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세기 한국불교의 회고와 반성

1. 글의 방향

20세기 한국 종교지형의 변화는 ‘기독교의 급성장과 동양의 전통적 제도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약화’로 특징지워진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 종교변동에 대한 학문적 관심에도 반영되어, 기독교의 급성장에 관해 다양한 시각의 연구들이 학문적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현상에 대해 다양한 학자들이 자신들의 시각과 이론적 논의를 개진해 왔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현상을 세계체제론에 입각하여 서구의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분석하기도 하며,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한국사회의 구조변동 혹은 근대화 과정의 부산물로 보고, 사회심리학적 시각이나 가치갈등적 시각으로 진단하기도 했다.

심지어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정치경제학적 시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관심은 ‘왜 전통적인 제도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세력이 약화되었는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을 특정한 구조적 요인과 연관시켜 분석하고 있는 연구결과들을 종합한다면, ‘20세기 한국사회에서 왜 전통적인 동양종교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설명은 가능하다.

기독교에 우호적인 구조적 조건이 전통종교인 유교나 불교에게는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한국사회에서 종교간 대립이나 사회변동과 종교의 특정한 관계를 전제하거나 혹은 무시한 논리적 비약으로 귀결되기 쉽다. 게다가 특정한 종교의 변동은 외부의 구조적 요인뿐만 아니라 내부의 구조적 요인들과 그 역동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의 변화는 한국불교 내부의 구조적 요인을 설명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20세기 한국사회에서 왜 전통적인 동양종교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에 있어서 종교간 갈등관계,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변동과 각 종교의 관계, 그리고 각 종교 내부의 구조와 그 역학관계를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을 모두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이 글은 20세기 한국불교의 저조한 포교활동이 불교세력의 약화를 야기한 원인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20세기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을 비판적으로 회고하고 반성하는 데 있다. 특히 이 글에서는 한국불교 내부의 구조적 요인과 그 역학관계가 포교활동의 상대적 약화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불교 내부의 역학 구조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조적 요인들을 추출하고,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이 포교활동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이론적 차원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이론적 논의에 기초하여 20세기 한국불교의 포교활동 전체를 재해석해 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떠한 포교활동들이 전개되었는지를 간략하게 드러내고 그러한 노력들에 대한 총체적 해석을 덧붙여 나갈 것이다.

2. 이론적 논의:불교 내부의 역학구조와 포교

포교활동과 관련되는 종단 내부의 요인은 다양하다. 심지어 포교활동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종단 내부에서 발생하는 역사적 우연이나 돌발적 계기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20세기 한국불교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요인들을 추출하고 이러한 요인들이 포교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론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곧 역사적 시각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우연이나 돌발적 사건 혹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시적 현상 등은 포교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적재적소에 포함시켜 해석해 나갈 것이다. 또한 포교활동에는 종단 외부의 요인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연구의 주장이나 성과를 적절하게 소화하여 활용할 것이다.

1) 한국불교의 이념구조와 포교 견성성불의 이념과 전법도생의 이념――

이는 자리적 측면과 이타적 측면, 지혜의 측면과 보살행을 포함한 자비실천의 측면, 선불교의 측면과 밀교까지 포함한 대승불교 혹은 통불교의 측면 등과 같은 방식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불교이념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실천적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두 가지 이념적 차원은 그 우선성이나 강조점을 두고 분리되거나 대립되는 경향을 지닌다. 이러한 대립적 성향은 포교활동이라는 구체적인 실천 영역에서, 특히 신도 확보 방법에서 잘 드러난다. 종교의 지형변화가 신도수의 크기와 무관하지 않을진대, 신도를 확보하는 문제는 모든 종교의 일차적 관심사항이다. 게다가 신도 없는 종교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로든 신도 확보의 메커니즘을 이미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신도 확보 노력을 경주해 왔다.

