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0세기 한국불교의 회고와 반성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향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쏟아내셨던 말씀, 그것도 일부 계층을 위한 고급언어가 아닌 서민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언어로 베풀어진 ‘설교’의 종교이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 인도는 계급사회였다. 바라문이나 귀족계급이 쓰는 언어와 하층민이 쓰던 언어가 서로 달랐다. 또한 정통 바라문교의 성전인 《베다》는 산스크리트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베다 어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베다 어는 결코 하층민들에게 들려져서는 안 되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인도 사회는 부처님의 정신에 크게 어긋났다.

부처님은 해탈해야 할 중생이 반드시 바라문이나 귀족계급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어찌 보면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하층민들이 ‘자신의 소중함(佛性)’을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도 화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처님은 어떠한 하층민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 지방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진리를 설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부처님을 향해 아쉬움과 불만을 품은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출가하기 이전에는 바라문 계급이었다. ‘천박한 민중들의 언어로 언급되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숭고하다.’ ‘바라문교의 성전처럼 우아하고 격조 높은 베다 어로 가르침을 설하셔야 한다.’ 그들의 간청은 보기 좋게 거절당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나아가 반드시 그 지방의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진리를 설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불교가 말씀의 종교라면 그 말씀을 기록한 것이 바로 ‘경전’이다. 따라서 경전은 설주(說主)와 청자(聽者)를 잇는 다리이다. 중생을 부처의 경지로 이끄는 뗏목이다.

그렇다면 경전은 중생에게 ‘읽힐’ 권리가 있다. 1999년을 살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은 누구라도 경전을 읽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 그 경전을 좀더 쉽고 정확하고 감명깊게 사람들 속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이 바로 ‘역경(譯經)’이다. 역경은 이렇게 모든 사람(중생)을 향한 불사(佛事)이다.

2. 역경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땅에서 역경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역경’이라는 표제어의 정의를 ‘한문경전의 한글화 작업’이라고만 국한시킨다면 역경불사는 당연히 조선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서 그 서막을 보게 된다.
하지만 ‘역경’을 ‘일반인을 위한 우리말화 작업’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역경의 역사는 아주 먼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가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나라를 통할 수밖에 없으며, (경을 포함한) 불교전적은 무작위로 수입되거나 구법승들에 의해 들여오게 되었다. 불교는 외국문자(한자)에 해박한 일부 승려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될 위험에 처해졌다. 일반 대중이 쉽게 불교의 진리에 접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아차린 승려나 지식인들은 가능한 부처님의 말씀을 쉽게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라의 향가가 그것이고, 고려시대 균여 대사가 《십구장원통기》를 방언(方言)으로 적어간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에 가장 먼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이 한글로 지어졌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많은 유가의 전적들을 다 물리치고 가장 먼저 부처님의 말씀이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바른 소리’로 옮겨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 또한 역경의 정신이 아닐까 한다. 그 시기를 전후하여 불교를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하고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노력이 또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부모은중경》의 판화이다.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의 이해를 도왔으며 판목에 새겨서 널리 유포시켰던 것이다.

또한 경을 외워서 독송하기 편하도록 한자를 한글로 음사(音寫)한 것도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은 아주 먼 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경주되어 왔음을 입증하는 매우 좋은 실례가 아닐 수 없다. 어두운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의 말과 글이 말살될 위험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한 역경불사는 꺾이지 않았다. 1921년 용성 스님은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화엄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을 우리글로 옮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민족 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과 중생구제라는 큰 사명을 저버리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냉대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용성 스님은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의식문을 우리글로 옮겼으며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찬불가를 지어서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산 속의 사찰에서 세간 서민의 가슴 속으로 끌어내리는 역경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감히 시도해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3. 역경(逆境)을 딛고 오늘에 이른 역경(譯經)불사

1) 동국역경원이 개원되기까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 속에서도 그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던 역경사업은 광복 이후 기지개를 켜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50년의 6·25 동란은 불교계 전반에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불교계는 역경 사업은 물론이요, 부서진 사찰과 문화재들의 복구, 그리고 종단 차원의 제반 불사에서 힘겨운 재건의 땀을 흘려야 했던 것이다. 광복과 6·25라는 역사적 분수령을 넘어오면서 우리 불교계의 대표적 종단인 조계종이 내건 종단의 3대사업은 바로 비구와 대처의 대립에서 야기된 승려 위상의 정립(도제양성)과 포교, 그리고 역경이었다.

