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영 (朴漢永, 1870~1948)]

1. 우리 불교에 미래가 있는가?

우리 불교에 미래가 있는가?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즉각적인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템플스테이나 사찰음식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보면 꽤 긍정적인 답이 가능한 반면, 청년 불자 수와 출가자 수의 급속한 감소나, 심하게 자본주의에 침윤되어 ‘세상이 불교계를 걱정하는 세태’를 보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답을 찾을 수 없기도 하다. 조선이라는 성리학적 질서 중심의 도덕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가 무너지는 와중에 우리 불교는 억불정책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회생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왜색불교의 침입 앞에서 그다지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아야 했다.

광복 이후 40여 년에 걸친 일제강점기의 얼룩을 스스로 닦아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요된 ‘정화(淨化)’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고, 그것이 다시 1990년대에 전개된 젊은 승려들에 의한 불교계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우리 불교는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한국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고, 다양한 행사나 세미나, 법회가 끊임없이 열리면서 학술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2011년)과 올해(2012년) 초에는 법정(法頂)과 지관(智冠)이라는 한국불교의 상징적 인물들이 열반에 들었고, 그들의 다비식에 쏠린 불자들과 일반인들의 관심과 추모의 물결을 보고 있자면 한국불교 또는 한국불교계는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답변을 쉽게 내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 핵심적인 이유를 다음 두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한국불교가 그 미래적 대안을 스스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내적 차원의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가 한국불교가 제시하고 있는 미래적 대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외적 차원의 이유이다. 물론 이 두 차원은 서로 얽혀 있어 불이적 관계 속에 있지만, 문제 해소에 접근하고자 할 경우에 먼저 한국불교 안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순서이다. 그렇게 해야만 문제가 더 잘 보여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외적인 차원에 초점을 맞출 경우 초래될 수 있는 순환론적 교착상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과제는 물론 우리만이 겪고 있는 고유한 성격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시기에 경험했던 문제이고,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는 시기에도 경험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첫 번째 시기에는 기화(己和)로 대표되는 유가적(儒家的) 소양을 지닌 스님들이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고, 두 번째 시기에는 용성과 석전(石顚), 만해로 상징되는 당대의 스님들이 온몸으로 이 문제와 맞서고자 했다. 특히 두 번째 시기는 한국불교와 서구 사이의 만남이라는 화두가 중심에 있던 시기이고, 이 문제는 여전히 현재에 살아 있는 화두라는 점에서 우리가 그들과 공유할 수밖에 없는 연속성을 지닌다.

한국불교와 서구의 만남은 구체적으로 한국불교가 자본주의 문명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으로 정착한 자본주의 문명은 모든 것의 상품화와 소유를 그 핵심적인 구호로 내세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돈으로 환원시켜 값을 매길 수 있고 또 소유가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은 값으로 환원된 소유의 양과 질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자본주의 문명의 핵심 테제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소유 욕구를 적극적으로 부추겨 엄청난 양의 생산물과 고급스러운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는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곤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른바 ‘명품’ 소비 열풍이 그러한 구체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우리 불교는 이러한 자본주의 문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또 맺어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용성과 석전, 만해가 직면했던 초기 형태의 고민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철과 숭산, 법정, 지관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중후반의 한국 자본주의 문명에서 살아내야 했던 스님들의 구체화된 고민으로 이어졌고 동시에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있기도 하다. 용성과 만해, 석전이 살아내야 했던 20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고민들은 주로 초기 자본주의의 극단화된 형태인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에 어떻게 맞서서 제대로 된 삶을 구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공통된 화두를 붙들고 그들은 각각 다른 색깔의 대안을 마련해서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은 그중에서도 교육(敎育)을 중심에 두는 장기적이면서도 근원적인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 점에서 돋보인다. 용성과 만해의 경우에도 승려 교육을 비롯한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석전만큼 교육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석전은 특히 승려 교육뿐만 아니라 젊은 인재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교육 전반의 개혁에 큰 관심을 쏟았다. 전통교육을 계승하면서도 당시의 학문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껴안고자 했고, 더 나아가 문명의 흐름을 관조하면서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실천적인 지식인을 길러 내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석전의 불교개혁론을 현재 우리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면서 오늘에 되살려보고자 하는 것이 이 작은 글의 목적이다.


