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속의 예술, 예술 속의 불교

1. 영화와 불교의 만남

1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영화와 2,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불교가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욱이 대중문화와 관련한 현대 산업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영화와,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를 두라고 할 것 같은 불교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2,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불교는 인도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불교의 모습으로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상대의 수준에 맞게 설법을 펼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대가이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였다는 사실에서 이미 예상된 결과였다. 그렇다면 과연 21세기 한국의 사정에 맞는 불교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21세기 한국을 볼 때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강력하다. 라디오와 TV를 운용하는 공중파 방송을 시작으로 수십 개의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 셀 수 없는 만큼 많은 양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생산되고 있으며, 매체 수만큼이나 많은 새로운 대중문화 스타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청소년의 장래희망 1순위에 연예인이 차지한 지가 이미 오래다. 그리고 특정 대중매체에 한 번 등장한 일반인이라도 인기 정도에 따라 매체를 바꿔가며 소개되면서 방송인이라는 이름의 신종 연예인이 되어 유명세를 탄다. 대중매체에 등장한 식당은 누구나 찾아가 먹어봐야 하는 맛집이 되며, 인기 있는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된 장소는 누구나 찾아가 봐야 하는 명소로 탈바꿈한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강력해질수록 불교를 포함한 종교의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대중문화는 대중문화 소비자가 종교에 관심을 둘 짬을 주지 않고 감각적인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서 받아야 할 위안과 평화를 대중문화 스스로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민이 있는 사람은 이제 공동체의 어른이나 종교 성직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송국에 사연을 보낸다.

그러면 선망하는 연예인이 즉각적인 해답과 위로의 말을 주고 적절한 음악을 들려주며 고민을 해결해준다. 울적한 마음을 블로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적어 놓으면 수많은 방문자와 팔로어가 격려의 댓글을 달아준다.

그러므로 21세기 한국의 사정에 알맞은 불교는 대중문화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대중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분야를 외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영화와 불교의 점점이 생긴다.


2. 불교를 다루는 영화인가, 불교가 구현된 영화인가

영화와 불교의 만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영화에서 단편적인 소재로 불교 요소가 등장하는 경우이고, 다른 한 가지는 본격적으로 불교 용어와 불교 소재를 전면으로 드러낸 직접적 불교영화의 경우이다. 하지만 두 가지 경우 모두 현재까지는 불교와 영화가 제대로 만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불교를 소재로 채용한 경우에는 선명한 주제의식 속에서 채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불교의 이미지를 채용한다. 그러다 보니 왜곡에 가까울 정도로 불교가 드러난다. 스님의 모습이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길흉화복을 점쳐 주거나 주술처럼 비치는 진언을 통해 상황을 해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불교는 정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마치 미신을 신봉하는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이미지나 세상과 동떨어진 은둔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직접적인 불교영화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주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 사상을 얼마나 잘 구현해 내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일반적인 불교영화 구현 방식인 인물의 전기를 다루는 경우, 인물의 사상이 구현되는 설정이나 장치가 없이 단선적이고 일대기적으로 묘사됨으로써 기본적인 대중 미디어로서의 흥미를 잃게 하는 것은 물론, 자칫 그 인물을 오해하게 하는 경우까지 있다. 경전이나 설화를 소재로 하는 경우는 경전과 설화에 담긴 신화적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지 않고 묘사되어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경전과 설화에 담긴 사상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불교영화에 등장하는 인물형은 출가자가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출가 동기는 한결같이 세속에서 실연하거나 다른 인물들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피의 방법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현재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동승이 주요한 제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속 동승은 모성을 향한 그리움으로 형상화되어, 굳이 동승일 필요 없이 일반 아이로 그려내도 관계없는 설정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효 스님과 경허 스님을 모델로 한 막행의 설정이다. 깨달음 이후의 자유로운 경지라는 정확한 주제의식이나 표현 양식이 아니면 영상으로 보이는 막행만이 두드러지게 각인될 위험성이 높다. 막행의 양상에서 나타나는 여성 출가자에 대한 성폭력이나, 출가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여성 등 불교영화에는 성차별 요소가 담겨 있는 경우까지 있다.

무엇보다 불교영화라면 불교 사상을 구현해내는 주제 의식이 특히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영화를 표방한 영화들이 아직은 기독교적 설정이 들어 있다거나 정확하게 불교의 가치를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불교와 영화를 만나게 하는 방법이자 전략이다.

