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속의 예술, 예술 속의 불교

1. 들어가는 말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아 조계종에서도 그간 금기시해 오던 영산재며 범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산중 기생으로 여겨지던 범패승은 1970년대 초반 문화 보호 정책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 난립하는 범패 승단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요즈음 불교계에는 세속음악보다 더 세속적인 악가무가 사찰 행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데에는 불교문화의 전통이 단절되면서 의례와 이에 수반되는 음악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다른 어떠한 종교보다 문화적인 이벤트가 풍부하였던 한국 불교계가 음악의 황무지가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간 우리는 신라시대 향가의 대부분이 불교음악이었는데도,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고려시대 수도가 있었던 개성 주변에는 민요마저도 찬불가였음을 서도민요 〈긴염불〉 〈자진염불〉 등이 말해 주고 있다. 유흥을 부추기는 〈창부타령〉이나 오방무 형태로 추는 궁중 〈처용무〉도 살짝만 그 껍질을 벗기면 불교의 속살이 드러난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운수납자가 산천을 떠다니다 당도한 곳이 어딘지를 몰랐다가도 골짜기에서 울려 퍼지는 염불 소리를 듣고 그곳이 어딘지를 알았을 정도로 우리네 불교문화는 율조를 타고 흘렀다. 

역사를 거슬러 볼 때 한국 불교문화의 전통 단절은 억불 정책을 쓴 조선시대와 한국의 기층문화를 말살하고자 하였던 일본의 사찰령과 근대의 ‘사찰정화운동’이라는 분규가 가장 큰 원인이다. 더불어 서구문화에 현혹되어 우리네 본연의 불교 음악에 대한 무관심과 애정 결핍도 이에 못지않은 장애로 보인다. 이에 본고에서는 불교의 태동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불교문화권 각 지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 음악의 전개 과정과 그 양상을 조명함으로써 불교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배양하고자 한다. 

2. 인도의 불교 음악

1) 불타 이전의 음악

인도에서 음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들(deva)에 대한 찬가를 집성한 《리그베다》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아리아인들은 찬가를 작성하여 정확하게 암송하였고, 또한 복잡한 제사의식을 틀리지 않게 집행하기 위하여 고도의 전문지식과 훈련을 쌓았다. 베다의 찬가나 사제(司祭)의 주사(呪詞)는 신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바라문에게만 내재하는 것으로, 신을 움직여 원하는 바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운율이 마음의 집중과 명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운율(metre)’에 대한 언급을 《브라흐만수트》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음성은 신을 찬미하는 도구’인 동시에 신과 자아가 하나가 되는 매개가 되기도 하고, 신과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주술적 도구로도 쓰였다. 그러므로 당시 인도인들은 각기 다른 단계의 공명(공진현상, resonance)을 발생시키는 ‘음성의 힘’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 또한 음성은 우주의 5대 요소(땅·물·불·바람·공간) 중에서 공간이라는 요소의 실체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음성 관련 학문인 성명(聲明, 범어 Sabdavidya. 인도 오명의 하나. 음운, 문법, 훈고의 학문)을 탄생시켰고, 이 학과는 브라만 사제들이 꼭 배워야 하는 과목이 되었다. 베다 시대에는 여러 신들과 더불어 세계 창조의 유일신을 향한 찬가들이 바라문 사제들에 의해 송주되었는데 이러한 음악들은 오늘날 인도의 전통음악 ‘라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명’을 뜻하는 ‘사브다비드야’의 어원을 살펴보면 ‘사브다(Sabda)’는 소리(聲)를, ‘비드야(vidya)’는 학문(明)을 의미한다. 즉 시구(詩句)에 율조를 넣어 낭송하는 데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발생함을 인지함으로써 ‘성명’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때 사제들의 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는 단어마다 일정한 율과 성조를 지니고 있어 이를 10가지의 메트라로 정돈하였다. 범어의 율조는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지면서 함께 유입되었다.

그리하여 범어 체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경전의 한역 작업이 이루어짐으로써 범어를 음사한 진언과 다라니가 중국에서도 병용되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중국의 범패에도 산스크리트어의 운율 체계인 ‘Meater법’이나 팔리어의 운율 체계가 내재해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를 반영하듯 진감선사가 당나라로부터 범패를 배워온 이후 신라 전역에 범패가 널리 창송되었고, 오늘날 한국의 범패 소리길에도 중국 성조와 유사한 4성 체계가 활용되기도 한다. 