2. 불교 강사로서 석전의 삶

논자는 석전의 불교개혁론이 당시 한국불교가 직면하고 있던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것이지만, 그 중심은 교육(敎育)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근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의 불교개혁에 관한 대표적인 글인 〈조선불교현대화론〉은 절반 이상의 내용을 ‘불교 강사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의 삶 대부분이 전통강원의 강사이거나 근대적인 교육기관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근거이다.

개화의 격랑이 한반도에 몰아치기 시작하던 1870년 전북 완주에서 출생한 석전은 출가 이전에 통사와 사서삼경을 수학하였고, 17세 되던 1886년 출가하여 강원도 고성 신계사에서 금산(錦山)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그 후 백양사, 선암사 등에서 공부하고 1896년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 스님에게 건당하고 염송과 율장, 화엄을 수학한 후 법통을 이어받아 개강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불교 강사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10년에는 일본 불교계의 침략에 맞서 선(禪) 중심의 임제종 법통을 세우는 노력에 동참했고 다음 해(1911년)에는 경허 스님 등과 함께 광주 증심사에서 회합을 갖고 교학을 쇄신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해 《조선불교월보》 9호에 〈불교 강사와 정문금침(頂門金針)〉을 발표하여 불교 강사의 문제점과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근원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함으로써 불교개혁가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1913년에는 조선불교포교당에서 환등기로 여래팔상(如來八相)을 보여주는 현대식 기법을 활용해 설법했고,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의 숙사, 불교중앙학림의 강사, 학장,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1932년) 등으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강백으로서 활발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반대하여 1938년 중앙불전 교장을 사임한 이후에도 다양한 장소와 공간에서 강의를 계속해 나가는 한편 1945년 광복 후에는 전국승려대회에서 초대 교정으로 추대되었고 세수로 79세, 법랍 61세 되던 1948년 내장사에서 입적했다.

 

석전 박한영(1870~1948)이 중앙불전(동국대학교 전신) 학장으로 재직하던 모습.

 