조계종은 이에 종정 직속기관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역경위원회를 두고 사계의 권위자를 역경위원으로 위촉하게 된다. 1962년 11월의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조계종단 자체가 미처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던 판국에 무한정으로 재력을 쏟아 부어야 할 역경불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다가 1963년 9월 역경위원장 운허 스님은 역경계획안을 동국대학교 김법린 총장에게 전달하고, 동국대학교에 동국역경원을 개설하기로 정식으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64년 7월 21일 개원식을 갖고 동국역경원은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애당초 역경을 종단의 3대 사업으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종단에서는 경을 번역할 도량(譯經道場)을 제대로 정하지도 못하였고, 역경을 위한 재정의 조달은 물론이요, 독자층의 확보와 판매사업 등의 모든 면에서 종단이 올린 성과는 미미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경을 번역할 역경사 양성은 단 한 번의 연수생을 배출한 뒤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1968년). 활로를 모색하던 동국역경원은 마침내 동국대학교의 학칙기관으로서의 승인(1965년 4월)을 얻게 되고 그에 따라 정부로부터 국고보조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종단으로부터 대책없는 재원조달의 약속만을 믿고 있던 동국역경원은 1966년에 정부로부터 1천3백만원의 지원을 받으면서 명실상부한 공공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역경불사를 해온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장경 전체를 번역하기 위한 공식기관으로서는 동국역경원이 조선 세조의 간경도감 이래 처음인 셈이다.1) 1) 이상 朴敬勛, <譯經>, 《月雲스님 古稀記念 佛敎學論集》, 東國譯經院, 1998에서 역경의 경위와 동국역경원에 관한 연대 등을 전적으로 의존했다.

2) 한글대장경이 간행되기까지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동국역경원은 한글대장경이라는 우리글 팔만대장경을 간행하게 되었다. 1964년 개원한 이래 1993년까지 137권, 94년부터 98년까지 147권을 번역하였고 1999년 올해분 약 30권이 현재 번역 중에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의 승려가 찬술한 책(한국찬술불서)이 모두 23권이다.

특히 94년부터 올해까지 6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177권의 한글대장경이 간행됨으로써 우리는 완벽한 한글대장경을 갖추게 되었다. 불교를 연구하거나 역경에 종사하는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이 일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대법거다라니경》 《대위덕다라니경》 《불설계소재경》 등 일본에서도 내용이 난해하거나 문장이 매우 까다로워 번역이 유보된 경론들까지도 동국역경원에서는 한글로 번역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경론들은 그 방면의 학자들이 깊이 연구하여 세밀한 주석을 달아서 번역한다면 더 말할 나위 없는 반가운 일이겠지만 우선 한글로 옮김으로써 후일에 뜻있는 학자들이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주먹구구식인 종단의 태도, 빠듯한 국고보조 그리고 실력 있는 역경사의 절대적인 부족과 빈한한 여건 등의 무리수를 감수한 채 동국역경원의 한글대장경 번역사업은 이제 그 마무리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4. 역경불사의 반성

1) 애당초 정부와의 계약은 합리적인 수준이었을까?


역경원은 1994년 정부로부터 3억 5백만원을 지원받고, 역경원 측도 지원금 이상의 예산을 들여 26권의 한글대장경을 번역 간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1999년 4억의 국고지원금을 받아 올해분(1999년도) 30권의 책을 만들기까지 6년 동안 매년 30권의 한글대장경을 번역 간행하여 왔다. 한 권당 200자 원고지로 약 3,000매 이상의 분량을 계산할 경우 매년 30권의 책이란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숫자가 아니다.

