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현대 한국불교 개혁의 배경

개혁론을 논하기에 앞서서 한국불교라는 단어가 지니는 함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한국불교계는 다수의 종파가 난립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자칫 특정 종파 중심의 한국불교를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국이란 공간에서 전개된 불교 전체를 한국불교로 그 개념을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이 시간적으로 본다면 개항 이후 전개되는 다양한 개혁론과 개혁운동가들의 사상을 무리 없이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이나 유신이란 단어를 통해 한국불교의 변화와 갱생을 주장한 논문이나 운동가들도 있었다. 해방 이후 많은 종파들이 발생했지만 그 중심에는 조계종이 있었으며, 발표된 개혁론 역시 마찬가지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해방 이후 전개된 개혁 담론은 조계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개혁적인 종파운동이 있었다는 점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한국불교계에는 수많은 개혁론이 등장했다. 해방 이전에는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1912~1913)을 필두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1922), 백용성의 역경과 대각교운동(1921), 박한영의 〈조선불교현대화론〉 박중빈의 《조선불교혁신론》(1935) 등이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황성기의 〈한국불교재건론〉 이기영의 《다시 쓰는 한국불교유신론》 불교사회문화연구원 편의 《한국불교의 현실과 전망》 등이 있었다. 기타 많은 불교인들이 불교계의 개혁과 변화를 도모하는 단편적인 글을 발표하거나 참여운동을 전개했으며, 그러한 움직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복잡한 사회현상, 혹은 문화적 속성을 단순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개혁론의 등장과 시대적 배경에 대해 다양한 분석들이 있었다. 개혁론을 언급하기에 앞서 개항 이후 일제하의 한국불교가 어떠한 상황의 종교였는가를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즉 한국불교의 현황에 대해 “조선의 불교는 민중과 영욕을 같이하면서도 신도의 조직화나 적극적인 포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조선사회에서 현실의 고난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제도종교로서 기능해 왔다. 불교에는 안심입명의 기능과 세련된 형이상학적 교리와 실천규범도 있으나 그것은 종교 엘리트들의 것이었다. 서민들에게는 주로 소원성취를 비는 종교로서 기능해 왔다.

이처럼 이원적인 성향을 가진 불교는 개항 때까지 불교선각자와 광범위한 하층민의 지지기반이 있었으나 전통에 대한 타성과 신도 구성원이 대체로 현대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층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자기 변신의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상과 같은 현황 속에서 개혁론은 등장한다. 그리고 개혁론이 등장하게 되는 사회정치적 배경에 대한 학자들의 분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승유는 개항과 일제의 경제 침탈, 기독교의 유입과 서구 과학문명, 도성출입의 허용과 불교를 둘러싼 정치적 종교적 지형의 변화 등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순석은 외적 요인과 내적요인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침탈, 기독교의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영향력 증대, 억불정책의 해소 등 내부 환경의 변화 등에 주목한다. 서재영 역시 김순석과 마찬가지로 한국불교 개혁론의 역사적 배경을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으로 구분한다. 그렇지만 보다 상세하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즉 외부적인 요인으로 국제정세의 변화와 봉건체제의 붕괴, 승려의 도성출입 허용과 불교 위상의 변화를 들고 있으며, 내적 요인으로는 개항으로 인한 일본불교의 진출, 서양종교의 팽창과 위기의식의 고양, 불교계 지성의 자각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조명제와 김정희는 불교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과 1921년에 시작해 1930년대 유행병처럼 번졌던 사회주의 계열의 반종교운동을 불교개혁운동의 촉매제 중 하나로 지적한다. 특히 김정희는 전통과 근대의 만남 및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백용성의 불교개혁사상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분석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불교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과 시각에 대해서는 송현주의 분석이 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기독교는 불교에 대해 세 가지의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즉 불교를 우상숭배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 무신론으로 간주하는 것, 철학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시각의 불교 비판은 결과적으로 불교지식인들의 각성과 대응논리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불교의 대응논리는 서양의 학문적 방법론에 의해 개발된 종교학을 원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화론적 시각에서 종교의 현상은 다신교, 일신교, 무신교로 전개된다는 전제 아래 불교는 그 정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김경집은 개항과 그로 인한 불교에 대한 인식 변화, 그리고 불교사상에 입각한 개화파의 활동 등을 거론하는 것이 특징이다. 더하여 안병직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근대적 시민의식 속에서 한용운의 개혁사상이 배태되었음을 분석하고 있다.

