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수상 논문

1. 서론

근대불교 연구는 한국 불교학계에서도 그 연구 성과가 많지 않으며, 한국 근대사학계에서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근대 한국불교 연구에 가장 활동적인 학자 중의 한 사람인 김광식에 따르면 물론 그 이전에도 연구 성과가 있긴 했지만 “학문적인 입장에서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초반 이후”라고 한다.

근대불교에 대한 연구가 적은 것은 한국 불교학계보다 그 양적 질적인 면에서 앞서 있는 일본 불교학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오늘날 불교연구의 모델이 된 19세기 후반 유럽의 근대불교학이 현실불교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문헌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과거’ 역사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던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식민지 시기 일본을 통해 근대불교학을 받아들인 한국학계의 경우, 한반도 불교의 황금 시기로 알려진 신라(통일신라 포함)와 고려 시기의 불교에 특히 관심을 쏟아왔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 현실불교의 암울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보상이었으며, 낙후된 조선불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이러한 동력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 근대불교 연구의 희소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 한국불교 상황에서 비롯되는 일정한 제약 때문이 아닌가 한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이며, 조계종은 불교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의 창립자로서 지금도 동국대학교를 중심한 불교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0세기 초 시작된 근대불교와 조계종단과의 역사적 인과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조계종의 역사적 위상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해방 이후 소위 ‘비구-대처 간의 갈등’으로 알려진 종단 분규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채 정립이 되어 있지 않다는 현실적 이유 또한 근현대불교사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적은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근현대 한국불교사라는 주제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사실, 1990년 이후 근현대 한국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고 있는 것도 ‘현실불교’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가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난 과거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1970~80년대의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가 보였던 소극적 행태에 대한 반성적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 서구에서의 불교 붐에 영향을 받은 국내 지식인들의 불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현실불교가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평가가 1990년 이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불교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과 함께 불교의 사회참여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당초 종단 내부의 권력 다툼, 일부 승려들의 비윤리적 행태를 고발하고 시정하기 위해 출범하였던 재가자 중심의 ‘불교 바로 세우기’ 운동이 점차 출가교단에 대한 견제와 자정을 위한 상설기구 창립으로 이어진 것도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이러한 불교의 대사회적 기능의 문제뿐만 아니라 출가승단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수행 전통에 관해서도 또한 1990년대 이후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조계종이 최상승이자 정통불법이라고 자부하는 간화선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소승’ 전통으로 일축하였던 비파사나 수행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여 실제로 많은 출·재가자들이 태국이나 미얀마에 가서 수행을 하고 돌아왔다.

이후 도심 곳곳에 비파사나 수행을 위한 명상센터가 세워지고 있다. 당연히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 또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붓다의 ‘진짜 말씀’을 알고자 하는 욕구의 등장이다. 진정한 붓다의 종지를 잇는다고 하는 선불교가 역사적 산물임을 깨달으면서 선의 가르침 또한 불설(佛說)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상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현실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평가, 그리고 현실불교의 개혁에 대한 불교인들의 욕구가 점증하면서 근대불교사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증폭된 것이라고 본다. 필자 또한 근대불교가 전공 영역은 아니지만 최근 몇몇 논문과 비평을 통해 근대불교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며, 한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비판적 의견을 제출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 또한 ‘현실불교’에 대한 비판의식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새로운 연구자들이 등장하면서 근대한국불교를 바라보는 기존의 역사인식과 역사기술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근대한국불교에 대한 인식 틀의 변화가 요청되고 있다. 본 논문 또한 필자가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던 근대한국불교의 재평가라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간 근대한국불교에 대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해온 이가 바로 앞서 언급하였던 김광식이다. 김광식은 그 이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종합하는 한편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인터뷰 등을 통해 꾸준히 근대한국불교에 관한 논문과 저술을 출판해오고 있다. 김광식은 한국불교학계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전통 불교적’ ‘항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근대한국불교를 바라보고 있다.

근년에 김광식은 〈근대불교사연구: 회고와 성찰〉이란 논문에서 한국근대불교연구 성과와 동향을 1)항일과 친일 2)일본의 불교정책과 종단 설립 3)전통불교의 수호와 불교 대중화라는 세 가지 주제영역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주제 범주는 해방 후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매우 유효하고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근대불교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연구가 이 세 가지 범주에 포섭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근대불교를 바라보는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 가지 범주는 김광식을 포함한 한국불교학계 대다수 연구자들이 근대불교사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주요 모티프가 되어 왔다. 실제로 김광식은 이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이 세 가지 주제 영역을 적절하게 재배치하면서 한국 근대불교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고 있다.

근대불교는 불교 구성원과 종단의 정체성 찾기를 위한 노력(종단 건설, 전통불교수호)이었으며 동시에 불교가 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하면서 공동체에 기여하려는 활동(민족의식, 불교대중화)이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근대불교는 곧 식민지 상황하에서 전통불교 수호를 위한 항일불교이며 굳이 ‘전통’과 다른 면모라면 근대라는 새로운 종교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는 불교대중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 시기 한국불교가 보였던 다양한 모습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항일과 친일의 도식으로 수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현재의 조계종단을 근대불교의 당연하며 유일하게 가능한 역사의 귀결점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입장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불교에 대한 한국학계 일반의 단선적이며 목적론적인 역사해석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지적될 수 있다. 우선, 항일적 민족의식의 불교가 근대 한국불교 전체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주요한 한 모습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항일적 민족불교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불교수호라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는가? 항일적이면서 개혁적 불교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인가?

