 벗어나 여러 종파로 나누어진 조직형태가 되어야 한다. 특히 시대성을 띤 불타의 교리방편을 가진 재가종파가 따로 일어나서 대중교화에 중점을 두고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민주 체제에 맞도록 생활화, 풍속화하는 것이 불교 민주화의 첫 단계이다. 그렇게 될 때 사회가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자유사회가 되면서 자유로운 사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양한 불교의 모습 가운데 비구와 우바새가 각각의 종지로 종파로 나누어져 각자의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서로 기울어짐 없이 평등하게 된다면 이것은 현대 평등사회를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힘이 불교의 장원한 문화도 수립될 수 있다고 예견하였다. 그런 예로 부처님도 불교 교단을 이원화하고 각기 전문적인 분야에서 각자 종지와 의무를 실행케 하여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음을 들었다.

그는 민주사회에서 출가와 재가가 이원화되어 교화 스승이 활동하는 것을 근대적 대승으로 생각하였다. 이원화는 우열의 구분이 아니고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나누어지는 것이다. 출가자는 계율로서 정화하고 삼보가 변함없이 하나로 계승하여 가는 것을 주로 하는 것이고, 재가자는 시대에 따라 진리에 맞도록 혁신하여 법, 보, 화 삼신이불(三身理佛)을 믿는 것이다. 그런 시행으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부처님의 진리를 밝히며, 자기에게 있는 심인을 깨닫는 방편을 세우고, 그리고 육행을 실천할 수 있는 근기에 맞추어 방편을 세운다면 생활불교로 지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는 크게 발전하고 중생을 선도하여 교화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 사상적 변화를 근대적 대승불교로 인식하였다. 이런 회당의 인식은 시대와 사회의 변천에 따라 이원주의로 전환하여 현세를 교화한다면 일원에 병든 것을 바르게 하는 새 불교가 이 세상에 출현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 두 번째는 다종교 사회 속에서 불교의 발전 방향에 대한 생각이다. 회당은 한국사회가 다종교 사회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자연히 종교 간의 경쟁이 생겨나고, 그런 종교 간의 경쟁에서는 자율이 있는 종교가 우세하며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자율이 있는 종교가 흥왕할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종교에서 자율을 중심으로 흥망을 예견한 것은 본래 종교는 자율에 의해 교리가 발달되었고, 큰 종교로 발전하여 개인과 국가 그리고 세계의 평등문화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종교가 자율을 잃고 의식을 주장하고 형식화되면 시기, 질투, 당파가 일어나 개인과 국가 그리고 세계가 멸망의 길로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시대에 걸맞은 종교의 자율이 있어야 하며, 불교 역시 자율이 강조되어야 할 때임을 피력하였다.

불교의 이원화를 주장했던 회당은 이 역시 불교의 자율을 위해 필요한 조건임을 주장하였다. 불교가 전통을 계승하는 출가종과 시대를 따라 교화하여 가는 재가종으로 나누어져서 이원상대로 서게 된다면 계승과 교화의 각각 전문적인 사명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이원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 불교는 과거 부분적 종파로 나누어진 법에만 집착하여 시대 변화를 읽지 못했다. 그런데 문호가 개방되고 각국과 소통하는 현대에 전 세계를 대상으로 불교가 포교해 가려면 다양한 계층과 소통할 수 있는 이원화는 커다란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이원화는 시대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적 요구라는 인식이다.

마지막으로 회당이 생각한 현대불교 발전을 위한 방향은 불교의 조직화로 외호자의 조성과 연합체의 구성이다. 외호자의 경우 정치적 외호와 경제적 외호로 구분하였다. 정치적 외호는 종교 활동에 국가의 지원이며, 경제적 외호는 필요한 재원의 지원이다. 과거 불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외호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석존 당시 급고독장자와 열반한 이후 많은 국왕과 대신들이 불법을 옹호한 것이 그런 예로 보았다.
그는 외호자의 구성이 가장 큰 종교로 기독교를 꼽았다. 기독교는 민주진영의 몇몇 나라가 그의 큰 외호자가 되어 세력으로 끌고 권력으로 끌고 경제적으로 끌어주었다. 그 결과 수백 종파가 온갖 방법으로 단결하여서 정치, 교육, 산업 각 방면에 이르기까지 다른 교가 미칠 수 없게 선교하면서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기독교의 발전을 지켜본 회당은 불교 역시 크게 발전하고 널리 중생을 교화하려면 재력과 세력을 가진 외호자가 있어야 하며, 불교가 전 세계적으로 포교하자면 민주주의에 알맞은 외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방법적으로 과거 봉건주의 시대에는 왕과 대신이 외호가 되어 왔지만은 민주국가에서는 민중의 선거로 의회가 성립되고 대통령이 선출되고 내각이 성립되기 때문에 의정단상에 초종파적인 큰 외호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외호를 만드는 일에는 불교의 모든 종파가 개별적인 활동을 지양하고 하나로 일치되는 초종파적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불교계의 공동 목적일 뿐 아니라 기독교와 같이 부와 힘을 가진 나라들이 정치적인 힘과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 지원하는 강력한 선교활동에 대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초종파적 대외 활약에는 반드시 연합체의 조직 구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불교는 교리와 방편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신자들 사이에 종지로서 나누어지는 태도가 분명하지 않고, 합세가 되어야 할 때도 잘 단합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연합체를 구성하면 반대편에 가담하여 도와주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구성하는 방법으로는 자국 내의 각종 불교연합회나 협회를 구성하고, 국가 사이에는 세계불교 연합기구 등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조직이 발전 강화된다면 불교가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고 세계평화의 기본이 확립될 것으로 보았다.