이상에서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일면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분석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불교개혁론의 태동과 전개의 역사적 배경이 단순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단일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불교개혁의 배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다 종합적이고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불교개혁론의 발생 배경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17세기 이래 서구는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완성하며, 서구 중심적인 근대과학문화를 이룩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와 동양을 침탈해 자본주의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를 전파했다. 합리성과 실용성으로 무장한 서양은 19세기 이래 자본의 집중과 집약을 가속화하며, 그 결과 과잉자본 상태에 이르게 되자, 자국의 과잉자본을 국외로 수출하고 상품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19세기 말엽이면 대부분의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서구의 식민지배 아래 떨어지며, 동북아 역시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뒤늦게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에 편승하게 된 일본 역시 1876년 개항 이후 제국주의로 변모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었다. 부의 축적과 산업혁명은 과학기술을 촉진시켰으며, 전세기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기술적 진보가 진행되고 있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함께 성장한 기독교는 서구의 문화제국주의적 태도 속에 동양에 유입된다. 그들은 서구문화에서 정립된 ‘종교, 정교분리, 종교자유’ 등과 같은 개념을 앞세워 문화적 우월감을 구가하고자 했다. 반면 동북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에서 근대적 개념의 종교, 정교분리, 종교자유 등의 용어는 이질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이었다. 특히 유교적 관념에 익숙했으며, 이미 중국문화의 영향을 농후하게 받은 불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접근과 이해가 필요했다.

불교개혁론의 대두는 이상과 같은 문화적 차이와 충돌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 서구 중심의 문화가 한국사회, 특히 한국불교계에 던진 것은 폭탄을 맞은 것과 같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문화가 불교와 너무나 이질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그럼에도 거기에 적응하지 않으면 불교의 내일, 심하게 말하면 불교의 존립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불교개혁론 내지 불교유신론은 어떤 사람이 그 어떠한 내용을 주장했건 무관하게,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갈등과 융합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 갈등의 중심에 근대화와 전통문화, 혹은 한국불교문화라는 키워드가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한국사회 전체의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 불교의 역사와 정체성, 근대사회로의 전환, 시민의식의 수용과 적응, 중국문화에 중독된 전통 불교문화에서 탈피 등이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불교개혁론 내지 유신론의 배경에 대해 필자는 근대성의 수용과 그에 대한 한국불교의 응전이란 표현을 하고 싶다. 서구문명의 유입과 도전에 대한 한국불교의 대응 혹은 적응을 위한 주체적인 반응인 것이다. 물론 그 근대성은 서구에서 태동하여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여 지속적인 적응과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개혁론의 발생 배경은 그 성격이 복합적이다. 또한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존과 극복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한용운은 중국에서 들어온 《영환지략》이나 《음빙실문고》 등의 서책과 일본 방문을 통해 문화적 충격을 받으며, 이영재 역시 마찬가지다. 백용성은 3·1운동 이후 교도소에서 기독교인의 불교 비판과 사회주의의 종교무용론에 충격을 받고 각성한다. 그 결과는 반응과 응전인 것이다.

그렇지만 서구문화는 실용성과 대중성을 그 핵심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의 당면 과제는 대중의 요구와 무관할 수 없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과 소통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과거와 완전히 다른 종교지형과 사회 환경은 지속적으로 불교의 개혁과 유신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불교의 개혁과 유신은 해방 이후 최근까지도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개혁의 지향점

한국불교의 개혁론이나 유신론은 이구동성으로 불교의 다양한 변화를 주창했다. 전통의 방식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현대사회에 부응하는 불교가 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그 이유는 다양하며, 각각에 상응하는 대응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한국불교의 중흥 혹은 재건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불교의 현대화이며, 현대화란 단어 속에는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란 명제가 포괄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둘째는 불교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자존하는 한편으로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이다.