일반 출판사의 경우 한 해에 20, 30권 정도의 책을 간행하고 있다. 그와 비교할 때 한문으로 쓰여진 고려대장경을, 그것도 심오한 교리를 담고 있거나 아주 오래 전에 한문으로 번역된(舊譯) 내용의 고려대장경을 한 해에 30권씩 번역해낸다는 일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작업분량이다. 한해 역경원의 평균예산은 국고의 보조금을 제외하고 약 10억 정도가 소요된다. 이 액수는 책판매 수익금과 동국대학교의 보조, 조계종단의 지원금, 기타 종단의 지원, 역경원 후원회와 개인의 보시금으로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2) 2) 역경원에는 1984년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가 설립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법인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그리고 역경원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200자 원고지 한 매당 번역료가 4,000원이며 증의윤문료로 1,000원이 배당되어 있는 가운데 한 권의 한글대장경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약 2,500만원의 예산이 소요된다.

결국 30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정부지원금의 곱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 번역료의 수준은 어떠할까? 다른 국책기관인 민족문화추진위원회의 경우 산문으로 이루어진 서적의 번역이 6,500원, 운문이나 다소 어려운 문집의 번역일 경우 8,000원의 번역료를 받고 있으며 아주 쉬운 내용의 번역은 6,000원의 번역료를 받고 있다. 이와 비교해볼 때 역경원의 4,000원이라는 번역료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런 낮은 번역료로 양질의 번역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경을 번역할 사람들이 생계의 위험을 받지 않고 마음껏 역경에 종사할 수 있는 환경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애초에 역경원에서는 시역고(試譯稿) 제도를 두어 능력 있는 역경사(譯經士)를 모집하고 그들의 번역 실력을 검증한 뒤 번역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한정되어 있는 불교인구 속에서 그나마 많지 않은 역경사에게 그 엄청난 분량의 번역을 모두 맡긴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려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전적(典籍)의 내용을 볼 때 그에 담겨 있는 매우 다양한 교리와 불교철학에 관한 심오한 체계는 단순한 시역고 검증을 통한 역경사 제도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천축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승려들의 한문번역은 오늘날의 한문교육으로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 어려운 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당시 승려들의 언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경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팔만대장경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폭넓은 시야와 해박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문경전을 다 읽고 소화해낼 수 있는 역경사를 양적으로 풍부하게 확보하고 있다면 역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빠듯한 예산으로 인재들을 ‘차출’하기에는 그들의 희생이 너무 크며 노동의 강도가 너무 세다. 낮은 번역료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엄청난 정신노동을 견디어 가면서 한 해에 그렇게나 많은 전적을 번역해야 한다는 현실은 처음부터 완벽한 번역을 기하기에 무리가 있었다는 말이다. 정부와 약속한 한 해 30권 번역 완간이라는 애초의 합리적이지 못했던 계약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2) 역경예규는 완벽하게 적용되는가?

번역은 정신적인 작업이다. 번역하는 사람의 수준과 성향에 따라 하나의 외국어는 다양하게 옮겨지게 된다. 역경불사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표현법에 대한 통일된 표기가 언제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표기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번역문체의 통일도 급선무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하나의 경론을 채택하여 번역을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공식기관에서 대장경이라는 거대한 양의 서적을 번역해내는 작업에서는 이럴 때 의견의 일치를 쉽게 모을 수 있는 법칙이 필요한 것이다. 1964년 당시 한글대장경 1집의 출판에 앞서 원고 정리와 교정단계에서 야기될 수도 있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그해 10월 4일에 선학원에서 역경예규(譯經例規) 제정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1966년 8월 8일부터 8월 13일에 해인사에서 역경용어심의회를 열어 우선 빈도가 높은 270개의 불교용어를 통일시켰다(1966년 9월 20일 한글대장경월보에서). 또한 이 자리에서는 역경용어심의회를 상설기구로 설치하여 앞으로 매월 정기적인 모임을 가질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3) 3) 沈三鎭, <東國譯經院 ‘譯經例規’에 관한 小考> 《月雲스님 古稀記念 佛敎學論集》, 東國譯經院, 1998.