한국불교는 최소한 지금까지는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일정한 양의 신도수를 지속적으로 확보해 왔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한국불교가 신도를 확보해 온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경로는 선(禪)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고승대덕을 배출함으로써 신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스님들의 법문을 듣거나 친견하기 위해 신도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사찰을 찾도록 유도하는 경로이다. 이 경로의 경우 한국불교의 선불교적 정체성을 계승하면서도 한국불교문화의 기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수행문화를 강화함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의 종교문화를 재생산하고 그 결과가 다시 포교 효과로 귀결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로는 간접적으로 포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뿐 직접적인 포교활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둘째 경로는 일부 교화승이나 재가 포교사들의 포교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신도를 확보하는 경로이다. 그러나 이 경로는 포교 주체의 의식이나 노력 그리고 종단의 포교정책이나 전략, 그리고 종단, 교구본사, 단위사찰의 행·재정적 지원 등의 부대조건이 모두 구비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를 때, 한국불교가 주로 의존해 온 신도 확보 경로는 첫번째 경로이다. 이는 ‘수행만 열심히 하면 포교는 자연히 된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지니거나 합리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든 출가수행자들의 철저한 수행과 그들의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합의가 전제되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수의 스님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첫번째의 경로만을 고집하는 것은 포교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크다면 두번째 경로가 오히려 더 효율적인 신도 확보 경로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경로를 모두 활용하는 것이 신도 확보의 효과를 배가하는 가장 좋은 전략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견성성불 전법도생’이라는 불교이념의 총체적 구조와도 부합된다. 그러나 한국불교문화의 실재를 보면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두 경로가 상호 보완적 성향을 갖기보다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로 한국불교는 주로 첫번째 경로를 강조하였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두번째 경로는 경시되거나 봉쇄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불교문화가 강제되는 조건 속에서는 한국의 스님들이,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을 바쳐 포교에 헌신할 수 있는 동기를 갖기란 실로 어렵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으로는 한국불교의 이념구조나 선불교 문화와 연관되는 문제로서, 종단이나 교부본사의 포교종책 및 전략 부재, 포교에 대한 출가수행자의 의식부족, 포교전문 출가수행자의 배출노력 부족 등으로 현상하고 있다. 물론 두 번째 경로를 통한 신도 확보 노력, 즉 직접적인 포교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세기 한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두번째 경로를 개척하기 위한 시도를 해 왔으며, 통합종단이 탄생한 이후에는 포교를 종단의 3대 종책사업의 하나로 설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와 노력들이 과연 얼마나 효율적으로 실천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었는가를 회고해 볼 때, 포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한국불교의 이념구조와 그로 인한 불교문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이념구조가 포교활동의 기본조건인 포교경로 및 포교방법을 일관성 있게 확립하고 체계적으로 개발하는 데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가설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와 포교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불교사상이 평등사상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치 사상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불교사상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에서 보면 한국불교 내부는 불평등이 구조화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포교를 열심히 하려는 사람은 돈도 없고 힘도 없는 반면에, 돈도 있고 힘도 있는 사람들은 포교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없어 포교가 되지 않는다’라는 자조적인 푸념은, 불교 내부에 불평등 현상을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평등 구조가 포교활동을 저해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국불교의 내부적 불평등 구조는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진 복합구조이다.

첫째 차원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에 따른 불평등으로 이는 승가와 재가 사이의 불평등으로 현상하고 있다.

둘째 차원은 성(性)의 구분에 따른 불평등으로 이는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들 간의 불평등으로 현상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소속집단의 구분에 따른 불평등으로 이는 비구 스님들 사이에서 문중이나 소속집단 및 세력에 의한 불평등으로 현상되고 있다. 부처님의 전법선언이나 종헌종법에 따를 때, 모든 사부대중은 포교의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에서 보면, 한국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로 인해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은 정치경제적 능력이나 종교적 위신을 지닌 일부 집단이나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비구 스님들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집단이나 그 집단에 소속된 스님들은 포교 외적 활동으로 인하여 포교에 전념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부대중, 그 중에서도 특히 재가자나 비구니 스님들은 포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포교활동의 반대 급부가 보장되어 있지도 않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적 현상은 존재한다. 실제로 재가자가 운영하는 신행단체가 많이 생겨나고 또 사멸해 갔을 뿐만 아니라 종단이나 특정 사찰에서 그러한 활동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또한 일부 개별 스님들이 투철한 포교서원과 효과적인 포교방법을 토대로 포교활동에 매우 성공적인 사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의 재생산으로 귀결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것은 그러한 사례들이 종단의 제반 제도적 장치와 무관하게 존재함으로써 재생산 기반의 태생적 취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포교성과는 전 종단적 차원으로 귀속되기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단체에게로 귀속되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그러한 사례는 예외적인 사례로서 종단적 차원의 포교활동으로 평가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한국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가 포교활동의 또 하나의 기본조건인 포교 주체의 개발과 효율적 활용을 방해함으로써 포교활동을 저해해 왔다는 가설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 승가 내부의 세력간 갈등과 포교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다양한 원인에 의해 다양한 유형의 집단이나 세력이 형성되고 소멸하면서 변화해 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러한 세력간 갈등이 포교대상, 곧 한국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논리적으로 따져 보고자 한다. 이론적으로 볼 때, 화합중으로서 승가공동체는 포교대상자들의 종교생활 및 사회생활의 모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승가공동체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형성된 제반 세력이나 집단 간에 수많은 역학관계가 형성되어 왔으며, 그러한 역학관계가 때로는 갈등과 분규로 현상되기도 하였다. 비구―대처 간의 싸움,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의 분종,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및 개혁세력 사이의 갈등, 그리고 각 문중 간의 역학관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분종이나 분규가 불교의 포교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기독교의 선교를 도와주고 있다’라는 포교현장의 볼멘소리가 들린다는 점이다.