2) 불타 이후 승단의 음악

소리의 진동과 음악의 ‘생명 기능’을 중시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브라만교와 달리, 초기불교 승단은 금욕적 계율에 따라 음악을 멀리하였는데 이러한 자세는 중국의 증일아함경, 《마하승기율(僧祇律)》 등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초기 승단은 기악(伎樂)을 부정하였지만 승려가 운율을 넣어 경문을 읊는 것은 제한적으로 허가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설교가 기록이 아닌 구전으로 전해졌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승려 대중이 합송(Samgati)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율조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의 엄격함을 강조한 초기 승단이었기에 ‘말씀을 읊는 것’이 뜻을 전달하는 이상의 기교적인 노래를 하는 것은 금하였다. 
주로 합송의 단계에 머물고 있던 초기불교의 이와 같은 자세는 밀교로 인하여 고인도의 음성에 대한 사상이 다시 유입되었다. 7세기를 전후하여 힌두적 영향에 따라 불교음악이 밀교적 혹은 힌두문화적으로 변용되어 갔다. 밀교적 가사인 진언(眞言)은 소리 그 자체에 신비한 주술적 힘이 있음을 믿고 활용하였는데, 오늘날 한국과 중국·일본에서 범어로 불리는 진언과 다라니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밀교의식의 ‘삼밀상응(三密相應)-신밀(身密), 어밀(語密), 의밀(意密)-’ 중에서 어밀(語密)은 언어상의 어의 전달뿐 아니라, 음성과 대자연의 소통을 강조했다. 이는 밀교가 왜 모든 주문(呪文, incantation)을 진언(眞言)이라고 하는지 말해 준다. 이를 삼밀가지(三密加持)라고 하여 부처님이 구제하는 힘과 중생의 신앙이 합일하는 경지를 말한다. 즉 중생이 손으로 수인(手印)을 하고, 입으로 주문을 외우고, 뜻으로 중생과 부처가 하나 됨을 관(觀)하면 부처님의 삼밀과 어우러져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밀교의 대표 경전인 《대일경(大日經)》의 “하나하나의 소리가 곧 법계에 들어서는 문이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밀교적 음성은 불교 수행과 범문이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불타 입멸 후 부파불교 시대를 맞이하게 되자 석가모니 생존 당시 음악에 대해서 보수적인 자세를 취했던 모습은 상좌불교(Theravada)인 동남아 지역 승단을 통하여, 진보적 자세를 취했던 대중부는 대승불교권으로 퍼져 나가 각기 다른 음악문화를 형성하였다.

3) 힌두 문화의 불교 음악적 습합

불타 입멸 후 힌두문화가 불교로 유입되면서 인도의 신화와 그에 따른 음악적 요소들도 불교로 습합되었다. 경전을 비롯하여 한국의 불교 탱화 및 불탑, 사찰 건축 등에 등장하는  ‘긴나라’ ‘가릉빈가’ ‘간다르바’와 같은 존재들이 이에 해당한다. 

①긴나라(緊那羅, Kinnara)

인도에서 ‘긴나라(緊那羅)’는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즐거움을 제공해 주는 신이었다. 형체는 사람의 모습에 가까우며 머리에 뿔이 있으며 하나가 아닌 다수의 무리이다. 긴타라(緊陀羅)·긴날락(緊捺洛)·진타라(眞陀羅)·견타라(甄陀羅) 등으로 음역(音譯)되기도 하는 긴나라는 인비인(人非人)·의신(擬神), 또는 가신(歌神)·가악신(歌樂神)·음악신 등으로 의역되기도 하였다. 그 생김이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이 아니었는데, 부처가 있는 곳에 가까이 갈 때는 사람의 모습을 한다고도 한다. 긴나라는 불교의 수호신인 천룡팔부중(天龍八部衆)을 총칭해서 말하는 경우도 있다. 