초창기의 열의에 가득 찬 이런 움직임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재정적인 이유로 인하여 역경원의 위상이 축소되면서 자연히 역경예규와 관련된 크고 작은 모임은 지속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물론 고려대장경의 한글화 작업에 의한 우리말 사용 운동은 1974년 한글학회로부터 국어사랑 감사패를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번역이라는 작업은 역자 개인의 역량과 성향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60년대에 제정된 역경예규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현실적으로 적용되지 못한 채 지금은 그저 참고할 만한 사항으로만 남아 있을 뿐 역자에게 적극적으로 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쓰는 우리말은 1960년대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좇아가기에 급급하기만 한다면 이 또한 책임 있는 번역작업의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글은 그 시대의 자화상이다. 시대를 이끌어 나가고 시대를 그대로 비추어 내는 거울이다. 더구나 앞으로 한글대장경을 읽을 세대들이 서양의 사고방식과 영어와 기계문명에 익숙해 있는 세대들임을 감안할 때 현실감 있는 역경예규가 빨리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역자들에게도 역경예규에 대한 숙지를 먼저 요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출판사들의 역경사업이나 또는 개인이 원력으로 이루어 내는 역경불사에서도 역경원의 역경예규를 가장 먼저 참고하고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3) 증의(證義)작업은 꼼꼼하게 진행되었는가?

역경을 하다 보면 참으로 어려운 문장을 접하게 될 때가 많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켜놓고 이것저것 들춰볼 수 있는 사전을 모두 찾아보고 그와 관련된 참고서적들까지도 일일이 찾아보아 어렵사리 우리말로 옮겨놓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확하고 타당하고 무리 없는 번역인가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마음에 꺼림칙하게 남는 것이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의’라는 단계가 마련되어 있다.

가벼운 외국연애소설을 번역할 때에도 어려운 단어를 만나면 오랜 시간을 고민하게 마련인데 그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내용에서라면 말할 필요가 없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어 한역(漢譯)되어 가는 과정에서 당시 역경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고민도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A.D. 401년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중국에 와서 역경을 시작하면서 그가 얼마나 번역이라는 일에 신중을 기하였는가에 관한 일화는 여러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마라집이 중국 장안성 북쪽의 소요원(逍遙園)에서 《대품반야경》을 번역하였을 때 그는 인도어 원본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그 의미까지도 설명하였다.

그때 국왕인 요흥(姚興)도 몸소 그곳에 나아가서 이전부터 있던 같은 계통의 경전인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나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이 지금의 번역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히고 올바른 뜻을 물었다. 국왕의 이와 같은 관심은 국가사업이라는 점을 비추어볼 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구마라집의 역장(譯場)에는 당시의 고승 석학 500명이 참여하여 그의 번역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그 취지가 올바로 드러나도록 문장을 다듬었다고 한다. 그런 후에 이것을 깨끗하게 옮겨 쓰고 교정과 검열을 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번역을 쉬운 용돈벌이쯤으로 여기며 고민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번역서를 내놓고 있는 오늘날의 젊은 번역가들이 한 번쯤은 가슴에 새겨야 할 내용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삼장법사로 유명한 중국 당나라의 현장 스님의 역장에는 범문(梵文)을 한문으로 옮기는 본인 외에 한역을 필기하는 필수자, 범어가 올바른지를 증명하는 증범어자, 역어가 올바른지를 살피는 정자자(正字者), 역문의 의미를 상세하게 검토하는 상증대의자(祥證大義者), 문장을 올바르게 다듬는 증문자(證文者), 이러한 일들을 모두 감독하는 감열자(監閱者) 등이 함께 역경불사에 참여하였다. 현장 이후 송대(宋代)에 들어와서는 역경원 제도가 만들어졌으며 그에 따라 9개의 번역관 직위까지 마련되었다.

첫째는 역주(譯主)이다. 이 사람은 범본을 가지고 온 역경자이다. 그는 역경장 중앙에 앉아서 범본을 읽는다.
두번째는 필수자(筆受者)이다. 구마라집이나 현장이 번역했던 경우와 같이 역자가 한역한 것을 받아쓰는 사람이 아니라 역주가 읽어가는 범문 그 자체를 받아쓰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는 도어자(度語者)이다. 범문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역어자(譯語者), 전어자(傳語者)라고 부른다.

