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속의 예술, 예술속의 불교

1. 머리말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지 1,700여 년이 넘었다. 불교는 경전에 부처님 말씀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를 전달하는 그릇으로 문학과 예술을 택하였고, 문학은 불교를 받아들여 깊이를 더하고 빛깔을 다채롭게 하였다.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문학과 예술로 형상화하면서 한국 문학과 예술은 내용에서는 형이상학적 심오함의 세계로 다가가고 형식에서는 불교의 형상화 방식을 수용하여 다양한 은유와 환유 스타일을 구사하게 되었으며, 미적 체험과 감상의 장에서는 성스런 세계와 궁극적 진리를 향하여 본격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향가, 고려조와 조선조에 이어 현대로 계승된 선시, 불교가사, 불교설화와 불교소설은 텍스트 거의 전체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창작된 장르였다.

또한 탈춤, 민요, 속요, 시조, 현대시와 현대소설의 일부 텍스트에도 불교사상이 영향을 주었다. 특히, 현대성을 성찰하는 대안의 사유로 불교철학이 부상하면서 불교 사상을 반영한 생태시와 차이의 패러다임에 따른 소설이 부활하고 있다. 그럼, 한국 현대문학 속에서 불교는 어떻게 스며들어 어떤 문학을 낳았고, 이는 21세기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드러내는가.

2. 진리에 이르는 장대로서 문학

말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여도, 부처님의 마음도 아니다. 그러기에 선(禪)은 불입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한다. 하지만, 인간이 진리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방법은 또, 말을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찾은 논리가 말을 방편으로 이용하되 말을 떠나 진리를 본다는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 뗏목과 언덕 너머(《금강경》), 통발과 물고기(《장자》), 손가락과 달(《원각경》), 사다리와 지붕(비트겐슈타인)의 비유가 모두 이를 나타내지만, 가장 적절한 비유는 장대와 하늘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높이 뛰어도 하늘에 오를 수 없다. 그렇다고 높이 뛰는 일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장대를 들고 뛰면 하늘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대신 장대를 놓아야만 그 반동으로 높이 오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불교시를 공안처럼 방편으로 삼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새기고 이를 새기고 새기다가 의미들이 감추고 있는 진리에 다다르게 된다.

빛을 滿載한 달이 텅 빈 산으로 들어간다
산이 환해지고
달은 텅 빈다
明山 空月
바라볼 수 없다
내 마음이 너무너무 난동을 부린다

물 먹은 달
지나가면서 연잎을 건드려 논다
波瀾萬丈
구름 누에가 만월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삽시간에 내가 없어져 버린다

無明, 無明
속물이 되자
― 황지우 〈노숙〉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135쪽

빛으로 가득한 보름달이 두리둥실 능선 위로 떠오른다. 사람 없이 텅 빈 산은 빛으로 가득하다. 공산명월(空山明月). 산이 없으면 달이 없고, 달이 없으면 산이 없다. 산이 있어 달이 있고 달이 있어 산이 있다. 달은 모든 빛을 산에 내준다. 산은 환해지고 달은 텅 빈다. 명산공월(明山空月). 이 부분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전하는 도천(道川) 야부(冶父) 스님의 〈금강경송(金剛經頌)〉의 패러디다.

천길 되는 낚싯줄을 곧게 바로 드리우니/ 한물결이 일어나매 만물결이 따르도다/ 적막한밤 물은 차서 고기 물지 아니하니/ 한배 가득 텅빈 채로 달빛 싣고 돌아오네