다시 말해 일본 총독부의 정치적 간섭에는 반대하지만 일본불교를 한국불교 개혁의 모델로 삼는 경우는 불가능하였던 것인가? 한편 항일적 민족의식에 기반을 둔 전통불교 수호가 근대불교의 귀결점이라면 근대기에 제기되었던 다양한 개혁프로그램들과 제안들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항일적 민족의식’과 ‘전통수호’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 어떻게 등치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조계종단이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 ‘전통’이 고대 인도로부터의 전통이 아니라면 조계종이 수호하고 있다고 말하는 전통은 도대체 어떤 전통인가?

흔히 말하듯 그것이 임제종이라면 그것이 어째서 ‘민족불교’인가?

김광식을 비롯한 지금까지 한국학계의 일반적인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은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근거하고 있으며, 항일적 민족의식과 전통수호를 통한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은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의 주요 모티프가 되고 있다. 이러한 모티프로 구성되는 근대한국불교에 대한 내러티브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일본불교의 한반도 진출에 맞서기 위하여 항일 민족주의 불교가 등장하였으며, 해방 후 식민지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을 교단에서 몰아내기 위한 정화운동을 통해 민족불교의 정통성을 잇는 대한불교조계종이 1962년 재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학계의 주류적인 내러티브는 최근 외국의 한국불교 연구자들에 의해 심각한 문제제기와 함께 도전을 받고 있다. 우선 박노자는 항일과 친일의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조선 승려들을 판단하는 한국학계의 역사인식에 대해 “한 시대에 유효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게임을 몰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를 묻는 식의 퇴보에 다름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마이카 아워백(Micha Auerback)은 최근 그의 한 논문에서 항일과 친일의 단순 범주화로 인해 “역사연구가 범죄수사 행위로 전락해 왔”음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한국학계의 근대불교사 연구가 결과적으로 “다른 역사적 시각들을 억압해왔으며, 이러한 이분법의 무비판적인 사용은 역사연구의 잠재력을 심각하게 훼손해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워백은 한 예로 조지 에본(George Evon)의 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소위 ‘친일불교론’에 입각한 근대한국불교사 서술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혼인한 승려와 독신 승려 사이의 반목에 대한 지배적인 역사기술에서는 승려의 혼인은 “열등하고” “청정치 못한” 불교 관행으로, 일본 식민 당국자들에게 “협력”으로, 자아의 상실과 이에 따른 “타자”에 의한 “타락”으로 무비판적으로 등치된다. 반면에 수도자로서 독신주의를 고수한 승려들은 국가와 민족을 지킨 것으로  회고 된다.

……식민지 시대에 관한 한 한국 불교 역사학의 현재중심주의적 허위는 바로 이 점, 즉 결혼에 반대하고 독신주의를 옹호하며, 타자인 일본에 반대하고 자아인 조선을 옹호하며, 타락에 반대하고 순결을 옹호하며, 협력에 반대하고 저항을 옹호하는 무조건적인 경향에 있다.

아워백은 한국 근대불교 역사학의 이러한 현재중심주의 혹은 ‘민족중심주의’가 내장하고 있는 ‘친일과 항일’이라는 단순한 범주를 비판한 후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친일’에서 ‘친근하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 ‘일본’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일본불교 아니면 총독부?” 이러한 문제 제기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친일과 항일의 단순한 이분법적 범주를 넘어서서 식민지 공간에서 벌어졌던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상호인터액션을 당시 상황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더 나아가 아워백은 ‘친일’을 규정하는 주요 내용으로서 ‘대처’가 곧 친일이라는 등식은 잘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불교단과 1920년대 조선 승려들의 대처논쟁을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한국불교에서의 대처화 경향은 일본 정부의 강제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당시 일본 불교인들이 전적으로 대처의 문제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경우조차도 1937년이 되어서야 승려의 대다수가 결혼을 하게 된다.

아워백의 실증적 연구는 승려의 혼인을 둘러싼 논쟁이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갈등이라기보다 전통적 계율에 대한 해석의 문제, 근대성과 관련한 불교의 사회적 역할, 사찰 운영에 관한 실질적 효율성의 문제 등에 집중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대처의 문제는 친일-항일의 문제가 아니라 계율과 불교의 사회적 기능을 둘러싼 전통주의자와 개혁주의자들의 논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근대불교 연구자들은 대처 문제를 ‘일본에 대한 협력’ 그리고 불교 전통에 어긋나는 파계 행위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하려는 ‘불가피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근대한국불교를 친일과 항일이라는 ‘현재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당시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편 아워백은 내가 다른 글에서 항일과 친일의 도식적인 이분법에 대해 ‘목적론적 역사해석’이라 비판하였던 것에 동의하면서 현재중심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현재중심주의가 가진 또 다른 문제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과거가 낳을 수 있는 유일한 결과라는 경직된 목적론이다. …… 유일한 현재만을 긍정하는 것은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한국의 정체성과 하나뿐인 정통성 있는 불교관행의 형태를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친일 대 항일’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이 학계 전반에 등장하고 있지만, 한국[학계]의 근대불교사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요컨대 ‘항일적 민족의식’과 ‘전통수호를 통한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이라는 근대불교 역사기술의 모티프는 무의식적으로 해방 이후 조계종이 등장하는 과정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조계종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조계종단의 성립을 근대한국불교의 완성으로 기술함으로써 식민시기 동안 한국불교의 다양한 근대화의 노력들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계종은 ‘근대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전통복고’를 지향함으로써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한 경우로서 근대불교와는 거리가 있다. 조계종의 민족주의적 자기 정체성은 20세기 초 이래 한국불교의 중요한 과제였던 근대적 개혁을 희생시킨 결과물로서, 어찌 보면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혼란기에 사용하였던 전술적 레토릭을 자기 정체성으로 전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근대한국불교사에 대한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을 대신할 새로운 내러티브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고에서는 박노자, 마이카 아워백 그리고 조지 에본 등의 비판과 지적, 그리고 나 자신이 근현대한국불교에 대해 발표하였던 그간의 논문들을 반영하면서 항일-친일의 이분법적 접근의 한계와 현재중심주의적 역사 기술의 오류를 벗어나, 새로운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한 시도로서 ‘딜레마’라는 관점을 통해 근대한국불교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항일-친일로 환원되지 않는, 근대한국불교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다 섬세하게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2. 근대한국불교의 딜레마