②가릉빈가(迦陵頻伽, Kalavinka)

구례 연곡사 북부도탑(국보 제54호)에 새겨진 가릉빈가.
가릉빈가는 산스크리트어 ‘칼라빈카’의 음사(音寫)로, 인도에 서식했던 새의 일종이었다. 깃이 아름답고 소리가 맑아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조’라고 하였으며, 정토 만다라 등에서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아미타경(阿彌陀經)》 〈정토만다라(淨土曼茶羅)〉 등에 따르면 가릉빈가는 극락정토의 설산(雪山)에 살며, 머리와 상반신은 사람의 모양이고, 하반신과 날개·발·꼬리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며, 춤을 잘 춘다고 하여 호성조(好聲鳥)·묘음조(妙音鳥)·미음조(美音鳥)·선조(仙鳥) 등의 별명이 있는데, 불화(주로 관음도 등)와·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수막새 기와들과 구리거울에 그려진 것과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연곡사 동부도(국보 53)의 상대석(上臺石)과 연곡사 북부도(국보 54)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③간다르바(乾達婆: Gandhorva)

성대 박물관 남산리사지 3층 석탑 아수라·건달바 모형(서울 종로구 명륜동).
간다르바는 인도 신화에서 천상의 신성한 소마를 지키는 신이자 제석천의 음악을 담당하는 신이었다. 소마는 신령스러운 힘을 지닌 약이므로, 이를 지키는 간다르바는 병을 낳게 하는 의사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허공을 날면서 음악을 즐기고 향을 먹고 살던 간다르바가 부처님의 설법에 감동해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불교로 습합된 내용이다. 이후 간다르바는 천(天), 용(龍), 야차(夜叉), 긴나라, 마후가라, 가루라, 아수라와 함께 팔부신중의 하나가 되었다.  

고대 인도로부터 서역을 거쳐 중국과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점차 투구와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화한 간다르바는 경주 석굴암의 팔부신중 중 하나로 새겨지기도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무장상(武將像)으로 왼손에는 소마의 영약을 담은 물병을 들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인도에서나 경전의 묘사와는 달리 신라시대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흔히 ‘일 없이 빈둥대며 노는 사람’을 빗대어 ‘건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불교를 탄압하고 왜곡하고자 했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4) 경전 속의 음악     

경전에는 불보살을 찬탄하는 음악에서부터 세속음악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 석가모니의 탄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수반되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처님의 잉태와 탄생

부처님의 잉태와 관련한 내용으로는 《수행본기경》 〈보살강신품〉과 《보요경》 〈소현상품〉의 내용 중에서 《수행본기경》 권 상 〈보살강신품〉의 내용을 보면, “마야부인의 꿈에 공중에서 웬 사람이 흰 코끼리를 타고 광명을 천하에 두루 비추며 여러 가지 악기를 울리고 노래하면서,금(琴)을 타고 북(鼓)을 치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라고 적고 있다. 

탄생과 관련해서는 《과거현재인과경》 《태자서응본기경》 《보요경》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보요경》의 〈욕생시32서품〉을 보면, “광명의 빛이 두루하고, 향이 피어오르며 (중략) 많은 천인들이 한꺼번에 백·천이나 되는 기악(伎樂)을 울리며 왕후를 따랐다. (중략) 땅에 내려와서 일곱 걸음을 걸으신 후 범음(梵音)을 드러내고 무상(無常)을 가르쳤다.”

석굴암의 팔부신중(八部神衆)과 간다르바.

②부처님의 성장과 출가

석가모니의 궁중생활에 관한 기록은 《불설덕광태자경》과 《불본행집경》 등에  보인다. 이들 중 《불설덕광태자경》 제14 〈상식납비품 (常籂納妃品)〉에 의하면 “(전략) 너희는 모든 인연을 버리고 밤낮으로 많은 기악을 하여 태자를 즐겁게 하고 태자가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하여라. (중략) 천상의 옥녀(玉女)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태자를 둘러싸고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고 적고 있으며, 출가에 관한 내용으로는 《불본행집경》 제16 〈사궁출가품〉에서 “어떤 채녀는 세요고(細腰鼓)를 목에 걸고 팔짱을 낀 채 자고 있으며, 어떤 채녀는 공후를 목에 걸친 채 자고 있었다. (중략) 이때 태자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더니 궁 안을 둘러보았다. (후략)”

《불본행집경》의 기록 중에 음악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내용은, 태자의 출가를 막기 위한 과정에서 등장했던 음악과 그에 따른 여러 종류의 악기이다. 이때의 음악은 만 명이 넘는 관현악 편성의 연주와 노래, 그리고 무용이 함께 연출된 종합적 성격을 띤다. 이러한 음악들은 태자의 게송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허황된 세속의 음악이었기에 태자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으며,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느끼고 출가하게 되었다.

