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鏡虛, 1849~1912)]

1. 글을 시작하며

 

경허(鏡虛, 1849~1912)
경허 선사는 근현대 한국불교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오늘날 조계종을 탄생시킨 실질적인 씨앗이었다. 선사의 선풍 진작으로 인해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그 제자들은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였으며 조계종 탄생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마치 조선 후기에 스님들 대부분이 앞다투어 청허휴정 스님의 제자를 자처했던 것처럼 지금도 경허 선사의 법맥을 잇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이 되고 있다. 그만큼 선사의 감화가 진한 향기로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선사의 기행(奇行)을 소재로 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그 유명한 〈참선곡〉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려 출가를 결심하게 하기도 하였다. 사실 필자도 20대 초반에 우연히 선사의 〈참선곡〉을 접하고 방 한쪽 구석에 붙여두고서 틈틈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때면 가슴을 저미어 오는 애절함으로 잠 못 이루던 밤이 며칠이었던가.

 

지금까지 경허 선사에 대한 연구는 근대기를 살았던 어떤 스님보다 많이 축적되었다. 학술대회가 열려 선사에 대해 집중 탐구가 이루어지기도 했고, 박사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야기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선사의 선사상과 불교사적 위상에 관한 문제이다. 선사상과 관련해서 혹자는 선교일치(禪敎一致: 선과 교학은 일치한다), 혹자는 사교입선(捨敎入禪: 교학을 버리고 선을 닦는다), 혹자는 선정쌍수(禪淨雙修: 선과 정토를 함께 수행한다)를 주장했다. 선사가 간화선으로 깨달음을 얻고 후학들을 지도하여 간화선을 부흥시켰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는 없지만, 교학이나 정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이능화가 1918년에 간행한 《조선불교통사》에서 경허의 선을 ‘마설(魔說)’이라고 평가한 이래, 대부분의 연구자가 이를 비판하며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한국의 달마” “한국 근대 선의 첫 새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선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질곡의 근대 시기에 불어 닥친 외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한국불교의 중심을 잡아 주었고 그로 인해 한국불교 전통을 지금까지 계승할 수 있도록 한 버팀목이었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오늘 여기서 새롭게 이야기해 보려는 내용은 경허 선사의 불교사적 위상과 관련한 부분이다. 그 가운데서도 선사가 주도했던 결사와 관련하여 ‘왜 수선결사를 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해 보려 한다. 불교에서 ‘결사(結社)’라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개혁운동이라는 용어와 맞닿아 있다. 그 시대의 부정적 현실을 개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선구적인 시대정신의 발로에서 주장한 것이 개혁이고 결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는 당시의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선사의 개혁운동에 함의되어 있는 시대정신을 탐구해 보자.


2. 경허 선사의 생애와 수선결사

1) 선사의 생애

경허 선사의 속명은 송동욱(宋東旭)이고,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 씨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사가 탄생한 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고 있다. 1931년에 방한암 스님이 쓴 행장에서는 1857년(철종 8) 4월 24일에 태어났다고 하였고, 1943년에 만해 스님이 간행한 《경허집》의 약보(略譜)에서는 1849년(헌종 15) 8월 24일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 김지견 박사는 경허 선사가 찬술한 〈서암화상행장〉의 글을 토대로 1846년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스님이고 그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태어난 해에 대한 기록이 엇갈리는 것은 생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수행자의 면모 때문이었으리라. 이 글에서는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1849년설을 따르기로 한다.

경허 선사는 아홉 살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사에서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경허 선사가 15세가 되었을 무렵에, 계허 스님이 환속하면서 동학사의 만화(萬花) 화상에게 소개해 주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전을 배웠다. 선사는 타고난 영특함으로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외우고 이해하였으며, 마침내 23살의 젊은 나이에 동학사의 강사가 되었다. 사방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많은 학인들이 몰려올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을 향해 길을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급히 근처의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염병이 돌고 있던 탓에 가는 곳마다 쫓겨났다. 그 후 동학사로 돌아온 경허 선사는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겠다”며, 강사의 직분을 벗어 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참선에 들어갔다. 하루는 시중드는 사미의 스승이 사미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여 경허 선사에게 그 뜻을 물었는데, 그 순간 선사는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때는 1879년(고종 16)으로 스님의 속세 나이가 31살이었다. 이후 선사는 서산의 연암산 천장암으로 거처를 옮겨 오도송을 읊었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줄 단박에 깨달았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에 연암산 내려오는데

六月燕巖山下路

들 사람들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더라.

