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卍海, 1879~1944)]

1. 들어가는 말

 

만해 한용운(1879~1944)
나는 만해 한용운의 불교개혁론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지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일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실상과 개혁 방향에 대한 만해의 시각이나 문투는 에두르지 않고 일목요연하다. 이 때문에 만해 저술을 원자료로 되새김질에 그치는 연구논문이나 저술은 무색해지기 십상이다. 불과 서른을 갓 넘긴 해에 지은 이 책에 담긴 개혁노선은 만해가 입적하던 시기까지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의 불교개혁론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어쭙잖은 글을 읽는 것보다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통독하는 것이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첩경이며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다.

 

여기에다 조금 더 품을 들여서 《조선불교유신론》이 탈고된 지 20년 정도 경과된 뒤에 발표된 〈불교 개신(改新)에 대하여〉와 〈조선불교개혁안〉 등 길지 않은 두 편의 글까지 살펴본다면, 만해가 생각한 조선불교개혁의 전모는 굳이 남의 눈을 빌리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의 개혁안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피력된 내용 가운데는 아직까지 유효한 것도 있지만, 지금과는 접목되지 않는 부분도 보인다. 따라서 만해의 불교개혁론 전반을 개괄적으로 훑어보기보다는 현재의 한국불교, 특히 대한불교 조계종단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와 연관 지어 살펴보는 것이 현시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2. 대한불교 조계종의 당면 과제

1) 종단 내부의 자정과 쇄신 문제

대한불교 조계종이 당면하고 있는 첫 번째 문제는 종단 내부의 ‘자정과 쇄신’이다. 이 문제는 종단 내부의 엄격한 규율 시행과 수행자의 청정한 계율 준수 그리고 외부 권력집단과의 관계 설정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는 사안이다. 이 사안이 공론화된 배경에는 공중파 방송사의 보도 내용이 주효했다. 공중파를 통해 조계종단 내부의 문제점이 고발 양상으로 보도되면서 불교계는 물론 일반 국민까지 심각한 문제의식에 봉착했고, 종단 내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타개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방송보도를 통해 얼핏 노출되었던 불교계의 문제점은 봉원사의 직영사찰 전환 과정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이명박 정부 들어 조계종단에서는 시청광장에서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를 열기도 했고, 현 정부 인사와 여당 국회의원들의 출입금지 현수막이나 현 정부의 종교편향을 규탄하는 현수막을 조계사에 내걸기도 했었다.

그런데 봉원사 문제가 부각되는 과정에서 종단 지도층과 정치권의 불미스러운 밀월관계가 폭로되면서 정치권력에 대한 종단 지도부의 이중적인 태도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조계종단에서는 2011년 6월에 종단 차원에서 ‘자성과 쇄신의 5대 결사’를 전담할 결사추진본부를 발족시켰다. 이는 언뜻 장해 보이지만 조금 엉뚱한 구석도 있어 보였다. 일반 언론에서조차 “1962년 통합종단으로 출범한 이래 정권과 갈등과 화해를 되풀이하고 종단 분규까지 겪은 조계종이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아 반성하는 결사 운동을 종단 차원에서 선언한 것은 처음이다. 가깝게는 2008년 8월 시청 앞 광장에서 불교계가 열었던 범불교도대회의 주제가 ‘헌법파괴·종교차별 이명박 정부 규탄’이었던 것과 비교해도 사뭇 다르다.”고 의아해했다.

조계종단의 자정과 쇄신이 그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하고 그 방향성을 의심받는 것은 종단의 모호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자정과 쇄신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거나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눈길을 보내는 이들은 대개 조계종단의 내부 사정에 밝은 사람들인 데다가, 그것이 단순한 추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 자료까지 제시될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범어사 주지 선거와 관련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터져 나왔으니 더욱 난감한 노릇이다.