③부처님의 열반

《대반열반경》 〈수명품(壽命品)〉 〈기감다비품(機感茶毘品)〉 〈교진여품여(憍陳如品餘)〉에 음악과 함께 묘사되는 부처님의 열반에 드시는 모습과 최후의 법문을 설하시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 중 한 부분을 소개하면, “(전략) 아난의 말을 듣고는 다비를 엄숙하게 행하였다. 먼저 보배로 된 가마를 만들어 장엄하고 아름답게 조각한 다음 여래의 몸을 보배 가마에 안치하고, 향을 피우고 꽃을 뿌리고는 여러 가지 기악을 만들어 가송(歌頌)으로 찬탄하였다. 그 음악 속에서는 고(苦)와 공(空),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부정(不淨)의 법을 설하고 있었다. (후략)” 위 내용에서 당시에 연주됐던 음악은 단순히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부처님이 설하신 법문이 모두 음악 속에 포함된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④부처님의 음성

장아함경에는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32상호를 갖추고 있었으며 범음(梵音)으로 맑고 청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불설대승입제불경계지광명장엄경》에는 “여래의 음성은 메아리 같았으며, 중생의 서로 다른 믿음에 따라 갖가지 마음과 즐거움을 알고, 묘한 음성으로 그에 맞게 설법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법원주림》에서는 범성(梵聲)의 다섯 가지를 논하고 있으며, 《범마유경》에는 여래께서 법을 설할 때는 여덟 가지 음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살펴보면, 장아함 권 제1 《대본경(大本經)》에서 “(전략) 32상호 중 스물여덟 번째 호상은 석존의 음성이 맑고 청정한 범음(梵音)이었다. 그 음성에는 다섯 가지의 청정함이 있으니 첫째는 음이 바르고 곧으며, 둘째는 음이 화합하고 우아하며, 셋째는 음이 맑으며, 넷째는 음이 깊고 원만하며, 다섯째는 두루 퍼져 멀리서도 들을 수 있으므로 ‘범음’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범마유경》에서는 “여래께서 법을 설하실 때의 음성에 여덟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가장 좋은 소리, 둘째는 알아듣기 쉬운 소리, 셋째는 부드러운 소리, 넷째는 화합하고 고른 소리, 다섯째는 존귀한 지혜의 소리, 여섯째는 틀림없는 소리, 일곱째는 깊고 묘한 소리, 여덟째는 여성의 소리가 아닌 소리이며 말을 하되 빠뜨리는 것 없이 하고 단점이 없는 소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처님의 음성이 ‘여성의 소리가 아닌 소리’를 강조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특정한 성(性)을 뜻하거나 여성의 맑고 부드러운 소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3. 불교 문화권 각 지역의 음악

초기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동남아의 승가에서는 계율에 따라 수행자의 ‘악가무’를 철저히 금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반인이 수행할 때도 8계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8계 중에 일곱 번째 계율은 “스스로 춤추거나 다른 이를 춤추도록 시켜 즐기지 말 것이며, 스스로 노래하거나 다른 이를 노래하도록 시켜 즐기지 말 것이며, 스스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다른 이를 연주하도록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남방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직설인 팔리어 경전만을 진경으로 삼으므로 대승불교권의 경전을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중국의 증일아함경, 《마하승기율(僧祇律)》 등에도 제7계의 기악을 금하는 내용이 전하고 있어 음악에 대한 기본 맥락은 같다. 그러나 동남아에서도 막상 사찰에서 조석예불과 공양기도를 비롯하여 경전을 암송할 때의 율조가 마치 그레고리안 찬트를 듣는 듯하니 음악을 빼고는 종교 행위를 논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1) 남방 지역 불교음악

