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李英宰, 1900~1927)]

1. 서언

한국 근대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널리 활용되는 것이 불교혁신론이다. 근대불교의 성격, 내용, 흐름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대상이 바로 불교혁신론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불교혁신론을 제기한 승려로 주된 연구 대상이 되어온 인물은 한용운, 권상로, 백용성, 백학명, 박중빈, 박한영 등이다. 그러나 본 고찰에서 살필 대상 승려인 이영재(李英宰, 1900~1927)의 불교혁신론에 대해서는 지금껏 극히 일부의 연구자가 관심을 뒀을 뿐 불교 및 근대사 연구자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이 글에서는 이영재 불교혁신론의 개요와 성격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런데 추후에 불교혁신론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하고자 한다면 기존의 연구 방향을 새롭게 바꾸어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지금껏 근대 불교혁신론을 이해, 서술하면서는 혁신론을 집필한 당사자의 분석, 그리고 그 혁신론의 개요 및 성격을 정리하는 선에 머물렀다. 그러나 추후에는 혁신론의 등장 배경, 역사적 맥락, 혁신론의 비교 연구, 혁신론이 갖고 있는 전통과 문명의 충돌, 실천된 것과 실천되지 못한 것, 불교계(단체, 인물)에 끼친 영향, 이념과 사상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필자 역시 이 글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할 여력은 없다. 그럼에도 이를 지적함은 불교혁신론 연구의 외연과 문제의식을 창발시키기 위함이다.

이영재의 혁신론을 소개하기 이전에 먼저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키포인트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영재는 법주사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가, 스리랑카에서 순례와 연구를 하다 1927년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승려라는 점이다. 이 같은 그의 삶 자체가 특이하였고, 격정적인 구법의 과정에서 삶을 마감하였기에 그가 남긴 혁신론은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다음으로 이영재의 혁신론은 1910년대 한국불교에 대한 철저한 성찰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우리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불교로 전락한 1910년대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영재가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관점을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이영재의 혁신론에는 1920년대 문명, 일본불교, 민주제도 등의 영향이 강력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을 유의하면서 이 글을 읽는다면, 1920년대 전반기 23세의 고뇌하는 젊은 학승의 대안을 통하여 근대불교의 단면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일본 대학의 후미진 연구실과 자취방에서 불교개혁을 위해 밤을 지새웠으며, 이역만리 스리랑카의 연구실과 병원에서 스러져가는 몸을 추슬렀던 이영재. 그가 무엇 때문에 고뇌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조선불교혁신론〉의 개요

동경 유학 시절의 이영재(李英宰, 1900~1927)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은 1922년 11~12월 〈조선일보〉에 총 27회로 연재된 기고물이다. 당시 그는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대학 종교과에 재학하면서, 재일조선불교청년회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면서 재일불교청년회의 기관지인 《금강저》의 편집을 주도하고 방학 중에는 귀국하여 강연 활동에 나섰다. 이와 같은 행보는 그가 당시 한국불교에 대한 애정이 적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1922년 11월의 〈조선일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아서 혁신론의 도입부인 7회분의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전제하에 현전하는 혁신론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불교개혁의 기운

● 개혁의 준비

● 본말제도의 타파
1.사찰령 폐지 운동 2.말사 주지의 단결

● 법국(法國)의 건설
1.진리의 왕국 2.교헌의 제정 3.교체(敎體) 4.교단의 통일 5.교구의 획정 6.교구의 귀일(歸一) 7.교정의 분사(分司) 8.교정의 조직(중앙기관, 지방기관, 사원 및 교회[포교당])

● 포교
1. 사원의 폐합 및 이전 2. 교회기구의 확장 3. 포교사의 양성 4. 교회의 배치 5. 외국의 선교 6. 문서전도

● 교육
1. 학교 교육 2. 사회 교육 3. 외국 유학

● 경전의 번역

● 교재기관 및 교보발행

● 사회사업

● 교계 청년 제형(諸兄)에게

이와 같이 혁신론은 10개의 주제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혁신론의 전제, 혁신의 방법, 혁신 교단의 건설, 혁신사업, 혁신론의 성격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순서에 입각하여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첫 번째는 혁신의 전제이다. 우선 이영재는 1920년대 초기의 불교가 처한 상황이 지난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된 요인을 일제가 시행한 사찰령의 본말제도에서 찾았다.