이렇게 그 배경과 추진 과정에서 진정성을 의심하는 미심쩍은 눈길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자정과 쇄신은 현 시점에서 조계종단이 당면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2) 이웃 종교와의 관계 설정 문제

종단의 자정과 쇄신 문제는 2011년 들어 이웃 종교와 관계 설정에 대한 의제로 이어졌다. 자정과쇄신결사본부 화쟁위원회에서는 2011년 8월 23일에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발표했다. 기조 내용은 불교계가 먼저 이웃 종교와의 이해와 화합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음을 반성하고, 종교 평화를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고 이웃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취지는 무난해 보였다.

비록 지금까지 불교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보여 오지는 않았지만, 이웃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가지자는 선언 내용을 두고 탓할 일은 아닐 듯싶다. 한 언론인 역시 “불교와 기독교 인구가 서로 비슷한 나라에서 종교 사이의 열린 자세를 공론화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 바람직한 일”이라고 했고, “내가 아닌 상대의 허물이 또렷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그 문제를 품는 성찰과 실천은 유약하거나 패배주의가 아니라 가장 힘 있는 종교적 행위”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웃 종교와의 관계 설정 문제가 조계종의 자정과 쇄신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고 왜 갑자기 부각되었는지 그 동기와 배경 역시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는 각 종교들 사이의 갈등이나 불화가 비교적 덜한 편이었고 종교 간의 분쟁으로 인해 내란에 가까운 소요를 겪은 적도 없다. 최근 이교도들이 몇몇 사찰에 난입하여 행패에 가까운 행위를 하여 보도된 적은 있었지만, 이 정도 사건 사고는 그동안 불교계가 비일비재하게 겪었던 일들이고 언론에서조차 단신으로 처리해 왔을 정도로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일이다.

또한 헌법에서도 이미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이웃 종교를 인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다. 이렇게 근현대 불교사는 물론이고 종교사를 통틀어 봐도 종교들 사이의 관계 설정 문제가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던 기억이 별로 없는 국내 상황에서, 갑자기 종교평화라는 의제가 불교계에서 부각된 배경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동기와 배경은 분명치 않지만 조계종단은 주도적으로 종교평화선언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이웃 종교는 관두고 정작 불교계 내부에서 먼저 강하게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화쟁위원회와 종정 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지는가 싶더니 종정예경실의 음모론까지 제기되었고, 급기야 또다시 정치권력과 이면적 논의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이웃 종교와의 평화는 제쳐두고 종교평화선언이 엉뚱하게도 불교계 내부의 평화를 해치고 있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정작 더 심각한 갈등은 아직 수면 위로 올라와 있지도 않은 상황이다. 불교계에는 조계종 이외에도 태고종이나 천태종 등 규모 면에서 만만치 않은 종단들이 여럿 있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선언을 모색한다면, 마땅히 불교계 종단들 사이의 조정과 합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인데,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이웃 종단의 문제 제기와 갈등의 여지는 아직 남아 있는 상황이다. 만약 다른 종단에서, “조계종단은 한국불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선언은 조계종단의 선언일 뿐 한국불교의 선언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들고 나온다면, 조계종단의 변명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불교가 이웃 종교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두고 모종의 ‘선언’을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종교평화선언은 현 조계종단의 당면과제 가운데 하나로 떠올라 있다.
 
3) 조계종 정통 수행법 정립 문제

대한불교 조계종이 당면하고 있는 세 번째 문제는 ‘정통 수행법 정립’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간화선이 핵심적인 사안으로 부각된다. 일반 언론에서조차 지금 불교계 화두는 ‘화두 수행 회의론’이라고 지목하고 있을 정도로 수행법의 정립 문제는 심각한 사안이 되었다. 간화선에 대한 회의론 혹은 재정립의 필요성이 수면 위로 올라온 때는 2003년 즈음부터였다. 그해 8월 22일 지리산 실상사에서는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선우논강이 열렸는데,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수행법 1000년 간화선이 흔들린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어쨌든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회의와 재정립의 필요성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조계종단에서는 다급하게 간화선 수행법을 총정리한 《간화선: 조계종 수행의 길》을 2005년에 출간했다.