이러한 석전의 생애는 이판과 사판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어서 전계 아사리를 역임하거나 내장사나 구암사의 주지, 초대 교정과 같은 다양한 불교계 경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을 찾자면 그 스스로 이름 붙인 ‘불교강사(佛敎講師)’라고 할 수 있다. 전통강원의 강사를 시작으로 근대화된 불교 교육기관의 강사, 학장, 교장 등의 일을 그 스스로 자신의 삶의 중심 영역에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일은 단지 불교계 내부에 머물지 않고 조지훈이나 김동리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을 유발상좌로 만드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석전은 재가 지식인들이 불교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1926년부터 20년 가까이 강주로 있었던 서울 개운사 대원암 강원에서 일반인들도 수강할 수 있게 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이 강원을 통해 스님으로는 운허와 청담이 배출되었고, 재가자로서는 앞서 언급한 조지훈, 김동리 외에도 신석정, 서정주 등이 배출되었다. 이 강원 교육과정의 특징은 승려들에게도 칸트(I. Kant)의 3대 비판서나 루소의 《에밀》 같은 외전을 읽게 하여 서구 문명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점이다. 공식 교육과정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강원 내에 비밀 독서회가 조직되어 일제가 금기시하던 사회과학 서적을 읽다가 일본 고등경찰에게 발각되어 경찰서로 끌려가기도 했다. 석전은 승려들에게는 외전까지 접하게 하고 재가자들에게는 정통 불교경전을 공부하게 하여 시대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이 땅의 실천적 지식인을 길러 내고자 했고, 그것이 개운사 대원암 강원만이 지닐 수 있는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로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배출된 수많은 제자들이 기억하는 스승으로서 석전은 각자의 인연에 따라 다르지만, 그가 단순히 경전의 내용을 건조하게 전달하는 강사가 아니었다는 점에는 합의를 보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교사가 있었고 현재 우리의 경우에도 각급 학교와 강원, 승가대학원 등에 수많은 교사가 있지만, 학교폭력이나 입시학원화와 같은 말들이 횡행하면서 우리 교육의 미래는 물론 우리 사회의 미래까지도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새로 등장하는 대통령마다 교육대통령을 자임해왔지만, 어느 누구도 근원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점점 더 상황만 악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문제에 관한 한 해답이 없다고 체념하는 사람도 늘고 있고, 교육당국은 결과적으로는 문제를 악화시키는 단기적인 처방을 ‘언 발에 오줌 누듯’ 포기하지 못한 채 쏟아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문제는 단순히 교육적 차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유교권 국가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한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핵심 통로로 작동해왔고, 그 전통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학부모들의 교육열로 나타나 경제성장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교적 전통을 천 년 이상 간직해온 우리에게 교육은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격도야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성리학으로 정착한 우리의 유교에서도 본질적으로는 공유했던 과정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로 받아들인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여전히 중시되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생존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사회적 위신을 지키기 위한 기본 요건으로서의 수단적 성격에 치우쳐 있다. 초등학교 단계에서 이미 시작되는 대학 입학을 위한 경쟁은 중·고등학교로 오면서 격화되고, 이 과정에서 인성교육과 같은 교육의 목적 자체는 경시되거나 아예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맹목적인 경쟁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형태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선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만 하고, 우리는 그 주체로서 이 땅의 교사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불교계의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쯤 해서 일제강점기 우리 불교의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 석전의 시선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우리 불교의 진리가 드넓고 위없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기독교에 처지고 있음은 실로 태평양의 물을 온통 기울인다 해도 그 수치를 씻기 어렵거늘 오히려 우리 형제들은 그 노후한 유풍에만 깊이 젖어 공덕은 좀처럼 이룬 게 없고, 내 몸 하나 위하는데 해가 안 되면 남이 고통받는 것쯤 보살피려 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만 배부르고 편하면 그만이라는 자세를 고집하는 지경으로 썩어 들어가 마치 흐르는 물에 아무렇게나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처럼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니,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된다면 불교가 과연 미래에 오늘의 상황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과거의 잘못으로 오늘에 슬픈 결과를 자초한 점을 눈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터이니 바로 지금 불교를 진흥시킬 좋은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내일의 불교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갈 것이다. 잘라 말해서 즐겁고 슬픈 것이나 흥하고 망하는 것이 모두 사람에게 달린 것이라는 얘기다. ……중략…… 깊은 산골에만 묻혀있는 장로들과 저자거리의 화주(化主)들은 돌아가는 세상을 똑바로 보고 새 불교를 회복하기 위해 청년도제들을 옳게 가르치고 이끌어서 요즘 오가는 시비를 이제야말로 크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석전의 예측은 거의 현실로 드러나 이미 우리 불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하는 그리스도교에 추월당했고, 자신만 잘살게 해달라고 빌거나 자신의 자녀만 수능시험에서 공부한 것 이상의 결과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기복성도 쉽게 극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지점은 그런 위기에 이미 익숙해져서 ‘마치 흐르는 물에 아무렇게나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처럼’ 우리 불교와 불교계가 자본주의적 일상 속에 함몰되어 있는 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당시 불교계에 대한 석전의 날카로운 비판은 불행하게도 현재의 우리에게도 전혀 다르지 않게 적용된다. 이런 한국불교에 과연 미래가 있는가? 또는 불교가 미래에도 현재의 위상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석전은 돌아가는 세상을 똑바로 보면서 청년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이끈다면 분명히 길이 있다는 확고한 답변을 하고 있다.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할 사람으로 그는 불교 강사를 적시하고 있고, 그 스스로 삶의 중심에 불교 강사라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품고자 노력했다. 그런 노력들은 우선 일제강점기 당시에 불교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장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결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운허와 조지훈 같은 다음 세대의 강사를 성공적으로 길러 내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강맥(講脈)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운허는 다시 월운, 지관 같은 제자들을 강사로 길러 내 고려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해 내거나 불교대사림을 편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한국불교계는 디지털 대장경을 만들거나 승가교육 과정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기획하고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3. 석전의 불교 강사론과 불교개혁의 지향점