아무리 불교를 문화콘텐츠로 바라본다고 해도 정확하지 않은 불교 정보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며, 많은 대중에게 불교를 전달하려고 한다면 더더욱 정확하게 불교의 지향점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와 영화의 접점은 단순히 불교를 소재로 하는 데서 머물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불교를 구현하는 일까지 나아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어법에 녹아들 수 있는 또 다른 문화적 코드로서 불교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이미 〈불교와 영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제대로 된 불교영화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에 그치면 안 되고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21세기에 맞게 불교를 전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관객과 소통하여 관객이 극장을 찾게 해야 하는 영화의 기본적인 역할을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 불교 신자도 일반 영화와 불교영화를 앞에 두고 불교영화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데 일반 관객들이 불교영화를 선택할 리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불교적 소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불교적인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불교영화여야 한다.

그리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일반 영화나 방송 등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불교 코드’를 마련해 주는 일” 즉 “일종의 ‘불교 매뉴얼’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은 〈불교와 영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의 연장선에서, 불교 인물형에 초점을 두고 이러한 ‘불교 코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3. 불교 구현을 위한 불교 코드

영화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불교 코드’란, 시나리오 작가 등 영화 제작자가 영화 속에 불교를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도록 불교 교리가 담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과 구조를 일반적인 언어로 제시하는 것이다. 불교 개론서마다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등이 기초 교리로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이 용어 그대로는 ‘기초’처럼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구현해내려고 관심을 갖는 영화 제작자가 영화 속에 이 개념을 구현해내기가 쉽지 않다.

‘삼법인’ 하나만 보더라도 ‘삼법인’이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벅찰 텐데, ‘삼법인’이라는 표제어 아래에 또다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와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삼법인’ 하나에 기본적으로 네 개의 불교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불교 교리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설명해야 현실적으로 응용할 수 있다.

‘삼법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 그 진단 내용은, 세상은 늘 변화하고 있고(제행무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일체개고), 그 어느 것에도 실체가 없다(제법무아)는 것이다. 만일 ‘삼법인’을 이렇게 설명한다면 영화 속에 불교를 구현하겠다는 마음을 좀 더 쉽게 낼 수 있지 않을까? 보통 ‘제행무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상함의 부정적인 의미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이것을 영화 속에 표현할 때 어떤 과정과 결과로 이어질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제행무상’을 ‘세상은 늘 변화하고 있다’는 말로 설명하면 부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의 변화도 함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삼법인’을 표시하는 코드는 ‘진단’ ‘변화’ ‘내가 바라는 것과 어긋남’ ‘실체 없음’ 정도가 될 것이다.

불교 코드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불교가 지향하는 방향을 정확히 드러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흔히 어떤 영화가 불교를 담고 있는 영화인지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이 바로 ‘윤회’를 소재로 하고 있는가이다. 〈번지점프를 하다〉(2000)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에는 아무런 불교적인 표시가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윤회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불교를 표현한 영화로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윤회로 불교영화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불교의 지향점은 윤회를 하는 모습이 아니라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다. 언제까지 윤회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동’해서 불교영화 속에 넣어 주어야 할 것인가? 영화 속에 윤회를 구현한다면 윤회에만 머물러서는 불교가 구현된 것이 아니며 그러한 윤회를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담고 있어야 제대로 윤회 코드가 구현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지향하는 방향을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서 불교 코드가 필요하다는 말의 또 다른 측면은 성격이 서로 다른 불교 개념이 동시에 등장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분명히 대승불교의 가치를 담고 있는 영화이면서도 중생 전체의 깨달음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수행과 행적이 지극히 개인적인 데에만 머물고 있으면 불교가 제대로 구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또는 화엄이나 선처럼 특정 교리를 전면에 드러내면서도 실제 내용에서는 화엄이나 선의 논리와 교리를 담지 못하고 초기불교나 남방불교의 이야기를 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와 지역에 따른 다양한 불교 교리의 핵심과 지향점을 코드화해서 정확하게 어떤 구조를 담아내야 그 불교를 제대로 구현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불교 코드의 기본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21세기 한국에서 불교를 영화 속에 구현하기 위한 불교 코드를 생각해 보자.