초기 불교 승단에서도 대중이 부처님의 말씀을 합송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이 율조가 수반되었다. 그렇듯이 현재 남방불교권에서 전승되고 있는 팔리어 경전의 율조는 석가모니의 어조(語調)에 따라 9가지로 분류된다. 에세이나 이야기 식의 서술형으로 된 ‘숫다’, 《법구경》과 같이 시(詩) 형식으로 된 ‘가타’, ‘숫다’와 ‘가타’체가 혼합되어 있는 ‘계야’, 문답식으로 된 ‘위야가라나’, 감탄조의 ‘우다나’ “이렇게 말하였다”라는 조로 시작하는 ‘이띠 보타까’,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를 풀어가는 ‘자타카’ ‘대단하다’ ‘신기하다’와 같은 투로 표현되는 ‘아부파다마’조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음악적 성격이 가장 두드러지는 체는 《법구경》과 같은 가타체이다.

양곤 승가대학의 저녁예불에서 염송하고 있는 승려들(왼쪽)과 양곤 시내 삼야디 따사원에서 새벽예불을 드리고 있는 동자승들. 촬영 필자(2010).
부처님의 어조에 따라서도 위와 같은 율조가 있는지라 송경 자체에 음악적 요소가 수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남방 지역 수행처의 조석 예불을 들으면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인데, 이는 불법승을 찬탄하는 발원에서 자연스러이 나오는 음악적 현상이지 계율에서 금하는 기악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승려들만으로 이루어지는 예불에는 《보호경》의 11가지 바리타(진언) 중 2, 3개, 메타, 삼귀의를 바치는 것을 보았다. 한국의 강원에 해당하는 승가대학의 예불은 촘촘히 재빠르게 엮어 가므로 율조랄 것도 없어 삭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만들레이 강원도 마찬가지였고, 이웃 나라 태국이나 캄보디아도 비슷하였다. 어쨌든 남방 지역에서 한국에서와 같은 범패승들의 활동은 계율을 어기는 것이므로 승려의 악가무 활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상 남방불교의 대략적인 불교음악을 살펴보면, 대승불교권에 비해서 의식이 매우 간소하듯이 음악적인 요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승가대학과 같은 곳의 예불은 더욱 간단하고 짧은데, 이는 한국의 전통 고찰에서 사물 타주와 더불어 장엄한 예불 송주를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남방불교 승가의 음악에 대한 자세는 대승불교권에 비해서 훨씬 절제되며 엄격한 계율이 적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중국의 불교 음악

중국에서 경전의 한역(漢譯)이 진행될 때 ‘성명학(聲明學)’ 역시 인도 승려들을 통해 중국에 전해져서 실담(悉曇, Siddham)의 자모와 범문 문법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국과 대만의 조석예불인 조모과(朝暮課)에는 한어 경전·게찬(偈讚)과 더불어 범어로 된 주(呪)가 포함된다. 중국의 불교음악은 불경의 산문 부분을 읊는 전독(轉讀)과 불경이나 찬탄의 게송을 노래하는 패찬(唄讚)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찬탄의 시를 노래하는 것에 대하여 ‘패찬’이라 하는 것은 인도에서 법언을 읊으며 노래하던 것을 ‘패’라고 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대승불교를 표방한 중국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홍법(弘法)의 필요에 의해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대승불교에서 의식에 노래와 율조를 도입하여 장엄한 것은 의례가 사람을 무리 짓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을 집단에 소속시키고 그 관계 설정 속의 소속감으로 교법(敎法)의 전달이 배가되었고, 선근공덕(善根功德)을 기뻐하는 의례문을 창송함으로써 체득하는 수희(隨喜)의 기능이 음율로 인하여 그 효용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의례의 장엄은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무제(武帝, 재위 502~549)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그가 치세한 48년간은 정국이 안정되어 남조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자 이것이 불교의례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빈번히 행해지고 있는 우란분법회, 수륙법회, 양황보참(梁皇寶懺: 자비도량참법) 등이 모두 무제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의례의 장엄화가 성해지자 이에 수반되는 음악은 민간음악까지 수용하는 과정에 불교음악의 세속화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송 대에는 사찰 마당이 마을의 연희장이 될 정도였다. 이때 경전을 이야기 조로 노래하는 ‘설창(說唱)’을 비롯하여 ‘부모은중경’  ‘회심곡’과 같은 다양한 불교음악이 생겨났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통 의례와 음악이 단절되자 본토를 떠난 중국 한족(漢族) 불교음악은 대만을 통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즈음은 중국 본토에서 대만의 범패를 배워가는 실정이 되었다. 대만의 불교음악은 크게 의식음악과 공양음악으로 나눈다.