이 책이 간행된 배경을 두고 언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계종은 오래전부터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간화선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라는 세간의 질문에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또한 제3 수행법이 난립하면서 불자들을 현혹시키는가 하면, 이로 인해 ‘간화선의 본질마저 흐려지고 있다’는 분석이 대두되면서 자칫 간화선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교육원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간화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지침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지침서 발간 준비에 착수했다.”

조계종단이 종단 전체의 역량을 모아 야심 차게 추진하였고 그렇게 해서 출간한 《간화선》이 성공적이었다면, 이 책으로 말미암아 간화선의 구조와 원리는 정립되었을 것이고, 간화선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은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다. 간화선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전혀 가시지 않았고, 간화선은 빛 좋은 개살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는 더욱 짙어졌다.

조계종 승가교육진흥위원회가 2010년 9월 28일에 개최한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에서는 현재의 간화선 수행이 폐쇄적이고 고답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조계종의 전통 선법이 간화선이기 때문에 간화선이어야 한다거나 과거부터 최상승법이라고 해왔기 때문에 간화선이어야 한다는 공식은 배제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11월 23일에 개최한 조계종지(曹溪宗旨)의 현대적 구현을 주제로 토론회에서는, 진정 시대불교를 이끌 간화의 종장이라면 간화의 교조화를 넘어 염불, 간경, 지주(持呪), 예참, 기복, 사판의 모든 방편문에 반야의 산 눈[活眼]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지금 간화선이라는 이름 밑에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일부 방법론이 정말 붓다의 세계관에 부합되는 것인가를 스스로 되물어야 할 때라는 지적이 있었다.

또 12월 토론회에서는, 간화선은 조계의 선풍이 침체해진 선불교 후기에 형성된 참선수행의 여러 방법론 중 하나일 뿐 이를 조계종이라는 교단의 종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한국불교가 간화선이라는 선불교의 특정 수행법만을 사부대중에 일반화시켜 불교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개진되었다.

간화선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시작될 즈음에 필자는 이런 기류에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런 취지의 글을 작성하여 《불교평론》에 싣기도 했었다. 조계종단 수행자 개개인의 잘못된 의식(意識)이나 종단 운영시스템의 불합리성에서 비롯된 불교계의 문제점들이 마치 간화선 수행법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처럼 와전되어 가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외국인 불교학자가 한국불교의 특징을 일러 비빔밥불교라고 했다고 하는데, 조계종단이 간화선만을 정통 수행법이라고 굳이 붙잡고 늘어질 필요도 없고, 한국불교 전통 속에서 나타난 모든 종류의 수행법을 동등한 자격으로 모두 인정한다고 해 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간화선에 대해 잘 모르고 그래서 포기하는 결과라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만해 한용운의 불교개혁 노선

1) 종단 내부의 자정과 쇄신 방향과 관련하여

만해의 불교개혁론은 불교 내부와 외부 이 두 가지 방향에서 설정되어 있다. 먼저 외부적으로는 관권(官權)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나는 일찍이 불교혁신에 대하여 첫째 관권(官權)과 분립하여 자치주의를 철저히 할 것, 둘째 통일단체를 공고히 하여 불교 전도(傳道)와 또 불교의 사회화에 노력할 것을 역설한 사실이 있노라. …… 원래 조선불교의 부패와 타락,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쇠퇴를 가져온 원인은 결코 한둘에 그칠 것이 아니나, 나의 관찰에 의하면 관권과 결탁한 것은 확실히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는 것을 인정하느니…….

이처럼 만해는 불교개혁을 위해서는 불교도들이 정치는 현실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요, 종교는 이상계를 표준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각성하여, 종교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만해의 이러한 판단은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정교분리는 보편적인 당위 명제인 것으로 만해는 파악했다.