근대한국불교는 한마디로 ‘딜레마에 빠진 불교’였으며 그 딜레마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던 한국불교의 다양한 모습의 총체가 곧 근대한국불교사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이래 그리고 식민지 시기 동안 한국불교가 겪어야 했던 딜레마의 원천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일본의 종교가 불교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일본의 불교가 오랫동안의 침체로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한국불교에 비해 대단히 ‘선진된’ 불교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한국불교의 관계가 항일 혹은 친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늘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모색해야 했다는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식민자의 종교가 불교라는 사실 그리고 당시 일본불교의 선진성 때문에 한국불교가 근대기에 겪어야 했던 딜레마적 경험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일본불교와의 관계 설정의 곤란함에서 비롯하는 정체성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의 계몽적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한국불교에 대한 ‘양가적(兩價的) 인식’(ambivalent understanding of Korean Buddhism)에서 비롯하는 문제이다.

1)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의 딜레마

20세기 초 한국불교가 조선 오백 년간의 질곡에서 벗어나 비로소 활동 공간을 얻게 된 것은 1895년 일본 불교에 의해서였다. 1910년 이전 아직 항일적 민족주의가 일반화되지 않은 가운데 조선불교인들이 일본불교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본은 일종의 ‘해방군’이자 당시 조선사회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기독교라는 새로운 세력 앞에서 자신들을 외호(外護)해 줄 수 있는 우호 권력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국의 불교인들은 오랜 침체에서 벗어난 한국불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근대화’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신라 혹은 고려의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당시 국권상실의 위기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 또한 ‘문명개화’를 통한 근대사회로의 진입이었다. 따라서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전통적 종교인 불교가 근대적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선행 과제였다. 과학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불교는 스스로를 ‘철학’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당시 막 시작된 승려들의 교육 커리큘럼에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종교학, 역사학 등 근대의 여러 분과 학문들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기독교의 사회복지 활동에 자극을 받아 불교계 또한 병원 설립과 교도소 교화 등 여러 근대적 개념의 복지사업을 시행해보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새로운 사회에서도 전통적 종교인 불교가 유용할 수 있으며 근대와 공존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이런 모색과 실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통을 스스로 부정하는 과감한 개혁적 제안들도 등장하였다. 만해의 대처육식, 염불당 폐지, 근대적 승려교육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시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고 불교는 그 급변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자 하였다. 근대의 후발주자인 한국 불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와 일본불교는 경쟁과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종교의 사회적 유용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일종의 선진적 모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일본불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메이지 정부의 ‘폐불훼석’이라는 정치적 박해를 겪으면서 이른 시일 동안 천황에 충성하고 국가 이념에 봉사하는 국가주의 불교로 변모하였다. 한국불교인들은 이러한 일본불교의 정체성을 바라보면서 일본불교를 단순히 한국불교의 우호적 세력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1919년 3·1운동을 통해 첨예하게 드러난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더 이상 일본불교를 단순히 근대불교의 한 선진적 모델로서만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불교인들은 불교의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 못지않게 일본 불교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 근대불교의 두 가지 과제 즉 ‘근대적 유용성 확보’와 ‘정체성 확립’은 양립하기 어려운 상호 모순적 관계로 인식되게 된다. 당시 선진적 근대불교의 모델로 인식되었던 일본불교를 따르자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잃게 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근대적 유용성’과 ‘정체성’이란 과제는 상호배타적 관계로 인식되고 실제 실천의 현장에서 두 과제에 대한 절충과 조화의 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지속적 형태의 운동으로 이어지기에는 내적 추동력이나 구체적 방향성이 부족하였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근대적 유용성을 추구하면서도 일본의 국가주의적 불교와 구별되는 한국적 근대불교의 모델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한계적 상황에서 그러한 제3의 모델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리라 생각된다. 지난 오백 년의 질곡이 너무 깊었으며 당시 불교계의 인재와 재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식민자인 일본의 종교가 불교라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 조선불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매우 복잡한 함수의 정치적·사회적 역학구도 속에 조선불교가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 식민지의 경우처럼 식민자의 종교와 피식민자의 종교가 다를 경우 피식민지의 전통종교는 ‘저항’과 새로운 민족담론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러한 역할을 불교가 아닌 기독교가 맡게 되었다. 일본의 반기독교적 정서 그리고 일본 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견제 정책 속에서 기독교는 조선민족과 마찬가지의 ‘억압받는’ 처지에 있다는 연민과 공감을 얻기 쉬운 위치였으며, 이러한 정서 가운데 기독교는 외래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민족담론의 주요한 발신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근대불교 연구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일본불교를 한국불교인들의 일차적 ‘타자’(他者)로 설정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 불교인들의 상황 인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불교인들 처하고 있던 상황은 일종의 딜레마적 상황이었다.