대만 불광산사 수륙법회에서 수인(手印)을 하며 범패를 노래하는 모습. 촬영 필자(2007).
의식음악은 조석예불을 비롯하여 수륙법회에 이르기까지 의식에 수반되는 음악을 말하며 그 외 연주공간이나 민간 합창단에 의해 연행되는 노래나 기악음악은 모두 공양음악으로 분류된다. 대만의 의식음악인 범패는 전통적이면서도 대중이 함께 노래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대중적이다. 일주일간 행하는 장엄한 수륙법회라 할지라도 의례와 기도에 몰입하기 위해 선율악기를 배제하고 목탁·대경과 같은 법기(法器)만으로써 의례를 집전하므로 매우 정제된 의례와 음악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도량 외의 공간에서 연주되는 공양음악은 그 범위가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여 짧은 글로 다 설명할 수 없으므로 논외로 하겠다. 
수륙법회에서여러 가지 법기로 범패를 반주하고 있는 스님들(右). 촬영 필자(2007).

3. 티베트의 불교음악

다마루와 법령.
티베트의 불교의례와 음악은 중국 한족에 비해서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편이다. 송경 중에도 나팔과 자바라와 큰북으로 절주를 장엄하거니와 의례를 집전하는 주법승이 법령(法鈴)과 다마루를 흔들며 의례를 이끌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때는 달라이라마가 법령을 흔들며 의례를 집전하는 모습이 유럽과 미주 등지에서 매우 신비롭고 성스러운 모습으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티베트 의식음악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사자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저음의 송경과 주문(呪文)이다. 이는 심연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와 수행의 발원이기도 하지만 그 저변에는 티베트 민간의 동물숭배 사상과 토속 종교인 뵌교와 관련된 점이 있기도 하다. 

나팔과 법고를 치며 불경을 외고 있는 티베트 샤루스 사원 스님들. 촬영 필자(2008).
뵌교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 의례와 음악은 뭐니뭐니해도 춤으로써 의례를 진행하는 ‘참’이다. 티베트어로 ‘춤추다’라는 의미를 지닌 ‘참’의 기원은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사바가 호법 춤을 추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실제 ‘참’ 의례를 보면, 파드마삼바바를 비롯한 구루들의 춤과 호법신들의 춤뿐 아니라 여러 가지 동물과 신들의 모양을 한 탈춤이 있어 티베트 토속 종교와 민간 사상이 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중국 간쑤성 샤허 라브랑 사원에서 탕가를 걸어놓고 참의식을 행하는 모습 . ② 동물탈을 쓰고 춤추는 승려 ③ 둥첸과 ④ 법고반주로 춤추는 행렬. 촬영 필자(2008).
이들 춤에는 둥첸을 비롯한 여러 가지 관악기와 법고 등이 우렁찬 음향으로 도량을 울려낸다. ‘참’의식의 내용과 진행 절차는 종파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들 의례 중에 수반되는 타악 절주와 범패는 그 어느 나라보다 음량과 음색이 강하고 자극적이며 유니크하다.

아무리 떠들썩한 티베트 불교 의식이고 춤과 노래지만 이는 승려라면 누구나 수행 과정 중에 보편적으로 익히는 것이므로 한국과 같이 전문 직승(職僧)은 없다. 한국의 ‘외채비’들이 악가무로써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불교문화권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근세기 한국 불교의 탄압과 왜곡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교 악가무의 예능화와 대중화 내지 세속화 현실이기도 하다. 

4. 한국의 불교음악

한국의 불교의례와 음악에는 중국의 영향이 지배적이지만 중국불교 유입 이전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유입된 불교문화가 신라의 유물과 기록을 통해서 발견된다. 불교음악의 전개에서 서역 경로에 대해서 중시하는 것은 한국의 불교음악이 무용을 비롯하여 악기 등 중국 한족 불교음악에서 다 밝히지 못하는 부분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는 ‘월전(月顚)’과 ‘산예(狻猊)’라는 유희가 보인다.  이들이 모두 서역에서 유입된 놀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당시 중국을 거치지 않은 서역 불교음악의 유입을 말해 준다. 