이 시에서 ‘어부’의 핵심 의미는 ‘상즉상입(相卽相入)과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낚시에 몰두한 어부는 내가 어부인지 물고기인지 그 경계를 넘어선다. 바다와 하늘, 물과 땅, 나와 물고기의 경계를 넘어설 때 낚시는 도(道)의 경지에 이른다. 이 상태가 바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니 어부는 화엄 중에서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요, 모든 차별을 하나로 아우른 원융(圓融)의 경지이다. 강가에서 고요히 낚시를 하고 있는 어부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간이자 대상과 합일을 이룬 주체이다. 사람이 상즉상입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그 순간 그는 부처이다. ‘어부’가 ‘부처’라면, ‘물고기’는 바다에 널려 있으며 포획을 기다리는 것이니 ‘중생(衆生)’의 의미가 있다. 물고기가 중생이라면 중생이 부처에 낚임은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해탈을 이룸이다. 낚시는 자비행(慈悲行)이며, 배는 자비행을 이루는 방편(方便)이다. 바다는 중생이 있는 속계(俗界)이며, 달빛이 있는 바다 밖은 이를 초월한 세상이다.

왜 물고기는 낚시를 물지 않았을까?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심(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가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니, 중생은 부처의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배와 달빛은 서로가 서로를 헤살 놓지 않고 동시에 비추고 동시에 서로에 침투하여 서로를 이룬다. 인식하고 추구하려는 대상은 공이지만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萬法歸一], 달빛을 가득 실은 배는 결국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른다. 달빛을 가득 담은 산 또한 이와 같은 경지를 뜻한다. 그러니 아직 깨닫지 못한 내가 바라볼 수 없다. 내 마음은 아직 평정심에 이르지 못하였다.

연못에 비춘 달은 물과 상즉상입을 이룬다. 물은 달에 스며들어 달은 물기로 젖게 하고, 달빛은 물에 들어 물을 환한 궁전으로 만든다. 연못에 잠긴 달은 연잎을 스치기도 하고, 연꽃을 비추기도 하면서 논다. 그때 바람이 불어 달빛을 담은 물결이 끝없이 출렁인다. 파란만장(波瀾萬丈). 연못을 보고 있는 나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돌이킨다. 다시 달을 바라보니 구름이 누에가 뽕잎을 먹듯 달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달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리고 그를 바라보는 나도 사라져 버린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 달빛으로 가득한 보름달, 구름 하나 없이 청정한 하늘, 무명을 완전히 벗어던진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런데 저 산도 달빛을 받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건만 나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 청정한 하늘에 먼지가 끼면 더러워 보이듯 무명 때문이다. 무명, 무명, 무명, 속물이다.

이 시는 보름달이 산과 연못에 비추는 자연의 현상에 빗대어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고, 그를 자아에 투사하여 그러지 못하는 자아의 성찰을 잘 그려내었다. 우리는 향가, 선시, 게송을 통해 경전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의식과 언어에 의해서도, 의미들이 만드는 조합에 의해서도 가능하지만, 좋은 시일수록 감성과 이미지에 의해 의식과 언어로 포용할 수 없는 부처님의 마음을 전한다. 이처럼 문학은 진여 실제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장대 구실을 한다.

3. 거울과 등불로서 불교문학

흔히 문학을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나 타락한 세상에서 진정한 가치를 밝히는 등불로 비유한다.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그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좋은 문학일수록 당대 있는 현실을 비추면서 자연스레 그 모순을 담고, 나아가 그 모순이 지양된 세계를 꿈꾸기에 거울의 문학은 등불의 문학으로 이어진다.

보증금 삼십만 원에
달삯 오만 원짜리 삭월세 방에서
나는 생각한다 분신을 하느냐
현장에 들어가 노조를 만드느냐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짓느냐
어느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오늘도 턱을 괴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날이면 날마다 빈 내장에
찬 소주를 붓는 젊은 고뇌가 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창과 방패들
코오류우지에 안치된 목조 미륵불상이나
중앙박물관에 걸터앉은 금동미륵불상이 아니라
거짓과 불의에 던져지는 짱돌과 꽃병이
핏줄을 따라 뜨겁게 타오르듯
온몸에 피가 도는 미륵이 있다
노동의 몫이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고
참교육의 뜻이 물구나무 세워지는 이 시대의 무게를
검지손가락으로 떠받치는 미륵이 있다
―고영섭 〈생각하는 미륵〉 《몸이라는 화두》 103쪽

여기서 현실은 둘이다. 국가 차원의 현실은 “노동의 몫이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고/ 참교육의 뜻이 물구나무 세워지는 이 시대”다. 개인이 처한 현실은 “보증금 삼십만 원에/ 달삯 오만 원짜리 삭월세 방에서” 모순된 한국 사회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할 것인지 번민하는 자아다. 자아가 마주친 세계는 몹시 부조리하다.