사찰령을 기초로 한 본말제도는 영락하나마 일괴(一塊)가 되었던 불교를 도리어 30개로 분할하였으며 미약하나마 협의적이던 것을 본말(本末) 관계로 인하여 도리어 분규케 하였으며 미미하나마 공화적(共和的)이었던 교정(敎政)을 도리어 본산 주지의 전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본말제도를 정한 동기는 고의 악(惡)에 있다고는 하지 못할지라도 본말제도를 실시한 결과 교단의 불통일, 교도의 불화합, 본산주의 전제 횡포 등에 비추어 보면 본말제도는 선(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그는 당시 불교 모순의 근원을 사찰령의 본말제도로 지목하였다. 즉 협의적이고 공화적이었던 전통불교가 본사 주지의 전제, 교단의 불통일, 교도의 불화 등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제와 한국의 일부 승려의 독단에 의해서 나온 30본산 지정, 본말사 제도를 마땅히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를 강조했다. 이영재는 사찰령, 본말제도의 구도에 나온 본사 주지의 문제점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구체적인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승가를 문란하게 한 것
―포교, 교화사업이 전무한 것
―교계의 청년들을 속가로 축출한 것
―당파를 만들어 여러 승려를 억압하고 주지직의 연임운동을 강행한 것
―일제 및 권력층에 아부하여 세력 구축과 명리에만 전념한 것
―사무를 독단으로 처리하고 일반 승려의 의견을 묵살한 것
―사찰 재산을 대처와 주지육림에 소비하여 낭비한 것
―사법과 계율을 무시하여 승가의 풍기와 권위를 실추케 한 것
―교단을 혁신하지 않고 본말제도를 옹호하여 불교의 멸망을 재촉한 것
―교무원을 조직하고 정당한 불교유신운동을 방해한 것

이러한 판단하에 이영재는 1920년대 초기의 불교는 멸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고 보았다. 즉 불교혁신을 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면서도 그를 위해서는 개혁의 준비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혁신의 준비는 영적(靈的) 혁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 자체가 영적이기에 영적 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 쇠퇴의 원인을 출가생활의 영적 양식이 되고, 교단 유지의 중심 생명이 될 ‘바른 믿음’이 부재한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인(吾人)은 조선불교 개혁의 무기를 폭탄에서도 구하지 아니하고 대포에서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정신(正信)에서 구한다. 그러므로 조선불교를 개혁하려는 자는 모름지기 먼저 이 정신에서 완전한 준비를 정제한 후에 개혁의 진두에 출마하여 백전백승의 개선(凱旋)을 기할 것이다.

