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속의 예술, 예술 속의 불교

1. 불교적 연극, 접사로서의 불교

불교와 연극을 나란히 사유하기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얼핏 보면 불교와 연극은 대단히 흡사해 보인다. 불교가 번뇌와 번민으로부터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종교라면, 연극은 갈등과 긴장으로부터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교와 예술이라는 차이만 소거하고 나면 불교와 연극은 닮은꼴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불교와 연극을 거칠게 정의한 앞서 진술에서 각각을 특정하는 방점은 ‘해탈’과 ‘갈등’이라는 서로 상반된 단어에 찍힌다. 물론 갈등과 해탈을 하나의 선분 위에 위치시키고 이를 과정과 결과로 묶어내 논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친연성의 논증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교 그 자체와 연극 그 자체를 등가로 놓고 보았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별로 관련 없음’ 정도일 터이다.

불교와 연극의 등가적 사유에서 제일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아마도 불교극 혹은 불교연극(이하 불교연극으로 통일)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 또는 연극의 역사에서 불교연극을 논하기란 대단히 난감하다. “불교연극은 전승도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구도 몇 개의 개별 작품에 국한되어 수행되었고, 아직까지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은 시도된 바 없다.”는 지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종교극으로서 불교연극은 고구(考究)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의 양적·질적 축적이 미미하다. 이는 종교극으로서 불교연극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정리해보면 그 이유가 간명하게 드러난다.

종교극으로서 불교연극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의된다. “불교극이란 일차적으로 승려에 의해서 사원에서 연행되는 연극을 가리키겠지만, 승려가 아닌 세속인이 사원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불교적인 내용을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정리에 따르면 불교연극은 기본적으로 ‘승려’에 의해 ‘사찰’에서 ‘불교’의 사상을 담아 행연되는 연극이되, 승려가 아니고 사찰이 아닐지라도 포교가 목적일 경우에 한해 불교연극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연극을 종교극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하게 되면 ‘포교’라는 목적성이 더해지면서 논의의 폭이 대단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 근현대 연극사에 기입될 만한 가치가 있는 종교극으로서 불교연극은 미미하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흔적을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와 연극에 대한 접점은 종교극이라는 제한적―일뿐더러 지나치게 엄숙한― 범주로부터 벗어나 사유할 필요가 있다.

불교와 연극을 함께 논할 때 둘 사이를 매개하는 가장 적절한 접사로 ‘―적(的)’ 이상의 것은 없을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와 연극의 관계는 종교로서의 불교연극보다 ‘불교적 연극’이라는 너른 범주에서 출발했을 때 비로소 풀어낼 만한 이야깃거리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적 연극이란 크게 네 가지 정도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① 불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 ② 불교의 사상을 담아내는 것, ③ 불교적 소재를 차용하는 것, ④ 불교적 공간을 재현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첫 번째 범주는 종교적 목적으로서 불교연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번째 범주는 연극 자체가 한정하는 범주라기보다는 연극에 대한 해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주되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범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범주가 연극의 관점에서 불교에 접근하든, 혹은 반대로 불교의 관점에서 연극에 접근하든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앞의 두 가지 범주에 비해 좀 더 풍성한 사유를 허락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교적 소재를 차용한 연극과 불교적 공간을 재현한 연극의 사례로서 우선 두 편의 희곡을 일별할 것이다. 불교적 소재를 차용한 연극으로는 이강백의 〈느낌, 극락 같은〉을 다루고, 불교적 공간을 재현한 연극으로는 함세덕의 〈동승(童僧)〉을 살피려 한다. 이 두 편은 문학성과 연극성 혹은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거둔 희곡으로 평가되어 왔다.

불교적 소재 혹은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이 두 편에 대한 독해를 통해 불교와 연극의 현재적 거리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고는 이러한 불교적 소재와 공간을 형상화한 연극에서 미처 채워지지 않는 결락을 메워주는 불교적 연극으로서 이만희의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를 소개할 것이다. 이만희의 이 희곡은 불교와 연극이 어떻게 서로를 의미 있게 소환해낼 수 있는가를 적절히 보여주는 이상적 모델이기 때문이다.