노동의 몫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와 갈등이 첨예하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이식되면서 노동자는 모순의 극단에 처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며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노동한다. 자본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아니라 더 많은 이익을 위하여 정리해고하고, 해고된 노동자는 헐값에 재취업하거나 극단의 생존위기에 놓인다. 이를 항의하면 자본과 야합한 국가의 폭력이 무자비하게 가해지고, 사법부는 몇천 원도 아쉬운 노동자에게 수억 원의 손배소를 청구하여 노동운동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한다.

교육은 인격의 도야, 창의적인 사고와 상상력 제고, 도덕적인 품성과 비판적인 인식의 육성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과 국가에 먹이를 물어다 주는 ‘사냥개훈련소’로 변하였고, 승자독식의 논리를 주입하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의 장으로 전락하였다.

이 상황에서 그도 또한 오만 원짜리 사글셋방에서 생을 이어가는 가난한, 하지만 의식을 가진 시적 자아가 부조리한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세 가지다. 분신과 같은 극단적 저항을 하는 것,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조를 결성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등 장기적 투쟁을 하는 것, 아니면 세상과 등지고 은거를 하는 것이다.

번민으로 끝났다면, 이 시는 그렇고 그런 시 축에 속하였을 것이다. 그리 번민하는 자아를 미륵에 투사한다. 주지하듯, 미륵보살은 현재불인 석가에 이어서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의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되는 때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龍華三會]으로 272억 명의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이다. 상층민은 공덕을 닦아 도솔천에 가서 미륵불의 설법을 듣고 왕생한다는 미륵상생 신앙을, 하층민은 미래의 미륵이 나타나 이 세계를 개벽하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 신앙을 믿었다. 화랑과 궁예는 미륵의 화신이라 여겼으며, 조선조에서도 1688년(숙종 14년)에 여환(呂還)은 무장한 농민, 천민, 노비들을 모아 흉년의 굶주림과 신분적 질곡에서 해방되고 양반이 중심인 세상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미륵혁명을 꾀하였다.

이렇듯 이 시는 한국 사회의 모순된 현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인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열려는 꿈을 꾼다. 한국 현실에 고통하고 저항하려는 자아가 곧 미륵의 화신이다. 그 미륵불은 “거짓과 불의에 던져지는 짱돌과 꽃병이/ 핏줄을 따라 뜨겁게 타오르듯/ 온몸에 피가 도는 미륵”이다. 미래를 꿈꾸면서도 현실의 구체성을 담보한다. 이 시는 현실을 반영하여 구체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이를 굴절시켜 용화세계의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문학은 거울처럼 현실을 반영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 그에 담긴 모순과 그 맥락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실상을 드러내며, 이에서 그치지 않고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어두운 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길, 진정 부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할 길을 알린다.    

4. 깨어진 망치로서 불교문학

문학은 우리가 당연시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던 것을 해체하거나 전복을 가하는 것이다. 선이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며 깨달음조차 해체하듯, 쉼 없이 반역을 하고 전복을 가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그러기에 문학은 사물의 숨겨진 세계를 드러낸다. 부서지고서야 자신의 ‘망치다움’을 드러내는 ‘깨어진 망치’처럼, 문학은 낡은 사물의 세계를 해체하고 숨겨진 세계의 세계다움을 드러낸다.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맘 다 비우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조오현 〈허수아비〉 《아득한 성자》 17쪽

오현 스님은 ‘하루살이’를 ‘아득한 성자’로 노래하여 주목을 받았다. ‘하루살이’와 ‘성자’ 사이의 불협화음을 연결하는 유사성은 “하루살이가 하루 동안에 해가 뜨고 지는 자연 운행의 시작과 끝을 지켜보면서 그 이상 볼 것이 없다며 안분지족의 풍요함 속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용맹정진하는 선사처럼 하루 동안에 탄생하고 성장하고 사랑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등 일 분, 일 초에 모든 것을 다하여 압축적으로 하루를 산다.”라는 점이다.