20세기 초 이래 위기적 상황에서 한국의 엘리트들은 ‘국가(state)’가 아닌 ‘종족(ethnic)’에 기초한 민족개념을 사유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역사, 종교, 언어는 민족을 정신적으로 사유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극히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불교에 있어 두 주요 과제인 ‘근대화’와 ‘정체성’이 상충되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 ‘문명개화’와 ‘민족주의’의 문제 또한 서로 대립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앙드레 슈미트(Andre Schmid)가 그의 책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문명개화와 민족주의는 20세기 초 한국의 지식인들에 의해 하나의 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변용되고 재구조화될 수 있었다.

즉 ‘국가’라는 형(形)이 없는 가운데 ‘종족’(ethnic)을 중심한 민족개념을 사유해야 하는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에서 역사, 언어, 종교 등 민족의 구성요소를 통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민족주의는 ‘자강(自强)’을 위한 문명개화 담론과 적절하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종교가 아니라 서구종교이지만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민족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민족종교론은 당시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당시로서 문명개화, 신교육과 여성교육, 그리고 민족담론의 주 생산지였다. 근대 초기 그리고 식민지 기간 동안 기독교는 잠재적으로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독교는 분명 외래 종교였지만 식민자들의 종교와 다를 뿐 아니라 식민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민족종교로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는 달랐다. 식민자인 일본의 종교가 불교였으며, 당시 일본불교는 아시아의 전통적 불교국가에서 가장 성공적인 불교의 근대적 모델이었다. 재가 지식인들이 불교의 중요 구성원으로 등장하였고 대학에서 불교를 근대학문의 하나로서 가르치고 있었으며, 포교의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도 사회복지를 포함하는 등 ‘전통불교’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근대화된 불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근대화’와 ‘일본불교’를 떼어 놓는 것도, 그렇다고 민족주의와 근대를 함께 결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에 있어서 ‘근대’란 곧 일본불교를 매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처’의 문제가 핵심적 사안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이다. 한국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혹자들은 ‘대처’의 문제를 일본불교의 정체성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불교의 한 근대적 모습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대처’가 일본적 불교의 핵심적 정체성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일본불교의 근대적 모습에서 ‘대처’만 제외한다면 일본을 모델로 불교를 근대화하면서도 일본불교와 스스로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백학명이나 백용성과 같은 ‘보수적 개혁운동가’들의 입장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처의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문제들 특히 도심포교, 승려 교육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불교의 근대적 모습을 굳이 배척하지 않았다. 한편 ‘대처’의 문제를 일본불교의 정체성이라고 보기보다 근대화된 불교의 한 모습이라고 보는, 보다 유연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대처’는 근대화를 위하여 필요한 변화이며, 굳이 일본적 정체성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만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만해에게 있어 대처는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변화이며 그것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해치는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만해는 일본불교의 문제가 그 국가주의적 성격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더 긴요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정교분리에 대한 주장은 바로 이러한 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만해의 민중불교론 혹은 불교대중화론은 한편으로는 협의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불교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승려 중심의 불교에서 대중(즉 대처) 중심의 불교로 전환함으로써 불교의 근대적 모습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만해의 입장에서는 대처가 곧 일본불교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교분리를 통해 정치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움을 획득하여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대처라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해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상당한 통찰력이 있는 관점이었지만 대처불교를 곧 일본불교라고 보는 당시 조선 승려들의 통념을 깨고 불교계의 일반적 동의를 구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당시 많은 엘리트 승려들(특히 일본과 유럽 등지의 유학승들)이 대처와 육식을 하였던 것을 두고 왜색과 친일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해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만 당시 상당수의 승려들은 대처와 육식을 불교 근대화의 한 필요조건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한 예로 많은 일본 유학승들이 대처와 육식이라는 일본불교의 한 근대적 모습을 따르긴 하였지만 일본불교로 개종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대처와 육식을 곧바로 왜색불교 혹은 친일불교와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도 대부분의 국내 연구들은 대처를 ‘친일불교’의 실천으로 보고 1913년 식민지 정치권력을 통해 ‘대처’를 제도화하고자 했던 만해와 3·1운동에 앞장섰던 만해의 행위를 각각 친일적 행위와 민족주의적 행위로 서로 모순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대개는 “일본불교의 침략적 정체를 몰랐던 만해가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다”는 식으로 만해의 생애를 일종의 발전사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처의 문제를 두고 근대한국불교의 대표적 개혁주의자들의 의견이 양분되었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 근대불교사를 통해서 ‘근대화’와 ‘정체성 확립’의 두 가지 과제는 양립하기 어려운 상호 모순적 관계로 인식되게 되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일 수도 없었다. 당시 선진적 근대불교의 모델로 인식되었던 일본불교를 따르자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잃게 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이 대립적으로 설정되는 이런 딜레마적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불교는 1936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총동원체제에 휩싸게 된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거나 다양한 형태로 협력하는 등 소위 친일의 문제가 핵심적 사안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이제 총동원체제하에서 한국불교에 있어 근대적 유용성이냐 정체성이냐의 고민은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가운데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해방을 맞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식민지라는 상황하에서 대립적 관계로 설정된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의 문제가 해방 이후 1960년대에 들어와서 ‘왜색불교’ 대 ‘민족불교’의 문제로 단순화되는 과정이 곧 현 조계종단의 성격과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흔히 비구−대처의 갈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소수파와 다수파의 갈등이었다. 해방 후 한국불교계의 주류는 대처제도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처와 비구를 함께 종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자는 입장이었다.

그 다수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포교(대처)와 수행(비구)의 제도화를 통해 20세기 초 이래 한국불교의 두 과제인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적 정체성’을 이루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비구승만으로 구성된 소수파에서는 당시의 ‘반일정서’를 등에 업고 왜색불교 추방이라는 미명하에 다수파를 종단에서 몰아냈다. 대처불교가 곧 일본불교이며 비불법이요 불법을 훼손하는 불교라는 것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당시 소수파 비구승들의 신념이었다.