이렇듯 이영재는 조선불교의 개혁을 조선불교 구성원들의 바른 믿음[正信]이라고 전제하였다. 이 점은 여타 개혁론과 다른 차별성을 갖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영재가 제안한 혁신의 방법을 살펴보자. 그가 혁신의 방법에서 최우선적으로 제시한 것은 사찰령의 개폐운동이었다. 당시 불교계 모순의 근원이 사찰령에서 정한 본말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 사찰령 개정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운동에 있어서 당국에 반항함은 적절한 책략이 아니라고 보고, 될 수 있는 대로 타협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즉 종교상의 문제를 신성하게 해결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일제 식민지정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영재는 먼저 사찰령 개정에 주력한 연후에는 말사 주지들의 단결을 강조했다. 말사 주지가 단결한다면 본사 주지의 횡포를 막고 권리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본사 주지의 전횡은 본사 주지에서도 나오지만 말사 주지들의 몰지각에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영재는 말사 주지의 단결을 통해서 본말제도 타파, 교단 개혁이 가능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본말사 주지가 일치단결하여 본산 주지의 횡포를 징계하여 정법(正法)의 부식에 진력하고 전국 말사 주지가 일치단결하여 본말제도를 타파하고 교단을 개혁하여 불교의 신생명을 창조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일부 사찰에서는 본산 주지를 대신한 수반 말사의 전횡도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본사 주지 전횡에서 말사 주지 및 모든 승려가 동참하는 교단 운영 체계로 즉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즉 전제군주 정치에서 귀족과두 정치의 형식을 거치지 말고 즉시 민주공화정의 형태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영재 혁신론에 민주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적극 반영됨을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영재는 불교도들의 단합을 강조했다. 즉 사찰령 철폐운동과 함께 말사 주지의 단결 이후에는 전국 불교도가 대동단합을 해야 개혁이 성취된다고 보았다. 이는 불교도의 단합을 통해서 교단 운영 및 개혁의 모든 일을 공론(公論)으로 결정하고, 개혁 추진에 있어서 주의 선전과 여론의 환기를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개혁은 일부 계급, 단체, 개인이 아닌 전 불교도의 일치 단합을 통해서 추진해야 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영재의 혁신 방법은 사찰령 철폐(본말제 개혁), 말사 주지 단결, 불교도의 단합이었다. 이런 내용은 불교계 구성원들이 사찰령 철폐에 적극 나서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이영재는 이런 전제하에 혁신 교단 건설의 내용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본말제도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교단 건설이거니와 그 건설의 기본으로 내세운 것은 “국가 사회의 신진제도(新進制度)에 준거(準據)하여 일개의 진리(眞理)의 왕국(王國)”이었다. 즉 가장 진보된 국가제도를 모방하여 교정(敎政)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영재는 진보된 국가제도(민주공화정)의 채택이 자신의 독단적 견해가 아니라 불타의 정신에 의한 것인 동시에 시대에 적응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이런 전제하에 이영재는 민주공화정을 혁신의 기준으로 단언하고 혁신교단을 건설함에서 우선적으로 할 것은 교헌(敎憲)의 제정이라고 하였다. 진보된 국가가 헌법으로 주권의 존재, 국민의 권리 및 의무, 입법·사법·등의 원칙을 정하는 것과 같이 혁신교단에서도 마땅히 교헌을 제정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래야만 합리적인 교정을 운용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 연후에는 국가에서 국체, 정체가 있어 주권의 존재와 통치의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교체(敎體)를 규정할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이에 그는 본존의 통일, 종학의 통일, 의식의 통일을 거론하였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 이영재가 제안한 본존, 종학, 의식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겠다.
우선 본존의 통일에서는 기존의 불상과 탱화를 받드는 것은 타락, 모순이라고 단정했다. 이는 타 종교에서 불교가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상이 갖는 역사적 인습이 있어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각사 본당에 석가모니불의 존상 일위만 봉안하고 그 밖의 불보살 신상 등은 일체 철폐하여 한 사찰에 하나의 불상만 봉안케 할 것이다.

즉 각 사찰에 하나의 석가모니불만 봉안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철폐된 불상과 신회들 중에서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은 잘 보존하되 숭배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았다.
이영재는 본존의 통일 이후에는 불교의 내용을 종학(宗學)으로 개념화하고, 소의경전을 통일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경전 섭렵이 부족하다고 보고 대승경전으로 정하면 된다는 정도에서 대안을 마무리하였다. 의식의 통일에 있어서는 기존 의식을 형식화된 도깨비 연극이라고 비판하면서 정성이 담긴 간결한 의식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의 종학과 의식을 비판했지만 정작 뚜렷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다.

교헌과 교체를 통일한 후에는 교단의 통일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봉건적인 30본산 형태를 타파하고, 전 교단을 아우르는 완전·유일·최고의 통일기관을 설립해서, 전 사찰과 전 교도들은 통일기관에 예속시키되, 그 통일기관은 재단법인의 형식을 취하게 하자고 하였다. 그 연후에 전국을 몇 개의 교구(敎區)로 나누어 지방행정의 통일기관을 설립하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통일기관이 설립되고, 지방교구가 분정된 이후에는 교권(敎權)과 교정(敎政)을 정립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통일기관이 교단의 통일, 교풍의 진흥, 인재양성, 재정절약 등을 기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통일기관이 중앙집중적인 권력을 갖되, 내부적으로 행정 기능과 입법 기능을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일기관의 자문 기구를 설치하여 교단 책임자의 교정을 도와야 한다고 하였다.
이영재는 이와 같은 교단의 통일기관의 당위성을 설명한 연후에는 그 운용의 내용인 교정 문제를 설명하였다. 기본 구도는 중앙과 지방 단위 기관으로 설정했다.

먼저 중앙기관을 살피면 중앙에는 대법통(大法統), 총섭원(總攝院), 성의원(聖義院)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대법통은 지금으로 말하면 종정과 같은데, 일반 국가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대법통은 전 교단을 통할하는 권한을 주되, 선출은 전 교도의 공선(公選)으로 하고, 제반 내용은 교헌으로 정하며, 임기는 유한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법통을 자문할 기구로 노덕원(老德院)을 설립케 하였다. 이는 조계종단의 장로원 및 원로회의와 유관한 성격을 갖는 것이다. 노덕원에 근무할 원로는 삼학을 구족하고, 대법통의 후보가 될 만한 노덕을 추천하자고 주장했다.