2. 불교적 소재의 차용과 불교적 공간의 재현

〈느낌, 극락 같은〉(1998)의 포스터
이강백의 〈느낌, 극락 같은〉은 불교적 소재를 차용한 연극이다. 1998년 초연된 이 연극은 불상(佛像) 제작의 권위자인 함묘진의 두 제자 동연과 서연을 중심으로 하여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동연과 서연은 각기 ‘형태’와 ‘내용’이 육화된 인물로서, 스승인 함묘진의 인정과 그의 딸인 함이정과의 사랑을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형태를 표상하는 동연이 함이정을 강제로 취하고, 스승의 명성마저 물려받음으로써 ‘형식적 승리’를 얻는다. 하지만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돌과 물을 이용해 아무렇게나 만드는 불상이 부처의 진리에 더 가까운, 즉 극락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내용적 승리’는 서연의 몫으로 귀착된다.

연극은 동연과 함이정 사이에서 태어난 조숭인을 화자(話者)로 삼아 시공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탁월한 불상 제작자로 명성을 떨친 함묘진의 제자인 동연과 서연은 일(불상 제작)과 사랑(함이정) 모두에서 번번이 충돌한다. 형태에 집착하는 동연은 완벽한 형태의 불상을 만들면 자연히 부처의 마음이 깃든다고 믿는 반면, 서연은 불상의 형태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부처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어진다고 믿는다.

결국 동연은 함묘진의 후계자이자 사위가 됨으로써 일과 사랑 모두에서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게 되고, 서연은 진정한 부처의 마음을 찾기 위해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 남은 동연은 불상 제작자로서 스승을 뛰어넘는 명성을 얻음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삶을 보내고, 서연은 자연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의 삶 속에서 때로는 돌에서 때로는 물에서 부처의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내용적으로 성공한 삶을 마감한다.

수평의 양쪽 동연과 서연은, 각자 형태와 내용을 주장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양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양분화는 너무 선명하고 단순하게 보일 우려가 없지 않다. 함묘진과 함이정과 조숭인의 수직적 배열은 양분화를 통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조숭인은 태어나기 전부터 등장하고, 함묘진은 죽은 다음에도 등장한다. 이것 역시 수평적인 인물에 있어서도 상호 균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이하 밑줄 강조는 인용자)

‘공연을 위한 작가 노트’의 일부분인 인용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연극은 ‘균형’을 중요시한다. ‘형태’와 ‘내용’ ‘수평’과 ‘수직’의 ‘양분’을 ‘통합’하여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작가의 주문은, 그러나 주문에 그칠 뿐이다. 실제로 이 연극은 궁극적으로 서연의 동연에 대한, 즉 내용의 형식에 대한 옹호의 포즈가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동연과 함이정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조숭인이 동연을 ‘육신의 아버지’로 규정하고, 서연을 ‘정신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비롯하여, 그가 “이 세상의 어떤 칭찬보다 그분(서연―인용자)을 닮았다는 소리가 듣기 좋았죠.”라는 결어(結語)에 이르면 보다 분명해진다.

〈느낌, 극락 같은〉은 불상이라는 불교적 소재를 차용해 예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하지만 이 연극은−이 연극이 주되게 논하는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을 빌자면− 무대 위에서 불교적 형식을 보여줄망정 불교적 내용은 보여주지 못한다. 불상 제작가라는 등장인물의 직업과 이로 인해 무대 위에서 포착되는 여러 형태의 불상은 분명 불교적 볼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이 연극은 공연 당시 불상을 정물(靜物)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일군의 코러스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역동적 연기로 표현함으로써 대단히 불교적인 색채를 선보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이 내장하고 있는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의 경직성은 아쉽다.