그는 또한 불교 내부적으로는 구태와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대처(帶妻) 문제였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만해는 교계의 비판을 각오하면서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에게 ‘불교는 무슨 방법으로 장차 부흥시킬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반드시 이렇게 말하겠다. ‘승려의 결혼 금지를 푸는 것도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의 하나일 것이다.’라고. 그러면 아마 나를 비난할 것이다. ……비록 결혼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행하기 어렵다고 해도, 마땅히 결혼이 불교의 시기와 근기에 이롭다 할 때에는 방편으로 결혼을 행해 때와 근기에 적응하다가 다시 결혼이 불교의 시대적 상황에 이롭지 않은 때가 온다면, 그때에 가서 이 방법을 거두어 옛날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는바, 그렇게 하는 경우 누가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결혼 금지가 어찌 세상의 도리에 어울리겠는가. 그 어울리지 않는 까닭이 되는 이치를 논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윤리에 해로운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국가에 해롭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포교에 해롭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교화(敎化)에 해롭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나라고 해서 부처님의 계율을 무시하여 승려 전체를 휘몰아 음계(淫戒)를 범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자유에 일임하려 하는 것뿐이다. ……옛사람들이 음계를 금지함으로써 부처님을 숭상한 데 대해 요즘 사람들이 그 계율을 해제해 놓고 부처님을 숭상한들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다만 시기에 들어맞으면 될 따름이다.

지금 현재 만해의 대처 주장이 유효하다는 것도, 지금이라도 그의 의견을 좇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대처제를 주장했던 그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대처제가 파계 여부를 다툴 사안이 아니라고 보았다. 대처는 파계가 아니기 때문에 용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설사 파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분명한 시대적 요청이라면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해는 단순히 불교 수행자의 욕망을 인정하자는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대처옹호 발언은 철저히 사회윤리적 맥락을 타고 있다. 대처는 불교 수행자의 투철한 사회적 역할의식과 책임의식을 전제로 용납되는 것이지, 본능이기 때문에 무조건 긍정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만해의 대처옹호 주장은 구세(救世)와 사회참여를 위해 불교가 스스로 자신의 순수와 청정을 기꺼이 걷어낼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해의 역할 의식은 외재적이고 타율적인 규범체계가 아니라, 행위 주체의 자발성에서 불거져 나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역할의식의 진정성은 행위 주체의 자재(自在)의 순도(純度)에서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만해에 의하면, 조선의 선은 구세의 방편이 되지 못하고 독선과 염세의 변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조선불교의 폐단인 염세주의와 독선주의를 넘어선 구세를 강조하고 있다.

구세는 곧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관계 속에서만 역할이 나온다. 역할의식은 곧 관계의 자각이다. 금욕적 수행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인 데 반해서 책임이란 타자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며, 개체의 독존을 전체의 결속으로 교환하며, 고요함을 번잡함으로 바꾼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독선주의이다. 독선은 관계의 병리현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 개념이 바로 ‘대중불교’이다. 그는 대중불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중불교(大衆佛敎)라는 것은 불교를 대중적으로 행한다는 의미이니, 불교는 반드시 애(愛)를 버리고 친(親)을 떠나서 인간사회를 격리한 뒤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만반현실(萬般現實)을 조금도 여의치 않고 번뇌 중에서 보리(菩提)를 얻고 생사 중에서 열반을 얻는 것인즉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곧 대중불교의 건설이다.

이 대중불교가 바로 앞서 만해가 밝힌 ‘불교의 사회화’이다. 현 조계종단이 자정과 쇄신을 당면과제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반세기 전에 만해가 제시한 방향성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만해의 관점을 이 시대에 가져와서 생각해 본다면, 자정과 쇄신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역할의식에 대한 자발적 각성이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어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무침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사무침을 바탕으로 해서 안으로는 현 실정에 맞게 탄력적으로 계율과 청규를 정비해 나가고, 밖으로는 집권층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불교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 불교의 사회적 존재 가치를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길은 바로 이것뿐이라고 만해는 생각했던 것 같다.