네번째는 증범어자(證梵語者)이다. 한역이 잘못되지 않았는지를 범본에 맞추어 검증하는 사람이다. 이 증범어자에도 범어의 의미가 잘못되지 않았는지를 검증하는 증범의자(證梵義者)와 선정(禪定)의 의미나 내용, 행법에 오류가 없는지를 검증하는 증선의자(證禪義者)가 있었다고 한다.

다섯번째는 윤문(閏文)이다. 한역문장을 매만지고 읽기 쉽고 잘 들을 수 있도록 아름다운 문체로 다듬는 사람이다. 중국에서는 산문의 문장을 4자(字)씩 구(句)를 나누어 박자가 맞도록 번역하는 것이 통례였다. 하지만 문장을 다듬어서 올바른 의미가 사라진다거나 왜곡되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름다운 문장이면서도 올바른 의미를 전해야지만 이상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번째는 증의(證義)이다. 번역된 경문의 앞뒤가 모순되지 않고 의미가 잘 통하는지를 검토하는 역할이다.

일곱번째는 범패(梵唄)이다. 인도어 경문에 곡조를 붙여서 읊는 역할이다. 이것은 역경이 시작되거나 법연이 열릴 때 제일 먼저 거행되는 일종의 의식적인 행사이다. 이전에는 역경을 할 때 범패를 부르는 일이 없었지만 역경사업이 형식화되면서 하나의 의식으로 범패가 불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덟번째는 교감(校勘)이다. 현재 번역하고 있는 경전과 같은 종류의 경전이 이미 한역된 경우, 먼저 번역된 경전을 현재의 역경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고 참조하는 역할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이전의 역경의 장단점도 알게 되고 두 경전 내용의 차이도 명백해져서 더 좋은 번역이 이루어지게 된다.

아홉번째는 감호대사(監護大使)이다. 번역사업 전체를 총감독하고 검교하여 역경이 차질없이 이루어지게 하는 역할이다.4) 4) 미즈노 고겐 지음, 이미령 옮김, 《경전의 성립과 전개》, 시공사, 1996, p.175.

이상 살펴본 내용은 역경이 국가적 사업으로 적극적인 호응을 얻은 경우이다. 오늘날 정부기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애써 국고를 타오고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종단의 원로 중진들을 찾아다니면서 재정을 보조받는 실정에서는 위와 같은 역경의 국가적 제도 장치가 사치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번역이라는 일을 얼마나 신중하게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어느 한 개인이 외국어로 이루어진 경전을 붙잡고서 단시일 내에 혼자서 뚝딱 번역해 내는 오늘날의 사정과 비교해 보면 토론하고 묻고 검열하고 해석하고 소리내어 읽어 보기까지 한 옛 시대의 역경이 한없이 부러워지기까지 하다. 지금 역경원에서도 번역의 다음 수순으로 증의와 윤문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다. 하지만 촉박한 일정에 방대한 양을 번역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증의는 그저 빠진 부분이 없는지를 살펴볼 뿐이고 윤문은 원문을 도외시한 문장꾸미기로 흐르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자유로운 심성을 가진 역자들의 성향과 수준으로 인해 역경예규의 ‘강제적인 준수’를 고집할 수 없다면 역경원에 역자들의 질문거리와 고민을 해결해 줄 교계원로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상주토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와 같은 경우 젊은 학자들이 번역을 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점들을 해결해 주기 위해 한학계(漢學界)의 대가를 상주하게 하고 있다.

원전을 앞에 두고 심각하게 토론하고 의견 수렴하여 세대간의 괴리감을 없애어 학문의 연계를 밝게 해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제도를 역경원에서도 채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때그때 자신에게 적당한 선배를 알아서 찾아가 해결하도록 하는 방식은 장기적인 역경불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교교리는 매우 다양한 만큼 번역을 할 때면 그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여 앉아 오랜 시간을 머리 맞대고 고민하고 언쟁을 벌이고 주석을 달면서 완성해 내어야 한다. 완벽한 번역어를 이끌어 내기 힘들다면 부처님의 가르침, 경전의 내용에 가장 근사치인 용어가 도출될 때까지 토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마저도 힘들다면 차선책으로라도 역경원에 가면 경전의 대가를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4) 역자의 태도­마음을 열었는가?