1) 석전의 불교 강사론과 교육론

그렇다면 석전에게 불교 강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는 불교 강사가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건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이고, 두 번째 요건은 그러한 지혜를 자신이 만나는 제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이다. 이 둘은 불교의 기본 지향인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원력을 세우는 일과 동일한 맥락을 지니는 것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불교 교육의 도량을 염두에 두면서 찾아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별성도 동시에 지닌다.

석전은 불교 강사가 갖추어야 할 이러한 요건을 염두에 두고, 당시 불교 강사들의 상황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데서 자신의 논지를 시작한다. 그가 보기에 당시의 불교 강사들은 ‘약간의 경전을 읽어서 부처님의 말씀을 조금 흉내 낼 줄은 알지만 스승이나 법려(法呂)들과 서로 교제하는 과정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아직 받지 못한 까닭에 지혜가 열리지 못하여, 견문이 고루한 것은 물론 종교가로서 필요한 지식을 지니지 못한 자’이다. 상황이 그러함에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게으름의 타성으로 산만함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자이기도 하고, 오만하여 독선만을 꾀하면서 공동체의식이 결핍되어 있기도 하고, 교만하고 인색하기까지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단점을 잘 알면서도 억지로 감추려 하는 소인배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섯 가지 병통을 그는 불교 강사의 다섯 가지 병으로 규정하면서 그 비판의 범주에서 자신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불교 강사’는 석전이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다르마(dha-rma)를 향한 구도의 길을 걷는 수행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뒤따라오는 후학들에게 모형이 되어야 하는 두 차원의 삶을 동시에 살아내야 하는 존재이다. 모든 교사의 삶 속에 이러한 이중적 차원, 즉 상구(上求)와 하화(下化)의 차원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특히 불교 강사의 경우에는 그 스스로 붓다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원을 세우고 삶 속에서 수행을 지속시켜가는 불교 수행자이면서 사부대중을 포괄하면서도 특히 스님들을 대상으로 경전의 진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스승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위상과 책임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교 강사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요청과 기대는 현실 속에서 늘 속절없이 무너지곤 한다. 그것은 석전이 살아내야 했던 일제강점기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시기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질긴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교 강사들은 ‘약간의 경전을 읽어 부처님 말씀을 조금 흉내 낼 줄은 아는 자’이지만, 제대로 된 스승이나 도반을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더라도 그들에게 제대로 배울 만한 근기와 열의를 갖지 못해 지혜가 열리지 못한 까닭에 보고 들은 것이 좁고 고루하면서도 겉으로는 교만하고 인색하기까지 한 소인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해 어느 순간 지혜의 눈이 열릴 가능성이 있겠지만, 독선으로 가득하여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불쌍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강사들이 대부분이다. 대학생들이나 대학원생, 일반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불교 관련 강의를 하곤 하는 논자 자신도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시대 강사의 애처로운 자화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이런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석전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맑은 거울에 비춰 볼 기회를 얻은 우리에게는 그 행운을 날려버리지 말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책무가 주어진다. 먼저 석전의 대안을 함께 음미해보기로 하자. 석전은 당시 강사들의 상황을 너무 병이 깊어 이미 약을 쓸 수 없는 극한의 상황으로 비유하면서, 마지막 방법으로 정수리[頂門]에 금침을 맞는 것을 제안한다. 다섯 가지 병통에 대해 각각의 금침을 놓음으로써 목숨의 끝을 되살리는 방법인 셈이다.

