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데카르트와 베이컨

이 글의 제목인 ‘나는 걷는다, 고로 생각한다’란 말은 어디선가 들었던 말 같지 않은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란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길을 걸으면 마음이 비워지고 성찰케 하며 사색하게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잠시 유보해두자. ‘나는 걷는다. 고로 생각한다’란  동중정(動中靜, 동 속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정신의 파문)에 대한 객체로서 정중동(靜中動)을 조명해 보고 싶다. 몸은 밖을 향해 나아가지만 마음은 내면으로 향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동정은 조화롭게 서로 응해야 한다.

선승(禪僧)들의 무소유(無所有)를 말할 때 일의일발(一衣一鉢)을 이야기한다. 이 말은 정중동(靜中動)이고 데카르트적이다. 여기에서 ‘나는 걷는다, 고로 생각한다’는 일의일발(一衣一鉢)이란 ‘말(言)’이 아니고 일낭일장(一囊一杖)이란 ‘행(行)’에 가깝다. 등에 바랑을 지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바람 따라 가는 일낭일장은 동중정(動中靜)이고 베이컨적이다. 선승들이 한곳에 머물며 수행 정진하는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는 데카르트적이다. 운수납자가 되어 천하를 주유(周遊)하는 만행(漫行)은 베이컨적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우리 인간의 동물성(動物性)을 가장 잘 구현해 주는 행위가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가장 ‘낮은 데로 임(臨)’해서 ‘저 높은 곳을 향(向)’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두 발이다. 인간이 유아기까지 기어 다니다가 2천여 번을 넘어지는 부단한 학습을 거친 다음 두 발로 걷는다. 그래서 인간을 직립동물이라고 부른다.

원공 스님과 칸트

걷는 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몇 명 기억 난다.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 밥 구멍 외에 출입문까지 봉쇄한 선방)에서 6년 수행을 마친 원공 스님이 있다. 참혹한 감옥보다 더한 무문관 6년 수행을 마친 원공 스님은 이제는 ‘원 없이 펼쳐진 공간’을 걷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0년을 넘겼는데도 아직도 걸어만 다니신다. 자동차, 기차, 버스는 물론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도 안 타신다고 한다. 그래서 원공 스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걷는 스님’이시다. 개인적인 바람은 30년 채우고 스님 법랍(法臘)도 있으시니 이제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서 방하착(放下着)하고 자유로워지시기 바란다.

십 년 공부면 거의 모든 전문분야에 도통(道通)한다는 데 30년 동안 오직 기회만 있으면 걷기만 하셨으니 걷는 것은 경지에 올랐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스님의 행위는 너무 쉬워서 시시해 보인다. 그러나 이 스님은 그런 시시한 행위를 시시각각 지금까지 계속하고 계신다. 보통 수행 자세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다. 걷는 것도 그냥 걷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주우면서 걷는다. 그래서 원공 스님은 자타가 ‘원조로 공인’한 ‘쓰레기 줍는 스님’이시다. 우리 같은 하근기 인간들을 고개 숙이게 하고 부끄럽게 한다. 부디 이제는 경로우대증도 나왔을 것 같으니 당분간 지구촌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대중교통은 이용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

서양 근대철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생각하는 칸트(Kant)’라고 한다. ‘걷는 칸트’를 통해서 ‘생각하는 칸트’의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혹자는 주장한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매일 규칙적인 시간(오후 3시 30분)에 산책하면서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의 킬라닌그라드)를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칸트는 150cm 정도 단신에 아주 병약한 체질에 비정상적으로 틀어진 체형을 하고 있었지만 규칙적인 걷기를 통해서 당시로는 드물게 80세까지 살았다. 그래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를 노래한 시인 두보(杜甫, 712~770)를 비웃었다. 걸어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가 아닌가 생각된다.

걸으면 뇌가 건강해지고 젊어진다. 생각하는 칸트에게는 늘 ‘생각하는 뇌’에 과부하가 걸린다. 그래서 ‘걷는 칸트’의 ‘걷는 뇌’를 활성화시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걸으면서 근대철학의 커다란 흐름인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근대철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육체와 정신’이 병행하면서 발달하듯이 ‘걷기와 생각하기’도 균형을 이루며 발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뇌는 일하지 않지만 정중동(靜中動)을 추구한다. 뇌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엄청난 에너지와 산소를 소모하는 동(動)을 실천한다. 몸 전체의 2%인 뇌가 20%의 산소를 사용하면서 에너지도 가장 질 좋은 포도당을 사용한다. 뇌의 에너지 소비는 ‘전체 근육’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양과 거의 같다. 뇌는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판단하고 결정하여 우리 몸에 필요한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하며, 가장 유익하고 가장 경제적인 행동을 하게 하여 정중동(靜中動)을 실천한다.  

 다리는 생각하지 않지만 동중정(動中靜)을 추구한다. 다리는 머리가 아니므로 생각하지 않지만 가장 낮은 곳에 임하면서, 가장 거친 음식을 들고도 무겁고 힘들게 움직이며, 어렵고 신속한 균형을 담당하면서 순식간 임기응변하면서 대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다리는 뇌가 생각하지 못하고 명령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상황을 자체적으로 ‘생각보다 더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하며 즉시 행동에 옮기는 동중정(動中靜)을 실천한다. 뇌는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도 한다. 다리는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한다는 말이다.

하나이자 전체이고, 전체이자 하나이다(一卽一切 多則一). 하여간 걷는 동안에 우리의 다리는 쉼 없이 동중정(動中靜)을 실천한다면,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정중동(靜中動)을 실천한다. 그리하여 이런 가설이 입증되는 것이다. ‘나는 걷는다, 고로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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