동연과 서연의 형식과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일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한 은유적 설법처럼 읽힌다. 그러나 이 연극의 등장인물은 애초부터 ‘악한’ 형식과 ‘선한’ 내용이라는 틀에 얽매여 평면적으로 사고하고 평면적으로 움직인다. 모든 것은 결국 마음에 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은 결코 형식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식과 내용을 불교적으로 사유하자면, 이분법적 나눔과 차별을 경계하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의 가르침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요컨대 〈느낌, 극락 같은〉은 불교적 소재인 불상을 중심으로 불교적 볼거리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적이지 않다.

이강백의 〈느낌, 극락 같은〉이 불교적 소재를 차용한 연극이라면, 함세덕의 〈동승〉은 불교적 공간을 재현하고 있는 연극이다. 극작가 함세덕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수류탄 사고로 인해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동승〉은 1939년 3월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유치진 연출로 극연좌에 의해 〈도념(道念)〉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동승〉을 비롯한 그의 희곡은 그가 월북작가라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오랫동안 한국희곡사에서 삭제되었다가 1988년 해금 조치에 이어 1991년 극단 연우무대에 의해 공연되면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동승〉의 한 장면(1991년, 연우무대)
〈동승〉의 주인공은 초연의 제목과 같은 열넷의 사미승 도념이다. 도념은 절에서 나고 절에서 자랐지만 어머니를 본 적이 없다. 비구니였던 생모가 사냥꾼과의 사랑으로 파계를 당하고, 도념을 낳자마자 삼(麻)밭에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도념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주지를 찾아와 명년 봄보리를 베고 나면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그 후로는 소식이 끊기었다. 도념에게 산사의 생활이란 언젠가 자신을 찾기 위해 돌아올 어머니에 대한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머니에 대한 오매불망(寤寐不忘)이 도념을 산사에 머물게 하는 유일한 이유인 셈이다.

자연히 어린 도념에게 미망인은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의 현신이다. 그녀는 아들의 백일재를 지내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대갓집의 딸이다.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잃어 상심이 깊은 그녀 역시 도념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운 이에 대한 도념과 미망인 사이의 겹침은 이내 미망인으로 하여금 도념을 양자로 삼겠다는 결심을 불러온다. 하지만 도념을 키워온 주지의 생각은 다르다.

아씨께서 진정으로 얘를 사랑하신다면, 눈앞에 두구 노리개를 삼으실랴구 하시지 말구 얘 매디매디에 사무쳐 있는 전생의 죄 속에서 영혼을 구하게 이 절에 둬 주십시오. 자기 한 몸의 죄만 아니라 제 아비 제 어미 죄도 씻어야 할 테니까 얘는 여간한 공덕을 쌓기 전에는 저승에 가서 무서운 지옥을 면치 못 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아씨께서 서방님을 잃으시고 외아들마저 잃으신 것두 다 전생에 죄가 많으셨던 탓입니다. 아씨 죄두 미처 벗지 못하시구 이 죄덩이를 데려다가 어떻게 하실려구 이러십니까? 두 번 다시 이 이야기를 끌어내시려거든 다신 이 절에 오시지 마십시오.

도념이 산사를 떠나 속세와 연을 맺게 되면 육계(六戒)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주지의 우려는 진심이다. 하지만 미망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내는 도념과, 반대로 도념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미망인의 마음 역시 모두 진심이다. 하지만 모자의 연을 맺고자 하는 도념과 미망인의 바람은 도념에 대한 주지의 우려와 충돌하면서 좌절된다. 결국 도념은 자신의 생모를 찾기 위해 산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눈 내리는 산문을 나서 속세로 나간다. 요컨대 〈동승〉은 사찰이라는 불교적 공간을 주요한 무대 공간(stage-space)으로 삼아 모성을 실감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어린 소년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연극이다.

〈동승〉은 함세덕의 초기작에 속함에도, 곧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힐 만큼 고평을 받아온 희곡이다. 텍스트를 통해 주되게 드러나는 긴장은 도념과 주지 혹은 미망인과 주지 사이의 대립으로 외화되는 불성(佛性)과 인성(人性)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긴장은 적대적이지 않다. 도념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그 또래의 소년에게 더없이 자연스럽다. 또한 도념에 대한 주지와 미망인의 태도는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도념을 위하는 각자의 진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승〉은 불성과 인성을 사이에 둔 우호적 긴장의 형상화라는 점에서 값지다.