번역이란 다른 나라의 글로 쓰여진 문헌을 내 나라의 글로, 또는 내 나라의 글로 쓰여진 문헌을 다른 나라의 글로 옮기는 작업이므로 창작(創作)에 비교해서 그다지 독창적이거나 창의적인 작업은 아니다. 하지만 텍스트가 없어 그 어떤 선입관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운 창작과는 달리 번역은 숱한 감시자가 있다.

우선 원문이 존재하고, 사전이 있으며, 그와 비슷한 다른 번역물들이 존재하고, 역자보다 더 뛰어난 언어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비판이 존재한다. 그래서 번역은 항상 따가운 지적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작업이다. 특히 역경은 더욱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 단순히 화려한 언어나 문장구사력만을 지녀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박한 불교교리에 대한 지식만을 지녀서도 안 된다. 자신이 번역하고 있는 경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함은 필수요, 무리 없이 현대어로 옮길 수 있는 문장구사력도 지녀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에 대하여 단순히 글자만을 보지 말고 글자 속에 담긴 부처님이나 설주(說主)의 심정을 갈파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의 도안(道安, 314∼385) 스님은 경을 번역할 때 역자가 견지해야 할 태도를 ‘오실본삼불역(五失本三不易)’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오실본(五失本)이란 인도의 원전을 중국말로 번역할 때 원본의 어순을 그대로 살리지 못하더라도 중국식으로 도치한다든지, 수식양식(修飾樣式)은 중국식을 따른다든지, 번쇄한 설명은 삭제한다든지, 계속되는 반복구는 생략한다든지, 같은 주제에 대해 중언부언한 것을 줄인다든지 하여 원 텍스트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 다섯 가지 경우를 말한다.

삼불역(三不易)이란 시대의 풍속에 따라 문장을 고칠 수 없음과, 성인의 말씀을 세속적인 데에 맞추어 고칠 수 없음, 말세의 천박한 사고로 부처님의 말씀을 고칠 수 없음 등 불설(佛說)의 근본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가져야 할 세 가지 번역태도이다.5) 5) 李仁惠, <漢譯論書 飜譯方法에 관한 小考>, 《月雲스님 古稀記念 佛敎學論集》, 東國譯經院, 1998, p.206의 각주1에서 재인용.

경(經)은 진리의 말씀이 담긴 그릇이다. 그 경을 읽거나 옮기는 일은 하나의 불사, 즉 부처님 일이다. 역경은 수행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도안 스님의 경우처럼 옛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원전에 대한 경외감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오늘날의 우리는 너무나 소홀하게 대하고 있다. 그저 현대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간단하게 줄이고 생략하고 축소해 버리고 만다. 그에 대해서 그 어떤 설명을 달거나 깊은 사색을 거치지도 않고 쉽게 그런 오류를 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따금 자신의 번역만이 옳다고 여기며 다른 이의 지적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논서의 경우 원저자의 견해를 비판하며 역자가 자신의 견해대로 번역하려는 경향까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른 이의 이견이나 비판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할 것이며, 정말 상대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면 다른 기회에 주석서나 논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번역은 자신을 텍스트에 맞추어 가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임해야 하는 작업이다. 또한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어떤 이는 직역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의역을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한글대장경이라는 일련의 문헌에 불협화음이 생겨나게 된다. 또 어떤 단어에 대해서는 이미 그 단어가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 단어를 고집하기도 한다. 너무 옛스러운 문체도 조금 고려해 볼 일이다. 물론 이런 일들은 역경원에 종사하고 있는 편집부에 의해 다듬어지고 있지만 번역하는 당사자들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너무나 현대적인 용어나 문체만을 고집하다 보면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이 도태될 위험이 있다. 경론에 눈이 밝은 역장(譯匠)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는 용어를 도출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아름답고 의미 전달이 쉬운 우리글을 찾아내고 만들어 가야 하는 일까지가 역경의 몫이 아닐까 한다.