2) 이웃 종교와의 관계 설정 문제와 관련하여

만해 당시에 불교의 이웃 종교 가운데 그 이념의 무게나 규모로 보았을 때 가장 강성했던 것은 유교(儒敎)였다. 유교는 서구적인 관념에서의 종교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동양에서 유교의 종교적 성격이나 비중을 간과할 수도 없다. 유교를 보는 만해의 시각을 통해 이웃 종교에 대한 만해의 의견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만해는 〈선과 인생〉이라는 글에서 “마음을 닦는 것, 즉 정신 수양에 대해서는 불교의 선만 있을 뿐 아니라, 유교에도 있고 예수교에도 있으니, 유교에는 맹가(孟軻)의 구방심(求放心)과 송유(宋儒)의 존양(存養)이 그것이요, 예수교에는 예수의 요르단 하변(河邊)에서 40일간 침획명상(沈劃冥想)한 것이 그것일 것이다. 다만 그 내용의 방식이 다소 다를 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유교의 세부 이론에 대해 상당히 높은 식견을 가지고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방심은 즉 방종산일(放縱散逸)한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 방심은 물욕에 교폐(交蔽)되어서 본성을 지키지 못하고 경(境)을 따르고 욕(欲)을 좇아서 방종불기(放縱不羈)한 심원의마(心猿意馬)인 고로 그러한 방심을 구하여서 비로소 본성의 천리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방심은 곧 마음을 닦는 것이요, 곧 정신 수양이 되는 것이다. 맹가는 구방심의 필요를 말하였으나 구방심의 방법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존양(存養)은 구방심에 비하여 구체적이요 합리적이어서, 수양의 도로는 일층 진보된 학설이다. ……존양이라는 것은 이발(已發)의 심(心)을 추구 회수한다는 것이 아니요, 심의 체(體)를 미발(未發)의 전에 존양하여 장래를 예비하는 것인즉, 그 논리에 있어서 구방심보다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양의 방식에 있어서 하등 구체적 이론이 없다. …… 그러므로 존양은 구방심보다 진보된 것이나 논리와 방법이 완비한 선(禪)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해는 유교와 선불교를 상호 비교 분석하면서 그 차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분석의 맥락은 유교의 존재성에 대한 일방적 혐오나 부정이 아니라, 유교에서 추구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나가면서 불교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만해는 선과 유교가 정신수양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음을 말하는 한편, 구체적인 수행 방법론에 있어서 선이 더욱 구체적이라고 분석하였다. 이것이 승려인 만해가 이웃 종교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만해는 예수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에 예수교의 교세나 그 이론과 사상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 역시 유교에 대한 식견은 상당히 깊었으나 예수교에 대해서는 따로 깊이 살펴보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그는 다른 글에서 불교에 귀의하는 이유를 밝히면서 불교의 특징을 이웃 종교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불교(佛敎)를 믿습니다. 아주 일심(一心)으로 불교를 지지합니다. 그것은 불교가 이러한 것이 되는 까닭입니다. 불교는 그 신앙이 자신적(自信的)입니다. 다른 어떤 교회와 같이 신앙의 대상이 다른 무엇−예(例)하면 신이라거나 상제(上帝)거나−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자아(自我)라는 거기에 있습니다. 석가의 말씀에 “심즉시불 불즉시심(心卽是佛 佛卽是心)”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 사람이 다 각기 그 마음을 가진 동시에 그 마음이 곧 불(佛)인즉 사람은 오직 자기의 마음 즉 자아를 통해서만 불(佛)을 이루리라는 것이외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 자아라함은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物)을 떠나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과 물을 통해서의 자아입니다. 즉 사람 사람의 오성(悟性)은 우주만유(宇宙萬有)를 자기화할 수 있는 동시에 자기가 역시 우주만유화할 수 있는 것이외다. 이 속에 불교의 신앙이 있습니다. 고로 불교의 신앙은 다른 데 비하여 예속적이 아니외다.