그들은 일본불교로부터 구별되는 한국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그것이 곧 샤키야무니(Shakyamuni) 이래의 정통 불법을 유지하는 것이며 1,600년 ‘민족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20세기 초 이래 끊임없이 한국불교의 주요과제가 되었던 불교근대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계종단의 공식명칭이 ‘대한불교조계종’이라 하여 불교 종단의 이름에 국호(國號)가 부가된 것도 이러한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교적 근자에 이르기까지 조계종단이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근대화보다는 ‘정통 불법의 수호’라는 다소 초역사적인(어쩌면 몰역사적인) 자기정체성에 집착하는 것 또한 조계종단 성립의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적 정체성’과 ‘근대적 유용성’의 두 과제가 민족불교 대 왜색불교의 구도로 왜곡· 변질되는 과정에서 조계종은 전통복고의 길을 택함으로써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정통 불법의 수호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근대적 유용성을 모색하던 한국 근대불교의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은 친일과 민족, 혹은 파계 대처와 청정 비구의 대립적 구도하에서 역사의 전면에서 일단 사라졌던 것이다.

2) “화려한 과거와 우울한 현재”

한편 근대 한국불교가 경험하였던 딜레마는 일본불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의 계몽적 민족주의 지식인(self-Proclaimed nationalist intellectuals)들의 한국불교에 대한 ‘양가적(兩價的) 인식(ambivalent understanding of Korean Buddhism)’ 때문에 겪어야 하는 딜레마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20세기 초 국권상실의 위기적 상황에서 한국의 엘리트들은 ‘국가(nation)’가 아닌 ‘종족(ethnic)’에 기초한 민족 개념을 사유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역사, 종교, 언어는 민족을 정신적으로 사유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극히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역사 부문에서는 단군이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하였다. 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주된 과업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우선 청산해야 할 주된 문화적 잔재는 직전의 전통이었으며 그것은 주로 중국의 문화적 유산이었다.

개신유학이 개량을 추구하고 문명개화와 ‘단군’을 통해 민족담론의 주도권을 가지려 한 것도 이러한 중화의 해체와 중국문화 유산을 청산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는 ‘외래종교’로 간주되었으며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학의 범주에서도 제외되고 있었다. 오백 년간의 질곡에서 막 벗어난 불교는 근대에서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소외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당시 새로운 지식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한 개신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전통적 편견도 작용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식민자들의 종교가 불교였다는 사실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기독교는 반사적 이익을 얻고 있었다.

1908년 12월 13일 자 〈대한매일신보〉에서 당시 불교계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적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비판의 요지를 현대 한글로 재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시대사조를 자각하고 승려교육에 나서는 자들이 간혹 있으나, 그 내용을 보면 서산과 사명의 구국종지를 갖추어 후진을 개도하는 자는 적고 오늘의 시세에 따라 일본어 통역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조선]승려의 수치요

2) 혹 몇몇 승려가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여 종문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나 일본 승려들과 같이 동서고금의 철학을 섭렵하여 불교의 새로운 면목을 일신하는 자는 없으니 [조선] 승려의 수치요

3) 일본 승려의 포교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승려들이 없을 뿐 아니라 일본 승려들에게 설법을 청하는 자 많다고 하니 이 또한 조선승려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4) 조선 승려 여러분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첫째 불교 본래의 구세주의를 잊지 말고 둘째 한국불교 특색의 국가주의 정신을 잃지 말 것이며 셋째, 새로운 세계의 지식을 수입하여 일체의 사업을 외국승려에게 양보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깊은 산사에 머물며 선의 맛(禪味)을 홀로 맛보며 자신의 일신만 천당에 머무르게 하려는 자는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바라 곧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명과 서산의 호국승병 활동에 대한 강조는 불교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교계 바깥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신문에서 불교계에 대한 요청 혹은 질타는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요컨대 불교계가 ‘구국’을 위한 민족주의적 애국정신과 문명개화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당시 등장하는 불교계 단체의 각종 취지문을 보면 ‘애국정신’을 강조하고 ‘국부민강’이라는 국가에 대한 불교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919년 상해에서 있었던 대한승려연합회의 독립선언서에서도 이러한 내용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김광식은 대한승려연합회의 독립선언서 내용을 분석하면서 불교계 내부 즉 대승불교의 구세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불교대중화’의 흐름과 불교계 외부의 요청인 민족독립이라고 하는 국가주의적 사명을 불교계가 수용함으로써 한국 근대불교의 주된 흐름인 ‘민족불교론’으로 발전하였다고 서술한다. 김광식에 따르면 민족불교론은 구세(救世)라고 하는 불교 본래의 교리와 민족 독립이라고 하는 국가주의적 역사적 사명을 결합으로써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제안하고 실천한 주요 인물로서 한용운을 들고 있다.