불교가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1966년에 발표한 시론에서 이기영은 “현대에 적응하는 불교, 현대인을 교화하고, 현대를 불화(佛化)할 수 있는 불교를 꾸미기 위해서 제일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이 현대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 말한다. 먼저 불교현대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불교교리에 대한 합리적 연구와 이해, 승려교육의 현대화, 현대 메커니즘에 대한 적응, 역경과 대중교양도서의 출판, 의식과 장엄의 개선, 현대사조와의 대화 등을 거론”하고 있다. 현대화가 맹목적인 서구화나 정체성의 상실이 되어선 곤란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승려교육, 현대사회의 적응, 역경과 교양서의 출간, 현대사조와의 대화 등은 불교라는 종교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항들이었다. 불교라는 종교를 알리고, 이해시키며, 대중의 이해와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라는 점에서 불교현대화의 방향을 큰 틀에서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개혁론 내지 유신론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과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가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개혁론자들의 주장은 상황의 변화와 시대의 요구를 교단이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선에서 과감하게 교단의 제도와 의식, 교리해석, 인재양성, 교육제도 등 필요한 사안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현대화와 함께 한국불교의 자존과 자주가 큰 틀에서의 목적이라면 기타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의 시행 방식에 대한 견해 역시 동일하지는 않다. 시기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선언적인 내용이 있는가 하면 매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에 권상로와 박한영이 해당된다면 후자에 한용운, 이영재, 박중빈, 손상규가 해당될 것이다. 물론 개혁론의 전개도 한일합방 이전, 식민지 시대, 해방 이후의 주장에 차이가 있었지만 현대화 내지 불교의 자주와 정체성 확립을 위한 방법론의 제시라는 점은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개별적인 개혁론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최초로 개혁론을 주장한 권상로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이다. 안으로 간경과 참선을 하고, 밖으로 포교를 하기 위해 인재 양성과 교육기관의 개량을 주장하며, 불타를 혁명가로 묘사한다. 다만 기독교 세력의 팽창과 포교 양상에 고무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지만 구체적인 개혁의 방향이나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박한영은 “삼국시대는 잉태의 시대요, 나여 중간은 장성 시대, 이씨 조선은 노후 시대, 그리고 오늘날은 부활의 시대”라 평가하며 당시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교단의 무기력과 사회현실에 대한 의식 부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불교의 중흥과 포교의 활성화에 의해 네 가지 필수조건을 구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청년도재를 양성하는 것, 강의교재를 알기 쉽게 하되 대승 교리에 입각할 것, 포교인의 정신자세와 행동강령 등이다. 그러나 인재와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단의 자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개혁의 방향은 보이지 않는다. 해방 이후 황성기, 이기영 등의 개혁론 내지 유신론은 이들보다 구체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계몽적이고 선언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또한 이들보다 앞서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한 불교연구회가 있었다. 홍월초와 이보담에 의해 주도된 이 단체는 명진학교를 설립하고, 전국의 사찰에 불교와 신학문을 연마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만해 한용운의 유신에 대한 견해는 한일합방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설명해야 타당하겠지만 《불교유신론》에 나타난 그의 불교개혁사상은 혁명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는 먼저 승려교육과 포교를 현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은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산중에 있는 사원을 도시로 옮겨야 한다고 제안하며, 번잡하고 불필요한 의식을 간소화하거나 불교의 정체성을 호도하는 부차적인 것들을 사원에서 제거하자고 주장한다. 1933년대, 《불교》에 기고한 〈불교유신회〉란 글에서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교리의 민중화와 제도의 민중화, 재산의 민중화가 우선적이라 역설한다. 1931년 《불교》 88호에 발표한 〈조선불교개혁안〉에서는 《조선불교유신론》의 기조를 계승하면서도 기존 불교의 현상은 역사적 퇴조라 비판하고 ‘산간에서 가두로’ ‘승려에서 대중에로’ 전환되는 것이 조선불교의 급선무라 주장한다.