여기서도 허수아비의 모습은 통이 큰 달관의 수행자의 모습이다. 허수아비는 하찮은 생명체에게 관심을 가지고 손을 흔들어주는 표현을 하고, 자신을 부리는 사람에게도 이를 행한다. 그는 농부가 짓는 논의 벼를 지키는 일을 하면서 노동의 고통을 토로하지 않은 채 늘 미소를 짓고 있다. 논두렁, 혹은 현실을 밟고 서서 풍년이 들든 흉년이 들든 아무런 상관이 없이, 둘을 경계를 지어 구분하지 않고서 웃는다. 그런 현실을 바라보며 내 것과 남의 것을 가리지 않는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늘 평안하게 웃는다. 무등(無等)의 경지다. 이런 허수아비를 두고 사람들은 “쓸모가 없거나 실권 없는 사람의 비유”나 “남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허수아비야말로 성냄과 욕심과 어리석음을 모두 버리고서 하늘과 삼계의 모든 것을 한데 끌어안은 자이니, 깨달은 자요, 부처다.  

리쾨르는 은유가 ‘의미론적 불협화음의 해결(the resolution of sem-antic dissonance)’에 바탕을 둔다고 본다. 의미들 사이에 언뜻 보이는 부조화와 긴장을 넘어서 새로운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은유를 새로운 의미창조의 언어적 단위나 매체로 보는 궁극적 이유이다. 리쾨르의 지적처럼 양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 불협화음이 클수록 세계는 숨겨진 세계다움을 드러낸다. 이처럼 불교문학은 의미론적 불협화음을 통해 세계의 숨겨진 진리를 드러낸다. 나병춘은  ‘호박’을 ‘동자승’으로 노래했다. “폭염의 고통 속에서 수행 정진하여 자신의 내면을 익혀 결국 타인에게 보시하는 호박”의 속성이 동자승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한 티끌 속에서 화엄을 보듯, 사물의 숨겨진 속성을 꿰뚫어 보고 이를 유사성의 유추인 메타포(metaphor)를 통해 드러낼 때, 우리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세계의 진리와 마주치게 된다.

 5. 대안의 비전으로서 불교문학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촌의 극단의 위기 속에 있다.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고, 환경파괴는 인류문명의 종말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이 상황에서 불교는 대안의 패러다임이나 세계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담고 있으며, 이런 것을 담은 불교문학도 서서히 출간되고 있다. 그 중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박범신의 《나마스테》를 보자.

“우리 과장님은 물어봐요. 어제도 물어보고 오늘도 물어봐요. 네팔에도 해가 뜨냐. 니네 나라에도 달이 뜨냐, 니네 나라 여자들도 애를 낳냐. 나, 그럼 돌아요.”
“과장 얘긴 거기서 왜 나와?”
“한국 사람이니까요. 다들 ……치, 치사해요.”
사비나는 휭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낫고,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가슴 어디쯤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켓을 운영할 때, 어느 날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들어와 자조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야, 한국에 꽃 피고 새가 우냐.”
어떤 흑인이 가게에 들렀다가 너희 나라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우느냐, 묻더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당황하여 가만히 있자 너희 나라 사람도 사랑하고 연애하느냐, 덧붙여 물었던가 보다.
―박범신 《나마스테》 56-57쪽 

전형적인 인력 수출국이었던 나라가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달성하여 인력 수입국으로 전환하였다. 한국인은 이제 굳이 3D 업종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만큼 잘살게 되었다. 인력난의 위기에 봉착한 한국의 자본가들은 비싼 임금을 지불하고 한국인을 고용하느니 말이 통하지 않고 기술력이 모자라도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는 것이 더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이는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저임금과 노동 강도가 심한 중소 제조업체에서 시작하여 건설현장에 외국 인력이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식당, 농장, 어장, 유흥업소, 원양어선의 선원에 이르기까지 노동환경이 좋지 않고 임금이 낮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여지없이 외국인이 들어와 한국인 대신 일을 하고 있다.