그런데 〈동승〉은 불교적 공간을 재현할뿐더러 주지의 언어를 통해 불교적 교리를 설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불교연극으로 단언하기가 어렵다. 〈동승〉에 불교 중심의 종교적 색채가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연극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 찾기로 대표되는 도념의 세계를 향한 욕망이며, 이때 불교적인 것은 그것이 지닌 선의에도 불구하고 도념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동승〉의 어린 소년 도념이 성장의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세계와의 조우에서, 불교적 인물과 배경과 사상은 긴장을 창출하는 극적 요소라는 맥락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도 무방하다. 물론 함세덕의 〈동승〉이 거두고 있는 성과−서정과 서사 혹은 사실과 낭만의 조화라는 가치−의 측면에서 불교적 인물과 배경과 사상이 대단히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이 연극을 불교연극이라고 확정할 수 있게 만드는 핵심소는 되지 못한다. 요컨대 〈동승〉은 불교적 공간의 재현을 통해 〈느낌, 극락 같은〉보다는 좀 더 종교적 면모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교적 연극이라는 수사에 한정될 뿐이다.

3. 수단으로서 불교, 목적으로서 연극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2009년 극단 청사의 재공연 무대.
이러한 맥락에서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의 불교에 대한 연극적 재현은 흥미롭다. 이강백의 〈느낌, 극락 같은〉이 불교적 소재를 차용한 연극이고, 함세덕의 〈동승〉이 불교적 공간을 재현한 연극이라면, 공교롭게도 이만희의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는 이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연극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어둠이었습니다〉는 〈느낌, 극락 같은〉과 마찬가지로 불상 제작이 연극 전체의 핵 서사로 작용하며, 〈동승〉과 마찬가지로 산사에서 벌어지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연극은 사찰 법당의 주불 제작을 의뢰받아 봉국사를 찾은 도법과 봉국사의 주지인 탄성 사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도법과 탄성은 행자 시절부터 함께 수행해 온 사이이다. 도법은 봉국사의 방장 스님으로부터 법당의 주불 제작을 의뢰받는다. 봉국사를 찾은 도법은 탄성과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다. 삼 년 기약으로 봉국사에 머물며 불상 제작을 맡은 도법은 어느 날 분신자살을 한 사람의 시달림에 따라나섰다가 화상을 입은 망령을 보게 된다. 도법은 탄성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탄성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법이 색계(色界)에 사로잡혀 정사(政邪)를 분별치 못한다고 믿는다. 급기야 도법 역시 빈번히 자신의 앞에만 나타나는 망령에 시달려 방장스님과 독대하여 가르침을 청한다.

중국 어느 지방에 거지가 있었는데 거지랄 수도 없는 거지였어. 왜냐면 아주 비싼 목걸일 하고 다녔거든. 그런데 거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는 땡전 한 푼 없는 거렁뱅이로만 여기고 있었어. 그러다가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는데 자초지종 얘길 들은 거지는 깜짝 놀랐지. 그 목걸일 보았던 거야. 친구가 알려줬지. “이 친구야, 자네 목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가 있는데 뭐하러 동냥하러 다니는가. 그걸 팔아 장사를 해도 큰 장사를 할 수 있을 텐데…….” 거지는 그제서야 그걸 알고 기뻐했지. 얼마나 기뻤겠어. 거지가 기뻐서 길길이 날뛰는 걸 보고 친구가 또 말했지. “이 친구야. 그 목걸인 본래부터 네 것이었어. 어디서 주운 게 아냐. 그런데 뭘 그렇게 좋아하는 거지?”(자신의 얘기에 재미있어 큰 소리로 웃는다) 본래부터 자기 것인 것을, 이제 생겨난 양 기뻐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겠나. 하하하하 모든 것이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지.