野人無事太平歌

경허 선사는 그 후 1899년에 가야산 해인사로 옮기기까지 20여 년간을 서산의 개심사, 부석사, 천장사 등지를 왕래하며 지냈다. 이 당시의 행적에 대해 한암 스님은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장암에 계실 때, 한 벌의 누더기 옷으로 춥거나 더워도 갈아입지 않았고, 모기가 물고 이가 옷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물어뜯어 피부가 헐어도 산처럼 앉아 고요히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는 뱀이 몸을 기어 올라오더니 어깨 위에 서려 있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놀라서 소리쳤지만 태연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뱀이 스스로 다른 곳으로 갔다. ……어느 날 아침에 게송 한 구절을 읊기를,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봄의 성에는 꽃피지 않은 곳이 없도다. 누군가 만일 성우(惺牛)의 일을 묻거든, 돌계집 마음속 겁외(劫外)의 노래로다.(世與靑山何者是 春城無處不開花 傍人若問惺牛事 石女心中劫外歌)”라 하고, 드디어 주장자를 꺾어 문밖으로 던져 버리고 훌훌 털고 산을 나서서 방편에 따라 교화하였다.

아마도 경허 선사는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이룬 이후 다시 천장암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대오(大悟)를 이루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행장에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속인들과 섞여 지내기도 하고 한가로이 정자에 누워 풍월을 읊조리며 지냈다고만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구자는 동학사에서 천장암으로 옮긴 후 20여 년간의 행적에 대해서 은둔의 세월이었다고 서술하거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실망하며 울분의 세월을 보냈으리라고 보기도 한다.

깨달음을 이룬 이후 충남 서산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경허 선사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준 것은 1899년 해인사의 초청이었다. 51세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선사는 이로부터 1904년까지 5년간 본격적인 후진 양성과 교화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다시 1904년에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웅이방에서 입적할 때까지 선사의 행적은 불확실하다. 만년에는 환속하여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함경도 지역을 떠돌며 시골 서당 훈장 노릇도 하고 시장 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였다고도 한다. 사법제자(嗣法弟子)인 혜월 스님과 만공 스님은 경허 선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함경도로 가서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하고 그 동네 노인으로부터 임종게를 받아왔다.

마음 달 외로이 둥그나니

心月孤圓

달빛 만상을 머금도다.

光呑萬像

빛과 경계 모두 잊으니

光境俱亡

다시 무슨 물건인가.

復是何物

 

선사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살다가 64세로 파란만장한 인간세상의 삶을 마감하였다. 수선결사를 통한 본격적인 교화의 시기는 5년에 불과하지만 선사의 선풍은 영남과 호남 지역 사찰에 크게 진작되어 근대 한국불교 선풍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2) 수선결사 운동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는 1899년에 가야산 해인사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수선사(修禪社)를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때 보조지눌이 1200년에 송광사에서 수선결사를 결성하였고, 조선 후기에 백파긍선이 1822년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수선결사를 맺은 후 또 하나의 수선결사가 경허 선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선사와 관련된 것으로 《경허집》에 보이는 것은 수선결사는 해인사, 화엄사, 범어사의 수선결사이다.
먼저 1899년 11월에 찬술한 해인사 수선결사문인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에서 선사는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일이 어지러워 몸조차 감출 겨를 없이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고, 부처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해 해인사로 갔다가 여러 스님들과 뜻이 맞아 결사를 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동맹의 약속은 무엇인가. 함께 정혜를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고, 세세생생 도반이 되어 필경에는 함께 정각을 이루며, 만약 도력이 먼저 성취되는 이가 있으면 따라오지 못한 이를 이끌어 주기로 서약하고 이러한 맹세를 어기지 말자는 것이다. 만일 견해가 같고 행동을 같이 하려는 이가 있으면 승속과 남녀노소, 똑똑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함을 묻지 말고, 또한 친하거나 친하지 않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선배거나 후배거나를 묻지 않고 모두 동참하는 것을 허락한다. ……정토와 도솔천은 그 수행하는 사람이 잠시 서원하는 바에 따라서 다름이 있으나 어찌 도솔천에 상생하려는 이가 미타여래를 친견하기를 원치 않겠으며 미타정토에 왕생하려는 이가 미륵존불을 받들어 섬기길 원하지 않겠는가.