2011년 6월 30일 현재 취업을 위해 입국한 외국인은 등록 노동자가 540,737명, 미등록 노동자가 51,775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중에는 중국 출신이 53.1%로 가장 많고, 베트남(11%), 필리핀(5.3%), 인도네시아(4.7%), 태국(4.2%), 우즈베키스탄(3.5%), 스리랑카(3.2%)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네팔 노동자도 10, 038명에 달한다. 이들 중 주로 저발전국 사람들, 특히 동남아시아인에 대해 한국인은 차별적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우리가 혐오하는 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우리가 요구하는 임금보다 턱없이 싼 가격으로 대신 수행하고 있으나 이들에 대한 노동 착취와 억압, 소외는 아직 노동에 대한 인식이나 주체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이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이 작품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어느 날 주인공인 수연의 집으로 네팔의 이주노동자인 카밀과 사비나가 찾아온다. 카밀은 부유한 가정에 속하여 한국에 올 이유가 없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러 한국에 온 첫사랑 사비나를 찾아 한국에 온 것이다. 사비나는 오자마자 업주에게 강간당하고 여러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고초를 겪는다. 카밀은 손가락을 프레스기에 잃어버리고 임금체불 문제로 한국인과 다투다 폭행 후 도주하다 사비나와 함께 수연의 집으로 숨어든 것이다. 둘의 딱한 사정을 들은 수연은 그들에게 방을 내어준다. 위의 대화는 사비나와 수연의 대화 가운데 한 대목이다.

우리의 등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보인다. 여기서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과 배제, 폭력은 한국인이 백인과 미국인에게 당하였던 경험과 기억을 통해 성찰된다. 주인공인인 수연은 작은 옷가게를 하고 있는 서른 살 한국인 여성으로 미국 이민 시절인 92년 4월 29일에 있었던 흑인폭동으로 아버지와 막내 오빠가 죽는 참사를 겪었다. 작가는 둘을 병렬시켜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다. 카밀과 결혼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오빠에게 수연은 “우리나라에 와 있는 네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엘에이에 있을 때의 우리 신세와 같잖아. 상처는 오빠와 내가 같지만, 그걸 대하는 관점은 오빠와 내가 너무 다른 것 같아 하는 말이야. 좀 더 너른 각도로 생각해봐!”라고 외친다. 수연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타인을 통하여 나를 보고 내 안에서 타인을 본다. 나와 너, 내 안의 타인과 타인 속의 내가 대화할 때 양자의 갈등은 사라지고, 주체는 동일성을 넘어 진정한 차이 그 자체, 타자성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타인에게서 부처를 본다.

포허르 깨따.
네팔말로 더러운 놈이란 뜻이에요. 사비나가 그날 옥상에서 세 번이나 그 말을 했거든요. 사장 아들인 내게, 여자들에겐 무서운 건달로 소문난 내게 그렇게 겁도 없이. 포허르 깨따, 포허르 깨따, 포허르 깨따라고, 소리치며 덤벼들 여자가 공장에 있으리란 상상도 못했지요.
……(중략)…… 포허르깨따.
나는 충격을 받았지요. 후려칠 수도 없고 올린 손을 내릴 수도 없었어요. 마치 이상하고 이상한 불구자처럼요. 나의 카르마가 사비나의 카르마로 엮여 들어가는 순간이었던 셈이지요. 지금 생각하면요. 아니 그 순간은 단순히 사비나의 카르마와 나의 카르마, 서로 얽여 들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바르도란 게 있어요.
티베트말로 바르(bar)는 사이, 틈, 그 뜻이구요, 도(do)는 매달린, 뭐 그런 말인데요, 합해서 위험한 어떤 틈, 과도기. 아시지요, 누나, 과도기. 티베트에선 죽음이 끝이 아니라 세 시작의 전 단계예요. 일상의 바르도가 있고, 죽음의 바르도가 있고, 새로 태어나는 바르도가 있어요. 어떤 것이 완성되면 어떤 것은 시작돼요. 어떤 것이 죽으면 또 어떤 것은 새로 태어나요. 모든 것은 카르마에 따라 반복돼요.
―박범신 《나마스테》 78-79쪽
 