역사적으로 한국의 불교는 중국불교의 영향권에 있으며 한역 경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대승불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화엄사상이 선사상과 함께 두 주축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 이 말은 한국인에게는 초기불교나 남방불교보다는 대승불교가 친숙하며, 다른 많은 종파와 교리보다 화엄과 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교가 일반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한국불교를 생각한다면 화엄이나 선이 담고 있는 핵심 교리와 지향점을 코드로 제시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신라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불교 인물형을 위한 코드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의상 화엄사상의 핵심은 성기(性起)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러한 의상의 성기사상이 의상의 제자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 불교 사상의 근간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의상 화엄사상은 보조의 선사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상의 주 저서인 〈법성게(法性偈)〉에 선적 해석까지 하는 등 화엄과 선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사상이기도 하다. 더욱이 현행 한국불교 의례 속에도 화엄사상이 계승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의 사정에 맞는 불교의 모습을 모색하려는 목적과 가장 부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불교 인물형

영화의 스토리를 전개해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등장인물과 그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다. 뚜렷한 특징을 갖는 등장인물이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행동을 하면서, 다른 등장인물과 어떻게 갈등이 만들어지고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 바로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불교 가치를 구현하는 영화라면 불교 코드로 형성된 인물형이 불교 코드에 맞추어 갈등을 해결하면 될 일이다.

의상 화엄사상에서 인물형으로 추출할 수 있는 핵심 개념은 ‘구래성불(舊來成佛)’ ‘자리이타원만(自利利他圓滿)’ ‘불국토의 실현’이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으로 시작하는 〈법성게〉의 성기(性起)가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마무리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구래성불’은 의상 화엄사상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인물형이다. 또한 〈법성게〉에서 설명하는 이타행과 수행의 방편 및 이익 얻음 역시 자리가 이타행이며 이타가 자리행으로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공덕행이 바로 수행의 방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래성불인 수행자가 자리와 이타를 동시에 닦는 세계가 바로 불국토이다.

이 세 가지 핵심 개념을 불교 코드로 삼아 달리 표현하면 ‘구래성불(舊來成佛)’은 ‘완전한 사람’ ‘자리이타원만(自利利他圓滿)’은 ‘다른 이를 치유하며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 ‘불국토의 실현’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다.

첫 번째 ‘완전한 사람’이란, 아무런 상처와 갈등도 없이 완전무결한 인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상처와 갈등이 없다면 스토리를 구성할 수 없다. 불교 인물형의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상처와 갈등을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하여 원래 지니고 있던 긍정적인 능력들을 충분히 발휘하는 인물이다. 이 인물형과 대치되는 인물형은 스스로의 상처와 갈등에 갇혀서 그것들이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인물이다.

완전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특징은 자기를 바로 볼 줄 안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치유 능력이 바로 이 자기를 바로 보는 힘에서 나온다. 반드시 파멸을 부를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의 꿈을 찾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긍정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 인물형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다른 이를 치유하며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의 특징을 가진다. 자신의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고 극복해서 얻은 그 힘을 발휘하면 그대로 다른 등장인물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 중요한 것은 갈등의 해소가 단순히 인물들 사이의 갈등 해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인물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상대 인물을 치유시키면 세 번째 ‘세상을 바꾸는 사람’의 특징을 지닌다. 불교 인물형의 특징을 갖는 등장인물이 만나는 사람마다 한 명씩 치유를 계속하면 결국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변화하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사회적인 담론을 담는 영화라면 당연히 담겨야 할 코드이며, 개인 사이의 감정을 다루는 영화라도 두 인물의 만남으로 최소한 각자의 가정이 변화하는 설정이 담길 것이다.

한마디로 의상 화엄사상을 코드화한 불교 인물형은, 스스로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갈등의 제공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갖추고 있는 완전한 힘으로 다른 사람을 치유하며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이며, 개인의 갈등을 넘어 그렇게 치유시킨 사람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다.

이상의 세 가지를 불교 인물형의 코드로 삼는다는 것은, 적어도 불교의 가치를 구현하는 영화 속 인물형이라면 이러한 세 가지 코드를 구현해야 한다는 뜻이며, 불교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세 가지 인물형 코드가 파악되면 불교 가치를 구현한 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불교와 영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에서 비판한 영화를 이러한 불교 인물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보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의 주인공은 우선적으로 불교 인물형이 갖추어야 할 ‘완전한 자기의 힘’이 없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원죄(原罪)와 같은 설정이 끝까지 주인공을 괴롭히며 전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어 제대로 삶을 살고 있다는 암시를 주지 못하고 모두 윤회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불교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는 전혀 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자신의 문제를 치유하지도 못하고 그럴 수 있는 힘도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번민하며 회피하며 도주한다. 절대로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한다. 따라서 불교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이 영화를 더 이상 불교영화의 범주에 넣지 않았으면 싶다.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아제아제바라아제〉(1989)의 인물형 역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의 인물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서 보살행을 펼친다는 설정 역시 중생들의 갈등을 해결해주거나 상처를 치유해주지도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스님이기 때문에 더욱 인물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기독교적인 설정 때문에도 불교영화라고 보기에 문제점이 있었지만, 불교 인물형으로 보더라도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남자들이 죽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주인공은 대승의 가치를 구현하는 인물로 상징되어 있는데 이런 인물과 만나는 사람마다 목숨을 잃는다면 대승의 가치는 살인이라는 뜻일까?