우선 해인사 결사문의 제목을 풀이해 보면, ‘함께 정혜를 닦고 함께 도솔천에 나서 함께 성불하는 계사를 결성하는 글[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이다. 여기서 계사(稧社)란 계(契)와 같은 의미로서 ‘뜻을 같이하는 모임’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함께 선(禪)을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서 미륵부처님께 의지하여 성불하자고 하는 염원을 담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경허 선사는 오로지 선(禪)만을 닦자고 하지 않았다. 수선(修禪)만으로 모든 수행이 끝난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토에 태어나기보다 도솔천에 나기가 쉽기 때문에 도솔천에 태어나자고 한 것이지 왕생극락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였다. 또 “잡념 속에서 염불하지 말라”고 하여 염불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롯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선(禪)을 중심에 놓되 다른 불교 신앙도 수용하면서 수선(修禪)할 것을 당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규례를 만들어 엄격하게 수행의 풍토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1900년 12월에 쓴 〈화엄사상원암부설선실정완규문(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에서는 화엄사 상원암에 있던 선실(禪室)이 화주하는 사람이 없어 중간에 폐지되었지만 산중의 대덕들이 모여 다시 선실을 재건하기로 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훗날 암자의 주지가 부처님 교화의 엄중함과 옛사람이 절을 처음 창건한 본래 뜻과 지금 장로가 다시 선회(禪會)를 시설한 간절한 뜻을 생각하지 않고, 혹은 사욕에 따르며 혹은 그의 편의에 따라 선실(禪室)을 폐지하거나 선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은 부처종자를 끊는 사람이며 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으로 인과가 분명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선하는 사람이 비록 졸음과 망상에 빠져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삼승 학인이 훌륭하게 도업을 성취한 것보다 수승한 것이다.

경허 선사는 당시 주지가 누구냐에 따라 선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실을 폐지하는 시속(時俗)이 있음을 비판하고 교학보다는 수선(修禪)의 공덕이 더 크다고 하였다. 실제로 선사의 수선결사 운동이 있기 전까지 조선불교계는 교학 중심의 불교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17세기부터 정착한 선, 교학, 염불의 삼문수학(三門修學)이 대부분 지역에서 일반화되었고 점차 선 수행보다는 교학승들이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염불신앙을 통해 신도들을 포교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1903년 3월에 쓴 〈동래군금정산범어사계염암창설선사기(東萊郡金井山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혼해장노가 성월선백에게 청하여 계명암 주지를 하라고 하였고, 성월선백은 대중과 의논하여 선원을 설치하고 각 방과 암자에서 논 38마지기를 거두어 선원에 부쳤다. ……헌납받은 논을 합하여 82마지기가 되었다. 이것은 단연코 선원 대중을 공양하는 데만 쓰고 다른 곳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경허 선사는 수선결사에 필요한 재원을 다른 곳에 쓰지 않도록 함으로써 안정적인 결사를 당부하였다. 수선하는 스님들이 선방에 들어와서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정진할 수 있도록 하여 전국의 납자들이 모여 선 수행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시 논 1마지기가 대략 150~300평이므로 82마지기면 12,300~24,600평이다. 그러므로 거의 2만 평에 이르는 논을 선원을 위해서만 부쳤다면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수선 납자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는 당시 불교 전체로 보면 미미한 개혁운동이었을지 몰라도 이것이 불씨가 되어 훗날 전국적인 선풍 진작으로 이어졌던 것을 상기한다면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러면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가 함의하고 있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선사의 수선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그러한 개혁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시대적 이해가 필요하다.