먼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마음인 공고(貢高)에 대해서 석전은 금침을 놓는다면 그 효능이 허심박학(虛心博學)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금침은 특히 전통 강원의 형태에만 매달리면서 그것만이 모든 것이라고 여기고 그 밖의 사상이나 철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몰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강원의 승려강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강원 교육과정에서 불교경전 공부가 우선임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의 학문과 단절된 것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방편의 차원을 제외하면 인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세상과 자연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가운데 얻어진 깨달음에 기반한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당시의 철학은 물론 자연과학의 성과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더 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외부 학문의 성과에 휘둘리지 않는 경지를 석전은 허심박학이라는 한마디로 잘 정리해내고 있다.

불교 강사들이 지니고 있는 두 번째 병통은 게으름의 타성에 젖어 산만함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인 나산(懶散)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일상을 향유하면서 대접받고 있는 강원의 강사들은 석전의 정확한 지적과 같이 ‘경전에서 얻은 알량한 지식에 자족하면서 석가여래가 물려준 복으로 곳곳에 그럴듯한 거처를 마련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면서도 일상의 게으름과 귀찮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산속의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 병통에 금침을 놓으면 얻어지는 효능은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주로 불교 강사를 대상으로 삼은 석전의 이러한 금침은 오히려 이 땅의 교사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중산층 이상의 지위와 부를 확보한 많은 교사들이 게으름과 귀찮음을 감추지도 않은 채 교무실과 교실을 지키는 와중에 우리 아이들은 입시지옥의 상징인 학원을 자신의 집으로 삼거나 학교폭력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교사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내고 있는 교사들의 존재를 결코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대다수의 교사들이 일상적 직업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사실 또한 적시되어야만 우리 교육에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세 번째 병통은 자신만을 알고 자신이 속해 있는 인연의 고리를 제대로 보지 못해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조차 지니지 못하는 위아(爲我)이다. 불교 강사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알고 그 이익 앞에서는 ‘느닷없이 부드러워지거나 계산 또한 치밀하기 이를 데 없어 민첩함과 교활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라고 석전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성을 중요하고 핵심적인 본능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20세기 이후 사상사 속에서 석전의 이기성 비판은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역비판을 받을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이기성의 영역이 무한정으로 확대되어 최소한으로 필요한 공공재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우리에게 그 이기성은 최소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제한되거나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동반하면서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몰지각한 일부 학원 강사가 아닌 한 자신이 받는 급여 수준에만 맞추는 강의나 수업을 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경향성을 우리는 가끔씩 목격하곤 한다. 이들에게 석전의 망아이생(忘我利生)이라는 처방은 그다지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그 이기성의 무한정한 확산을 상상하면서 결국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다.

네 번째 병통은 소유욕에 빠져서 한없이 인색한 것을 의미하는 간린(慳吝)이다. ‘소유욕으로 똘똘 뭉쳐 도무지 남을 도울 줄 모르는 성품이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입으로는 사리분별을 말하면서도 그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자신의 이익과 소유 확대로 삼는 자들을 경계하는 말이다. 이러한 수준의 도덕성 발달 단계를 현대의 대표적인 도덕심리학자인 콜버그(L. Kohlberg)는 전체 여섯 단계의 도덕성 중에서 2단계인 자기 이익 지향의 단계라고 규정짓고자 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맞추는 도덕성 단계가 바로 2단계인데, 남 앞에서 불교의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강사가 이 수준이라면 당연히 도덕교육 자체는 불가능하게 되고 단지 앵무새가 떠드는 어설픈 경전 구절들이 횡행하게 될 것이다. 이 병통에 금침을 맞게 하면 희사원통(喜捨圓通)이 된다고 석전은 강조한다. 욕심을 버리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주는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모든 일에 걸림없이 통하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병통은 자신의 행위와 지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오류로 그 단점을 감추는 장졸(藏拙)이다. 사실 강사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오류나 잘못이 바로 이 장졸의 문제이다. 어쩌다 보니 남 앞에 서서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우리는, 자신의 단점은 자신이 먼저 알기 때문에 아예 뒤로 물러서서 도덕군자연하거나 거꾸로 아는 것을 과장하여 공격적으로 내세움으로써 그 단점을 감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 그 단점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기꺼이 모르는 것을 배우고자 한다면 석전의 표현과 같이 ‘배움이 날로 새로워지고 도(道)의 그릇을 완성해서 아무도 함부로 뒤따르지 못할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금침을 놓으면 얻을 수 있는 효능은 호문광익(好問廣益), 즉 묻는 것을 좋아하여 큰 이로움이 따라올 것이라고 석전은 강조하고 있다.