여기서 확인되듯이 만해의 발언에서는 어떤 배타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불교의 특징이 자신적(自信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불교에 귀의한다고 밝히고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타신적(他信的)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에 귀의한다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한 유효하다. 그뿐이다. 만해는 자신적이라는 점이 불교가 이웃 종교와 구별되는 차별성이며 그 점에 자신이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만해의 종교관에 비추어 볼 때, 작금 조계종단의 종교평화선언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라는 점에서 그 맥락이나 취지가 만해의 종교관에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만해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이웃 종교와 구별되는 불교적 진리의 특징과 성격을 명확하고 밀도 있게 천명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만약 만해가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이웃 종교와 구별되는 불교의 진리관을 뚜렷하게 천명하면서, 다른 종교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고 종교 사이의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3) 조계종 정통 수행법 정립과 관련하여

굳이 수행법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만해는 불교 자체가 곧 선교(禪敎)에 다름 아니라고 보았다. 선과 교학, 이 둘을 제하고는 불교라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불교관이었다. 따라서 불교수행이라면 교학수행과 선수행을 겸비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가 지은 〈조선불교 개혁안〉에는 서언(緖言)을 포함해서 모두 7개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맨 끝에 ‘선교(禪敎)의 진흥(振興)’이라는 항목이 있다. 그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교(禪敎)를 떠나서 불교를 말할 수 없으니 선교는 곧 불교요, 불교는 곧 선교다. 선(禪)은 불교의 형이상적(形而上的) 순리(純理)를 이름이요, 교(敎)는 불교적 언문(言文)을 이름이니, 교로써 지(智)를 얻고 선으로써 정(定)을 얻는 것이다. 정을 얻어야 바야흐로 생사고해를 건너서 열반피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교를 말미암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하는 보벌(寶筏)의 지침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하나를 궐(闕)할 수가 없으니, 불교의 성쇠는 선교의 흥체(興替)를 영향하는 것이다.

선과 교가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국불교 전통에서 이 둘을 제외하면 불교에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만해의 논지를 미루어보면 선은 수행자의 자기 단련의 방편이고, 교는 수행자가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다. 비단 출가 수행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재가불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두 가지를 겸비해야 출가 수행자의 면모와 불교를 신앙하는 종교인의 면모가 갖추어진다는 것은 사실 너무 평범해서 차라리 고리타분해 보인다.

선교의 겸비를 강조하는 가운데 만해가 생각한 이상적 인간상은 ‘종속되지 않는 자아를 완성한 사람’이었다. 이에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그는 선을 지목했다. 만해가 당시의 불교수행 전통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으면서도 여전히 간화선 수행법에 주목한 까닭은, 수행의 구체적 방법론을 적시하고 있는 분야는 간화선이 유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만해는 동서양 정치계와 사상계의 여러 인물을 거론하면서 이들이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후천적 수양이 자연히 선적 활용에 부합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해는 선의 대표적 수행동력으로 방할(棒喝)을 예로 들었는데, 이것이 이상적 인간상을 구현하는 구체적 방법론이라고 판단했고, 그 자신이 일상 중에도 수시로 사용했다. 그는 방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제(臨濟)의 할(喝)과 덕산(德山)의 방(棒)은 선기에 있어서 특별한 명물(名物)이다. ……임제의 할은 할마다 치할(痴喝)이요, 덕산의 방은 방마다 맹방(盲棒)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임제의 할은 할을 쓰는 마음이 없었고, 덕산의 방은 방을 쓰는 상(相)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임제의 할은 한마디의 무심한 소리에 지나지 못하고, 덕산의 방은 한 가지의 무정한 고목에 지나지 못하였다. 사량복탁(思量卜度)의 지해(知解)가 없는 무심한 할인 고로 어느 법에 통하지 아니함이 없고, 친소애증(親疎愛憎)의 착상이 없는 이상(離相)의 방인 고로 맞지 아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할은 진정한 치할이라야 되고, 방은 완전한 맹방이라야 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할과 방의 지해와 착상(着相)이 있으면 그것이 이른바 영리한 치할이요 총명한 맹방이다. 그러한 방할은 선기(禪機)에 있어서 10만 8천 로(路)이다.