이는 이러한 갈등 사례가 출가수행자, 한국불교문화, 나아가 불교 그 자체에 대한 포교대상의 인식 및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러한 부정적 영향은 신심이 투철하게 확립된 기성신도보다는 일종의 ‘신도 예비군’에게 더 민감하게 나타난다. 비록 그러한 신도 예비군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고, 그러한 부정적 영향으로 인해 불교신도화되지 못한 숫자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정확하게 추산하기란 쉽지 않지만, 개종이 주관적 믿음체계의 문제라면 한국불교의 갈등이나 분규는 신도 예비군의 이탈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종단 내부의 갈등이나 의견대립이 반드시 포교활동이나 불교발전에 저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변화에 따른 불교계의 대응방안이나 신도들의 욕구변화에 따른 종단 및 스님들의 대처방안과 관련하여 전 종단적 차원이나 전 사회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논쟁이나 갈등이 발생한다면, 이는 불교발전은 물론 포교활동을 확대하고 심화시켜 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승가공동체 내부의 분열, 대립, 그리고 분규는 불교에 대한 포교대상자의 부정적 인식과 이미지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포교활동을 저해해 왔다는 가설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한국불교 내부의 구조적 역학관계를 포교의 효과와 논리적으로 연관시켜 보았다. 포교방법, 포교주체, 그리고 포교대상이 포교활동이나 포교전략 수립의 3대 기본요건이라면, 그리고 불교의 포교활동이 저조한 불교 내부의 구조적 원인을 추적하려면, 포교활동 및 포교전략 수립의 기본조건인 ‘포교의 3대 요소’와 각각 연관된 부정적 요인――종단 내부의 불평등 구조, 세력 간 갈등, 그리고 이념적 혼란――을 색출하여 논리적으로 연관시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논리 연역적 가설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이 외부의 구조적 조건 및 역사적 우연과 어떻게 결합하여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경험적으로 검증해 보고자 한다.

3. 20세기 포교의 역사적 전개와 그 한계1)

1) 본 장의 내용은 <현대 한국사회의 변동과 포교>라는 졸고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다만, 앞장에서 논의한 이론적 가설에 입각하여 그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보완하였음을 밝혀 둔다. 그리고 구체적인 역사적 자료에 대해서는 졸고의 자료와 그 출처를 참고하기 바란다.

20세기 포교의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기 구분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 구분은 한국사회 및 한국불교의 변동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현대포교사를 조작적 차원에서 현대포교의 태동(일제시대), 답보적 전개(해방 이후∼1960년대 초), 포교의 종책화(통합종단∼1970년대 말), 포교의 제도화(1980년∼현재)로 시기 구분을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그러한 구분의 근거는 각 절의 초두에서 간략하게 제시할 것이다.

1) 일제시대:

현대 포교의 태동 일제시대 한국불교는 무엇보다도 불교의 왜색화에 휘말려 진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색화는 해방 이후 불교계의 대혼란과 그로 인한 포교의 퇴조를 낳게 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제시대는 그러한 왜색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일부 개혁적 스님들에 의해 현대포교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불교계의 일각에서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한국불교의 개혁을 주창하게 되는데 포교와 관련하여 유의미한 움직임은 교육진흥을 위한 노력과 새로운 포교 활동의 전개였다. 일제시대 포교사대회는 현대포교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포교사대회는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그 결과는 한국불교의 현대포교사에서 개척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1회 대회는 1927년 8월 동화사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는 교전의 편찬, 포교의식의 방법, 교육제도, 예식, 조선불교사업연구회의 조직, 포교기관지 발행 등 재래식 포교방식을 탈피하기 위한 광범위한 모색을 시도했다. 그리고 제2회 대회는 1928년 3월 교무원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는 1회 대회의 안건을 보다 구체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제도와 사설 포교당에 대한 논의가 추가되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 한국불교의 일부 선각자들은 수행을 통한 간접포교가 아니라 직접포교를 통한 포교방안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포교방법의 현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한국불교가 최초로 직접적인 포교방법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일제시대 한국불교 내부의 세력 갈등은 일제를 우호적으로 인식하고 자의든 타의든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긍정하는 세력과, 만해 스님이나 용성 스님과 같이 일제를 적대적으로 인식하고 일본 제국주의적 식민화에 저항한 세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세력갈등으로 인해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의 주체는, 불교계 사부대중 전체가 아니라, 포교를 통해 한국불교를 개혁함은 물론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불교적 기반을 확고히하려는 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수많은 본사급 수사찰을 필두로 하여 최초의 도심 포교당을 설립함으로써 포교사업을 태동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실은 당시 한국불교의 본사급 수사찰만이 포교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제시대의 경우 재가자나 비구니 스님들이 주도한 포교활동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는데, 그것은 이러한 인력을 동원하여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 일제시대 훨씬 이전부터 구조적으로 봉쇄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구한말 이래 기독교의 한국 선교전략이 현지인 지도력의 확보와 그를 통한 선교 효과의 극대화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이는 한국불교의 포교 활성화를 가로막는 구조적 제약 요인임에 틀림없다.

2) 해방 이후∼1960년대 초:포교활동의 답보적 전개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사회는 일제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미군정하에 놓이게 된다. 미군정은 직접적인 식민화정책을 실시하지는 않았지만 근대적 제도의 도입과 정착이라는 미명하에 당시 한국사회 전반을 미국(혹은 서양)에 우호적인 조건으로 바꾸어 갔다. 그리고 1948년 남한만의 민족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근대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이승만을 비롯하여 당시 자유당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친미성향과 친기독교적 성향을 가졌거나 혹은 기독교인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종교정책에 있어서 자유당 정부는 미군정의 그것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1950년 6월 25일부터 시작되어 3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잿더미 속에 묻어 버리기에 충분하였다. 한마디로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는 불교계가 포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이 시기 불교계의 내적 조건도 포교활동에 우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해방 직후 불교계에서도 일부 개혁적인 스님들을 중심으로 불교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운동목표는 통일노력이라는 민족적 과제와 왜색불교 청산이라는 불교적 과제로 압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 혁신운동은 당시 종단 내외의 보수적인 세력과 크게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954년 이승만의 유시와 더불어 불교계는 현대 한국불교사의 가장 큰 질곡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왜색불교의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발표된 이승만의 정화유시는 비구측과 대처측 간의 싸움으로 발전함으로써 한국불교는 총체적인 내분과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후 태고종의 분종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암흑기에도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시기의 포교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당시 승가공동체의 세력갈등과 직접 관련을 갖고 있지 않던, 그리고 한국불교의 불평등 구조로 인해 종단 내 주요 활동에서 소외되어 있던 재가신도들이 스님들의 공백을 메우면서 포교활동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한국불교의 포교는, 유교의 경우와는 달리, 그 명맥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실은 당시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이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러한 활동들이 소수의 뜻있는 스님들에 의해 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거나 아니면 재가불자 단체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 종단적 차원에서 체계적인 사업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교활동의 제반 조건을 충분히 갖춘 세력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세력들이 주체가 되어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포교활동의 정도와 수준이 매우 낮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결국 이 당시 한국불교는 식민잔제의 청산이라는 문제로 인해 갈등과 분쟁에 휩싸이는데, 그것은 해방 직후의 혁신세력과 보수세력 간의 갈등과 1954년 이후 비구­대처 간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세력갈등으로 현상되었다. 그리고 이렇듯 전 종단적 차원의 연속적인 갈등으로 말미암아 승가공동체는 포교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이는 불교 내부의 세력갈등이나 불평등 구조가 포교활동의 저해 요인임을 경험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신도확보 방안에서는 진보된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불교매체가 탄생되어 일정정도 포교의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불교의 포교는 직접포교의 방안을 더욱 확고하게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수단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개발하기 시작하였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해방 직후부터 통합종단 이전까지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은 매우 저조하였다. 그것은 당시 한국사회 전체의 사회구조적 조건과 불교 내부의 갈등 및 싸움이 일체의 포교활동을 저해하는 요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통합종단∼1970년대 말:직접 포교의 종책화

주지하듯이, 1961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는 박정희 정부가 계속 이어진다. 물론 박정희 정부 내에서도 제3 공화국과 이른바 유신체제로 알려진 제4 공화국 사이에는 사회구조 전반에 있어서 상당한 차별성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차별성이 한국 종교지형의 변화에도 다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전 기간을 하나의 시기로 간주하고자 한다.