만해의 유신사상을 계승했다고 인식되는 이영재는 일제의 사찰령을 철폐하고, 불교계의 제도 및 교단의 혁신을 도모했다. 그는 서구적인 민주주의를 교단의 종무행정에 도입하고자 했으며, 재가자의 교단 참여를 유도하는 등 불교가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렇지만 핵심은 포교와 교육에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단의 통일, 기구의 확장, 교육의 진흥, 사회사업의 장려, 역경 등 모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가 그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용운과 이영재가 주장한 불교유신사상과 방향을 함께하면서도 교단의 자립갱생과 불교의 대중화를 실천운동으로 전개한 개혁사상가들도 있다. 백용성은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뒤에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해 대각교운동을 전개한다. 그의 대각교운동은 불교의 구체적인 개혁과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대승기신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영향에 구애받지 않고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에 더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제시한다. 구경각이란 “이 대각(大覺)의 근본적 심성을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치게 하는 자각각타(自覺覺他)가 둘이 아니어서 원만하므로 구경각”이라 정의한다. 여기서 자각과 각타는 나의 깨달음과 다른 사람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점에서 깨달음과 중생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깨달음이 중생의 구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나의 깨달음이 중생의 깨달음으로 전이 내지는 융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중적이다. 따라서 수행과 중생의 불이(不二), 세간과 출세간의 불이, 중생과 부처의 불이를 몸소 실천하고자 한다. 그의 선농일치 운동은 불이사상의 표현이자 대중불교의 구체적인 실천운동이라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불자들의 생활을 구제하기 위해 포교사를 두어 포교하고, 생활의 실질을 도모하기 위해 공장이나 생산소비조합, 사원산림제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불이운동의 일환이자 불교대중화의 구체적인 실천이지만 불경의 한글화 작업에 매진하거나 불교의례를 대중화하기 위해 찬불가를 도입하는 등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다양한 운동을 전개했다. 시대에 상응하는 교무행정의 개혁에 대해 “세계 사조가 나날이 변하고 반종교운동이 시시각각 돌진하고 있다. 우리가 이때를 당하여 교정(敎政)을 급속도로 개신(改新)치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라 말한다. 그는 근대화와 산업화에 따라 불교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직시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또한 생활불교의 기치 속에 불교의 현대화를 모색한 운동가는 박중빈이다. 1935년 그는 《조선불교혁신론》이란 개혁안을 발표한다. 전문 7장으로 되어 있는 이 글의 핵심은 첫째 외국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 둘째 과거의 불교를 현재와 미래의 불교로, 셋째 소수인의 불교를 일반 대중의 불교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주의식, 즉 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전제 속에서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도모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근대적인 교육, 의식의 현대화 내지 간소화, 불상 대신 일원상의 안치, 간척지 개간을 통한 교단의 자립 등을 추진했다. 그런 점에서 불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불교운동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해방 이후 전개된 불교개혁론 내지 개혁운동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그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였던 황성기는 정화의 와중에서 한국불교의 장래를 우려하며 〈한국불교재건론〉을 발표했다. 그는 “불교인들이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관에 의지하거나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늙은 부녀자들의 귀의에 만족하고 있으며, 자기의 사명인 개인의 인격완성과 구국제민, 광도중생을 망각하고 있다”고 문제점을 제시했다. 따라서 대승보살사상의 본질을 밝히고 한국불교가 내포하고 있는 그릇된 인습과 변질을 타파하여 본래의 면목을 되찾자고 역설한다. 사찰보다 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승려보다 신앙을 본위로 하는 불교를 역설하면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불교의 현실화, 대중화, 생활화를 제시한다. 그가 말한 불교의 현실화는 현대인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불교, 종교적인 생활이나 제도가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불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현대화와 간소화, 합리화를 내포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의 계몽적, 개혁적 불교운동가는 진각종의 창시자인 손상규이다. 그는 1947년 5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본다면 해방 이후의 불교운동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손상규는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새로운 종교관의 도입’이 특징이며, 그것을 생활불교로 전환시켰다. 그는 종교를 통해 개인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인식했으며, 거기에 가장 적합한 종교는 불교라고 본다. 불교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손상규는 두 가지 점에 주목했다. 즉 불교적 수행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적 화합을 달성하는 것, 그리고 타인의 이익과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사업에 주목하며, 종단의 의식을 양력과 한글에 맞추었고, 전통적인 초하루, 보름 법회를 지양하고 일요일 법회를 활성화시켰다. 말 그대로 현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전통불교와 골격 자체가 다른 불교로 종단의 모습을 혁신하게 되었다.