이를 증명하듯 《삼국유사》에서 월명사가 “향가만 알지 성범(聲梵)은 못한다”고 했는데, 이는 진감 선사가 당품 범패를 배워 오기 이전의 기록으로 당시에 중국풍이 아닌 불교노래가 신라에 퍼져 있었으니 그것은 곧 인도풍 혹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유입된 불교노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궁중음악에 관한 기록에서도 서역 음악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악학궤범》에 보이는 ‘호악’이라는 설명에서 보면, “서역 음악 중 불교음악과 관련되는 내용으로는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들 수 있다. 이를 잠시 소개해 보면, (전략) 음악은 그 음소로 보아서는 분명히 서역 제국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거기에 여러 가지 불교적 음조나 호어(胡語, 서역언어)까지 혼합되니 난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동서의 문명이 실크로드 지역을 통과하면서 서역문명의 촉진을 가하였고, 불교음악 또한 이 지역 문화가 가미된 이후에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와 더불어 티베트적인 요소까지 한국 불교음악과 의례에 혼재해 있으니 티베트적인 성격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산재는 마당에 괘불을 내어 걸고 의식을 행하는데, 이러한 절차는 티베트의 ‘참’ 의례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둘째, 중국과 대만 불교의례가 매우 절제되고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반면 한국의 영산재와 티베트의 불교의례는 열린 공간에서 구경꾼들까지 합세하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리말 중에 ‘딴따라’라는 말은 고려시대 이전에 유입된 한족(漢族) 불교의식에 비해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요란한 티베트 불교 의식을 이르던 ‘딴뜨리즘’에서 비롯된 말이다. 실제로 티베트의 불교의례를 보면 나팔 불고 북 치는 모습이 ‘딴따라’라는 말을 실감 나게 하며 한국의 ‘야단법석(野壇法席)’인 영산재의 분위기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셋째, 중국과 대만의 대표적인 의례인 수륙법회는 음악만으로 이루어진다면 티베트의 대표적 의례인 ‘참’은 춤이 주가 된다. 이에 비해 한국의 영산재는 춤과 노래가 두루 쓰이고 있어 중국과 티베트의 중간적 입지를 보인다.         

마당에 괘불을 걸어 놓고 참의식을 행하며 법기를 타주하고 있는 북인도 라다크 헤미스곤 파의 승려들. 촬영 필자(2009).
티베트 불교의례와 한국 불교의례의 유사점과 마찬가지로 민간의 복식과 음식·무속의식을 비롯한 풍속에도 티베트와 한국 문화의 친연성은 매우 많다. 이러한 점은 그동안 한국 불교 의례 악가무를 중국의 것에만 관련하여 이해하려고 했던 자세의 변화를 요구하는 대목이다. 특히 티베트의 참 의례에서 악귀를 쫓고 불법을 수호하고자 금강저와 화살촉을 들고 추는 춤은 한국 바라춤의 목적과도 상통한다. 또한 바라춤을 출 때 반주로 불리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밀교에서 비롯된 범사(梵詞)인 점도 마찬가지이다.

고려조를 거치며 티베트적인 색채까지 더한 한국 불교음악은 궁중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성행하였다. 이러한 음악은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궁중음악과 민간의례까지 시연되었으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유생들의 반대로 궁중에서 쫓겨난 불교음악은 민간의 풍류음악이나 무당의 푸닥거리로 전락하였고, 사당패나 걸림패들의 구걸 수단이 되는가 하면, 조선 말기에는 총림의 염불원까지 폐지되자 우리네 문화 속에 불교음악이 고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겉으로만 불교적인 모양새를 숨겼을 뿐 그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한국 전통춤과 노래의 한 꺼풀만 걷어내면 대부분이 불교의 속살을 드러낸다.