방장 스님이 도법에게 무심하게 들려주는 위 일화는 이 연극의 전언(傳言)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도법의 주위를 맴돌며 끊임없이 그의 불상 제작을 방해하던 망령의 실체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전직 미대 강사인 도법은 아내가 불량배들에게 윤간(輪姦)당하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충격으로 인해 출가한 전사(前史)를 지니고 있다. 결국 그의 주위를 배회하던 망령은 그의 ‘번뇌와 불안’에 다름 아니었다. 도법은 이러한 깨달음 끝에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미추를 초월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흉측하지만 신비한 모습의 불상−을 완성한 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내의 윤간은 도법, 아니 속세의 김명석에게는 분명 천지가 무너져 내릴 정도의 아픈 사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아팠을 이가 윤간의 피해자인 그의 아내였으리라는 사실 역시 자명해 보인다. 그가 아내의 윤간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견디지 못하고 출가를 선택했던 일은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으나 그러한 선택엔 남겨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소거된 것이었다. 이 연극은 도법과 탄성, 탄성과 월명, 방장과 도법 등의 대화를 통해 유독 일체유심조를 강조하는데, 거듭 반복되던 이 화두는 결국 아내의 아픔 위에 자신의 아픔을 뒤덮어 버림으로써 자기 연민에 빠진 도법을 향하고 있음이 망령의 일갈을 통해 드러난다.

자넨 어째서 이 순간을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인생이 순간이면 영원한 건 없고 인생이 영원하면 순간이란 없을 텐데 말이야. 이건 앞뒤가 맞질 않아. 마누라가 강간당한 건 영원하고 마누라를 사랑했던 건 순간이라니 이런 엉터리 발상이 어디 있나. ……중략…… 너와 마누라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으로 똑같이 당했어. 둘 다 시궁창에 빠진 거야. 그런데도 너는 말짱하고 마누라만 더럽다 이거야. ……중략…… 난 자네의 번뇌와 불안일세. 세상 이치가 일체유심조라. 난 바로 자네일세. 자넨 자네의 추악한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어. 그러나 이젠 보았겠지. 자네의 다른 한 부분이 얼마나 추악했던가를. 도법당. 미추를 포기하게. 아름답고 추함이란 한낱 꿈속의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야. 본디 이 세상 모든 것은 묘하게 있을 뿐 미추란 없는 것이야.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는 이처럼 아름다움과 추함이란 한낱 꿈과 같은 것이고, 결국 인간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우쳐 준다. 그런데 사찰이라는 불교적 공간에서, 불상 제작이라는 불교적 소재로, 승려들의 입을 빌려 노골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이 연극은 〈느낌, 극락 같은〉이나 〈동승〉보다도 불교적이지 않다.

〈느낌, 극락 같은〉의 동연과 서연이 불상 제작을 둘러싸고 참된 불상의 의미, 즉 예술의 본질에 대한 갑론을박을 주고받던 것에 비해 도법과 탄성의 대화는 진지할 때보다 경박할 때가 더욱 많다. 〈동승〉의 산사가 불교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수행하는 주지에 의해 이끌어짐에 반해 봉국사라는 공간은 정종의 맛을 그리워하는 방장은 물론이려니와, 음담(淫談)을 일삼는 주지인 탄성뿐만 아니라, 경내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러대는 사미승 월명에 이르기까지, 절은 절이되 절 같은 않은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극작가 이만희는 이 연극의 창작 동기가 불가(佛家)에 진 빚을 갚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문학과 종교가 합일이 되어, 혹은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 내가 합일이 되어, 혹은 어머니와 내가 합일이 되어 쓴 작품”이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실상 그가 무대 위에 재현해내고 있는 것은 엄밀하고 엄숙한 의미에서의 불교와는 사뭇 거리를 둔 지극히 속가적인 이야기이다. 물론 텍스트의 심층에 흐르는 것은 일체유심조라는 불교적 화두이지만, 텍스트의 표층은 도법이 속가에서 겪은 세속의 사연이 지배하고 있다. 더욱이 연극을 이끌어 나가는 인물의 면면은 그들이 승려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으레 기대되는 불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불교적이되 불교적이지 않은 불교적 연극. 일종의 언어유희이지만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가 지닌 불교적 연극으로서 매력은 바로 이러한 역설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는 불교가 지닌 자비의 분위기를 무대 위로 호출하지 않는다. 또한 세속의 번뇌와 불안을 초월한 해탈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속의 연이 물씬 풍기는 경박한 언사와 불교적 수행과는 거리가 먼 거친 입담을 자유로이 구사하면서 연극적 재미를 증폭시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희곡은 불교와 연극을 등가로 놓고 사고했을 때, 불교적 무게보다 연극적 무게가 더 빛을 발하는 텍스트이다. 불교와 연극에 대한 사유에 있어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가 던지는 이러한 화두는 의미심장하다.