불교 강사를 대상으로 하는 석전의 강사론은 이 시대 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교사론이자 교육론이기도 하다. 교육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삶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치열한 열망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승과 도반(道伴)이라는 동반자를 상정할 수 있고, 그중에서 스승은 도도한 일상의 흐름을 함께하면서도 자신이 스스로 진여(眞如)의 경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수행자여야 한다. 물론 우리 시대 모든 교사들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구현하고자 하는 공부의 열정을 거두어버린 사람을 더 이상 스승으로서의 교사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기능인일 뿐이고, 그런 사람들은 마땅히 학원 강사들과의 경쟁에서 탈락하면 퇴출시켜야 한다.

생멸(生滅)과 진여(眞如)의 두 차원에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 운명과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교육은 그 두 차원 각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이 두 차원을 걸림 없이 넘나드는 깨침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하루의 일상을 숭고함으로 살아낼 수 있으면서도 그 일상에 숨겨진 진여의 차원을 직시하면서 삶의 의미를 동시에 찾아갈 수 있는 인간을 길러 내는 것이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이다. 이때의 교육은 물론 주로 도덕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으로 상정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 일반의 정의(定義)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의 교육이 근원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진여의 차원을 인위적으로 배척하면서 배타적인 생존능력을 길러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일 뿐이다.

 

1941년 선학원 유교법회에 참석한 고승들. 앉은 이들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석전.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이러한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하나의 묘책은 없지만, 그 시작은 당연히 교육을 이끌어가는 주체인 교사의 인식과 실천일 수밖에 없다. 그가 단순히 비교적 괜찮은 봉급 수준과 여유로운 방학 등만을 이유로 그 자리를 지킬 경우, 석전의 통렬한 지적과 같이 자신만을 위하는 위아(爲我)와 게으르고 산만한 나산(懶散)의 병통에 빠져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만의 이기적인 성을 높이 쌓는 공고(貢高)와 단점을 감추기 위해 위세를 떠는 장졸(藏拙)의 병까지 지니게 된다면 자신의 이익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하는 소인배의 간린(慳吝)까지도 갖춘 최악의 인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물론 교사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존재자들과의 깊은 인연의 고리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책임을 온전히 교사들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이러한 연기적 맥락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우선 교사는 자신이 만나고 있는 학생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동시에 그 학생들의 부모인 학부모들의 다양한 관심과 압력 속에서 교육에 임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 학부모들이 곧 시민사회의 주체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들의 부당하고 과도한 관심과 압력 속에서 학생과 만나고 수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충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중 어느 주체에게도 교육에 관한 한 전문성과 책임성을 온전히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교육을 바로 세우는 주체는 용맹정진의 자세로 끊임없이 공부하여 기꺼이 남에게 주고자 하는 호문광익(好問廣益)과 희사원통(喜捨圓通)의 경지를 지향하는 허심박학(虛心博學)의 교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석전 교사론과 교육론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다.