카밀이 사비나와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장면도 극적이다. 사장 아들로 망나니, 건달이었던 카밀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의 타루 족의 예쁜 여성 노동자를 강간하려는 순간에 사비니가 나타나서 더러운 놈이라 외치며 자신을 가져보라고 대든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비나를 때리려던 카밀은 그 찰나에 업이 얽혀드는 것을 느낀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마음으로[意業], 말로[口業], 몸으로[身業] 짓는 것에 따라 인(因)으로서 세력을 가지고 오온에 작용하여 어떤 결과를 낳는 과정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 바로 삶이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衆生]는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다. 시간이 업과 얽히면서 업은 시간에 따른 존재의 변이가 정의롭게 일어나도록 통제하는 원리가 된다. 짧고 직선적인 시간관만으로 보면, 착한 자가 고통을 받고 선한 일을 하면 손해 보는 부조리로 만연한 곳이 이 세상이다. 그러나 길고 둥그런 시간관으로 보면, 선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전생의 죄업을 씻는 과정이다. 곧 선한 자가 고통을 받는 것은 전생에서 죄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 원인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며, 지금의 고통은 고통이라기보다 선업을 쌓는 과정이요, 다시 이 선업이 원인이 되어 나의 후생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이 업의 얽혀듦에 따라 적대자였던 카밀과 사비나가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업에 따라 반복되는데, 악업을 쌓다가 선업을 쌓게 되는 전환되는 틈이 바로 바르도다. 바르도에 따라 악한 일만 하던 이가 무엇인가 깨닫고 선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사람들은 업에 따라 살고 사랑하고 죽는다. 얼핏 보면 업은 숙명인 듯하지만, 바르도가 있어 전혀 다른 인간과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는 모귀(MÖGÜ) 때문이다. 모귀는 갈망과 염원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끈질기게, 상주불멸의 본성과 같은 카일라스를 품는 일이다.

타인, 혹은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고 섬기면 새로운 바르도를 통해 새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을 잇는 근본 사상이자 논리다. 인물들은 업을 짓고 업에 따라 반복되는 삶을 살다가 바르도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된다.

나팔꽃이 연이어 도미노로 피어나고 있었다.
어떤 나팔꽃이 아버지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나팔꽃은 어머니, 덴징 아저씨, 구릉 아저씨, 사비나 쟈마 같기도 했다. 나는 게으른 부처같이 실눈을 뜨고 꿈 속에서 그것을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연약한 나팔꽃 줄기가 어떻게 그런 힘이 깃들여 있는지, 나팔꽃은 삽시간에 무화과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더니, 더욱 쑥쑥 커가면서 황량한 고원의 등성이를 넘고, 툭체 봉과 닐기리 봉을 넘고, 해발 8000미터 만년 빙하로 뒤덮힌 히말라야 준령을 넘어, 마침내 얼음의 왕관과 같은, 지구 중심 카일라스 정수리로 뻗어가는 것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내 볼을 적시고 흐르는 걸 나는 느꼈다. ……(중략)…… 나는 얼른 눈뚜껑을 닫았다. 세상이 화안해요……라는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치지 말아요, 아빠.”
나는 그제서야 짐짓 소리쳐 말했다.