현대사회는 종교와 예술이 하나의 틀에서 사유되던, 즉 종교적 믿음이 일상적 실용 그 자체이던 시대와 결별을 선언한 지 오래다. 고대 사회가 종교와 예술의 구분 자체가 애매하던 시대였다면, 중세 사회는 예술이 종교에 복속되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사회의 도래는 종교와 예술이 각각 진(眞)과 미(美)의 영역으로 분할되게끔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와 연극의 관계를 목적과 수단으로 사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양 연극의 역사에서 교회가 종교극 이외의 연극을 탄압했던 서기 5세기로부터 르네상스 직전의 대략 1,000년을 ‘암흑기’로 기록하고 있음을 상기해 보면 현대사회에서 종교와 연극의 바람직한 공존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종교를 목적으로 하고 연극을 수단으로 삼던 암흑기의 경험을 뒤집는 것, 즉 연극이라는 목적에 종교가 하나의 질료로서 수단화되는 불온한 신성 모독을 기꺼이 권장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와 연극의 공존을 사유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불교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연극을 수단으로 삼는 불교극, 즉 일종의 포교극은 종교적 실효와 연극적 실효 모두에서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다양한 예술 장르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애초부터 불교적 믿음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자면− 특정 종교를 목적으로 삼아 ‘제작’된 연극이란 흥미롭기는커녕 고루하기만 할 따름이다. 하지만 연극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불교가 일종의 질료로 수단화된 불교적 연극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만희의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러한 연극은 불교를 겉으로 드러내되 결코 불교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라는 종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적지 않은 극적 재미를 선사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무대의 불이 꺼지고 극장 문을 나선 후에도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은 은연중에 각인되게 마련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가르침이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4. 불경(佛經)에 대한 불경(不敬), 예술을 위한 소신공양(燒身供養)

다소 불온한 언어유희를 거듭하자면 결국 불교와 연극의 바람직한 공존은 불경(佛經)에 대한 불경(不敬)을 관대히 용인하는 것, 심지어 권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존을 십분 용인하더라도 한국의 근현대 희곡사와 연극사에서 불교적 연극을 찾아내기란 녹록하지 않을 정도로 그 수는 대단히 미미하다. 이는 물론 불교연극 혹은 불교적 연극에 대한 범주 설정의 엄정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종교와 연극의 접속 혹은 접목이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대개 목적(종교)과 수단(연극)의 관계로 간주됨으로써 창작과 수용 모두에서 기피되었던 탓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와 연극의 공존에 대해 또 한 가지 불온한 첨언을 하자면, 연극에 대한 불교적 공간의 후경화, 즉 연극에서 배경으로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용인하고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불교적 공간, 즉 사찰이 지닌 장소정체성(identity of place)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다. 공간과 장소는 다르다. 공간이 물리적이고 지정학적으로 확정된 위치라면, 장소란 이러한 공간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된 의미 있는 위치이다. 따라서 장소정체성이란 인간이 장소와 맺는 관계, 즉 인간이 장소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환경·인간 활동·의미가 결합함으로써 형성된 의미화 공간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선상에서 불교와 연극의 관계에 대한 장소정체성 문제는 흥미롭다. 연극을 비롯하여 영화·텔레비전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극문학에서 사찰은 불교에 대한 직접적 관심이 아닐지라도 빈번하게 등장해 온 극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렐프는 인간과 장소의 관계에 대해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고,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연극에서 심심치 않게 무대화되는 불교적 공간인 사찰의 장소정체성은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해준다. 그것은−적어도− 한국 문학과 연극에서 사찰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부여되는 장소로서의 계맥(戒脈)이 어떠한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본 〈느낌, 극락 같은〉 〈동승〉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등의 연극은 모두 불교적 공간으로서 사찰 자체를 삶의 주요한 공간, 즉 장소로 삼는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경우 사찰이라는 공간은 주로 현실로부터의 도피 혹은 휴식의 장소이자, 위안과 갱생의 장소로서 등장한다.