2) 석전의 불교개혁론: 삼장(三藏)과 삼학(三學) 전통의 실천적 회복

석전의 불교 강사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 스스로 강사였다는 점에서 자신의 실존적 삶의 영역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그 지향점은 일제강점기의 한국불교 개혁에 닿아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당시의 한국불교가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는 암울했던 조선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일제 식민지 문화정책에 따라 이른바 왜색불교로 전락할 가능성도 함께 지니고 있었고, 석전은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극복하여 새로운 한국불교 전통을 확립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음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석전은 우선 1910년 일제 강점이 본격화되면서 최초의 근대 종단인 원종의 종정 이회광이 일본의 조동종과 합병하려고 하자 이에 맞서는 임제종을 탄생시키는 주역을 담당했다. 그때를 회고하는 석전의 음성을 들어보면 당시 상황과 석전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대 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지금 47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 감옥에 들어가 있는 한용운과 나와 두 사람이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반대 운동을 하는데 그때는 30본산이 없었소.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 전통이 훼손될 수 있는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만해와 함께 임제종을 창립하는 데 앞장서는 석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가 선(禪)의 전통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석전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불교 강사로서 경전을 제대로 가르치고자 하고 그것이 단순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루함을 고수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 일이다. 또한 이미 확인한 것처럼 승려는 현대학문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고 신학문에만 경도될 가능성이 있는 재가 지식인들은 불교 경전의 전통을 접하게 하는 균형 잡힌 교육관을 실천에 옮기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승려와 재가자 사이의 불필요한 벽을 허물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줌으로써 진정한 대승불교의 구현을 시도했다는 점 또한 현재 우리 불교의 사정을 미루어보아도 매우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우리는 경전공부를 중심에 둔 석전의 삼학관(三學觀)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스님께서 아직 춘추 60을 갓 넘기신 때였습니다. 그 당시 스님께서는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장으로 계시면서 한편 이 강원(講院)을 위하여 그대로 심혈을 기울이셨으니, 젊은 제자들의 입은 바 은총은 새삼 들을 것도 없이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매월 받으시는 많지 않은 수입은 그대로 강원에 내놓으시고 필묵을 구하시는 외에 문하생들의 학비에 충당하도록 내어주시는 것을 볼 때마다 담담하신 스님의 그 명경지수 같은 마음에 문하생은 몸에 젖으신 불법에서 풍겨오는 스님의 불성(佛性)을 받들게 되었으니 이 또한 크나큰 은총을 그때 맺었던 것인가 생각하나이다.

개운사 대원암 강원에서 석전에게 배운 신석정이 쓴 위의 머리말을 통해 우리는 그가 경전 공부를 중심에 두는 강원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재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원에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받는 수입을 그대로 내놓으면서 강의와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석전의 모습은 승려교육뿐만 아니라 사회를 이끌어나갈 주체들을 불교적 전통 속에서 길러 내고자 하는 그의 강한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영향력 속에서 조지훈이나 김동리, 신석정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들이 자라나 광복의 기틀이 되었다. 서정주의 경우도 석전의 깊은 관심을 받은 제자로 꼽히지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근기와 기회를 갖지 못해 친일과 군부정권에의 협력 같은 변절의 모습을 보인 점은 안타까운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굴곡이다.

이처럼 참선과 경전 공부를 동시에 중시한 석전은 삼학의 마지막 축이자 가장 근간을 이루는 계율(戒律) 또한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가르치고자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로 꼽히는 《계학약전(戒學約詮)》의 서문을 함께 보면서 석전의 계율관을 고찰해보자.

