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한영옥
시인·성신여대 교수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라는 흔한 말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나 자신이 곧잘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이러저러한 고충을 털어놓을 때 덥석 그 사람의 편에 서주기보다는 좀 더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라는 충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 사실이 그 당장에는 몹시 섭섭했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를 객관화시키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워하던 사람들도 떠오른다. 솔직히 나 자신도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어떤 상황들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방이 덥석 내 편이 되어주지 않으면 슬며시 화가 치밀었던 경험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좀 더 생각을 밀어가 보면 나로 하여금 사태와 거리를 두도록 종용해주던 이들의 차분함에 힘입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었음을 깨닫곤 한다.  

살아가는 중에 사람으로 하여 오는 고통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가령 특별한 이유 없이 돌변하는 태도들, 혹은 석연치 않은 표정, 쌩하게 거리를 두는 눈길들…… 이런저런 표지를 드러내며 이전과 달라졌음을 드러내는 얼굴들을 만나는 일은 적지 않은 괴로움이다. 사실 이와 같은 상황들과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모임을 자주 회피하는 요즘이다.

시간이 한가해진 틈을 타 몇몇 얼굴들의 석연치 않은 표정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분명히 오해된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시간을 되돌리며 여러 정황을 되짚어 본다. 특별한 사안이 떠오르지 않을 경우,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생각하게 되어 있는 만큼 나 자신의 잘못을 쉽게 집어내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스스로에게 말한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라고. 한발 물러서면 내 잘못도 잘못이려니와 사람의 마음, 그 허망한 정체가 만져진다. 특별한 근거 없이도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변전하는 것인데 마음의 여일(如一)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근거를 잃은 채 변계소집성에 휘둘리는 마음의 정체를 생각하면 내 마음, 네 마음 할 것 없이 그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평온해진다.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면 그 판단으로부터 배반당하게 된다는 데카르트의 한 구절이 오래 남아 있다. 살면서 스스로의 대책 없는 판단으로부터 뒤통수를 맞곤 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중심축에 놓고 사태를 성급하게 분별하다 보면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무안해지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허망한 분별, 변계소집성의 끈질김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지만 순식간에 미혹에 빠지는 것이 일상사다. 매 순간의 알아차림을 놓지 않고 비루한 분별심을 버려야겠다는 다짐이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누군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생각처럼 어리석은 망상도 없을 것이다. 이 모두는 내 마음이 요동치며 만드는 그 파장의 환상일 뿐이 아니겠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한발 물러서는 아량을 갖는 일이겠는데 오히려 사태에 바싹 다가서서 울화를 삼키지 못하는 자화상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자니 마음이 후줄근해진다. 자신을 질타하는 중에 〈유람(遊覽)〉이란 제목의 시 한 편을 얻었던 기억이 새롭다. 적어보기로 한다.
    
자꾸 맺히기만 하는 마음 두들기려 제주도에 왔는데
그래도 맺히기만 하여 우도 유람선에 올랐을 것인데
이 형상 저 형상 찾아보라고 야단법석인데
이 형상 저 형상 어디 있느냐 빗나가는 마음
 코끼리를 찾아라, 거북이를 찾아라 시끌벅적인데
끼룩끼룩 갈매기가 우는 것만 못하다는 마음
우도의 지붕들, 왜 모두 새파란 하늘색인지 아는가
유람선 선장은 또다시 선객들을 들었다 놓는다
특별한 이유 없다, 한 집 두 집 그냥 퍼져 갔을 뿐
혼자서 이 말 묻고 저 말 대답하는 잔뜩 쉰 목소리
끼룩끼룩 갈매기 웃는 소리 같다고 차츰 바뀌는 물결
 맺히던 기운 제풀에 스르륵 풀려나가는 기미, 매끄럽다 
영락없이 저건 코끼리로구나, 또 저건 거북이로구나
 마음이 뒤늦게 유람선에 올라 바다로 흐르게 된 것인데
우도의 지붕들 별 이유 없이 한 집 두 집 파랗게 번졌듯
별 이유 없이 마음은 맺혔다 풀렸다 하는 것인데.

 마음을 저만치 한 물건처럼 세워놓고 이렇듯 관찰해 본 셈이다. 유정(有情)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이런저런 불쾌감들을 떨쳐내지 못하다가 스스로 자정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각오로 마음을 굴려가 본 것이다. 시를 써 내려가기 전 불쾌한 느낌이야말로 변계소집성이라고 마음을 무던히 달랬을 것이다. 시를 완성했을 즈음 무엇인가 스르륵 풀려나가는 느낌과 함께 마음이 웬만큼 가라앉고 있었다. “별 이유 없이 마음은 맺혔다 풀렸다 하는 것”이란 생각에 이르러 어느새 마음은 정좌하고 오히려 나를 위무하고 있었으리라. 

 한발 물러서는 정도로는 내 안에 온전하게 자리 잡은 원성실성의 그 자리를 찾아내지는 못하리라. 수많은 고집과 편견으로 점철된 허망분별의 껍질이 어디 그리 쉽게 벗겨지겠는가. 그럼에도 마음의 유람이 원성실성에 이르기 위한 도정이라고 생각하면 네 마음 내 마음 할 것 없이 쓰다듬어주고 싶을 뿐이다. 무한 가능을 제 안에 두고 떠도는 측은한 헤맴을 저만치 밀어 놓고 보면 밉다거나 곱다거나 하는 바닥 없는 분별로부터 잠시 놓여날 수 있다. 그렇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한다는 것은 잠시라도 자유로워지는 그 시간을 누릴 수 있어서 좋은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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