렐프의 인간다움에 대한 정의에 의거하자면, 사찰이라는 공간을 찾는 극중인물의 대부분은 의미 있는 자신의 장소를 박탈당한, 즉 장소상실(placelessness)을 경험한 이들이다. 이들이 현실, 즉 속세에서 의미 있는 장소를 상실하고 찾는 곳이 깊은 산 속의 사찰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한국 연극에서 사찰의 장소정체성은 단순히 불교의 사원이라는 특정 종교의 공간이 아니라 지극히 한국적인 평온과 평화의 공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심상지리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장소상실에 대한 대안의 장소로서 등장하는 사찰은 그 형상화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무게감을 지니게 마련이다. 거기엔 굳이 직설적인 불교적 교리가 등장할 필요도 없고, 불법승(佛法僧) 등의 삼보(三寶)가 노골적으로 강조되거나 전경화될 필요도 없다.

 고즈넉한 산사에 역시나 고즈넉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가 마치 부처의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중생의 고단한 심신을 위로해주듯이, 불교적 공간으로서 사찰이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들의 뒤편에 일종의 버팀목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연극은 충분히 불교적이며 또한 한국적이다.

예컨대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처럼 심산유곡에 자리한 암자의 승려가 왕년의 왈짜패였던 ‘남대문 개백정’으로 묘사될지라도 무방하다. 심지어 그의 입에서 불자로서 차마 담을 수 없는 왁자지껄한 욕설이 나와도 무방하다. 한국의 불교는 경건하고 엄숙하며 신성한, 그래서 저 멀리에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중생의 삶과 지근거리에 위치한 생활 속의 종교로서 현재에 이르렀듯이, 연극 속에 재현되는 불교 또한 그러한 아우라로서 재현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불교와 연극, 나아가 불교와 예술의 관점에서 기억을 더듬어 보자. 가장 널리 알려진 혹은 가장 많이 회자된 불교적 예술은 무엇일까?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불교와 관련된 가장 세계적인 예술 작품은 아마도 15세기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인 《서유기(西遊記)》가 아닐까 한다.

《서유기》는 삼장법사인 현장이 불경을 얻기 위해 천축국으로 가는 장대한 기행의 서사이다. 너무나 불교적인 이 이야기는 그러나 불교 외적인 모험담으로 가득 차 있다. 손오공·저팔계·사오정이 삼장을 보필하며 맞닥뜨리는 온갖 요괴와의 대결은 기괴하다 못해 허무맹랑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불교적인 듯하면서도 불교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거쳐 만화와 영화와 게임 등의 영상으로 거듭되면서 끊임없이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소중한 불교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연극의 관계는 바로 이러한 《서유기》와 같은 소설 혹은 앞서 살펴본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와 같은 연극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가늠할 수 있다. 요컨대 불교와 연극의 습합(習合)은 연극이라는 예술을 위해 불교가 기꺼이 스스로를 질료로 내어 놓는, 일종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통해 달성될 것이다. ■

 

박노현 /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1999년 《월간문학》 희곡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동국대, 동덕여대, 인천대 등에서 ‘드라마와 문화’ ‘희곡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극장의 탄생〉 〈비극으로서의 텔레비전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상 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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