김광식의 이러한 관점은 근대불교를 전통 수호의 항일불교로 이해하는 평소 그의 관점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첫 번째, 김광식 본인이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민족불교론’으로 수렴하여 민족불교를 구성하는 한 내용으로 규정함으로써 불교대중화가 함의하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광식 자신도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하면서 대처육식과 같은 문제는 “승려 중심 불교에서 대중 중심으로의 전환에 부수적으로 나오는 딜레마적인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대한국불교가 추구하였던 두 과제, 즉 한국적 정체성과 근대적 유용성이 안고 있던 본질적이며 지속적인 딜레마라고 봐야 한다. 불교 대중화는 전통에 속하는 불교가 새로운 종교 환경에서 반드시 실현해야 할 불교근대화의 노력이지만, 동시에 일본과 구별되는 혹은 반대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와 긴장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두 번째 ‘민족불교론’의 문제가 당시 사회의 불교계에 대한 ‘요청’이라는 해석의 문제이다. 김광식은 당시 신문 기사와 논설 등을 분석하고 ‘국가주의’ 혹은 애국정신이 불교계에 대한 당시 사회의 요구와 요청이라고 보고 그러한 요구에 불교계가 부응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김광식이 인용하고 있는 기사와 논설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비록 ‘요청’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실은 당시 불교계의 현실을 질타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의 내용이 그러한 요청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서의 선언적 내용일 뿐이다. 선언적 내용과 구체적 실천은 다른 문제이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불교의 근대화 노력 즉 불교대중화의 과제와 일본에 저항하는 국가주의적 애국의 문제는 쉽게 결합되기 어려운, 근대한국불교가 안고 있던 지속적인 딜레마였다. 요컨대 불교계는 당시 한국지식인들의 요청인 문명개화와 국가주의적 애국정신을 잘 알고 그에 부응하려고 하였지만, 불교계가 처한 특수한 상황−식민자의 종교가 불교라는 사실−하에서 ‘선언’ 이상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한편 당시 지식인들의 불교에 대한 입장과 요청이 일관된 것도 아니었다. 문명개화라는 입장에서 불교가 근대화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지만 동시에 불교가 한국적인 어떤 것을 상징하는 ‘전통’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입장도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불교를 ‘외래종교’로 간주하고 조선학의 범주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전통 유지’의 기대가 반드시 불교의 근대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의 적극적 근대화를 주춤거리게 하는 효과는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통 유지’의 입장이 당시 불교계로서는 반드시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조선불교인들은 그들의 시대를 일종의 ‘회복기’로서 이해하고 있었으며 신라나 고려불교의 소위 ‘황금시기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에 맞는 새로운 불교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의 불교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당시 한국지식인들의 ‘전통 유지’와 ‘불교근대화’라는 ‘양가적 불교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남선은 1928년 《불교》 잡지에 기고한 〈묘음관세음〉이란 글에서 자신과 불교의 오랜 인연을 밝히고 있는데, 다음에 인용하는 한 대목에서 우리는 일본 근대불교를 바라보는 당시 조선 계몽지식인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성동(成童)의 해에 일본으로 가매, 차차 서양의 철학책을 접하고, 한편으로 불교의 철학적인 것을 알게 되고 또 불교가 산간적(山間的)의 것으로만 여겼더니 세간적(世間的) 활동과 문화적 교섭이 어떻게 큰 것을 일본의 교황(敎況)에서 관감(觀感)하게 되어, 불교에 대한 흥미는 부쩍 늘었습니다. 그 전에도 서구인의 철학적 교상적(敎相的) 저서를 상해 광학회(廣學會)에서 나온 한문 저술로써 얼마간 봤었지만, 그네가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는 까닭에, 또 당시까지의 불교에 대한 서구인의 이해가 깊지 못한 까닭에, 거기서 보이는 불교는 이전 우리가 허무적멸(虛無寂滅)이란 말로 배격하던 범위를 벗음이 그리 크지 못하고, 더욱 비세간적, 비활동적 결함을 지적하였음에, 그러면 섭섭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하였더니, 불교란 반드시 은퇴적 명잠적(冥潛的)의 것이 아님을 일본에서 실관(實觀)한 것이 그때에는 퍽 든든하였으며, 더욱 당시에 활약하던 여러 학장(學匠)들이 불교의 철학적임을 고조함에 대하여 은근히 큰 감격을 느꼈습니다. ……그때의 생각에는 철리적(哲理的)으로 서양의 그것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 크게 든든한 생각을 주었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우리가 불교에 대한 태도는 좋게 말하여도 사변적 만족, 지식적 완미이었지 신수(信受)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성동(成童)의 해”는 최남선이 15세가 되던 해로서 와세다에서 유학하던 1906년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겉으로는 불교를 바라보는 최남선 자신의 인식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행간에는 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의 불교가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최남선이 불교가 서양 사상과 견줄 만한 철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근대사회에서 중요한 문화적 종교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일본불교를 통해서이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 최남선이 근대사회에서 불교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한국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당대의 조선불교를 비판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이후 자신이 경영하던 신문관을 통해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그리고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 등을 발행하는 등 당시 불교계가 근대적 학문체계를 갖추어 나가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자신도 다양한 접근을 통해 한국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불교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는 한국문화를 이해하고 한국문화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불교연구가 필수적이라고까지 한다.

불교적 교양을 가짐이 아니면 조선의 문화를 이해치 못할 것을 알았으며, 더욱 국조 단군에 관한 소전(所傳)이 불교 중 저술에 있어서 종종(種種)의 문학상 의현(疑眩)을 야기하므로 이 정체를 알기 위하여는 아무것보다 먼저 불교 지식을 수양해야 할 필요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전통문화의 일부로서 불교를 바라보는 것과 당대 현실불교를 바라보는 것이 같을 수 없었다. 현실불교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에는 아무래도 근대 일본불교의 선진적인 모습, 즉 “세간적(世間的) 활동과 문화적 교섭”이 크며 서양의 철학적 체계와도 견줄 만한, 그 일본불교와 당시 후진적인 조선불교의 현실이 겹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화 건설’에 앞장서지 못하는 조선불교에 대해 최남선은 다음과 같이 질타하고 있다.