3. 수선결사의 개혁적 성격과 계승

1) 수선결사의 개혁성과 시대적 함의

경허의 수선결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경허 선사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은 국가적으로는 풍전등화와 같은 암울한 상황이었고, 불교계는 교학이 중심이 되어 선 수행은 일부 승려의 수행법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17~18세기에는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혹은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법맥을 자처하던 대부분의 선사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교학의 권위자인 강사로서 평가받는 것을 더 기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이능화는 1918년에 간행한 《조선불교통사》에서 당시 한국불교계의 상황에 대해, ‘30본산의 주지와 기타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스님들의 종지를 조사하여 보니 경교(經敎)가 가장 많아서 염불이나 송경(誦經) 송주(誦呪)를 일삼고 있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하였다. 이어서 본산의 주지를 비롯한 중요한 승려 84인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나열하였는데 교종 68인, 선종 16인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제방의 선교의 승려 수를 비교하여 보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 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에 속한다. 만약 조선의 승려 7천인을 들어서 말하면 10명 가운데 8, 9인은 모두 교종에 속하는데, 실제로는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사람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능화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불교에 대해 깊이 이해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불교계의 현실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인 평가였는지도 모른다. 또 그가 조사한 시점이 1910년대이므로 경허 선사가 살았던 시대와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20~30년 만에 불교계가 크게 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의 평가가 전부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당시 대체적인 불교계의 상황이 교학 중심이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경허 선사가 수선결사를 주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새로운 선풍 진작을 위한 하나의 작은 개혁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경허 선사가 수선결사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개혁운동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8세기 불교계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불교계는 19세기와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19세기 후반의 불교가 교학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18세기까지는 선 중심의 불교였다는 점이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불교계는 선, 교학, 염불의 삼문수학(三門修學)이 정착되어 승려들은 선을 중심으로 교학과 염불을 수학하였던 것이다.