박정희 정부가 시작되면서 한국불교계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1962년 불교계가 그간 계속되어 온 비구­대처 간 싸움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통합종단으로 출범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불교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종단의 내실화와 사회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포교와 관련하여 특기할 사항은 1966년 불교계가 ‘한국불교 중흥의 해’라는 기치 아래 역경, 포교, 도제양성을 3대 사업으로 확정하고 불교계의 숙원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포교를 종단적 차원에서 종책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는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다. 그후 포교는 종단의 3대 종책사업의 하나로 굳어져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는 포교이념의 확립 및 제도화라는 의의를 갖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종단은 분열의 불씨를 여전히 내장하고 있었는바, 1966년부터 비구―대처 간에는 법정투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어 1979년 조계종과 태고종으로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러한 분열은 연이어 법화종, 진각종, 천태종, 법화종 등 다양한 분파로 나누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조계종의 경우 1970년 이후부터는 종권싸움이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됨으로써 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는 더욱 확대되었다. 결국 이러한 세력 간 갈등과 분규는 포교를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는 한마음선원이나 대원정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몇몇 개별 스님이나 재가신자가 독특한 포교방법을 활용하여 도심포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하였다.

게다가 포교의 종책화로 인해 직접 포교의 중요성이 강화되면서 일부 소수의 스님들과 재가신도들에 의해 다양한 계층별·직능별 단체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 계층별 포교는 그 범위가 청소년, 대학생, 군인, 심지어 해외포교에 이르기까지 넓혀짐으로써 더욱 활성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 불교계의 포교활동과 관련하여 특기할 사항은 매체포교가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불교의 포교성과는 개신교와 비교해 볼 때 턱없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개신교는, 한국사회가 산업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면서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하자, 농촌 출신자를 선교의 전략적 목표로 설정하여 선교에 획기적인 성과를 남겼으며, 이러한 선교 전략과 그 성과는 80년대 기독교의 폭발적 성장의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반면에, 당시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은 포교의 종책화에도 불구하고 종단적 차원의 제도적 지원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내부의 구조적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개별 스님이나 재가자의 활동조차도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 포교활동의 한계에 다름 아니다.

4) 1980년∼현재:포교의 제도화

이 시기는 크게 80년대와 90년대를 모두 포괄하는 시기이다. 물론 한국사회의 변동과정에 있어서 80년대의 사회상황과 90년대 초의 그것이 다소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1994년 종단개혁이라는 사건이 발발하기도 하였지만, 포교활동과 관련된 불교계 내부의 흐름은 큰 단절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1980년대 불교계의 가장 큰 사건은 10·27법난이다. 10·27법난이 발생함으로써 불교계는 커다란 손실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불교계에 대한 대사회적 이미지는 크게 악화되었고, 이러한 이미지 악화는 이후 포교활동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10·27법난은 종단 내부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원로스님들로부터는 자성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으며, 소장파 스님들로부터는 종단개혁이라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가운데 1983년 신흥사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그 수습을 위해 소장파 승려를 중심으로 한 비상종단이 선포되고 이에 맞서 원로 중심의 전국승려 대표자 대회가 개최되는 등 또 다시 갈등의 조짐이 나타났으나,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고자 한 양측의 노력과 비상종단측의 양보로 종단 내적 질서는 어쨌든 다시 안정되어 가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또한 1980년대 한국불교는 이른바 ‘민중불교운동’이라는 불교운동을 통해 사회참여를 전개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1980년대 포교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1981년 3월 19일 종령 제43호에 의거하여 포교원을 설치한 사실이다. 당시 포교원은 포교의 3대 지표를 첫째 인류의 불자화, 둘째 불교의 생활화, 셋째 사회의 정토화에 두고 구체적인 시행방침을 마련하여 포교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예컨대 1982년 포교원의 포교사업계획은 포교인적 자원의 체계화, 포교자료의 문서화, 그리고 법회의식의 일원화 및 생활화로 설정됨으로써 상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업으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포교원은 조계종 전국 포교사단을 결성함으로써 전국적인 포교조직을 형성하였는데, 1,050명으로 구성된 포교사단은 상호 정보교류와 포교방법의 교환 등을 통해 불법전파의 실천적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 19일에는 ‘중생의 불자화, 불교의 생활화, 세계의 정토화’를 강령으로 한 전한국불교포교사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협회는 종파를 초월하여 각 사찰 스님 300여 명이 발기하여 설립되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80년대 도심포교당 설립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첫째 도심포교당 설립이 서울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 시급 도시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포교당 설립이 연고 있는 본사급 사찰의 지원을 받고 설립되기보다는 특정한 스님의 개인적 원력과 노력에 의해 설립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80년대 포교당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는 도심포교당 설립이 일반적인 추세로 굳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의 포교활동이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일부 개혁지향적 소장파 스님들은 10·27 이후 불교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하였으며, 재가신도들도 7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계층별·직능별 단체들이 더욱 광범위하게 설립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한국불교는, 법난이나 몇몇 종권분쟁으로 포교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볼 때 포교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교 내부의 세력 간 갈등이 종권을 둘러싼 일부 세력들, 혹은 일부 문중들 간의 다툼이었지 종단 전체가 관련된 분규는 아니었다는 점과, 특히 94년 개혁종단 이후 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가 다소 해소되면서 포교 주체자가 다소 확대되어 비구니 스님이나 재가자의 활동 공간이 다소 확대된 것에 기인한다.