시방까지 조선의 문화가 불교에 신세 진 것이 많음은 가장 명백한 사실이다. 외래한 사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문화적 약진(躍進)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무래도 불교를 그 으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략…… 현재와 장래의 조선 문화가 불교에 기대할 것은 과거의 그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금일 조선의 불교와 불교도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부담과 위촉을 할 수 있을까? 그네들의 축 처진 어깨와 느른한 팔뚝이 과연 얼마만큼의 부담과 책임을 우리의 신문화 행정(行程)에 나누어 맡을까? 세계가 온통 불교화할 운회(運會)가 당래하였다고도 할 만한 이때에, 불교 그것을 침폐(沈蔽)와 해색(嗨塞)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남 아닌 불교도 자신임은 대체 어떠한 인과(因果)인가? 망칙한 것은 더욱 조선 금일의 불교도라고 할밖에 없음을 우리는 슬퍼한다.

교리상으로는 조선불교가 전불교(全佛敎)의 중에서도 특수한 지위와 탁월한 가치를 향유하게 되고, 문화적으로는 불교 유입된 이후의 조선의 문화란 것이 온통이 불교적이고 말게 된 것이다 실상 심상(尋常)과 우연이 아니다.

위의 글에서 “세계가 온통 불교화할 운회(運會)가 당래하였다”라고 하는 불교 현황에 대한 최남선의 언급은 곧 근대일본불교를 바라보는 최남선의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조선불교의 현실에 대한 최남선의 평가는 “축 처진 어깨와 느른한 팔뚝”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당시 조선불교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남선의 이러한 평가는 공정한 평가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500년의 침체기를 막 지나 이제 겨우 근대라는 출발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불교는 비록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당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 신흥종교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의 한국기독교를 기독교의 원산지인 서구 기독교의 교세와 비교하는 것이 온당치 않은 것처럼 당시 근대불교의 선진적 모델이었던 일본불교와 한국불교를 비교한다는 것은 온당한 것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계몽적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조선불교는 선진적인 일본문화에 대한 열등감의 원천이었으며 이는 곧 조선불교에 질시와 혹독한 비판의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이는 불교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식민자의 종교가 불교인 데서 돌아오는 또 다른 불이익이었다.

최남선이 윗글에서 “조선불교가 전불교(全佛敎)의 중에서도 특수한 지위와 탁월한 가치를 향유”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관심이 ‘지금’의 한국불교가 아닌 ‘과거’의 전통불교로 돌아가는 것은 민족의 문화적 자존심을 확립해야 하는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 동안 한국의 지식인들은 거북선, 인쇄술, 도자기, 팔만대장경 등 과거의 ‘전통’을 통해 지금의 초라함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받고 민족적 프라이드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처럼 과거의 불교를 통해 지금 일본 근대불교와 조선불교의 격차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받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 당시 조선불교계로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화려한 과거를 이야기하면 할수록 현재는 더욱 우울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보면 식민주의에 협력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의도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화려한 과거가 현재를 극복하는 원천이 되기보다 현재의 정체성(停滯性)을 더욱더 부각하게 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화려한 과거’에 몰두한 나머지 ‘우울한 현재’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부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부터 도피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근대 일본불교와 비교하면서 문명개화의 대열에 조선불교가 적극 동참해주기를 요구하는 한편 불교가 조선적인 어떤 것을 상징하는 ‘전통’으로 남아주기를 원하는 계몽지식인들의 요구는 불교계로서는 곤혹스러운 것이었으며, 일종의 모순된 요구였다. 불교는 식민자인 일본의 종교이면서 피식민자인 조선의 중요한 과거 전통의 하나였다. 한편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전통이 부정되거나 재구조화되는 가운데 조선불교의 정체성(正體性)을 ‘현재’가 아닌 ‘과거의 황금시기’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식민자인 일본의 지식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목적은 달랐다.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를 위시한 일본 학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조선의 현재 불교는 정체(停滯) 자체였으며 곧 개선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과거불교의 황금기를 찾아내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현실불교를 개선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규정하는 데 긴요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라불교’를 조선불교의 황금기라고 찬양하고 칭찬하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신라불교 예찬’은 조선 지식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과거의 황금기를 통해 지금의 초라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과거의 찬란함을 통해 지금의 초라함에 대한 심리적 보상과 민족적 프라이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었다. 최남선이 불교를 통해 ‘조선적인 것’을 찾고자 하고 〈조선불교: 동방문화사상(東方文化史上)에 있는 그 지위(地位)〉라는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에 있어 한국문화가 일본문화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을 증명하려 한 것도 모두 그러한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그러한 점에서 일본과의 비교우위를 증명하는 데 다른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유산에 비해 더 적합한 사례였다. 신라의 불교가 과거 동아시아불교의 중심에 있었고 일본 교학불교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의 불교는 한국이 건네주었던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최남선의 〈조선불교: 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Korean Budd-hism and Her Position in the Cultural History of the Orient)는 1930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불교청년회의에서 발표할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그 부제 ‘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가 함의하고 있듯이 세계불교사의 맥락에서 한국불교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진 논문이다. 그에 따르면 반도라는 특수한 지리적 위치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사상의 결론이며 종합으로서 그 정점에 원효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논지는 한국불교가 ‘고착성’과 ‘비독립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중국불교의 축소판이라고 보고 있는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 등 당시 일인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지만 그 접근의 방식은 당시 한·중·일 근대불교학의 일반적 흐름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동아시아 불교사를 자국(自國)불교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다. 최남선이 한국불교를 현재가 아닌 ‘과거’를 통해 주로 고찰하면서 ‘결론불교’이며 ‘종합불교’라는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불교계에서는 현재를 중심으로 일본불교가 불교의 종합이자 완성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일본학계의 관점은, 동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만이 세계불교학계와 소통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당시 세계불교학계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었다.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는 그의 책 《불교철학의 정수(The Essentials of Buddhist Philosophy)》의 서문에서 “그러므로 각 종파를 총망라하여 불교철학의 전모를 드러내는 유일한 길은 일본의 불교를 개괄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불교 문헌의 전부, 즉 삼장(三藏)이 보존되고, 연구되는 곳이 일본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책의 편집책임자였던 윙칫 찬(Wing-tsit Chan)과 찰스 무어(Charles A. Moore)는 공동으로 쓴 편집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일본불교가 너무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카쿠스 교수가 말하고 있듯이 일본에는 “불교의 모든 것이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불교가 대중의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는 사실에서 그것은 당연하고 어쩌면 불가피하기도 하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이러한 관점이 당시 세계불교학계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최남선과 다카쿠스 준지로의 관점의 차이는 곧 ‘과거’와 ‘현재’의 차이이다. 다카쿠스 준지로가 일본불교의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 데 반해 최남선은 한국불교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최남선은 결코 의도하거나 바라는 바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불교가 근대적 개혁이라는 현재에 몰두하기보다 과거, 그것도 화려한 과거에 몰두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과거’를 강조할 경우 근대적 개혁을 강조하는 경우와는 달리 ‘민족적 정체성(正體性)’이라는 딜레마에 봉착할 위험도 없었다.

