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맹난자
수필가
겨울 해가 짧아졌다.

하루의 반밖에 살지 못하는 노경(老境)이 내게도 찾아와서 어름어름 하루해가 비껴 간다. 몸도 전처럼 활발하지 못하고 계획을 세운 일도 마음처럼 되어주질 않는다. 얼마간은 접어두고 무기력해진 몸을 데리고 사나흘에 한 번씩, 집 앞에 있는 공원으로 나간다. 그때가 아니고서는 절박하게 와 닿지 않는 일, 걷고 걸으면서 마지막 가는 길을 생각하게 된다.

구부러진 둘레의 완만한 곡선 길을 따라 걷다가 나중에는 운동장 흙길을 반복해서 걷는다. 걷다가 쉼표처럼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살아 있는 존재를 느낀다.

‘존재하라 그리고 동시에 비존재의 조건을 알라’

비존재의 조건을 알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는 릴케의 말이 언뜻 이마를 스친다.

숲 둘레에는 어둠이 내리고 수은등이 켜지는 다섯 시 반쯤 이 무렵, 숲은 다른 빛깔로 태어난다. 따뜻한 불빛에 감싸인 공원의 모습은 참으로 고즈넉하다. 동심원을 그리며 전구 바깥으로 배광(背光)처럼 흐르는 불빛의 파장을 지켜보면서 내 안의 불성(佛性)을 생각한다. 낮게 소리 내어 나는 주문처럼 외운다.

‘이 마음이 광명하여지이다.’

그러면 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이 마음이 청정하여지이다.’

발원하면서 마음의 먹구름을 밀어낸다. 마음이 한결 맑아지는, 상쾌함이 더해진다.

‘이 마음이 화합하여지이다.’

이것을 되뇌며 마음의 모서리를 깎고, 나를 없애서 남들과 화합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다시 걷는다. 운동장 모서리를 돌아서는데 ‘무(無)라, 무(無)라!’ 자꾸만 효봉 스님의 음성이 뒤따라온다. 입적할 때까지 들고 계셨던 그분의 무자(無字) 화두.

무엇이었을까? 일체만물에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해놓고 어째서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을까? 유(有) 무(無)를 타파하기 위한 하나의 공안이었으리라.

언젠가 화계사에서 숭산 스님을 뵈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사과 한 알을 불쑥 내 앞에 들이밀며 ‘색(色)이냐? 공(空)이냐?’ 답해 보라는 것이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그 후로 오십여 년의 세월이 잠깐 흘렀다.

나는 지금 텅 빈 나뭇가지 앞에 서 있다. 저들의 푸르른 여름이 분명 내게도 있었건만……. 그러나 봄이 되면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이룰 것이다.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 속은 텅 비어 있다. 그렇지만 빈 나무속에서도 봄이 되면 꽃이 새롭게 피어난다. 공즉시색이다. 조건만 맞으면 연기(緣起) 상황으로 존재하다가 조건이 다하면 돌아간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생사(生死)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연기에 의해 가합(假合)된 이 몸뚱어리는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본래 공(空)하다는 것을 알면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반야심경》은 일러주고 있다.

‘무라! 무라.’ 요즘 나는 《반야심경》의 ‘공중무색, 무수상행식(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즉 공한 가운데는 육신도 없고 감각과 표상작용도 없고 행위와 분별작용도 없으며,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혀 몸 뜻의 6근(根)도 없으며,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6경(境)도 없으며, ‘무안계내지 무의식계(無眼界乃至 無意識界)’ 6근과 6경이 부딪혀 일으키는 인식작용인 제6의식(意識)도 없으니, 모든 것은 6근과 6경의 인연 조합과 거기에 보태진 마음의 작용인바 모두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숙지하며 외운다. 제7식과 제8식인 아뢰야식의 공(空)함도 함께 통찰한다. 결국은 무(無)다. 제법무아(諸法無我)다.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 무노사(乃至 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없나니, 이 ‘12연기’ 가운데 나는 특히 ‘늙고 죽음이 없다’는 ‘무노사(無老死)’를 마음판에 새긴다. 어디에 죽을 내가 있던가.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고(苦)와 고의 원인인 집(集)과 고가 해결된 멸(滅)과 멸에 이르는 실천 방법인 도(道)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지혜를 실천함으로써 주어지는 공덕의 얻음 또한 없는데 왜냐하면 원래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여기까지를 소리 내어 철필로 마음에 새기듯 외운다.

그동안 털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나’라는 에고와 소유에 대한 갈망과 복잡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일시에 빛을 잃고 만다. 공한 가운데 이것들은 내가 몸으로 생각으로 만들어낸 마음작용의 현현(現顯)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에 이르니 고단한 내 칠십 년 삶이 허망한 꿈이었음을 알게 한다. 물에서 나왔는데 옷이 젖지 않다니 얼마나 다행한가 싶다.

수심이 깊고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바다, 이것을 물의 본질인 공(空)으로 본다면 마음에 솟구치는 노도(怒濤)는 현상으로서 드러난 색(色)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로 둘이면서 기실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무(無)의 본체와 유(有)의 현상을 같이 보아야 하는 까닭은 둘은 본래 한 가지로 나오면서 그 이름이 무(無)와 유(有)로 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무(無)에 해당하는 무극(無極)과 유(有)에 해당하는 태극(太極)이 같은 근원에서 나와 그 명칭이 달라진 것과도 같이. 그리하여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겨우 짐작이나마 해본다.

이 몸은 본래 주인이 없고
오온(五蘊)은 원래 텅 비었어라
저 칼이 내 목을 친다 해도
봄바람을 자르는 것과 다름없어라.

중국의 승조 스님이 재상 자리를 마다한, 왕명 거역죄로 처형될 때 읊은 노래다.
나는 운동장을 한 시간가량 반복해 돌며 특히 ‘무(無) 자’에 힘을 주어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를 외운다. ‘오온(우리 몸의 구성요소)은 원래 텅 비었어라’를 마음에 새기면서 그러나 오른발은 땅을 향해 굳건히 내딛는다. 현상으로서 색(色)이다. 왼발을 떼면서는 본체로서 공(空)을 또 생각한다. 나의 일보(一步)는 계속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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