3. 개혁운동의 전개 양상

개항 이후 전개된 한국불교의 개혁 방향에 대한 논의는 선언적인 주장에서 실천적인 운동으로 그 흐름이 변하게 된다. 방법상의 차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개혁과 현대화가 전개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근대적인 학교를 설립하거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했으며, 라디오 방송이나 신문, 출판 등 과거와 다른 매체를 활용해 다양한 방식의 포교를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에선 불교 유관 서적을 한글화하는 작업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전통강원의 교육제도를 보완해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인력양성에 노력하는가 하면, 종단 운영의 시스템을 서구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불교계의 혼란은 타율적인 지배의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자율과 자강을 위한 노력, 개혁을 위한 몸부림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병원 운영, 전국 조직의 대학생불교연합회와 청년회의 결성, 일요법회의 활성화, 단위 사찰의 학생회와 직장 법우회의 조직 등 직능별, 직장별 불교신도회도 탄생했다. 불교의 생활화를 보다 심도 있게 전개하기 위해 관혼상제를 불교식으로 안착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있었으며, 도심지 불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수많은 사찰이나 포교당이 도시에 건립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국불교는 개항 이후 다양한 형태로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그것은 일부였다. 전반적으로 보면 전통불교의 구습을 굳건하게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개혁의 속도는 비포장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와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가운데 진행된 개혁운동의 주체를 전체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네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첫째, 선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추구한 집단이다. 경허, 한용운, 백학명, 청담, 성철, 광덕, 숭산행원 등이다. 혁신적인 개혁론자인 한용운 역시 선교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선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보다 강력한 혁명 수준의 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출가자들과 차별화된다. 백학명은 선농일치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원불교 창시자인 박중빈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본다. 경허는 구한말 무너진 한국 선풍을 중흥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그의 사고는 염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론자라 평가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청담과 성철 역시 해방 이후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며 한국불교의 방향을 철저한 수행가풍에 의거한 현대화, 내지는 현대적인 연구방법론을 수용한 선교일치를 주장했다. 광덕은 도심지의 생활불교운동을 주창하며, 불광법회를 현대화했다. 숭산행원은 한국선의 세계화에 헌신했다. 선사상을 서구에 소개하여 그 우수성을 알렸다는 점에서 현대화를 넘어 세계화에 앞장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용운을 제외하고는 과연 개혁론자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그것은 개혁과 주어진 시대상황에 적응 내지 대응하는 것은 그 본질적인 개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선종을 한국불교사상의 중심에 두고 현대화를 논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수구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안국선원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그룹의 인물들은 출가자 중심이며, 한용운을 제외하면 철저한 비구승 중심의 출가집단이었다.

둘째, 대승보살사상의 기치 아래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수행문화를 일신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구제불교 운동만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개혁론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각교운동을 전개하고 불경을 번역했으며, 불교의례를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한 백용성이다. 그는 말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인물로서 출가자 집단과 신도들이 공존공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몸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타 해방 이후 불교개혁이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민중불교 혹은 대중불교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많은 불교운동가들이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념적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 속에 피어나는 불교의 모습을 간구했다는 점에서 개혁적이고 실천적이었다. 또한 대원 장경호 거사처럼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 그 토대를 제공한 인물도 있다. 최근 활동하는 인물들 중에는 정토회의 최석호, 대구 대관음사의 우학, 만불회의 학성 등도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운동가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 기존의 한국불교계가 종교적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전제하에서 전개되는 개혁운동이다. 즉 전통불교의 사상과 제도에 의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불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종파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출가자만의 종단이 아니라 재가자와 출가자가 함께 하는 불교개혁 운동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이영재나 백용성의 사상과 상통한다. 그러나 대다수 선종에 매몰된 출가자가 아니라 생활불교를 주창하는 재가자에 가까운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해방 이전을 대표하는 인물로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이 있으며, 해방 이후의 인물로 진각종을 창시한 손상규와 관음종을 창시한 태허 이홍선이 있다. 손상규와 박중빈은 앞서 간단하게 소개한 바가 있으므로 태허 이홍선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혼란과 갈등 속에서 불교의 활로를 모색하고 관음종을 창시했다. 창종(創宗)의 이유에 대해 “고식적인 전통불교의 탈피와 진취적이고 한국적인 새로운 불교 이념의 발아를 기원하는 본 대한불교 불입종(관음종)은 승려 중심의 종단이 아니라 승속 혼연일체가 되는 종도 대중의 종단으로서 불(佛)의 지견(知見)을 계발하고 실천 수행함으로써 극락천당을 찾기보다는 자아완성을 추구하는 데 더 큰 서원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의 성취는 복을 빌자는 마음에 앞서 복될 일을 하려는 자세와 개인적인 포교활동을 넘어선 유기적인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자오(自悟) 자각(自覺) 자증(自證)의 신앙불교를 구현하는 데 있는 것”이라 고백한다.