어느 정도 불교 인물형이 구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먼저 〈달마야, 서울 가자〉(2004)의 경우이다. 이 영화의 갈등은 철거 위기에 놓인 사찰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빚 때문에 철거를 앞두고 있는 사찰을 지키려는 스님들과, 사찰을 철거하고 쇼핑몰을 지으려는 건축주 사이의 갈등이다. 여기에 당첨된 복권이 끼어든다. 어느 쪽이든 이 복권만 있으면 자신 쪽으로 유리하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영화는 영리하다고 할 만큼 모두가 사는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한다. 찢어진 복권을 모두가 모아 공동 건물을 짓고 건물 옥상에 사찰을 지은 것이다. 개별적인 등장인물이 불교 인물형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모습을 한 영화라면 적어도 ‘불국토 건설’이라는 세 번째 인물형의 특징은 드러내야 한다는 의식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
세 가지 불교 인물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로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사기꾼이기 때문에 여주인공의 말을 믿지 말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통해 영화적인 재미를 준다. 역설적인 제목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사랑 고백 장면인데, 거짓말인지 알아내는 게임으로 처리해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흥미로운 상황을 만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게임을 하는 곳에서 영주가 희철을 일깨우는 내용이 바로 자기를 바로 보라는 것이었다. 희철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잘 보라는 것이다.

불교 인물형으로 보면, 영주의 갈등은 어쩔 수 없이 희철네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과 가석방 중임이 밝혀질 위험이다. 그리고 영주의 상처는 가족이다. 영주는 희철의 가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상처인 가족 문제를 치유하고, 희철을 감화시키며, 최종적으로 희철 가족 전체를 영주 쪽으로 감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큰 갈등을 해결한다. 세 가지 인물형이 거의 완전하게 구현된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밖에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이긴 하지만 불교 인물형이 정확하게 구현된 것으로는 〈네 멋대로 해라〉(2002), 〈굿바이 솔로〉(2008), 〈제빵왕 김탁구〉(2010), 〈최고의 사랑〉(2011), 〈보스를 지켜라〉(2011) 등을 들 수 있다.

불교 인물형과 관련하여 인물을 주요 제재로 하는 경우를 덧붙인다. 특정 인물을 제재로 하는 영화는 인물의 기본적인 행적이 있기 때문에 영화화하는 시도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인물의 전기를 다루는 경우, 인물의 사상이 구현되는 설정이나 장치가 없이 단선적이고 일대기적으로 묘사됨으로써 기본적인 대중 미디어로서의 흥미를 잃게 하는 것은 물론, 자칫 그 인물을 오해하게 하는 경우까지 있다. 경전이나 설화를 소재로 하는 경우는 경전과 설화에 담긴 신화적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지 않고 묘사되어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경전과 설화에 담긴 사상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인물을 제재로 할 때에는 반드시 단선적인 방식을 벗어나 그 인물이 지니고 있는 사상과 행적의 핵심을 코드화해야 한다. 무모하리만치 맹목적인 돈키호테 인물형, 우유부단하고 아버지의 그늘에 억눌린 햄릿 인간형, 천재형인 모차르트 인물형과 노력파 살리에르 인물형, 또는 천재를 질투하는 살리에르 인간형 등 서양의 역사와 문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미 코드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원효 인물형과 진중한 의상 인물형, 또는 국내파인 원효 인물형과 유학파인 의상 인물형 등 버디 형식의 인물형의 원형을 만들 수 있다.


5. 보편적인 대중문화로서 불교

위와 같이 불교의 개념과 인물형이 코드로 만들어진 상태에서 불교와 영화가 만나야 종교색이 드러나는 ‘불교영화’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냥 ‘영화’라는 보편적인 대중문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불교가 편입될 수 있다. 불교라는 특수한 분야가 아니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대중문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원형화, 또는 불교 코드의 정립이라는 것이다.

이미 영상미디어는 힐링과 치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반드시 포교를 위한 불교 영상미디어라기보다는 불교 가치를 담고 있는 대중문화를 통해 누구나 치유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살게 하는 영화, 나아가 영상미디어, 그것이 미래의 불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최원섭 / 성철선사상연구원 전임연구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불교학 박사과정 수료). 불교적 대중문화비평론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논문으로 〈진실과 방편의 중도〉 등이 있다. 《정선 원효》 《정선 지눌》 《정선 화엄 1》의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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