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산이 좋아 산에 오르며 산야초와 야생화를 관찰하고 연구한 지도 어언 35년이 되었다. 산에는 높낮이에 따라 수많은 산나물류와 약초, 야생화가 봄부터 가을까지 자라며 꽃이 피고 진다.

특히 야생화는 산의 표고에 따라 자생하는 종류가 다른데, 야산의 야생화는 화려하며 꽃향이 짙다. 반면 표고가 높을수록 꽃은 청순하게 아름다우며 꽃향이 거의 없거나 진하지 않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높은 산에는 벌과 나비가 별로 없으니 꽃의 향이 필요 없을 것이고, 오직 바람으로 수정이 되니 야생화의 키가 크지 않은 특징이 여기 있었다.

수많은 야생화 중에서도 나는 금낭화를 가장 좋아한다. 금낭화는 고산지대에서는 볼 수 없다. 마을 뒷동산이나 야산에서도 볼 수 없다. 산 중턱의 계곡 주변 습기가 많은 청정지역 돌서덜 지역에 주로 자생하는데 군락을 이룬다. 한 포기에 네댓 대궁씩 자라며 군락을 이룬 금낭화꽃밭은 가히 환상적이다  

애련하도록 아름다운 금낭화는 꽃처럼 애련한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며느리를 몹시 구박하는 시어미가 있었는데, 아들이 군사로 뽑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며느리가 애초부터 탐탁잖던 시어미는 이때부터 며느리가 먹는 밥이 아까워 허구한 날 누룽지와 먹다 남은 밥찌꺼기만 주었다. 밥에 포원이 진 며느리가 어느 날 부엌에서 식은 밥덩이를 집어먹다가 시어미에게 들켰다. 입에 밥덩이를 물고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며느리를 시어미가 부지깽이로 목덜미를 후려갈겼다.

찬밥덩이가 목에 걸린 며느리는 입술에 밥풀을 문 채 질식해 죽었는데, 시어미는 죽은 며느리도 미워서 돌서덜에 묻었다. 이듬해 며느리의 무덤가 돌 틈에서 이름 모를 풀이 돋아나더니, 밥풀을 입술에 문 모양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 꽃이 한꺼번에 피었다지는 것이 아니라 총상꽃차례로 먼저 핀 꽃은 지고 계속 피어나며 시어미로 하여금 며느리를 떠올리게 했다.
         
금낭화는 내게도 전설과 같은 추억이 있다. 1992년 이른 봄이었다. 20여 년간 경영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전업작가를 선언한 나는 포천군 관인면의 산골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들어앉았다. 산을 좋아하던 나는 이삿짐을 정리한 이튿날부터 마을 앞 뒷산 탐사를 시작했다. 사흘간에 걸쳐 뒷산과 좌우의 산들을 살펴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산이 높고 가파르면 계곡이 깊게 마련인데, 잔설이 남아 있는 으슥하게 깊은 계곡마다 온갖 산나물과 약초, 야생화 새싹들이 환상적으로 돋아나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닫지 않아 태곳적 풍치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은 앞산을 탐사하기로 하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관인봉으로 불리는 앞산은 해발 710미터로 마을에서 서쪽인데 능선에서 산 중허리까지 봉우리마다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마을에 터를 잡기 전부터 그 절벽 밑에 과연 어떤 산야초가 자생할까 궁금했던 나는 한 시간여 만에 가장 높은 벼랑 밑에 다다라 잠시 숨을 돌리고는 물을 마시려는 순간, 위쪽에서 달그락 달그락 잔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끝이 쭈뼛하고 등골이 오싹하여 숨을 죽이고 살펴보았다. 샅샅이 톺아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는데 소리는 단조롭게 계속 들려왔다.

틀림없이 산짐승일 것으로 여기고는 옆의 아름드리 참나무에 붙어 서서 ‘큼큼!’ 헛기침을 했다. 멧돼지나 고라니라면 어서 도망가라는 신호였지만 계속 소리가 나더니, 돌서덜 둔덕 너머에서 빨간 모자를 쓴 묘령의 여인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다. 산짐승과 맞닥뜨렸을 적보다 더 놀라 잠시 멍했던 나는, 역시 놀랐는지 멀거니 마주 보는 여인에게 물었다.

“거기서 뭘 하세요?”

“그렇게 묻는 분은 거기서 뭘 하세요?”

“저는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등산 오셨나요?”

“그렇기도 하지만 탐사차 왔습니다.”

대꾸를 하며 여인에게 다가간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둔덕 너머 잔자갈 서덜에 금낭화가 꽃밭을 이루고 있었는데, 여인은 그 아름다운 꽃을 무더기로 뜯어 놓고 있었다. 안타깝고 애처로워 화가 치밀어 여인을 쳐다보니, 얼굴에 잔주름이 있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나는 퉁명스레 물었다.

“아주머니, 그 예쁜 꽃들을 왜 모조리 꺾었습니까?”

여인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꽃이 예쁘기는 하지만 이건 나물이랍니다.”

“나물이라고요? 이걸 먹습니까?”

“그럼요. 나물 중에서도 고급나물이지요.”

“아주머니, 이 꽃 이름이 뭔지 아세요?”

“알지요. 학명으로는 금낭화, 나물 이름은 며느리취!”

여인이 뜯은 며느리취는 큼직한 배낭을 채우고도 남았는데, 여인은 내 배낭에도 가득 채우고는 어서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산을 내려온 여인은 며느리취 맛을 보여주겠다며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내 집필실 건넛마을의 그 집 마당에 들어서던 나는 또 한 번 입이 딱 벌어지도록 놀랐다.

꽤 넓은 마당과 텃밭이 온통 야생화 밭이었다. 금낭화를 비롯하여 꽃이 핀 복수초, 노루귀, 별꽃, 싹이 돋아나는 온갖 산야초를 여인은 일일이 이름을 대가며 개화기까지 설명했다. 여인은 나를 열  배 정도나 뛰어넘는 산야초 연구가였다.

우리는 며느리취를 데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많은 얘기를 했다. 여인은 나보다 열다섯 살이 더 많은 62세였는데,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남편이 죽고 이 마을에 들어온 지 5년이라고 했다. 이북이 고향이라는 여인의 오빠는 이름을 들으면 금방 떠오를 만한 1970~80년대에 한자리하던 정객(政客)이었다.

나는 그 마을에 사는 3년 동안 두 권짜리 장편소설을 쓰며 여인으로부터 산야초와 야생화 공부를 했다. 내가 지금 자칭타칭 산야초 연구가가 된 것은 모름지기 그 여인의 덕이다. 3년 전에 그 마을을 떠났다는 여인이 노환으로  작년에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아름다워 꽃을 사랑하던 그 여인은 천국에 가서도 틀림없이 꽃을 가꾸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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