카밀은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던 경찰을 피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다가 불구가 되고, 수연과 카밀 사이에서 애린이 태어난다. 그 후 정부의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이 전개되고, 이주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이 수연과 카밀을 괴롭힌다. 카밀은 집을 나와 명동 성당에서 이주 노동자 인권 투쟁 농성을 시작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자살이 멈추지 않자 카밀은 어느 날 고층 빌딩에서 몸에 불을 붙인 후 ‘더 이상 죽이지 마라’를 외치고 뛰어내린다. 수연은 추락하는 카밀을 받아내려다 함께 불에 휩싸이고 두개골이 함몰되어 식물인간이 되어버린다. 카밀은 즉사하고 수연은 수년 후에 생을 마감한다. 한참 후에 한국인도, 네팔인도, 미국인도 아닌 무적자 신세로 미국에 살던 애린이 네팔로 찾아가 사비나를 만난다. 애린은 사비나와 카밀의 아들, 카밀(동명)을 만나고 사비나로부터 수연과 카밀의 이야기를 듣는다. 애린은 카밀과 함께 어머니 수연과 아버지 카밀이 가고자 했던 히말라야의 카일라스에 간다. 거기서 그는 세상인 화안해요라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다. 산벚꽃 환한 그늘이 세상이 중심이던 날, 아버지 카밀이 어머니 수연에게 다가와 맨 처음 했던 말이 “세상이 화안……해요.……”였다.

20세기는 인류의 교양과 이성이 가장 심화하고 증대된 사회임에도 전쟁과 학살의 시대였다. 이데올로기나 종족 사이의 갈등, 자원과 자본을 둘러싼 탐욕, 국가간 이해관계도 작용했지만, 그 근저에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이 자리한다.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뉘고, 동일성은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미며, 타자로 간주한 것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특정 집단이 유색인, 제3세계, 다른 민족이나 종족, 광인, 장애인, 다른 이념을 가진 자, 소수자 등 동일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것을 타자로 간주하고 이를 자신과 구분시키고 배척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과정에서 전쟁과 학살이 벌어졌다.

우리 또한 일본의 타자로서 학살당하고, 미국의 타자로서 차별을 받았으면서 이주노동자를 타자로 간주하고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였다. 이에 서양의 철학자들은 21세기에는 나와 타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끝내고 서로 공존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나와 타자 사이를 우열과 다름이 아니라 차이(difference)로 바라보고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타자성(alterity)의 윤리를 확립하자는 철학을 대안의 사유로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위 소설엔 불교의 연기적 타자관이 잘 스며들어 있다. 이 소설의 인물과 사건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조건이 되고 상호작용을 하며 서로 인과관계를 맺으며 일어난다. 연기론을 깨달으면 세 가지가 가능하다. 하나는 존재와 타자를 설정하는 자체가 망상임을 깨닫고 실상(實相)을 직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원인과 결과로 맺어지고, 서로 조건이 되고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아(我)란 없으며 공(空)임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오온(五蘊)의 가합태(假合態)에 불과한 것인데 나를 내세우고 동일성을 강화하면서 타자를 해치는 것은 나를 자성(自性)을 가진 존재로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이제껏 타자로 간주하던 다른 생명이 나와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서로 조건이 되는 또 다른 나라는 실상을 깨닫고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행이 생긴다.

내 호흡에 영향을 받아 대기의 미생물이 달라지고 그리 변한 대기가 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인과관계는 상호역동성을 갖는다. 대상은 나의 인식과 판단에 상호작용을 하기에 사유는 나와 대상 ‘사이에서’ 형성된다. 내 영향을 받은 타자는 나에게 다시 영향을 미치기에 주체는 본질적으로 ‘상호주체(inter-being)’다. 찰나의 순간에도 내 얼굴의 세포가 바뀌고 앞뒤의 얼굴이 다른 것처럼,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 몸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몸과 몸 둘레의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나의 정신도 변한다. 무상하기에 이것과 저것 사이에 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를 인식하고 고정성에 집착하지 않을 때 동일성은 사라지며 타자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타자의 의식, 말, 행동과 몸짓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를 형성하는 것에서 보듯, 내 안에 타자는 이미 들어와 있고 그 역도 언제나 진행 중이다. 우리가 주체라고 내세우는 것도 실은 아버지를 비롯한 타자들을 내 안에 끌어들여 형성한 것이다. 지금도 내 안에 타자가 스며들고 있고 타자 안에 내가 스며들고 있는데, 나와 타자를 구분한다는 자체가 분별심에서 빚어진 망상이다. 우리는 모두 ‘상호 생성자(inter-becoming)’다.