통일기관 내의 행정기관인 총섭원은 국가 내각 기능을 갖는 것으로 행정의 중앙 수뇌기관으로 설정했다. 총섭원에는 수반인 도총섭(都摠攝) 밑에 5부(部)를 두고, 각 부에는 국(局)을 두어 실무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영재는 이런 행정 기능을 제시하면서, 책임 행정으로 가야 함을 강조했다.
국회 기능을 갖는 것으로 설정한 성의원은 최고 의결기관으로 입법, 예결산을 담당한다. 의원은 교도의 투표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영재는 의원은 승려와 신도가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일반 신도의 참여를 주장한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기관을 살펴보겠다. 지방기관은 중앙기관의 구도를 그대로 채택하였다. 우선 지방 행정기관인 섭리원(攝理院)을 각 교구의 편의상 좋은 장소에 설립하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기관의 책임자인 도섭리(都攝理) 밑에 국(局)과 과(課)로 나누어서 직무를 보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에도 독립된 의사회(議事會)를 두어 교구 내의 중요 내용을 의결할 수 있게 하였다.

사찰 및 포교당 등 단위 기관(조직)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 이영재는 사찰, 포교당이 지방 교구행정의 주체인 섭리원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각 사찰에도 의결기구인 의사회와 집행기관을 둘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집행기관의 책임자는 주지로 하되, 임원은 승려의 투표로 선출할 것을 제시했다. 이영재는 사찰과 대등한 성격을 갖고 있는 포교당(교회)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는 포교당이 단순히 포교만을 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각 지역 사회의 중심 기관, 문화 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포교당이 기존에 속해 있는 각 사찰에서 벗어나 직접 섭리원에 소속되게 하자고 주장한다. 요컨대 사찰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포교당에는 의사회와 집행기관을 설치하고, 신도들의 완전 자치로 운용케 하자고 제안하였다.

지금까지 이영재가 제안한 혁신교단의 건설 내용을 살펴보면 교단의 통일, 교권의 집중, 의회기관의 독립, 책임 행정기관의 설치, 포교당(교회)의 독립이었다. 이런 구도에서 제시된 교단의 구도 및 기능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혁신교단을 건설한 이후에 추진해야 한다고 개진한 혁신사업의 내용으로 제시된 것은 포교, 교육, 경전 번역, 교재기관 및 교보 발행, 사회사업 등이다.
우선 포교에 대해서는 대중이 생활 속에서 신앙을 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에 있어서는 포교 이상의 중대한 과제는 없다. 교단의 통일, 기구의 확장, 교육의 진흥, 사회사업의 장려 등 일체 행위가 모두 홍교도생(弘敎度生)의 구경(究竟) 목적을 달하기 위한 수단이요 과정이다.

이는 불교의 모든 문제를 포교에 귀결시키는 것이다. 이영재는 당시 포교당이 포교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민중과의 교섭도 부진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한국불교가 한국문화의 원동력이 되려면 우선 교단 활동을 포교에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원의 폐합 및 이전, 포교당 기구의 확장, 포교사의 양성, 재배치, 외국의 선교, 문서 포교 등을 설명하였다. 사원의 폐합 및 이전에서는 인민이 모여 사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산속에 있는 사찰은 도시로 가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교당 확장에서는 기존 사찰 소속에서 독립시킴과 동시에 신도 중심의 자치 조직으로 전환케 하자고 했다. 종래 1인 포교사 중심으로는 불교 진흥을 바랄 수 없다는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포교사 양성에서는 지리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균등하게 배치할 것을 제안했다. 외국 선교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인이 있는 간도, 러시아, 일본, 하와이 등에도 교단이 직접적으로 교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서 포교에 있어서는 집단포교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통신 포교를 주장하였다.

이영재는 일본 유학 중 《금강저》를 편집, 발간하며 불교개혁의 열정을 키웠다. 오른쪽은 금강저 16호, 왼쪽은 26호의 표지.
이제부터는 교육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교육에 대하여 이영재는 일반 교육사상이 보급되어 가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에 대비된 불교 교육 문제를 언급하였다. 즉 기존 강원제도는 무기력한 학인만을 양성하고, 신식 교육기관은 교육 방침 부재와 경영 부실로 인해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총섭원 차원에서 적극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

불교계에도 일정한 주의(主義)하에 교육기관을 통일하여 조직적 교육을 시(施)함이 가장 필요한 것이니 이것이 특히 총섭원에 학무부를 설치하자는 소이(所以)이다.

