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호병탁
문학평론가, 시인
남들처럼/ 너를 보냈다/ 그런데 왜/ 남들처럼 나는/ 너를 잊지 못하는가// 지면 그만인 것을/ 하늘 담은 물 위/ 떠가는 옻단풍 한 잎은/ 왜 저리도/ 함빡 붉어야 하는가

―졸시 〈가을〉 전문

가을비가 추적인다. 가끔 학교에 가고, 지인들과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일 외에는 책상 앞에 궁둥이가 짓무르도록 앉아 이 가을을 보내고 있다. 달력에 동그라미 그려 놓은 원고 마감일들은 왜 그리 바득바득 다가오는지 커피만 홀짝거리며 날밤을 새울 때도 잦다. 마지막 생명을 불 싸지르는 단풍 숲도, 후미진 산기슭에 흔들리는 구절초도 완상할 수 없었다. 그 고운 옻나무 단풍 한 잎 바라보는 조그만 호사조차 이 가을에는 나와 거리가 멀다.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다. 창밖에 추레하게 비를 맞고 떨고 있는 벚나무를 본다. 지난 봄날, 구름처럼 피어 눈보라처럼 흩어지던 그 하얀 꽃 이파리들의 화려한 군무와 겹쳐 무상감이 더하다. 그래도 검게 뒤틀린 저 나무뭉치 속엔 연두 움이 다시, 아니 반드시 올 내년의 봄을 꿈꾸고 있다. 단풍의 숲도 구절초도 모두 그 자리에 다시 살아 흔들릴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은 무엇인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벗의 얼굴이 빗속에 떠오른다. 그는 대학병원 영안실에서 문상을 마치고 귀가하다 반 시간도 안 되어 같은 영안실에 죽어 되돌아왔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확고하고 탄탄하게 여겨졌던 세계의 토대가 송두리째 흔들리며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불과 반 시간 전에 보았던 그의 웃음은 단박에 영원으로 소멸되었다. 인간의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란 참담한 고통의 말뚝만을 사정없이 박아버릴 뿐 그걸로 끝이다.

불문학자이자 유망한 시인이었던 그와는 긴 세월 동안 함께 술을 마셨고 문학을 얘기하고 가끔은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그 필연성과 삶이 죽음과 맺고 있는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주변 사람의 죽음에 대해 듣기도 했고 상갓집에 함께 문상을 다니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다하여 그 존재가 사라진다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만 파악되었을 뿐이었다. 어쩌다 고뿔이나 한 번 걸릴 정도로 비교적 건강하고 나이로 보아도 창창했던 우리에게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눈으로 보고 내 다섯 손가락으로 만져지던 친구의 실체는 이제 남김없이 지워졌다. 함께 만들던 ‘삶의 의미 있음’은 ‘삶의 의미 없음’으로 환원되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음은 순서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도, 그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냉혹한 단절의 고통을 주는 저주받을 그 카오스의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한 숙명인지, 혹은 인간의 원죄로 인한 당위적인 대가인지 내 얄팍한 이성으로는 알 수 없으나 친구를 보내며 천부당만부당하게만 느껴지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수월성을 인정한다면 시공을 초월하는 친구의 영혼은 지금 또 다른 내세에 있을 것이다. ‘육체의 장막에 갇혀 살던 영혼’은 ‘갇힘’에서 벗어나 사후세계로 비상했을 것이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밤하늘의 별을 보며 그를 그려볼 것이다.

혹은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고 그곳에 근원을 두고 있는 존재라는 자연과의 동질성을 인정한다면 가벼운 신혼(神魂)은 위로 나르고 무거운 체백(體魄)은 아래로 흩어져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청산의 들꽃에서 그를 볼 것 같다.

빗발이 굵어진다. 근천맞은 이파리를 흘리며 고개 숙이고 있는 창밖의 벚나무가 더 꺼칠하게 보인다. 책상 위의 커피잔은 다 식어 빠진 채 어지러이 널린 책 사이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 이게 살아 있는 지금의 나다.

어느 사람이 혜능 선사에게 “사람이 죽은 후 서방 극락세계로 가느냐, 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혜능은 “가지 않는다. 이 세상 사람들이 죽어 모두 서방정토로 가게 된다면 그곳 서방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고 반문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 각자의 현존가치를 중시하는 혜능의 주관적 유심론의 일단이다. 다시 말해 선사의 말씀은 우주 본연의 보편적 이성보다는 사심, 음심까지를 포함하는 보통사람의 현세당하적(現世當下的)인, 즉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맛있는 것 먹고 싶고, 좋은 것 갖고 싶고, 고운 여인에 집착하는 게 바로 나 같은 중생의 마음, 소위 ‘형이하학적 당하지심’이다.

갑자기 나의 이런 마음이 곧 해탈의 문을 여는 ‘불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선사께서도 ‘중생을 떠난 부처는 없다’고 거듭 강조하시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혜능선의 ‘즉심즉불’이 아니던가.

선학들께서는 견강부회도 유분수지 정말 고약한 중생이라고 나에게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실지 몰라도 나는 깨달은 사람처럼 식은 커피를 후딱 마신다.

늦가을 빗소리를 들으며, 떠난 친구가 지금 어디 있을까 잊지 못하고 청승 떨 일은 아닌 것 같다. 혜능의 유심을 되뇌며 ‘내세의 하늘’이건, ‘자연의 청산’이건 남들이 그를 보냈듯 나도 ‘남들처럼’ 잊고 그를 보내자. 대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청산의 들꽃을 보며 그와 함께 귀한 가치를 부여했던 시를 쓰자.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당장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것’이 ‘묘한 불법의 도리이자 수행’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중생이 이 자갈밭 같은 이생에서 지금 당장 할 일은 무엇인가. 우선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저 원고 마감일 동그라미 하나를 작대기표로 시원하게 그어 버리자. 그리고 후미진 산모퉁이에서 저 혼자 흔들리고 있는 구절초나 보러 가자. 의자를 책상으로 다시 바짝 당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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