6. 불교와 문학의 스며듦과 넘나듦

말이 진리를 왜곡하지만 진리에 다다르는 방편이 될 수 있으니,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불법의 진리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사상성이 뛰어난 불교 문학작품도 불법의 진리를 알린다. 하지만, 〈제망매가〉처럼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일수록 불법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왜냐하면, 불법의 진리는 논리와 이성을 떠나 있는 것이기에, 문학적 상상력과 감성이 풍부한 작품일수록 감성과 이미지를 통하여 논리 너머의 진리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시는 상투성에 대한 반역이다. 길섶에 홀로 핀 들국화를 외롭다고 노래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그러나 누가 들국화를 ‘화엄’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한 송이 들국화 속에서 중중무진의 세계를 보기도 하고, 꽃술 안에 우주 삼라만상을 담고 있음을 새삼 인식하기도 하고, 한 송이 꽃이 지나는 구름, 뿌리에 깃들여 사는 미생물에서 지구 반대편의 미물에 이르기까지 온 누리의 온 것들과 깊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무서리가 내린 뒤에 다른 꽃들은 모두 시들었는데 홀로 아름답게 핀 국화를 보고 ‘지절(志節)이나 선비의 표상’으로 노래한 시조에 비하여 ‘실존’으로 표현한 미당의 ‘국화’가 낯설게 하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가 국민의 시가 된 후에는 이 표상 또한 상투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때문에 문학은 끊임없는 창신(創新)과 낯설게 하기를 요구한다.

불교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주장할 정도로 깨달음조차 집착이라며 끝없는 낯설게 하기를 요구한다. 나가르주나의 중관론(中觀論)은 ‘삿됨을 깨뜨리는 것이 곧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破邪卽顯正]’이라 희론적멸(戱論寂滅)의 파사를 통하여 진리에 이르고자 한다. 올바르지 못한 모든 생각이 모두 삿된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사집(邪執)을 버려야 한다.

필자가 〈시(詩)와 선(禪), 비단꽃과 옥도를 주고 받다〉에서 “비단꽃(詩)의 아름다움에 홀려 선을 맛보았네. 온 세포들의 떨림, 떨림 뒤의 텅 빔. 옥도(禪)의 예리한 칼날로 시를 자르고 잘랐네. 언어의 비수, 피를 흘린 뒤의 황홀감.”이라 했던 것처럼, 문학은 비유, 형식, 이미지란 비단꽃을 통해 불교를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대중을 진여실제로 이끌 수 있다. 불교, 특히 선은 생략의 미학, 연기적 사유와 생태론적 패러다임, 중중무진의 참이란 옥도를 통해 문학을 다듬을 수 있다.

그럼 덧붙여서, 21세기 한국의 불교문학이 갈 길은 무엇인가. 우선 어설프게 불교를 이해하여 용어나 무늬만 불교인 문학들은 차치하고 이야기하자. 불교문학에도 세 길이 있다.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이들은 오늘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세계의 부조리는 무엇인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비판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데 서양의 사상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불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며 수용하자.

모더니즘적 지향을 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서양의) 현대문학이 이루어 온 현대적이고 탈현대적인 실험과 성과를 충분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불교의 사상과 미학, 형상화방식, 혹은 기존의 한국 불교문학의 전통을 응용하여 ‘새로운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길에 대하여 고뇌하자. 이것도 아니면, 양자를 종합하자. 그럴 때 한국 불교문학이 21세기에도 현재성을 가지는 동시에 서양의 대안의 문학으로서도 세계성을 담지할 수 있으리라. ■

 

이도흠 /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등 역임.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외래강사, 조계종 포교원 통일법요집편찬 연구위원, 민주화를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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