나아가서 학교교육은 인재양성 차원에서, 사회교육은 교화를 통한 불교문화 발전을 도모케 하는 기준을 세우자고 하였다. 학교교육에서는 초, 중, 고등의 교육기관을 세우되 초등은 사원 및 포교당에서, 중등은 각 교구에 1개소의 섭리원 직할로, 고등은 대학교육인데 중앙 1개소에 설치하되 총섭원 직할로 경영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학기관을 중점기관으로 육성할 것을 당부하였다. 사회교육은 지방 통신교육을 제안했다. 그는 사회교육을 치열하게 하면 포교당이 지역사회, 불교, 민중의 상호교섭하에 중생 구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는 기본적으로 포교당이 설교만 하는 곳이라는 관습이 타파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외국 유학은 충분한 예산, 자격 심사, 전공 심의를 거쳐 불교계 전체의 인재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시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경전 번역에 대한 것도 강조하였다. 그는 경전 국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큰 결함이라고 보고, 그로 인하여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되고 사회에서 불교의 생명력이 상실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역경사업을 교단기관의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교재기관(敎財機關) 및 교보간행(敎報刊行)은 교단을 통일시키고 전 교단의 재산을 통합한 후에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교단의 자금과 교도의 출자로 교립대은행(敎立大銀行)을 중앙에 설립하고, 각 교구에 지점 및 대리점을 개설하여 교단의 재산보호와 교도의 금융융통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또 총섭원이 주관하여 교보신문(불교신문)을 발행하자고 제안하였다.
사회사업 분야를 살펴보면, 이영재는 사회사업을 포교당을 통한 사회교육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려 하였다. 즉 사회사업은 기본적으로 종교교리를 전도하면서 종교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사업을 현실에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만일 불교도 다시 사회적 세력을 포착하여 종교적 생명을 만회하려면 고식적 설교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실지 사회를 위하여 제반의 교화적 시설을 하여야 할 것이다.

즉 불교의 사회적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위한 교화시설을 마련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교화시설에서 아동교육, 노동자 교육, 문화 계발, 빈민구제, 빈민환자 치료, 환난민 구제, 실업자의 구제, 노동자 숙박 지원, 풍속 개량 등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지역문화 발전과 민중생활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영재가 이처럼 사회사업을 강조한 것은 곧 불교가 지역사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별로히 교지를 선전치 아니하여도 민중이 자연 불교로 귀의할 것이요 교세를 부식치 아니하여도 불교가 자연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불원(佛院)의 성은(聖恩)이 사중(四衆)에 흡흡(洽洽)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가 그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고, 자연 불국토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지역사회, 불교, 민중, 포교당이 밀접한 관계가 된다는 구도와 이해하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이영재는 불교 혁신을 위한 다양한 방책과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혁신론이 자신이 본래 갖고 있었던 것은 절반도 개진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혁신론의 말미의 ‘교계청년 제형에게’라는 항목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개진한 주안점을 강조했다.

오직 당면의 과제는 구제도의 타파이다. 절실한 요구는 교계의 혁명이다.

즉 그는 불교를 혁신함에 있어서는 오직 ‘혁명의 일대사’가 있을 뿐, 부분적 개선과 인습적 교육, 고식적 포교로는 불교를 회생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제형(諸兄)이여 불교의 존망(存亡)은 제도 혁신의 여부에 있다. 쇠퇴를 칭한 불교의 상태는 일시의 유예를 허치 아니한다. 교단 혁명의 절호(絶好) 천시(天時)는 오직 금일(今日)이다.

이처럼 그는 당시 시점이 불교개혁의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그 개혁은 교단 구성원들이 다 함께 동참해야 가능함을 역설하였다.

제형(諸兄)이여 제형은 과연 어찌하려는가? 겁나(怯懦)히 구습(舊習)으로 이목(耳目)을 엄(掩)하고 멸망의 비애를 좌수(坐受)하려는가? 또는 당연히 교단 개혁에 궐기하여 생존의 광영을 획득하려는가? 이 양단의 기로는 제형에게 대하여 절대의 배중율(排中律)이다.

즉 교단 구성원들이 불교개혁에 나서야 함을 웅변하였다. 그는 교단 혁명을 “백전백승(百戰百勝)은 조선불교의 혁명전(革命戰)”으로 보면서 강한 자신감을 표출하였다.


