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이상문
소설가

지난 9월에 4박5일의 말레이시아 출장이 있었다. 일정이 끝났을 때, 같이 간 직원들은 먼저 귀국했고, 나는 태국의 푸껫으로 떠났다.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인 그곳에서 쉬었다 오려는 것이었다. 마침 주말의 1박 2일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였다. 그것이 예전과 달라진 내 모습이었다. 8년 전까지였다면 당연히 직원들과 함께 귀국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었다면 출장길에 아예 아내를 동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혹 부부동반이 조건이었다 하더라도, 내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일로 여겼으리라. 우선은 몹시 부담스럽고 쑥스러웠다. 게다가 혼자서도 되는 일에 아내를 동반한다면, 회삿돈을 낭비한다는 생각까지도 했을 것이다.

1년에 두세 번 있는 해외 출장길은 늘 혼자였다. 그런데 늘 혼자 집에서 날 기다리던 그 사람이, 8년 전의 1월 12일 한낮에 느닷없이 이 세상을 마감해버린 것이다. 느닷없이라고 하면 엉터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십수 년 동안 당뇨병을 앓아 왔었고, 수도 없이 병원을 들락거렸고, 그러는 사이에 두 다리 중 하나를 의료쓰레기화 했었다. 더욱이 그로부터 두 달 전부터는 새벽의 구급차 신세를 진 뒤, 의식을 잃은 채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분명히 느닷없이였다. 그 사람이 다른 때에도 그랬듯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올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을 납골당에 맡겨놓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30년 동안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같은 처지의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현상이라고들 했다. 그 뒤에 잘 해주지 못한 일들만 줄곧 떠오른다는 것도, 언제까지나 그런 생각에 짓눌려서 살게 된다는 것도 그런 현상이라 했다. 한마디로 죄인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꼭 4년여를 산 뒤 아내를 맞았다.

그 사람에 대한 죄인. 그런 마음이었다면, 진정 그런 마음이었다면 왜 재혼을 결심할 수 있었는가. 그 이전에, 지인들이 이 여자 저 여자를 내게 갖다 댈 때 어찌 딱 잘라버리지 못했던 것인가.

위선적이었던가. 그래서 가증스러움을 숨기고 있었던가. 나는 그렇다고, 그 다그침에 확실히 수긍한다고, 두 무릎 꿇고 두 팔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이제 어쩌겠는가.

거기에 점입가경이었다. 그 사람에게 못 해 주어 죄지었으니, 이제부터라도 아내에게 잘해 주어 죄짓지 말자는 결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사람의 영혼이 있다면 이 논리를 어찌 생각할까. 이 무슨 피에로의 짓인가.

결국 다시 그 사람에게 죄를 짓겠다는 결심을 한 셈이었다. 그것도 굳은 결심을……. 그 사람이 아주 좋아했던 일들 가운데 한 가지가 여행이었다. 여름휴가 때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완행열차를 타고 나주를, 그것도 시가를 가는 일도 즐거운 여행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인색하고 또 인색하게 굴었던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는 함께 내 돈으로 같이 가고 싶은 곳들을 죄다 가보리라 했으니, 아주 인색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허허.

결심대로 해외 출장 때면 반드시 아내를 동반했다. 부부동반으로 참석해야 하는 곳이 아니더라도 같이 가서 따로 일정을 소화하곤 했다.

내가 인간이던가. 아니던가. 그때마다 나는 아내를 옆에 두고 그 사람을 생각했다. 어느새 그 사람이 찾아와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은 어디에 두고 엉뚱한 사람과 같이 돌아다니고 있는가. 속옷을 기워 입어가면서도, 당신의 그 까다로운 성격 속에 짓눌리고 찢겨 살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내 속이 소금물 한 항아리를 품은 것처럼 아렸다. 그 속을 아내에게 내보인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내 마음이 이런 지경으로 푸껫에 간 것이다. 리조트에서 아주 편안하게 지내면서 그동안의 수고로 쌓인 것들을 확 풀어버리고 돌아가자고 했다. 아내의 생활이 편안한 일보다는 불편한 일들이 더 많았을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원숭이 사원’에서 부처님의 열반하신 모습을 그렇게라도 뵌 뒤였다. 사실 매우 조악해 보이는 그 조상이 존경심을 일게 하기는커녕, 비난하는 마음을 갖게 해서 씁쓸했다.

그리고 그곳을 출발한 지 20여 분 뒤에 사고가 났다. 현지의 운전기사가 졸았던지 갑자기 달리던 밴의 방향이 길 밖으로 꺾이는가 했더니, 가드레일을 넘어 내려가서 야자수를 들이받고 선 것이다.

앰뷸런스에 옮겨 탄 나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의 오른쪽 눈두덩이 공처럼 부어오르면서 여기저기서 피가 솟고 있었다. 나 자신은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도 몰랐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내게 또 횡액이 닥치는가 했다. 아내마저 잘못된다면 나는 다시 어찌 되는가 했다. 그 때문에 오로지 아내가 걱정이었고, 정신이 없었다.

도착한 병원에서 일단 응급처치를 한 뒤에 이른바 큰 병원이란 곳으로 이송되었다. 나도 이마가 찢어지고 턱과 입안이 찢어져 있었다. 오른팔은 들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팠고, 두 다리의 정강이에서도 피가 솟고 있었다.

옮긴 병원에서 아내를 촬영실로 밀고 가서 머리를 비롯한 왼팔을 촬영했다. 제발 뇌에 이상이 없기를……. 왼팔은 재촬영까지 했다.

참으로 다행히 아내의 검진 결과가 내 바람대로 나왔다. 왼팔목 부위에 금이 가서 깁스를 댔고, 왼쪽 다리의 정강이를 꿰맸다.

아내는 입원을 했는데, 나는 아직 응급처치를 받은 그대로였다. 그랬으니 아내 병실의 보조 침대가 내 차례였다. 다음날 새벽에 두통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 상태였다. 그때야 나도 진료를 받고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곳 병원에 입원해 있던 토요일 저녁에서 수요일 저녁까지도, 그리고 돌아와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지금까지도 시시때때로 나를 무안하게 하는 생각이 있다.

내가 그때 왜 얼이 빠져 있다시피 했을까. 내가 그토록 아내를 사랑했던가. 그래서 아내를 깊이 걱정했던 것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젓는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한 행동이었다. 8년 전에 한 번 당한 것으로 끝내고 싶었던 고통이 있었다. 겁이 나고 또 겁이 났다. 만일 그 고통을 다시 당하게 된다면 살아갈 자신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았다.

사랑……. 다급할 때는 까맣게 잊히는 사랑을, 나 자신의 형평만 우려하는 이기심을 과연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내가 한쪽 팔에 깁스를 한 탓에, 요즘 나는 가끔 등을 밀어주어야 한다. 수줍어하는 아내의 알몸을 보면서, 왼쪽 허벅지 위쪽에 있는 완두콩만 한 검은 점을 새삼 발견하고서, 지난 4년 동안 살아온 아내가 이 사람이었던가 싶어진다.

“그 주어진 운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쓴 약을 깊이 울대로 삼키는 연습을 해나갑시다.” 했는데. 나는 시방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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