4. 개혁불교의 실천적 지평

회당의 불교개혁론은 새불교 운동의 실천 이론이었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기존 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의식을 탈피하여 자신의 현실적 종교관에 입각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회당의 깨달음은 무사득오(無師得悟)에서 나왔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인식과 반성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이런 수행은 기복적 신행에서 자신의 인과를 강조하여 자신은 물론 교단의 중흥을 도모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음을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5월 16일 깨달음을 얻은 회당은 농림촌 최초의 설법을 시작으로 포항에서 자내증(自內證)의 법문을 펼쳤다. 1948년 8월 3일 교화단체 참회원(懺悔園)으로 경상북도 공보과에 등록하고 9월 1일 대구시장에서 교화하면서 참회원을 설립하였다. 이곳에 모여드는 대중들에게 현실의 도피나 기복을 일러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르쳤다. 그것은 자신의 인과를 알아 참회하고 보다 나은 자신의 미래를 여는 체험 불교였다. 그래서 강조된 것이 깨달음과 참회 그리고 실천이었다. 그것은 어려운 때 자신의 현실은 지난날 자신의 부정적인 원인이 있음을 알고, 그 원인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임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였다.

이런 면을 살펴볼 때 회당이 강조한 참회는 자신을 찾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명칭을 참회원으로 한 것은 바로 이런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의도였다. 그리고 그런 의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현실에서 보이는 불교의 형태가 진아(眞我)를 찾는 것이 아니고 형식 위주의 불교가 자행되던 폐해를 막아보려는 의도였다.
이와 같이 참회를 강조한 회당은 이어 참마음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심인불교(心印佛敎)이다. 그것은 참마음과 진언을 의미하는 심인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적 성숙함을 이루고자 하였다. 회당은 종단의 명칭을 ‘심인불교건국참회원’으로 하여 1951년 1월 18일 중앙공보처에 등록하였다. 그것은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의 잘못을 알아야 하지만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참회는 진정한 의미의 반성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망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회원에서 심인불교로의 전환은 참다운 나를 알고 나서 스스로 행하는 반성의 참회가 수행의 중심으로 옮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수행처의 명칭도 참회원에서 심인당(心印堂)으로 바꿨다. 여기에는 기존 불교가 지니고 있던 의미에서 탈피하여 시대에 맞는 새불교 운동이 한층 강조된 것이다. 이때가 진기 6년(1952)으로 안으로는 종단의 내적 성숙을 위한 교상의 정립과 교리의 체계화에 박차를 가할 때였고, 밖으로는 기복적 의미의 불교 이미지를 바꿔 수행적 자세를 견고하게 할 때였다. 이런 의도에서 사찰이나 사원의 명칭보다는 대중적이고 도심적인 이미지를 살려 새로운 명칭을 도입하고자 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새로운 변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존 불교와 다른 이미지를 살리고자 함은 단순히 수행도량의 명칭을 변용하였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새불교 운동은 철저하게 변화될 때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이 새로운 종단으로의 비상(飛翔)이다.

앞서 살펴본 일련의 변용을 토대로 회당은 자신만의 사상체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조직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진기 7년(1953) 10월 28일 ‘대한불교 진각종 보살회 유지재단’의 설립이다. 재단을 설립한 회당은 바로 다음해 1월 27일 문교부의 정식 허가를 취득함으로써 진각종(眞覺宗)을 창종하였다.

새로운 종단의 창종은 자신의 득오(得悟)를 체계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것을 위해 회당은 기존 불교와의 철저한 차별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출가를 통한 득도가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현실에서의 심인진리를 깨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가르쳤다. 수행의 모습도 면벽참선이 아닌 부부생활을 하고 세상에 머물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에 있어서 보살계를 가지게 하여 화민성속(化民成俗)하는 것임을 정립하였다.

당연히 종지도 기존의 불교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불교가 상을 보고 불법승 삼보를 숭상하여 정화하였다면, 진각종은 상을 떠나서 법신불인 이불(理佛)을 믿고 육행(六行)을 실천하며 인과를 내증(內證)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이원을 표방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기존 불교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회당의 말처럼 한 가지 양태만이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시대에 맞게 이원적 양태가 되어 서로가 융합되어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교화 방식은 평등한 사고를 갖고 있는 불교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회당은 종단을 세워 민중의 본성을 깨닫게 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자신의 견해대로 그런 생각이 현실사회에 실천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런 실천이 민중들의 현실적 어려움을 타개하려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회당 손규상이 창종한 서울 하월곡동 소재의 진각종 총인원 전경.
종단을 건립한 이후에는 민중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방향을 생각하고 사회사업을 확대하였다. 사회사업은 복지적 측면과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종단에서 직접적으로 실시한 사회사업과, 당시 사회적 여건에서 필요한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들이 실천되었다.