삼문수학은 청허휴정 스님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고, 그의 제자 편양언기 스님이 그 내용을 구체화시켰다. 언기 스님은 선의 경절문과 화엄교학의 원돈문과 정토의 염불문 공부를 언급하여 삼문수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경절문 공부는 조사의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고, 원돈문 공부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이며, 염불문 공부는 서방을 향해 자성미타를 염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문수학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전기의 선교양종이 선종으로 단일화된 상황에서 선종의 경절문이 교학과 염불을 포용한 삼문수학이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화엄교학이 전국 강원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선 중심의 삼문수학에서 벗어나 삼문은 점차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681년 6월의 태풍으로 전라도 임자도에 표류해온 중국 상선에 실려 있던 가흥대장경의 《화엄소초》를 간행하면서 촉발된 것이다. 이로부터 전국의 강원은 화엄을 공부하였고 유명한 선사들은 모두 화엄의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쳤다. 때로는 수천 명이 모인 화엄대법회를 열기도 하여 자연히 원돈문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원돈문은 더 이상 경절문의 부속적인 지위가 아니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또한 18세기에는 화엄학의 유행과 더불어 염불 수행도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 전기 이래로 선사들은 서방정토를 부정하지 않았으므로 염불은 그 목적이나 방법에 상관없이 권장되었다. 유심정토가 되었든 서방정토가 되었든 염불은 사부대중의 가장 유용한 수행법이었다. 염불과 관련한 서적들이 대거 간행되고 염불결사가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는데, 특히 19세기에는 건봉사를 중심으로 만일염불회가 크게 유행함으로써 염불문 역시 경절문이나 원돈문과 동등한 수행법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19세기 불교계는 선 중심의 17~18세기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삼문이 동등하게 인식되거나 오히려 교학이 더 우위에 놓이는 상황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경허 선사도 처음에는 만화 화상에게서 교학을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경허 선사는 교학의 최고 직위라고 할 수 있는 강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문을 풀지 못하여, 마침내 교학을 벗어던지고 선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어느 날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선사의 경험은 선사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역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19세기 이래 선사의 위상이 하락하고 교학의 강백이 우대받는 상황에서 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니 현실의 시대성을 거슬러 18세기를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허 선사는 만화 강백을 수업사(受業師)로 삼았지만 법통의 사법스승으로는 용암혜언(龍巖慧彦, 1783~1841) 스님을 들었다. 이는 선의 법통이 용암 스님에게서 끊어졌으므로 자신이 그 법통을 이어 새롭게 부흥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엄사 상원암의 수선결사에서 경허 선사는 “참선하는 사람이 비록 졸음과 망상에 빠져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삼승 학인이 훌륭하게 도업을 성취한 이보다 수승하다.”라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즉 경허 선사는 수선결사를 통해 선 수행 중심의 불교개혁을 추동하려 하였다고 생각된다.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는 불교계에만 한정되는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서양 세력과 일제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수백 년간 지켜오던 전통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갔고, 서울의 위정자들은 전통의 고수와 개혁 사이에 갈등하며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립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여러 나라들도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인 혼란, 신분의 혼란, 경제적인 혼란 등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농민들은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에 불교계는 고달픈 민중에게 아무런 등불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양반들에게 승려들은 천민이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보였고, 백성들도 존경할 만한 승려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이 증가하면서 일본불교가 서서히 침투해 오더니, 급기야 1895년에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인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에게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건의하여 고종 임금의 승낙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당시는 갑오개혁으로 우리나라를 근대사회로 변혁해 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노 젠레이의 건의가 아니더라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될 시점이었다. 그런데 일본인에 의해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됨으로써 조선의 승려들은 일본불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만큼 조선의 승려들 대부분은 세상의 변화에 무지했으며 일본의 야욕을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승려들이 세상의 변화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허 선사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불교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직시하며 우리나라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고, 그것이 바로 수선결사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우리 민족의 불교 전통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2) 수선결사의 계승으로서 선학원 운동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에서 거론한 16인의 선종 승려 가운데 9인이 경허 선사의 사법제자이거나 그 영향을 받았던 승려였다. 당시의 고승 84인 가운데 68인이 교종 승려이고 16인이 선종 승려라고 하였는데, 그 16인 중의 9인이 경허 선사의 제자라면 당시 경허 선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고승으로 인정받고 있던 선종 승려 가운데 경허 선사의 제자가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인공은 경허 선사의 사법제자인 신혜월(申慧月), 송만공(宋滿空), 방한암(方漢巖), 전수월(田水月)을 비롯하여 김제산(金霽山), 김남전(金南泉),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강도봉(康道峯)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1921년에 있었던 선학원 운동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국가가 식민지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불교계는 1906년에 ‘불교연구회’를 창립하고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적 교육을 통해 불교를 쇄신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908년 전국의 승려 대표자 52명이 서울 원흥사에 모여 ‘원종(圓宗)’을 창립하고 이회광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실로 조선 전기에 종단이 폐지된 이후 처음으로 불교계 자력으로 세운 종파였다. 그런데 이회광은 일본의 힘을 빌려 불교를 부흥시키려는 의도로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박한영, 한용운 스님 등은 국가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불교마저 일본에 넘기려 한다며 강력히 규탄하고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선풍을 지키고자 하였다. 경허 선사에 의해 부흥된 간화선풍에 기반하여 조선시대 이래 전통적인 종파라고 할 수 있는 임제종을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민족의 전통적인 불교가 일본 불교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면서 한국불교를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으로 종명을 정하여 운영하였다. 이에 따라 총독부의 명령에 의해 원종과 임제종이 폐지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불교 선교양종에 30본사를 정하여 통제하였는데 본사의 주지들은 대부분 일제의 불교정책을 수용하여 ‘본사주지회의’를 최고의 의결 기구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불교 정책에 대해 한용운, 백용성, 송만공 등은 한국 전통불교를 계승하기 위해 1921년에 ‘선학원(禪學院)’을 창립하였다. 선 수행을 민족의 불교 전통을 지켜내고 아울러 선풍을 진작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 선학원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승려들은 경허 선사의 제자이거나 손제자들로 신혜월, 송만공, 방한암, 김남전, 백용성, 오성월, 강도봉, 김석두(金石頭), 황용음(黃龍吟), 김적음(金寂音) 등이었다. 이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이 늘어나고 육식이 일반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청정승가를 지켜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경허의 제자들이 1921년에 설립한 선학원 중앙선원.
선학원은 재정 문제와 30본사 주지들의 비협조로 인해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짐에 따라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실질적인 활동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선학원이 활동을 재개한 것은 만공의 법제자인 김적음이 1931년 1월 범어사 포교당으로 사용되던 곳을 선학원의 근거지로 마련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34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개편하여 여러 차례 수좌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 전통불교를 수호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선학원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1941년에는 통합종단이라는 미명 아래 조계종을 창립하여 종정에 방한암, 종무고문에 송만암과 송만공 등 선학원 인물들을 참여시켜 민족불교 세력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학원은 1942년에 경허 선사의 문집을 간행하며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경허성우 선사는 우리 조선불교계에 대하여 선종 부흥과 현풍선양에 막대한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종취의 깊고 현묘한 것과 문채의 명려한 것은 세상에서 다 아는 바라 쓸데없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다. ……현재 조선 수좌로서 선사의 가르침에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경허 선사가 해인사에서 수선결사를 시작한 이래 40여 년 만에 전국의 수좌들이 대부분 스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까지 선 수행자가 교학승의 숫자를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선 수행자가 경허 선사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았다고 본다면 선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직제자들의 선풍이 전국을 풍미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경허 선사가 주도했던 수선결사의 개혁운동이 선학원 운동에서 결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글을 맺으며