5. 맺는 말

인도의 문화를 토양으로 하여 불교가 발생하였듯이 불교음악에도 인도적 요소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염불이나 범패를 잘하는 승려를 일컬어 “가릉빈가와 같다.”고 하거나 불교음악을 서술할 때 등장하는 ‘긴나라’나 ‘간다르바’도 모두 이에 해당한다.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의 인도 브라만교에서는 소리의 학문인 성명(聲明, 사브다비드야)이 사제들의 중요한 임무였을 정도로 경문(經文)의 율조가 중시되었다. 나아가 음성이 곧 우주와 신께 도달하는 매개로서 주술적인 힘까지 발휘하기도 하였다. 불타 입멸 후 힌두문화가 불교로 재유입되면서 힌두적인 의례와 음악적 성격들이 불교음악에 자연히 습합되었다. 오늘날 의례 중에 진언을 노래하거나 게송을 노래하고 이에 맞추어 춤추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도문화의 습합과 무관하지 않다.

초기의 불교 승단은 수행자의 절제된 계행을 중시하였으므로 힌두 사제들이 소리를 중시하는 경문 낭송, 주술적인 제의나 수행자들의 기악(伎樂)을 철저히 금지하였다. 그러나 초기 승단의 계행이 가장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남방 지역에서도 조석 예불이나 송경에는 율조가 수반되므로 불교문화권의 그 어디에도 율조가 활용되지 않는 승가는 없었다.

반면, 중국이나 티베트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에 따라 음악이 포교를 위한 매개로 적극 활용 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볼 때, 남방이건 북방이건 신행 중에 자연히 따라오는 음악적인 요소는 불타가 금한 기악이나 수행자가 하지 말아야 할 음악 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과 불교 정신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 지역의 문화를 수용하며 의식음악과 찬불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온 불교음악은 인류 문화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음악도 여느 지역 못지않게 풍부한 레퍼토리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근대의 일본 식민지배, 근세기의 사찰 분규를 거치면서 전통 불교문화의 탄압과 왜곡을 겪었고, 이후 전쟁과 서구문화에 휩쓸리며 불교의례와 음악의 전승이 고갈되었다.

이러한 여파로 불교의례 악가무가 민간의 문화재 정책에 의하여 보호받는 상황을 맞았다. 이는 불교음악의 전승에 고무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로 불교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하여 승려들이 세속 사람들과 함께 민속 경연대회에 나가서 불교를 전혀 모르는 심사위원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하는 과정에서 종교음악의 순수성과 위격이 상실되는가 하면 승단의 분열을 초래하는 부작용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한편, 그간 승가에서는 암묵 중에 음악을 부정적으로 여기던 관행이 있어 왔다. 이러한 자세는 근세기 잘못된 역사의 전개에서 비롯된 편견이나 선입견이지 대승불교 본연의 자세는 아니다. 부처님은 향락적인 음악을 금한 것이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금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문화의 시대를 맞아 불교음악에 대한 그 어떤 압박이나 왜곡이 없는 활로의 시대를 맞았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승려의 지나친 세속적 악가무 활동과 영리적 행위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께서 법령과 다마루를 흔들며 불음을 선보였을 때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였지만 그것은 달라이 라마의 수행자로서 덕목이 불음을 통해 드러난 때문이지 그분의 방울 소리나 미성에 감동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불교음악 속에 어떻게 불교적 감화의 내용을 담을 것인지, 계행과 수행자의 기악 행위는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허용될 것인지, 어떠한 음악이 불교음악으로써 아름다움과 덕목이 갖추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봐야 할 때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음악의 근본적인 의미를 비롯하여 우리 조상은 어떻게 불교 음악을 해 왔는지,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수평과 수직으로 두루 관심을 갖고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문화를 초월한 더 높고 숭고한 성음으로 불법의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세상의 혼탁함을 씻어내고, 생활에 쫓기고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는 불교음악이 되기를 바란다. ■

 

윤소희 / 부산대학교, 동국대학교 예술문화대학원 강사. 부산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작곡으로 석사학위, 한양대학교 음악인류학 박사학위 취득. 《한·중 불교음악 연구》 《신라의 소리 영남범패》 외 다수를 저술하였다. 논문으로 〈불교음악의 기원과 전개〉 〈티벳 탐무를 통해 본 처용무와 영산재〉 〈팔리어 경전 독송과 찬팅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창작 활동으로 음반 〈소리향〉을 출반하였으며 현재 주간지 〈뉴시스 아이즈〉를 통하여 〈윤소희의 음악과 여행〉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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