3. 불교혁신론의 성격

이제부터는 앞서 살핀, 이영재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조선불교혁신론의 내용에 근거하여 그 내용에 나타난 성격을 조망하고자 한다. 그 성격은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필자가 활용한 관점에 의지하여 미시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첫째, 이영재의 불교혁신론은 제도개혁에 치중하였다. 이는 그가 불교혁신의 전제로 상정한 본말제도의 모순, 본말제도를 설정한 사찰령의 강한 부정, 배척, 철폐를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존 불교계 운용의 틀 배척은 자연 제도개혁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교단의 틀(중앙, 지방, 사원 및 포교당)의 대안도 저절로 제도 개혁의 성격을 갖는다.

둘째, 이 혁신론은 일반 사회의 국가 운영에 대한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그 실례는 민주공화정이다. 이렇게 그가 민주공화정을 불교 운영에 깊숙이 반영한 것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혁신론이 발표된 시점(1922년)이 거족적인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정체에 공화정이 반영되었던 직후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보편화되어 가는 공화정을 차용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는 불교계의 전통에 있는 산중공의정을 근대적으로 변용한 것이라는 의미도 간과할 수는 없다.

넷째, 혁신론에는 일제 문화정치의 영향도 고려할 수 있다. 즉 이영재는 일제가 문화정치를 펴는 정책으로 인하여 사찰령 철폐, 본말사 제도 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였다고 보인다. 그러나 일제는 1945년 해방되는 그날까지 사찰령을 결코 철폐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영재의 일제에 대한 안이한 시각이 드러난다.

다섯째, 이 혁신론의 내용은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한 영향이 상당함을 부인할 수 없다. 혁신론의 기조나 내용 곳곳에 한용운의 주장이 반영되어 있다. 사찰 및 불상에 대한 문제와 주지 선출 등이 바로 그러하다.

여섯째, 혁신론에는 신도들의 배려, 신도의 종단 참여 등이 강력하게 개진되어 있다. 승려가 기술한 불교혁신론에 이와 같이 신도에 대한 배려가 상당함은 흔치 않다. 이 점은 추후 다각적 관점에서 분석할 여지가 많다.

지금까지 이영재 불교혁신론의 성격을 몇 가지로 대별하여 살펴보았다. 필자가 지적한 것은 일부 측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추후, 이 분야 연구자들에 의해서 다각적인 성격이 분석되기를 기대한다.

4. 결어

지금까지 이영재라는 학승이 일본에 유학 중, 한국불교를 개혁하려는 열망에서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1922년 11~12월에 걸쳐 기고한 〈조선불교혁신론〉의 개요 및 성격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에 유의하면서 이영재 불교혁신론의 위상, 자리매김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영재의 혁신론은 지금까지 불교학, 역사학 등 학문의 범위에서도 그렇고 관련 사찰에서도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결과 이영재의 생애, 지향, 고뇌, 불교혁신론 등등에 대한 정리나 연구는 황무지 그 자체였다. 필자는 그의 고뇌에 찬 개혁론에 대해서 적절한 역사적 평가와 자리매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관심을 촉구한다.

첫째, 그의 불교혁신론에 대해서 당시 재일 불교청년(유학승)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정황상 그의 개혁론 기고는 재일 유학생들과의 교류, 토론, 고민 속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그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유학승들은 그의 개혁론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둘째, 그의 불교혁신론이 국내 불교계에 끼친 영향에 관한 것이다. 그의 혁신론을 열람한 국내 승려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특히 한용운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 흥미롭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자료나 구전된 증언은 없다. 그런데 이영재의 혁신론 상당수가 1929년에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제정된 종헌, 종법 등에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승려대회를 주최한 핵심 주역이 불교청년들이었는데, 그들은 일본 유학을 경험한 당사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이영재와 교류하였고, 이영재 혁신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이영재의 개혁론이 1929년 승려대회에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추론된다.

셋째, 이영재의 불교혁신론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즉 한국 근현대 불교개혁론의 역사에서 일정한 평가와 자리매김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1929년 승려대회(종헌, 종법 제정)나 1994년 이후 종단 개혁승려들의 주장을 보면 이영재의 논리와 대안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고 필자는 본다. 이 점은 어떤 연유에서 그런지 추후 심도 있는 분석이 요청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이영재 불교혁신론에 대한 자리매김과 관련하여 필자의 단상을 제시하였다. 앞으로 이런 지적이 유관 연구자들의 새로운 관점과 맞물려서 혁신론 지평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광식 / 동국대 연구교수. 건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부천대 초빙교수,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한국 현대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등 다수. 현재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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