만해는 선문의 전통에서 배태된 수행기제인 방할을 다시 맹방(盲棒)과 치할(痴喝)이라는 말로 보충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영리하고 총명한 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맹(盲)과 치(痴)는, 상(相)과 사량복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말로 풀어서 이해한다면 할과 방을 쓰는 자가 스스로 ‘의도(意圖)’나 ‘기도(企圖)’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할은 스승이 자신의 의도와 기도를 배제한 교수법이라는 특징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의도나 기도가 없는 교육이 어떻게 가능한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이 선의 독특하고 구체적인 활용 사례임에 분명하다. 이미 마음이 흩어져 방종하고 있음에도 그 마음의 주인이 그런 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방할은 매우 적확하게 학인을 제접하는 방법이어서 남의 마음에까지 가 닿을 수 있다고 만해는 판단했다. 이처럼 그는 선에 수양의 구체적 방법론이 적시되어 있고 저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남의 마음에까지 가 닿을 수 있는 교수법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선사로서의 만해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심도 있게 진행된다면, 익히 널린 알려진 한국 근대불교 시기의 대표적 선사들에 견주어 볼 때 선승으로서 그의 모습은 손색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과 관련하여 그가 남긴 문헌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당대의 어떤 선지식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고, 그 문하에서 춘성(春城, 1891~1977)이라는 걸출한 선승이 배출된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만해는 〈선과 인생〉에서 다음과 같이 다시 설명한 바 있다.

선(禪)이라면 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을 숭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을 일종의 종교적 행사로만 아는 것은 오해다. 선은 신앙도 아니요, 학술적 연구도 아니며, 고원한 명상(冥想)도 아니요, 심적(沈寂)한 회심(灰心)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요, 따라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선에 있어서도 화두를 드는 이외에는 무슨 방법이든지 방법을 쓰는 것은 금물이다. 망념을 제하기 위하여 망념을 물리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망념을 물리치고자 하는 그 생각이 도리어 망념이 되어서 망념을 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망념을 더하게 되는 것이요, 선을 잘 하리라는 생각이라든지 쉽게 깨달으리라는 생각이라든지 무릇 어떠한 좋은 생각이라도 일으키기만 하면 곧 망상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모착처(摹捉處)가 없이 심(心)의 본체를 보유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일이어서 하근중생(下根衆生)으로 하여금 현애상(懸崖想)을 내게 하기 쉬운 고로 부득이 화두의 방편을 설(設)하여 일종의 방법을 삼게 되었으니 화두 즉 무(無), 시심마(是甚麽),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등 소위 1천7백 공안(公案)이라는 것이 일종의 의정(疑情)을 일으키게 하는 방편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화두에 의하여 의정을 일으키고 의정에 의하여 망념을 제하고, 망념의 제거에 의하여 심식(心識)이 통일되고 심식의 통일에 의하여 심체가 자명하느니, 선의 유일한 방법은 화두뿐이다. ……화두라는 것은 선의 목적이 아니라 선의 방편이다. 화두를 들어 의정하는 상태는 어떠한가. 그것은 지적 작용으로 연구하는 것도 아니요, 다만 무의식으로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지적 작용으로 연구를 하면 도거(掉擧)의 허물을 범하고 무의식적으로 침묵하는 것은 혼침(昏沈)의 허물에 떨어지는 것이다. …… 선(禪)이라는 것은 마음을 써서 연구하는 것도 아니요, 마음을 쉬어서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화두에 의정만을 활착맹기(活着猛起)할 뿐이다.