율은 법이다. 이는 능전(能詮)의 법에 맞춘 번역이다. 옛날에는 조복(調伏)이라고 번역했는데, 세 가지 업을 조절하고 단련하며 잘못된 것을 제어하고 굴복시킴을 말한 것이다. 조절하고 단련함을 그치고 짓는 것에 모두 통하는 것이고, 제어하고 굴복시킴은 오직 악을 그치게 하는 것만을 밝힌 것이다. 혹은 멸(滅)이라고 번역하는데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악이 수행자를 태워버리는 것이 흡사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과 같은데 계는 이를 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청량(淸凉)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는 활활 치솟는 악의 불꽃을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전이 1926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이미 일본불교의 대처육식(帶妻肉食)이라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율장의 정신을 다시 환기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근원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대안으로 나온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승려교육의 중심이었던 중앙불교전문학교에 계율학 강좌를 설치하고 그 강의에서 사용하는 교재를 직접 편찬함으로써 율장의 정신을 근원적으로 다시 세우고자 했다는 점에서 계정혜(戒定慧) 삼학 모두를 균형 있게 강조하는 개혁을 추구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삼장 중에 경은 정(定)을 주로 설명하고 율은 계(戒)를, 논은 혜(慧)를 주로 설명한다. ……(중략)…… 그런데 능전의 경율론(經律論) 삼장과 소전의 계정혜 삼학이 차례가 같지 않은 것은 삼장은 본과 말, 범위의 넓고 좁음을 기준으로 차례를 정했고, 삼학은 수습의 어렵고 쉬움으로써 차례를 정했으니 계학(戒學)은 닦기 쉽고 정학(定學)은 조금 어렵고 혜학(慧學)은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4. 석전 불교개혁론의 현재적 의미 : 결론을 대신하여

석전의 시대는 성리학 중심의 조선이 붕괴하고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혼란과 격동의 시대였다. 그 중심에 서서 현실을 객관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인식하면서 그가 삶의 중심에 두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함께 확인한 것처럼 교육이었다. 석전은 당시를 불교의 노후 시대였던 조선과 비교하여 ‘불교의 부활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참다운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시대의 변천과 문화사조의 세례를 충분히 감안해야 하고’ 불교가 남긴 아름답지 못한 유산은 말끔하게 씻어 내리고 미래불교의 새로운 씨앗을 가꿀 청년 세대의 사명이 실로 막중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삼아 교육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의 중심축으로 삼고자 했다.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승려교육은 물론 대원암 강원에서 재가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석전은 당대를 대표하는 이 땅의 교사이자 강백이었다고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의 불교개혁론은 삼장과 삼학이라는 경전과 공부, 수행의 세 축을 오롯하게 되살리는 것을 중심지향으로 삼았고, 그 실천 또한 교육의 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교사로서의 본보기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그와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은 동료나 제자를 막론하고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불법의 향기에 취할 수 있었고 그런 존경심이 혼란스런 일제강점기 상황 속에서도 삼학의 전통을 새롭게 하는 힘으로 표출되었다.

외형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확보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된 현재의 우리 상황 속에서 한국불교는 그 풍요의 보이지 않는 마력에 취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세계사상사에서 새롭게 주목하는 불교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통과 서구, 또는 자본주의와의 접점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철학적 세계관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는 종교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다. 그러면서 외제 차를 타거나 돈 선거를 통해서라도 사판승의 자리를 획득해야만 행세하는 무기력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양상에 대해 석전은 아마도 두 가지 금침을 내놓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승려교육을 삼장과 삼학의 정신으로 개편하는 교육개혁의 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승가와 재가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사부대중 공동체의 회복이다.

승가 공동체만의 노력으로 한국불교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사부대중 공동체 안에 있을 때에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연기성을 망각한 착각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교개혁의 첫 단추는 승가교육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승가교육을 위해서는 먼저 불교 강사를 비롯한 스승들이 자각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석전의 불교 강사론이 훌륭한 지침으로 수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청년 불자를 비롯한 재가자들이나 불교와 큰 관련이 없는 지식인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교육의 장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전형을 석전의 대원암 강원 운영과 결과를 통해 충분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석전의 불교개혁론은 그 스스로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 스스로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는 것이 오늘에 남겨진 절박한 과제이다.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 수료. 전주교대 교수 역임. 저서로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다. 현재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전문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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