이상으로 경허 선사가 남부지역을 유력하며 수선결사 운동을 일으켰던 이유와 그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허 선사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국가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불교계는 선 수행보다 교학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전국의 고승들 가운데 8, 9할은 교학승들이었다. 17세기 이래 선을 중심으로 교학과 염불을 수행하는 삼문수학이 전통이 되었는데, 18세기부터 교학과 염불이 중시되어 삼문이 동등한 비중으로 중요시되면서 선 중심의 분위기에서 일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에 접어들어 점차 선의 중요성이 교학보다 낮아지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선 수행을 하는 납자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경허 선사도 처음에는 교학을 배웠으나 교학만으로는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음을 느끼고 선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던 어느 날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더욱 수행하여 대오(大悟) 하였다. 그러나 국가적인 혼란으로 인한 시대적 상황에 실망하여 20여 년간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경허 선사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던 것은 1899년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겨 수선결사를 주도하면서부터였다. 이로부터 남부지방 여러 사찰을 유력하며 5년간 수선결사를 통해 간화선풍을 진작하였는데, 이는 당시 교학 중심이었던 불교계를 선 수행 중심으로 변화시키려는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허 선사의 개혁운동은 5년에 불과했지만 그 씨앗이 자라서 일제강점기에 선학원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21년부터 시작된 선학원 운동은 대부분의 본산 주지들이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여 왜색불교화되어 가던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간화선 수행을 강조하여 한국불교 전통을 수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를 통한 개혁운동은 한국불교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지금까지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는 한국불교 전통에 관한 것이다. 본고에서 언급한 한국불교 전통이란 조선 후기 불교를 말한다. 왜냐하면 고려시대까지의 불교 전통은 조선 전기의 억불정책을 통해 변형되었고 17~18세기에 간화선 중심의 삼문수학이 불교 전통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경허 선사가 교학을 비판하며 되찾으려고 했던 전통이 바로 17~18세기에 성립된 간화선 중심의 삼문수학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해인사 수선결사문에서 살펴보았듯이, 경허 선사는 염불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음 이후 교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지만 만공 스님이나 한암 스님 등 그 제자들의 박식함에 비추어 본다면 교학도 배척하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경허 선사가 진작했던 선풍은 간화선이었지만 그 전통은 17~18세기의 삼문수학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연 오늘날 조계종이 경허 선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조계종 승려로서 교학을 배척하는 선사가 있다면 경허 선사와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 경허 선사를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자’라고 평가하고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자라는 평가는 그의 제자들이 조계종 성립의 주역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나온 평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가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조계종이 경허 선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두었을 때, 필자가 경허 선사의 정신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경허 선사의 제자를 자처하는 선사가 만약 교학을 배척한다면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종수 / 동국대 불교대학원 HK연구교수. 동국대 사학과, 동 대학원 불교학과(석사), 사학과(박사) 졸업.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이 있으며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체계 연구−삼문수학을 중심으로〉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조선 후기 불교 이력과목의 선정과 그 의미〉 등 논문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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