5) 역경불사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장치는 마련되었는가?

역경은 왜 하는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서이다. 2600년 전의 부처님 말씀을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게 하려고 역경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경의 효과는 잘 나타나고 있는가? 일부 뜻있는 불자들은 번역된 경전을 읽음으로써 신심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간혹 펼쳐 보지만 그들은 한문경전이나 범문경전 등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수많은 한글대장경은 일단 한 번 우리글로 옮겨진 뒤에는 그것으로 수명을 다하고 만다.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애써 번역된 불전들이 더 이상 생명의 불꽃을 지피지 못한 채 서가에서 먼지만을 쓰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경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역경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은 1950년대 율장(律藏)의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에서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운허(耘虛) 스님이 《사분계본(四分戒本)》(1957), 《사미율의요략(沙彌律儀要略)》(1956), 《사미니율의요략(沙彌尼律儀要略)》(1957), 《신산정사분승계본(新刪定四分僧戒本)》(1959), 《사분비구니계본(四分比丘尼戒本)》(1959), 《범망경(梵網經)》(1957) 등을 번역하였다. 이렇게 그다지 대중적인 인기를 끌 일이 없는 율장이 활발하게 번역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자운(慈雲) 스님의 지계(持戒)운동이 깔려 있었다.

자운 스님은 종단 3대 사업 가운데 하나인 도제양성(徒弟養成)의 바탕을 철저한 지계에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 출가하는 신참(新參)에게 우리말로 계를 설함으로써 계율의 사상을 철저히 주지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6) 6) 박경훈, 앞의 논문, p.721.

역경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경을 위한 재정지원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번역된 경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강의하고 함께 토론하며, 현실생활에서 그 의의를 찾아내고 응용하려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히 번역만을 한 뒤에 묵혀 둘 것이 아니라 그 불서가 그 시대에 적용되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5. 맺는 말

n세대를 위한 역경의 현대화를 위해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젊은 시절과는 다른 공간에서 인생을 즐기고 있다.

기성세대가 불교를 알기 위해 경전을 열고, 마음을 쉬기 위해 애써 산사를 찾고, 출가자의 권위에 조건 없이 무릎을 꿇었던 반면 다가올 21세기의 주인공이 될 세대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작은 글자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경전에 염증을 내고, 다리 아프게 산사를 찾기보다는 사이버 법당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전국의 사찰을 유람하고 있으며, 자신들도 시대의 아픔을 앓고 자아를 상실한 고통 속에서 방황하는 또 하나의 고독한 수행자임을 자처하며 권위를 거부한다.

그들은 스님을 친견하는 기쁨만큼 자신과 똑같은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만들어 밤새도록 왜 불교가 젊음을 사랑하지 않는지를 토론하는 일에 가치를 두고 있다. 기존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뒤엎은 인터넷의 세대! 바로 그들을 n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불교가 찾아가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한문경전의 한글화작업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의 역경이 ‘한글세대를 위한 한문경전의 한글화작업’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제 역경은 그 목표를 ‘새 시대를 위한 한글경전의 재해석과 응용’에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간행되어온 한글대장경을 검토해야 한다. 먼저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야기될 수밖에 없었던 오역(誤譯)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다지 오류가 생기지 않은 경전도 가능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역자에게 재검토를 요구하여 정오표(正誤表)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증의작업이 치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경전의 경우는 원전(原典)과의 꼼꼼한 대조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서툰 번역’이라는 평가는 후일을 기약할 수 있지만 ‘틀린 번역’은 한글대장경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며 자칫 이 땅의 불교의 위상을 흐릴 우려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한글대장경을 검토하면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바로 불교용어의 통일이다. 1960년대 역경불사의 초창기에 이루어진 불교용어 통일에 관한 여러 가지 작업들은 한문용어에 대한 ‘한글화’가 급선무였다.