게다가 포교원의 설립에서 알 수 있듯이 포교가 거의 제도적으로 정착됨으로써 직접적인 포교방법이 신도확보 방법으로 확고하게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이 시기에는 총무원에서 포교활동을 종책적 차원에서 사업화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포교 관련 직능별 단체들이 다양하게 결성되어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는 한국불교 포교사에서 포교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시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큰 흐름은 90년대 이후에도 지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종단 내부의 불평등 구조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며, 종단내 세력 갈등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일부 스님들을 포함한 사부대중의 포교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데, 그것은 한국불교의 이념구조와 선불교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4. 글의 마무리

지금까지 우리는 20세기 포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그 특징을 불교 내부의 구조적 요인과 연관시켜 해석해 보았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일제시대 일부 선각자 스님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직접적인 포교활동은, 교구본사 차원의 도심포교당 설립 붐을 조성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불교 내부의 구조적 제약 때문에 지속되지 못하고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합종단 이전까지 한국불교는 포교이념도 제도화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내부의 세력 갈등으로 인해 포교활동 자체를 전개할 수 없었다. 물론 불교계 내부의 구조적 불평등은 20세기 이전부터 구조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구조적 영향으로 통합종단 이전까지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은 일부 세력이나 개별 스님들, 그리고 일부 재가자에 의해 자발적이고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을 뿐이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통합종단 이후 70년대 말까지는 포교가 3대 종책사업의 하나로 확정되면서 포교이념의 제도화는 물론이고,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전 종단적 차원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물적·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불교 내부의 세력 간 갈등이나 분규는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구조적 불평등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 포교는 종책사업이긴 하였으나 전 종단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독특한 포교방법과 전략을 활용한 일부 개별 스님들이 포교에 성공을 거두거나 혹은 재가자 중심의 다양한 계층별·직능별 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마지막으로 80년대 이후 현재까지를 보면, 포교이념은 확고하게 제도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는 포교원이 별원화됨으로써 그 활동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어졌다. 물론 포교원은 아직까지도 완전한 자율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며 간헐적으로 종단적 차원의 분규도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종단이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80년대 이후 한국불교의 포교활동은 상대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종책적 차원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 스님들이나 재가단체의 포교활동을 지원해 줌으로써 포교활동을 활성화해 가고 있다.

그러나 구조적 차원에서 볼 때, 아직까지도 문제는 종단 내부의 구조적 불평등이 포교활동의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불교 이념구조의 특수성과 선불교 문화의 전통, 그리고 세력 갈등의 잠재성 등도 포교활동을 부분적으로는 제약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민주화가 곧 사회발전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문화와 다양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머지않아 우리 사회도 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사회를 통과하고 지식기반사회로 진입할 것이라고 한다. 한국불교가 이러한 사회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를 극복하고 나아가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사부대중들을 최대한 동원하고 조직화하여 포교활동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끝>

유승무
한양대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사회학박사.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불교사회학의 성립조건(Ⅰ·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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