넷째, 불교개혁의 당위성 확립을 위해 이론을 개발한 학자 집단이다. 해방 이전의 권상로, 박한영과 해방 이후의 황성기, 이기영, 한상범, 박선영, 공종원, 임무근(승려) 등이다. 학자는 아니지만 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한국불교의 개혁, 특히 조계종의 개혁을 주창한 승려로 휴암, 목우 등이 있다. 이들은 승속을 떠나 개혁의 당위성을 위해 필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면서 한국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를 획책했다. 특히 해방 이후 학자들의 빈번한 해외교류, 정보의 확대, 불교학 연구의 심화 등은 불교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함께 그에 상응한 불교계 전체의 개혁을 촉구하는 이론을 제공했다.


4. 개혁운동의 성과와 과제

개항 이후 최근까지 지속된 한국불교 개혁의 목표는 한국불교 정체성의 유지와 현대화였으며, 현대화는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가 전통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전개되길 희망했다. 그렇지만 현시점에서 선구자들의 기대만큼 개혁이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는 전통과 현대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방향을 잃은 조각배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권상로의 개혁론이 등장한 지 백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한국불교계가 안고 있는 개혁의 대상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담론이 전개되고 있다. 고익진은 “불교 혁신은 오늘날도 한국불교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로 거론되고 있다. 명칭은 ‘불교현대화’로 바뀌어 있다.”고 본다. 그는 1982년 4월 조계종 총무원 주최의 ‘한국불교, 어제와 내일’이라는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거론된 한국불교의 당면 문제는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제기한 문제 중에서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라’는 문제를 제외하면 동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혁이 전혀 진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불교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익진의 지적처럼 1세기 이상 다양한 목소리로 한국불교의 개혁을 주장했는데 개혁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 당혹스럽기도 하다. 문화의 관성이 지독스럽다는 표현은 오히려 자기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불교의 개혁을 주장했던 수많은 불교사상가, 혹은 불교운동가들의 사회에 대한 진단이 잘못된 것이라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부정적으로 논하자면 불교의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이나 운동가들의 주장이 구두선(口頭禪)에 머물면서 지적유희를 자랑하는 데 그쳤거나 한국불교계가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고 있다고밖에는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통계자료에 의하면 외형적으로 한국불교는 과거에 비해 괄목할 만큼 성장하고, 현대화되었다는 점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2007년 기준으로 사회복지법인 555개소(해외 2개소 포함), 해외포교당 및 사찰 19개국 총 254개소, 유치원 및 어린이집 388곳, 방송 및 신문 135기관, 교양불교대학 361개소, 학술연구 기관 122개소, 수행 내지 수련 66개소, 일반 대학교 및 승가대학 14개, 종합 의료기관 12개소, 재가자의 신행 연합단체 335개소, 불교 관련 출판사 164개소 등이 운영되고 있다. 학술연구 기관이나 대학 및 대학원 시설, 사회복지시설은 1990년대 이후 급증했다. 외형적으로는 해방 이전이나 해방 직후 1980년대 후반까지의 통계자료와 비교해 눈부신 성장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불교가 생활화되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에 비해 현대화와 대중화는 상당히 진행되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부족함을 지니거나 전근대성을 불교에서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성과를 인식할 수 있음에도 허기 속에서 전근대성을 느끼는 것은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또 다른 한계가 아닐까? 근원적인 것은 한국불교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종교가 아니라 시대에 뒤처져 있으며, 여전히 대중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자기논리에 집착하는 종교집단으로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화의 핵심이 교육이란 점을 누누이 언급했지만 그 과정은 한학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인지 신념 있는 종교인을 양성하고자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승가는 여전히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며, 운영 역시 매우 전근대적이다. 개혁론은 한국불교의 전체적인 변화의 움직임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일부의 하소연, 내지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담론처럼 인식되었다. 시대에 역행은 아니라 하더라도 조류에 편승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재의 한국불교를 진단할 때, 여전히 교육의 전근대성과 전문가의 양성에 실패한 것을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이영재를 비롯해 수많은 전세기의 개혁운동가들이 행정의 효율을 위해 조직을 합리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음에도, 조계종을 비롯한 여타 종단의 행정조직은 합리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부수적인 사안이지만 포교와 신행이 여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도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2010년 조계종의 승려교육을 총괄하는 교육원 부장이었던 법인은 ‘여전히 중국불교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강원의 교과과정을 현대적으로 개정하고, 교재를 한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조계종의 교육목표는 출가자로서 분명한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한 교육, 사회와 소통하고 역사에 부합할 수 있는 교육, 전법과 봉사를 위한 풍부한 소양을 배양,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육성, 대안적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교육 등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1세기 전에 이미 개혁론자들이 주장한 내용이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여전히 현안으로 상존하고 있다. 개혁이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불교의 생활화는 아직 요원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라는 개혁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졸론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한용운이나 백용성 등이 일찍이 부르짖은 자주, 자강, 자립이 아직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불교는 임금의 세력과 대가의 보호에 의존하여 절을 이룩하고 신도를 증대시키므로 임금의 탄압을 받으면 산처럼 무너지고 기와처럼 깨져 물같이 흐르고 구름처럼 흩어져 형체도 그림자도 없다”는 지적이 여전히 현실적인 종단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둘째, 사찰재정의 투명성이 문제이다. 다종교 현실에서 불교계의 자본은 도제의 양성, 보살도의 실천, 사회와의 소통 등으로 활용되어야 함에도, 몇몇 책임자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쌈짓돈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자본이 건전하게 순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불교의 동맥경화증을 유발할 장애요인이 분명하다. 또한 전체적으로 자본주의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는 교단의 풍토 역시 사자충(獅子蟲)이 될 것이다.