만해는 선이 불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불교인이든 아니든 종교인 비종교인 할 것 없이 어떤 종교적 선입견도 없이 일상에서 행하는 명상이나 마음수련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만해는 “선에 있어서도 화두를 드는 이외에는 무슨 방법이든지 방법을 쓰는 것은 금물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 모착처(摹捉處)가 없이 심(心)의 본체를 보유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일이어서 현애상(懸崖想)을 내게 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만해의 판단에 따르면 선이라고 하든, 명상이라고 하든, 마음수련이라고 하든 호칭이야 어떻게 해도 좋겠지만, 이것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를 드는 방편을 취하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한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화두를 들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치닫기 십상이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만해의 발언을 미루어 볼 때, 단지 명상이나 마음수련 차원에서 진행하는 선 수행의 위험성을 짐작할 수 있고, 반드시 화두를 드는 간화선을 해야 하는 이유 역시 분명해진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해는 선을 불교에 국한하지 않으면서도, 수행의 과정에서 화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설악산 백담사의 만해 흉상과 《조선불교유신론》의 산실인 만해당 전경.
나는 화두수행에 대해 만해가 설명한 것처럼 간명하고 적절하게 진술된 문건을 별로 본 적이 없다. 〈선과 인생〉은 내가 아는 한 적어도 근현대 불교사를 통틀어 화두수행의 의의와 필요성 그리고 그 원리에 대해 가장 체계적이고 완결성을 갖춘 글이다. 만해가 세상을 떠난 지 두 세대가 훌쩍 넘었다. 아직도 조계종단에서는 만해를 뛰어넘을 만큼 간화선을 체계적으로 설명해내고 있지 못하면서도, 그를 한국 선종사의 계보에 넣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간화선에 대한 회의론만 봇물처럼 쏟아지는 형국이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4. 나가는 말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당면과제는 어쩌면 불교가 자진(自盡)할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종단 내부의 자정과 쇄신, 이웃 종교와의 관계 설정, 그리고 정통 수행법의 정립 문제는 하나같이 무겁고 버거운 사안이다. 야심 차게 시작했다가도 과정 속에서 삐걱대고, 해결책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흐지부지되어, 추진하던 사람이나 바라보던 사람이나 결국 절망하고 회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접한 방송 내용은 충격적이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의 자정과 쇄신 그리고 종교평화선언이 이명박 정부의 정책노선과 이면적으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추진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방송 내용이 사실이라면 조계종단의 자정과 쇄신 그리고 종교평화선언은 관제(官制)라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조계종단의 눈길이 여전히 권력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종단에 대한 미련과 연민조차 접어버릴지도 모른다.

2044년에 이르면 조계종단의 신규 출가자는 21명에 그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출가자 숫자가 그러할진대 불교신자는 늘어날까? 종교는 어떤 외압이나 탄압에 의해서도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외압이나 탄압은 오히려 종교의 생명력을 키우고 연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탄압이 가해지면 종교는 어디론가 스며들었다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봄날의 새싹처럼 한꺼번에 솟아나온다. 종교는 대개 자진한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고, 사람들이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 주지 못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종교를 찾지 않게 되고 종교는 마침내 자진하고 만다.

그래서 지금 다시 만해를 떠올린다. 만해가 생각한 불교계의 자정과 쇄신의 방향은, 대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자발적 반성과 각성을 전제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일체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불교 고유의 가치와 진리를 세상 속에서 구현해 나가면 그만이다. 불교와는 다른 진리관이나 이웃 종교를 인정하는 태도는 불교 고유의 진리관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 속에서 저절로 달성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화두라는 최고의 방편을 이용한 선 수행을 통해 수행자 개개인이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이것이 만해가 한국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남겨 놓은 유산이다.

 

박재현 / 불교철학자. 서울대학교대학원 철학박사.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이며,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등이 있다. 현재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인문학습원 선불교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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