하지만 모든 불교전적이 한글로 번역된 지금 다양한 불교용어를 한 가지의 한글번역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하나의 불교용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설해진 경이 아함경인가, 부파계통의 경론인가, 중관계통인가, 유식계통인가 또는 밀교계통의 경론인가에 따라 그 해석은 각각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미나 등의 학술모임을 개최하여 전문가들의 치밀한 연구와 토의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7) 7) 이 불교용어 통일과 관련해서 한글대장경의 재검토가 이루어질 경우 빠뜨려서는 안될 작업이 바로 밀교(密敎) 진언(眞言) 표기의 확립이다. 대장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밀교 부분이다. 그런데 밀교 경전에는 반드시 진언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 진언의 우리말 표기는 상당한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의 옛 스님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해서 통일된 진언집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이 현재 역경원에서 ‘진언 우리말 표기’의 근거로 삼고 있는 《중간 진언집》이다. 여기에는 실담자(悉曇字)의 우리말 표기와 더불어 상당량의 진언을 우리말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대장경 전체에 나오는 한문으로 표기된 진언에 비하면 그 양은 너무나 적다. 따라서 《중간 진언집》과 같이 진언 표기가 실려 있는 많은 서적들을 찾아내어 용례를 더 늘려야 할 것이며, 그에 따른 전문 학자들의 치밀한 연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현재의 한글대장경이 고려대장경 순서와 같지 않다는 점이다. 한글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역경을 처음 시작할 때 대중들에게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경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였던 까닭에 고려대장경의 순서를 고려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의 한글대장경을 유심히 살펴보면 권수(卷數)가 빠져 있으며 책 케이스에만 번호가 매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후 한글대장경의 재편(再編)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작업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완벽한 한글대장경을 갖게 된다. 실로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3, 4세기 이래 무려 1700여 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결실을 맺은 불사(佛事)는 회향되어야 한다. 부처님을 향한 숭배와 귀의의 마음으로 줄기차게 진행하여 온 한글대장경은 이제 중생들이 사는 세간을 향해 크게 회향할 차례가 남았다.

그 세간이 바로 21세기의 젊은 세대인 것이다. 지난 2천년의 세월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와 진보와 몰락과 좌절과 희열의 시기였다. 문명과 문화가 쉬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흘러갔으며 많은 부족들이 멸망하고 많은 국가들이 등장하였다. 불교를 위시한 무수한 종교가 선지식과 예언자, 구법승의 노력으로 사람들을 정화시켜갔으며 때로는 종교 자체가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세력으로 등장하여 인류역사에 피를 뿌리게 하였다. 이른바 문명의 종주국이 생겨나고, 자본과 기계문명의 맛을 본 인류는 경제라는 보이지 않는 무기를 선점하는 순서대로 이웃 나라와 민족을 병합하였다.

이제 새로운 천 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 인류는 더 이상 지고한 정신의 힘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종교는 점점 기득권을 잃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포함한 종교의 힘은 인류의 역사에서 제거되기는커녕 새로운 화두와 방편으로 물질문명에 탐닉해 있는 인류에게 다가서고 있다. B.C. 5세기 인도 북부에서 태어나 오롯하게 인도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같은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

더욱이 오로지 말씀으로만 전해진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한정된 지역의 언어로 우리에게 남겨졌으며, 인도라는 대륙에서 아득하게 떨어져 있는 이 대한민국에는 그 당시 그 지역의 언어로 전해진 경전이 한자(漢字)라는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지금 우리의 손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역경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서적을 1999년의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말로 옮기는 작업이다. 2500년 전의 말씀이 21세기를 불과 며칠 남겨두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 진실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사이버공간에서 밤을 지새고 테크노 리듬에 맞추어 온몸을 흔들어 대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은 과연 현실에 대한 대답을 주기는 할 것인가? 역경은 바로 이런 의문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대답의 시작이다. 생경하고 난해하기만 한 문자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심장을 마구 두드리는 우리의 말이 되게 하기 위한 작업! 바로 역경인 것이다.<끝>


이미령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재 동국역경원의 역경불사에 동참하고 있다. 논문으로 <원효와 법장의 기신론관 비교연구>,역서로 <불모출생삼법장반야야바라밀경><대당서역기><본생경><경전의 성립과 전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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