셋째는 도제양성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조계종과 진각종, 원불교의 도제교육은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단에 비해 비교적 양호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여타 종단의 도제교육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한국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에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되어 있는 전통적인 18개 종단 이외에 수많은 종단이 난립하고 있지만 사상의 선명성 논쟁이 전개된 바가 없으며, 심지어 무속화된 종단이 많다는 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넷째, 현행 조계종의 법령은 현대적인 법체계를 모방했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 일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개정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특히 선거제로 인해 발생하는 폐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다섯째, 출가자나 재가자에게 불교적 신념 내지 이념을 확고하게 심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권상로나 박한영이 누차 지적했듯이 무위도식하고, 막행막식하며, 승단을 호구지책으로 생각하고 들어온 무리를 통제하고 관리할 교단의 자정 기능이 상실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조계종을 비판할 때 자정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표현을 하곤 하지만 여타 종단의 현실은 더욱 심각하다. 이러한 요인들은 결국 불교를 낙후된 종교의 전형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여섯째, 사회적으로 한국불교는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리는 너무 어려우며, 신행체계 역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조계종단을 예로 들자면 종단에 대한 종도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가정에서 신행생활을 하고자 할 때 할 수 있는 간편한 신행지침도 확립되어 있지 않다. 진각종 등 몇몇 종단을 제외하면 심각한 수준이라 말할 수 있다.

일곱째, 한국불교는 국민적 신뢰성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한국천주교가 해방 이후 최근 들어 교세가 급증하는 원인은 교단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다. 즉 천주교 사제들에 대해 국민들은 ‘그들은 정직하고 믿을 수 있다’는 통계조사도 있다. 신뢰성과 사랑을 주는 불교로 각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질이 부족한 출가자는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승려나 신도의 숫자에 연연할 때는 아니라고 본다.

여덟째, 기실 1,000여 만 신도 중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신도는 450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 보는 것이 종교학자들의 진단이다. 이미 단일교단으로는 천주교가 한국 최대의 교파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추측의 통계, 부풀리기 통계에 의존에 진면목을 숨기고 있으며, 숫자에 의지해 정치적 이권을 탐하고자 한다. 진각종과 원불교를 제외한 각 종단은 내부의 통계를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것이 가능할 때 한국불교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리라 생각한다.

아홉째, 여전히 산중불교가 아니면 제의불교, 내지 무속화된 불교는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이 시대에 불교가 필요한지 자각하고, 의식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농본사회를 배경으로 성장해 온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은 여전히 현대사회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각 종단은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특히 거대화, 집중화되고 있는 도시화의 특성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만 한다.

열 번째, 청소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도의 노령화를 한탄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청소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불교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 본다. 다른 종교의 장점을 불교적으로 벤치마킹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열한 번째, 생활 속에서 불교적인 신행 생활을 할 수 있는 가이드북이나 현대적인 기도문이 없다. 수많은 종단이 있지만 몇 종단을 제외하면 종단의 특색이 없으며, 의식집이나 의례의 순서, 법회 순서도 대동소이하다. 구복불교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구복 중심의 불교가 여전히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한다.

 

차차석 /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도의국사의 사상적 연원고찰〉 〈법화경의 본서사상연구〉 등과, 저서로 《중국의 불교문화》 《법화사상론》 《불교상식백과(공저)》 《선어삼백칙(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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