최남선을 비롯한 당시 불교계 주변의 이러한 입장과 태도는 당시 대단히 열세에 있었던 조선불교계가 근대적 개혁으로 과감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종교가 ‘불교’가 아니었더라면, 또는 차라리 한국불교에 ‘화려한 과거’조차도 없었더라면 근대불교를 향한 조선불교인들의 발걸음이 머뭇거림 없이 좀 더 가볍지 않았을까?

3. 결론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따르면 조계종단은 근대한국불교의 ‘완성’이며 ‘결론’이다. 일제의 억압적인 동화정책에 맞서 정통불교와 민족불교적 정체성을 지켜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역사기술은 근대한국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항일-친일’의 이분법적 구도로 단순화함으로써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근대한국불교의 다양하며 복잡한 전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고 있으며, 근대기 제기되었던 다양한 불교 개혁프로그램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김광식은 그의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에서 불교 내부의 요청인 ‘불교대중화’와 당시의 사회적 요청인 ‘민족운동’, 이 두 가지를 불교가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을 ‘민족불교론’이라고 이름하고 이를 한국 근대불교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결론지으면서 민족불교론의 역사적 성격과 불교사상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때문에 민족불교론은 불교의 보편성(교리, 사상)을 띠고, 근대불교에 부여된 역사적 사명(민족운동, 독립운동)을 구현하며,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논리, 고뇌인 것이다. 그래서 민족불교론은 불교의 교리 및 사상에서 결코 이탈하지 않고―대승불교의 근대적 변용을 실천하며,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으려는 근대 불교도의 정체성 재정비의 산물이라 하겠다.

김광식은 이러한 ‘민족불교론’의 대표적 실천자로 만해 한용운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세계불교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만해의 불교개혁론과 동아시아의 근대불교를 바라보는 시대 인식을 ‘민족불교론’이라는 틀로써 담아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한편 김광식은 그의 다른 글에서 ‘친일’ 문제가 근대불교 객관적 연구의 한 ‘장애물’임을 인정하고 “현재적인 기준을 갖고 이전 불교사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아워백이 비판하고 있는 ‘현재중심주의’ 그리고 내가 지적하고 있는 ‘목적론적 역사이해’의 위험성을 김광식 또한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한국불교를 민족불교의 형성 과정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입장,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은 여전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민족불교론’은 근대 한국불교가 처했던 복잡한 딜레마적 상황을 항일과 친일이라는 도식적 이분법으로 환원시켜버릴 뿐 아니라 다양한 근대적 개혁의 노력들을 역사적 공간에서 사라져버린 것으로 무화시켜 버린다.

조계종단은 근대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전통복고’이며 반근대적 성격의 종단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역사 기술은 조계종단의 형성 과정을 ‘민족불교’의 이름으로 근대불교사의 중심축에 놓음으로써 20세기 초 만해를 비롯한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제안하였던 개혁프로그램들을 역사적 돌출 사건으로 처리할 뿐 ‘현재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한다.

본고에서 제안하는 근대한국불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내러티브로서 ‘딜레마’는 식민시기라는 경험 속에서, 항일과 친일 그리고 항일적 민족주의의 구도 속에서, 잘 포착되지 않았던 근대한국불교의 다양한 모색과 고민들을 이해하고, 여기에 일정한 역사적 좌표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199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종단 개혁과 불교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요구에 대해서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20세기 초 이래의 연속적인 근현대 한국불교사를 기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항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역사 이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대기 특히 식민시기 동안 다기 다양했던 불교계의 모색과 시행착오를 ‘딜레마’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환원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딜레마’는 근대 한국불교사 전체를 조망하는 하나의 틀이며 상황을 이해하는 구도일 뿐, 근대기 동안의 불교와 관련된 개인의 삶이나 개별적 사건 하나하나를 ‘딜레마’의 관점으로 이해하거나 또 그 산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딜레마적 상황 속에서도 개인은 항상 어떤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개인의 ‘선택’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러한 역사적 이해의 배경으로서 당시 한국불교가 처했던 상황을 딜레마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민족문화연구》 53호(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2010. 12)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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