 

먼저 직접적인 사회사업으로는 양로원의 설립을 들 수 있다. 회당이 양로원을 생각한 것은 두 가지 측면을 해결하려는 의도였다. 그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정의 모습이 와해되면서 생겨나는 노인 문제와 가난으로 인해 기거 공간의 어려움이 있는 자들을 보살피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교도들의 신행 장애를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앞선 목적은 종교가 사회에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적 이상이라면 후자는 사회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당은 중생들의 삶 가운데 가난과 고통과 불화로 이어지는 것은 자주적인 자세가 결여된 것에 있음을 알고 이를 경계하였다. 양로원을 설립한 이유도 인륜에 대한 외도를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교도 가운데 자녀가 없거나 딸만 있는 사람들이 딸의 출가 후에 함께 기거함으로써 빚어지는 가정불화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다음 사회적 여건에서 필요한 사회적 실천으로 장세함(藏稅函)의 설치를 들 수 있다. 종단에 장세함이 설치된 것은 진기 11년(1957) 7월 18일로 국가에 대한 세금을 올바로 내기 위해 설치된 저금통을 말한다. 즉 세금을 내기 위하여 미리 조금씩 돈을 모아두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둔 것은 먼저 교도들의 의식전환을 이루려는 데 있었다. 당시 국민들의 의식 수준에서 볼 때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국민과 국가 모두에게 중요성을 일깨워 사회적으로는 자주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계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길임을 일깨워 진호국가의 실현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장세함을 설립한 당시 우리나라 재정 자립도는 극히 미약하였다. 미국의 원조로 나라의 경제가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국민의 세금은 곧 정부를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세금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납세를 기피하는 경향이 컸는데 그런 면으로 볼 때 회당의 의식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회당은 물질적 자주를 강조하는 한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금융거래보다는 그 선명성이 입증된 은행거래를 통해 국가와 국민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사회질서를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후 회당은 교도들의 단순한 희사에만 의존해서 사회사업을 추진하기는 재정적 어려움이 있자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재원 마련을 위한 종단의 이익사업이다. 이를 위해 진기 7년(1953) 9월 종단 안에 전문적인 조직을 구성한 그것이 자선사부(慈善事部)이다.

자선사부에서 제일 먼저 실행한 것은 진기 8년(1954) 3월 15일 대구시 비산동에 직포공장 설립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스승들의 숙박소 및 미장원 등을 경영하였다. 뒤에는 제과업의 공동경영 그리고 언론사의 주식을 매입하는 한편 총국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하였다. 이러한 경영으로 전국적으로 심인당을 건설하는 토건회사의 설립으로까지 이어져 종단의 이익사업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사업의 근본정신은 재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재원을 사회에 환원하는 보살도의 실현이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5. 결 론

회당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회와 일치한다. 그만큼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강점 속에서 민족의 길을 찾았던 회당은 사람의 심성을 찾아 세상을 바꾸는 것을 정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인식은 그를 불교에 귀의하게 하였으며, 불법을 정립하여 세간을 정립하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런 생각들이 정리된 것이 불교개혁에 관한 글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불교관을 제시하였다.

회당은 민주시대 다원화 시대인 근대의 불교가 발전하려면 일원적인 불교를 넘어 종파가 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다원화는 교단의 분열이 아닌 불교의 발전으로 보았다. 또 분파된 불교는 민주적이고 자유가 보편화된 시대에 맞는 종교로 진일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출가와 재가가 이원화되어 활동하는 근대적 대승이 정립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적으로 불교를 외호할 수 있는 세력이 형성되어 지지기반이 되며, 많은 종파의 활동을 통일할 수 있는 연합체를 구상하였다. 이런 모습이 정립될 때 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자주력을 갖춘 종교가 되며,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가 자주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회당은 그런 인식하에 새불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기존 질서의 파괴가 아닌 새로운 변용으로 개혁의 가치를 찾은 것이다. 기존의 불교가 지녀왔던 수행 공간 용어 그리고 의식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확연히 다른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의식은 중생들의 삶을 이해하는 현실적 안목의 발현이 되며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생활불교·실천불교이다.

이런 새불교 운동을 통해 추구해 온 것은 바로 인간심성의 회복이었다면,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실천이었다. 회당은 그런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현실적인 빈곤을 탈피하고 민중들을 계몽시키는 힘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김경집 / 진각대학원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경허의 定慧結社와 그 사상적 의의〉 〈근대 僧尼都城出入의 解禁과 그 推移〉 등과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 《역사로 읽는 한국불교》 외에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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